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가 잘못되었다. 분명 비틀려 있다. 도하는 그런 생각 말고는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제 눈이 잘못된 것이라고 이번만큼은 정말 눈을 감았다 뜨면 꿈이라고, 그렇게 누군가가 말해주기를 빌었지만 아무리 그래보았자 소용없는 짓이었다. 더운 공기가 단번에 달아나고 한기가 훅 끼쳤다. 등골이 찌르르 울리는 것은 현실감을 무엇보다도 강하게 가져다주었다.

도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더 절망적이었다. 방금 전까지 모른 척 하겠다던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단지 한 사람을 구해내야만 하는 필사적인 인간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도하는 고민하였다. 이 종이를 없애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깐의 시간을 끌 수는 있겠지만, 그는 곧 시우의 얼굴을 알게 된다. 잠시의 찰나를 벌고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실은 이렇게 고민하고 있을 시간조차 없었다. 내관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데 이렇게 우두커니 앉아 있어봤자 명만 줄이는 꼴이었다. 움직이자. 도하는 자신에게 그렇게 명하였다. 몸은 그 말에 반응이라도 하였는지 굳어 있던 것을 풀어내고는 천천히 제 감각을 되찾았다.

종이를 줍고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소맷자락에 넣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감쪽같다 느껴졌다. 이대로 화란궁으로 돌아만 간다면 정말 아무 일 없이 틈새를 벌일 수 있었다. 그 다음은 돌아가서 생각해도 된다. 도하는 뻣뻣이 발을 내딛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내딛을 때 마다 속도는 점점 제 자리를 찾아갔고, 이내 월야당을 향할 때보다 더 빨라졌다. 정신없이 그렇게 한참을 뛰듯 걷고서 처소에 도착했을 때는 온몸에 기운이 다 빠져 다리에 힘이 풀렸다. 풀썩. 바닥에 넘어질 뻔한 것을 이상궁이 붙잡았다.

“마마, 무슨 일이십니까. 어찌 혼자이십니까? 나루가 모시지 않은 겝니까?”

도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리고 아, 하고 소리를 내었다. 그러고 보니 나루를 두고 왔다. 어디 주변에 있을 텐데. 그러자 머리 뒤 쪽이 서늘하였다. 나루는 그 근처에서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나루를 봤다면 어찌 되는 것인가. 그 아이는 분명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들어도 그녀는 입을 다물 사람이었다. 궁 안에서 오래토록 생활한 아이이니 제 목숨줄이 붙기 위해서는 어찌 해야 할지 알 터였다. 그러나 나루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죽일 명분은 충분하였다. 그들은 그럴 수 있는 자들이다. 황자를 죽이는 것은 어려워도 나인 하나의 목숨을 뺏는 것은 너무도 가볍게 할 수 있는 이들이란 말이었다.

다행인 점은 나루가 그 소리를 들었다면 먼저 제 몸을 숨겼을 것이란 점이었다. 그 정도 눈치가 없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녀는 숨어있다. 그 어딘가에. 어쩌면 저 멀리 도망갔을 지도 모른다. 이 넓은 궁에서 도하는 나루를 찾아야만 하였다. 그녀를 위해서 뿐 아니라, 유일하게 전부를 알 수 있는 자였고 제가 심부름을 시킬 수 있는 아이였다. 시우를 위해서든 그녀를 위해서든 지금은 나루를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나루, 나루를 찾아 오거라. 당장!”

“예, 마마.”

이상궁은 정말로 당황하였다. 자신의 상전은 저렇게 급히 명령을 하지 않는다. 저런 표정을 지을 정도로 위기에 처한 적도 없었다. 늘 평화로운 일상에 마치 폭약하나가 던져 진 마냥 그의 감정이 폭풍같이 휘몰아쳤다. 정말로 위험한 것이 분명하다.

“조용히 찾아라. 절대 다른 궁에서,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 화란궁의 나인 그 외에 누구도 나루가 지금 화란궁에 없었음을 알아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다. 알아들었느냐?”

