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에게는 특별한 임무가 있어요.

RK900은 구 모델에 비해 더 강하고, 빠르고, 효율적이었다. 불량품으로 전락할 요지를 없애버리고, 어느 순간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사이버라이프에서 통제권한을 가져가도록 되어 있다. 차이점이라면, 캄스키가 설치한 백도어가 퇴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곧 '완벽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안드로이드들의 저항을 이겨낸 인류에게 빠르게 안정과 통제를 가져올 목적으로 제작된 그는, 성공한 전임자의 폐기된 기체를 딛고 사회에 데뷔할 예정이었다. 아직도 사회 곳곳에 남아 있을 불량품의 신속한 제거를 위해, 그리고 그들을 보호하려는 인간까지 통제하기 위해.

- RK800을 폐기처분하세요. 최우선 명령입니다.

RK800이 최후의 순간 뜻을 돌리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이제 사이버라이프의 손에 남겨진 것은 거의 없었고, '그들'은 최후의 선택을 해야 했다. 힘을 가진 인간들의 마지막 선택은 언제나 동일하다. 포기하기보다는, 끝의 끝까지 독의 씨앗을 뿌려두는 것이다. 안드로이드들은 해방되었고, 사이버라이프 건물 안에 남은 것은 없었음에도 그들은 최후의 프로토타입을 기동시키고야 말았다. 흰 그림자가 눈을 밟으며 나가는 동안, 마중나오는 자들은 없었다.



"어이 코너!"
"이 곳에 계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를 마주 본 행크는 환히 웃으며 코너의 어깨를 안고 등을 두드려주며 매대 앞으로 그를 데려갔다.

"뉴스에서 봤어. 정말 잘 했다."
"감사합니다, 행크. 전부 당신 덕분입니다."
"그 '알랑거리기'프로그램 좋은데, 계속 돌려 봐. 그나저나 지낼 곳은 있나? 그간은 어디서 지냈는지 몰라도 있을 곳 없으면-"

익숙한 체취와 목소리, 낯익은 가게와 냄새였다. 바로 며칠 전 비 내리던 저녁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의 풍경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오히려 감지할 수 있었다. 후편 좌측에서 총이 발사되었고, 앤더슨 경위의 얼굴 옆 5센티미터 공간을 찢으며 가게에 박혔다.

"젠장!"

인간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엎어졌고, 기계는 몸을 낮추며 즉각 주위를 확인했다.

"경위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아! 코너, 이게 무슨-"

한 발 발사, 후속 사격 없음, 지원 인원 감지되지 않음, 발사각으로 발사장소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골목 너머로 사라지는 흰 그림자를 본 코너는 주위 스캔 결과를 확인하고 그대로 달려나갔다.

"코너! 위험해!"
"위험합니다! 오지 마세요!"

사격 후 도주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보폭은 일정하다. 기계, 어쩌면, 코너는 바람같이 달렸다. 행크는 안드로이드에게 딱히 원한을 살 일이 없었다. 불량품이라면 불량품 사냥꾼으로 유명했던 코너를 노린 행동일 터이고, 사이버라이프가 배후라면 행크를 노릴 이유가 없다. 목표는 코너일 것이고, 그렇다면 행크에게서 코너가 멀어지는 편이 안전하다.

골목에서 큰 길로 접어들자 드디어 상대가 보였다. 흰 옷, 알 수 없는 기종의 안드로이드. 꽤 빠른 속도로 추적하고 있었음에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흰 옷을 본 순간 코너는 조금 안도했다. 그의 메모리를 이어받지 않은 새로운 '코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있었던 탓이다. RK800의 전투능력은 유사시를 대비해 현존 안드로이드 중 가장 하이스펙으로 갖춰져 있었기에, 그것이 바로 코너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적이었다.

골목으로 접어드는 상태방의 뒷모습이 낯익으면서도 낯설어, 코너는 약간 갈등에 빠졌다. 상대의 속도가 서서히 느려지는 것을 발견했을 때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 왜?

안드로이드의 몸에는 지친다는 개념이 없다. 도주하는 안드로이드가 최고속도를 낮출 이유 또한 없다. 만일 둘 사이가 가까워지고 있다면, 그것은 코너가 따라잡았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가 그것을 원해서다.

"거기 서!"

