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iring: 데미안 웨인(로빈)/딕 그레이슨(2대 배트맨)

Rating: PG-13



딕이 배트맨을 그만두게 된 것은 정말 우연찮은 계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런 일로 히어로 활동을 관두리라고는 그도, 그의 로빈인 데미안도, 심지어는 저 브루스마저도 예상하지 못했다. 가장 뛰어난 탐정 집단이라는 그들로써도 그런 종류의 일을 예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항상 모든 일을 두고 최악의 사정들을 대비하곤 했다. 그들의 성향이 유달리 비관적이거나 소심해서가 아니라, 현실이 그랬기 때문이다. 세상의 악은 거대했고 밤은 더욱 깊었다. 그림자 속에 숨어 적과 대적하는 어둠의 기사에게도 언젠가는 종말의 날이 찾아오리라. 이제껏 겪어왔던 수 많은 승리와 그 보다 더 많았던 패배 그 모두가 무의미해지는 날이. 그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날을 각오하고 있었다.


**


-....하지만, 이런걸 각오한 적은 없었는데.

브루스 웨인은 좀처럼 드문 경험을 하며 그자리에 얼어 붙었다. 그를 마주 보고 선 큰아들은 보기 드물게 겸언쩍은 표정으로 브루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출산 휴가라고?"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는 몹시 동요하고 있었다.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표정을 내리누르느라 턱 근육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상대는 딕 그레이슨이다. 브루스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할리 없는 그는 조심스럽게 그의 안색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브루스."

"여자친구가 있었니?"

임신? 임신이라고? 브루스는 머릿속이 어지럽게 헝클어졌다. 자신의 양자가 여성들에게 꽤, 흠. 솔직히 말하면 엄청나게 인기가 있다는 것 정도는 파악을 하고 있었다. 자기와 다르게 여성과의 관계를 진심으로 즐기는 딕은 스테디한 연인도 여럿 있었고, 몇 몇과는 거의 결혼 직전까지 가기도 했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꽤나 얌전했고 특별히 사귀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는데. 

다 큰 아들의 사생활이긴 하지만 자신이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에 브루스는 은근한 자책감을 느꼈다. 딕은 그의 양자들 중에서도 유난히 싹싹한 편이었다. 같이 보낸 시간이 많다보니 서로를 잘 아는데다, 워낙 쾌활한 성격이다보니 묻지 않아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 데 너무 익숙해졌다. 그러다보니 종종 자기 손으로 아이를 챙기는 걸 잊곤 한다. 물론 다 큰 청년을 어린아이 대하듯 할 필요는 없지만 저 아이가 임신까지 시킬 정도라면 꽤 진지한 관계일 텐데. 그런 상대를 이제껏 모르고 있었다는 게 브루스는 마음에 걸렸다. 사실 딕의 성격이라면 자기가 말도 안한 걸 어떻게 알겠느냐며 신경도 안쓰겠지만, 아버지의 마음이란 그런 게 아니었다. 

"......아, 뭐..........여자친구가 있는 건 아니구요...."

딕은 애매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이걸 말해야 되나 말아야 하나. 짧은 순간 격렬한 갈등이 그의 얼굴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늘 뻔뻔스러운 표정을 짓는데 익숙한 잘생긴 얼굴에 뜻하지 않은 곤혹스러움이 서린다. 브루스는 그 얼굴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딕은 한 손을 들어 목뒤를 득득 긁으며, 발끝으로 배트 케이브의 동굴 바닥을 문질렀다. 그러더니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한 가지 사실을 고백했다.

".........낳아요......"

"뭐라고?"

무슨 소리가 들리긴 했는데, 아무래도 잘못들은 것 같아 브루스는 자기도 모르게 반문했다. 자기 귀를 의심하는 브루스의 되물음에 귓볼이 벌겋게 달아오른 딕이 시선을 떨어트리며 다시한번 속삭인다.

"......제가 낳는다구요. 그래서 필요해요. 출산휴가.............."



세계 최고의 탐정이자 동시에 과학 마스터. 시대를 앞서가는 빌런들의 첨단범죄를 따라잡기 위해 최첨단 과학기술에 대한 정보는 누구보다도 먼저 섬렵하고 있는 브루스 웨인에게도 남자가 임신이 가능하다는 건 새로운 소식이었다. 잠깐동안 머릿속이 멍했던 브루스는 속으로 온갖 생각을 다 하고 있었다. 이게 요즘 젊은 애들의 유머감각인가부터 시작해서, 이 녀석이 지금 나한테 무슨 불만이 있어서 간접적으로 시위하는 건가 하는 의심까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해가 안되서 브루스는 딕을 빤히 바라보았다. 본인은 그냥 보는 거지만 남들은 옛 소련의 정보단체가 특별히 고안한 심문용 시선이라고 믿고 있는 바로 그 시선이다. 딕은 브루스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쓴웃음을 머금었다. 하긴, 단서를 찾아 진실을 추적하는 마인드가 기본으로 장착된 탐정이 이런 얼토당토 않은 주장을 덥썩 믿어줄 리 없었다. 브루스가 아니라 누구라고 해도 같은 반응일 것이다.

"무슨 생각하시는지는 알겠는데요, 이건 농담이 아니구요..."

