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이별이 떠났다 OST - 봄날 러브송 (In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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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준] Midnight Kiss. 06


w. 도화






이제야 막 태양이 온전하게 마드리드의 거리를 채워가기 시작한 이른 아침이었다. 어슴푸레 차올랐던 붉은 새벽빛이 살며시 가시고 아침을 알리는 따사로움이 마드리드의 곳곳을 빠르게 채워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차분함과는 달리. 그 시각 세훈이 머물고 있는 호텔 방은 새벽부터 울리는 핸드폰 요란한 진동이 퍼져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울어버린 준면을 달래고 또 달래다 잠이 든 모습까지 보고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세훈은 밤새 준면이 한 말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답을 쉽게 얻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 억지로 잠을 청한 지 고작 세 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결국 그 웅웅 울리는 진동에 세훈이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전화를 받는 세훈의 목소리가 잔뜩 잠에 잠겨 있었다.


“네, 오 세훈입니다.”

[아직도 자고 있는 거야? 미친놈아? 어?]


갑작스레 들리는 익숙한 욕에 세훈이 볼에서 핸드폰을 떼어 화면을 바라보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세훈의 꽤 오래된 친구 중 한 명이었다. 요즘 통 연락도 없던 애가 갑자기 왜 이런데. 세훈이 다시 눈을 꾹 감아 내리며 그대로 뒤로 털썩 누웠다.


“오랜만에 전화해서 무슨 소리야. 나 스페인이야. 여기 아침 일곱 시라고.”

[어제 도착한 애가 무슨. 아직 시차 적응도 안 됐겠다. 잠이 오긴 와?]

“…왜 시비인데. 나 어제 도착한 건 또 어떻게 알았어.”


갑자기 뜬금없이 뱉어지는 친구의 말에 세훈의 미간이 한껏 좁혀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시콜콜한 말이나 뱉으려고 전화한 건 아닐 텐데. 세훈이 조금은 귀찮다는 듯 하품까지 한 번 해보이며 다시 전화를 고쳐 잡았다. 여전히 세훈의 눈꺼풀은 아래로 깊게 내려간 상태였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친구의 말에 세훈의 표정이 굳어진 것은 금방이었다.


[너 김 준면씨랑 사귀는 거 진짜야?]

“……뭐?”

[얘 진짜인가 보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미 기사 다 났어. 여기 난리 났다고.]

“뭐라고…?”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은 세훈이 조금은 바보 같은 대답만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다시 핸드폰을 고쳐 잡으며 자신의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조차 되지 않아 멍하니 두 눈을 깜빡이는 그 행동이 조금은 처량해 보일 정도였다. 현재 시간 아침 일곱 시. 한국은 오후 두시. 세훈이 자신을 부르는 친구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그대로 뚝 끊고서 인터넷을 서둘러 켰다. 그 사이에도 세훈의 핸드폰에는 수많은 연락들이 속속히 도착하고 있는 상태였다.



김 준면. 오 세훈. S기업. 김 준면 열애.



이미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하고 있는 자신과 준면의 이름에 세훈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 파악조차 할 시간도 없었다. 설마 한 태주가 정말 기자에게 말한 건가? 잠시 고민을 한 세훈이었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태주의 성격이라면 자신의 눈치를 보느라 차마 기자들에게 연락을 돌리진 못했을 것이었다.

잠시 머리를 쓸어 올린 세훈이 맨 위에 뜬 기사를 다급히 클릭했다. 빠르게 기사를 읽어 내려가는 세훈의 미간이 좀처럼 펴질 생각을 않고 있었다. 그 기사에는 바로 어제 저녁, 자신이 준면의 호텔 방으로 들어가는 사진이 실린 상태였다. 아마 태주와 준면의 열애설을 위한 사진을 찍으려던 기자가 자신과 준면의 사진을 찍은 것으로 보였다. 아니, 그래도 열애설을 이렇게 터트린다고? 세훈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머지 기사를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노래는 물론 연기까지 착실히 쌓아온 김 준면씨가 처음으로 열애설이 터졌는데요. 그 상대 주인공은 다름 아닌 국내 손꼽히는 대기업 S기업의 오 세훈 이사였습니다. 현재 오 세훈 이사는 김 준면씨가 영화 촬영 중인 스페인 마드리드에 함께 머물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세훈이 빠르게 기사를 마지막까지 읽어 내리다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하루아침에 온 얼굴이 푸석푸석해진 기분이었다. 사실, 열애설이 터진 것은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준면과 단 둘이 있는 사진이 찍힌 것이 아니라, 자신이 준면의 호텔 방에 들어가는 상황이 교묘하게 매니저를 빼고 찍힌 것이었으니까. 물론 그 방도 준면이 머무는 방이 아니라고 기사를 내면 끝일 일이었다.

