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과 지훈은 배송된 물건의 포장을 뜯어 마당에 줄지어 놓고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양한 사이즈의 나무 판, 수십 개의 나사, 여러 장의 사포, 당최 무엇에 쓰이는지 모르겠는 도구들. 사이트에서 보았던 멋들어진 ‘그네’는 이것들을 완벽하게 조립한 후의 모습이었다.


지훈은 외계어 같은 설명서를 보고 또 보았다. 한글로 쓰여 있는데 이해되지 않는 말만 한가득이었다. 그 옆에서 윤은 설명서의 그림과 마당에 늘어놓은 것들을 비교하면서 ‘이건가, 저건가’ 혼잣말을 했다.


“오빠, 우리 바보 같아. 주문할 때 조립 서비스 신청했으면 됐는데.”

“그러게, 우리 진짜 바보 같다.”

“오빠, 아냐, 우리 이거 주문할 때 가격 저렴하다고 좋아했잖아. 그 이유가 D.I.Y였어.”

“아... 바보 같은 게 아니라 우리 진짜 바보다.”


누가 누구를 모자라다 탓할 상황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빠르게 평화협정과 동맹을 맺었다. 끙- 소리를 내며 나무판을 하나씩 옮기는 지훈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윤아, 여기 잡고 있어. 내가 나사 조일게.”

“알았어.”

“나무판 엄청 무겁다. 잘 잡아야 해.”

“어어, 빨리 나사나 조여.”

“행여나 놓치면 안 돼.”

“알았으니까 입을 좀 닫아.”


지훈은 나사를 조이다 말고 코를 훔치며 윤을 노려보았다. 가만 생각하니 억울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윤아, 지금 이 상황 좀 이상하지 않니.”

“뭐가.”

“이 그네 말이야.”

“응.”

“네가 사달라고 졸라서 내가 사줬어.”

“응.”

“근데 내가 조립해.”


윤은 훌쩍하고 코를 훔쳤다. 춥다고 얼굴만 뚫린 모자로 완전 무장한 윤은 꼭 중세 시대 병사 같았다. 영화에서 가장 먼저 죽는 그런 병사.


“오빠, 내가 나무판 안 떨어뜨리고 잘 잡고 있을게.”


윤은 큰 눈을 더 크게 뜨고서 눈동자를 일렁였다. 지훈은 체념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서희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저 눈에 속아서...”


지훈이 웹사이트에서 결제 버튼을 누르려던 그때, 서희가 그네가 웬 말이냐며 지훈을 말렸다. 타면 얼마나 탈 것이며 관리는 누가 하느냐는 것이었다. 반박 불가할 만큼 서희 말이 다 맞았다. 하지만 서희 뒤에서 장화 신은 고양이 마냥 눈을 글썽이는 윤을 보니 자연스레 결제 버튼이 눌러졌다.


나사를 조이는 지훈의 정수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지훈은 나사를 조이다 말고 나무판을 꼭 잡은 중세 병사를 물끄러미 보았다. 문득 기왕 고생하는 거 시소까지 사줄 걸 그랬나, 하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


마당에 늘어놓았던 자재가 하나씩 사라지고, 팔이 떨어져라 사포질을 하고 나니 사이트에서 보았던 그럴듯한 2인용 그네가 만들어졌다. 윤과 지훈은 숨을 헉헉거리며 완제품을 바라보았다. 뭔가 뿌듯하면서도 저게 잘 움직일까 하는 노파심이 생겼다. 오빠가 타봐라, 싫다, 네가 타봐라 하며 탑승을 미루던 두 사람은 같이 타는 데 극적 합의를 이뤘다.


나란히 앉아서 발을 구르니 제법 그네처럼 움직였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물개박수를 쳤다. 윤과 지훈은 닦아도 닦아도 계속 흐르는 콧물을 코에 달고 그네에 몸을 맡겼다.


“윤아, 꽃님이 결혼 날 잡았다고 연락 왔더라.”


꽃님이는 윤에겐 중학교와 고등학교 동창, 지훈에겐 중학교와 고등학교 후배였다.


“어, 내후년 봄에 한 대.”

“내년도 아니고 내후년?”

“응, 약혼자가 항해사인데 내후년에 배에서 내린대.”

“와... 꽃님이 꽤 힘든 연애를 했겠네. 원거리 연애도 힘든데 바다 건너 연애라니.”

“진정한 사랑의 힘이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데 이 말에도 언제나 예외는 있었다.


“결혼식은 어디서 할 예정이래?”

“광주에서 할 거 같던데.”

“그럼 결혼식이 구현중, 구현고 동창회가 되겠네. 완전 블록버스터 급 피로연이겠는데.”

“안 그래도 꽃님이가 피로연을 1박 2일로 계획하고 있더라고.”


지훈은 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들은 지금 어찌 사는지 궁금해했다.


