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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환불하신 마음 반품되셨습니다




경악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아이들은 상황 파악이 끝나자마자 우리 쪽으로 후다닥 달려오기 시작했다. 1년 내내 이마크를 덕질하며 끝장나는 스토커 짓을 한 덕분인지 학교에는 내 얼굴을 모르는 애들이 없었다. 존나 얼굴 본 적도 없는 아이들이 내 쪽으로 손을 뻗으며 괜찮냐고 물어보길래, 나는 그냥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인생 잘 살면 똥을 싸도 박수를 쳐준다더니… 인생 관종처럼 살면 할아버지한테 딱밤 놓은 애한테 손도 내밀어 주는구나. 나는 이마크 빠순이 짓을 했던 지난 1년이 꽤나 의미 있는 1년이 아니었을까 하는 시답지 않은 생각을 했다.




" 여주야, 괜찮아? "

" 어, 어… 괜찮긴 해. 발목이 존나 끊어질 것 같고 체감상 열여섯 갈래로 찢어진 것 같지만… 진짜 괜찮아. "

" 괜찮은 거 맞냐고… "




아이들은 개똘추 보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가도, 이내 내 한 쪽 팔을 잡아들며 날 부축하기 시작했다. 막상 주저앉아 있을 때는 발목 쓸 일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일어나 보니 발목이 심하게 접질린 것 같았다. 나는 친구들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민경훈마냥 냅다 비명을 지르며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씨발 미친 거 아니야? 구라가 아니고 진짜 발목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진 것 같았다. 나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발목을 쥐어잡았고, 나를 부축해 주던 친구들은 내가 바닥에 주저앉자마자 뭉크의 절규 표정을 지으며 할아버지를 노려봤다. 어른이라서 차마 욕은 못 하겠다…< 하는 표정이 대놓고 드러났다.




" … 아니, 미쳤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몸을 막 던지는 사람이 어딨어요. "

" 흐어어엉… 이 새낀 구해 줘도 지랄이야 지랄이… "

" 지금 이게 지랄하는 걸로 보여요? "

" 그럼 뭔데 미친놈아… 내가 괜히 몸 던져서 너 구한 줄 알아? "




내 뒤에 쓰러져 있던 이동혁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내 한 쪽 어깨를 잡아 쥐었다. 반쯤 일어난 이동혁은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내 두 눈을 마주 보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애써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발목에서 올라오는 고통 때문인지 자꾸만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 너 발목 다치면 안 되잖아. 춤추는 애한테 발목이 얼마나 소중한데… "

" … "

" 너네 동아리에서 지금 공연 출전 멤버 뽑고 있을 거 아니야. 너 그거 못 나가면… 크흥… 존나 하루 종일 죽상일 거 같아서… "




내 말을 들은 이동혁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화가 났다고 하기에도 좀 그렇고,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좋은 표정도 아니었다. 그냥… 이 새끼 뭐지? 표정에 고마움 10% 정도가 섞인 얼굴이었다. 이동혁은 슬쩍 고개를 돌려 퉁퉁 부어 있는 내 발목을 내려다봤다. 새빨갛게 부어 있는 내 발목을 발견한 이동혁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 신고받고 왔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

" 경찰 아저씨! 저 미친, 아니, 할아버지가 대낮부터 술 마시고 애먼 학생한테 폭력 휘둘렀어요! "

" 혹시 저분이세요? 아니 저 할아버지는 이틀 전에도 파출소 오셔놓곤... 또 사고 치셨네. "

" 진짜 어디다 격리 시켜 놓으면 안 돼요? "

" 하하, 그럴 수는 없구요… 혹시 할아버지한테 뭘로 맞으셨어요? "




진지한 얼굴로 할아버지와 내 상태를 체크하던 경찰 아저씨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다. 경찰 아저씨의 시선이 꽂힌 곳은 할아버지가 놓쳐버린 참이슬 소주병이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주병과 할아버지를 번갈아서 쳐다보던 경찰 아저씨는 설마… 아니죠? 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 혹시… 소주병으로 맞으셨나요? "

" 그걸로 맞았으면 지금 살아 있겠어요? "

" 그건 그렇죠… "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인 경찰 아저씨는 벙찐 듯한 할아버지의 한 쪽 팔을 잡아채며 반강제로 할아버지를 일으켰다. 할아버지는 경찰 아저씨의 과감한 손길에도 불구하고 멍한 얼굴로 입만 어버버거리고 있었다. 왜! 자기보다 50살은 더 젊어 보이는 애한테 딱밤 맞은 게 그렇게 억울하냐! 나는 씩씩대며 할아버지를 올려다봤다.




