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소녀au

*보쿠로+아카아시

*부상 소재 有

*급전개주의

*보쿠로데이 기념 연성 / 보쿠로 전력 참여 / 리퀘박스 소재

§



고등학교 시절, 누군가를 처음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배구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누구보다 함께 있는 시간도 많았다. 우리 셋은 늘 세트로 붙어 다니길 좋아했고 나는 언제까지나 우리가 함께일 줄 알았다. 우습지만 당연하게도 어른이 되기 전에 헤어져 버릴 거라는 걸 믿지 않았다. 적어도 그 여름의 골든 위크 합숙이 끝나기 전까진 말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체육관 밖으로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여름 한낮의 열기를 수도꼭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 줄기 냉수로 달래기엔 온 몸이 다 끈적거렸다. 물을 마시는 건지 머리를 감는 건지 옆에서 어푸어푸거리며 물기를 사방으로 뿌려대는 보쿠토의 얼굴에 제 목에 걸려있던 수건을 던져주곤 검은색 반팔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악, 쿠로오! 주려면 제대로 주던가—! 라며 켁켁거리는 보쿠토의 볼멘소리도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경기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계속되는 블로킹 실패와 서브 미스, 아무리 연습경기라고 해도 좀 심했다 싶었다. 오히려 리에프한테 커버를 당해야 할 지경이라니. 말 다했지 뭐.


잘못 날아간 공이 체육관 2층으로 보기 좋게 안착한 순간, 쿠로오는 한숨 쉬는 걸 포기해버렸다. 아, 오늘은 안 되는 날이구만.


옆에서 묵묵히 배구화를 고쳐 신더니 쿠로오 제 등을 툭 쓸어내리는 아카아시의 손길이 느껴졌다. 아마 연습경기 중에 평소와는 다르단 걸 이미 눈치 챘겠지. 안 그래도 심각해보이던 아카아시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더욱 세모꼴이 되었다. 쿠로오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청록색의 눈동자가 마치 모든 걸 꿰뚫어보는 듯 해 대충 둘러대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 문제없다는 미소를 지어보이곤 돌아서는데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한바탕 썰물이 빠져나간 듯 점심을 먹기 위해 아이들이 모두 달려 나간 체육관 안에는 나직한 여름소리만이 들려왔다. 더운 열기에서 베어 나오는 축축한 풀잎의 냄새와 습기어린 나무의 냄새, 간혹 가다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찌는 듯한 남서풍이 땀에 젖은 뒷머리를 간질여놓았다. 주섬주섬 체육공구실 근처에서 개인 짐을 챙기던 쿠로오는 왠지 모르게 다리에 힘이 빠져서는 차가운 마룻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뒤로 머리를 기대니 촉촉하게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오던 물방울들이 이마를 적셨다. 벽에서 맡아지는 나무의 송진냄새가 코끝을 아리게 만들었다.


부스럭—


갑자기 난 인기척에 감았던 눈을 떴다. 쿠로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반쯤 열려진 체육공구실 문 안쪽에서 누군가가 어슬렁거리는 그림자를 본 것만 같았다. 덩달아 눈이 커진 쿠로오가 한 손에 들려있던 네코마 져지를 꽉 움켜잡곤 공구실의 문을 밀었다. 제 1체육관의 공구실은 다른 데에 비해 공간이 제일 넓었다. 양 옆으로 늘어진 축구공과 배구공, 각종 마루운동을 위한 매트와 뜀틀, 평행봉 등이 줄줄이 서 있는 곳을 지나가는데— 시야에서 검은 인영이 훅 지나가면서 목 뒤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거기 누구야?”


쿠로오가 휙 몸을 돌리자 곧바로 옆에 있던 바스켓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얼떨결에 손을 뻗어 매트를 잡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대로 매트 여러 장과 함께 바닥으로 나뒹구는 찰나, 왼쪽 팔꿈치 부근에 작은 공 같은 게 닿았다.


일순간 번쩍이는 빛이 일더니, 사방에서 시계의 초침이 째깍거리며 돌아가는 소리와 환영이 보였다. 하릴없이 으아악—! 거리는 비명만 질러대다가 어지러움에 몸을 바둥거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배가 무거웠다. 고개를 내려 보니 제 몸뚱이 위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매트 더미에서 퀴퀴한 먼지가 잔뜩 올라오고 있었다. 쿠로오는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겨우 몸을 빼내었다. 잿빛으로 얼룩진 검은 티셔츠를 툭툭 털어내고는 공구실의 물건들을 대충 정리하기 시작했다.


