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별통보는, 파리 출장 중에 전화로 왔었다.



“선배... 저 힘들어요.”

“응. 알어...”



바쁜 와중에 온 전화라, 다정히 달래 줄 수 없었다.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오늘 또 선배 어머니 찾아오셨어요.”

“하... 또 협박하셨어? 죽겠다고?”

“네... 선배 파리에 있는 거 뻔히 아시면서 저한테 내 아들 내놓으라고. 그러셨어요.”



전화를 받으면서도 내 머릿속엔 산더미 같이 쌓인 업무들만이 꽉 차 있을 뿐 이었다. 이런 투정 받아줄 시간 없는데. 그녀가 평소에 이런 말을 자주 하는 건 아니지만, 나중에, 내가 좀 더 여유 있을 때 해주면 좋겠는데.



“가을양, 내가 나중에 한국 가서...”

“...그냥...”

“그냥 뭐?”



슬쩍 벽시계를 쳐다봤다. 오후 11시... 한국은 오전 7시. 아침이었다. 또 어머니한테 밤새 시달리다 나에게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헤어...... 질까요? 우리?”

“...가을양?”

“매일 어머니 전화로 밤새우는 것도 힘들어요. 오늘 선배 어머니가 귀에 차고 있던 귀걸이. 그거 하나 가격이, 제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고 있던 옷들 다 합친 거보다 더 비쌌거든요? 근데 그걸 그냥 던져버려요. 제 앞에서 보란 듯이.”



나의 말에서 별 감정이 없었듯이 그녀의 말에도 별 감정은 들어있지 않았다. 그저 질린다는 듯이 말할 뿐.



“저 선배랑 사귈 생각 하면서 각오했어요. 어느 정도의 수모, 잔디가 했던 고생, 어쩌면 그것보다 더 심한 것들. 다... 각오하고 생각했던 건데... 힘들어요. 너무.”

“그래서?”

“헤어지는 게 어쩌면 더...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우리. 선배도 더 이상 나 사랑하지 않고 있잖아요. 동정심과 미안함일 뿐인 거 알아요.”



그녀도 결국 느끼고 있던 거였다. 그동안 이어졌던 나의 무심함을... 변심을.



“예전에 선배가 했던 말이 맞았어요. 결국 우리 둘은 안될거란거. 전 바보같이 겪어보고 처절하게 아파봐야 깨닫네요. 선배와 제 사이의 차이가 얼마나 대단하고 큰 건지 이제야 보여요. 죄송해요. 먼저 헤어지잔 말 꺼내서.”



평생 들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말들을 들으면서도 화나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졌을 뿐. 그래. 그대가 원하는 게 그거면 헤어지자. 그게 더 편하다면 그러자.


눈물 한 방울 없는 이별. 반대하는 이 하나 없는 이별. 그녀에 대한 미련조차 없는 이별. 깨끗하고 깔끔했던... 이별이란 단어가 무색한 이별.





***





그녀의 이별통보 일주일 후. 나는 한국에 귀국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추억 저편에서 아련히 떠오르는 그녀에 관한 기억은 내 옆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던 그녀의 빈자리일 뿐이라 생각했다. 공항에 도착한 이후부터 계속 떠오르는 그녀의 기억은 그저 시간이 지나면 잊힐 거라고... 착각했었다. 늘 내 옆에 있던 그녀니깐, 그런데 갑자기 없으니깐 생각나는 건 당연한 거라고,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그 말만 믿으며 산지 두 달이 지났다.



F4녀석들을 만나면 떠오르는 건 가을양 뿐. 준표가 자랑하듯 잔디얘길 꺼내놓으면 떠오르는 가을양의 생각에 웃으며 맞장구 쳐줄 수가 없어서 급히 다른 얘길 꺼낸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어쩌다가 금잔디라도 만나게 되면 최대한 빨리 자리를 피했다. 금잔디는 늘 내 앞이면 보란 듯이, 들으라는 듯이 가을양 얘기를 꺼냈으니깐.