" 아, 아니, 이봐! 왜, 왜 나만 끌고 가! "

" 할아버지가 잘못하셨으니까 할아버지만 끌고 가죠! "

" 너, 너네가 먼저 예의 없게, 어?! 그렇게 굴었잖아! "

" 아니 진짜… 하아… 씨히히히히발… "




진짜 개빡친다… 나는 열 존나 받은 얼굴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경찰 아저씨는 이 할아버지 미쳤나? 하는 얼굴로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고, 내 뒤에 있던 이동혁은 금방이라도 할아버지에게 덤벼들 것처럼 살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을 눈치 못 채고 있었던 할아버지는 여전히 어이없다는 얼굴로 내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쟤네가 먼저 노인 공경 안 했는데, 이게 내 탓이야? 노인 공경 안 한 쟤네 탓이지! 하는 얼굴로다가. 나는 직장인 시절 18 적금으로 180만 원을 모았던 과거를 떠올렸다.


난 내가 18 적금으로 180만 원 모은 거 보자마자 내가 화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이 세상은 화가 많을 수밖에 없는 세상이구나… 나는 마음속 깊이 끓어오르는 화를 참아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여기서 더 싸워 봤자 시티고 딱콩녀로 이름만 날릴 것 같으니.




" 그냥 끌고 가세요, 경찰 아저씨. 저 할아버지랑은 더 이상 할 말 없으니까. "

" 그… 상황 설명 정도는 해 주셔야… 저희가 뭐라도 해 드리는데. "

" 저 할아버지랑 경찰서에서 얼굴 맞대고 얘기하기도 싫어요. 보상 요구고 뭐고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그냥 저 할아버지 좀 치워 주세요. 지금 제 눈앞에서, 당장. "




경찰 아저씨는 내 말을 듣자마자 조금 머쓱한 얼굴로 냅다 할아버지를 치웠다. 할아버지는 또 다른 경찰 아저씨 손에 질질 끌려가면서도 내게 삿대질을 했다. 물론 나는 삿대질하는 할아버지에게 은근슬쩍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 보였지만… 다행히도 경찰 아저씨는 내가 엿 날린 걸 못 본 모양이었다. 경찰 아저씨는 혹시 모르니 연락처 하나만 남겨 달라며 수첩을 내미셨고, 추후에 연락이 가면 파출소에 한 번 들러야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나는 죽상을 한 채로 전화번호를 적으면서도, 할아버지가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에 하나에 만족하고 있었다. 발목은 뭐, 통장에 있는 돈으로 병원이나 가야지…




" … 걸을 수 있겠어요? "

" 아니. 나 사족보행해서 집 가야 될 것 같은데… "

" 아니 뭔, 하… "




이동혁은 멍청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만 안 했지 표정으로는 뭐 이딴 게 있냐는 듯한 얼굴로 오만 쌍욕을 다 하고 있었다. 내가 다치고 싶어서 다쳤냐, 미친놈아. 그렇게 퉁퉁 부어오른 발목을 붙잡은 채로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다짜고짜 내게 등을 내민 이동혁이 까무잡잡한 귀를 새빨갛게 물들이며 입을 열었다.




" … 업히세요. 일단 그 상태로 집에 갈 순 없을 것 같으니까… "

" 야… 나도 인권이라는 게 있거든? 나이 24… 아니, 18살 먹고 어떻게 17살 후배한테 업혀. "

" 나이 많으면 후배한테 업히지도 못해요? 어차피 부축해 줘봤자 아까처럼 주저앉을 거면서. "




그건 그래. 나는 일리가 있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어차피 누가 부축해 준다고 해서 걸을 수 있는 상태도 아니고… 살짝 인간 존엄성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이동혁 등에 업히는 게 더 빠르겠지. 나는 체념한 얼굴로 천천히 이동혁의 등에 몸을 안착했다.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동혁의 등은 생각보다 넓고 아늑했다. 맨날 춤만 추는 놈이 옷에서 나는 향기는 또 왜 이렇게 좋은지. 나는 변태 같은 얼굴로 이동혁의 섬유 유연제 냄새를 맡으며 이동혁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이동혁은 내가 딱 달라붙어 목을 끌어안자마자 잔뜩 굳은 얼굴로 삐걱삐걱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지? 인간을 사랑한 레고 뭐 그런 건가.