“예, 알아들었습니다. 마마.”

이상궁은 나인들을 불러 세웠다. 그녀들은 하던 일을 전부 멈추고 줄지어 섰다. 도하는 수를 세었다. 고작해야 넷이었다. 나루를 포함해 다섯이건만, 오늘은 그 빈자리가 유독 컸다. 저들로 찾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다른 궁은 믿을 수 없다. 어쨌든 저들이 저의 수족이고 더 크게 일을 벌려 놓으면 분명 누군가는 눈치를 채고서 그녀들은 눈을 깜빡이며 상궁마마님이 무슨 소리를 하려고 불러 모았나 싶어 눈을 말똥거렸다. 이상궁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서 그들을 둘러보다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조용히 나루를 찾아 오거라. 어디 있을지는 모른다. 온 궁을 다 뒤지되 다른 곳에서 알게 해서는 안 될 것이야.”

“상궁마마님 저희가 어찌 알고 이 넓은 궁을 뒤집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상궁은 슬쩍 뒤로 돌아 도하의 대답을 기다렸다.

“월야당, 그 근처를 중심으로 샅샅이 뒤져 보거라.”

“예? 나루가 거기는 왜 갔단 말입니까?”

“내가 갔다. 그 아이는 그 주변에 있을 것이다.”

저 상전을 진짜. 이상궁은 속으로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말을 꾹 눌렀다. 이런 소리를 하려자니 자신의 목숨도 하나였고 무엇보다도 도하의 표정은 정말로 심상치 않았다. 타박과 추궁이야 나중에 하더라도 일단 그의 명부터 받들고 봐야 했다. 그리고 정말로 나루의 신변이 걱정되었다. 절대 길을 잃을 아이가 아닌데. 분명 도하가 있던 곳에 없는 것을 알면 달려와서 큰 일이 났다고 난리를 피우고도 남을 아이였다. 정말 무언가 일이 나긴 났구나 싶었다.

나인들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도하는 그저 자신의 침소에 멍하니 앉아, 초조히 소식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마마, 나루가 왔습니다. 상태가 영 좋지 않은 것이 무슨 일이 있던 모양인데...”

“들라 하거라.”

“그 지금은 정말로.”

“들라 하거라.”

도하는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였다. 세 번 반복하게 하지는 말라는 눈빛이었다. 어린 아이가 저렇게 사나운 눈빛을 할 수 있는 것을 보면 왕족은 왕족이구나 싶기도 하였다. 이상궁은 한숨을 쉬었다. 나루는 정말로 무서운 것을 본 아이마냥 벌벌 떨고 있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여 설이에게 끌려왔다. 지금 도하가 나루를 부르는 것은 필시 이유가 있어서임을 알지만,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나루를 돌봐온 입장에서 지금은 푹 쉬게 해주고 싶은 것이 제 마음이었지만 어디 상전의 명을 거절할 수 있나. 그녀는 께름칙함을 무릅쓰고 나루를 불러들여야만 하였다.

“소, 소녀 마...마님의 며, 명을 드...”

“되었다. 앉거라. 이상궁은 나가보고 아무도 이 근처에 들지 말거라. 혹여나 엿들었다가는 경을 칠 것이다. 내가 인기척 하나 눈치 채지 못할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하지?”

“예, 마마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이상궁은 정말로 물러났다. 아무런 항의도 없었다. 그녀는 장지문을 나서자말자 나인들을 전부 쫓아냈다. 그들은 벌서는 꼬마들 마냥 뒤뜰에 옹기종기 모여 섰다. 이들이 자유로워 지려면 나루가 도하의 방에서 나와 얼굴을 보여야만 하였다.

“들었느냐.”

“무, 무엇을...”

“듣지 못하였다는 거짓은 일삼지 말거라. 너도 분명 ‘황자’라는 것을 듣지 않았느냐.”

그녀는 정말로 당장이라도 경기를 일으킬 것만 같았다. 그것은 확실히 열 살짜리 소녀에게도 감당키 어려운 소리였다. 왕자인 자신조차도 그 말을 듣고 심장이 한참을 올라갔다 솟구친 것을 그저 평범한 나인에게 감당하라고 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였다.

