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졸지 않고 끝까지 재미있게 봤다. 제국의 건국 설화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였는데, 언젠가 읽었던 책의 내용과는 달리 제국을 건국한 초대 황제가 자신의 사랑도 찾아 돈, 권력, 사랑을 모두 쟁취하는 결말이었다. 연극을 보고 있자니 왜 이 연극이 인기가 많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했고, 연출 역시 조금은 뻔할 수 있는 영웅담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어주었다.


"무척 재미있었어요. 왜 인기가 많은지 알겠던데요?"

"재미있었다니, 다행이군."


그런데 연극을 너무 집중해서 보느라 기력을 다 쏟아버린 건지, 궁으로 돌아오는 마차에 오르자마자 완전히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결국 황태자와 제대로 인사도 못 한 채로 눈을 떠 보니, 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래, 다음 날 아침인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여긴 도대체 어디지...?


"흐음, 일어났나?"

"으악!"


낯선 공간에 정신이 팔려 옆에 누군가 있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상황 파악을 하던 중 갑자기 내 위로 올라온 단단한 팔에 깜짝 놀란 나는 팔이 이어진 곳을 바라보았다.


"저, 전하?

"... 지금이 몇 시지?"


황태자가 방금 일어나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 그러니까..."


나는 눈동자를 열심히 굴려 시계를 찾았다. 다행히 시계는 눈에 잘 띠는 곳에 있었고,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5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이런, 나의 비께서는 아침 잠이 너무 없으시군. 조금 더 자는 게 좋겠어."


황태자는 살짝 뭉개진 발음으로 그런 말을 남기더니 눈을 감고 금세 잠이 들어버렸다.


"전하...?"


작은 목소리로 불러 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떡하지..?"


힘을 줘도 전혀 꼼짝하지 않는 팔에, 꼼짝없이 그가 일어날 때까지 멀뚱멀뚱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7시, 황태자가 눈을 뜨고 나서야 그의 팔 밑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나는 차라리 그가 잠들어 있을 때가 나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하, 연극을 볼 때에는 자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건가 싶었는데, 역시나더군. 나의 비께서는 여전히 어린 아이인 모양이야."

"아닙니다."


진지하게 말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웃음기 가득한 장난기 어린 말뿐이었다.


"나랑 있을 때에는 자고, 먹는 모습밖에 보이질 않으니 어디 믿을 수가 있나."

"..."


분하지만, 정말로 그와 있을 때에는 그 외에 무언가를 한 기억이 없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지금 함께 아침을 먹으러 가고 있다는 것도 그 근거가 되기도 했고.


"... 다음에는, 다른 걸 해요."

"응? 그럴까? 뭘 하면 좋아하려나.."


생각에 빠진 듯한 그는 자신만의 즐거운 상상에 빠진 어린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가 어린 아이인지 모르겠다. 그 얼굴에 분했던 마음도 싹 가라앉았다.

비가 쏟아진 그날, 내가 여전히 그를 마음에 품고 있음을 알게 된 나는 고민에 빠졌다. 내가 이 감정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하는 것이다. 이 감정을 숨기면, 최악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상처받고 또 후회하는 그런 결말은. 문제는 내가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가 나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면 더더욱. 헷갈렸다. 최악을 면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오늘 아침을 먹고 나면 그대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 아마 마음에 꼭 들 거야."

"제게요? 무엇인가요?"

"그걸 벌써 말하면 재미가 없지. 도대체 내가 보여줄 게 뭘지 기대하면서 식사를 하면 한층 즐거운 식사가 되지 않겠나?"


궁금해서 밥이 안 넘어갈 것 같았지만, 나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천천히 먹거라. 그렇게 먹다가 체하면 어쩌려고."

"충분히 천천히 먹고 있습니다."


실제로 객관적인 측면에서 나는 천천히 먹고 있었다. 그는 이미 식사를 마친 상태였고, 나는 마지막 남은 디저트를 먹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평소에 비하면 조금 빨리 먹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내가 무엇을 보여줄지 그리도 궁금하더냐."


정곡을 찔려 멈칫했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은 이 감각은 몇 번을 경험해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언제나 발가벗겨진 것처럼 부끄러웠다.


"이런, 더 놀리면 아주 얼굴이 터질 것 같구나. 그만 놀려야겠어."

"..."


그런 말이 나를 더 부끄럽게 한다는 걸 그는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반응을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걸 반복 학습을 통해 깨달은 나는 최대한 그에게 어떤 관심도 주지 않은 채 먹는 데에만 집중했다.


"다 먹었습니다."

"아주 깨끗하게 잘 먹었군. 그럼 이제 가 볼까? 우리 비께서 그렇게도 기다렸던 걸 보러."


인정하기 싫었지만, 솔직히 기대됐다. 그래도 그 기대하는 마음을 다 보여주고 싶지는 않아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런 내 마음도 눈치챈 듯 살짝 웃었지만.


그는 식당에서 나와 앞장서 걸었다. 그리고 그가 걸음은 멈춘 곳은 예상 밖의 공간이었다.


"자, 여기 문을 열어봐."


복도에 있는 많고 많은 문 중 하나의 앞에 선 그가 말했다.


"... 여기가 어딘데요?"

"그건 열어보면 알 거다."


마음에 의문을 품으며 문을 열자 이곳이 어디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내 방의 모습과 꼭 닮아 있었으니까.


"여기는..."

"그대의 방 구조와 똑같이 하려고 노력은 했는데, 어떨지 모르겠네. 구조는 역시 그대로가 편할 것 같아서. 가구는 내가 직접 엄선했으니 품질은 보장할 수 있어."

"..."


이건 어떻게 봐도 오로지 나를 위해 준비한 방이었다. 아까 잠시 보았던 그의 방과는 가구의 색도, 배치도 너무나도 달랐으니까.


"... 마음에 드나?"


그가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물음을 했다.


"최근에 바빴던 게 이것을 준비하기 위함이었습니까?"

"그래, 실은 어제 궁에 돌아오면 바로 보여주려 했는데, 그대가 잠이 드는 바람에 말이야."

"아..."


기뻤다. 너무 기뻐서 곤란했다. 나를 위해 바쁘게 움직였을 그가, 그 바쁜 와중에도 내게 편지를 보냈던 그가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그대만 괜찮다면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으면 하는데... 여기가 햇볕도 훨씬 잘 들고, 밤에도 따뜻하고, 또 여름에는 바람도 잘 들어오고... 무엇보다 얼굴도 더 자주 볼 수 있으니까..."


주절주절 설명을 늘어놓는 그의 귀 끝은 살짝 붉었다. 긴장을 하고 있는지 힘이 잔뜩 들어간 듯한 손등에는 핏줄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그의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척이나, 마음에 듭니다."


최악은 면하는 걸로는 부족했다. 그와는 언제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우와 어제 9시 40분쯤 저녁을 먹고 잤는데, 오늘 9시 40분에 일어났어요... 12시간 자고 일어나니까 상쾌하긴 하더라구요 ㅎㅎ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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