이동혁은 학교 운동장 벤치에 나를 내려놓으며 어깨에 메고 있던 크로스백을 뒤적거렸다. 이 새끼 지금 뭐 하나 싶은 얼굴로 이동혁을 빤히 쳐다보니, 이동혁은 검은색 크로스백 안에서 붕대를 비롯한 여러 도구들을 꺼내고 있었다. 뭐야, 갑자기 웬 허준 모드. 얘 이런 것도 할 줄 알았나? 내가 살짝 당황한 얼굴로 이동혁을 쳐다보니, 이동혁은 자기가 더 민망하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이동혁이 툴툴대는 얼굴로 빨갛게 부어오른 내 한 쪽 발목을 들어 올렸다.




" … 일단 붕대로 압박 먼저 할게요. 원래는 병원 가서 진료받고 해야 하는데… 지금은 급하니까. "

" … "

" 임시방편 같은 거예요. 집 가면 얼음찜질도 좀 해 주고… 웬만하면 움직이지 말고 푹 쉬어요. 괜히 나대다간 더 부으니까… "




이동혁은 자기가 생각해도 부끄러운지 붕대로 내 발목을 칭칭 감으면서도 계속해서 말을 내뱉었다. 줄줄이 말을 잇는 이동혁의 뒷목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귀 쪽은 뭐… 말할 것도 없었고. 이러다가 이동혁 얼굴 터지는 거 아니야? 나는 열심히 붕대를 감고 있는 이동혁의 갈색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 춤만 잘 추는 줄 알았는데. 이런 건 또 언제 배웠대? 하긴, 춤 자주 추면 부상도 잦을 테니까… "

" … "

" 그래도 항상 몸조심하면서 살어. 이 나이대엔 몸이 재산이야. "




이게 무슨 엄마 아빠도 안 할 법한 진지충 발언인가. 나는 내가 내뱉고도 어이없는 말에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이동혁은 이런 내 말을 들으면서도 오글거린다는 말 한마디를 안 했다. 오히려 이런 소리가 고맙다는 듯, 살짝 입꼬리를 올려 옅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 … 누나는 진짜… 이상한 사람이에요. "

" … "

" 평생 가도 이해 못 할 것 같다니까… "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이동혁의 말에, 나는 뭔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두 눈을 크게 떴다. 이 말, 어디서 많이 들어 봤다 했더니. 이거… 이동혁이 몇 달 전에 나한테 했던 말 아니야? 나는 그제서야 이동혁과 있었던 과거의 일을 온전히 떠올려낼 수 있었다. 이동혁 앞에서 춤 같은 거 왜 추는지 모르겠다며 개 쌉소리를 했던… 그런 과거의 일을 말이다. 세상에, 과거의 김여주 진짜 미친 거 아니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동혁한테 그런 소리를 왜 해? 나는 이것도 모르고… 이동혁한테 사과 한 번 한 것 가지고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이동혁이 나에 대한 적대감을 지우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동혁은 이마크를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는 내 행동에 열받은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멸시하고 하찮게 여겼던 내 행동에 화가 난 거지.


나는 열심히 붕대를 감고 있는 이동혁을 내려다보다,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몇 달 전에 있었던 일, 사과할게. 너한테 춤 같은 거 왜 추는지 모르겠다고… 힘든 것만 골라서 하는 거 이해 안 된다고 했던 거. 사과할게. "

" … "

" 내가 기억력이 많이 나빠서… 이걸 이제서야 기억해 버렸네. 미안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한꺼번에 사과할 걸 그랬다. "

" … "

" 내가 옛날에 했던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겠지만… 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 안 해. 너네들 춤추는 거 멋있어. 존나 캡짱임. 내가 노래를 좋아하는 것처럼 네가 춤을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이해가 빨리 되더라고. "




물론 이거 다 개지랄이고 그냥 대가리 커서 이제서야 잘못한 걸 깨달은 거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니까. 나는 놀란 얼굴로 날 올려다보는 이동혁의 두 눈을 마주하며 옅게나마 웃어 보였다. 이동혁은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사과를 한 게 퍽 어이없어 보이는 모양새였다. 물론 어이없음 반, 놀람 반이겠지만… 하긴, 나 같아도 놀라겠다. 할아버지가 시전한 몸통 박치기 대신 맞고 날아간 여자애가 발목 퉁퉁 부은 채로 사과하고 있으니… 이게 무슨 염병인가 싶겠지. 나는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이동혁의 시선을 피했다. 아까부터 진득하게 닿아오는 이동혁의 시선이 적응되지 않아서였다.