§


아직 합숙 이틀째에 불과했지만, 쿠로오는 오늘 자신의 컨디션이 영 아니라는 걸 직감했고 그건 네코마타 감독님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무리하게 밀어붙이려는 생각은 없으니 오늘은 머리라도 좀 식히고 자율연습으로 돌리라는 감독님의 배려로 쿠로오는 점심시간 이후로 외출증을 받아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필요한 물건도 있었고, 켄마가 부탁한 애플파이를 사러 가자 싶어서 시내로 향했다.


날은 더워도 방학 직전이라 그런지 시내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스포츠백 끝에 걸린 빨간색 져지가 쿠로오가 걸어가는 속도대로 덜렁거리며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마을 병원 근처를 지나자 저 멀리 신호등이 바뀌는 게 보였다. 2시 38분. 


한 블록 더 가야했지만 기다리기는 또 싫어서 쿠로오는 걸음을 점점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호등만 보고 달리다가 어깨 위에 둘렀던 스포츠백이 코너를 돌아 나오던 아주머니와 부딪혔지만 미처 죄송하다 말할 새도 없이 쿠로오는 뛰고 있었다.


깜박거리는 경고등이 켜지고 사람들도 거의 빠져나간 듯 보였다. 바로 앞 편의점에서 나오던 사람과 또 한 번 부딪힐 뻔 한 걸 이번엔 가까스로 피해 뛰었다. 대충 옆을 보니 차가 오진 않는 것 같아서 그대로 앞으로 크게 보폭을 내밀었다. 그 순간.



빵—빠앙—!!!


요란한 클락션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이 달려들었다. 이상하게도 코너를 돌아 전력질주해오는 트럭을 보고도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멍하니 서서 제 바보 같은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지는 모습을 상상하자 속이 메스꺼웠다. 핑글 도는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워지자 세상이 만화경처럼 돌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시계 초침이 째깍거리며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목구멍에서 맴도는 소리만 질러대고 있는데, 한 순간 모든 소음이 어딘가로 빨려들어간 듯 조용해졌다.



“—봐요, 이봐요. 학생!!”


뿌옇게 흐려졌던 시야 안으로 잔뜩 화난 듯한 아주머니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비춰졌다. 울그락붉으락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장바구니를 여미는 아주머니는 아니, 부딪혔으면 미안하다고 말이라도 하든지. 그렇게 멍하니 서 있으면 어떡해? 라며 쯧쯧거리는 한숨과 함께 새초롬한 눈초리로 쿠로오를 쏘아보곤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멍청하게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헤 벌리고 서서 아주머니가 지나간 인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쿠로오를 행인들이 이리저리 피해 지나갔다. 안 그래도 잔뜩 뻗쳐있던 머리가 이제는 거의 반 미치광이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모든 사람소리건 자동차 소리건 쿠로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제 눈동자가 도로록 거리며 굴러가는 소리와 시계 초침 소리의 이명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방금.. 뭐지?”


분명히 트럭에 치이는 걸 봤는데. 가방도 저만치 날아가서 산산조각 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현실은 멀쩡했다. 쿠로오는 제 어깨에 걸려있는 가방의 묵직한 무게감을 여실히 느끼며 제 몸을 더듬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멀쩡했다. 지나치게 건강했다. 뒷덜미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 외에는 별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뭔진 모르지만 일단 살긴 한 거 같은데. 대체..


띠리링—띠리링—


줄무늬가 들어간 트레이닝복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 불빛이 요란하게 반짝거리며 울려댔다. 그제서야 흠칫 놀라며 정신이 돌아온 쿠로오가 액정에 뜬 발신자를 확인했다.


“어, 켄마.”

“어디야?”

“시내인데.. 저기 켄마, 있잖아..”

“그래서. 달려오는 트럭에 부딪혔는데 멀쩡하게 살아서 지금 나랑 통화하고 있다고?”

“어.”

“왠지 모르게 과거로 돌아가 있었고?”

“어.”

“…….”

“…….”


역시, 미친 놈 소리 들을 게 뻔하려나. 쿠로오는 핸드폰을 들고 있는 반대쪽 어깨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냈다. 표정관리가 안 되는 것 같았다. 아직까지 사고가 날 뻔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일까 생각하며 자신이 내뱉었던 말들을 무마시키기 위해 또 어떻게 둘러대야 하나 고민하는데. 핸드폰 너머 치직 거리는 약한 기계음 사이로 켄마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타임 리프 아니야?”

“타임 리프..?”


생각보다 태연한 어조로 말을 하는 켄마의 설명을 듣고 나서 쿠로오는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 속으로 쑤셔넣었다. 그러다가 퍼뜩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주섬거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흰색으로 깜박거리는 검색창에 ‘타임 리프’를 입력했다. 사이트 검색 결과가 아래로 주욱 뜨고 있었다. 시간의 불가역성.. 시간 여행을 하는 사람들..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 슬립이 가능성.. 시간을 뛰어넘는 방법..


