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반 반장 이대휘 클라스 보소....

생일이라고 애슐리 룸 하나를 통째로 빌린 이대휘 엄마 덕에 그 자리에서 소 한 마리도 잡아먹을 수 있을 만큼 돌아서면 배 고픈 고딩 남자애들은 가방을 던져놓고 바로 샐러드바로 달려들어 치킨이며 탕수육 등 육고기부터 조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저학년때나 실내놀이터를 빌려 생파를 하지 고등학교에서는 이럴 줄은 몰랐는데 전교 1등에, 사업하는 아버지와 운영위원장 엄마를 두고, 반장만 하는 이대휘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선물은 괜찮다고 했지만 인당 13900원짜리라 우리 가족도 어쩌다 한 번 생일 때나 와보는 곳이라 나는 차마 빈손으로 갈 수 없어 다이소에 가서 거금 5천원짜리 이어폰을 사서 포장을 했다. 친구 생파간다고 선물 사게 돈 달라는 나한테 엄마는 요즘에도 밖에서 생파하냐고 하루종일 땅을 파보라고 100원짜리 하나 안 나온다고 잔소리를 한바탕 듣고서야 받은 돈이었다.

 

너무 대충 주나 싶었지만 생일 축하한다느니 그런 걸 쓰기엔 너무 간지럽고, 전교 1등 이대휘가 32명 중에서 29등 하는 나를 기억할까도 싶어 그냥 가방 속에 넣어가지고 있다가 나와는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우등생들끼리 모인 자리에 앉아 다른 놈들이 치킨이나 탕수육, 피자로 접시가 넘치도록 담아올 때도 풀떼기와 과일이나 담아와 포크로 조그맣게 찍어먹는 이대휘를 슬쩍슬쩍 보다 파스타 가지런 간 사이에 슬쩍 놓고 왔다. 동글동글한 머리와 얼굴에 한쪽만 쌍꺼풀 진 빛나는 눈, 그리고 남자애 답지 않게 장미꽃같이 도톰하고 빨간 입술이 내 눈에 들어왔다. 13900원짜리 얻어 먹으면서 5천원짜리 다이소 이어폰을 주는 민망함이란...하긴 이대휘는 내가 왔었는지 어쩐지도 모를 것이다. 이대휘가 귀족이라면 난 천민이니까.

 

 

- 지가 언제부터 사장 사모님이었다고. 학교 다닐 때는 전교 꼴등에 순 날라리였던 게...

 

샐러드바를 몇 번이나 오가며 배불리 먹고 집으로 오니 여고동창회를 다녀온 엄마의 푸념 섞인 혼잣말이 시작되자 아빠도 나도 동생 예림이도 최대한 빨리 엄마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피하기 시작했다. 여고동창회를 다녀온 엄마의 레퍼토리는 똑같아서 우선, 엄마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공부를 넘나 잘해 전국 석차에서 찾는 게 빠를 정도라 서울대 법대가 목표였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외할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망하면서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작은 회사에 취직했다는 것이다. 엄마 말에 의하면 당시 외갓집은 남천동에서 가장 큰 집이었는데 초등학교때 친구들은 주산학원 다닐 때 엄마는 피아노학원을 다니며 집에 피아노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피아노마저 외할아버지 사업이 망하면서 팔았다는 게 믿거나 말거나 한 나와 동생 예림이의 귀에 귀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야 했던 이야기였다.

 

- 엄마 때는 서울대에 장학금이 없었나? 그리 공부 잘했으면 장학금이라도 받고 가지 그랬나?

 

어릴 때 엄마의 무한루프 푸념을 듣다가 순진하게 이렇게 말했다가 그날 빨간펜 학습지를 12장 풀어야만 했다. 그 후 난 엄마의 푸념이 시작되면 재빨리 내 방으로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았다.

 

- BMW를 몰고 왔더라니까. 뻔히 시내는 주차 힘드니까 버스 타고 오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나도 서울대 법대 나왔어 봐. 니네 아빠 만났겠나. 적어도 삼성 가 며느리감이었다. 내가. 삼성가 며느리가 BMW 타는 거 봤나? 못해도 벤츠지 벤츠.