문제는 다름 아닌 사람들의 반응. 세훈이 방금 읽었던 기사를 포함하여 몇 개의 기사를 더 읽고는 결국 핸드폰을 저 멀리 던질 수밖에 없었다. 모든 기사의 댓글 창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터무니없는 말들에 속에서 열불이 터질 지경이었다.


[익명1] 열애가 아니라 스폰 아님?

[익명2] 이번에 김준면 영화도 전부 오세훈이 후원한다는데? 그럼 끝난 거 같은데. 이미지 관리 그렇게 하더니ㅋㅋㅋㅋㅋㅋㅋㅋ

[익명3] 미친 어쩐지 김준면 요즘 연기 엄청 찍었잖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져가는 소문들. 그저 사실이 아닌 가십거리만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들이 거의 가정사실화 되어가는 상황에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오직 준면의 실력과 노력만으로 올라선 자리마저 그런 식으로 매도되는 상황에 세훈이 아까보다 더욱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세훈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굳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세훈은 그렇게 한참을 속을 삭히고 있다가 서둘러 자리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그 누구보다 제일 걱정되는 것은 이 소식을 듣고 놀랐을 준면이었다. 그의 호텔 방으로 향하는 세훈의 걸음이 자꾸만 빨라지고 있었다.





*





아휴-. 그 시각 세훈과 마찬가지로 불이 나도록 오는 전화에 잠에서 깨버린 준면이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태주와의 열애설을 걱정하고 있던 게 바로 어제 저녁이었는데. 준면이 또다시 웅- 울리는 핸드폰을 보며 이를 그대로 뒤집어 버렸다. 이대로 멈춘 듯 아무런 생각조차 들지 않는 머리에 그저 준면이 할 수 있는 것은 한숨만을 퐁- 내쉬는 것뿐이었다. 머리를 얼마나 헝큰 것인지 안 그래도 잔뜩 눌린 머리는 이미 삐쭉 솟아있는 상태였다.

결국 뒤집었던 핸드폰을 저 멀리까지 던져버린 준면이 다시 이불 속으로 꼬물꼬물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푹, 뒤집어 쓰며 눈을 질끈 감아 내렸다. 속상해. 아니, 그저 속상하다는 말로 표현될 마음이 아니었다. 오직 무대 위에 자신에게로 향하는 사람들의 관심이 좋고, 그저 그 사랑이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다. 또 그만큼 좋아하는 노래와 연기였기에 5년 동안 버거운 상황이 찾아와도 늘 밝게 버틸 수 있었다.


“….”


하지만 그럼에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이 저주 아닌 저주가 있기에 자신은 언제든지 연예계 일을 놓을 생각 역시 하고 있었다. 결국 준면이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폭 감싸 안았다. 지금 자신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세훈이었다. 열애설로 연예계 일을 그만둘 것은 당연히 아니었지만, 자신은 늘 언제든지 미련을 버릴 다짐을 하고 있었기에 괜찮았다. 이 정도쯤이야 그다지 신경 쓸 상황도 아니었다. 하지만 세훈은…. 실시간 검색어 가장 윗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그 이름이 도통 눈앞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세훈을 둘러싸고 퍼지기 시작한 무성한 소문들과 이로 인한 기업 이미지 타격. 자신은 왜 이렇게 세훈에게 피해밖에 주지 못하는 걸까. 세훈이 듣는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진지하게 화를 낼지도 모르는, 조금은 바보 같은 생각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채워나갔다.


“준면씨.”


그때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준면의 침실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따라 걱정이 잔뜩 묻은 익숙한 목소리 역시 귓가에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에 끝까지 뒤집어썼던 이불을 살짝 내리고 눈만을 빼꼼 내민 준면이 방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엔 역시나 준면의 예상대로 다급히 뛰어온 듯 보이는 세훈이 서 있었다.


“…세훈씨.”

“….”


대충 씻고 온 것인지 부스스하게 가라앉은 머리 위로 물기가 흐릿하게 맺혀 있었다. 거기에다 편한 추리닝 복장까지. 오랜만에 보는 세훈의 편안한 모습에 준면이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귀여워. 방금 전까지 혼자 땅굴을 파고 있던 것은 벌써 저 멀리 날려버린 준면이 실실 올라가는 입 꼬리를 애써 내렸다. 이 순간마저 세훈의 열렬한 얼빠가 되어버리는 자신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는 했다만. 자꾸만 시선이 가는 그 차림은 자신 역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평소라면 그저 아무런 감정조차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는 그 눈가가 강아지마냥 축 쳐져 있는 게 이렇게나 귀여울 수가.

하지만 그런 준면을 전혀 모르는 세훈은 그저 아무런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에 심장이 한 번 철렁했다. 아까 혼자 방에서 그리 차갑게 화를 내던 오 이사님은 이미 사라지고, 그저 연인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팔불출만이 남아버린 상황이었다. 세훈이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 자리에 앉는 준면을 보다 그 옆으로 서둘러 걸어왔다. 그리고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으며 준면과 시선을 마주했다. 오직 앞에 앉은 연인에 대한 걱정만이 가득한 두 눈에 준면 역시 덩달아 세훈을 차분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준면씨. 또 혼자 자책하고 있었죠.”