§


아무래도 합숙하러 왔는데 하루 종일 농땡이만 피우기도 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쿠로오는 좀 싱숭생숭한 게 아니었기에 저녁 시간 전에 잠깐 짬을 이용해 제 3체육관으로 향했다. 이미 먼저 와서 자율연습을 하고 있던 보쿠토와 아카아시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 평소처럼 스파이크를 날리는 보쿠토를 잔뜩 놀려주자, 조금은 기분이 풀리는 것도 같았다. 리시브가 서툰 리에프를 야쿠 손에 맡겨놓고 온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간만에 제대로 몸 좀 풀어볼까 싶었다.


“헤이—헤이—!! 그 정도 힘으로 날 막겠어?”

“오야, 방금 전에 자신만만하게 날린 스트레이트 막혔던 사람이 누구더라?”

“두 분 다 그만하시죠. 지겹지도 않으십니까.”

““아니 전혀—!!””


우렁차게 되돌아오는 두 명분의 외침을 고스란히 받아낸 아카아시가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그 뒤로 슬슬 짐을 챙기는 후쿠로다니 3학년들이 왠지 모르게 싱글벙글거리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휘파람을 부는 것이 보였다.


여어, 아카아시— 아까 낮에 봤다? 잔뜩 즐거운 듯한 표정으로 말하는 코미와 코노하, 그리고 옆에 있던 사루쿠이까지 합세해 이야— 그러게. 뜨겁던데? 라며 미묘한 시선으로 아카아시를 쳐다보는 상황에 보쿠토가 왜 자기만 모르게 다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방방 뛰어댔다. 오히려 아카아시는 별 신경 쓰지 않는 듯 벤치에 놓여있던 수건으로 땀만 연신 닦아댈 뿐이었다.


응? 뭔데 그래? 쿠로오까지 궁금해지자 코노하가 씨익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아— 아까 낮에 우리 학교 치어리더 부 여자애 중 한 명이 아카아시 본다고 와서는 불러내더라고. 그 소리에 옆에 있던 보쿠토가 입을 크게 벌리고서는 저만치에 있는 아카아시를 쳐다보았다. 아 진짜? 그래서? 쿠로오가 흥미롭다는 듯 묻자, 코미가 말을 받았다. 그래서는 뭐. 얘기 들어보니까 고백 받은 거 같던데? 


고백이라는 단어에 보쿠토가 성난 황소마냥 우다다거리며 아카아시 쪽으로 달려갔다. 에엑?!! 쿠로오도 덩달아 아카아시에게 고개를 돌렸다. 뭐야. 진짜? 보쿠토는 아카아시가 땀을 닦던 수건을 휙 붙잡고서 득달같이 채근하기 시작했다. 아카아시! 어떻게 됐어? 뭘 말입니까. 아 다 들었는데 뭘 빼고 그래! 그런 거 아닙니다. 그래서 사겨 안 사겨? 안 사귑니다. 엑, 왜!! 딱히..별 생각 없습니다. 


그래도—!! 나라면 당장 사귄다!! 라며 씩씩거리는 울분을 토하는 보쿠토를 보며 다들 웃음이 터져버렸다. 네가 고백 받은 것도 아니면서 왜 난리야— 라며 딴지를 거는 코미에게 보쿠토가 배구공을 날려 응징하자, 옆에 있던 코노하와 사루쿠이에게도 불똥이 튀어 금새 체육관 안은 소란스러워졌다. 어린 애들 장난 같았던 공 싸움을 끝낸 건 3체육관 문을 두드리며 들려온 매니저 스즈메다의 목소리였다.


“다들 지금 밥 먹으러 안가면 30분 뒤에 식당 문 닫는다—”


어이쿠, 얼른 가야겠네. 장난 끼를 잔뜩 달고서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나가는 아이들 틈에 자연스럽게 섞여 나가던 아카아시가 기어이 코노하한테 헤드락이 걸려서 바둥대는 뒷모습이 퍽 웃겼다. 이 짜식, 부럽다야— 왁자지껄하게 웃어재끼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체육관 밖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대충 뒷정리를 한 쿠로오가 신발을 갈아 신자 제 옆으로 불쑥 다가온 보쿠토가 발 앞부리를 땅바닥에 툭툭 치며 신발을 고쳐신었다.


“헤, 아카아시한테 여자친구라니.”

“왜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닌데. 잘 생겼잖아 아카아시.”

“뭐? 생긴 건 나도 잘 생겼거든..!!”

“아침에 거울은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보쿠토 씨.”

“뭐야 그 반응! 너무해!”