 

아빠를 만나 이유도 외할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면서 고등학교만 졸업한 채 작은 회사에 다니던 엄마는 아버지의 열정적인 구애로 못이기는 척 한번 만났는데,

 

-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집에 가는 버스가 끊기지만 않았어도...내가 미쳤지...

 

다른 게 다 참말이라도 이 말은 뻔한 거짓말이라는 건 동네 똥개도 다 안다. 부산에 눈이 오면 얼마나 온다고 집에 가는 버스가 다 끊긴단 말인가.

 

- 현숙이 고건 공부는 안하고 맨날 용두산 공원에서 남자애들이랑 놀러만 다니던 게...그래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니까.

 

처음엔 모르고 동창회 나갔다가 들어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얼굴이 뚫어질 듯 클렌징크림으로 화장을 지우는 엄마한테 저녁 안 먹냐고 물었다가, 공부도 안하고 하루 종일 뭐 했냐고 한소리만 더 들었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내가 밥 언제 먹냐고 물어봤지 공부 언제 하냐고 물었나...

툴툴거렸더니 엄마의 무한루프 신세한탄을 피해 내 방으로 피신한 아빠가 한마디 하신다.

 

- 니가 이해해라. 그래도 엄마가 뒤끝은 없다 아이가.

 

정말 외갓집에 갈 때마다 외할머니한테 묻고 싶다. 진짜 우리 엄마 고등학교때 공부 잘했어요? 서울대 갈 실력이었어요? 정말 2층집에서 살면서 동네에서 엄마가 피아노 있었어요? 근데 엄마 닮았으면 공부 잘해야지 왜 나는 돌대가리예요?

 

아빠가 안방으로 건너간 후 나는 가방속에서 이대휘에게 미처 주지 못한 빨간 장미꽃을 꺼냈다. 이어폰 하나만 덜렁 주기 미안해 다이소 옆 꽃집을 지나다 가게 앞에 꺼내놓은 빨간 장미를 보는 순간 문득 이대휘의 도톰하고 빨간 입술이 생각나 거금 3천원짜리 한 송이를 산 건데, 도대체 무슨 용기로 산 건지 차마 선물과 함께 주지 못하고 하루종일 가방속에 넣고 다녔더니 이미 꽃 부분은 댕겅 부러진 채였다. 결국 쓰레기통에 버리려다 서랍 속에 넣어버렸다. 괜히 사서 돈 3천원만 날렸다.

 

 

“야. 박우진 일어나 봐.”

 

첫 교시부터 엎어져 잠든 나를 깨우는 건 우리반 실장 이대휘. 안 봐도 뻔하고 공부 잘 하는 부잣집 애는 뭐가 달라도 달랐으니까. 이미 이 교실과는 어울리지않는 꽃향기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이대휘...이곳 부산 애들답지 않게 교과서를 읽듯 또박또박 싸가지없게 말하는 말투만큼이나 하얀 셔츠는 주름 하나 없이 목까지 단추가 잠겨있고 넥타이도 빼먹지 않았을 테고, 조끼에 회색 마이까지 반듯하게 챙겨 입었을 테고, 네이비색 교복 바지도 얼룩 하나 없이 이대휘의 마른 다리를 감싸고 있을 것이다. 나한테 뭐 하나 쓸 만한 거 주지 않고 이대휘한테 몰빵한 하나님은 불공평하다.

 

“너 아직 영어수행평가 파일 안 보냈어. 어젯밤 10시 까지 보내달라고 했잖아.”

 

내가 못 들은 척 하는 건 초저녁부터 시작된 엄마의 무한루프 신세한탄이 자장가가 되어 방 침대에 누워 휴대폰 게임을 하다 휴대폰 모서리에 콧잔등 찍히는 줄도 모르고 잠들어 버린 탓도 있지만 아예 손도 대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씨발, 영어...개싫다. 아니 영어 뿐 아니다. 수학, 국어, 고전문학, 한국사, 윤사 다 어렵고 존나 싫단 말이다.