“다들 많이 변했겠다, 그치?”


윤은 그러게, 하면서 그네 위로 두 다리를 올리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흐릿한 흑백사진 같은 기억이 불쑥 머릿속을 지나갔다. 지훈은 다리를 구르면서 슬며시 윤의 눈치를 살폈다. 피식, 지훈과 눈이 마주친 윤은 가볍게 웃으며 팔꿈치로 지훈의 옆구리를 툭 쳤다.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런 게 뭔데.”

“생각한 거 아니라고.”


지훈은 괜히 코를 훌쩍이며 어눌하게 말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이실직고하네.”

“진짜 아냐.”

“아니긴, 나도... 궁금한데.”


도영.

지금 어떻게 사는지 가장 궁금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 근황은 어쩌다 한 번씩 건너 건너로 들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도영의 소식은 아는 이도 전하는 이도 없었다. 마치 이 세상에서 존재 한 적 없었던 사람처럼.


도영을 잊은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애써 기억하는 것도 아니었다. 윤은 여전히 십 년 전과 같은 휴대폰 번호를 쓰고 있었지만, 도영에게 연락 오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십 년은 그런 시간이었다. 윤은 웅크린 무릎 위에 두 팔을 포개고 그 위에 턱을 댔다.


“처음엔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기만 하면 좋겠어.”


시간이 흐르면 다 증발하는가 보았다. 섭섭함도 그리움도. 이마에 맺혔던 땀이 싸늘한 바람에 날아가자 부르르 몸이 떨렸다. 지훈은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윤의 어깨에 걸쳐줬다. 그리고 윤의 뒷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꽃님이 결혼식에 서희랑 너, 나 이렇게 셋 다 가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보강 수업해야겠다.”


지훈은 셋이 같은 곳에서 근무를 하니 이런 문제가 생긴다며, 꽃님이 결혼식이 일요일이면 좋겠다고 농담 투로 말했다. 윤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웬 한숨, 오빠가 너 웃는 거 보려고 그네도 사줬는데.”

“그러게... 오빠가 그네까지 사줬는데 왜 한숨이 나오고 난리.”


지훈은 윤의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점퍼를 다시 여며줬다.


“동창들이 하나 둘 결혼하니 마음이 섭섭해?”

“아니... 그냥.”


윤은 틈을 두고 말했다.


“나는 꽃님이 보다 서희가 먼저 할 줄 알았는데.”


서희가 청혼 받았다고 할 때만 해도 바로 결혼식이 진행될 줄 알았다. 지인들의 축하를 받으며 그 후로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고 끝나는 동화처럼.


“오빠... 서희가 또 잠을 못 자는 거 같아.”

“왜.”

“몰라... 말을 안 해.”

“무슨 일 있나. 하긴... 일이 좀 많았어야지.”


서희가 진혁의 집에 정식으로 인사 갔던 날이었다. 서희에게 처음 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자는 경찰이었다. 그는 등산객의 신고를 받아 출동하게 되었고, 지금 할머니를 모시고 가는 중이라 했다.

할머니가 발견된 곳은 잠실 집에서 한참 떨어진 도봉산 어귀였다. 실내용 슬리퍼를 신은 채 초점 없는 눈으로 산을 오르는 할머니를 등산객이 발견하고 신고를 해주었다.


할머니의 병명은 알츠하이머였다. 원인은 많지만 치료법은 없는, 조용히 몸을 숨긴 채 기회를 엿보다가 환자의 기억이 반 이상 사라지면 뒤에서 칼을 꽂으며 등장하는 살인마 같은 병이었다.

이후 할머니는 무언가에 홀린 듯 집을 나가 어느 대학교 운동장, 서울과 경기도를 연결하는 어느 도로, 어느 산 중턱을 하염없이 걸었고, 서희는 그런 할머니를 찾느라 새벽녘 어둠을 하염없이 헤맸다.


지훈은 금연 중인 걸 잊고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수면제는.”

“안 먹고 버티는 거 같아.”

“다행이다.”


지훈은 다행이라 말해놓고도 이게 다행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빠, 그때 일... 진혁 오빠한테 말해야 하는 거 아닐까. 진혁 오빠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서희 병원에 있어서 장례식에 못 갔다고...”


지훈은 말없이 천천히 발을 굴러 그네를 움직였다.


“오빠, 난 자꾸 그날 일이 걸려.”

“서희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또 잘 넘어갔고, 그러니 우린... 그냥 가만히 있자.”


지훈은 손을 들어 윤의 등을 토닥거렸다.


“윤아, 사람 일 몰라. 갑자기 서희가 내일 당장 결혼한다고 할 수도 있어.”

“그럼 더 바랄 게 없겠다. 그렇게 되면... 나는, 이 집은, 이 그네는 어쩌지.”