“그래그래.”


매번 놀려도 돌아오는 반응이 이러니 안 놀릴 수가 없지. 피식 웃으며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보쿠토의 어깨를 툭 치고는 쿠로오가 반걸음 앞서나갔다. 그러자 등 뒤에서 낮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의 걸음을 붙잡았다.


“저기 있잖아. 쿠로오.”

“어?”

“만약에.. 아카아시한테 여자친구가 생기면 말야..”

“뭐야. 아직 사귀는 것도 아니라며.”

“그러니까 만약에!”

“어..”

또 무슨 소릴 하려는 건지. 묘하게 폼을 잡는 보쿠토를 보니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꾹 참으려고 손으로 입가를 쓸어내리며 고개를 돌리는데.


“그러면.. 나랑, 사귈래?”


“뭐..?”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 싶어서 늦추지 않고 걸었던 걸음이 대번에 우뚝 멈췄다. 바닥에 껌이라도 붙은 듯 쿠로오의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제 등 뒤로 덩달아 멈춰 선 보쿠토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 이래봬도 꽤 인기 많고..”

“잠..잠깐!”

“쿠로..?”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괜히 들은 것만 같았다. 이 상황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싫은 건 아니었지만 이런 말을 들으면 쿠로오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해야할지 감조차 잡히질 않았다. 미안, 보쿠토. 나 그냥 안들은 걸로 하면 안 되냐. 악! 돌아가고 싶다. 누가 시간 좀 돌려줘라 제발!!


어둑어둑한 운동장 샛길에서 외롭게 불이 켜져 있는 가로등 불빛을 피해 몸을 숨기고 싶은 저녁이었다. 식당에서 풍겨오던 맛있는 음식 냄새는 여전했지만 이미 배고픔 따위는 잊혀진지 오래였다. 기나긴 침묵을 참지 못하고 쿠로오가 속으로 비명을 질러대자 동시에 머리 위로 일그러진 공간이 덮쳐드는 기분이 들었다. 이거다!


사방에서 째깍거리는 시계소리와 함께 비디오의 되감기 버튼을 누른 것처럼 쿠로오 자신이 시간 속을 날고 있었다.


그렇게 보쿠토가 몇 번을 고백하든 쿠로오는 계속해서 시간을 돌리고, 또 돌렸다.


§


“무슨 일 있으신거죠.”

차가운 이온음료를 건네는 아카아시의 음성이 꽤나 진지했다.


“무슨..”

“어제오늘. 계속 보쿠토 선배 피하고 계시잖아요.”

“별로..”

“차였다던데.”

“뭐?”

“대뜸 치어리더부에 여학생 하나만 소개시켜 달라고 생떼를 쓰시던데요. 그거 쿠로오 씨한테 차여서 그런 거 아닙니까.”

“…….”

“도망치는 게 현명할 때도 있지만. 매번 그럴 순 없는 거 아시잖아요.”

“아카아시.”

“꽤 오래 전부터 보쿠토 선배가 당신을 좋아했다는 것도 아실테고.”


딱히 받아칠 말이 생각나진 않았지만, 쿠로오는 들숨을 마시고 입을 살짝 벌렸다. 하지만 연습의 재개를 알리는 휘슬이 불렸기에 그 후로는 어떠한 질문도 대답도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게 어색한 채로 우리들의 여름은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쿠로오는 계속해서 타임 리프를 사용하고 있었다. 지각이라든가 경기 중의 미스라든가 아주 사소한 것들뿐이었지만 점점 시간이, 관계가 어긋나고 있음을 쿠로오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골든 위크 합숙이 끝나던 날, 쿠로오는 후쿠로다니 학교 정문에서 교복을 입고 서있던 예쁜 여학생에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가는 보쿠토를 보고야 말았다.



“이기적이네.”


조곤조곤한 목소리였지만 단호했다.


“켄마아..”

“그러길래 왜 사람 마음 갖다 장난질이야.”

“장난질이라니.. 말이 심하네.”

“아니면 뭔데.”


침묵.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아마 보쿠토 딴에는 기껏 고민하고 고심해서 꺼낸 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그걸 보쿠토가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없었던 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딱히 보쿠토가 싫은 게 아니었다. 그저, 밸런스를 깨트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난 우리 셋이 영원히 이렇게 지낼 줄 알았다고.”

“바보냐.”

“…….”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되는 건지.. 참.”


“왠지 열 받아.”


손에 들렸던 게임기를 아무렇게나 방바닥에 던져버렸다. 한참 잘 되고 있던 게임도 흥미가 식어버렸다. 화면에 GAME OVER 라고 뜨는 걸 보니 괜히 기분이 나빴다.


