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방에 들어갔더니 최애가 제 침대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김독자는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 없어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졌다. 눈을 깜빡여 봐도 고개를 마구 흔들어 봐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 걸 보면 이게 실제로 일어난 게 맞는 것 같긴 했다. 아니, 그럴 리가. 차라리 문을 열었더니 마지막 시나리오의 무대가 펼쳐졌다는 게 더 개연성이 있을 것 같았다. 유중혁이 내 침대에서 잠들었다는 것보다는. 그 유중혁이! 내! 침대에서!!

아니 도대체 왜?

경악 다음에는 의문이 찾아들었다. 혹시나 싶어 문 밖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와 보았지만, 다시 봐도 이 방은 김독자의 방이 맞았다. 그야 한 3년쯤 자리를 비웠다 돌아왔다면 방이 사라질 수도 있다. 너 죽은 줄 알고 물건들은 싹 정리했어, 공간 아까우니 그 방은 다른 사람이 쓰고 있고. 한수영이 그런 말을 아주 냉정하게 건네 왔대도 이상하지 않다. 문제는 하늘에 맹세코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독자는 바로 어제도 저 침대에서 곯아떨어졌던 것이다. 그는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한 번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유중혁이 사라지지 않는다.

좋아, 최애가 침대 위에 있다는 상황을 인정하기로 합시다. 김독자는 드디어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유중혁이 아예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보다는 훨씬 인정하기 쉬울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발소리를 죽여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오롯이 그의 것이었던 침대로 다가갔다. 유중혁은 – 당연히 – 그대로 있었다. 김독자는 피곤했고, 침대에 눕고 싶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 1안, 유중혁을 깨워서 그가 방을 잘못 찾았다는 것을 친절하게 알려 준다(“중혁아, 방을 잘못 찾았다고 생각하지 않니?”). 유중혁의 답변이 아주 명확해 보였다. 꺼져. 매우 억울한 일이지만 김독자는 유중혁이 자면서도 허리에 차고 있는 저 칼이 조금 무서웠다. 선 채로 눈 뜨고도 잘 수 있는 놈이니 잠버릇이 그렇게까지 흉폭하진 않을 거라 생각하고 싶지만, 확인한 적은 없었으니까. 위험한 다리는 건너지 않는 것이 좋다.

제 2안, 침대 밑에 쪼그리고 누워서 불쌍하게 바닥에서 잔다. 당연히 불편할 테고 내일 아침에는 여기저기 쑤실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시나리오의 세계에서 그런 통증 따위는 포션 한 병이면 깔끔하게 해결된다. 새삼스럽게 하급 포션 한두 병이 아까울 정도로 주머니 사정이 곤궁한 것도 아니다. 아니, 포션을 사기 싫어 버틴다고 해도 올스텟 1의 민망한 몸이었던 시절에 비하면 훨씬 빠르게 회복할 것이 분명했다. 즉 이 안을 선택하고 싶지 않은 것은 순전히 기분 문제다. 왜냐하면 여긴 내 방이고, 저건 내 침대니까.

제 3안, 그냥 이대로 유중혁의 방으로 가서 그의 침대에서 잠을 청한다. 내일 아침에 유중혁이 화를 내기라도 한다면 네가 먼저 내 침대를 차지했노라고 한 소리 하면 그만이다. 그럼 설마 내가 너 자는 동안 널 내 방에 옮기기라도 했을 것 같냐, 하고 덧붙이면 금상첨화다. 애초에 ‘떠메고 가도 모를 만큼 깊게 잔다’ 같은 말은 유중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으니 놈도 금세 납득할 것이 틀림없었다. 저 지랄맞은 성격에 사과를 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죽인다고 덤비지는 못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해결책일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김독자는 자리를 뜨지 않은 채 유중혁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머리로는 그만 가자고 생각했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머리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생겼지? 그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쟨 세수할 때마다 거울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자기가 잘생겼다는 건 알겠지? 실감은 하나? 못 하나?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뿐더러 유중혁이 깨어 있다 한들 묻지도 못 할 의문들만 하나 둘 떠올랐다.

‘멸살법’에 유중혁의 외모를 묘사한 부분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국인이니까 검은 머리일 거고, 같은 이유로 대충 검은 눈일 것이고, 엄청 잘생겼다, 뭐 대략 그런 정도였다. 유중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심리가 묘사될 때마다 ‘어, 엄청난 미남...!’ 하니까 잘생겼나 보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김독자는 유중혁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가 유중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렇게 생긴 얼굴이 달리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세상에는 가끔 유중혁 뺨칠 만한 얼굴이 존재하고, 더 드물게는 유중혁 뺨을 두 번 정도 칠 만한 얼굴도 존재하지만 – 그래도 역시 우리 중혁이가 최고지. 김독자는 제 새끼가 세상에서 가장 귀엽다고 주장하는 고슴도치 아빠처럼 그런 생각을 했다. 아니, 근거도 있잖아? 자기합리화 스킬이 단숨에 레벨 10을 돌파할 기세였다.