 

“들었어? 오늘 밤이 마감이라니까. 새대가리 네가 0점 처리되는 건 상관없지만 나까지 점수 깎인단 말야.”

 

참새 닯았다고 날 참새라고 부르는 건 참을 수 있지만 새대가리라고 부르는 건 참을 수 없다.

 

“니 뭐라켔나!!”

“모?”

 

독이 오른 수달처럼 코앞까지 바짝 다가와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한쪽만 쌍꺼풀 진 이대휘의 짝눈을 마주한 순간 에 내 머릿속은 아찔해졌다. 쌍꺼풀진 왼쪽 눈은 눈꼬리가 휘어져 귀엽고 순둥한데 쌍꺼풀 없는 오른쪽 눈은 눈꼬리가 올라가 성질만큼이나 날카롭고 까칠해보였다. 그 신비롭게 빛나는 투명한 짝눈을 한 채 코 앞에 다가온 이대휘의 숨결과 목소리가 달다 못해 아찔해서 내 머릿속은 몽롱해지면서, 그러면 안 되는데 이대휘의 도톰하고 붉은 입술에만 시선이 고정됐다. 심장이 쿵 하고 지구 내핵까지 떨어진다. 아, 이 싸가지가 뭐라고 이렇게 심장이 떨어지냔 일이냐. 하긴, 쬐끄만하고 삐쩍 마른 게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지보다 한뼘은 더 큰 나를 올려다보며 바락바락 잔소리하는 모습이 좀 귀엽긴 하네...

 

“....몇 시까지...보내면 되나?”

“뭐라도 써서 10시까지 카톡으로 보내.”

 

최후통첩을 남기고 지 삐쩍 마른 몸뚱이보다 배나 큰 책가방을 둘러매고 뒤돌아서는 이대휘의 바쁜 걸음걸이만 물끄러미 바라봐야 했다. 이대휘는 요정이 분명하다. 요정이 아닌데 저렇게 공기처럼 걸어다닐 순 없지. 하나님은 공평하다. 싸가지면 어때. 이렇게 이쁘고 귀여운데...아놔. 뭐라냐...

 

집에 들어가니 웬일로 좋은 냄새와 함께 엄마의 콧노래가 흥겹다. 어제 여고동창회 가야하는데 입을 옷 하나 없다고 미어지는 10자짜리 옷장을 뒤적이며 두시간을 투덜대던 엄마였다.

우진이 왔어? 씻고 밥 먹자.

얼래? 엄마의 하이텐션에 어떨떨해서 소파에 앉아 아빠와 함께 TV를 보던 예림이에게 눈으로 물어보니 동생이 소곤거렸다.

 

- 현숙이아줌마라고 알지? 엄마의 라이벌. 그 아줌마네가 망했대. 폭!삭!

- 와. 엄마 인성 무엇.

 

그래도 무한루프 신세한탄을 안 듣는 게 어딘가, 얼굴도 본 적 없는 폭삭 망한 현숙아줌마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이게 갈비찜에 장어까지 구울 일인가 싶긴 했지만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우적우적 뼈에서 갈비를 빼 먹는 맛은 존맛이었다.다음 날 무엇을 보게 될지도 모르면서.

 

 

여전히 티끌 하나없이 단정한 얼굴에 머리카락 한 가닥도 삐져 나오지않게 정리한 평소답게 매일 세탁하고 다림질한 듯 구김하나 없이 반듯한 교복셔츠를 입고 맨 앞자리에 앉아 수업준비를 하는 이대휘는 뒤통수도 싸가지없이 귀엽다. 동그란 뒤통수가 움직일 때마다 팔랑거리는 정수리의 새싹머리는 한번쯤은 쓰다듬어보고 싶어 나도 모르게 덜 떨어진 놈처럼 덧니까지 드러내며 헤 웃다가 갑자기 몸을 돌린 이대휘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모? 이대휘의 눈꼬리가 올라간 쌍꺼풀없는 쪽 눈이 까칠하게 나를 야리면 일개 참새 주제에 그 눈을 피하는 것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도톰하고 빨간 입술만 보면 너무 예쁜데 한까칠하는 왕싸가지 이대휘는 영락없이 날카로운 가시를 세운 빨간 장미였다.

