학교 앞에서 분식집 하는 엄마 돕는 딸(홧김에 회사 때려치우고 내려온 상태) 그 분식집에서 뭐 훔치다 걸린 아이가 적반하장으로 여주 보고 뭐 아줌마!! 이런다. 여기서 지지 않는 여주.

- 너 부모님 데려와

시전하면

- 너 진짜 왜 그래 김주하

개빡친 김도영 등장에 김여주도 더불어 공손해짐...

처음 다시 고향으로 왔을 때 환영보단 핀잔과 등짝 스매싱이 반기고 있었을 듯.

- 너 내가 거기 어떻게 보냈는데, 아이고!! 내가 못 살아 진짜.

- 잘 살아 있네… 쩝…

- 말대꾸가 나와?

어쩌다 보니 꽤 먼 타 지역인 서울로 대학교 합격하고 취준 생활도 거기서 하고, 이제 막 부모님께 손 벌렸던 거 취업해서 다 갚아갈 시점에

- 나 퇴사했어. 집도 정리했어, 엄마.

하고 태연히 어제도 왔던 것처럼 들어오는 딸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겠지. 그래서 왜 그랬냐고 하면 입을 꾹 다무는데 속만 상할 것 같음. 바퀴벌레 질문(엄마 나 바퀴벌레로 변하면 어떡할 거야?) 이때 하면 걍 밟아 죽인다 할 듯… ㄷ

딱히 별 이유가 있어야 하나? 12년 동안 초중고 생활하고 대학교 타지에서 보내고 취준부터 취업까지 한 번도 쉴 겨를이 없었어서 다 그렇게 산다지만 그게 힘들었어서 그냥 나왔는데. 거기에 거창한 이유가 있어야 하나. 엄마한테 말하면 더 혼날 것 같아서 여기 지내는 동안 일이라도 돕겠다고 함. 나 나름 그래도 자취 8년 차야 아앙 ㅋㅋ~? 자신만만하게 이래 놓고 초등학교 끝날 시간쯤에 애들 몰아치니까,

- 어… 떡볶이? 떡꼬치? 둘 다? 순대도? 많이 먹네…? 생각보다?

- 아니거든요!! 엄마가 사오랬거든요!

- 아무튼 좀 기다려 주시겠어요? 손님이 밀려갖고…

8살부터 많게는 13살까지 티키타카 잘 되는 이 여자 아주 혼이 쏙 빠짐.

- 엄마, 엄마… 살려 줘.

- 빨리 애들 튀김이나 잘라 줘.

- 가위 갖다 주고 걍 하라 하면 안 되겠지?

- 야!!

- 아, 알았어.

어린이 손님들 덕에 우리나라 경제가 잘 돌아가요 ^^~ 이러면서 정신 없이 일하다가 분명 아까 자기가 먹으려고 탐내던 충무김밥이 개수가 좀 달라진 것 같은 거임. 분명 계산도 개수도 다 자기가 확인하고 있는데. 내 눈이 틀렸을 리 없는데… 저거 남으라고 염불 외면서 안 남으면 엄마한테 다시 싸달라고 할랬는데… 하고 어떤 꼬마랑 딱 눈이 마주쳤는데…

- 어?

- 아 씨…

주춤주춤 흙 묻은 양손에 두 개 집고 나가는 걔랑 눈이 마주친 거임. 그리고 냅다 뜀박질을 하는 거야, 걔가. 김여주 늦어도 신호등 건널 때 안 뛰는 사람이 개뛰었을 듯.

1. 흙 묻은 손으로 다른 것도 만졌으니 죄다 팔지 못 함.

2. 어린 애가 저런다는 게 벌써부터 괘씸함.

아무리 운동을 안 했어도 키 160 안 되는 남자애 다리보단 성인 여성의 다리가 쬐끔 더 길었기에 어찌저찌 잡아서 간지 없이 헉헉대고 말했을 듯.

- 야… 헉, 야… 아니 아, 숨 좀 쉬자.

이러는데 그 손 탁 쳐내면서 또 도망 가려는데, 이번엔 진짜 화나서 말할 듯.

- 너 이거 범죄야.

어디서 봤는데 잘못을 먼저 인지시키라고 해서 냅다 뱉고 본 말이었을 듯.

- 너 이거 나쁜 짓이야.

솔직히 이 쬐그만 애한테 돈 물어내라 할 생각은 없는데, 그냥 어른으로서 아이를 보호할 의무가 있는 성인으로서 따끔하게 그러지 말라고 할랬드만 이 어린 게 손 탁 쳐내면서 소리침.

- 아, 어쩌라고 아줌마!!

여기서 핀트 나감. 나 아줌마 아닌데 ㅅㅂ(그 핀트가 아니잖아요)

- 네가 잘못해 놓고 지금 무슨… 어이가 없네. 너 저기 학교 다녀? 몇 반이야? 선생님을 불러와?

- …아 좀 놓으라고.

- 너 부모님 데려와.

그 말 듣고 애 표정이 아주… 슬퍼질 듯.

- 불러도 안 와.

- 뭐?

- 바빠. 아빠는 나보다 일이 더 중요해.

대충 무슨 스토린지는 알겠는데… 여주는 꽤 냉철한 편이었기에 조금 누러진 목소리로 말함.

- 그럼 다른 보호자 데려와.

- 없어, 없다고! 나한테 올 사람 없다고!!

- 아, 어쩌라고. 그럼 아빠 불러. 야, 전화번호 내놔.

네 아빠 바쁜 게 내 알 바야? 너 아빠 제정신이면 너 이렇게 안 냅둬! 하면서 결국 아빠를 불러냈는데…

- …네 아버님이셔?

- …

존나 개빡친 표정으로 차에서 내리는 남자가 보임. 이가 입술 꾹 깨물면서 고개 푹 숙이면, 여주도 같이 공손해져서 손 모으고 있을 듯.

오,

안 그러면 선생님한테 가서 네가 한 일 다 이르고 아버님 부르고 경찰 부르고(당연히 거짓말이었다) 난리부르스를 치겠다고 해서 겨우 불러낸 건데… 이렇게 무서울 줄 알았으면 걍 내가 대충 혼내고 보낼 걸 그랬어요. 오자마자 한숨 푹 쉬고 화가 난 것 같기도, 실망한 것 같기도, 피곤하고 지친 것 같기도 한 표정과 말투로

- 너 진짜 왜 그래 김주하

이러는데 여주까지 같이 움찔함. 말로 패는 스타일이시구나… 얼굴과 목소리에 냉기가 돈다는 게 뭔지 확실히 이해할 듯. 아니 난 왜 혼나는 기분이지?

정말 죄송하다고 연신 반복하는 그 남자에 에… 예… 뭐… 돈은 안 주셔도 되는데, 예 그냥… (사실 이렇게 기본적인 가정 교육 없이 큰 아이의 부모 한번 보자 하는 심보도 있었음) 그냥… 뭐지? 아이는 왜 그랬을까… 하게 됨. 어느새 여주 뒤에 숨어 있는 그 아이 어르고 달래서 안아들고는 또 정말 죄송하다고 고개 숙이는데, 여주도 같이 숙일 듯. 예… 일도 바쁘신 것 같은데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나 왜 이러고 있음?

돈 안 줘도 된다는데 자꾸 주겠다는 그 남자에,

- 카드기 있긴 한데요, 학교 앞 분식집은 카드 선호 안 해요.

- 네?

- 어린이 손님들은 현금을 선호하시거든요. 아, 참고로 탈세는 안 합니다.

이러고 걍 안겨 있는 걔한테

- 적당히, 정신 차릴 정도로, 좀 혼나고 다시 손님으로 보자.

하고 갈 듯. 털레털레 다시 가면서 걔 걱정할 때가 아니었단 걸 깨달을 듯.

- 야, 너는 일 돕겠다는 애가 한 시간? 한 시간이나 자리를 비워?

- 아, 엄마! 와, 엄마 손 더 매워졌어. 복싱 배워? 아!!! 미안해 미안해 아 좀,

어린이 손님들 앞에서 먼지 나게 맞으셨을 듯.

그리고 흙먼지 가득한 손으로 만진 충무김밥은 여주의 것이 됐음. 이거 어쩌냐는 엄마에 냅둬… 내가 먹을게.(나중에 도영이랑 엮이면 어떻게 될지 대충 보이는군) 하고 그 애 덕분에 충무김밥 무료로 먹었네 ㅋㅋ 많이 혼났을라나 하고 넘어갈 듯.