한숨을 푹푹 쉬며 뭔가를 설명하려던 복잡하다는 듯 한 손으로 머리를 헤집더니, 허리춤에서 USB를 하나 꺼내 브루스에게 내밀었다. 브루스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틴 타이탄 타워에서 검사한 결과에요. 혹시 몰라서 바바라한테 재검까지 부탁해봤는데 확실하대요."

솔직히 딕은 브루스한테 사실을 말하는게 이렇게 부끄러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오히려 전 애인인 바바라한테 사실을 털어놓을 때가 더 괴로울 거라고 예상했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괴로움의 강도가 완전히 달랐다. 브루스는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묵묵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너무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이마를 밀면 머리끝부터 산산히 부스러질 것 같다. 아, 무서워. 왜 이렇게 무섭지. 딕은 등뒤가 척척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끼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이 나이에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지만, 꼭 부모 몰래 아버지 차를 끌고 나갔다가 사고를 낸 열 일곱살짜리가 된 기분이었다.

"....딕 그레이슨 웨인."

마이클 잭슨처럼 살금살금 뒷걸음질 쳐 물러가려고 했던 딕은 어두운 동굴 안을 장중하게 울리는 브루스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범죄자 들을 겁줄 때나 쓰는 목소리가 낮게 깔리며 딕의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라."

증거자료까지 제출하는 딕의 태도에 드디어 상황이 사실임을 깨달은 브루스가 엄한 목소리로 딕을 불러세웠다. 무서운 건 그 와중에 와직, 소리가 나며 브루스의 손아귀에서 딕이 건넨 증거자료가 부서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 장면을 보고 딕은 일이 제대로 틀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상 외로, 아니 예상 이상으로 브루스는 엄청나게 화를 내고 있었다. 머릿속이 어지간히 끊어지지 않은 다음에야 저 배트맨이 증거자료를 저따위로 다룰리 없는 것이다. 딕은 얼음동상처럼 끼끼긱하고 목을 돌려봤다 바실리스크를 마주한 연약한 인간재물처럼 덜컥 굳었다. 어둠 속에서 파랗게 타오르고 있는 브루스의 눈빛이 지옥의 불길보다도 더 차가워 보인다. 왜 이렇게 심각해요. 와이 소 시리어스? 딕은 애처로운 마음으로 생각했지만 차마 그 말을 입밖에 낼 수 없었다. 그랬다간 무슨 꼴을 당하게 될 지 자신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탐정을 두고 바른 답을 찾아내는 직업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틀렸다. 원래 탐정이란 바른 답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질문부터 찾아야 하는 직업이다. 배트맨 일가는 최고로 훈련된 좋은 탐정들이고 예상치 못한 난관앞에서도 해결책을 찾아내곤 했지만 항상 성공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예외는 있었다.  처음 딕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브루스가 제일 먼저 떠올렸던 질문은 그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결혼도 안 한 자녀가 느닷없이 미혼모가 되겠노라고 고해온 상황에서는 그도 별 수 없는 아버지일 수 밖에 없었다. 임신한 자녀가 딸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게 당혹스럽긴 했지만 별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오히려 평소 상상도 못했던 일인지라 당혹감은 더욱 클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의 질문에 대한 딕의 대답은 난처한 웃음과 어색한 으쓱임이 전부였다.

- 묵비권을 행사할께요.

딕은 브루스가 진짜로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아니 그랬기에 더욱 더 진지하지 못한 태도로 생글 생글 웃으며 딴청을 부렸다. 언제나 그렇듯 그 앤 웃는 얼굴로 완고했다. 브루스가 냉혹하게 몰아붙여도, 진심으로 언성을 높이며 사납게 다그쳐도 끝끝내 입을 다물곤 그저 식은땀을 흘리며 웃기만 한다. 브루스는 그 모습을 보고 그가 끝까지 상대를 털어놓지 않으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더불어 그는 그 빌어먹을 놈이 딕도 딕의 아이도 책임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이다. 브루스는 모처럼 불같이 타오르는 격노를 느꼈다. 결혼도 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애를 임신시킨 놈이니 무릎꿇고 빌어도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애가 임신했는데도 꼬빼기도 안비추다니 대체 뭐하는 놈인가 싶은 것이다. 저간의 사정이야 저희의 사생활이라지만, 뱃속의 아이는 그게 아니지 않은가. 일말의 책임감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정체를 감추지는 않았을 터였다.

허나 거기까지 생각하던 브루스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인간적인 감정에 휘둘려 말도 안되는 관점으로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순간적이지만 이성을 잃었던 모양이었다. 딕은 여자가 아니다. 그는 남자고, 남자는 자연적으로는 절대 임신이 불가능하다. 남자인 그가 임신을 하기 위해서라면 인공적인 신체 개조가 필수며, 그 과정에서 꼭 통상적인 절차가 개입할 필요는 없었다. 즉 딕이 임신을 했다고 해서 그를 임신시켰을 미지의 남자가 있을 가능성은 드물다는 이야기였다. 아닌 말마따나 자의가 아니라도 신체의 개조따윈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 아닌가. 늘 지켜보고 있던 아이가 언제, 어느 순간 그런 일을 당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일이 일어난 건 확실했다. 딕이 임신했다는 사실이 그를 증명했다.딕이 지나치게 여상하게 굴어 무심결에 그 태도에 휘말렸지만 뒤늦게나마 브루스는 그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자식의 일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일 수도 있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의 단서를 놓친 탐정으로서의 감일 수도 있지만 그의 본능이 뭔가를 경고 하고 있었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고. 장막 뒤에 보이는 것 이상의 일이 존재할 지도 모른다고 말이다.마음을 달리 먹은 그는 딕을 닥달하는 대신 바바라에게 연락해 딕의 검진 기록을 받아보았다.