 

금요일이라 수업이 끝난 후 나만큼이나 공부도 싫고 학원도 싫은 돌대가리들이 모여 PC방에서 놀다가 헤어져 집으로 가는 길, 삼겹살집을 지나던 나는 너무도 이질적인 풍경에 걸음을 멈추고 저절로 가게 안으로 눈을 돌렸다. 돈 내고 사먹는데도 절대 이런 곳은 올 것 같지 않은 낯익은 뒤통수가, 소리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발걸음에 팔랑이는 정수리의 새싹머리는 아닐래야 아닐 수 없는 이대휘인지라 멍하니 유리문에 다가갈 수 밖에 없었던 나는 음식을 서빙하고 숯불위에 돼지껍데기를 올려주고 돌아서던 대휘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헉!! 놀란 나는 얼른 몸을 돌려 가게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무조건 앞으로 걸어나갔다. 저 부잣집 아들, 전교 1등 왕싸가지 이대휘에 생긴 이 상황이 내 새대가리로는 가늠도 안 되는데 죄없는 내가 더 놀란 것도 더 이해가 안 됐다. 하긴 부잣집 아들도 용돈이 필요할 수도 있지. 고2 남자애들이라면 용돈벌이로 편의점 알바나 주말 뷔페 홀서빙 알바를 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으니까. 그러나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나는 다시 그 가게를 돌아보았다. 그렇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구려 돼지껍데기집은 아니지. 이대휘는. 도도하고 예쁜 나의 싸가지 이대휘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도둑이 제 발 저린 것도 아닌데, 하루종일 엎드려 자다보니 이대휘와 눈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던 나는 종례 후 교문을 나서던 나는 교문 앞에서 검정 양복에 깍두기머리를 한 남자들이 어슬렁거리는 모습에 별 관심없이 심상스럽게 지나치고 있었다.

 

야!! 이대휘!!

 

그러나 깍두기들이 부르는 이대휘라는 이름이 내가 아는 이대휘인지 잠시 가늠이 안되다 아이들의 웅성거림에 뒤돌아 본 순간 깍두기들에게 둘러싸여 겁먹은 걸 들키지 않으려고 입술을 앙 다문 이대휘를 보고서야 뭔가 안 좋은 일이라는 걸 직감했다.

 

이경수가 니 아버지 맞지? 엄마아빠 어디 갔어?

몰라요...

씨발, 남의 돈을 썼으면 갚아야 하지 잠수를 타? 아니면 너라도 갚던가.

 

다짜고짜 이대휘의 셔츠깃을 붙잡아 손을 올리는 깍두기를 보는 순간, 나는 눈이 확 도는 기분이었다. 나의 요정 이대휘한테 뭐하는 짓이야!! 나, 박우진, 비록 영어수학 8등급 돌대가리지만 4살 때부터 아기스포츠단에서 수영과 태권도를 배웠고 무려 태권도 공인 초단이란 말이다. 돌대가리라 장유유서 그딴 거 모른다. 나는 그대로 이대휘의 멱살을 쥐고 겁을 주는 깍두기의 옆구리를 밀어붙이고 깍두기의 손아귀에서 이대휘를 빼내어 손목을 쥔 채 그대로 내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덩치만 크지 달리는 건 영 젬병인지 깍두기들이 쫒아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알고서 이대휘는 달리는 걸 멈추고 서서 턱까지 차오른 숨을 헐떡이며 앙칼지게 말했다.

 

“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엉클어진 머리를 옆머리까지 꾹꾹 눌러 정리한 이대휘는 아직도 이 상황이 얼떨떨한 나를 휙 돌아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남의 일에 신경쓰지 말고 니 일이나 제대로 해. 아직도 너만 영어수행평가 제출 안했더라.”