“세훈씨….”


자신의 손등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을 잇는 세훈에 준면이 순간 멈칫했다. 역시나 함께 한 10개월은 그저 헛된 기간이 아니었다. 준면이 세훈의 손길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살며시 내렸다. 사실이었잖아. 어찌 보면 연예인이라는 직업 때문에 이미지 타격을 더 크게 받은 것은 자신이면서, 준면은 참으로 바보 같게도 세훈을 더 먼저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모든 게 자신 때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하면서. 준면이 차마 그 이후의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런 준면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세훈이 그를 천천히 품 안으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는 다 괜찮다는 듯 준면을 천천히 도닥이기 시작했다. 다정한 그 손길에 준면이 눈을 꾹 감아 내리며 세훈의 품으로 고개를 더 파묻었다. 천천히 이어지는 일정한 도닥임에 쿵쿵 뛰었던 심장이 가라앉기 시작한 것은 금세였다.


“괜찮아요, 준면씨.”

“…세훈씨.”

“그래도 상황 정리가 필요하니까 잠시 한국에 갔다 와야 할 거 같아요.”

“….”

“영화 촬영은 잠깐 멈춰질 거예요.”

“….”

“그동안 좀 쉬면서 여기 여행도 하고 그래요. 같이 하면 좋을 텐데…. 미안해요.”


하지만 이어진 세훈의 미안하다는 말에 준면은 더욱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뾰족한 바늘이 자신의 속을 그대로 쿡쿡, 찌르는 기분이었다. 정리해야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세훈의 말에 자꾸만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세훈 역시 이 영화에 투자한다는 사실 하나로 그는 물론, 세훈의 기업마저 타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스폰서. 이 말 하나가 가지는 파장은 상상이상으로 더 큰 것이었다.

준면이 자꾸만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고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세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라는 듯 싱긋 웃는 세훈의 얼굴. 그런 세훈의 모습에 결국 준면의 얼굴이 그대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참으로 바보 같다, 이 사람은. 준면이 울컥 터지는 속에 손을 뻗어 세훈의 손을 꾹 잡아왔다. 평생 놓치기 싫은 손이었다. 늘 곁에 있고 싶다는 그 욕심에 지금껏 자신의 마음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


“나중에 우리 같이 갈 곳, 준면씨가 먼저 가보는 거라고 생각해요. 사진도 많이 찍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응?”

“…세훈씨.”

“….”

“나도, 나도 갈래요.”


준면이 세훈의 눈을 피하지 않으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자꾸만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이를 감추는 것도 힘들었다만, 준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준면의 머리를 살살 넘겨주고 있던 세훈의 손길은 그대로 멈춰질 수밖에 없었다. 세훈이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싶은 마음에 눈을 느릿하게 한 번 깜빡였다.


“…준면씨도요?”

“응응…. 나도 세훈씨랑 같이 갈래….”


조금은 바보 같이 되물어진 세훈의 말에 준면이 고개가 몇 번이고 아래로 끄덕여졌다. 준면이 조금은 아이같이 칭얼대며 세훈의 허리를 더욱 꾹 붙들었다. 조금이라도 세훈과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한국가면 모든 것을 다 말해주겠다고, 그리 다짐한 게 고작 어젯밤이었는데. 이젠 그런 다짐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전부를 다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혹여나 세훈이 떠나면 어쩌지 싶은 불안함은 여전했지만, 그 불안함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아니, 이젠 그 불안함보다 더 커져버린 확신.

자신의 말에도 쉽게 바꿀 것 같지 않은 준면의 세훈이 조금은 난처한 표정을 해보였다. 한국가면 힘들 텐데…. 아마 공항에서부터 기자들은 자신들에게 따라 붙을 게 분명했다. 대기업 이사와 톱스타 간의 열애. 이미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한 것처럼 세훈과 준면의 연애는 꽤나 큰 파장을 몰고 온 상태였다. 아마 온갖 취재진이 공항에서부터 진을 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본가와 오피스텔, 준면의 집까지 대기하고 있을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옆에 있고 싶어….”

“준면씨.”

“….”