[연락 받으셨어요?]

임신한 건 딕인데 자기가 부끄러운 듯 발그레하게 볼을 붉힌 바바라가 정보를 전송해주며 말했다.

[너무 야단치지 마세요. 어린애도 아닌데.]

브루스는 딱딱한 목소리로 바바라에게 대답했다.

"야단 칠 일인지 아닌지는 좀 더 두고 보면 알겠지."

브루스는 딕의 검진 기록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딕의 말대로 그의 뱃속엔 아이가 있었다. 성별은 XY. 이제 5개월. 소장에 연결된 인공자궁 속에 들어있는 아이는 이미 사람 꼴을 모두 갖춘 채였다. 5개월부터라면 슬슬 티가 나기 시작할 시점이다. 원래는 임신초기가 더 위험한 법이지만 격렬한 자경단 활동에도 여태까지 버틴 걸 보면 임시로 만들어진 장기임에도 불구하고 자궁이 퍽 튼튼한 모양이었다. 

브루스는 대체 어디에서 이런 기술력이 나왔는지부터 추적하기 시작했다. 딕이 제 손으로 제 배를 가르지 않은 이상 누군가 분명히 시술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는 이런 종류의 인공장기가 연구되는 전세계의 모든 연구소를 뒤졌다. 그리고 오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수상쩍게 시간이 비는 모든 연구자들을 추적해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조사해도 잡히는 게 없었다. 모든게 깨끗했다. 마치 하늘에서 수태고지라도 내려 딕에게 아이를 점지해주기라도 해준 것처럼 말이다. 

그가 의심했던 단서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브루스는 벽에 막혔다. 그는 자신이 뭘 뒤쫓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확신이 생겼다. 이렇게까지 기록이 없다는 것은 좋지 않은 신호였다. 딕을 가르친 것은 브루스였고, 그는 딕의 모든 것을 알았다. 딕은 좋은 학생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브루스를 이렇게까지 완벽히 속일정도는 아니었다. 딕 스스로가 한 일이라면 이렇게까지 모든 것이 깨끗할 순 없었다. 어딘가 다른 자의 손길이 닿은 것이다. 누군가, 그가 상상한 적 없는 자의 손길이....

- 탈리아 알굴.

아예 원점으로 돌아가 5개월 전쯤 딕이 뒤를 쫓던 사건에까지 소급해 올라가던 브루스는 뜻밖의 이름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탈리아 알굴. 보안을 뚫고 들어간 모니터 속에 그녀의 알파벳이 반짝이고 있었다. 


**


"휴가?"

휙, 채찍을 휘두르는 것처럼 팔을 뻗어오며 데미안이 물었다. 사각에서 꺾어 들어오는 날카로운 잽이다. 리치가 길고 힘이 좋아서 잽이라고 해도 잘못 맞으면 골치 아픈 수준이라 딕은 아슬아슬하게 턱을 젖혀 정통으로 명중당하는 걸 피하고 팔꿈치를 관절기로 밀어쳤다. 손톱도 안 박힐 두툼한 팔꿈치가 손아귀에 잡혔다가 강철처럼 강하게 젖혀온다. 복싱에서 자연스럽게 쿵푸로 넘어와 팔꿈치로 딕을 되받아친 데미안은 바로 뒤돌려차기를 해 딕의 허리를 걷어차려고 했다. 이 자식이 지금 누굴 죽이려고! 평소대로라면 수직으로 허리를 젖혀 피했겠지만, 현재의 신체적 사정상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딕은 과하게 큰 동작으로 재주를 넘었다. 얼씨구? 데미안이 입가에 시니컬한 미소를 띄우며 땅을 박찼다. 녀석을 피해 한번 더 재주를 넘은 딕은 벽을 차고 드러나 있는 철골조 위로 몸을 옮긴다. 그는 중력을 모르는 것처럼 우아하게 날아올라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놓치고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데미안을 내려다보며 씩하니 미소를 지었다.

"그래. 휴가."

끝까지 덤비자면 다시 한번 벽을 박차고 따라가 체력단련실의 천장 위에서 2차전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딕이 좀 쉬었다 하자는 듯 손을 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끝을 못 본 데미안은, 쳇 하고 혀를 차며 바닥을 굴러다니던 생수병을 집어들어 딕에게 던져 주었다. 공중에서 생수병을 낚아 챈 딕은 땡큐하고 인사를 한 뒤 뚜껑을 열었다.

"휴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어따대고 휴가야 휴가가. 여름철이라고 범죄가 줄어들어?"