- 안녕하세요…

그리고 다음 날 삐까뻔쩍 종이 봉투 들고 등장. 쭈뼛쭈뼛 내미는데 아주 빳빳한 새 지폐로 현금 꽉 들어 있음.

- 아빠가 정말 죄송하시다고…

- 많이 혼났는지 이제 존댓말도 쓰네?

- 아줌마 진짜 짜증 나.

- 덜 혼났나?

그럼 대충 돈인 거 확인한 여주가 지폐 봉투 돌려 주면서 말함.

- 이거 너 써.

- 에?

- 너 몰래 쓰라고. 아빠한테 들키지 말고.

- …왜요?

- 너 돈 없어서 저 쬐~끄만 김밥 훔친 거 아냐?

- 아니에요!! 나 용돈 받아요!

- 근데 왜 훔침?

- 받… 받았는데, 매일 받긴 하는데…

눈도 못 마주치고 말 얼버무리더니 갑자기 여주한테 푹 안김.

- ៖?

- 제가 갖고 있으면 안 돼요!

하고 안은 사이에 당황한 여주 앞치마에 지폐 봉투 넣고 쓩 사라짐. 달리기도 개빠르고 머리도 영민함. 어떻게 안을 생각을 했지? 녀석 영민하군. 정도의 감상만 남기고 봉투는 넣어 뒀을 듯. 나중에 오면 다시 주려고. 항상 걔 오면 다시 주려고 앞치마 주머니에 꼭꼭 넣어 놓고 일했을 것 같음. 그러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또 쭈뼛쭈뼛 고개 들이미는 걔 보고 여주 남몰래 씨익 웃었을 듯. 도둑 또 충무김밥 훔치러 왔냐고 놀리고 싶다가도 애들은 어떻게 어디서 충격을 받고 상처를 받을지 모르니 오 초 정도 고민하다 말했을 것 같다.

- 이번엔 손님으로 왔어?

그럼 아기는 그때 처음 봤던 아빠를 닮은 듯, 안 닮은 듯 토끼 같은 눈 더 크게 뜨면서 작게 고개 끄덕임.

- 뭐 줄까요.

- 충무김밥...

- 반말?

- 이요...

아기 놀려 놓고 좋다고 까르륵대는 여주에 여주 어머님이 등짝 한 대 칠 듯. 아이고 이 화상아. 그리고 아기한테는 엄청 상냥하게 물으심.

- 꼬마김밥 말고 충무?

- 네.

- 입맛 특이하네.

- 아빠가 아침에 자주 해 줬어요.

그거 충무김밥이라기보단 걍 김에 밥 싸서 김치랑 같이 준 것 같은데. 아빠가 요리 못하시는구나(잘한다 시간이 없을 뿐), 하는 뒷말은 삼켜둠. 얘 혼내던 그 얼굴이 생각나서 갑자기 오싹했거든... 아무튼 음식 갖다 주고 보니까 다른 테이블은 삼삼오오 아기들끼리 앉아서 꺄르륵대거나 떡꼬치 사가서 운동장으로 뛰어가는데, 얘만 그 4인 테이블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거야. 그게 퍽 외로워 보여서 맞은편 의자 꺼내서 앉을 듯.

- 어때, 아빠가 해 준 거랑 같아요?

- 아니...요.

- 아빠는 어떻게 해 줬는데.

- 그냥 김에 밥 싸 줬는데...

이거 김 마른 김이라 그런가. 입 천장에 김 쩌억쩌억 달라붙는 느낌이 이상한 듯 계속 입천장 훑는 그 아이에 푸하학 웃을 듯. 아, 어째 행동 하나하나가 소동물 같냐. 그 도둑 맞나 싶을 것 같음. 아기한테 잠깐 기다리라 하고선 분식집 위에 있는 본가로 털레털레 뛰어 올라가서 찬장 뒤져서 조미김 찾아갖고 즉흥으로 밥 싸 줄 것 같잖냐.

- 이 김으로 하니까 그 맛이 나?

- 네!

- 김치도 먹어.

그리고 다른 거 더 주겠다는데 한사코 거절할 것 같잖니. 그냥 자기 앞에 앉아서 김에 밥이나 싸달래. 그게 젤 맛있다고. 그럼 하나하나 싸 주면서 한마디씩 붙일 듯. 니가 아직 인생의 맛을 모르네, 이런 기회 없네... 그러거나 말거나 잘 드시는 아기 손님 턱 괴고 쳐다볼 듯. 귀엽네... 오물오물 토끼 같네... 이런 생각하는데 꼬물꼬물 주머니에서 뭘 꺼내더니 대뜸 건네는 거임. 지폐였음.

- 이거 손님 맞춤 커스텀 김밥이라 비싼데.

- 네?!

- 한 입에 5만 원

- 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부들부들 떠는 그 아이에 입꼬리 실룩실룩 올라감. 그리고선 냅다 사기꾼이라고 한다.

- 어, 나 사기꾼 맞아.

- 아빠한테 다 이를 거야!

- 야?

- 거예요 ㅡㅡ...

- 억울하면 다음에 또 와 ㅋㅋ

티격태격 티키타카 잘 되는 이 여성... 아이의 마음을 속수무책으로 허물어 버림. 오늘 아빠가 또 야근인지 야긍인지 늦을 것 같다고 해서 일주일 만에 용기내서 찾아온 건데, 정말 더 이상 올 생각 없었는데(남의 물건 훔치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쯤은 아는 나이이다) 이러면 자꾸 오고 싶어지잖냐... 김여주도 얘가 퍽 귀여움. 사회생활에 찌들어 속을 알 수 없는 놈들과 가면 쓰고 만나는 게 일상이었는데 여기 와서는 사랑하는 엄마도 있고 의외로 아기들도 너무 귀여움. 특히 얘는 첫만남이 안 좋았어서 그런가 지금이 약간 반전매력? 은근 예의바르고 의젓하단 말이지.

자꾸 마음 쓰였을 듯. 그리고 눈치가 있으면 알잖아. 부모님 데려오라고 했을 때 엄마 말고 아빠 먼저 나왔던 것도, 다른 보호자는 없다고 했던 것도, 아빠는 바쁘다고 안 올 거라고 했던 것도 대충 2n년의 데이터로 이게 뭘 말하는지 잘 알겠어서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갔을 듯. 걔 먹는 것까지 다 보고 입가도 벅벅 닦아 주면서 고이 모셔뒀던 봉투 꺼낼 듯.

- 이거 다시 줄게.

- ...이거 아빠가 아줌마한테 준,

- 아줌마 아니라고. 그리고 나도 마지막으로 묻는 거야. 지금 안 가져가면 진짜 내가 먹는다? 나 두 번은 안 물어보는데 어린이 특별대우 해 주는 거임.

봉투 보면서 동공 흔들리는 게 보이는데 고개 휘휘 젓고 안 된다고, 안 받겠다고 할 듯.

- ...이거 저한테 있어 봤자 제가 안 써요.

- 뭐?

- 아줌마 가져요.

그 표정이 퍽 결연하고 의젓해서 또 두 번은 안 물었을 듯. 그리고 그 봉투 다시 앞치마에 넣으면서 말했겠지.

- 그래, 내가 가질게.

- 네.

- 그리고 오늘 네가 먹은 거 내가 살게.

- 네?

- 너 여기 올 때마다 내가 사 줄게.

- 네??

- 난 돈 받았고 내가 쓰고 싶은 데 쓰려고. 앞으로 자주 와. 단골손님 돼야지.

이걸 계기로 쭈뼛쭈뼛 들어오던 그 아기 도둑이 이제 진짜 당당해져서는 분식집 문지방 닳도록 드나들었겠지. 학교 안 가는 주말에도 분식집에 출석 도장 찍다가 아예 문 안 여는 일요일에도 서성거리길래 그거 발견한 여주가 피식 웃을 것 같음. 얘 표정이 너무 시무룩해서.

- 손님 오늘은 휴무인데요.

- 휴무?

- 항상 일요일은 가게 문 안 연다고.

- 아...