 

헐...대박!! 고맙다는 말은 못 하고. 싸가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달랐다. 특히 전교 1등 싸가지는. 그러나 깍두기들에게 멱살을 잡힐 때 뜯겼는지 목에서 대롱거리는 타이까지는 아무리 왕싸가지라도 어찌할 수 없나 보다. 신경질적으로 깃에서 떼어내 쓰레기통에 버리더니 아직도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는 나를 내버려둔 채 흔들리지않고 도도하게 가버렸다.

 

그런 이대휘가 뭐가 이쁘다고 난 이대휘가 일하는 돼지껍데기가게 앞을 어슬렁거렸다. 유리창 너머 뿌연 연기 사이에서 이대휘는 그 가냘픈 몸으로 테이블 사이를 날아다니듯 바쁘게 오가며 냉삼과 돼지껍데기와 소주를 나르고 있었다. 밤 10시가 다 되어 테이블 정리와 가게 청소까지 끝낸 이대휘는 가방을 매고 가게 밖으로 나오는 걸 나는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몸을 숨긴 채 가만히 뒤쫓아가던 나는 말 한마디 못하고 뒤돌아섰다.

 

 

아침에 학교에 왔을 때 이대휘는 늘 그렇듯 한 치의 흐트러짐없이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바뀐 게 있다면 어제 교문 앞에서 깍두기들을 본 반 아이들의 눈빛이었다. 바로 어제 종례 전까지는 이대휘를 동경하며 범접하지 못하던 놈들은 노골적으로 폭삭 망해버린 이대휘 등 뒤에서 낄낄거리며 수군대기 바빴다. 기분 나쁜 긴장감과 수근거림으로 교실 안의 공기는 무거운데 어디선가 날아온 우유곽이 이대휘의 마른 등에 정통으로 맞고 말았다. 깔끔한 이대휘가 신경질적으로 뒤돌아보자 실수가 아닌 듯 우유곽을 던진 양아치 놈이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뭐야?

그렇게 꼬나보면 뭐? 반장이면 다가? 거지새끼 주제에. 망해서 집도 없다면서 그럼 어디서 자나? 조건만남 뭐 그런 거 하는 거 아이가?

막 틀딱들한테 후장대주고 그러나?

 

기억난다. 저 양아치놈은 1학기 체육대회때 반 티값 낼 때도 마지막까지 안내다 이대휘한테 한소리 들었던 찌질이놈이었다. 꼭 그런 놈들이 있다. 자신과는 딱히 관계도 없으면서 타인의 불행에 꼭 제 숟가락을 얹어야 속이 시원한 놈들. 순 일베같은 놈들. 그러나 터무니없는 양아치의 디스에도 이미 가장 아픈 곳을 찔린 이대휘는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살면서 이런 입에도 못 담을 더러운 말은 처음 들었다는 듯 얼굴은 수치스러움으로 빨개진 채 부들부들 떨기만 하고 있었다.

 

반 애들이 모두 피하는 양아치놈들이라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자 이미 유치한 싸움의 판가름이 난 듯 양아치의 같은 무리의 놈들이 낄낄거리며 아예 대놓고 이대휘의 옷에 우유곽을 던지기 시작했다. 미처 다 안 마셨는지, 아니면 고의인지 아직 내용물이 있는 우유곽에 맞은 이대휘의 회색마이가 하얗게 젖어들었다. 앗!! 안되는데. 존재감없는 새대가리지만 이대휘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인양 돼지껍데기냄새가 찌든 제 교복셔츠를 어떻게 빨아 입고 단정하게 나오는지 알기에 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꽝!!

내내 엎드려 있던 내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고마 해라!!

 

이번엔 반 아이들과 양아치들의 놀란 시선이 나에게 모아졌고, 그 사이에 난 얼굴이 빨개진 채 부들부들 떠는 이대휘의 손을 붙들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와 위층 화장실로 끌고 왔다.