애당초 만약 한국에서 가을양을 만난다면 잔디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람처럼 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고, 어쩌다 가을양까지 다 같이 모이게 되면 온 신경이 가을양에게로 가서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잔디와, 혹은 다른 F4녀석들과 웃는 얼굴을 보며 화가 치민 적도 있었다. 그녀는 괜찮은데, 나와 헤어진 게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만 이렇게 힘들게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거야?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이젠 아예 가을양과 전혀 상관없는 일에도 가을양이 떠올라 죽을 맛이었다. 가을양과 한창 사귀고 있을 때도 이러진 않았다. 도자기를 빚을 때면 그 무엇도 떠오르지 않고 집중하던 나였는데, 그녀와 헤어지니 도자기를 빚을 때도 그녀 생각뿐이었다. 나의 손 안에서 모양을 잡아가는 도자기가 마치 그녀의 위로에 점차 안정을 찾아가던 내 모습과도 흡사해 보여서 어느 샌가 울고 있었고, 흐릿해진 시야 덕에 모양을 잡아가던 도자기는 금세 엉망이 되기도 했다.


가을양과 사귄 뒤 끊었던 클럽에도 자주 가서 다른 여자들도 만나보고, 독하디 독한 술을 미친 듯 들이켜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냥 그런 여자들과 얘기를 나누거나 입술을 부딪칠 때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자신이 타락하는 느낌에 곧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술은 마시면 마실수록 오히려 가을양에 대한 기억을 강하게 자극시켰다. 현실을 잊기 위해 마시는 술은 오히려 더더욱 나에게 현실을 인식 시켰다. 니가 이렇게 엉망이 되도 그녀는 오지 않아. 누군가가 나에게 말했다. 니가 이래봤자 그녀는 더 잘 먹고 잘 살 거야. 더 이상 널 위해 슬퍼하지 않을 거야. 니가 아무리 엉망이 되서 또 작업실 한 구석에서 찌그러져 잔대도 그녀가 와서 널 보살펴 주지 않는다고. 지독한 현실이었다. 그 현실이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그녀는 널 찾지 않아. 너는 또 지독하게 외로운 사람이 된 거야. 혼자라고.




그렇게 지독한 현실을 깨달아 버린 뒤 몇날며칠을 고열에 시달렸다. 친구들이 술병이라 놀려댔지만 나는 이 병의 병명을 알았다. 벌. 이 병은 벌이었다. 그녀에게 몇 년 동안이나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벌. 이런 며칠의 고열로 그 죄를 다 면할 순 없지만, 그래도 벌을 달게 받기 위해 약 하나 먹지 않은 채 고스란히 그 모든 병과 벌을 앓았다. 병문안 오겠다는 친구들의 발길도 막고 간호를 해주겠다는 어머니의 손길도 막았다. -사실 어머니가 누굴 간호할 처지는 아니셨다.― 혼자서 앓아야 했다. 지독하게 외로운 상태에서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이 죄를 받아야 했다.




“추가을.”




나지막이 그 이름을 불러 보았다. 가을. 가을양. 가을아. 추가을. 한 3일 동안 한여름의 햇살 마냥 뜨겁게 일었던 고열은 이제 미약하게 남아있었다. 가을이 온 건가. 가을아.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태어나서 그렇게 뜨거운 눈물은 처음 느낀 것 같다. 숨 쉴 때 내 입과 코를 통해 나오는 공기도 뜨거웠다. 그렇게 내 몸의 모든 열은 빠져나가고 가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제 가을을 찾을 거야. 가을을 찾아서, 다신 잃지 않을 거야.






***






약간의 미열이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없는 나는 하루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 될 수 없는 이 내안의 공허함은 그녀가 있어야 비로소 채워질 수 있었다. 소이정은 추가을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그 간단한 사실을 그렇게 아파서야 깨달아버렸다.