" 아아~! 물론! 사과했다고 예전처럼 아는 척하고 지내자는 건 아니야. 그냥 이렇게 사과한 김에 옛날 일 다 잊어버리고, 나랑 아예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

" 누구 마음대로요? "

" … 엉? "

" 그게 누나 방식이에요? 사과 다 끝났으니 됐다, 이젠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지내자. 마크 형한테도 이랬다면서요. 인간관계든 뭐든… 누나는 왜 그렇게 맺고 끊는 게 쉬워요? "

" … "

" 나는 이제서야 누나를 제대로 보게 됐는데. "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은 이동혁이 벙찐 듯한 내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는 세상에서 제일 진지한 얘기 하고 있는데, 막상 자기 말 듣고 있는 사람은 영혼 개털린 김용명 표정을 짓고 있으니… 어이가 없을 만도 했다. 나는 뒤늦게서야 표정을 수습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어어, 미안. 내가 좀 놀라서. 이동혁은 맥락 따위 없는 내 대답에 어이가 한 주먹 정도 가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 저도 누나랑 아는 척하고 지낼 거예요. 지성이처럼. "

" … "

" 복도 지나가다 마주치면 인사도 할 거고요, 이젠 반말도 안 쓸 거예요. "

" … "

" 그러니까, 누나도 저 보면 아는 척해요.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무시하지 말고. "




나는 이동혁의 말에 멍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사실상 흉기만 안 들었지 반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시발… 저렇게 무서운 말투로 말하는데 누가 거절해. 이동혁은 내가 고개 끄덕이는 걸 보자마자 한층 뿌듯해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혁아… 넌 지금 뿌듯하니? 난 정신 나갈 것 같은데… 기껏 이마크 무리와 멀어지기 위해 팔자에도 없는 사과를 하고 다녔더니만… 돌아오는 건 무시나 무관심이 아닌 색다른 형태의 관심이었다. 뭐지? 시티고 관종에겐 남들과 다른 피가 흐르고 있는 건가? 왜 다들 나를 아는 척 못 해서 안달이지? 나는 정말 울고 싶어졌다.




" 누나. 택시 잡아놨어요. "

" 어? 어어… 고맙다. "




이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동혁은 해맑은 얼굴로 내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동혁은 절뚝이는 나를 옆에서 부축까지 해 주며 택시 코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나는 이동혁과 헤어진 뒤 택시 문을 닫자마자 생각했다.


… 18살 김여주 삶은 리셋 안 되나요.


될 리가 없지. 나는 택시 뒷좌석에 머리를 박으며 울음을 삼켰다. 이쯤 되니 이마크의 원래 운명은 한겨울이 아닌 나였다는 신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창틀에 머리를 기대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 나 진짜… 자퇴 말린다…





*





여주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정재현은 여주가 발에 붕대를 감고 등장하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과자 봉지를 후두둑 떨어뜨렸다. 부동산 사기 삼천만 원쯤 당한 듯한 표정으로 어버버거리고 있던 정재현은 여주에게로 후다닥 달려가 어떻게 된 일이냐며 캐물었고, 여주는 그런 재현을 받아내며 머쓱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분명 사실대로 말했다간 그 할아버지 죽을 때까지 쫓아다니겠지? 여주는 재현에게 적당한 MSG를 섞어가며 선의의 거짓말을 펼쳤다. 재현은 여주의 말을 다 듣자마자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여주의 발목을 쓰다듬었다. 누가 보면 발목 잘린 줄 알겠네. 뒤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여주의 어머니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안 되겠다. 여주 내일 일어나면 전화해. 오빠랑 같이 나가자. "

" 어? 오빠는 왜? "

" 왜긴 왜야. 이 다리로 어떻게 걸어 다니려고. 오빠가 차 태워줄 테니까, 일어나면 전화해. "




재현은 조금도 물러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으르렁거렸다. 여기서 여주가 반박해 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경영과 과탑을 지키고 있는 재현에게 3시간 동안 지옥의 연설을 듣고 싶은 게 아니라면… 여주는 재현의 완강한 태도에 백기를 들며 항복했다. 오빠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내가 뭐 어쩔 수 있나. 여주는 재현의 부축을 받으며 거실 소파에 드러누웠고, 재현은 소파 밑에 자리를 잡고 앉아선 여주의 입으로 쏙쏙 과자를 넣어 주었다.