“소녀,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리 하게 해주십시오.”

“아니, 너는 보았고 들었고 알았느니라. 그래야만 한다. 몰라도 알아야 한다.”

나루는 정말 당장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려버릴 것 같았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것이 부여되고 있음을 이미 눈치 챈 것인지,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면서 끝까지 부정하고 있었다. 도하는 그 끝을 말해주기라도 하듯 말을 더 얹었다.

“너는 나를 도와 둘이서 그 일을 막아야만 한다.”

침묵이 흘렀다. 나루는 제가 무엇을 잘못 들은 것이라 여겼다. 첫째로 이런 일을 저와 도하 둘이서 해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둘째는 그것을 왜 고작 저 같은 어린 나인에게 맡긴단 말인가. 하나같이 이유를 모르겠어서 도하를 빤히 바라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대신 이번 일이 끝나면 너는 내 사람이다. 내가 궁을 나서면 너는 같이 나설 수 있을 것이고 네가 원하는 그 자유를 손에 얻을 수 있다. 어찌 하겠느냐.”

도하의 조건은 꽤나 매혹적이었다. 그는 나루를 잘 알았고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 지조차도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궁에서 오래토록 살다 죽는 것과 하루라도 더 많은 것을 보고 일찍 죽는 것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후자를 택할 사람이 나루였다. 도하 역시 지금 자신이 하려는 짓이 얼마나 부담이 큰 지 잘 알고 있기에 그 크기에 맞는 것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의 일을 해내려면 간도 커야겠지만 무엇보다 목표의식이 뚜렷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되었다. 자신이야 시우라는 단 하나의 목표가 있지만, 그 누구도 목숨을 걸고서 그렇게까지 사람을 구할 자는 없었다. 그렇기에 나루여야만 했다. 자신이 내줄 수 있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며 그것에 목숨을 바칠 수 있고, 무엇보다 이 사실을 똑똑히 들은 사람. 그녀여야만 하였다.

“제, 제가 무엇을 하면 되옵니까...?”

그녀는 눈치를 보긴 했지만 거절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도하는 제 생각이 딱 들어맞았다 싶어 입가에 호선을 살며시 그려냈다 이내 지웠다. 가능성은 낮지만 어쩌면 해낼 수도 있다. 일말의 틈만 준다면 어떻게든 해볼 도리가 있을 것이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했다. 먼저 증좌가 필요하였고, 범인이 필요하였다. 아마 진범을 범인이라고 들이대면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왕을 황자시해범으로 믿을 사람도, 설사 믿더라도 몰아갈 사람도 화홍에는 없다. 그렇기에 가상의 범인을 만들어야 하였다.

“네 바깥 동무들 중에 글을 쓸 줄 아는 아이가 있느냐?”

“그, 마마의 대역께서 그을 쓸 줄 아시옵니다.”

“그 아이와 친하니?”

“예, 마마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이야기를 제법 나누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써주는 것을 그대로 수없이 적어내라고 전하여라. 많을수록 좋다. 그 대신 입을 다물지 않으면 다시는 이 나라에서 글공부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도 전하렴.”

도하는 제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는 어디다 박아두었을지 모르는 벼루와 먹을 꺼내 급하게 갈았다. 본래 천천히 갈아야 할 것을 급히 가루로 만드니 풀풀 휘날리고 제대로 갈리지도 않아 뭉치는 것이 난리도 아니었다. 한 쪽 옆에 있던 물을 조금 부어내고는 먹물을 만들어낸 도하는 붓을 푹 담갔다 꺼내었다. 멋대로 묻은 먹물이 붓에서 뚝뚝 떨어져 종이 한 귀퉁이를 적셨다. 그는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서 빠르게 휘갈겼다.