갈가마귀처럼 검은 머리카락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그 땀이 굵고 강인한 목덜미와 단단한 흉근으로 떨어지는 것을 딕은 흐뭇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눈만 커다랗던 열살배기 꼬맹이는 칠년 후 제가 제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증명해 냈다. 아직 열일곱살 밖에 안됐는데 키가 백 팔십오에 육박했고 그 능력은 웨인가의 누구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다. 유난히 건방진 눈초리와 버릇없는 말솜씨는 아직도 여전했지만, 그를 칠 년간 거의 키우다시피 한 딕에게는 그마저도 제법 귀여워보였다.

"슬슬 배트맨 그만하고 싶어?"

자신의 몫의 생수병을 들어 뚜껑을 개봉하며 데미안이 빈정거렸다. 딕은 데미안이 던져준 물을 마시며 낮게 코웃음 쳤다. 

"네 희망사항이겠지."

"웃기고 있네. 내 희망사항인데 휴가같은 소리가 나와? 그레이슨 너 요즘 은근히 이상한 거 알아? 몸도 둔해지고, 묘하게 살도 붙는 것 같고. 평생 안 그러던 사람이 왜 이래? 자기 관리는 손 놨어??"

오. 날카로운데? 아이가 눈치채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딕은 내심 움찔하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몸에 제법 변화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티가 날 줄은 몰랐다. 딕은 겉으로는 생글 생글 웃으며 스스로의 난처함을 감췄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데미안에게 만큼은 자신의 일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너도 나이 들어봐. 나정도면 양호한 거야."

"네가 나이가 들었으면 얼마나 들었다고 나이타령이야. 아버지도 아직 현역에서 쌩쌩하신데, 아들이라는 작자가 건방지게."

"로빈이 배트맨에게 이러는 건 안 건방지냐?"

"내가 언제까지 로빈일진 두고 봐야 알 일이지."

"무섭다. 자식아. 이러다 언젠가 등 뒤에서 썩시딩 유 브라더 하는 거 아닌게 모르겠네."

데미안의 타박에 과장스럽게 웃던 딕이 농담을 하며 목 주변을 어루만졌다. 데미안은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큰형에 대한 존경심과 배트맨에 대한 존중은 어디로 젖혀뒀는지, 사춘기에 접어든 데미는 부쩍 저따위 시선으로 형님을 바라보곤 했다. 이래서 애들은 안돼. 아무리 정성을 쏟으며 거둬 키워도 지가 혼자 큰 줄 안다니까? 사춘기 청소년의 부모들이 의례 갖는 쓸쓸함을 가슴에 품으며 딕은 건방진 막내둥이 동생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수련을 하려고 폼을 잡던 데미안은 머리 위에서 달랑달랑 다리를 흔들고 있는 딕이 신경이 쓰였는지 휙하니 위를 올려다보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수련 안 할거야?"

그때, 다행히도 수련실의 문이 열리고 알프레드가 나타났다. 

"딕 주인님, 브루스 주인님께서 부르십니다." 

알프레드의 부름을 들은 딕은 고개를 들었다. 브루스가 또? 떨떠름하게 알프레드를 바라보던 딕은 뭔데? 왜 난 안 부르는데? 하는 시선으로 그를 돌아보는 데미안을 의식하곤 애써 미소를 머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 자신의 상황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데미안에게만큼은 절대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세상에는 알아도 좋을 일과 절대 알아서 안되는일이 있었는데, 딕이 생각하기에 이번 일은 데미안이 절대로 알아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수고해, 로빈"

웃는 얼굴로 데미안을 놀린 딕은 알프레드를 따라 수련실을 나섰다.



어떤 아이들에게 배트케이브는 부기맨의 악몽 속 같은 광경일지도 모른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불쑥 불쑥 솟아있는 기괴한 형상들, 머리 위에서 퍼덕거리는 박쥐의 날개소리. 음산하게 가라앉은 습한 공기, 걸을 때마다 뒤따라 울리는 발자국의 묘한 메아리들. 하지만 딕 그레이슨에게 이 장소는 어린 시절 전체를 보냈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그에게는 즐거운 놀이동산이고 집이었으며, 더 자라서는 일터이자 쉼터가 되준 공간이다. 거대한 스크린을 가진 메인 컴퓨터 앞에 브루스가 등을 보이며 앉아 있다. 배트 케이브가 그렇듯 브루스의 모습도 변한 게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존재들 중 하나인 브루스 웨인은, 그렇기에 믿을 수 있는 남자다. 가끔 지나치게 꼼꼼하고, 어쩔땐 꼼꼼함을 넘어 편집증적인 집착을 보여줄 때가 있긴 하지만 적일 때는 그보다 더 무서운 이가 없고 아군일 땐 그보다 더 든든한 이가 없었다. 

문제는 지금의 딕에게는 브루스가 적인지 아군인지가 애매하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추궁 후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포기를 해줄 줄 알았던 브루스의 반응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는 마치 임신한 십대 딸내미를 추궁하는 아버지처럼 굴었고, 자신은 놀랍게도 아버지 몰래 임신한 십대 딸내미처럼 그의 앞에만서면 미묘한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둘 다 딕이 미처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전엔 한번도 임신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설마 이런 식의 반응이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탓이 컸다.

"부르셨어요?"

브루스에게 가까이 다가간 딕은 습관적으로 웃음을 떠올리며 말을 걸었다. 카울을 젖혀 얼굴을 드러낸 브루스가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평소보다 한층 더 낮게 가라앉은 듯 한 그의 눈빛에 딕은 의아해하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브루스는 단말기에 팔꿈치를 얹은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유를 말해봐."