눈꼬리 입꼬리 어깨마저 축 쳐져서 구십 도 인사하고 가려는 걔한테 요 앞 롯데ㄹ아 갈래? 아이스크림 콘 사 줌 ㅋㅋ 할 듯. 자기도 돈 없다면서. 그리고 데려가선 든든하게 햄버거 세트 먹여 주겠지. 한 달 정도 계속 뺀질나게 찾아오는 아기에 이미 그 아빠가 사죄의 의미로 줬던 돈은 다 얘한테 썼으면서도 계속 찾아오면 뭐 쥐여 주고 먹여 주고 했을 듯.

그러다 또 발길을 뚝 끊어. 2주 정도 안 나타나서 퍽 걱정했을 듯. 문 닫는 일요일에도 분식집 앞에 있을까 봐 슬리퍼 직직 끌고 주기적으로 나가 봐도 안 보이고... 돈 다 쓴 거 알았나, 이제 안 오려나 보다 생각하는데

- 너 왜 울어.

- 끄흡...

천둥 번개 치는 비 오는 날에 비 다 맞으면서 분식집 앞에 쭈그려 앉아 있는 걔에 엄청나게 놀라겠지. 2주 만에 나타난 꼴이 이거라니. 본가로 데려가서 알아서 씻고 나오라 하고 어릴 때 입던 옷도 쥐여 주고 얘한테 자초지종을 듣는데, 아빠는 항상 야근이고, 자기는 비 오는 날이 싫대. 천둥 치는 날은 더 싫대. 근데 친구는 없고 찾아올 곳이 여기밖에 없어서 무작정 뛰어왔다고 울면서 말하는데 속이 안 좋음... 동정인지 연민인지. 아빠가 이제 분식집에 민폐 그만 끼치라고 가지 말라 해서 2주 정도 얼굴 안 비췄던 사정도 알아내셨을 듯.

민폐...인가. 민폐이긴 하지. 돈도 안 내고 자리 차지만 하고 시간 까먹고 손 많이 가고 귀찮고. 그리고 그럼에도 여주도 얘한테 알게 모르게 위로를 받고 있었어서. 착잡한 와중에 밤 11시쯤 됐을 때 아빠가 직접 찾아왔겠지.

눈 꾹꾹 누르면서 누가 봐도 피곤하고 예민해 보이는 얼굴로 차에서 내리는 그 남자… 아이는 이미 잠든 지 오래고 깨지 않게 내려가서 분식집 앞에서 대화했을 듯.

- …저희 아이가 민폐를 너무 끼쳤죠. 죄송합니다.

여주는 그런 남자를 아무 말 없이 빤히 쳐다봤음.

- 언제 한번 감사 인사 드리려 하긴 했는데, 이렇게 뵙게 돼서 죄송해요. 원래 그렇게 예의 없는 애가 아닌데, 제가 신경을 잘 못 썼나 봐요. 앞으로 얻어먹는 일도 없도록 하겠습니다.

- 앞으로 계속 찾아갈 것 같아서… 미리 제가 돈을 결제해 두고 가는 게,

그럼 말 뚝 끊고 대답하겠지.

- 얻어먹은 거 아니에요.

- 네?

- 그쪽이 물어 준 충무김밥 값은 잘 받았고, 제가 사 주고 싶어서 샀습니다.그리고 주제 넘은 참견이긴 한데, 너무 돈으로 뭐든 될 거라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걘 오늘 돈보다 아버님이 옆에 계시는 걸 원했던 것 같은데. 아니, 원했어요. 아빠랑 같이 있고 싶어 해요.

그리고 구십 도로 고개 숙이면서 마지막 멘트까지 당돌히 쳐 주실 듯.

- 또 주제 넘게, 그쪽 집안 사정도 잘 모르지만. 그냥 좀 일을 줄이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그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애를 대하면 있는 애정도 없어 보여요. 저번엔 저까지 오금 저렸네요.얘한테 왜 그러냐고 하셨죠. 그 이유 제대로 알아가 볼 시간은 가져 보셨어요?

- …

- 주하 깨워서 다시 내려올게요. 다시 한 번 저도 죄송합니다.

아기 차에 태우고 집까지 가면서 도영 아빠도 생각 많았을 듯. 그 여자가 했던 말들이 진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거든. 집 주차장에 도착하고 한참 동안 자고 있는 자기 아들 빤히 쳐다보겠지. 진짜 눈에 넣어도 안 아픈데, 심장을 내어 줄 정도로 사랑하는데, 그래서 부족함 없이 키우려고 이러고 사는 건데… 그게 죄다 틀린 것 같아서 착잡할 듯. 착잡한 마음 뒤로 하고 아들내미 이마에 쪽 소리 나게 뽀뽀하고선 이마 쓰다듬는데, 이러면 잠귀 밝은 얘가 베시시 웃으면서 아빠 하고 일어남.

- 아줌마…?

근데 오늘은 서운하게 다른 사람을 입에 담길래 눈 부어서 잘 뜨여지지도 않는지 자기 이마에 뽀뽀한 게 그 분식집 여자인 줄 알았나 봐.

- 아빤데.

- 아빠?!

- 서운하게 (쪽) 응? (쪽) 이제 아빠보다 그 분식집 사람이 더 좋아? (쪽)

- 간지러…

그리고 난 아빠뿐이야 하면서 폭닥 안기는 아들내미에 도영 아빠는 아까 그 여자 말 듣고 하던 고민들 한 번에 정리할 듯. 그래, 얘 때문에 일하는 건데. 정작 얘랑 같이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게 말이 안 되지.

- 근데 그 아줌마도… 쪼~끔 좋아.

- 뭐?

- 쪼끔이야, 쪼끔… 아빠만큼 아냐.

그리고 그 분식집 여성에 대한 관심도도 크게 높아지셨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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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토끼: 오늘도 주하 거기 있나요?

분식집 터줏대감 주하는 이제 아주 당당하게 아빠가 말려도 뺀질나게 찾아옴. 아빠도 말리는 거 포기하고 정말 죄송하다면서 명함 내밀었을 듯. 자기 연락처라고 주하가 먹은 거, 시간 쓰게한 거, 아무튼 뭐든 다 청구하라고.

(사진) <

예 지금 완전 꿀잠 자는 중 <

큰 토끼: 아이고… 제가 빨리 갈게요 매번 죄송해요

매번 올 때마다 죄송해 하고 안절부절하는 게 퍽 토끼 같아서 아빠님은 모르시게 큰 토끼라고 저장해 놨을 듯. 작은 토끼는 주하였음.

매번 늦게 와서 아기 안아들고 가면서 제발 돈 좀 받아 주시면 안 되겠냐고 끈질기게 묻는 그 남자에 여주 팔짱 끼고 어딘가 마음에 안 든단 표정으로 김도영이랑 체감 거리 5cm 안으로 들어갈 것 같잖냐. 김도영 도르륵도르륵 눈만 굴리겠지.

- 어… 좀 가까운,

- 돈으로 뭐든 다 해결되는 게 아니라니까요. 돈으로 얻을 수 없는 걸 주하한테 받고 있어요. 주하랑 있는 게 즐거워요.

도영 아빠는… 감사하긴 한데 솔직히 좀 이해가 안 되기도 해. 첫만남도 최악이었고, 남의 아이인데다가, 딱히 이득되는 것도 없잖아.

- 왜요?

그래서 물으면,

- 귀엽잖아요.

뭐 당연한 거 묻냐는 듯 여주가 미간 찌푸릴 듯. 김도영이 그게 뭔 말이여? 싶은 표정으로 눈 꿈뻑이면 김여주 빡빡 웃을 듯.

- 제가 소동물에 좀 약해서 ㅋㅋㅋㅋ

- 네?

- 아무튼 즐겁다는 거예요. 아버님께서 불편하지만 않으시면 오래 보고 싶어요, 주하랑.

김도영도 눈 좀 도르륵 굴리더니 웃으면서 대답할 듯.

- 그럼 식사 한 번 대접하게 해 주세요.

- 음?

- 부모로서 주하가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알아보고 싶기도 하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기도 해서요.

- 비싼 거 얻어먹어도 되나요?

- 당연하죠.

그리고 정말 며칠 뒤에 오늘 밥 먹고 싶다는 김여주에 오케이… 지갑 털릴 준비 다 됐어 하고 뭐 먹고 싶냐고 했는데,

> 큰 토끼: 그게 비싼 건가요?