아래층에서 아주머니가 부르시는 소리에 켄마 녀석이 미적거리며 방문을 열고 나갔다. 열린 방문 틈새로 들어온 실내의 따뜻한 공기가 창문께로 넘어가고 있었다. 해가 지는지 빨갛게 타오르는 빛이 창문에 반사되면서 저녁 바람이 불어왔다.  쿠로오는 침대 모서리에 등을 기대고 뒷머리를 받쳐 천장을 쳐다보았다. 정지된 티비에서 들려오는 기계음만 방 안에 가득했다. 하루 종일 울리지도 않는 핸드폰이 영 거슬렸다. 고개를 돌려 침대 위에 있던 핸드폰을 집으려는데.


어라.


팔뚝에 반점 같은 것이 보였다.


50? 05?


뭐지.

손으로 문질러 봤지만 지워지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마치 디지털 시계의 숫자처럼 뚝뚝 끊어진 글씨체로 투박하게 살갗을 파고든 문신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게 생긴거지. 저절로 미간이 찌푸라들었다. 


“쿠로오 밥먹어.”


“어? 어..”


어느새 방 문 앞까지 올라왔는지 켄마가 후드를 뒤집어쓴 채 주머니에 손을 꽂고 있었다. 뭔가 눈치챈 것 같지는 않았기에 쿠로오는 숨을 한 차례 몰아쉬고는 엉덩이를 일으켰다. 왠지 왼쪽 팔뚝이 간지러운 것만 같았다. 


§


올해 여름방학 합숙은 신젠 다음으로 후쿠로다니가 다시 주최를 맡았다. 며칠 만에 다시 찾는 남의 학교가 꽤나 익숙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체육관 밖에서 기웃거리며 이쪽을 옅보는 한 여학생 무리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질 않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무시하고 말 일이었지만, 유독 쿠로오 쪽을 주시하며 졸졸 따라붙는 시선은 꽤나 피곤했다. 가뜩이나 다시 보는 보쿠토의 얼굴 때문에도 정신이 사나웠는데.  


하지만 더한 일은 그 다음부터 였다. 


점심을 먹고 나서 잠시 쉬는 시간에 학교 주변을 걷고 있는 쿠로오 앞으로 예의 그 여학생 무리들이 난데없이 나타나더니, 아카아시 군과 사귀고 있냐—고 물으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증거를 보여 달라. 고 말했다. 아니 염치가 없고 예의가 없어도 정도껏이지. 라는 생각에 쿠로오는 불쑥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현명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평소의 쿠로오 씨라면 이런 거에 당황하지 않지, 그럼. 


아까 서로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분명 가운데에 있는 여학생은 치어리더부 주장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그럼 이야기가 쉽지. 쿠로오는 두 눈을 감고 손을 굳게 말아 쥐었다. 온 세상이 시계로 만들어진 것처럼 째깍거리며 감기는 시계 태엽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양쪽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여학생들의 앙칼진 목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을 돌리길 두 번, 세 번. 네 번 째에 비로소야 골든 위크 합숙 첫째날의 낮 시간으로 돌아갔고, 연습 경기 중에 쿠로오 자신이 실수를 내버린 공이 튕겨져 후쿠로다니 코트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빠른 스피드로 그 여학생에게 향하고 있던 공을 재빠르게 받아내려던 아카아시가 왠일인지 그대로 뒤로 넘어지면서 사고가 생겼다. 다행히 아카아시 본인은 괜찮았지만 책임감 때문이었는지 여학생을 데리고 양호실을 방문했던 아카아시는 시내 병원까지 동행하기 위해 외출증을 받았다.


다들 이야— 하는 기분좋은 수군거림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고, 쿠로오는 내심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서브를 준비했다. 손을 높이 치켜드는 그의 팔뚝에 01 이라는 숫자가 흐릿하게 새겨져 있었다. 흘러내리는 땀을 어깨로 닦아내며 쿠로오는 깨달았다. 역시, 이거 타임 리프가 가능한 횟수를 나타나는 거였어.



수돗물은 여전히 차가웠다. 물을 흩뿌리는 보쿠토의 얼굴에 수건을 명중시키고는 큰 소리로 웃었다. 평소의 보쿠토의 모습이었다. 저도 모르게 안심이 되어서 입꼬리가 풀렸다. 뒤에서 아카아시는 어느 병원으로 갔대? 라며 조금 걱정하는 듯한 코미의 목소리에 스즈메다가 이온음료를 건네며 대답했다.


"그 시내에 편의점 코너 돌면 바로 있는 곳으로 간대. 오늘 문 연 곳이 거기밖에 없다나."