딕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이렇게 뜬금없는 질문의 의도까지는 파악하지 못한다. 뭐라구요? 딕이 반문하자 브루스가 팔꿈치 아래 깔려 있던 서류를 집어 딕에게 건네주었다. 딕은 무심결에 자료를 건네받고 시선을 내렸다. 익숙한 유전자 기호가 복잡한 도표를 그리고 있는 서류엔 그의 이름과 낯익은 이의 이름이 나란히 박혀 있었다.

"........이게 뭐죠?"

딕은 멍하니 그 서류를 읽어내려가다 숨을 삼켰다. 이런 세상에- 빌어먹을. 이건 친자 확인 증명서였다.

"친자확인 증명서."

브루스는 확인사살을 해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딕은 머리가 핑도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각오는 하고 있던 일이었다. 상대는 저 브루스 웨인이다. 언젠가는 들킬 수 밖에 없고, 감춰봤자 더 크게 드러날 일일 뿐이다. 하지만, 너무 빨랐다. 예상보다 더 빠르고 지나치게 느닷없어서 딕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망할 탈리아. 적어도 팔개월까진 숨길 수 있을 거라며! 딕은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는 이번달까지 자신의 일을 정리하고 탈리아의 곁으로 몸을 숨길 생각이었다. 자신에게 이런 일을 강요한 탈리아 알굴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브루스에게도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린 거였지만, 이렇게 빨리 모든 사실이 밝혀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딕은 완전히 얽허버린 일을 어떻게든 제대로 풀어보려고 애쓰며 입을 열었다. 젠장. 생각해. 제대로 생각해 딕 그레이슨. 하지만 눈 앞에 놓인 서류와 서류위에 쓰인 이름 하나가 그를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알고 저지른 일이니 상관없는 거라고.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비치든 그때의 그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임신을 받아들이는 브루스의 감정을 오판한 것처럼, 이 점에 대해서도 그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새하얀 종이 위에 쓰여진 글자가 아프게 눈을 파고 들자 새삼스레 자신이 저지른 일의 무게가 실감났다. 머릿속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데미안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딕은 그 애가 이 사실을 알게 되는 게 두려워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애만큼은 절대 이 일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너는 이유없이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지. 그러니 이유를 말해, 딕."

다시 한번, 브루스가 추궁한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진실을 캐냈으면서도 브루스의 태도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딕은 알고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차갑고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을수록 더 화가 난 상태라는 걸. 딕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떨어트렸다.

"어떻게 알았어요?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 사람을-, 아이의 아버지를 처음부터 예상하지는 못햇을텐데요."

상황에 걸맞지 않은 걸 알면서도, 딕은 질문부터 던졌다. 딕은 정말로 궁금했다. 브루스가 어떻게 사실을 알아냈는지 알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친자확인이라는 건 일단 부모와 자식간의 유전자가 확보되어야 확인이 가능한 것이다. 오라클의 데이타 베이스가 아무리 방대해도 전국민의 유전자 데이타를 확보하고 있을리 없다. 현존하고 있는 유전자 정보는 범죄 식별 프로그램을 위해 등록된 데이타들 뿐이기 때문에 애 아버지가 범죄자가 아닌 이상 이번 일 같은 일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할 터였다. 예상 범위라도 있다면 샘플을 뽑아 차근차근 범위를 좁혀가겠지만 그도 아니다. 아이의 유전자를 얻어도 비교해볼만한 자료가 전혀 없으니 누가 아버지인지를 확인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바바라가 제안한 양수 검사에도 응한 거였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은 몰랐다. 불행하게도 브루스는 언제나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난 탐정이었다.

"탈리아 알굴."

브루스는 목을 긁는 듯한 음성으로 그 이름을 내뱉았다.

"애초에 남성에게 임신이 가능하게 만들 정도의 유전자 기술을 보유한 단체는 거의 없지. 그 중에서도 5개월 전 너와 동선이 겹쳐진 것은 그쪽이 유일하고."

빌어먹을 탈리아. 그토록 자신하더니 결국 꼬리를 감추지 못했던 모양이다. 딕은 어이없이 웃으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물론 그랬을 것이다. 브루스가 이번 일에 알굴 가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면, 제일 먼저 무엇부터 의심했을지는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실제로도 그래서 그가 제일 먼저 친자 확인을 한 것은 자기 자신부터였다. 그리고 두번째가 팀이고, 세번째가 데미안이었다.

"그 여자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어, 딕? 네가 왜 데미안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거지?"

브루스의 직선적인 물음에 딕은 가늘게 웃었다. 눈가가 희미하게 휘고 입가가 일그러지는 게 웃음이라면, 그는 분명 미소를 지은 거였다. 

"......데미안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더군요. 제 앞에서 그 애를 해부하려고 했어요."

더이상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딕이 순순히 사실을 털어놓았다. 데미안은 아직까지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그때 그 애는 이미 마취가 되어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상황이었고, 모든 일이 끝난 뒤엔 단순히 자신이 제압되어 있다 깨어난 줄로만 알았으니까. 딕의 머릿속에서 그 무시무시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이의 머리 위에서 뇌절개용 커터가 돌아가고 있었다. 냉정하게 미친 탈리아가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지켜본다. 그들에게 붙잡힌 자신은 그 일을 말릴 수 없었다. 제발. 제발... 눈 앞에서 자신이 키운 아이가 산 채로 해부될지도 모른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무너져내렸다. 그는 그제서야 브루스가 겪었던 절망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진정으로 이해했다.