고급 인력인 아버님을 써먹었으니 나름 뭐… 비싸다고 할 수 있죠 <

김도영이 >직접< 만든 정성이 듬뿍 들어간 요리가 먹고 싶댄다… 근데 김도영 집에서 요리 안 해 먹는단 말이야. 아들한테도 카드 쥐여 주거나(요즘은 분식집 맨날 가서 현금 쥐여 줌), 간단하면 좋겠는데 인스턴트는 절대 못 멕이겠고… 해서 샐러드(…) 정도만 집에 있단 말임.

- 이러니까 꼭 가족 같애!!

그래서 결국 장을 보게 됐단 말이다. 차에 탈 때는 별 감흥 없던 아들내미가 분식집에서 여주 픽업 하니까 눈 동그랗게 뜨고 미주알고주알 학교에서 있던 일 이야기하는데…

이거 꼭… 어, 음…

- 가족 맞지. 우리는 피의 맹약을 했어.

- 맨약?

정말 가족 같다.

- 내가 주하 너 지키기로 결심했다는 뜻.

- 멋있어!! 근데 그럼…

- 웅.

- 아줌마가 엄마야?

0.5초 정도의 정적을 뒤로 하고 김도영이 말하려는데 여주가 먼저 선수 쳤을 듯.

- 고모야.

- …고모? 엄마 하면 안 돼?

아무리 의젓해도 주하도 겨우 열 살이었음. 울먹거리기 공격 들어간다는 뜻.

오,

곤란한데… 결국 김여주는 책임을 전가하기로 함.

- …느이 아빠한테 물어봐.

- 아빠 ㅠㅠㅠ!!!

- 아니, 여주 씨…

- 아빠, 아줌마 우리 엄마 하자. 응?

- 아니 여주 씨 정말 ㅠㅠ…

우는 사람만 두 명 됨. 김여주는 걍 빨리 차 몰아서 마트나 가자고 함. 장난감 코너로 혼을 쏙 빼놔야 한다면서… 그렇게 마트 도착하고 카트 빼서 장보는 동안 주하는 미친 듯이 신나 있음. 카트에 타고 슝슝 하면서 온갖 곳 다 돌아다녀 주는 여주, 애 둘 키우는 기분이 갑자기 들어차는 김도영이 그러지 말라고 쫓아오는 것까지. 그리고 아줌마랑 깔깔대며 웃는 것까지 다 너무 행복했거든.

김도영도 솔직히 좀 아니 …많이 즐거웠을 듯. 주하가 여주 씨를 왜 이렇게 좋아하나 했는데, 그냥 주변 사람들을 재미있고 힘나게 만들어 주는 선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인 것 같음.

- 아버님, 벌써 지치셨어요?

카트에 앉은 자기 아들내미, 그리고 그걸 밀고 있는 여주 씨가 뒤돌아보면서 저렇게 말할 때는 심장 쿵 내려앉았을 것 같다. 너무너무 즐겁고 저 그림이 보기 좋아서. 정말 간만에 심장이 쿵쿵거리는데… 이러면 안 된다고 입술 꾹 깨물 듯.

미쳤어, 내가 진짜 미쳤나 봐. 그러면서 여주 씨한테 식사만 대접하고 절대… 엮이는 일 없게 해야겠다고 다짐하실 듯.


장 다 보고 도영이 집에 왔는데, 여주도 도영이도 둘 다 어색해서 쭈뼛쭈뼛거릴 듯. 여주는 그냥 진짜 비싼 데 가서 밥 얻어먹기는 좀 부담스러워서 요리해달라고 한 건데 뱉고 보니 이미 애까지 있는 집에 처들어와서 생각이 짧았다… 하고 민망했고, 도영이는 집에 여자가 들어온 것 자체가 어색했음. …게다가 아까 여주 씨 보고 심장 쿵쿵거렸던 것까지 떠올라서 자괴감 오질 듯. 이 집은 평생 아들이랑 자신의 공간이고 누구도 못 들어올 거라 생각했는데, 거실에 있는 여주 씨 보면 눈도 못 마주칠 듯.

둘 다 어색어색하길래 정적을 깬 건 주하였을 듯.

- 나 배고파!!

- 어? 어어… 금방 밥 해 줄게.

- 저… 그, 앞치마는 어디에 있을까요?

- 여주 씨는 앉아 계세요! 제가 대접할게요.

서로 리액션 과해지고 민망해 하고 있음. 결국 여주는 거실 소파에서 주하 보고 있고, 도영이는 매고 식사 준비할 듯. 근데 여주가 자꾸 힐끔힐끔 부엌에 있는 도영이 쳐다보니까 주하가 실눈 뜨면서 푸하학 웃겠지.

- 아줌마.

- 아줌마 아니라고 했어.

- 아빠 도와주러 가요. 나 여기서 혼자 티비 볼래!

- 어?

- (소곤소곤) 아빠 요리 잘 못해(거짓말이다).

아줌마는 김밥도 잘 싸니까 빨리 도와주러 가요.주하가 이러면 여주 고민하고 있는 자신이 좀 웃길 듯. 아니, 당연히… 주하 곁에 있는 게 편하지. 얼굴 본 거라곤 매번 주하 픽업 올 때 안절부절하던 그 모습인 저 남자랑 단둘이 요리를 하는 건 어색하잖아.

…근데도 그냥 같이 앞치마 매고 도와주고 싶어서 엉덩이 들썩거리실 듯. 결국 주하한테 말하겠지.

- …너 밥 빨리 주려고 나 가는 거다. 알겠지? 티비 잘 보고 있어.

이러고 부엌으로 가려고 하면 주하가 옷 소매 붙잡고 올려다 보면서 애교부림.

- 뽀뽀… 해 주고 가.

- 뭐?!?

- 고모… 는 해 주는데. 아줌마도 고모라며.

결국 망설이다 볼에 쪽- 하는데 그거 도영이가 봤을 듯. 아들이 자기 말고 누군가한테 뽀뽀해달라고 애교부리는 것도 처음 보고, 뽀뽀해 줄 때, 받을 때 표정이 둘 다 너무… 행복해 보여서 지금 이게 너무 단란한 가족 같아서. 주하가 여주 씨 이야기 종알종알거릴 때마가 자꾸 욕심이 나서. 정신 차리자는 말만 되내면서 양뺨 챡챡 때릴 듯.

- 뭐 하세요?

- 어, 깜짝이야…

그럼 어느새 곁에 온 여주가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보다가 토끼 눈 뜬 도영이 보고 박장대소를 하겠지.

- 아 진짜 토끼 같다.

- …토끼요?

- 토끼 닮았단 소리 못 들어 보셨어요?

- 처음 들어봐요, 진짜.

말도 안 돼… 그냥 딱 보자마자 토끼 같은데 인상 쓰고 다녀서 다들 몰랐나? 김여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손 뻗어서 도영이 눈가 콕 눌렀을 듯.

- 이 눈이 진짜 토끼 같… 은데…

그리고 뭔가 좀… 분위기가 이상해서 손 떼면서 죄송하다고 했겠지. 허둥지둥 앞치마 찾아서 매려고 하는데 여주네 분식집에서 쓰는 단추 형식이 아니라 묶는 거라서 뒤에서 손 허우적거릴 때 도영이가 묶어 줬을 듯.

- …

- …

- …감사합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뒤로 하고 레시피 보면서 각자 할 일 정하는데, 둘 다 어리바리 까서 레시피 보다가 머리 꿍 부딪치기도 하고, 서로 칼질 위험하다며 티격태격했을 듯.

- 전 자취 8년 차였어요!

- 저도 나름 애 아빠로서 이것저것 해 줬어요!

- 뻥!! 맨날 김에 밥 말아 줬으면서!!

김도영 눈 크게 뜨고 지 아들 쳐다볼 듯. 그럼 아들은 다 듣고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 티비만 보고 있다 ㅋㅋㅋㅋㅋ

- 아… 아무튼 손 다쳐요. 제가 썰게요.

- 저 4인 기숙사 살 때도 요리 담당이었어요. 자취할 때도 요리 맨날 해먹었고…

이 여자… 저번부터 느꼈지만 고집 진짜 개쎄다.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든 이 남자가 포기했는데, 한 삼 분 지나서 단발 비명이 터졌겠지.

- 아!

- 다쳤어요? 괜찮아요?

- 아줌마 다쳐써?!