헤에— 꽤 멀리갔네. 거기라면 여기서 30분 정도 걸리지 않나? 더울텐데. 라며 맞장구를 치는 코노하의 목소리가 졸졸거리며 흐르는 물 소리에 섞여들고 있었다. 


뭐..?


쿠로오는 수돗꼭지를 채 잠그지도 못한 채 굳고 말았다. 편의점 코너 근처라니, 시내에 편의점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불안했다. 지금 몇 시지? 목뼈가 꺾일 정도로 빠르게 몸을 돌리자 체육관 안에 걸린 쇠창살이 달린 시계가 2시 1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누가 뭐라고 말을 걸 새도 없이 쿠로오는 경기복 차림 그대로 정문으로 뛰쳐나갔다.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시간을 멈출까? 아니 너무 성급한가. 아직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미친 사람처럼 뛰어나가서 무작정 내달리던 쿠로오는 골목에서 돌아나오던 자전거에 거의 치일 뻔 했다. 하지만 이미 과부하가 걸린듯 뻐근해져 오는 다리를 멈출 수는 없었다. 버스든 지하철이든 타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도 않았다. 달려야 했다.  익숙한 도로가 나오고 깜박거리는 신호등 불빛이 보일 때까지.


“혹시 여기서 트럭 사고 나지 않았나요?!!”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는 쿠로오는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개만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들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했다. 당황스럽지만 안쓰럽게 자신을 쳐다보는 한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보낸 쿠로오는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띠리링—띠리링—


요란한 불빛을 번쩍거리며 울려대는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액정에 뜬 발신자와 현재 시각. 2시 38분.


“보쿠토?”

“어디야, 쿠로오.”

“아.. 그게, 아카아시가 좀 걱정되서..”

“아카아시는 도중에 더 가까운 병원을 찾아서 거기로 갔대.”

“아.. 그래?”

“있잖아 쿠로오.”

“어?”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어, 뭔데.”



혹시 너, 타임 리프 같은 거 하고 있지 않아?



혹시 너, 타임 리프 같은 거 하고 있지 않아?

혹시 너, 타임 리프 같은 거 하고 있지 않아?


귀가 웅웅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 고장난 장난감 로봇처럼 뇌가 삐그덕거리는 소름끼치는 느낌이 온 몸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되는 건데. 어쩌지. 피하고 싶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쿠로오는 시계의 태엽을 감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네코마의 빨간 져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여보세요.”

“쿠로오! 어떻게 된 거야?”

“아.. 미안 금방 들어갈게.”

“저기 너 말야...”

“어?”

“아니다.. 조심해서 와.”


전화를 끊고 땀으로 얼룩진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쿠로오는 목구멍에 꽉 걸려있던 응어리가 겨우 밀어내려간 것 같은 기분에 밭았던 숨을 들이마셨다. 모든 게 돌아왔다. 아무 문제 없을거야 이제. 별 일없이 후쿠로다니로 돌아가면 감독님께 약간의 쓴소리는 듣겠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았을 거고, 다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시시껄렁한 농담조로 쿠로오의 등을 퍽퍽 쳐댈 것이다. 그래 그거면 됐다.


여기까지 어떻게 뛰어왔나 새삼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시끄러운 인파들 속에 밀려 자동차의 매캐한 매연을 피해 쿠로오는 고개를 들어 주변를 응시했다. 그리고 저만치서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던 낯익은 인영이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힘들어하는 여학생을 부축하며 코너를 돌아 편의점 앞을 지나가는 익숙한 모습. 아카아시였다. 그의 머리 위로 파란 신호등 불빛이 위태롭게 깜박거리고 있었다.


잠, 안 돼.. 가면..안 돼—


손을 뻗었지만, 목소리마저 나오질 않았다. 이미 시간을 돌릴 기회는 모두 바닥난 상태였다. 미친 듯이 달렸다. 사람들과 부딪히든 전봇대에 어깨가 찧듯 지나가는 오토바이에 손등이 긁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더라도 상관없이 달렸다. 붙잡아야만 했다. 보이지 않는 코너에서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다. 곧이어 굉음이 날 것이다. 어찌해 볼 새도 없이 붕 뜬 몸, 바람에 흩날리는 후쿠로다니 져지가 눈동자 안으로 고통스럽게 밀려들고 있었다.


안 돼. 제발.. 멈춰.. 멈춰 줘..!!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미련한 부르짖음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째깍—


사방에서 들리던 시계 초침 소리가 멎었다. 꽉 감은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파드득거리며 날아가려던 비둘기가 허공에서 멈춰섰고 트럭 위로 날리던 후쿠로다니 져지가 그대로 굳어있었다. 정신없이 사람들이 오고가던 사거리는 마치 레고에 나오는 사람 모형의 장난감처럼 멎어 있었다. 온통 백색 소음만이 쿠로오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것을 깨달은 순간, 



역시.. 맞았구나.