입만 다물면 진짜 최곤데. 자는 얼굴은 천사 같잖아. 일반적으로 말하는 의미와는 좀 다르긴 하지만. 유중혁은 그 아기천사보다는 조각상에 훨씬 가깝긴 하지만. 아니 근데 진짜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생겼냐. 김독자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유중혁을 내려다보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침 떨어질 뻔했다. 그건 진짜 사망이다. 절대 처형당한다. 그는 한 손으로 입가를 문지르며 다시 잠든 남자를 바라보았다. 미남의 얼굴에는 끈끈이가 발려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눈을 돌릴 수 없을 리가 없다. 그렇게 많은 난전을 겪고도 유중혁의 얼굴은 깨끗했다. 1853회차쯤 되면 얼굴에도 커다란 흉터가 생긴다지만, 아직은 3회차다.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나저나 대체 어떤 놈이 저 얼굴에 그런 몹쓸 짓을 했을까. 눈깔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걱정 마라, 중혁아. 우린 네 얼굴을 구할 수 있다, 그렇지? 절대 그 어떤 누구도 너한테 – 아니, 네 얼굴에 손가락 하나 못 대게 할 테니까 말야. 김독자의 허리는 이미 거의 기역자에 가깝게 굽어졌다. 입을 가렸던 손이 점점 내려갔다. 유중혁의 얼굴은 이제 거의 30센티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

아주 잠깐은 말이다.

“...컥!!”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반대편 벽까지 날아가 있었다. 얻어맞은 배가 뒤늦게 욱신거렸다. 설화를 토해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눈물 때문에 살짝 흐릿해진 시야를 들고 보니 유중혁이 침대 위에 반쯤 몸을 일으켜 앉아 있었다. 뭐가 그렇게도 불만인지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야 이 미친놈아, 잘 자다 말고 뭐야?”

“자는 사람한테 콧김 뿜지 마라.”

“내가 언제? 내가 뭘 했다고?”

아주 약간 양심이 켕겼지만 김독자는 일단 최대한 큰소리를 쳐 보았다. 유중혁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일어난 김에 한 마디만 하자. 여기 내 방이거든? 네가 내 침대에서 잔 거라고. 그러니 일어났으면 이제 나한테 정중히 사과하고 나가 줘야 할 타이밍 아니냐?”

“여긴 내 방이다.”

“...중혁아, 너 잠 덜 깬 거 아니...”

“시끄럽다. 이젠 내 방이니 나갈 거면 네놈이 나가라.”

또 한번 귀찮게 굴면 죽이겠다. 유중혁은 그 말만 하고는 조금 전처럼 돌아누웠다. 김독자는 눈을 깜빡였다. 지금 뭔가 좌시할 수 없는 단어가 섞여 있었다. ‘이젠’? 그건 마치 기존에는 김독자의 방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 유중혁의 방으로 바뀌었다는 느낌이었다. 아니 누구 마음대로? 김독자는 다시 바깥을 내다보았다. 다시 봐도 자기 방이 맞았다. 다만 –

언제부터인지 문에 걸린 명패가 유중혁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공단 통합했잖아요. 대표님 방은 하나면 되죠.”

아일렌이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말을 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말했다. 물론 이해할 수는 없었다. 김독자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녀를 바라보다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럼 유중혁이 쓰던 방은? 아일렌은 잠시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이내 식당, 창고, 입원실, 그리고 누군지도 모를 몇 사람의 이름이 쏟아져 나왔다. 아무튼 그 중에 있었는데. 그녀가 그렇게 덧붙였다. 그 방을 뭘로 바꿨는지 기억하지도 못 하는 눈치였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좀 같이 쓰셔도 되잖아요? 그 방 넓으니까.”

“아니, 하지만... 그 유중혁이라고? 침대는 하나뿐이잖아.”

“공단에서 대표님이 그분하고 가장 친하잖아요.”

“아니, 그게, 나는, 그게, 어라? 그게 그렇게 되나?”

“고민은 딴 데 가서 하실래요? 저도 바쁘거든요?”