“…그래요, 그럼. 같이 들어가요.”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품에 고개를 파묻은 채 웅얼거리고 있는 준면을 보니 차마 안 된다는 말이 입 밖으로 꺼내지지가 않았다.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준면에 자신 역시 이곳에 그를 놓고 가면 일조차 손에 잡히지 않을 게 확실했다. 결국 세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준면이 여전히 자신을 달래고 있는 세훈의 손길을 느끼다 입술을 한 번 앙, 다물었다. 세훈과의 열애를 부인하는 기사 따위는 낼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훈 역시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아니, 아마 세훈은 전적으로 자신의 뜻을 따를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풀어야 할 문제. 세훈에게 이 인형으로 변하는 저주를 말하지 않은 채 열애를 인정할 수는 결코 없었다. 준면이 여전히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세훈을 바라보았다. 마주하는 눈동자에 가득 들어찬 자신의 모습 하나만으로도 이렇게나 심장이 빨리 뛸 수 있는 걸까. 준면이 손을 뻗어 세훈의 볼을 살살 쓰다듬었다. 언제나 자신에게 늘 다정했던 세훈인데. 항상 그의 모든 시선 끝에는 오직 자신만이 서 있었는데. 그저 두렵다는 생각 하나에 자신은 그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스스로를 너무나도 어두운 동굴에 가두고 있떤 것인지도 몰랐다. 세훈에게 모든 비밀을 말하겠다던 다짐을 뱉는 순간조차 자신은 그에게서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준면이 세훈과 시선을 마주하며 입 꼬리를 당겨 가득 웃어보였다. 그리고 매 순간 세훈이 반하고 또 반했던 그 봄꽃 같은 웃음을 환하게 짓기 시작했다.


“한국가면….”

“….”

“…나 세훈씨랑 함께 있을래요.”

“준면씨.”

“옆에 있어 줄 거죠?”


평소 같지 않은 어색한 물음에 세훈이 끄덕이면서도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혹여나 기자들이 몰린다느니 그런 걱정에 자신 역시 준면을 보낼 생각은 없었다만. 이렇게 먼저 함께 있자고 말하는 준면은 평소에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젯저녁도 그렇고, 방금 전도 그렇고. 홀로 고민에 가득 휩싸여 있는 준면을 보니 차올랐던 물음마저 다시 삼켜지는 기분이었다. 여태껏 무엇이 준면을 이렇게나 힘들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그 진실을 들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자신도 모르게 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자신이 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세훈의 모습에 준면이 결국 또다시 환한 웃음을 걸쳤다. 자신이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끄덕여주는 저 작은 행동과 언제나 다정하게 지어주던 웃음. 준면이 세훈의 허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그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저주에 대한 모든 사실을 말했을 때, 자신에게서 멀어질 세훈과 그런 그를 보며 스스로를 숨겨야 할 어둠은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여전히 끝도 없이 울리는 핸드폰 진동이었지만, 준면에게는 이 복잡하게 터져버린 열애설조차 그다지 중요한 것이 되지 못했다. 있잖아요, 세훈씨. 준면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세훈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조금은 용기를 낼 수 있을 거 같아요.



마침내 터져버린 마음이었다.








***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끝없는 구름을 준면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자꾸만 들어차는 상념들을 그대로 잊어버리기 딱 좋은 풍경이었다. 스페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한동안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준면이 옆에 앉은 세훈을 한 번 힐끗 올려다보았다. 할 일이 그렇게나 많은 것인지 평소에는 잘 볼 수 없던 안경까지 쓴 세훈이 비행기 안에서도 업무를 손에 놓지 않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 모습에 준면이 자신의 앞에 놓인 물 잔으로 손을 뻗었다. 집중하는 세훈의 표정이 꽤나 심장을 간지럽게 하고 있었다.

자신의 욕심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출발하기 바로 직전까지도 자신을 걱정하는 세훈에 괜찮다는 듯 고래를 끄덕였지만 준면 역시 초조한 마음을 쉽게 감추지는 못했다. 이미 공항에는 기자들이 잔뜩 몰려와 있다는 소식을 자신 역시 들었으니까. 준면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내뱉으며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어차피 비행기모드라 그 어떤 기사도 볼 수 없었다만 자꾸만 신경이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준면씨. 피곤하진 않아요?”

“…아.”

“졸리면 조금 자요. 깨워줄게.”

“세훈씨가 더 피곤해 보이는 걸요.”


하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은 역시나 이 다정한 목소리 하나 때문이었다. 어느새 세훈이 안경을 벗으며 준면의 손을 느릿하게 잡아왔다. 슬쩍 껴오는 깍지에 준면이 결국 포스스- 웃음을 터트리며 세훈을 마주했다. 그리고는 피곤이 가득 묻어 있는 세훈의 눈가를 살며시 도닥였다. 그런 준면의 행동에 세훈의 입가에도 역시나 잔잔한 미소가 퍼지는 건 금방이었다. 세훈이 자신의 볼 위를 만지작거리는 준면의 손을 살짝 붙잡아 그 위로 입술을 쪽, 부딪혔다.


“준면씨. 공항에서 나오면 바로 차타고 내 오피스텔로 넘어갈 거예요. 괜찮죠?”

“어…, 짐은요?”

“짐은 매니저한테 보내고.”

“…아.”

“준면씨는 나랑 함께 갈 거예요.”