제 등 뒤에서 자박자박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보쿠토? 네가 어떻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설마.. 너도 시간을 돌릴 수 있는 거야?”

“내가 온 시대에서는 시간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장치가 사용되고 있어. 그게 이거야.”


보쿠토가 내민 작은 호두알은 쿠로오의 손가락이 닿기도 전에 금새 바스라져 버렸다.


“하지만 바보같이 잃어버리고 말았지. 체육관 공구실에서.”

“아..”

“다행이야. 별 시시한 곳에만 쓴 거 같아서.”


보쿠토는 앞서 걸으면서 계속 이야기했다. 그는 꼭 이루고 싶은 일이 있어서 시간을 돌리고 돌려 과거로 돌아온 것이라고 했다. 뒷모습만 보고 대화를 하려니 시야가 답답했다. 평소답지 않게 방방거리는 모습이 아닌 보쿠토는 낯설었다. 지금까지 알아왔던 보쿠토가 아닌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어딘가로 가버릴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서로의 보폭을 유지하는 보쿠토의 뒤꿈치를 좇아 쿠로오는 거의 뛰기 시작했다.

 

축 가라앉은 대화의 무게가 견디지 힘들었는지 쿠로오는 약간의 희미한 미소를 달고 보쿠토에게 말했다. 그런 말을 들으니까 좀 궁금한데? 그 시대의 나는 어때? 여전히 배구 하고 있으려나?


그제서야 수많은 인파들로 둘러쌓인 사거리 횡단보도를 걷던 걸음을 멈춰선 보쿠토는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나 눈부셨던 금색 눈동자가 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니.


내가 꼭 보고 싶었다던 거. 

그건 네가 다시 배구를 하는 거야. 그리고 네가 포기하지 않는 거야.


보쿠토가 온 미래에서는 쿠로오는 더 이상 배구를 하지 못한다고 했다. 교통사고였다고. 보쿠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횡단보도의 흰색선에 발이 묶여 있는 쿠로오를 내버려 둔 보쿠토는 계속해서 사람들 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는 반복하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한 번의 타임 리프로 아직은 그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지만, 언젠가 다시 찾아올 일이 될 것이다. 만약 그 때가 온다면 너무 두려워하지 말길. 눈 앞에서 도망치지 말고 필사적으로 살아주길. 


“미래에서 널 가장 먼저 만나는 건 나일 테니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포기하지도 마.”


그렇게 말하면서 보쿠토는 사라졌다. 시간여행자의 룰을 따르기 위해.


쿠로오는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시계의 한복판에서 초침이 돌아가는 걸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가지마. 이러는 게 어딨어."


§


“좀 진정됐어?”


며칠 내내 정신을 어떻게 하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보쿠토는 자연스럽게 생활에서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모든게 야속할 만큼 잘 돌아가고 있었다. 보쿠토를 그리워하는 건 아카아시와 쿠로오 둘 뿐인 것 같았다.


그렇게 네가 떠나간 자리, 나에겐 너에 대한 기억만이 남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때 고백.. 들어줄걸.”

“후회는. 답지 않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눈부셨다. 무겁게 늘어진 팔을 들어올려 눈을 가려버렸다. 깜깜하게 변해라. 아무것도 보고싶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감았던 눈을 뜨고 싶지 않았지만 불가항력이었다. 그리고 살며시 떠진 눈꺼풀 사이로 익숙한 숫자가 보였다.


01.


잠깐. 이건?


설마.. 보쿠토가 시간을 돌려서 나까지 시간을 돌리기 전으로 돌아온건가.


돌아가야 해. 그가 있는 시간으로.


쿠로오는 되는대로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던 져지에 손을 꿰어넣고 켄마네 집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 대로변으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숨도 쉬지 않고 내달렸다.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만날 수 있어. 사방에서 시계소리에 섞여 매미소리가 들려왔다. 서로 맞물리고 겹쳐진 사거리를 뛰어넘어 오후의 뙤약볕이 내리쬐는 학교 운동장을 건너 시간의 톱니바퀴 속을 지나쳤다. 더운 바람이 코 안으로 깊숙이 스며들었다.


익숙한 코트의 풍경이 펼쳐지고, 익숙한 기합소리가 들렸다.


헤이—헤이—!!


체육관 한켠에서 보쿠토와 함께 이온음료를 마시는 아카아시에게 다가가 매니저가 스케줄 문제로 잠깐 보자는 거 같던데? 라며 아카아시를 체육관 뒤뜰로 내보냈다. 자연스럽게 운동장 쪽 개수대로 달려가는 익숙한 뒷모습을 따라 쿠로오가 발걸음을 내딛었다. 손에 들린 쓰지 않은 수건을 보쿠토에게 건네주며 자신도 수도꼭지를 돌렸다.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쿠로오는 주머니에서 작은 호두알을 꺼냈다. 그리곤 고개를 드는 보쿠토의 앞에 내밀었다.