" 저 가시나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

" 둘 다 없애서 집 들어오면 밥 먹여줄 거야? "

" 허미~ 개소리도 그런 개소리가 없다. "




여주의 어머니는 기상천외한 여주의 발언에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지독히도 말 안 듣는 K-딸래미의 성격을 알고 있는 어머니의 기권 패였다. 여주는 재현과 과자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재현은 여주가 잠든 걸 보자마자 여주를 침대로 옮겨주곤 곧장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까지 수다를 떨었으니, 오늘 하루 종일 피곤했을 여주가 잠에 빠져드는 건 당연지사였다. 재현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핸드폰 시계에 알람을 맞췄다. 대학생인 재현은 시간표를 잘 짠 덕분에 첫 번째 수업이 12시에 시작했지만, 여주를 위해 7시에 알람을 맞추는 미친 정성을 보여 주었다. 재현은 내일 아침 자신에게 고마워할 여주의 얼굴을 떠올리며 웃는 얼굴로 잠에 들었다.


재현은 다음날 알람이 울리자마자 곧장 여주네 집으로 찾아갔다. 일어나자마자 재현에게 전화하려고 했던 여주는 방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재현의 모습에 기겁하며 핸드폰을 떨궜다. 아니 뭔 대학생이 고등학생보다 빨리 일어나? 여주는 충격 먹은 얼굴로 재현을 바라보다가도, 이내 낑낑대며 학교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다리 다치기 전엔 10분 컷이었던 등교 준비가 거의 30분가량 걸린 걸 확인한 여주는 조용히 속으로 생각했다. 합법적 살인… 뭐 그런 건 없을까. 물론 있을 리가 없었다.





*





" 여주야, 안전벨트 해야지. "

" 으응, 알겠어. "




재현은 여주가 안전벨트를 하자마자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여주는 그날 도보와 자차의 차이가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었다. 걸어서 20분은 걸리는 등굣길이 차로는 5분도 안 걸린다니. 나도 차 뽑고 싶다. 여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김정우에게 카톡이 와 있었다. 하지만 여주는 아침 댓바람부터 온 김정우의 연락이 놀랍지 않다는 듯, 무덤덤한 얼굴로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김정우:

여주야

일어났어?



ㅇㅇ

학교 가는 중

지금 다 왔어

어디로 가면 돼?



김정우:

금방 왔네 다행이다

밴드부실로 바로 오면 돼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걱정 말고~




여주는 정우의 카톡을 보자마자 안심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 화면을 껐다. 며칠 전 정우와 함께 점심시간을 보냈을 때, 여주는 정우에게 밴드부 가입 시험을 봐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명색에 시티고 대표 밴드부인데, 이렇게 얼레벌레 꽁으로 합격 시켜줄 순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여주는 정우의 말을 듣자마자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에서 댄스부만큼이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밴드부에 노래 한 번 안 부르고 가입하는 게 말이 돼? 여주는 정우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며 남몰래 밴드부 가입 시험을 보기로 했다. 그게 오늘이었고.


여주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재현의 부축을 받으며 학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여주는 밴드부실 앞에서 재현과 헤어졌다. 재현은 아예 밴드부 시험이 끝나고 여주가 반으로 돌아갈 때까지 부축해 줄 기세였지만, 여주의 완강한 거절에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 사촌 오빠 분 걱정이 과하시네. "

" 저런 얼굴로 걱정이 과한 건 존나 감사한 거지. "

" 그건 그래. "




여주는 정우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정우는 여주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여주의 한 쪽 팔을 붙잡은 채로 여주를 부축해 주었다. 그렇게 여주와 정우가 나란히 의자에 앉으며 노래 시작 전까지 가벼운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을까. 마크는 반으로 올라가던 도중 밴드부실 근처에서 내려오는 재현을 발견하게 되었다.