궁금증이 가득한 준면의 눈가에 아예 그 쪽으로 몸을 돌린 세훈이 차분히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세훈은 공항과 기자들의 상황을 연락받은 상태였다. 예상은 했지만 공항은 물론이고 준면의 집, 세훈의 오피스텔마저 기자들이 몰려있다는 말에 세훈은 좀처럼 굳어진 얼굴을 풀지 못했었다. 그리고 준면에게 이 사실을 말한다면 그는 꽤 당황할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이 상황에서 준면 혼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면 그는 조금은, 아니 많이 무서워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아무리 준면의 직업이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연예인이라 할지라도, 이런 상황은 그 역시도 익숙한 것이 아니었으니.


“…음.”

“….”


하지만 세훈의 말에 준면의 입술이 앙, 다물어졌다. 그리고는 무엇을 깊게 고민하고 있는지 한참동안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세훈은 그런 준면을 전부 이해한다는 듯이 그저 별 말 없이 그를 기다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세훈이 손을 뻗어 준면의 귀 뒤로 머리를 살살 넘겨주었다. 눈을 도로로- 굴리다가, 자신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다시 입술을 꾹 다무는 그 모습에 참 바보 같게도 자꾸만 웃음이 비실 새어나왔다. 고민하는 모습마저 사랑스럽다, 세훈은 몇 번이고 그리 생각했다.


“…알겠어요, 세훈씨.”

“고마워요.”


그렇게 짧은 침묵이 지나고-. 준면의 입술 새로 긍정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준면이 자신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세훈을 보다 또다시 세훈의 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이를 살살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 도착하는 것은 오후 6시. 공항에서 빠져나가자마자 세훈의 오피스텔로 향한다면 아마 오늘은 정말 세훈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그 날이 되고야 말 것이었다. 열두시가 땡- 하고 지나면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자신의 비밀을 보여줄 바로 그 날이. 상상만으로도 온 몸을 부르르 떨게 하는 그 생각에 준면이 잠시 몸을 흠칫했다. 자정이 지나면 자신과 세훈의 관계에도 과연 소용돌이가 칠까.


“….”

“….”


준면이 자신의 반대편 손을 꾹 붙들고 있는 세훈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젠 확신할 수 있는 마음. 세훈과 마주한 손을 바라보는 준면의 눈가가 어딘가 모르게 밝아 보이다가, 또 그만큼 거세게 울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모든 시선을 메우고 있는 것은 그저 확신이었기에. 준면이 이번엔 자신이 마주한 세훈의 손 등 위로 입술을 촉, 내리며 생각했다. 그 시간이 지나도 우리의 관계는 여전히 잔잔한 파도일 것이라고-.





*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한 서울 하늘이 빠르게 달리는 세훈의 차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여름의 낮은 꽤나 길었지만 기자들을 피해 공항을 빠져나오는데 상당히 많은 시간을 쓰는 바람에 이미 저녁 하늘은 찾아온 지 오래였다. 불그스름하게 땅거미가 내려앉았던 하늘에 이젠 시원한 밤바람을 천천히 불고 있었다. 세훈이 직접 운전하고 있는 차가 그의 오피스텔 주차장으로 부드럽게 들어오고 있었다. 다행히 주차장까지 기자들이 들어오진 못한 것인지 조용한 안 쪽에 세훈의 입술 새로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 나왔다. 세훈의 차가 주차장 가장 안쪽 자리에 천천히 멈추어졌다.

세훈이 오피스텔로 오는 도중 세훈과 준면은 그 어떤 말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창밖만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준면에 세훈이 연신 그의 눈치를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 없었다. 그리고 그 침묵은 차가 멈추지는 이 순간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차에서 내린 세훈이 먼저 준면을 향해 말을 꺼냈다.


“올라갈까요?”

“…네.”


긴장감에 가득 굳어져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준면을 보며 덩달아 긴장한 세훈이 괜히 손을 바지에 벅벅 문질렀다. 함께 밤을 보낸 적은 없었지만 준면이 자신의 오피스텔을 온 적은 꽤나 많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 준면의 모습에 세훈이 자신도 모르게 침을 몇 번이고 꼴깍 삼켰다.

사실 한국으로 넘어오기 전 영화감독에게도 그렇고, 준면에게도 그렇고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 당당하기 말했지만 자신도 역시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미 함께 한국으로 귀국한 것이 보도된 터라 열애 부인 기사를 내는 것은 조금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인정하면 되지 않나, 이렇게 쉽게 생각하기에는 스폰서니 뭐니 둘을 둘러싼 가십거리는 결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세훈이 천천히 차에서 내리며 자꾸만 준면에게로 향하는 시선을 멈추지 못했다. 지금 세훈이 가장 궁금한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바로 준면의 마음이었다. 역시나 아무런 말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준면을 보며 세훈이 또다시 그의 얼굴을 연신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그저 고개만을 푹 숙이고 있는 준면을 천천히 불렀다. 단 둘이 타 있는 엘리베이터 안은 왠지 모를 묘한 공기와 긴장감만이 흐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준면씨.”