그녀가 언제 집에 들어올지 몰랐지만, 무작정 그녀의 집 앞에 왔다. 차 안에서 이렇게 무작정 기다리는 건, 또 오랜만이다. 기다린 지 대략 1시간 쯤 지났을 무렵 -기다린다는 게 전혀 지루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골목 끝 쪽에서 가을양이 걸어오고 있었다. 청바지에 하얀색 블라우스. 빨간 가디건에 예전부터 봐왔던 익숙한 검은색 가방. 귀에는 이어폰을 꽂은 채였다. 걸어 다니면서 음악 듣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약간은 느린 듯한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가는 그녀를 보며, 차에서 내려서,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걷다가, 마음이 급해져서 빨리 걷다가, 결국엔 뛰어버렸다. 며칠을 못 먹다가 뛰자니 어질했지만, 상관없었다. 그녀에게로 가는 길이었다. 어지럽든 가시밭길이든 어찌됐건 나는 그녀에게로 가야 했으니깐.


그녀는 이제 문 앞에 서서 열쇠를 찾는 중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불러볼까. 아파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모든 정신의 끈이 희미해져 있을 때 그저 입 밖으로 가을아, 하고 불렀던 것처럼, 그렇게 불러볼까, 아니면 그냥 손을 잡아 버릴까, 끌어 안아버릴까...




“가을아.”




하고 불러버렸다. 예전의 그 가을양이 아닌 가을아. 하고. 불러버렸다. 진심을 다해서. 가을아.




“가을아.”




내 부름에 멈칫하기만 하곤, 전혀 돌아보지 않아서 다시 한 번 불렀다. 가을아. 가을아. 돌아봐줘. 제발. 너 없인 못살겠어. 예전엔 영 찌질 하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망설이는 걸까? 그녀는 몸을 약하게 떨고 있었다. 예전에 나 때문에 힘든 기억이 다시 생각나서 저러는 걸까? 내 목소리마저도 싫은 걸까, 아니면...




“추가을 바보...”




그녀는 중얼 거렸다. 돌아보지 않은 채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곤 자신을 향한 책망의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제는 환청까지 들리냐...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그렇게 말하는데 그 모습이 너무... 미쳐도 단단히 미친 건 나였다. 너무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아 버렸으니깐. 두 번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는 머릿속으로 하는 계산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깨달았고, 그저 그녀를 향한 본능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환청아냐...”




그녀의 떨림이 멈췄다. 숨을 삼키는 소리도 들렸다.




“...이정...선배...?”

“응. 나야.”




나야. 내가 왔어, 너를 찾으러 와버렸어. 이젠 절대 바보처럼 놓치지 않을 거야.




“...선배...”




그녀의 목소리엔 물기가 서려 있었다. 감동, 원망? 다소 복잡한 감정을 지닌 목소리. 그 목소리가 지닌 감정이 정확히 뭐든 상관없었다. 나는 널 가져야해. 그래야 살 수 있어. 그 뿐이었다.




“바보처럼, 이제야 알았어. 너 없이 몇 달 살아보니깐 알겠더라. 내가 얼마나 약해빠진 인간이었는지. 난 너 없이 살 수 없어. 미안해. 이제야 알아서.”

“아팠다면서요...”




그녀를 끌어안은 내 팔을 감싸며 물었다. 아까 그 목소리보다 더 물기가 어린 채로.




“응. 벌 받았어. 너 상처받게 한 벌. 너 힘든 거 알면서 외면하고 방치한 벌.”

“이거 좀 놔봐요. 얼마나 아팠나 보게. 그 벌 얼마나 받았나 좀 봐요.”




그녀를 꼭 끌어안고 있던 내 팔을 풀며, 그녀가 뒤돌아 봤다. 내 얼굴을 나도 확신 할 수 없었다. 여러 날 동안 아프고 못 먹어서 좀 헬쓱해져 있을라나. 너 없어서 힘들었다 티내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본의 아니게 아팠다 시위하는 꼴이었다.