 

“놔!!”

 

어제처럼 내 손을 뿌리치며 나를 노려보는 이대휘를 무시하고 조금은 거칠게 이대휘의 마이를 벗겨내고 내 마이를 벗겨 이대휘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뭐하는 거야!! 남의 일에 신경쓰지 말고 니 일이나 제대로 해.”

 

내 마이를 벗어버린 이대휘는 우유자국을 닦아내기 위해 물에 담근 자신의 마이를 가져가려고 나와 실랑이를 시작했다.

 

“아. 쫌!!”

 

난 이대휘를 다시 붙잡고 소리쳤고, 난 대휘에게 옷을 입혀주려고 대휘는 내 옷을 벗고 젖은 제 마이를 가져가려고 어느 새 몸싸움으로 번지자 내가 쐐기를 박았다.

 

“영어수행평가 톡으로 보냈다고. 어제!”

 

내 말에 움직임을 멈춘 이대휘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나도 이 상황이 어이없어 웃음이 터졌다. 나 진짜 뭐하냐. 왜 자꾸 이대휘가 걱정돼냐...

 

“잘했어. 박우진...”

 

이대휘는 푹 젖어버린 제 마이를 한참 바라보다 들고 나가버렸다. 이대휘한테 젖은 옷을 입히고 싶지 않은데, 깨끗한 옷을 입혀주기 위해 내가 적셔버린 저 젖은 마이를 내일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 보송하게 말리고 입고 나오기 위해 어제같은 일을 하면 어쩌나 싶어 이대휘는 웃는데 나는 울고 싶었다.

 

 

뭘 할 것도 아닌데, 뭘 해줄 것도 없는데,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난 또 다시 돼지껍데기집 앞에 섰다. 이대휘네 부모가 진 빚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얼마나 큰 빚을 지면 고작 고등학교 2학년밖에 안된 열 여덟 살짜리 아들도 두고 도망치는지 궁금했지만 그럼에도 배움의 끈을 놓치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이대휘가 존경스럽다 못해 미련해 보였다. 도대체 이까짓 학교가 뭐라고 이 상황에서도 구김없는 교복을 고집하느냐 말이다. 나 같으면 쪽팔려서라도 어디 마트라도 취직해서 도망갈텐데.

 

내가 아는 이대휘는 늘 똑똑하고 도도하고 완벽한 아이였다. 늘 장미향기같이 좋은 향기만 나는 아이, 깔끔하고 지저분한 걸 못 참아하는 아이, 그래서 먹는 것도 돼지껍데기처럼 냄새나는 거 말고 예쁘고 좋은 것만 먹는 아이, 동그란 머리와 짝눈이 갓난 아기같은 뽀둥한 아이, 오목조목 예쁜 아이, 그리고 수달같이 귀여운 아이, 유명 브랜드옷에 늘 신상 신발을 신고 다니는 아이, 그리고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고 살았을 것 같은 아이였다. 그랬는데...

 

왜 이제야 보이는 걸까. 하루가 다르게 까칠해지는 얼굴을 한 이대휘는 학교에서 먹는 급식이 유일한 한 끼니일 것이다. 가게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끝난 후에도 이대휘가 무얼 먹는 걸 못 봤으니까. 당장 하룻밤 잠 잘 곳이 없는 이대휘가 삼시 세끼를 다 챙겨먹을 여유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말라가는 이대휘를 난 그저 공부하느라 공부하느라 밤잠 못 자고 까칠한 성격에 입 짧아서 그렇다고만 생각했지만 돈이 없어 먹지도 자지도 못 할거라고는 생각을 못한 것이다. 그렇게 이대휘가 끝날때까지 지켜보던 나는 며칠 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지 몸보다 큰 가방을 둘러매고 돼지껍데기집을 나서는 이대휘 뒤를 조심스럽게 뒤쫓아갔다. 오늘밤은 제발 이대휘의 작고 마른 몸 하나 마음 편히 누일 곳을 찾길 바라면서.

