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님과 같은 내용으로 글 - 그림 으로 작업한 합작입니다.

그림 버전은 이쪽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https://dhassd.postype.com/post/1254204




 완전히 최악이다. 타이밍이며 멘트까지 어느 하나 괜찮은 것이 없었다. 켄마에겐 갑작스러운 일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일생에 한 번 뿐인 열일곱 번째 생일을 곤란한 기억으로 만들어버리다니……. 최악이다. 나에 대한 배려인 건지 그저 피하고 싶은 건지 켄마는 그 날일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한다고 해서 마음까지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켄마를 좋아한다. 오랜 짝사랑의 매듭은 이렇게 숭덩 잘려나간 채 끝나는 걸까.



 “쿠로오, 쿠로오! 어디에 정신을 놓고 있는 거야? 113페이지 읽어보라니까.”



 초점을 놓고 있던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 나서야 현실로 돌아왔다. 문학 선생님이 교탁을 탁탁 내리쳤다. 수업 시간에 딴 생각하는 거니? 아이들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흩어지며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켄마에게 차인지 일주일, 나는 툭하면 그 날로 돌아가 내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 내쳐진 마음은 흙바닥을 뒹굴며 더러워졌어도 여전히 펄떡이며 숨 쉬고 있다. 괴롭고 수치스럽고 아프다고 소리친다. 나는 벌건 얼굴로 교과서를 읽었다. 지적받은 것이 창피해서 그런 줄 아는지 선생님이 작게 혀를 찼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동북 지방의 시골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꽤 자란 다음에야 기차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켄마의 표정이 어땠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당황스러워 눈을 동그랗게 떴던가, 아니면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흘겨봤던가. 그것도 아니면 켄마도 나처럼 얼굴을 붉혔던가?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늘어진 기억의 테이프는 닫히는 현관문 사이만 흐릿하게 보여준다. 나는 잠긴 문 앞에서 고개를 떨어뜨릴 뿐이었다.



* * *



 완전히 어색해졌다. 쿠로오에게 고백 받은 지 이 주. 매일 같이 가던 길을 요새는 혼자 걷는다. 부활동할 때를 제외하곤 얼굴 보기도 힘들다. 3학년과 다른 건물을 쓰는 탓에 우연히 마주칠 일도 없었다. 전부터 쿠로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망설이며 눈치를 보는 탓에 나까지 긴장하게 했었다. 사실 쿠로가 혹시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커져갈수록 객관적으로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평소처럼 친절한 것을 내게만 그런 거라 착각하고 있을까봐, 나 혼자 좋을 대로 생각했을까봐 무서웠다. 그러면서도 서로의 마음이 하나였음을 확인하는 순간을 기다렸었는데……. 막상 눈앞에 닥치니 바보같이 굴고 말았다.



‘켄마, 좋아해.’

‘엣.’



 두근거리는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가는 만화적인 표현이 결코 상상 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입을 열면 심장이 밖으로 뛰어 나올까봐 나는 현관에 서서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뒤늦게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이미 쿠로는 그 자리에 없었다. 분명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였겠지. 그날 나는 달아오른 얼굴이 도통 진정되질 않아 밤새 한숨도 자질 못했다. 다음날 쿠로는 등굣길에 나의 집 앞으로 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 다음 날도 오지 않았다.



 “샤프 좀 가만히 두면 안 될까?”

 “아……. 미안.”



 나도 모르게 샤프를 딸깍거리고 있었는지 옆자리에 앉은 아츠키가 주의를 줬다. 사념을 떨치기엔 게임만한 게 없는데 수업 시간에 할 수는 없으니 애꿎은 샤프만 괴롭힌다. 따각거리며 분필이 칠판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운동장에 모여 있던 학생들이 손바닥으로 머리를 가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른 흙바닥에 점점이 얼룩이 생겨나간다. 곧이어 쏴아아-하고 비가 쏟아졌다. 오늘 우산을 챙겨왔던가? 아, 사물함에 여분으로 두었던 우산이 있었지. 쿠로는 우산 가지고 왔을까?


 언젠가 집으로 가는 길에 갑작스런 비를 맞은 적이 있다. 지하철역을 나오니 부슬부슬 비는 내리고 쿠로와 나 둘 다 우산이 없었다. 우리처럼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가방을 머리위로 올리고 빗길을 뛰어갔다. 더 있다간 빗방울이 굵어질 것 같아서 빨리 뛰어가기로 결정했다. 휴대폰을 가방안쪽 깊숙이 찔러 넣고 급한 대로 져지를 뒤집어 쓴 우리는 숨이 차도록 달렸다.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 놓은 쿠로는 얼른 씻어야겠다고 웃으며 허둥지둥 뛰어갔다. 빗줄기는 실처럼 가늘었고 져지를 둘렀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 보니 티셔츠며 바지며 죄다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날 쿠로에게 우산을 쥐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내 옷이 젖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같이 비를 맞고 온 쿠로를 돌보지 못했다. 같이 비를 맞으면 같이 젖는 것은 당연한 건데 내 옷이 젖은 것만 신경 쓰느라 옆에 있는 사람이 젖었는지 돌아보지 못했다. 여전히 나는 이기적이었다. 내 감정, 내 마음 챙기기 급급했다. 나도 너를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워 먼저 용기를 낸 쿠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비가 들이치는 창문을 닫았다. 바로잡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고 누군가 말해주길 바랐다.