“볼살 빠진 거 봐...”




그녀가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녀의 손이 얼굴에 닿자 따스한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 했다. 그녀의 눈 한가득 들어있는 걱정. 그래. 이거였어. 내가 그리워 한건.


내 얼굴위에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늘 흙을 만지고 자주 씻다보니 차가운 내손과는 확연히 다르게 따스한 손. 오랜만이다. 손잡는 것도. 이렇게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도.


심지어는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도. 오랜만이었다. 얼굴을 가까이하고 있으니 그녀의 숨결이 코끝에 닿아 간지러웠다. 저 숨결을... 가져도 될까.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 했다. 그녀도 내 마음을 느낀 걸까? 어쩐지 아까와는 다른 긴장된 분위기. 더 진해진 듯 한 눈빛, 뜨거워진 듯 한 숨결, 유독 크게 들리는 숨소리.




오랜만인 만큼, 더 강하고 진할 수밖에 없었다. 부드럽고 싶었지만 거칠 수밖에 없었고, 달콤하고 싶었지만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키스는 좀 더 부드럽고 달콤하고 감미로운 키스인걸 알았지만, 그녀의 입술이 나의 입술에 닿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아프도록 그녀의 아랫입술을 빨고, 깨물다가,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가선 그녀의 혀를 감았다가 풀었다가, 장난을 칠 수 밖엔 없었다. 갈증. 갈증이란 단어로 표현해야 할까?


조금은 갑작스런 키스에 그녀의 손이 내 어깨를 치는 것이 느껴졌다. 거부의 표현. 하지만 놓지 않았다. 나중에 뺨을 한 대 얻어맞는다 해도, 정강이를 걷어 차인데도, 상관없었다. 지금 당장 나의 눈앞에 놓인 갈증을 해소해야 했으니깐.


키스가 계속되자, 나는 조금 힘을 빼서 그녀의 입술을 가만히 나의 입술로 눌렀다. 미안해. 약간은 속삭이기도 하면서.




“미안해. 키스뿐만 아니라, 나도 내 마음을 몰랐던 거. 미안해.”




여전히 입술을 마주한 채였다. 줄곧 내 어깨를 치던 그녀의 손은, 계속되는 키스에 내 옷 앞자락을 잡고 있었고, 미안하다는 나의 사과에 조금 망설이는 듯 싶더니, 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곤 자신의 입술을 내 귀로 옮겨와서 속삭여 주었다.




“나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나를 감싸 안는 행동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으니깐.




“나빠요. 진짜. 엄청 나쁘고 못되고 어리석고 바보같고.”

“응. 다 맞아.”




순순히 인정 할 수밖에 없는 말들 이었다.




“그런데...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요.”

“...?”

“아까 그 키스... 진짜 싫지만은 않았으니깐.”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자,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게 억울할 정도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언제 그렇게 대담해 진거야?”




질문은 했지만, 대답도 듣기 전에 그녀의 입술에 직행. 대답이 필요한 질문이 아니었으니깐. 아까 전엔 나의 완전히 일방적인 키스였다면, 이번엔 그녀도 열렬히 반응해 주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나의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고 숨소리도 방금 전 보다 훨씬 더 격렬해지고 있었다. 그동안의 그리움을, 애절함을 그리고... 새로이 얻은 깨달음을 담아서.




사랑해.


너 없이 난 살수가 없어. 견딜 수 없고, 버틸 수 없어. 단 하루도. 절대로.

그래서 널 갖겠다. 니가 내 안에서 힘들다 해도, 어쩔 수 없어.

너도 나 없이 살 수 없잖아. 그렇잖아. 그러니까... 널... 갖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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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소이정 후회물이라서 이정이 완전 개쓰레기처럼 표현했을까봐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덜 쓰레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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