"왜?"

"그녀의 아이가 아파요, 브루스. 당신과 그녀의 유전자를 조합했지만 이번엔 그녀가 직접 낳은 아이죠. 그 아이가 알 수 없는 유전적 질병에 걸렸다는군요. 아픈 아이의 엄마는 미치게 마련이죠. 그녀는 아이가 죽기 전에 치료법을 찾아내려고 하고 있어요."

딕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역시 그녀의 고통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의 눈 앞에서 데미안을 산채로 찢어버리려고 했을 때. 그녀가 그런 미친 짓을 하는데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때 그는 똑같은 고통을 맛보았다. 미친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미친 아버지도 못할 게 없었다. 그는 한 아들을 위해 다른 아들을 죽이려는 그녀를 필사적으로 설득했다. 꼭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뭔가 더 좋은 방법이! 제발 탈리아. 생각을 해봐. 내가 도와줄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게!! .....그랬기에 그는 탈리아가 데미안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제안을 했을때 거절할 수 없었다. 다른 방법과 마찬가지로 끔찍하게 미친 짓이었지만 당장 죽어갈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 그 아이는-"

뭔가 끔찍한 발상을 떠올렸는지 브루스의 음성이 한층 더 낮고 음산하게 변했다.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던 딕은 얼른 그 의혹을 부인했다.

"아뇨. 브루스. 설마 무슨 끔찍한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겠죠? 아무리 데미안을 위해서라도, 다른 어린애를 산제물로 내놓을 생각은 없거든요? 탈리아가 필요한 건 정확히는 태반이라나봐요. 탈리아의 아이는 데미안이랑 유전적으로 쌍둥이잖아요. 말로는 자기네들 클로닝 기술로는 재현에 한계가 있어서 데미안의 유전자가 섞인 자연산이 필요하다는데... 정말 사실이 그런지 말만 그렇게 하는 건지는 닥쳐봐야 알 일이죠."

거기까지 말한 딕이 고개를 들더니 브루스를 바라보며 제대로 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니까 브루스가 도와주세요. 사실 반대하실 것 같아서 탈리아에게 가기 전에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미리 아셔서 다행이네요. 아, 그리고 솜씨 괜찮은 외과의 한 명 아세요? 솜씨가 무지 괜찮아야 해요. 데미안 뇌 속에 엄청 예민한 생체폭탄이 들어 있거든요. 그거 꺼내려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해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브루스는 딕의 계획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딕의 행위가 지나치게 무모하다고 생각했고, 의도적으로 생명을 잉태했다는 사실 자체를 싫어했으며, 무엇보다도 탈리아를 믿지 않았다. 악당들의 공통점은 한가지였다. 그들은 필요할 때만 약속을 지킨다.

"너무 위험해."

브루스의 의사표현은 늘 그렇듯 명확하고 단호했다. 위험하고 불필요한 일이다. 원한다면 내가 그녀를 만나도록 하지. 그녀를 만나서 무엇을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브루스의 눈빛속에 스쳐 지나가는 섬뜩한 안광이 그의 속내를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었다. 딕은 쓰게 웃었다. 이미 다 자란 성인인데도 브루스는 가끔씩 그를 자신의 보살핌이 필요한 피후견인처럼 대할 때가 있었다. 오랜 습관과도 같은 거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이 늘 달가운 것만은 아니었다.

"아뇨. 소용없습니다. 이번에는 목적이 달라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딕은 브루스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했다. 여느 때처럼 그녀의 목적이 이윤이나 권력이었다면 먹혔을지도 모르는 방법이다. 다크 나이트는 적으로 두기에 무서운 상대고, 그를 화나게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이니까. 하지만 이번엔 그런 게 아니었다. 탈리아가 원하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식의 생명이다. 딕은 부모가 자식을 위해 얼마나 맹목적이 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면 다시 데미안을 노릴 겁니다. 제 로빈에게 그런 위험을 감수하게 할 순 없어요."

신체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감정적으로도 그건 너무 위험한 일이다. 아무리 다 자란 척 해도 데미안은 아직 어린애에 불과하다. 제 어머니가 다른 자식을 위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걸- 그 끔찍한 현실을 눈앞에 두고도 온전할 수 있는 아이가 대체 몇이나 되겠는가?

"내 로빈은 되고?"

딕의 씁쓸한 대답에 브루스가 서늘하게 되물었다. 처음엔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순간 놀라서 쳐다보는 딕의 시선에도 브루스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하긴. 저 사람은 실수로 본심을 드러내는 타입은 절대 아니었다. 그는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드러내곤 했다.

"....그래서 부탁드리는 거잖아요. 도와주세요. 브루스."