ㅅㅂ… 분명 자신만만하게 칼 들었는데 손가락을 썰어 버린 건에 관하여… 아픈 것보다 쪽팔린 게 더 했을 듯. 괜찮다며 피 나는 손가락 뒤로 숨기는데 김도영이 붙잡아서 물로 씻기고 지혈하고 반창고까지 붙여 줄 것 같잖니…

- 제가 지금 애 둘을 보는 건지 헷갈리네요.

- …저 원래 진짜 이러지 않거든요. 오늘 이상하네…

걱정스러운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토끼가 앞에 두 명이나 있어서 그런가. 여주도 심장이 쿵쿵 뛰었을 듯. …나 요즘 외로운가? 걍 갑자기 이런 토끼 같은 남편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들어서 ㅅㅂ 미쳤나!!! 김도영한테 잡힌 다친 손 말고 다른 손으로 진짜 빡! 소리 나게 자기 뺨 때릴 듯. 정신 차리자… 라는 뜻으로 가끔 이러는데(일이 안 풀릴 때도 이랬다)

그럼 김도영이 화들짝 놀라서 김여주 얼굴 감싸 쥘 것 같잖냐…

- ?????

- 왜 그래요???

- 에?

- 왜 막 자기를 때려요? 갑자기?

- 아… 아니 걍 버릇 나와갖고…

- 이게 버릇이라고요?

나 갑자기 무슨 자해에 미친 사람 된 것 같은데 아니에요. 아버님, 오해 마세요.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밥 해 먹고, 둘 다 의식없이 행해지는 스킨십에 화들짝 놀라고 얼굴 붉히고 염병 다 떨었을 때면, 밤 10시쯤 됐을 듯. 착하고 바른 어린이인 주하는 아홉 시만 돼도 졸리다고 했기 때문에 꿈뻑 잠들었고 이제… 어른 두 명만 남았는디.

- 밤이 너무 늦었으니까 데려다 줄게요.

- 어우, 아니에요. 버스 아직 안 끊겼으니까 괜찮아요.

그래도… 라고 말하려다 이제 이 여자랑 엮이지 않겠다고 다짐한 몇 시간 전의 자신이 떠올라 입 꾹 다물겠지. …그래요, 그럼.

여주는 현관에서 신발 느릿느릿 챙겨 신었을 듯. 뭔가 좀 더…

- 다음에…

- 네?

- 다음에 또 와도 될까요?

좀 더 같이 있고 싶은데. 그게 도영 씨인지 주하인지 둘 다인지 모르겠어. 여주 말을 끝으로 정적만 이어졌을 듯. 아, 나 실수했구나. 죄송하다 하고 급히 나가려는데,

- 또 와요. 또 와 주세요.

- …

- 대신 오늘 제가 여주 씨 데려다 줄 수 있게 해 주세요.

현관 불이 탁 꺼졌음. 둘 다 어떤 표정인지 보이진 않았지만… 김도영은 그 잠깐 새에 입술을 씹었음.이 여자랑 엮이면 안 되는데.정말 엮이면 안 되는데.

이 여자를 거부하는 방법을 모르겠어.거부할 수가 없어.거부하고 싶지 않아.

김도영 진짜 속수무책으로 김여주한테 빠질 것 같음. 재택근무하는 쪽으로 알아보다가 안 되면 이직까지 생각하고 있었어서 한 달 정도는 평소보다 더 아들 못 챙겨 줬을 것 같은데,

- 아빠 왔다.

- 아빠!!

그럴 때마다 꼭… 퇴근을 분식집 앞으로 했거든. 쭈그려 앉아 갖고 나뭇잎 돌로 빻아서 소꿉놀이하고 있는 여주 씨랑 아들내미 보니까 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겠지. 쭈그려 앉아서 자기 발견하고 활짝 웃는 여주 씨가 좋아 죽겠지.

하루는 아들내미가 여주 씨 본가(분식집 위층)에 잠들었는데, 여주가 먼저 용기내서 말했을 듯.

- 주하 잠든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어… 좀 깊게 잠들 때까지 우리 산책이라도 할까요?

주하 잠든 지 이미 한 시간 넘었는데 말이야. 그냥 그날따라 큰 토끼 씨가 너무 멋있어 보여서… 말 뱉고 좀 정적 이어지길래 …역시 부담스러운가 하면서 후회하는데 김도영이 또 알겠대잖아. 둘이 나란히 느릿느릿 동네 한 바퀴 돌았을 듯. 한 바퀴 돌면 아직… 주하 좀 더 재울까요? 하면서 두 바퀴 돌고 세 바퀴 돌고. 나누는 이야기도 많아졌겠지. 재택근무를 하는 쪽으로 알아보고 있고, 여주 씨 말에 좋은 영향을 받아서 주하랑 좀 더 시간을 쓰려고 여러 방법을 찾고 있다고… 여주 안 그래도 요즘 이 토끼 같은 남자가 남편이 되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미쳐 버릴 것 같은데, 이런 가정적인 모습 보여 주면 어떡하냐고…

여주가 아무 말 없이 김도영 빤히 쳐다볼 듯. 나 진짜 외로운 건가. 아니면 옆에서 같이 걷고 있는 이 남자가 남편이었으면 하는 건가. 여주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지 않았음. 아이를 낳는다는 것 자체는 아플 것 같아서, 커리어에 영향이 갈 것 같아서 부정적인 생각도 있었지만 나를 똑 닮은 애 하나 보고 싶다는 생각 역시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었거든. 결혼에 그렇게 회의적인 입장은 아니었던 터라 이제 슬슬 사람 좀 만나서 결혼할까 생각하며 선자리도 나가 보고 했을 듯.

당연히 서른 살 기념으로 퇴사하고 본가 내려왔을 때부턴 그런 생각 접었지. 초등학생만 드나드는 이 분식집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날 리 없고, 따지고 보면 지금 자신은 백수라 현실적인 문제가 중요한 삼십 대의 연애에서는 어디도 안 끼워 줬거든. 쩝… 그러던 중 만난 게 김도영이었음.

당연히 처음부터 이런 감정 느낀 건 아니었지. 열 살 된 아들도 있고, 버젓이 혼자 잘 키우는 것까지 인지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 남자 손가락에 결혼 반지가 있나 확인했잖아. 없는 걸 보고 안도감이 드니까. …나 이 남자가 이혼한 것에 좋아하고 있는 거야? 하는 생각에 자괴감도 드셨을 듯. 집에서 밥 얻어먹었던 그날 이후로 조금씩 마음이 커져서 커지는 만큼 주체할 수가 없어서 다가가는데, 이 남자가 또 막… 그렇게 밀어내진 않으니까. 괜찮은 건가 싶음. 이 남자도 우리가 가까워지는 게 나쁘진 않은 건가.

김도영은 계속 가까워지면 안 된다, 엮이면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음. 사람이 매력적이었거든. 빈말 안 하는 것도, 당당하고 솔직한 것도, 가치관에 대한 확신과 잘못된 걸 알면 바로잡는 것까지 전부… 처음 봤던 그 모습 그대로 멋진 사람이니까 욕심 안 날 수가 없는 걸. 하지만 동시에 욕심 내면 안 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겠지. 자기한테만 빛나 보이지 않을 거니까. 자신한테만 이렇게 멋진 사람인 게 아니라 모두에게 그럴 거니까. 애 딸린 이혼남 만나는 것보다… 그런 사람들 만나는 게 여주 씨한테도 더 좋을 테니까.

그래서 이 관계에서 다가가는 건 항상 여주였음.

도영이 일 빨리 끝나는 날엔 주하 데리고 한강 드라이브 가자고 민망한 듯 웃으면서 제안하기도 하고, 퇴사하고 탄력근무제로 운영하는 회사로 이직했을 땐 맥주 담긴 검은 비닐봉지 흔들어 보이며 집에 처들어 오기도 하고 ‘퇴사 기념 맥주 쏠게요. 전 퇴사했을 때 다들 미쳤냐고 욕만 하고 아무도 안 해 줬어서 서운했거든요.’ 그렇게 말하면서 환하게 웃는 모습에 위로도 해 주고 싶고 공감도 해 주고 싶어서 결국 또 같이 시간을 보냈겠지. 그날 둘이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함께 있는 것도 처음이었을 듯. 주하는 옆에서 절대 안 자겠다고 나도 이거 한 입 줄 때까지 버틴다고 드물게 고집을 피우다 결국 골아떨어졌을 거고, 그 아이 재우고 나오는 김도영이 너무… 너무 애아빠라서 자신의 남편이었으면 좋겠어서.

