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키 기분을 맞춰줘야 해. 새벽 운동 전 항상 쳐들어가 두들겨 깨우며 시비를 걸던 것을 오늘은 건너뛰기로 한다. 파트너는 내장이 얼어버릴 날씨에 밖에서 뛰고 있는데 너만 어떻게 안락한 숙면을 취할 수 있어? 하는 심술이 터져서 시작한 일인데 의외로 로키가-잠귀가 어두운지 귀찮은 건지-이불을 돌돌 말고 끙끙대는 온순한 반응이라 귀여워서 꼬박꼬박 갔었다. 반대의 경우였으면 타워 밖으로 냅다 내던졌을 것이다.

오늘은 또 뭐라고 저 자식의 기분을 맞춰주나 고민하며 나와 보니 간밤에 폭설이 내렸다. 순찰루트는 눈이 치워져 있지만 운동 루트는 완전히 눈밭이다. 발을 디뎌보니 무릎까지 푹 빠진다. 오늘은 훈련 못하겠네! 들어가서 잠이나 자야겠다. 발을 빼고 신나게 뛰어 들어가다 기동대 교관과 딱 마주쳐 결국 질질 끌려나온다. 이런 곳에서 훈련하면 죽는다고 소리를 질러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앞에서 다 헤쳐 놓은 눈길을 뛰는데도 독보적으로 나자빠지는 모습을 보며 오랜만에 교관이 마른세수를 한다.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제가 지금 몸개그를 해봐야 뭐가 남겠어요. 기껏해야 멍든 몸과 근육통이 전부일 텐데. 반은 구르면서 타워를 돌고나니 교관이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린 한숨을 쉬며 한 바퀴 더!를 외친다. 아, 그런 게 어디 있어! 항의해봤지만 역시 씨알도 먹히지 않아 혼자 달리기를 시작한다.

다 돌고 왔더니 모든 훈련이 끝나 절반도 넘게 들어가 버렸다. 남은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스트레칭을 더 하거나 눈싸움을 한다. 헤이, 히어로! 눈뭉치가 날아온다.

천수관음 그래픽을 넣으면 딱 좋을 모양새로 한 번에 눈덩이를 수십 개씩 던지다 거센 항의를 받고 눈 속에 머리만 내놓은 채 파묻혔다. 신성한 눈싸움에 초능력을 사용하다니, 비겁하다! 같은 소리를 하며 다들 신나게 도망간다.

염력으로 튀어나가 지구를 침공한 대괴수같은 모습을 연출할까 했는데-시원하다. 눈길에 고군분투하고 눈싸움 하느라 뛰면서 오른 열을 적당히 식혀주는 지금이 아주 딱 좋다. 조금만 더 있다가 나가야지. 안락하게 파묻힌 상황을 즐기다 얼굴도 한 번만 박아볼까, 아무도 없는데. 고민은 찰나. 세상 공손한 사람이 되어 고개를 팍 숙여 눈에 푹 박는다. 엄청 시원해!

“……그러면 재미있나?”

정말 깜짝 놀라 얼굴을 팍 든다. 아이고, 뒷목이야. 로키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날 내려다본다. 너는 왜 이런 타이밍에 갑자기 오고 난리니.

“재미있어. 해볼래?”

아무렇지 않은 척. 짐짓 태연을 가장하며 올려다본다. 로키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힌다.

“눈덩이에 머리를 잘못 맞은 거야?”

“……농담이야.”

“빨리 일어나. 괴상해.”

괴상하다니. 염력으로 눈을 파헤친다. 얼굴에 묻어있는 눈도 툭툭 털어낸다. 엉거주춤 일어나니 갑자기 바람이 엄청 차게 느껴진다.

“허약한 개미 주제에 이게 뭐하는 짓이야.”

“어우, 어우우. 추워. 빨리 가자.”

“순간이동 하면 되잖아.”

“훈련 전후로는 안 하기로 했어.”

몸이 절로 떨린다. 로키가 몹시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더니 손을 가볍게 휘둘러 실내복 차림이던 자기 옷을 갈아입는다. 뭐야, 내가 춥다는데 왜 네가 옷을 갈아입어. 황급히 걸음을 옮기려다 또 휘청하는 걸 턱 잡아 세운 로키가 제 망토를 어깨에서 툭툭 떼어낸다. 그러더니 그 망토를 쥔 손이 내 앞으로 쑥 다가온다.