어영부영 쫓겨난 김독자는 눈을 깜빡였다. 아니 내가 3년을 비웠다며? 그런데 어떻게 아직도 내가 제일 친한 사람일 수가 있어? 물론 그 뒤엔 씁쓸한 생각도 뒤따랐다. 우리 관계를 친하다고 부를 수 있기는 한 건가? 그들은 생사를 따로 한 동료였다. 어느 샌가 유중혁에게 ‘생과 사의 동료’ 같은 설화가 생긴 걸 보면 이젠 정말 생사를 함께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어느 쪽인가 하면 약간 불안하고 좀 개복치 같긴 해도 <김독자 컴퍼니> 내에서 최강의 화신이란 생각도 한다. 그런데 그걸 친하다고 말할 수 있나?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 새 자신의 방 앞이었다. 명패에는 여전히 유중혁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무래도 이 공단은 김독자의 것이 아닌 게 분명했다. 이름이 ‘유중혁-김독자 공단’일 때부터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사실은 3년 사이 대표가 유중혁으로 바뀐 게 아닐까? 내가 어젯밤에 여기서 잔 게 오히려 유 대표님의 호의였던 게 아닐까? 김독자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을 잠시 중단했다. 노크를 해, 말아? 유중혁은 아까 다시 드러누웠다. 지금쯤은 다시 잠들었을 것이다. 노크를 해서 그걸 깨웠다간 방에 들어가지도 못 할지 모른다. 하지만 노크를 안 하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유중혁이 안 자고 있으면 매너도 모르는 놈이라고 한 소리 들을지도 모른다.

음, 방에 들어가지도 못 하고 쫓겨나는 것보다는 매너를 모르는 놈이 낫지. 김독자는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는 소리 없이 문을 열었다. 유중혁은 조금 전의 그 자세 그대로 자고 있었다. 옆으로 누워서 약간 몸을 앞으로 구부린 채였다. 어깨 안 아픈가? 똑바로 눕혀 주고 싶었지만 뒷감당을 할 자신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 나름대로는 경계태세일지도 모른다. 공단 내에 유중혁을 습격할 만한 사람이 있을 리 없지만 몸에 밴 습관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에그, 불쌍한 것. 괜히 어깨를 다독이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지만 참았다. 여기서 건드리면 또 몇 대를 맞을지 모른다.

그나저나 다시 봐도 잘생겼네. 김독자는 침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선 채로 또다시 그런 생각을 했다. 아니 저 얼굴이 아깝지도 않은가. 하려고만 하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포로로 만들 수 있을 텐데, 고독한 늑대도 정도가 있지. 도대체 3년 동안 뭘 한 거야? 왜 아직도 친한 사람이 나밖에 없어? 중혁아, 너 그러면 안 된다. 너 이번 생은 회귀 안 하기로 했잖아. 할 뻔했던 것도 네가 스스로 거부했잖아. 그럼 좀 더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살아야지. 몹시도 해 주고 싶은 말들이었다. 물론 그 중 어느 하나라도 입 밖에 냈다간 다음 순간 공단 쓰레기장에 처박혀 있을 것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애초에 내가 할 말은 아닌가. 김독자는 짧은 한숨을 쉬며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 확실히 이 방은 크지만, 그래 봐야 침대는 하나뿐이다. 더불어 혼자 자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으나 유중혁의 덩치를 생각하면 둘이 쓰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저 위에서 둘이 편하게 누우려면 아주 끌어안고 있어야 할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최애가 안아준다는데 싫을 사람은 없다. 김독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안아줘야 할 사람의 입장은 좀 더 생각해 볼 문제다. 그게 유중혁이라면 더욱 더.

결국은 어쩔 수 없이 바닥행이었다. 제 2안만은 고르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처량한 기분에 김독자는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소리를 냈다가 흑천마도가 날아올 것이 두려웠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도대체 유중혁의 방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몰래 카메라? 깜짝 이벤트? 막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이었다.

[히든 시나리오 - ‘친해지길 바래’를 획득하였습니다!]

“...무슨 뭐?”


+

<히든 시나리오 - 친해지길 바래>

분류 : 히든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당신은 동료의 외로움에 깊은 동정을 품었습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그와 애정 어린 스킨십을 나누고, 친밀도를 높이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결말이 당신을 기다릴 것입니다.

제한시간 : 3일

보상 : 동료의 호감도 상승

실패시 : 동료가 일행에서 이탈합니다.

+


“...미친, 뭐라고!?”

“...시끄럽다고 했다, 김독자.”

‘법보단 주먹이 가깝다’고 했던가. 말보다도 주먹이 빠른 것이 분명했다. 언제 일어났는지 유중혁이 흑천마도의 칼집으로 김독자의 뒷목을 후려쳤다. 김독자는 컥 소리도 못 낸 채 바닥에 엎어져, 제 신세를 한탄할 겨를조차 없이 기절하듯 잠들었다. 아니, 잠들 듯 기절했다는 것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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