여주는 약간의 취기를 빌려 말했겠지.

- …저 어떻게 생각해요?

진부한 멘트지만 동시에 가장 궁금한 질문이었음. 김도영은 흠칫하더니 맥주 캔 들어서 한 입 마시고는 싱긋 웃겠지.

- 감사한… 분이죠. 주하가 여주 씨 만나기 전에 한참 사고를 많이 쳤는데, 요새는 여주 씨 만나고 안정적으로…

- 저 돌려 말하는 거 못해요.

- …

- 돌려 듣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해요. 그런 걸 듣고 싶은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 아… 음,

- 도영 씨랑 반말 쓰는 사이도 해 보고 싶고, 이렇게 서로의 집에 불쑥 찾아와도 당황하지 않는 사이도 하고 싶고, …핸드폰 저장명 뒤에 하트 붙여도 괜찮은 사이가 하고 싶어요.

여주는 모든 문장을 김도영의 눈을 맞추며 했음. 피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거든. 반면 김도영은 끝까지 안 마주치려고 고개 푹 숙였을 것 같다… 그리고 끝에 내놓은 답변은 실망스러웠겠지.

- 하지만 여주 씨는 아름다운 걸요.

…나는 애 딸린 이혼남에 불과한데. 내가 어떻게 감히 여주 씨를 욕심내요.

그 말을 끝으로 정적이 꽤 오래도록 이어졌을 듯. 정말 둘 다 죽은 사람처럼 아무 행동도 없이 시간을 버리다가 여주가 말을 정리한 듯 입술을 축이더니 말했음.

- 주하가 도영 씨한테 딸린 애예요? 그런 표현은 왜 써요?

- …

- 자기를 낮추는 표현은 왜 쓰냐고.

- 여주 씨,

- 그럼 그렇게 못난 사람 좋아하고 있는 나는 뭐예요. 나는 뭐가 돼.

너무 억울해. 억울해 죽겠음. 이렇게 보잘 것 없는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로 만들다니. 비겁하고 겁쟁이였어. 씩씩대면서 다음 말을 이었겠지.

- 그런 생각하면서 왜 나는 거부 안 했는데?

- …

- 말해 봐요. 왜 날 데려다 줬는데, 왜 나 오늘 이 집에 들였는데.

잔뜩 상기된 목소리 사이로 지극히 차분한 김도영 목소리가 끼어들었음.

- 거부할 수가 없으니까요.

- …

- …그래서 여기까지 왔어요.

- 그럼 지금은 왜 거부하는데요?

- …

- 대답해.

- …여기서 제가 섣불리 받아들이면 여주 씨가 나중에 후회할 거예요.

김여주 그대로 자리 박차고 일어났을 듯. 미련한 새끼. 멍청한 새끼. 너무너무 미련해. 소심해. 겁쟁이야. 휘청거리면서 현관에서 신발 신는데 김도영이 붙잡겠지. 버스도 다 끊겼고, 지금 많이 취했다고.

- 그럼 어쩌자고요.

- …

- 방금 우리가 그런 대화를 했는데 무슨…

나 방금 차인 거예요. 다른 이유도 아니라 도영 씨가 도영 씨를 깎아내려서. 그리고 그냥 그 집에서 나와 버렸을 듯. 택시 타기 전에 술냄새 좀 빠지라고 근처 공원 돌면서 정신 좀 차리려는데 왜 자꾸 눈물이 나는지. 첫사랑이랑 헤어졌을 때도 안 울었는데.

- 짜증 나, 진짜…

누군들 애 딸린 이혼남 좋아할 줄 알았냐고…

누군들 좋아하는 거 인정하는 게 쉬울 것 같았냐고.

그 남자랑 연애하는 생각을 하면 주하를 빼 놓을 수가 없는데.

어떤 여자랑 결혼해서 애를 낳았고 왜 이혼했고 그 모든 과정들이 궁금한데, 동시에 알고 싶지 않기도 했음. 내가 모르는 시간의 김도영. 그 시간 속에 다른 여자와 그의 아이까지 있다면 알아가는 게 마냥 즐겁진 않을 게 분명했음. …근데 그래도 김여주는 그와 자신에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더 광활하다고 생각했기에 용기낸 건데. 이렇게 거절당하니까 좀 많이 슬펐을 것 같다. 김여주도 쉽지 않았는데. 아무리 주하가 예뻐도 얘를 모르고 지낸 시간이 십 년이었고, 자기 배 아파 낳은 애가 아닌데. 그럼에도 김도영과 김주하라면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건데.


- …엄마 나 다시 일하려고.

한 번 아니면 아닌 거지. 김여주 인생은 그랬음. 두 번 묻지 않고 상대방 입에서 나온 첫말을 항상 믿었어. 실연당하고 뭐라도 일거리 찾아서 하려는 사람 같아서 퍽 웃기긴 한데… 서른에 백수 생활도 육 개월이나 했겠다. 이제 좀 청산할 때가 됐다며 여러 합리화를 하면서 다시 혼자 살 집을 알아보겠지. 물론 그 몇 주 동안 주하도, 김도영도 보이질 않았음.

아빠가 절대 가지 말라고 했나 보네. 김도영도 나를 거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나 보다. 그냥 그런 생각이나 하면서 충무김밥 한 입 베어물 듯. 이 자식만 아니었어도.

일 알아보고 조건 마음에 드는 곳에서 미팅 끝내고 나온 김여주. 프로그래밍 쪽은 비교적 편한 차림새지만 첫 만남에 슬리퍼 직직 끌고 갈 수 없어서 엄청 차려입고 구두까지 신었는데, 역시 간만이라 그런가 적응 안 돼서 벤치에 앉아 잠깐 쉬는데,

- 이제 그만… 그만 뺏어가!

왜 놀이터 근처에 있는 골목길에서 벌벌 떨리는 주하 목소리가 들리는 건지. 두 눈 감고 있던 김여주 놀라서 번쩍 뜨겠지.

- 네 아빠 돈 잘 번다며. 너한테만 돈 쓴다며. 그거 좀 나눠 주면 되잖아. 엉??

주하보다 약간 몸집이 큰 아이들이었음. 그래도 말투나 얼굴을 보면 주하랑 나이가 똑같거나 비슷할 텐데 저것들이 지금…

- 니 엄마 없는 거 알고 울 엄마가 너랑 놀지 말라는데, 그래도 어울려 주잖아. 그럼 우리한테 뭐라도 해 줘야지.

- …그, 그래 놓고 항상 돈만 가져가잖아!

내 곁에 있어 주지도 않잖아!! 주하가 소리를 지르자 당황한 애들 중 한 명이 주하의 어깨를 밀쳐 벽에 박았음.

- 야! 조용히 해. 저번처럼 어른들이 오해한다고!!

- 뭘 오해해?

애한테 손 대는 건 아무리 어려도 죽어도 못 봐 주겠는 김여주가 이를 악 물며 골목길로 들어갔음.

- 뭘 오해하냐고. 니네가 얘 괴롭힌 거? 돈 뺏은 거?

- …아니, 아니에요! 괴롭힌 거 아니고 놀고 있던 건데… 저번에도 막, 막 얘가 울어서,

- 왜 친구를 울리는데? 그게 노는 거야?

김여주 보자마자 긴장 탁 풀린 주하는 안겨서 엉엉 울고 있었음. 속이 진짜 찢어지는 것 같아.

‘…이거 저한테 있어 봤자 제가 안 써요.’

그렇게 말했던 얘를 좀 더 들여 봤어야 하는데. 매일 용돈 받는데 충무김밥 훔친 것도 이상하게 생각했어야 하는데. 그냥 부모의 관심이 필요한 아이의 기행이라고만 생각했어. 자신한테도 김도영한테도 그리고 눈앞에 이 애들한테도 너무 화가 나서 손을 부들부들 떨었을 듯. 어디서 이런 못된 걸 배웠을까. 차마 주하처럼 어린 이 애들한테 고함은 못 치겠어서 몇 학년 몇 반인지 묻다가 한 애가 거짓말을 친 거야. 그거 때문에 더 화나서 그냥 경찰서 갔을 듯. 일일이 부모님 부를 필요도 없이 그냥 경찰서 가면 너네 부모님 다 불러낼 수 있다고.