" … "

" … "




재현은 마크를 보지 못했지만, 마크는 재현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주 남자 친구 아닌가? 성인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이 시간에 학교는 왜 오신 거지? 마크는 재현이 계단을 다 내려갈 때까지 재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요 며칠 전부터 계속해서 언급되던 여주의 남자 친구. 여태까지 미안했다며, 이제부턴 거리를 두자고 말하던 날… 수줍은 얼굴로 남자 친구를 언급하던 여주. 마크는 갑작스럽게 변해버린 여주의 태도가 적응 안 되면서도,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여주의 존재에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다가오는 방법이 틀렸을 뿐이지, 여주는 마크를 누구보다도 좋아하고 애정 했다. 그건 마크 본인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모질게 대하지 못했다. 애초에 모질게 대할 생각도 없었다. 마크는 여주를 싫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동아리 때문에 눈치를 보게 만들거나, 학습 심화반까지 따라와 성적을 떨어뜨렸을 땐 얘 왜 이러나 싶은 마음에 표정을 굳히긴 했어도… 마크는 여주가 싫지 않았다. 여주가 자기를 바라볼 때마다 이마크가 표정을 굳혔다고 생각한 건, 그냥 마크의 기본 디폴트 값 표정이 정색이었기 때문이다.


외적인 이상형.


여태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마크의 외적인 이상형은 여주와 똑닮아 있었다. 마크보다 아담한 키에, 포니테일이나 똥머리같이 깔끔한 머리 스타일을 고수하고,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살짝 들어가는. 그런 외적인 부분들. 김여주는 의도치 않게 이마크의 취향을 정확히 저격하고 태어난 생명체였다. 거기다 화룡점정으로 이마크와 정 반대되는 성격들까지. 이마크는 자신과 닮은 성격의 사람보다는 자신과 정 반대되는 성격의 사람을 좋아했다. 통통 튀고, 발랄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보기만 해도 주변이 환해지는 것 같은, 그런 사람을 좋아했다.


그럼, 여기서 도출시킬 수 있는 하나의 결론. 지금쯤 눈치챈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마크가 여주에게 고등학교 3년 내내 스토커 짓을 당하고도 여주를 자신의 결혼식장으로 초대한 것은… 애초에 여주를 진심으로 싫어한 적이 없다는 걸 뜻했다. 이마크는 김여주를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몇 년이 지난 후에도 김여주를 기억하고 자신의 결혼식장으로 초대할 만큼, 이마크에게 김여주는 여러모로 인상 깊은 사람이었다. 이마크는 희미한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밴드부실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부드러운 음색. 노래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듣는 사람의 기분마저 좋게 만들어 주는 신기한 힘. 여주의 노래엔 그런 힘이 있었다. 마크는 멍한 얼굴로 여주를 바라봤다. 살짝 열린 밴드부실 문틈 사이로 하얀색 가디건을 입은 여주의 모습이 보였다.


제멋대로 다가와놓고, 제멋대로 관계를 끊어내며 눈앞에서 사라진 사람. 이미 떠나간 사람을 다시 붙잡아 올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안다. 자기가 했던 행동들을 반성하며 사과하고 사라진 사람을 다시 불러올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안다. 내가 자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해서 날 모르는 척하는 거라면 할 말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김여주는 저 멀리 떠나버린 후라고 해도. 내가 다시 시작하고 싶다면, 내가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면…


그러면 어떡할 거야, 여주야?




" … 이마크? "




밴드부실 밖에 서 있던 이마크를 발견한 김여주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시 당황한 여주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에 든 마이크를 의자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너무 급하게 움직인 탓인지, 아까부터 저려오던 발목에 통증이 거세졌다. 여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심을 잃은 채로 비틀거렸다. 옆에 앉아 있던 정우는 자기가 더 놀란 얼굴로 여주에게 손을 뻗었지만, 넘어지려는 여주를 붙잡은 건 이마크가 더 빨랐다.




" … "

" … "




여주의 팔목을 붙잡은 마크와, 여주의 옷자락을 붙잡은 김정우의 시선이 교차했다. 김정우는 굳어져 있던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웃으며 입을 열었다.




" 그쪽. "

" … "

" 여주랑 모르는 사이라고 들었는데. "




마크는 김정우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모르는 사이 맞아. 모르는 사이 맞는데.




" 이제부터 아는 사이야. "

" … "

" 나랑 여주. "

" … "

" 친구부터 다시 시작할 거니까. "




마크는 붙잡고 있던 여주의 팔목을 조금 더 세게 그러쥐었다. 여주는 알 수 없는 김정우와 마크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도, 이내 제 눈앞에 있는 마크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야… 나 어떡하냐…


환불했던 마음이 반품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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