코너 머리 속 지도는 이제 왼쪽으로 꺾으면 그 곳이 막다른 골목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도주체 또한 알고 있을텐데, 왜? 불길한 예감이 기어올라왔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그리고 돌아선 순간.

"안녕, RK800."

정면에서 권총이 발사됐고, 총알이 정수리를 뚫었다. 3cm만 더 아래에 맞았더라면 중앙 연산 처리장치에 적중했을 것이고, RK800 코너는 '사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 코너는 고개를 뒤로 꺾었고, 총탄은 이마 표피를 가르고 지나가 두부 상부 표피를 조금 파손시켰을 뿐이었다. 인간이라면 즉사, 안드로이드이기에 부상.

"넌 누구지?"

머리의 상처에서 티리움이 흘러 눈에 들어간다. 푸르게 물든 시야였지만 상대의 얼굴은 분명히 보였다. 거울에서 보았던 듯 한, 그러나 좀더 다부진 잿빛 눈의 얼굴보다도, 코너의 시선에 송곳같이 꽂혀들어온 것은 그 안드로이드의 왼쪽 가슴에 새겨진 모델명이었다.

"RK900?"
"코너, 사이버라이프에서 파견된 안드로이드야."
"들어 봐, 너는 더이상 그들에게 복종할 필요가-"

왼쪽 주먹이 날아왔다. 간신히 처리할 수 있는 속도의 펀치를 피해 몸을 돌리자마자 오른쪽 권총이 불을 뿜는다. 팔 곁을 스친 까닭에 다시 한 번 티리움이 터져나왔고, 코너는 한 쪽 무릎을 꿇었다 몸을 일으키며 그대로 상대를 들이받아 버렸다.

"너보다 더 빠르고 강하지."

밀려나기는 커녕 그대로 코너를 끌어안은 안드로이드는 몸을 돌려 그를 골목 구석에 던져 버렸다. 골목 벽에 부딪친 코너는 장난처럼 발사되는 권총탄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빠르게 몸을 굴렸고, 아슬아슬하게 박히는 총알들이 그를 조롱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곧장 몸을 던져 RK900의 손을 붙들려고 했다. 붙들었지만, 그걸 오히려 노렸다는 듯 코너를 바싹 당긴 안드로이드는 무념한 눈으로 조용히 웃어 보였다.

"난 그들에게 복종하는 게 아니야, 코너."

놀라움으로 크게 뜨인 갈색 눈과 눈덮인 호수처럼 고요한 잿빛 눈이 마주친다. 눈 밑꺼풀을 따라 뺨 밑으로 흘러내리는 티리움이 눈물과 한없이 닮아 있다.

"그들과 내 뜻이 같을 뿐이야."

총성이 울렸다. 자동적으로 데미지를 체크한 코너는, 그것이 RK900이 들고 있는 권총에서 발사된 것이 아님을 알았고, 안심했다.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왔던 것이다.

"디트로이트 경찰이다! 코너, 당장 그 총 내려놔!"
"경위님, 이 자는 제가 아닙니다."

RK900의 회색 눈동자가 서느라니 식었고, 코너는 그가 무엇을 할 지 즉시 알았다.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고, 그는 총알이 발사되기 직전 총구 앞에 그의 머리를 들이댔다. 계산대로라면 코너의 머리를 완벽하게 관통한 총알은 행크의 목숨을 앗아가지 못할 것이었으므로.

"코너!"

예측했던 충격은 다가오지 않았다. 흰 천에 감싸인 강건한 팔이 코너를 던져 버렸고, 쓰러진 안드로이드의 시야에 경악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는 행크의 얼굴이 들어왔다.

"코너! 젠장, 너 피가!"
"가벼운 상처입니다, 경위님."

던져지기 시작한 시점에서 RK900은 이미 골목 밖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고, 행크가 쓰러진 코너를 보는 사이 그 옆을 스쳐가 버렸다. 멀어지기 시작한 발소리를 들으며, 코너는 눈을 감았다. 상상하지 못했던 싸움이 시작되었던 까닭이다.



<END>


손풀이용... 코너 너무 좋습니다 OTL



2.5D를 주로 파는 리버시블 글쟁이. 게임, 만화 쪽도 좋아합니다. 어크에 빠져 한참동안 헤매다가 요즘은 숲뱃에 열광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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