‘皇子弑害期犯 是國內之有 (황자시해기범 시국내지유)’

간단명료하면서도 정확한 문장이 종이에 담겼다. 도하는 종이를 몇 번 흔들어 급히 말렸다. 먹물이 잔뜩 묻어서인지 잘 마르지 않아 속이 답답하였다. 나루는 살며시 제 품에 감춰두었던 부채를 들어 종이를 향해 흔들었다. 역시 그녀는 눈치가 빠르다. 도하는 그것이 퍽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정도의 눈치도 없다면 일을 성사해낼 수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제 명대로만 따라서는 변수가 많을 이 일에서 살아남기란 힘들었다.

“이 문장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

“소녀, 글이 짧지만 살짝 읽은 바로는 ‘황자를 시해할 자가 이 나라 안에 있다.’ 아닙니까?”

“정확하다. 이 것은 사실이기도 하지. 약간의 진실을 숨긴 사실.”

“어찌 그것을 퍼트리려 하시는 것입니까?”

“눈치가 확실히 빠른 것이 궁에서 밥을 어릴 적부터 먹은 아이 답구나.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퍼트리려는 것을 아니 말이다. 답을 해주마. 이 일의 목적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황자에게 이 소식을 알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조심히 하겠지. 그것만 하여도 큰 효과가 있다. 둘째로 이런 소식이 퍼지면 화홍의 입장에서는 황자를 보호해야만 한다. 대외적으로 화홍은 황자를 보호하는 입장이기도 하니. 그러니 결코 그는 죽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분명 이런 소식이 들린다면 진자 범인은 분명 흔적을 남길 것이다. 자 답이 되었느냐.”

“하나만 더 여쭈겠습니다. 마마의 최종 목표는 대체 무엇입니까.”

나루의 질문은 도하의 정곡을 찔렀다. 어디까지 하고 싶은 것인가. 시우를 살리고 싶었다. 단지 그 생각만을 하였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자면 결국 어찌할지 선택하여야만 했다. 그가 화홍에 있는 한은 안전할 수 없다. 어쩌면 이 나라를 벗어나더라도 그를 죽이려는 자가 황제인 이상 칼날을 피할 도리가 없다. 결국 자신이 할 일은 그가 죽지 않을 만큼 안전한 상황을 만들어 주는 것까지였다. 정말 해낼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당장 막는 것은 가능하였다. 하지만 그 후까지 막기 위해서는 진범을 밝혀야만 하였다. 황자를 시해하려는 배후는 죽어도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를 시행하는 자, 내관은 밝혀야 했다. 그러면 당연히 화살은 왕실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황제는 적어도 몇 년은 시도를 할 수 없다. 같은 일이 반복될 위험을 안을 정도로 황자를 죽일 이유는 당장 없을 것이다. 그가 시우를 해치고자 하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같은 방법을 또 쓸 정도로 바보같은 황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아마 몇 년은 안전하다. 그리고 그가 더 자라서, 나름 제 몸을 보호할 정도는 된다면. 그때까지의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도하는 결심을 굳혀야 하였다.

“내관이 황자를 시해하려 했다는 것을 밝힐 것이다.”

나루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도하의 말을 이해한 것이다. 배후를 어디까지 드러낼 것인지, 이 이야기를 어느 선에서 끝낼 것인지.

“이 종이는 네 소매속에 잘 숨겨두었다가 내일 아침이 되자마자 출궁하여 전하거라.”

“제가 어찌 출궁을 합니까?”

“이상궁에게 당장 내가 오늘 사한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떨어트리고 온 것이 있다 말할 것이다. 너는 그것을 가지러 출궁하는 것이다. 명목상으로. 자 이것을 받으렴.”

도하가 건넨 것은 구슬이었다. 당잔대가 담긴 구슬. 도하가 딱히 오늘 들고 왔을 법한 물건은 이 것 뿐이었다. 그는 내줄 것이 없기에 결국 구슬을 내주는 수밖에 없었다. 영 내키지 않지만 지금은 시우를 구하는 것이 더 급하였고, 무엇보다도 그를 지키기 위해 쓰는 것이라면 잠시 떨어져 있더라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예, 마마. 꼭 잘 전달하고 오겠습니다.”