후견인과 시선을 마주한 딕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에게 호소했다. 브루스는 끝까지 탐탁치않게 딕을 바라보았지만 다행히 계속 반대하진 않았다. 브루스의 보살핌이 늘 달가운 것만은 아니지만, 딕은 자신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 그가 자신을 도울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건 마치 그가 처음 배트맨의 사이드 킥이 돼서 고담시의 잿빛 밤 하늘을 그네없이 날아다닐 때 느꼈던 기분과 흡사했다. 한없이 자유로운 듯 했지만 어디선간 항상 그의 시선이 있었다. 자신이 실수하거나 다쳐서 떨어져 내릴 때 그물 대신 그를 붙잡아 주기 위해서.


**


"너 뭐해?"

얼마 전에 있었던 브루스와의 대화를 떠올리느라 숟가락에 올린 아이스크림이 녹아가는 것도 잊고 있던 딕은 데미안이 방에서 나오는 기척을 느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입안에 숟가락을 퍼넣었다. 패트롤을 돌기 전에 학교숙제를 다 끝내야 한다는 엄명을 받고 무지 귀찮아 하며 남은 영문학 숙제를 끝내러 들어갔던 데미안은 물 마시러 나왔는지 부엌으로 들어오다 별 희안한 걸 다 보겠다는 시선을 하고 딕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딕은 뭐가 그리 이상한가 싶어 자기자신을 살폈다. 한벌에 수천달러가 넘는 디자이너 진 체크.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세련된 나염 프린트 티셔츠 체크. 지금 당장 파파라치에게 찍혀도 좋을만큼 여느 때나 다름없이 멋지기만 하구만 뭐가 문제지?

"그걸 아예 통째로 퍼먹고 있어? 혼자 다 먹게?"

그 이야기를 듣고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앞에 스테파니가 데미안의 간식용으로 사다놓은 하프갤론 아이스크림 통이 통째로 놓여 있는게 보였다. 이미 반이상 먹은데다 상온에 오래 꺼내놓는 바람에 자기들끼리 녹고 엉겨붙어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아차. 한숟갈만 먹으려고 했는데. 딕은 겸연쩍은 태도로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맞다. 이거 네 거지? 미안하다 데미. 내가 나중에 다시 채워놓을게."

"그딴 건 상관없어."

냉장고를 여느라 등 뒤를 지나가던 데미안은 힐끗 통 안을 들여다보곤 어이가 없는 듯 혀를 찼다.

"쯧, 많이도 드셨네. 단 거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거 참. 사다놓는 다니까."

"누가 그깟 아이스크림 때문에 그래?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냐고."

데미안은 웨인가에서도 가장 어린 나이에서부터 훈련받아온 탐정인데다 물려받은 혈통 탓인지 감도 상당히 좋았다. 딕은 내심 뜨끔해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아이스크림통 위에 뚜껑을 덮어 데미안에게 던졌다. 자연스럽게 아이스크림통을 받아 냉동실에 넣은 데미안은 생수병을 꺼내 냉장고 문을 닫고는 수상쩍은 시선으로 딕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솔직히 말해봐. 무슨 일 있어?"

냉장고에 삐딱하게 기대 생수를 마시는 폼이 골목길에 죽치고 앉아 삥을 뜯는 불량 청소년처럼 흉흉하기 그지없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솔직하진 못해도 딕을 걱정하는 말이었다. 딕은 풋하니 웃으며 막내동생의 서툰 걱정을 부정했다.

"왜?"

"네가 뭐가 있는 것 처럼 구니까."

"뭐가 있는 것 같은데?"

"이것 저것 다. 꼭 말로 해야 돼?"

"응. 말해봐. 우리 데미는 그래서 뭐가 그렇게 걱정인데?"

딕은 눈을 가늘게 접어 웃으며 바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걸쳤다. 잘생긴, 솔직히 말해 쓸데없을만큼 과다하게 잘생긴 얼굴 가득 흐뭇한 미소를 내걸고 어린아이의 재롱을 보는 것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딕의 태도에 데미안은 혀를 차고 말았다. 가끔가다 이렇게 딕이 그를 보는 눈길이 귀여운 강아지나 아니면 카나리아나 뭐 그런 것처럼 엄청 작고 귀여운 걸 보는 것 같을 때가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데미안은 그런 딕의 태도가 엄청 재수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자신을 언제까지나 어린애처럼 바라보다간 큰코 다치는 수가 있었다. 어린애가 언제까지나 어린애로 남아있지는 않는 법이고 데미안은 그 중에서도 유난히 빨리 자라는 편이다. 딕은 그걸 알아야 했다.

"숙제 다 했으면 이제 슬슬 나가보자. 요즘 또 슬금슬금 팔코네 패밀리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확인해봐야겠어."

그런 마음을 알리 없는 딕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펴며 나갈 준비를 했다. 패트롤 가자고? 짧은 순간 거짓말을 할까 말까 강하게 갈등했던 데미안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 되돌아왔던 처참했던 결과들을 기억해내고는 조용히 사실을 이실직고했다.

"....아직 덜 했는데."

"덜했어?"

"응."

"그럼 뭐해? 어서 가서 다 해야지."

아 진짜 재수없어. 지가 무슨 아버지도 아니면서. 데미안은 불만스레 입이 툭 튀어나왔지만 어쩔수 없이 냉장고에서 엉덩이를 뗐다. 옳지. 옳지. 착하다. 딕은 기특하다는 듯 데미안의 엉덩이를 툭툭 쳐주었다. 그러나 사춘기인 데미안은 짜증을 내며 엉덩이를 확 뺐다.