“뭐, 뭐.”

“둘러.”

아, 그 말이었구나. 나는 또 이걸로 날 확 잡아 묶어버리려는 줄 알았지. 허풍 조금 보태 이불 사이즈인 그의 망토를 쓰개치마처럼 머리부터 뒤집어쓴다.

가만히 지켜보던 로키가 뒷짐 진 자세 그대로 휘적휘적 걸어간다. 쟤는 진짜 추위 안타네. 부지런히 그 뒤를 따라 가다가 다리를 휘감는 로키의 망토와 미끄러운 길의 방해로 또 나자빠진다. 이 빌어먹을, 당장 이 신발 내다 버려야지.

-아이고…….

“일부러 그러는 거야?”

“아냐.”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엉거주춤 일어선다. 아이고, 죽겠네. 바람이 한 번 신나게 불어 젖히니 거창하게 재채기가 터진다. 그가 얼른 손을 놓는다. 이 자식이.

“나 간다.”

“같이 가.”

발목까지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참 잘도 걸어간다. 덕분에 빗자루로 쓸어낸 것처럼 길이 대강 뚫린다. 그 뒤를 조심조심 따라 걷다가 또 한 번 비틀하고, 뒷짐을 진 로키의 손을 냅다 잡는다. 늘 그렇듯 놀라지 않는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잠자코 제 갈 길을 간다.

그의 손을 잡고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른다. 시선은 바닥에 고정. 조심하는 주의력이 무색하게도 한 번 더 죽 미끄러지니, 이번엔 로키가 내 손을 힘주어 잡아 지탱한다.

“진짜 개미처럼 다리가 여섯 개가 되어야 제대로 걸을 수 있는 거야?”

“신발이 미끄러워서 그래, 이 자식아.”

“또 넘어지면 두고 가겠어.”

“대체 왜 온 거야? 너 새벽에 일어나는 거 싫어하잖아. 내가 또 놀랐나?”

“……네가 비명을 질렀잖아.”

내가 비명을 질러서 왔다고? 새삼 그 뒤통수를 바라본다. 눈싸움 하면서 다 같이 신나게 소리를 질렀지. 그 중에 내 소리를 알아들었어? 그보다도 네 방에서 그게 들려?

“공격당하는 줄 알고?”

“실제로 파묻혀 있었잖아.”

“너는 날 너무 약하게 봐.”

“실제로 약하잖아.”

아니거든. 나 엄청 세거든. 힘만 너한테 좀 밀리지.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뒤통수에 시선을 주는 것도 잠시. 또 넘어지면 놓고 간다던 말이 떠올라 다시 시선을 떨군다. 저 자식은 진짜 두고 가고도 남아. 주의 깊게 디딜 곳을 확인하고, 내 발을 보고. 로키가 낸 길에 큼직하게 남은 그의 발자국을 따라 밟는다. 다리도 길고 발도 크다. 휘적휘적 걷는 그의 보폭에 맞춰 징검다리를 건너듯 덩달아 최대한 다리를 쭉 뻗는다. 그렇게 따라 가다보니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닫는다. 로키의 보폭이 좁아졌네.

손을 잡고 있어 내가 헤매는 게 느껴졌나. 속도도 느려지고 보폭도 좁아지고. 간간히 삐끗하는 때에는 어김없이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작고 약한 미드가르드인. 그에게 박힌 내 이미지가 얼마나 더 이어질지 모르겠다. 그래도 미취학 아동 이후로 비명을 지른다고 누가 헐레벌떡 달려와 준 건 처음이라 조금 흐뭇하다. 짜식. 섬세한 면이 있다니까. 성질이 지랄맞아서 그렇지.

“헥-취!”

로키가 재빨리 물러났다가 코를 훌쩍이는 내게 잡혀있는 제 망토를 안타깝게 바라본다. 그 뒤를 졸래졸래 따라 들어온 타워 1층 로비. 출근하는 직원들 틈에서 독보적으로 괴상한 몰골로 등장하니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다. 평소 혼자 돌아갈 때에는 인사를 건네던 사람들도 내 재채기에 표정이 구겨진 로키를 보고는 조용히 눈짓으로만 인사하고 재빨리 도망친다.