“아니, 전달하고 기다리거라. 그라면 충분히 많은 분량을 한나절이면 써낼 것이다 너는 밤까지 기다렸다 뿌리고 와야 한다.”

“예? 그렇게 늦게까지 있다가는 분명...”

“너는 구슬을 찾다 헤매어 밤에나 겨우 찾아 온 것이다. 그리하여 늦은 것이다. 나는 눈을 감아 줄 것이고 너는 잔소리 한 번으로 그 값을 치룰 터이다.”

나루는 이번에는 질문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하였다.

 

해가 밝았다. 문으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에 나루는 눈을 번쩍 떴다. 일어나자마자 제 베게 속의 종이와 구슬을 확인하고는 안도하며 소매에 다시 넣었다. 혹여나 밤중에 소매에서 나올까 싶어 베개를 열어 안에 넣어 놓았던 것이 참 다행스러웠다. 아무런 생각 없이 잠들려던 중 번뜩 생각이 나 급히 위치를 옮긴 것이다. 이것들이 튀어나와 다른 궁녀의 이부자리로 넘어가기라도 하였으면 경을 쳤을 일이다.

옷을 단정히 입고 나왔다. 아마도 조금 있으면 이상궁이 제게 와 명을 전할 것이다. 이미 잘 알지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어야 했다. 자신이 맡은 일이 얼마나 막중한 것인지 나루는 다시 한 번 상기하였다. 단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아니 되었다.

“나루야, 괜찮아? 마마께서 많이 화가 나신 것 같던데.”

설이였다. 어제 그토록 나루를 걱정하였지만 나루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못하였다. 저 보다 다섯 살 많은 설이는 화란궁의 나인들 중에서 나루 다음으로 어렸다. 그렇기에 늘 나루를 보살피는 것이 그녀의 일이기도 하였다. 나루는 그런 그녀에게 늘 고마움을 느끼며 많은 것을 이야기 해주었지만 오늘만큼은 말을 아끼고 입을 다물어야 하였다.

“괜찮습니다. 어제는 그냥 몸이 조금 안 좋았던 것뿐입니다. 마마께서 그러신 것은 무엇을 찾느라 제가 다급히 필요하셨던 모양입니다.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나루는 일부러 목소리를 올렸다. 늘 행복을 추구하는 그녀에게 목소리를 굳이 올릴 필요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새삼 즐거운 척을 하려니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 할 듯싶었다.

“나루야, 게 있느냐?”

“예, 마마님. 무슨 일이십니까?”

마침 이상궁이 나루를 찾았다. 때가 알맞았다. 나루는 설에게서 벗어나 이상궁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미안하다는 낌새를 보이며 나루에게 패를 주었다. 외출증이었다.

“마마께오서 물건을 잃어버리셨다는 구나. 구슬이라는데 알고 있느냐?”

“아, 그것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어제 왕자마마께서 찾으시옵던데 결국 못 찾으신 겝니까.”

아주 찰떡이 와서 거짓말을 해도 자신보다는 못하리라. 나루는 그리 생각하였다. 마치 도하와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딱딱 이야기가 들어맞았다. 그와 자신을 빼면 누구도 그 것이 거짓이리라 믿지 못할 것이다.

“그래. 어제 그것 때문에 불려간 게로구나. 어서 찾아 오거라. 우리 중에 구슬을 본 사람이 너 뿐이니 어쩔 수 없구나. 몸이 힘들더라도 조금 참고 부탁한다.”

그녀는 나루의 손에 패를 꼭 쥐여 주며 정말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루는 뜨끔하였지만 이상궁에게도 이번 일은 정말 말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화란궁의 나인들에게 배웅을 받았다. 왕자와 같이 가지 않는 혼자의 외출은 처음인지라 다들 걱정이 많은 모양이었다. 사실은 도하는 매일 시우를 보러 가느라 바빠 자신 혼자 돌아다닌 것을 그녀들이 알 리가 없었다. 나루는 새삼 웃음이 나왔다. 도하가 꾸민 일에 같이 하게 되면서부터 예견된 일일지도 몰랐다. 그저 좋다고 세상 구경 바빠 예상하지 못한 자신이 꼴사나웠다. 어찌 되었건 이 일은 이제 무를 수도 없었다.