“에...?”

누가 들어도 멍청한 외마디 추임새가 보쿠토의 멍해진 얼굴과 제법 잘 어울렸다.


“쿠로오, 네가 어떻게 이걸?”

“네가 다 말해줬어.”

“그럴..리가?”

“…….”

“진짜?”

“어.”

“넌 그걸 믿었고?”

“어.”

“바보냐...?”

“그럴지도.”

“그 말 하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온거야?”

“어.”


고개를 들고서 속눈썹 사이로 떨어지는 햇빛을 쿠로오가 건넨 수건으로 대충 가리는 보쿠토의 미간이 가늘게 찌푸려졌다. 하지만 여전히 입은 웃고 있었다. 앞머리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이마와 뺨을 지나 턱 밑으로 떨어질 때까지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 왜 우리 둘 다 바보인걸까.”


§


지평선 너머로 해가 가까워 질때 쯤부터 걷기 시작해 별이 총총 박힌 하늘이 강 한 가운데의 다리 위로 펼쳐지자, 일기 예보에 없던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다. 맑은 밤하늘에 후두둑 서둘러 떨어지는 빗방울이 두 사람의 마음보다 더 성급한 듯 보였다. 하지만 비를 피할 시간은 없었다. 쿠로오는 말없이 보쿠토의 손을 잡았다. 가지말란 뜻은 아니었다. 이미 우리는 헤어짐을 말하고 있었으니까.


“잘 가.”

“어.”

싫지는 않았는지 쿠로오가 제 손을 잡는 것을 그냥 두었던 보쿠토가 제 손아귀에 힘을 한 번 팍 주고는 떨어졌다. 굳은살이 박힌 중지가 쿠로오의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느낌이 더디게 다가왔다. 별빛을 산란하는 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던 보쿠토가 이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시선을 주었다.


“쿠로오.”

“어?”

“가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심장이 두근거렸다. 답지 않게 뜸 들이는 건 또 어디서 배웠는지. 쿠로오는 저절로 침이 꼴깍 넘어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보쿠토의 입술이 위아래로 열리는 것이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너 말야.. 주장답게 하는 것도 좋지만, 성질 좀 죽여.”

“뭐...?”

지금 누가 할 소리를. 쿠로오는 잔뜩 부풀어 올랐던 가슴이 한순간에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피시식 가라앉는 것과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잇는 제 앞의 보쿠토가 그렇게 미워보일 수가 없었다.


“네코마라면 춘고 본선 꼭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보쿠토. 너..”


뒤늦게 꿈틀거리는 눈썹을 참아내며 보쿠토의 교복 자락을 움켜쥐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보쿠토는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간다.”


결국 아무것도 변한 건 없었다. 쿠로오는 그저 다시 한 번만 보쿠토를 보고싶었다. 이번에야말로 마음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 시간을 달렸다. 하지만 전해졌을까? 심장이 뚫린 것처럼 빈 깡통마냥 삐걱거렸다. 눈앞이 흐려져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한여름의 비는 차갑게 살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쪽팔리게 길가에서 울고 싶진 않았지만 나름 비가 오니까. 라며 얼버무린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렇게 쿠로오는 보쿠토가 가버린 빗속을 허망하게 쳐다보다가 무겁게 발을 돌렸다. 한 발짝을 떼기가 무서웠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벌려진 입 안으로 빗물이 잔뜩 새어 들어왔지만 서럽게 말리는 입꼬릴 주체할 수 없어서 어린아이처럼 우두커니 서서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축축하게 젖은 교복 바지 밑으로 무거워진 운동화를 질질 끌며 앞으로 겨우 밀어내려는데,


매고 있던 가방 끈이 뒤로 당겨지자 무게중심이 휘청거리며 돌아갔다. 미처 누구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창백해진 쿠로오의 뺨에 따뜻한 체온이 스며들었다. 비는 계속해서 둘을 적시고 있었지만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이 서로의 맞닿은 입술 사이로 흘러들었다. 입김 때문에 뿌얘진 시야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똑바로 보고싶어서 축축한 손바닥으로 보쿠토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게 간지러웠던지 제 손으로 쿠로오의 손등을 잡더니 이내 뜨거운 입술을 그 손바닥에 맞대었다. 무엇가를 약속하듯 진득하게 내려앉는 그 입맞춤에 사무치게도 심장이 버거웠다.



미래에서 기다릴게.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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