기우일지라도 이런 걱정을 하는 편이 나았다. 지훈은 잔잔하게 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서희 시집가면... 이 집에서 너랑 나랑 살자.”






*


저녁 식사하는 동안 진혁은 계속 휴대폰을 의식했고 서희는 그런 진혁을 의식했다.


“왜... 연락 올 곳 있어?”

“아니.”

“그런데 왜 계속 휴대폰만 봐.”

“... 미안.”


진혁은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접시 위 샐러드를 뒤적거렸다. 서희는 와인 잔 베이스를 지그시 눌러 잡고 테이블 위에 원을 그렸다. 두 사람 사이에 포크와 접시 닿는 소리, 와인 넘기는 소리만 존재했다. 어쩌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서희는 별일 아닌 듯 와인 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고 진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서희는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물끄러미 진혁을 보았다. 물어보고 싶은 것도 따지고 싶은 것도 산더미였지만 어떤 것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지금 자신은 판도라 상자 앞에 서 있음을 알았다. 여는 순간 모든 것을 알게 되지만 그 대가로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도. 서희는 반지 낀 손을 꼭 쥐었다. 아직은 어떤 대답도 들을 자신이 없었다.


“오빠, 우리 밥 먹고 좀 걸을까.”

“... 어디.”

“석촌 호수.”


한때 두 사람에겐 일상이었던 곳. 거기 어딘가엔 손끝 닿을 때마다 수줍어하던 순간이, 조금이라도 같이 있을 핑계를 찾던 기억이, 보폭 맞춰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진혁은 고개를 숙인 채로 ‘그래’하고 답했다.


 

 

두 사람은 호수 둘레를 나란히 걸었다.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진 않은 채 각자 앞만 보면서. 호수 물결은 바람이 부는 대로 움직이다가 살얼음이 된 곳에 머물며 부단히 일렁였다.


“시험 끝났으니 이번 주는 좀 쉬겠네.”

“응.”

“그럼 오늘 심야 영화나 볼까.”

“그러자.”


진혁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휴대폰으로 영화 상영 시간표를 찾았다. 그때 새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이 울렸다. 진혁은 기다렸단 듯이 메시지 함을 확인했다.


[ 진혁아, 우리 당구장 왔는데 너도 올래? ]


승유였다. 후...... 누굴 기대했던 것인지, 승유의 연락에 괜한 아쉬움이 올라옴과 동시에 이런 일로 실망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 나, 지금 서희랑 있어. ]

[ 진짜 열렬히 사랑하신다. 어제도 보더니 오늘도 만났어? 설마... 어제 나 빼고 둘이 보려고 외부 일정 있다고 거짓말한 거 아니지? ]


진혁은 걸음 속도를 높이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무슨 말이야.”

-여보세요 하기도 전에 다짜고짜 무슨 말이냐니.

“서희랑 내가 어제 만났다니. 외부 일정은 또 무슨 말이야.”

-서희가 이야기 안 해? 서희랑 나랑 어제 ADAGIO에서 만났는데.


진혁은 짧게 ‘아’소리를 내며 얼굴을 찡그렸다.


「나 동네 나왔다가 승유를 만나서... 지금 잠깐 이야기하고 있어.」


자신이 했던 거짓말이 세차게 머리를 내리쳤다. 어제 서희의 휴대폰 전원이 꺼져있던 일도 떠올랐다. 진혁은 전화를 끊고 천천히 뒤로 돌았다. 한참 떨어진 곳에 서희가 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서희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의 거리였다. 서희가 걸음을 멈춘 지도 모르고 혼자 걸어온 거리가.


진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알면서 아무것도 묻지 않는 서희에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때 진혁이 있는 곳으로 서희가 한 걸음씩 다가왔다. 진혁은 입을 다문 채 무거운 숨을 코로 내쉬었다. 서희가 무슨 이야길 할까, 뺨이라도 때릴까, 그럼 나는 변명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흔들렸다고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 걸까.


서희가 진혁 앞에 다가와 섰다. 자그마치 십 년, 헛기침 소리만 들어도 서로의 속내를 알던 두 사람이었다. 그러니 모를 리 없었다. 지금 서로의 마음이 엇갈리고 있음을.


“서희야.”

“오빠, 우리 주말에 서초동 가야 해.”

“서희야, 내가...”

“오빠.”


서희는 진혁의 말을 끊고 잠시 침묵했다.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그가 있었지만 예전처럼 안아주지 않는 그가 어려워 다음 말을 바로 잇지 못했다. 서희는 시선을 바닥에 둔 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빠... 우리 오늘 같이 있자.”


두 사람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두 사람 다 꺼내지 않음으로써, 언젠가 우리도 그런 적 있었노라 웃으며 말하게 될 날이 오길... 간절히 빌었다.


평범한 습작생. 더디고 어설픕니다. 빠른 전개를 원하는 분께는 권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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