궁 밖을 나서자말자 나루는 달리고 또 달렸다. 도하의 대역을 맡은 아이는 사한당에 가는 날이 아니면 늘 시장 구석의 책방에 박혀있다고 하였다. 그 집의 일을 도와주고는 낡아서 팔리지도 않는 책을 얻어다 읽는다며 한탄을 하였고, 나루는 그 이야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참을 달렸다. 숨이 벅차올랐다. 이제 겨우 시장이 보이니 책방을 찾으려면 한참 더 돌아다닐 것이었다. 더는 달릴 수도 없었다. 사람들이 조금씩 북적이기 시작하여 가로막혀서는 달리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루는 포기하고 대신 시야를 넓혔다. 책방을 찾아서. 구석이라 하였으니 중심가는 아닐 것이다. 어느 구석을 가야 하나. 그 때 입구 구석에 조그마한 책방 하나가 보였다. 딱 봐도 장사가 안 될 것 같은 낡은 내가 풀풀 났다. 저긴가. 나루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였다. 나루는 제 직감을 믿고 책방에 들어섰다.

“계십니까?”

“예~ 나갑니... 항아님?”

“쉿. 조용히 하십시오. 지금 아무도 없는 것입니까?”

“아니요, 안쪽에 책방 주인께서 주무시고 계신데.”

“오늘은 이만 일을 끝내십시오. 저와 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루는 그러고는 책방의 안쪽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세상 모르고 쿨쿨 잠든 주인을 향해 소리를 내었다.

“이보시오, 일어나 보시오.”

“아이고, 깜짝아. 뭐야? 계집아이가 여긴 왜 있어?”

“오늘 이 아이를 일찍 보내주시오. 지금 당장.”

“뭐? 내가 왜? 장사 말아먹을 일 있어?”

나루는 조금 그의 말이 웃기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남을 비웃고 싶지는 않아 꾹 참았다. 그리고는 제 주머니 자루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이것은 보상이요. 자 이제 보내 줄 터여요?”

옥가락지 하나였다. 조그마한 것이 그렇게 비싸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값어치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이 책장 주인의 한 달 치 수입은 된다. 그는 역시나 눈이 커다랗게 뜨여서는 당장에 낚아채며 외쳤다.

“야, 가봐. 오늘은 절대 오지 말고.”

그는 신이 난 사람이 되어서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루는 그를 뒤로하고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가자, 그렇게 말하니 아이는 영문도 모르고 손을 잡았다.

“무얼 히여야 합니까?”

“가서, 가서 이야기 하자. 우리가 갈 곳은 따로 있느니라.”

도하가 내 준 것은 종이와 구슬뿐만이 아니었다.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하나를 더 내주었다. 나루는 그 정체를 듣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와 시우만이 가질 수 있는, 서고의 열쇠였다. 아마도 유일하게 작업을 할 수 있을 곳이라 여겼기에 내준 것이리라.

도하는 시우가 최근에 서고에 잘 들락거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자신이 기껏 열쇠를 내주었건만 왜 드나들지 않냐고 물었더니 그 곳의 책을 전부 읽어 더는 필요가 없다 대답하였다고 한다. 나루는 그 소리에 정말 대단한 도련님이 있구나 싶었다.

도하는 시우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에 이 열쇠를 내주었다. 다시 말해 그만 오지 않는다면 아무도 오지 않을 곳이었다. 비밀스런 작업을 하기에는 최적이었다.

서고에 이르러 나루는 자물쇠를 열었다. 낡은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고, 그녀는 아이를 이끌어 들어오고는 안쪽에서 문을 잠가버렸다.

“자, 이제 일을 시작하자.”

나루의 눈에는 비장함이 가득 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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