“네, 네?!”


그리고 그런 세훈의 부름에 바닥만을 바라보고 있던 준면이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무슨 일이 있냐는 듯 걱정이 가득한 눈짓을 해 보이는 세훈이 시야에 바로 들어왔다. 결국 그 모습에 준면의 고개가 좌우로 빠르게 저어졌다. 공항부터 세훈의 오피스텔로 향하는 이 순간까지. 기자들에게 잔뜩 둘러싸인 그 혼란스런 공간을 빠져나오는 중에도 준면은 자꾸만 멍해지는 시선을 도통 어떻게 할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자꾸만 심장이 저 바닥으로 쿵쿵, 떨어지다 못해 바스스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세훈이 자신의 모든 비밀을 받아줄 것이라는 확신이 어렴풋하게 있었지만, 그래도 입 안이 자꾸 말라가고 온 속이 타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띵-. 하지만 붙잡고 싶던 시간은 그런 준면의 마음도 몰라주듯 속절없이 흘러가기 바빴다. 이미 도착했음을 알리는 그 신호음에 준면이 또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올렸다. 자신의 앞에서 먼저 걸어가는 세훈의 뒷모습에 더 이상 빨라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 심장의 박자가 끝도 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현재 시간은 열시 반. 지금 저 오피스텔로 들어간다면 아마 자신은 내일이 될 때까지 이곳으로 다시 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준면씨? 안 들어와요?”

“…가, 가요.”


세훈의 고개가 다시 뒤로 돌아갔다. 이미 열린 오피스텔 문에도 그저 복도 한 가운데서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준면을 보니 잠시 사그라들었던 의아함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세훈은 준면을 다시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 목소리에 자꾸만 퍼져가는 상념을 붙잡은 준면이 다급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준면까지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서자 등 뒤로 탁- 닫히는 문. 유난히도 크게 들리는 그 소리에 이를 따라 준면이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어떡해, 정말. 귓가를 채우는 적막에 내달리고 있는 심장소리가 세훈에게까지 옮겨가는 기분이었다.


“준면씨. 배는 안 고파요? 시간이 많이 늦었어요.”

“저는 괜찮아요. 세훈씨는요?”

“저도요.”


다정히 물어오는 세훈이 준면이 애써 차오르는 긴장감을 억누르곤 답을 뱉었다.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옷 방으로 걸음을 옮기는 세훈의 뒷모습으로 준면의 시선이 길게 따라붙었다. 준면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 마시며 자신도 역시나 세훈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 준면씨 옷. 잠깐만요. 저번에 놓고 간 옷이 어디 있을 텐데.”

“….”

“씻고 나와요. 옷 챙겨 둘게요.”


자신을 졸졸 따라온 준면을 보며 결국 세훈이 씩- 웃어보였다. 이렇게 있으니 진짜 결혼한 것 같네. 역시나 혼자 생각할 수밖에 없는 그 말을 한 번 곱씹으며 세훈이 준면을 향해 말을 건넸다. 준면이 예전에 놓고 간 옷을 찾는 세훈의 손길 역시 빨라진 상태였다. 아마 스페인에서 여기까지의 긴 비행과 기자들의 시선으로 인해 아마 준면은 지금 꽤나 피곤한 상태일 게 분명했다. 내일이면 또 준면의 소속사와 상의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닐 테니 이렇게 맘 편히 쉬는 시간도 지금이 마지막일 것이었다. 얼른 씻고 자요. 여전히 뒤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준면을 보며 세훈이 말을 덧붙였다.

준면이 들고 있던 핸드폰을 옆 탁상에 천천히 올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짐은 매니저를 통해 자신의 집으로 보낸 상태이기에 자신은 지금 정말 몸만 온 상태였다. 그래도 종종 들렸던 세훈의 오피스텔에서 사용했던 칫솔이나 옷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준면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긴장에 또다시 세훈을 힐끔 바라보고는 그제야 욕실로 향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

“….”


하지만 그런 준면의 걸음은 뒤에서 자신을 안아오는 세훈으로 인해 그대로 멈춰질 수밖에 없었다. 귓가에서 바로 들리는 세훈의 숨소리에 쿵쿵 뛰던 심장이 뚝 멈춰지는 것만 같았다.


“…준면씨. 기분 안 좋아요?”

“아니요….”

“그럼 많이 걱정돼요?”

“….”


이어진 세훈의 두 번째 물음에 결국 준면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이렇게 갑작스레 터진 열애설이 걱정되는 건지, 아니면 한 시간 반 후 모든 비밀을 털어놓아야 할 그 상황이 걱정된다는 건지. 아마 준면 스스로도 답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었다. 준면이 자신의 허리에 둘러진 세훈의 든든한 팔을 살살 쓰다듬다, 그에게로 몸을 더 기댔다.


“준면씨.”

“…네.”

“준면씨가 결정해요.”

“뭘요?”