갑자기 따뜻한 곳에 들어왔더니 이가 절로 더더덕 마주칠 만큼 춥다. 아오, 다음에 또 눈에 파묻히게 되면 까불지 말고 잽싸게 나와야지. 망토 앞섶을 여미며 황급히 발을 딛자마자 쭉 미끄러진다. 매끄러운 타일 바닥에 정말 제대로 미끄러져 거의 붕 뜬 몸을 로키가 턱 받아낸다.

“널 개미로 변신시켜 줄 수도 있어.”

“고맙지만 됐어.”

로키가 잡아준 상태에서 다시 발을 내려놓지만 여지없이 미끄러진다. 얘 이렇게나 미끄러운 신발이었어? 당장 내다버려야지. 짜증스레 발을 빼려는데 로키가 종아리를 잡아 올려 신발 바닥을 확인한다. 작게 혀를 차는 소리.

“야, 나 넘어진다!”

“잡아.”

턱으로 제 어깨를 슬쩍 가리킨 로키가 한 손은 다리를 잡고, 다른 손을 신발 바닥 가까이 가져간다. 작게 손짓하니 홈마다 꽉 들어차 단단히 얼어붙은 눈이 쑥 빠져나온다. 허공에 얼음 발자국이 생긴 것 같아. 우와, 감탄하는 내 반응을 본체만체하며 다른 쪽 신발 바닥에서도 얼음을 꺼내준다.

“너 별 마법을 다 쓰는구나.”

이제 안 미끄러워! 제자리 뛰기로 신발 바닥이 무사함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다.

“왜.”

“너 입술이 파래.”

다시 어더덕, 이가 부딪힌다. 진짜 추워. 그가 손을 뻗어 턱 아래 휘감고 있는 망토를 쭉 잡아 올린다. 간신히 눈만 나온 꼴이 잠입하는 군인 같은 모양새다. 머리 위로 덮어 쓴 망토를 대강 툭툭 잡아당기는 게 모양을 잡아주나 싶었는데, 잠깐 그 자락을 꾹 쥐니 망토가 따뜻해진다.

“와우.”

“가자.”

성큼성큼 앞서가는 로키를 황급히 쫓아간다. 야, 다리 긴 거 자랑하냐! 라고 하고 싶지만 콘서트 좌석에 앉기 전까지 무조건 잘 보여야 한다. 녹색 망토에 휘감긴 채 내달리는 내 모습에 직원들이 작게 웃으며 인사한다. 모든 인사를 일단 넘기고 로키를 향해 돌진한다.

“같이 가, 왕자님!”

왕자님? 작은 술렁임이 이는 게 느껴진다. 쟤 지금 뭐래? 시선이 처음에는 나를 향하다가 왕자님 소리를 들은 로키에게로 향한다. 훌륭한 피지컬에 신비로운 의상, 잘생긴 얼굴. 거기다 방금 전까지 몸개그를 하던 지구인을 부축하고 마법으로 신발 바닥 뒤처리까지 해 준-개미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말은 못 들었을 거다-자상한 모습. 입만 다물면 아름다운 외계 왕자님인 로키란 말이다, 미드가르드인들아! 내 파트너 껍데기 하나만큼은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다 이거야!

자, 어떠냐 로키야. 기본적으로 빌런인 너를 두려워하면서도 방금 전의 상황과 내 대사와 네 외모가 조화를 이루어 잔잔히 호감이 깔린 시선이 너에게 집중되는 이 상황이! 우주 제일가는 관종인 너를 만족시킬 만하니?

로키의 팔을 끌어안고 매달린다. 달려가 팔 하나에 턱 매달리는데도 힘 좋은 외계인님은 휘청하지도 않고 담담히 고개를 돌려 날 내려다본다. 그래, 이거야! 폭발해라, 로키 옆선 포텐아!

“왕자님, 아까 했던 말 진짜야?”

“어떤 말?”

“개미로 만든다는 말.”

“당연히 진짜지. 보여줘?”