 

술 취한 사람들이 오가는 술집 골목에 서서 잠깐 망설이다 작정한 듯 어느 한 곳을 향해 걷기 시작한 이대휘의 뒷모습이 비장하다 못해 너무 애처로워 난 덜컥 겁이 났다. 설마...이대휘...어제 그 곳으로 또 가는 건 아니지...

이대휘는 모텔이 즐비한 골목 앞에서 서성거렸다. 한손에 든 휴대폰을 연신 들여다보며 초조한 눈빛으로 연신 입술을 깨물던 이대휘 앞에 반 깐 머리에 기성양복을 입고 기름통에 빠진 것처럼 느끼한 30대 남자가 나타났다.

 

혹시? 가지볶음님?

 

이대휘의 눈이 더 할 수 없이 커지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 눈은 더 커졌다. 멀리서도 겁으로 파랗게 질리고 바들바들 떠는 이대휘의 표정이 보였다. 바보같은 놈...그깟 잠 잘 곳 없다고 조건만남어플에 들어가...그러나 한편으론 저 자존심 쎄고 까칠한 왕싸가지가 얼마나 절망끝으로 몰렸으면 저런 선택까지 했을까 생각하니 참담해졌다.

 

보기보다 어리네. 시간 끌지 말고 들어가지.

 

반깐 남자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번져나갔다. 이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예쁘고 귀여운 이대휘였다. 밝은 곳에서 보면 그 눈빛이 얼마나 눈 부시게 신비스러운데...아니 그걸 저 반깐 남자한테 알아달라는 건 아니고...

그런데 잔뜩 쫄은 이대휘는 두 발이 땅에 들러붙었는지 제 가방끈만 붙들고 어버버거리고만 있었다. 마음먹었대도 막상 닥치니 쫄아 붙은 이대휘는 제 가는 팔을 붙드는 반깐 머리에 히익 놀라서 뿌리치며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놓...놓으세요...저 아니예요.

씨발! 너 맞잖아? 며칠째 어플에 들어와서 먼저 꼬리친 거 모를 줄 알아?

 

잘못한 게 없는데도 돈이 없으니 반깐 머리는 뒷걸음질치는 이대휘에 빡쳤는지 이대휘의 셔츠 깃을 우왁스럽게 움켜쥐더니 모텔쪽이 아닌 자신의 차가 있는 쪽으로 잡아 끌었다.

 

왜 이러세요...놔주세요.

새끼 너 오늘 임자 만났어! 쬐끄만한 게 발랑 까져가지고.

 

이대휘의 셔츠깃을 붙든 반깐 머리에 빡 돈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어디서 감히 이대휘를...며칠 전 깍두기들을 깨부순 나 박우진이 가만 둘 수 없다.

 

그 손 놔요!!

 

여전히 이대휘의 셔츠깃을 움켜쥔 반깐 머리는 벙찐 표정으로 어두운 골목길에서 갑자기 나타난 나와 나를 보자마자 참담하게 얼굴이 일그러진 이대휘를 번갈아보며 바라봤다.

 

내 친구 그런 애 아니거든요. 나 만나러 온 거거든요.

 

반깐 머리는 반신반의한 눈빛으로 나와 이대휘를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가지볶음이 아니라고? 씨발, 재수가 없으려니까...

어른이면 다야? 야!! 사과 안 해?

 

어정쩡하게 이대휘를 놓은 반깐 머리가 불퉁하니 뒤돌아서는 걸 보고 쫓아가려는 날 이대휘가 얼른 붙잡았다. 그만해. 제발...이대휘는 수치심과 참담함에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너 왜 자꾸 나 쫓아다녀? 폭삭 망했다니까 너도 내가 우습고 만만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마른 몸을 겨우 지탱하며 이대휘가 나에게 쏘아붙였다.

 

“니 이런 애 아니잖아. 자존심 강하고 도도하고 늘 좋은 것만 가져서 모두가 부러워한다 아이가.”

