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이 그저 그 비뚤하고도 짧은 문장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또 읽었다. 글씨체는 아주 어린 아이의 것은 아니었다. 중학생… 즈음의 박찬열의 글씨체였던가. 백현은 지금보다 정리가 덜 되어 삐죽이 선이 튀어나간 알파벳들 위로 엄지손가락을 살짝 쓸어 보았다.

너는 얼마만큼의 고민과, 어느 정도의 확신과, 그리고 얼마나 깊은 마음으로 이 글자들을 써내려 갔을까. 어쩌면 백현 자신이 근래에 폭풍우처럼 밀어닥친 찬열과 저 사이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괴로워했을 것들을, 그 애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홀로 견뎌왔을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이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슬픔이나 힘듦이 짧은 시간 동안 몰아닥치는 것과 오랫동안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 중에 선택하라면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음을, 그래서 백현 자신과 찬열의 아픔은 애초에 비교 대상 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백현은 너무 늦게 깨달았다.

꽃밭을 찍은 건 아마 어른인 것 같았다. 사진을 찍은 구도로 미루어 보아 키가 좀 있는 것처럼 보였고 - 백현은 제 꽃밭을 이 정도 높이에서 내려다 보는 게 처음이었다 - 이 꽃밭은 백현이 중학생이 될 때 이미 없어졌었으니까. 사진은, 누군가 기념으로라도 남겨놓은 걸 언젠가부터 찬열이 가지고 있었던 것인가보다. 백현은 문득 이 꽃밭이 기억 속에 남아있을 때보다 더 초라하게 보인다고 느꼈다. 자신의 오랜 기억 속에 꽃들은 늘 싱싱하고 화려하고 향기를 풍기는,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사진 속에서의 꽃들은 초등학생이 키움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약간 삐뚜름하게 심어진 줄들과, 제 때 바람막이와 버팀대를 해 주지 않아 살짝 줄기가 꺾인 꽃도 보인다. 그래, 구석에 들에서 퍼 와 옮겨 심었는데 뿌리를 상하게 하는 바람에 한 포기만 살아남은 참나리가 있었다.

사진의 제일 가운데 앞 쪽에는 백현이 가장 좋아해서 가장 많이 심은 꽃이 있었다. 엄마가 아기천사를 생각하면서 키우라고 전해 줬던 씨앗 중 가장 먼저 꾸역꾸역 머리를 밀고 올라와 햇볕을 받고 자랐던 채송화들. 해가 뜨면 꽃잎도 반짝, 펼쳐졌다가 밤이 되면 조용히 잠이 들던 꽃. 그 때 백현이 하도 정성을 들여서 그런지 꽃가루가 많이 번져서 동네에 채송화가 꽤나 자라났었다.

 

“…유치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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