그제야 좀 겁이 나는지 울기 시작하는데 이미 머리 끝까지 화가 났기 때문에… 최대한 골져스하게 해결하기 위해 입을 꾹 다물 듯. 그리고 경찰서에서 주하 부모가 아닌 김여주가 주하에 대해 알고 할 수 있는 거라곤 없어서… 김도영 부르겠지. 서에 뛰어들어오는 김도영 보고 첫만남 생각날 듯. 그때처럼 화난 얼굴은 아니고 엄청 걱정스러운 얼굴로 뛰어들어왔지만, 몇 주 만에 보는 얼굴이 너무 미워서… 이제 진짜 보호자 왔다고 하고 자리 뜰 듯. 더 할 말도 없는 사이라 김됴영 그냥 지나치는데 손목 붙잡힐 것 같잖냐. …놓으라는 말 한 마디도 얹기가 귀찮고 미워서 잡힌 손 빼낸 다음 나갈 듯. 뒤도 안 돌아보고, 더 이상 말 한 마디도 뱉기 아까운 사이라는 것처럼… 그냥 나갈 듯.

근데 그때 붙잡은 사람이 주하였음. 아빠 얼굴도 보기 싫을 정도로 화가 난 거냐고. 이제 아빠 말 안 듣고 아줌마 말 듣겠다고. 가지 말라고 난리를 피우겠지. 그거 따라나온 김도영이랑… 눈이 마주쳐서 주하 붙잡고 말했음.

- 아빠한테 화난 거 아니고, 주하도 너무 보고 싶었는데,

- 근데, 근데 왜…

- 아줌마가 원래 있던 곳으로 가려고. 아줌마 일하는 곳이 거기 있는데, 이제 돈 벌어야 해서 가야 돼.

아이들에게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를 설명하라… 는 걸 어디서 봤는데,

- 또 돈 때문이에요?

아이 입장에서 그건 필연적인 이유가 아니었지. 어른의 사정일 뿐이었고, 이 어린 애가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뿐이었음. 아빠가 저랑 있어 주지 못 하는 것, 친구들이 자신의 용돈만 갖고 곁에 있어 주지 않는 것… 그리고 아줌마도 뺏어간대잖아. 앞에 울고 있는 이 아기한테 여기서 뒷모습을 보이면 정말 죽을 죄를 짓는 거라서, 천벌 받을 것 같아서 그냥 꾹 안아 주겠지. 잠들 때까지 옆에 있다가 잠들어서도 죽어도 떨어지기 싫은지 옷자락을 안 놓아서 그대로 안고 김도영 집까지 갔을 듯. 물론 가는 동안 둘 다 아무 말도 없었음. 주하만 집에 두고 가겠다. 그 한 마디가 둘 사이 정적을 깬 유일한 문장이었음. 김도영이 이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하고 부모, 선생과 이야기를 하며 해결하고 있을 때 그 옆을 자의든 타의든 지킨 것도 김여주였어.

무슨 짓을 해도 …사람한테 상처 주는 건 절대 안 하는 여자였음. 비록 상대방이 먼저 상처를 줬더라도 말이야. 주하 떼어놓고 뒤척거리는 그 애 토닥토닥 해 주며 완전히 잠재우고 나왔을 때가 돼서야 드디어… 온전히 둘만 있었겠지.

근데 그딴 건 김여주한테 중요한 게 아님. 김여주는 한 번 아니면 아니야. 전에 말했듯이 상대방의 첫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했음. 정제되지 않고 나온 날것의 마음이라고 생각했기에 더 이상 관계가 발전되지 않길 바라는 그 말과 몇 주 동안 찾아오지 않은 걸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는 거임. 그래서 그냥 간다는 말도 없이 가방 챙겨서 나가려는데,

- 여주 씨.

김도영이 허겁지겁 붙잡겠지. 김여주가 거기에 붙잡힐 리가 없지만… 성큼성큼 현관으로 향하는 김여주 앞 필사적으로 막아 설 것 같음.

- …

- 비켜요.

- 미안해요.

- 안 미안해도 되니까 비켜요.

- 후회했어요.

이때는… 좀 쿵 했을 듯. 흔들리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남자 눈이 너무 애처로워서 고개 돌리면서 대답하겠지.

- 더 후회하기 싫으면 비켜요.

- 지금 여기서 비키는 것보다 후회하는 일 없을 거예요.

- 저기요.

- 떠나요?

- …

- 이제 여기 없어요?

…뭐라 쏘아붙일 수도 없게 목소리가 너무 떨리잖아. 김여주 괜히 시선 이리저리 두겠지. 벽지를 봤다가 고개를 숙였다가 뒷목 쓸면서 말함.

- 없어요. 전에 말했잖아요. 도피처로 왔다고, 여기 정착할 생각 없다고.

- …

- 어차피 안 볼 작정으로 우리 마지막에 그런 거 아니었나.

김도영은 솔직히 할 말 없지. 항상 끊어내야 된단 생각으로, 오늘이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여주를 대했고, …마지막은 최악이었으니까.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느릿하게 신발 신고선 뒤도는데 김도영이 또 옷소매 붙잡겠지. 신중히 말을 고르는 것 같길래, 들으면 흔들릴 것 같아서 손 뿌리칠 듯.

- 잘… 지내요.

그리고 끝까지 젠틀한 여자라 꼬박꼬박 작별인사도 챙겼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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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육 개월 살 거면서 가구는 왜 죄다 팔아 갖고 하…

가구로 꽉꽉 찬 집이 꼴 보기 싫어서 홧김에 죄다 팔아 버리고 집(…)까지 나왔더만 이렇게 빨리 백수 생활 청산할 줄 알았냐고… 떡볶이 휘적거리면서 중고로 살지 고민할 때 트럭 지나갈 듯.

📢안 쓰는 테레비, 냉장고, 에어컨 팝니다. 떡볶이 뒤적거리던 나무주걱 내려놓고 근심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트럭 쳐다보는데,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 들릴 듯.

- 아… 걍 중고로 사는 게 나을라나?

- 뭘요?

- 집에 들일 가구… 어?

- …안녕하세요.

…엥

서른 살 먹고 당황하는 일이 많이 없어진 김여주 지금 너무 황당해서 할 말을 잃었을 듯.

- 우리 어제… 무슨 대화했는지 기억나죠?

잘 지내라 하고 나온 게 바로 어젠데. 썸 깨진 구썸남이 다시 찾아온 건에 관하여… 김여주가 너무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니까 김도영도 민망할 듯. 목끝까지 붉어져서 눈 꾹 감을 것 같은데… 이 남자가 눈앞에서 이러든 말든 떡볶이는 휘저어야 했음. 안 그럼 늘러붙고 결정적으로 이제 곧…

- 저 작은 컵 하나만 주세요!

학교가 끝나서 애들이 몰려오기 때문 ㅅㅂ 오늘 엄마 고춧가루 산다고 시장 갔는데 여태 안 오는 걸 보니까 백퍼 아이스크림 집 사장님이랑 노가리 까고 있을 거임. 그분한테 잡히면 최소 우리 동네부터 옆동네 상칠이가 새끼 낳은 것까지 들어야 하기 때문에 늦을 텐데, 몰려드는 애들을 감당할 수 없는 김여주는 결국

- 저랑 대화하고 싶어서 온 거죠?

- …네.

- 아줌마!!! 저 피카츄 주세요!!!!

- 그럼 일단 앞치마 매세요.

- 네?

- 아줌마!!!! 저는 떡꼬치 하나만 주세요!!!

- 빨리!!

- 네, 네. 맬게요!

김도영을 일일 알바생으로 부리기로 함. 몰려드는 어린이 손님들에 어색함이고 뭐고 분주하게 움직였을 듯. …여기 정말 바쁘군요 ㅠㅠ 이러면서 울상 짓는 김도영에 김여주 푸하학 웃었을 듯. 그러다 급히 정색함. 저렇게 귀여워도 여태 서운한 게 쌓였기 때문에 쉽사리 넘어가 줄 생각 없음.