“우리 열애설 난 거. 인정하자고 하면 인정하고, 부인하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할게요.”

“….”

“스폰서니 뭐니, 그런 말들은 신경 쓰지 마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고백처럼 쏟아지는 세훈의 말을 들으며 준면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감겼다 올라왔다. 잔잔히 흩어지던 세훈의 목소리였지만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그의 팔에는 더욱 힘이 들어가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를 따라 준면의 속눈썹이 깊게 흔들렸다. 세훈에게 모든 것을 말하겠다는 그 마음은 변함이 없지만, 그와 동시에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 역시 덩달아 커지고 있었다. 이 오피스텔에 들어선 이후로 자꾸만 숨이 턱턱, 막혀와 세훈을 바라보면서도 자꾸만 정신이 멍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는 세훈을 보니 그 모든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결국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쉰 준면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세훈의 팔을 천천히 풀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세훈과 또렷이 시선을 마주했다. 깊게 잠겨 있는 세훈의 두 눈동자에 오직 자신만이 담겨있다는 사실이 몸서리치게 좋았다. 전부 다 괜찮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는 세훈의 이 손길도 발끝이 저릿할 만큼 좋았다. 모든 것을 걱정하지 말라는 그 행동. 준면이 세훈의 손길을 가만가만 받고 있다가 이번엔 자신이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꾹 끌어안았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마주하는 세훈과 준면 사이를 메운 것은 그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애정 뿐이었다. 마주한 두 심장 소리가 쿵쿵 울리다 못해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듯 보였다. 끝도 없이 올라가는 긴장감 속에서 왠지 모르게 피어나는 아찔함. 세훈의 눈동자에 그려진 것이 오직 준면인 것처럼, 그 역시도 오직 세훈만을 담아내고 또 담아내고 있었다. 결국 그 숨 막히는 찰나를 뚫고 준면이 자신의 온 마음을 천천히 고백하기 시작했다.


“…세훈씨랑 밤새 이야기도 하고 싶고, 술도 마시고 싶어요.”

“…준면씨.”

“아침에 눈을 뜨면 내 옆에 세훈씨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일찍 일어나서 세훈씨 넥타이도 내가 메주고 싶고, 배웅도 해주고 싶어요. 밤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아무 걱정도 없이…, 그렇게 세훈씨 옆에, 밤새도록 계속 있고 싶어요.”


세훈의 품에서 고개를 든 준면이 그를 마주하며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평생 동안 결코 말할 리 없다고 생각했던 그 고백을 토해내듯 말하고 있는 이 순간이 정말 꿈은 아닐까, 이런 생각마저 자꾸만 피어올랐다. 하지만 준면은 그러면서도 중간 중간 차오르는 울컥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자꾸만 머뭇거림 역시 반복하고 있었다. 준면이 억지로 숨을 들이 삼키며 늘 마음속으로만 하고 싶었던 말을 뱉고 또 뱉었다. 너무나도 큰 욕심이란 것을 알기에 지금껏 단 한 번도 꺼낸 적 없던 마음들. 세훈의 옆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벅차올라, 그 보다 더 큰 행복들은 바라지도 못했던 날들. 세훈을 조금이라도 더 바라보기 위해 준면이 눈가로 가득 차오르는 눈물을 다시금 안으로 담아냈다. 이 순간 자신의 고백을 가만히 듣고 있는 그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바라보고 싶었다. 이젠 다시 못 볼 수도 있는 그 얼굴. 이것마저 욕심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겐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갑작스레 터지는 준면의 고백에도 세훈은 그저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세훈 역시 준면과의 마주침을 피하지 않고 그가 하는 모든 것을 찬찬히 담아내는 중이었다.


“세훈씨.”

“…응.”

“우리 결혼할래요?”


하지만 그때, 자신의 귓가를 파고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세훈이 눈을 한 반 깜빡였다. 걷잡을 수 없는 준면의 말과 행동들은 늘 자신을 홀린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 말이 준면에게서 흘러나오자 세훈은 오히려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혼. 세훈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축이며 눈을 꾹 감았다 올렸다.


“…진심이에요?”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바보 같은 대답밖에 하지 못하는 자신이 조금은 원망스러워졌다. 하지만 세훈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을 리 없었다. 혹여나 준면이 열애설이란 이 견디기 힘든 상황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인지, 그런 걱정이 먼저 튀어나왔다. 마주한 준면의 눈동자에 거짓이라곤 담겨 있지 않아 이리도 더 복잡한 마음이 생기는 것일지도 몰랐다.


“답은…, 지금 말고.”

“….”