로키의 얼굴에 악당 미소가 번진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지. 이 악당 미소가 옆에서 보면 정면에 비해 그리 사악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기다 지금 키가 저보다 작은 나를 바라보느라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좀 더 부드러워 보이지. 내가 로키를 이렇게나 파악하고 있었다니 나도 놀랍다. 과연 그를 향한 시선이 한층 더 후끈해지는 게 느껴진다. 역시 소곤소곤 말을 거니 무성영화같은 효과가 나는 모양이다.

“나중에. 지금 다들 너를 엄청 열렬히 바라보고 있는데, 개미로 변해버리면 막아낼 수가 없잖아?”

“무엇을 막아?”

“내 파트너를 탐내는 사람들.”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짓던 로키가 눈만 데굴데굴 굴려 좌우를 살핀다. 곧 자신을 향한 시선을 기가 막히게 포착한 우주대관종의 얼굴에 약간 뻐기는 미소가 슬쩍 걸린다.

“흠.”

“다 네가 너무 잘생긴 탓이라니까. 아, 정말 파트너 사수하기 힘들다.”

“맞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때리고 싶어. 웃는 얼굴에 경련이 일 것 같지만 간신히 미소를 유지한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몰라. 얼굴도 잘생겼는데 마음이 더 너그럽다는 걸.”

로키의 얼굴이 내게 더 가까이 다가온다. 거리와 비례해 더 진해지는 미소.

“노력은 가상하지만 안 통해.”

“하하……무슨 소리인지…….”

“어딜 슬쩍 넘어가려고.”

“나는 그저 진심을…….”

“그럴 리가.”

빌어먹을. 너무 대놓고 말했나. 씨알도 안 먹힌다는 듯 작게 고개를 젓는 그의 눈썹이 안쓰럽다는 듯 쳐진다. 아……. 좀 속아줘라, 이 자식아. 천 년을 살았다면서 이 인간의 간절한 소망을 듣고도 어쩜 그렇게 철벽을 칠 수가 있냐.

“로키-”

“안 돼.”

아! 오늘 진짜 시도하는 것마다 하나도 안 먹히냐! 아예 팔을 잡은 자세 그대로 다리에 힘을 빼고 온 몸을 던져 매달린다. 물론 한 손으로 나를 인형 뽑기를 하듯 드는 녀석이라 꿈쩍도 않는다. 다만 걷는데 거슬리기는 하는지 한 발 내딛으려다 팔을 위로 쭉 들어올린다. 성인 여성을 한 팔에 매달고도 빈손인 양 가볍게 들어 올리는 모습에 관심 없던 사람들의 이목까지 집중된다. 아예 그 팔에 매달려 숫제 발버둥을 치며 떼쓰는 나를 보는 표정이 꼭 어릴 때 마트에서 떼쓰던 때 마주한 엄마 같다. 잠시 두고 보던 그가 땅에 발이 닿도록 내려준다. 싫다, 이 자식아. 내가 이렇게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었는데 그냥 못이기는 척 넘어가 줘라 좀! 전혀 포기할 생각이 없는 나를 가볍게 흘겨보더니 언젠가처럼 옆구리에 덥석 끼고 성큼성큼 걸어간다.

“시도는 신선했어.”

“노력을 봐서 그냥 넘어가 줘.”

“다음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벌써 기대되네.”

“이렇게 물 흐르듯 진행되기가 쉬운 줄 알아?”

“마지막이 성급했어. 잘 보완해 봐.”

춥다고 망토로 잘 싸매고 있던 탓에 옆구리에 끼어 덜렁 들리니 발버둥도 양껏 치지 못하겠다. 꿈틀대며 불만을 표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 결국 포기하고 축 늘어져 한국어로 주절주절 욕을 하는데 그의 웃음소리가 작게 들린다.

네가 소리 내어 웃기도 다 하고.

그의 다른 쪽 손이 망토를 쓰고 있는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다. 예전에 시골에서 키우던 강아지한테 아이구, 내 새끼 하면서 머리 쓰다듬던 거랑 똑같네. 즉석에서 만든 작전 치고 엄청 훌륭했는데 완전히 망했다. 저걸 무슨 수로 구워삶는담.


Shearose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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