둘이 아주 환상의 콤비였을 듯. 김여주가 능숙하게 순대 썰고 기름에 튀김 넣어두면 옆에서 알아서 떡볶이 담아 주고 있던 김됴영이 순대 예쁘게 옮겨 담고, 튀김 올리고 건져서 기름 빼고 오… 나중에 둘이 분식집 같이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김여주 이런 생각하다가 정신 차리자 하면서 버릇대로 뺨 또 툭 치면 김도영 호다닥 달려와서 저번처럼 뺨 부여잡고 그러지 말라고 함. 근데 애기 다루듯이 ㅋㅋㅋㅋㅋ

- 쓰읍!! 그러지 말라니까는!

- …네?

뺨 부여잡고 있는 둘 보면서 키득거리는 어린이 손님들에 급히 떨어졌지만 둘 다 볼 붉은 걸로 놀림받았다네요.

보통 어묵은 저학년 애들이 별로 안 사 먹는데, 어딘가 동자님 같은 애들이 우르르 와서 어묵 하나만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러면 김도영이랑 김여주 둘 다 눈 마주치고 피식 웃음. 애들 너무 귀여워 갖고. 근데 어묵 꼬챙이에 찔릴 수도 있어서 김도영 그거 다 빼서 가위로 잘라 주고 어묵 국물에 담아 줄 것 같잖냐… 김여주가 따로 안 시켜도. 분식집 경력 있어요? 이렇게 놀리면

- 아빠 경력은 있어요.

이럼. 이때 왜 이렇게 듬직하게 느껴지는지. 아… 짜증 난다, 이 남자.


- 오늘 고마워요.

애들 하교 시간 다 끝나고, 축구하던 애들도 뒤늦게 와서 테이블에서 먹고 간 다음 테이블 닦고 있던 김도영한테 말했을 듯.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 여주 씨 오늘 퇴근하고,

- 여주 괜찮아? 엄마 왔다!

- 어…

- 오늘 너무 늦었지. 아니, 아이스크림 집 사장님… 음?

얼결에 삼자대면까지 하게 됨. 오늘 상견례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요 ㅠㅠ… 김도영 아찔해져서 냅다 구십 도 인사하면 김여주가 김도영 박박 밀어넣음. 잠깐 태권도장 앞에 있는 어린이 의자에 앉아 있으래 ㅋㅋㅋㅋㅋ

- 그때 그 분? 충무김밥 가져간 아이…

말은 안 섞어 봤어도 김도영이 분식집으로 퇴근한 전적이 꽤 있었기에 얼굴은 아는 여주 어머님. 지나가는 말로 이러다 저 애 때문에 니네 둘이 정분나겠다 ㅋㅋㅋ

…진짜로 정분나라는 건 아니었ㅅㅂ니다.

- …

- …

- 그래서 둘이 무슨 사이예요?

김도영은 오늘 진짜 그냥… 김여주 놓치기 싫어서 바짓가랑이 붙들어 매려고 온 건데 온갖 일을 다 겪고 있음. 분식집 4인 테이블에 앉아 팔짱 끼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주 어머님과 눈도 못 마주치겠음…

- 아무 사이도 아니야. 엄마, 괜히 이러지 말고 빨리 올라가. 여기 내가 정리할게.

- 도영 씨는요? 여주랑 의견 같아요?

그리고 김도영에게 집중되는 네 개의 눈알들에 여러 감정이 담겨 있었음. 김여주는 ㅅㅂ 절대아무말도하지말고내가수습할테니까잘둘러대. 라고 말하고 있지만,

- 제가 여주 씨 좋아합니다.

김도영은 김여주의 눈빛에 응해 줄 생각이 없었음. 애초에 김여주가 곧 여길 떠난다는데, 언제 가는지도 모르고 당장 빠른 시일 내에 와야 했기 때문에 어제 그런 대화를 해 놓고도 자존심, 양심, 수치 다 버리고 온 거였단 말이야. 짧은 정적을 뒤로 하고 여주 어머님이 입 여셨을 듯.

- 솔직히 반갑진 않네요.

- 아, 엄마.

- 내가 여태 본 바로는 여주가 더 아까워서.

- 엄마 그만해.

- 이혼하셨고, 아이도 있으시고, 아이가 도둑질 할 정도로 가정교육이,

- 엄마!!

- 넌 가만히 있어.

- 도영 씨 일어나요. 나가요.

- 저도 여주 씨가 저한테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

- 그런 소리 말고 그냥 좀… 나가요. 일어나라고.

김도영 팔 잡아끄는 김여주를 사이에 두고 김도영과 여주 어머님이 눈을 맞췄음. 둘 다 안 피했을 듯.

- 외람된 말이지만 제가 욕심이 좀 많습니다. 어느 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욕심을 부리다 화를 입은 적도 많습니다. 그래서 여주 씨를 욕심내지 않으려 했어요.

- 근데?

- 근데 여주 씨가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 …

- 여주 씨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이라 도저히 욕심을 숨길 수가… 없어요. 그런 사람을 거부할 수가 없어요.

여주 어머님 고개 돌리시면서 곰곰이 생각하시더니 잠깐 기다리라면서 여주 데리고 나갈 듯. 김여주는 김도영 말에 심장 터질 것 같은데… 걱정돼서 안 나간다고 버팅기다 결국 나가겠지. 근데 나가서 좀 걷더니 어머니가 쓱 뒤돌면서

- 야… 역시 한 번 갔다 온 놈은 다르다.

- …뭐?

- 말이 청산유수야. 미쳤어!!

- 엄마?

- 은근 기백 있어. 눈 안 피하고 또박또박… 야망 좀 있는 것 같더라. 너 굶어 죽이진 않겠어.

엄마도 홀라당 넘어가 버린 그이의 말빨에 김여주가 안 넘어갔을 리 없지. 여주 어머님은 둘이 얘기 잘하라면서 사라지시고 여주 혼자 터벅터벅 분식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떡할지 고민이 많을 듯. 이미 넘어가긴 했는데… 여기서 또 너무 쉽게 넘어가면, 나 쫌 자존심 쫌… 글치 않나?


- 뭐야, 왜 그러고 있어요?

- 아….

- …울어요?

- …킁, 아, 아니에요.

급하게 눈 가리려다 김여주한테 손목 붙잡힌 이 남성… 안 울긴 개뿔. 속눈썹까지 눈물에 젖어서 파르르 떨림. 그렇게 쿨쩍거리다 한다는 말이

- …가구, 가구 다 새로 사 줄 테니까, 그냥 같이 살면 안 될까요, 우리.저, 저 여주 씨가 언제 갈지 몰라서 매일 찾아오려고요.매일 찾아와서 여주 씨 마음 좀 바뀌라고 매달리려고요.잘못했어요.저 진짜 욕심 많아요, 욕심쟁이에요.저한테 여주 씨가 과분해도 같이 살고 싶어요.나… 나 여주 씨랑 살고 싶어.

울면서 자기가 무슨 말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 이 남성에

- 같이 삽시다.

안 넘어갈 수 있나… 경찰서에서 얼굴 보자마자 풀릴까 봐 냅다 도망친 건데, 매일 얼굴만 비춰도 풀렸을 건데, 이런 말까지 하니까 안 넘어가고 배기냐고. 자존심이고 뭐고 그냥 냅다 같이 살자고 했을 듯. 집 구한 건 어떡하지… 이미 시켜놓은 커피포트 어떡하지… 이런 생각 다 제쳐두고 그냥 지금 당장 이 남자랑 살림차리고 싶어서 죽겠는데 어쩌냐고… 자존심이고 뭐고 좋아 죽겠다고.

김여주는 어린 애 얼굴 박박 닦이듯이 김도영 앞머리 넘겨 젖히고 휴지로 얼굴 박박 닦아 주는데 김도영 속으로 ㅋㅋㅋㅋㅋ (🔒주하 씻기는 건 절대 내가 해야겠다) 이러고 있을 듯. 이미 살림차림.

?!!!!??

여주랑 살림차리는 생각하다 기습 뽀뽀당한 이 남자… 놀라서 토끼 눈 뜰 듯. 분식집 의자에 앉아 있는 김됴영 내려다 보는 김여주는 그게 너무 귀여움. 사실 토끼인 거 아냐? ㅇㅈㄹ 그래서 얼굴 이곳저곳에 계속 뽀뽀하다가 김도영이 손 뻗어서 여주 뒤통수 잡을 듯. 그 뒤로 뭐… 왐마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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