“열두시가 지난 다음에 해줘요.”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한 시간. 준면이 옆에 걸린 벽시계를 한 번 바라보곤 다시 세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한 시간 뒤에 자신은 정말 어떻게 될까. 준면이 세훈의 얼굴을 몇 번이고 담아내며 자꾸만 어그러지는 속을 다독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런 준면을 내려다보고 있는 세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모두 정의 내릴 수 없는 복잡함이 시곗바늘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






거짓말처럼 이어졌던 준면의 고백 이후 세훈은 한동안 멍해지는 시선을 숨길 수가 없었다. 준면이 먼저 씻고 나간 욕실에서 혼자 몇 번이나 자신의 볼을 꼬집어 봤는지도 몰랐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바보 같은 생각도 해봤지만 볼에서 느껴지는 알싸한 아픔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 세훈은 홀로 욕실에서 제자리로 돌아올 생각조차 하지 않는 심장을 다독이고 또 다독인 후에야 나올 수 있었다.


“준면씨. 이리 와요.”

“으응…?”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던 세훈이 침실로 들어오는 준면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환하게 터트렸다. 놓고 간 옷을 찾지 못해 결국 자신의 옷을 입은 준면의 모습에 자꾸만 웃음이 비실 새어 나왔다. 제일 작은 사이즈의 옷을 골라서 줬음에도 불구하고 소매 안으로 쏙 사라진 준면의 손으로 연신 시선이 따라붙었다. 귀여워. 결국 세훈의 두 눈마저 가득 휘어졌다.

하지만 그런 세훈의 웃음에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준면의 얼굴로는 금세 뽀로통함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세훈은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바라는 준면을 끌어당기고는 그의 소매를 천천히 접어줄 뿐이었다.


“많이 피곤하죠. 얼른 자야겠다.”

“…음. 아니요. 그래도 세훈씨 대답 듣고 자야죠.”

“…아.”


자정까지는 단 십 분만을 남겨두고 있는 11시 50분. 준면이 자신의 소매를 꼼꼼히 접어주는 세훈을 바라보며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어차피 열두시 지나면 인형으로 변해서 이런 옷도 필요 없는데…. 차마 뱉을 수 없는 그 말들만이 입안에서 한참을 맴돌고 있었다. 그래도 세훈의 향이 가득한 옷에 초조함에 쿵쿵 뛰었던 심장이 조금은 가라앉은 것인지 준면의 얼굴 위로 꽤나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니, 사실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오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것인지도 몰랐다. 너무나도 터무니없고 막연한데, 오히려 확신이 드는 기분. 준면이 지금도 여전히 같은 걸음을 내딛고 있는 초침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세훈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세훈의 이마에 처음으로 먼저 입술을 촉, 부딪혔다.


“…준면씨?”


이를 따라서 세훈의 눈과 코, 그리고 볼에도 준면의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런 준면의 행동에 그대로 심장이 쿵, 뛰어버린 세훈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잠시 굳혔다. 마지막으로 입술까지 전해지는 준면의 온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만 느껴졌다.


“세훈씨, 내가 물어봤었죠.”

“….”

“나를 사랑하냐고.”

“…네.”

“아마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몰라요.”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준면의 말에 세훈의 눈가 위로 금세 당황이 따라붙었다. 차분히 숨을 죽이고 말을 잇는 준면에 지금 세훈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눈꺼풀만을 깜빡이는 것뿐이었다. 이젠 해탈까지 한 듯 보이는 아련한 준면의 모습에 그 어떤 말도 쉽게 흘러나오지 않았다. 직감이었다. 늘 어딘가 모르게 자신을 꽁꽁 숨기던 준면이 처음으로 꺼내 보일 자신의 모든 것. 세훈이 자신도 모르게 앞에 선 준면의 허리를 꾹 붙들었다. 이대로 꼭 준면이 사라져버릴 것은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그런 세훈의 행동에 준면이 그를 바라보여 애써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마저 설렘으로 바꾸어 준 사람. 세훈의 옆에 서 있는 그 사람이 자신이길 매 순간 바라고 또 바랐었다. 준면이 빠르게 움직이는 시곗바늘을 한 번 바라보다 다시 세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세훈씨.



수없이도 담아내던 이름이었지만, 자신에게는 그 부름 하나조차 눈물 날 만큼 버거운 순간들이었다. 준면이 눈꺼풀을 깊게 내렸다가 다시 또렷이 올렸다. 이 말을, 그 부름을 다시 꺼낼 수 있긴 할까. 이제 59분을 지나는 시곗바늘에 준면이 천천히 세훈의 볼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결국 자꾸 터지는 울컥함을 참아내기 위해 그를 보며 가득 웃어보였다.


“세훈씨가 내 전부를 사랑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마침내 이어진 준면의 마지막 고백. 오로지 진심뿐인 그 말이 세훈의 심장으로 그대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시곗바늘이 정확히 열두시를 지나고 있었다.








새준온3 전 웹 공개본은 해당 편이 마지막입니다. 이후 <미드나잇 키스> 속 사랑스러운 새준이들은 소장본 속에서 만나요! 포스타입에는 새준온3 이후 유료공개 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桃花 도화 / RPS 찬백 세준 @dohwa_x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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