“그래서 이제 속이 시원하니? 잠 잘 곳이 없어 몸 판다니까 고소해? 자존심도 배 부를 때 내세울 수 있는 거야.”

“내는...니가 정말 잘못 될까 봐...”

“니가 무슨 상관인데. 엄마 아빠도 버리고 가버렸는데...남의 일에 신경쓰지 말고 니 일이나 제대로 해.”

 

자존심도 배부를 때 내세울 수 있다. 당장 굶어죽는데 어둠이 내린 밤 몸 하나 뉘일 곳 하나 없는데 고고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라면 고고하게 굶어 죽을 수 있을까...굶어죽을 일 없는 나는 지금도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없는 그냥 찌질이일 뿐인데. 아무 능력없는 이 시대의 평범한 미자 고딩일 뿐인데. 내 힘으로는 이대휘를 이 지옥에서 구해줄 방법이 없어 이대휘도 꼿꼿하게 참는 눈물이 내 눈에서 자꾸 흘렀다. 그러나 다시금 이대휘를 놓아두고 올 수 없었다. 비록 이대휘의 생일날 주려던 장미는 들고만 다니느라 모가지 댕겅 잘려버렸지만 지금 이대로 와버리면 이번엔 이대휘의 마지막 자존심이 댕겅 잘려나갈지도 모르니까.

 

 

“싫어. 못 가.”

“니가 그랬다 아이가. 자존심도 배부를 때 부리는 거라고.”

 

급한대로 싫다는 이대휘의 팔을 붙들고 집으로 왔다. 이대휘가 살던 정원이 딸린 하얀 2층집과는 비교도 안되는 25평짜리 주공아파트 우리집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왔을 때 마침 화장실에서 막 씻고 나오는 엄마와 마주쳤다.

 

“넌 이 시간까지 뭐하다 이제 와? 또 사고치고 다니는 건 아니지?”

 

쭈뼛거리며 현관에 들어서며 연신 제 등 뒤를 신경쓰며 문을 못 닫는 내가 이상했던지 엄마는 현관문 너머 어두운 복도를 바라봤다. 이른 나이에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눈치 하나는 빠른 엄마는 뭔가 우리 집안과는 다른 결을 가진 존재가 문 밖에 서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엄마는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쭈뼛거리는 이대휘가 선 복도 너머와 말을 못 꺼내고 쭈뼛거리는 나를 번갈아보고 있었다.

 

“누구...왔어?”

 

초등학교 이후로 집에 친구를 데리고 온 적이 거의 없는 나인지라, 그리고 시간이 시간인지라 엄마의 표정은 당혹스러움이 역력했다. 어떤 계획도 없었지만 말도 없이 이대휘의 부모가 올 때까지 같이 지낼 수는 없었다. 오늘 밤만 재워주고 이대휘를 다시 길거리로 내모는 건 더더군다나 할 수 없었다. 며칠 전 모텔 앞에서 서성이다 차마 못하겠다는 듯 돌아섰던 이대휘는 오늘은 결국 하룻밤 잠 잘 곳을 마련하기 위해 조건만남까지 작정하지 않았던가. 처음이 어렵고 무섭지, 두 번 세 번은 쉬운 법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대휘에게 따뜻한 잠자리와 밥 한 끼를 꼭 먹이고 싶었다.

 

“들어와.”

“안녕하세요? 이대휘라고 합니다.”

 

내가 이대휘의 손을 잡아 당기자 이대휘가 들어와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하는 순간, 어깨에 매고 있던 지 몸집만한 가방이 앞으로 쏠릴 뻔 한걸 얼른 붙들었다. 이대휘가 고개를 드는 순간, 엄마가 갸웃했다. 내가 저 아이를 어디서 봤더라...

 

 

 

 

 

***********************************

 

 

 

알오물로 <온달과 평강공주>에서 컨셉을 빌렸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 하트 눌러주시는 분들,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구독해주시는 분들...감사합니다.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대휘라서 가능했습니다.

 



그대의 놀라운 힘이 나의 꿈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너란 별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