* * *


 지난달 켄마 생일에 서프라이즈 파티를 했던 걸 벌써 잊은 게 분명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우스꽝스러운 안경과 고깔모자를 쓴 배구부원들이 케이크를 들고 나를 둘러쌌다. 사소한 일들로 귀찮게 하던 것들이 오늘따라 대화도 피하는 모습이 수상쩍어서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체육관이 떠나가라 축하노래를 부르고 나서 촛불을 불었다. 저마다 한 마디씩 축하한다고 떠드는 부원들 틈에서 나는 켄마의 얼굴만 쫓았다.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켄마는 리에프가 등을 떠밀자 마지 못해 한다는 표정으로 축하를 했다. 그래도 내 생일인데 얼굴 좀 펴지……. 입 안이 쓰게 느껴진다. 케이크 한 판은 열댓 명이 달려들자 순식간에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켄마는 몸을 부대껴가며 먹는 현장에 끼고 싶지 않았는지 멀리 떨어져 보기만 했다.


 집에 가는 길이 같은데 눈에 띄지 않게 각자 가는 일은 쉽지 않다. 그리고 그 어려운 걸 켄마는 한 달째 해내고 있었다. 나는 내 생일쯤 되면 이걸 핑계로 어떻게든 다시 친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켄마를 너무 만만히 보고 있었나보다.


 침대에 누워 오늘 받은 축하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뒤늦게 메시지를 보낸 친구들도 많았다. 어디서 가져온 건지 요란한 이모티콘이나 기상천외한 사진을 보며 킥킥 웃었다. 그러나 수많은 발신인 목록 사이에 켄마의 이름은 없다. 나는 그것이 못내 아쉬워 휴대폰을 놓을 수가 없었다. 생일이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자  기대를 내려놓고 잠이나 자기로 했다. 그 때, 휴대폰이 깜빡였다. 발신인은 ‘켄마’. 자리에서 튕겨지듯 일어났다.



  [놀이터로 나와]



 잠옷 위에 패딩점퍼만 걸친 채 놀이터로 헐레벌떡 향했다. 가로등 몇 개가 불을 밝혔지만 놀이터는 인적 없이 썰렁했다. 혹시 여기가 아닌가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문자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10을 세고 뒤를 보면 내가 있을 거야]



 나는 켄마가 무얼 하려는지 짐작하지 않기로 했다. 뛰는 바람에 숨이 차 헐떡이면서도 소리 내어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눈까지 꼭 감았다. 10, 9, 8, 7, 6, 점점 빨라지는 것 같아 숨 한 번 고르고, 5, 4, 3, 2, 1. 눈꺼풀을 슬며시 들어 올리자 휴대폰이 다시 진동을 했다. 뒤를 돌아보려는데,



 “잠깐, 메시지 먼저 봐.”



 켄마가 나를 저지한다. 뛰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두근거리는 심장이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숨을 헐떡이며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나도 좋아해]



 반사적으로 몸을 틀자 켄마가 눈앞에 있다.



 “생일 축하해, 쿠로. 서프라이즈…라고 하기엔 부족한가?”


 몸 안에서 밖으로 누군가 세게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쿵쾅쿵쾅 박동이 느껴진다. 그제야 떠오른다. 켄마는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쾌함도 거부감도 아닌 당황스러움이 담뿍 묻어나는 표정을 하고 얼굴을 붉혔다. 켄마에게 한 발짝씩 천천히 다가갔다. 켄마는 멀어지지 않는다. 그 자리에 있다.


 “말로, 말로 해주면 안 돼?”


  바보같이 말을 더듬었다. 목소리 끝이 파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몰라.”

 “문자 읽어줘.”

 “싫어.”

 “생일이잖아~ 생일 선물이라 생각하고 해 줘.”

 “칫, …좋아해. 나도.”


 싫다고 해놓곤 결국엔 좋아한다고 소리 내어 말하는 켄마를 보며 깨닫는다. 켄마의 부정은 대부분 긍정이었다. 몇 년을 보고서도 나는 새롭게 켄마를 알아간다. 사랑을 고백하고 부끄러워 눈 마주치지 못하는 켄마의 얼굴을 머릿속에 담는다. 앞으로도 기억의 앨범에 새로운 사진들을 붙여나가겠지. 우리는 팔을 벌린다. 서로의 몸을 힘껏 끌어안는다. 완벽하게 행복한 18번째 생일이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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