"언제봐도 사이가 좋네."

데미안을 놀리느라 재미가 붙어 엉덩이 두드리기에 열중하고 있던 딕은 부엌 문간에서 들리는 반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손에 부스럭 대는 비닐 팩을 한보따리 든 팀이 바 테이블에 가져온 물건들을 내려놓으며 싱긋 웃는게 보였다. 딕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 데미안은 뭐 귀한 손님 오셨다고 팀이 등장하자마자 쪼르르 그에게 다가가는 딕의 등을 살짝 흘겨보았다. 등 뒤의 불만스러운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못 만난지 며칠밖에 안 지난 형제들은 뜻밖의 재회를 반가워하기 바빴다.

"티미.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브루스가 연락 안했어? 그 사람이 보내서 왔는데."

"응?"

"따로 조사할 게 있다고 오늘 패트롤은 나랑 데미안랑 둘이서 돌라고 하더라고. 딕은 배트 케이브로 오라고 하던데 연락 못 받은 거야?"

그래. 못 받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도 남을 것 같아서, 딕은 쓰게 웃었다.

"아니. 하지만 널 보낸 게 연락이지 뭐. 그 사람 답네. 그래. 배트 케이브로 가면 된다고?"

"응."

"...그런데 이건 뭐야? 나 주는 거?"

"별 건 아니고, 요즘 즐겨 먹는 거 같길래 좀 사와봤어. 냉장고에 넣어두고 있다 생각나면 먹어."

팀은 자연스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딕은 부스럭거리는 비닐을 풀어 안에 든 물건을 열어봤다. 비닐 안에는 아이스크림 하프갤런이 세 통이나 들어 있었다. 평소 단 걸 별로 밝히진 않았지만, 그래도 가장 즐겨먹던 브랜드에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맛이다. 헉, 티미. 너 혹시?? 순간 등골이 서늘해진 딕은 일그러지는 입매를 애써 원형으로 유지하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아는 거야? 너 혹시 또 알아냈냐? 하지만 말로 건네지지 못한 대답엔 돌아오는 답도 없었다. 딕은 사람좋은 동생에게 차마 진실을 묻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그를 외면했다.



옛말에 인간에겐 절대 숨길 수 없는 세가지가 있다고 했다. 기침과, 사랑과, 가난. 

최근 딕은 거기에 한가지를 더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임신.

그가 제아무리 배트맨의 후계자니 세상 최고의 탐정 중에 하나이니 해도 그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일 뿐이다. 무슨 이야긴가 하면, 타고 나길 남자인 그에게 임신이라면 어찌되었든 남의 일일수 밖에 없어서, 막상 닥치기 전까지는 아무리 꼼꼼히 조사 했다고 하더라도 그저 피상적인 감각으로밖에 파악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마치 크립토니안이 감기라는 질병에 대해 인지는 해도 진심으로 실감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초기에 가장 문제가 될 거라고 여겼던 입덧은 그럭저럭 순탄히 넘어간 편이다. 그가 워낙 건강하기도 했고, 라스 알굴의 기술이 워낙 안정적이었던 까닭도 있었다. 하지만 그외 숱한 부수적인 것들, 이를테면 시도 때도 없는 식욕, 제멋대로 날뛰는 호르몬 문제, 신장 부담으로 인한 혈액순환 장애, 아기집이 자리를 잡음에 따라 골반뼈가 짓눌리는 요통, 급격한 체중변화, 아이의 체중이 늘어남에 따라 신체 하중이 달라지는 등의 전반적인 난제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차곡차곡 딕을 습격해왔다. 게다가 몸매의 선은 점점 더 확실하게 망가지고 있어서, 데미안이 던지던 막연한 의심의 눈초리는 이제 뚜렷한 의혹의 형태로 발전했다. 천만다행이게도 그 애에게는 상식이라는 게 있어서, 차마 임신에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는 모양이다. 그 대신 각종 병리학적 질병을 근심하는지 요즘 은근히 건강검진이라도 한번 받아보라며 안절부절 못하는 눈치였다.

'...다들 그 녀석 만큼만 상식적이어도 참 좋았을텐데.'

딕은 침울하게 불평했다. 

바바라와 브루스에게는 자신이 직접 고백했다고 손쳐도, 이외의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알게 된 건 계산 밖의 일이었다. 무서워서 아직 물어보진 못했지만, 기이할 정도로 꾸준히 들러 꼬박 꼬박 뭐가 먹고 싶은 건지를 물어보는 착한 동생 티미는 아무래도 뭔가를 알고 있는게 분명하다. 그리고 망할 크립토니안들. 빌어먹을 그 사기스펙의 종자들은 마주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피해서 도망다녀도 그쪽에서 찾아오면 도무지 피할 방도가 없었다. 그는 슈퍼맨이 불쑥 고담을 찾아들었던 어제의 일을 기억했다. 인자하게 미소지으며 반갑게 인사하려던 그가 흠칫 놀라 뒷걸음질 치던 것.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뭔가를 물어보고 싶은듯 입을 뻐끔 뻐끔하며 애처롭게 자신을 바라보다,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눈치를 보던 것까지. 그 모습이 일주일 전 우연히 마주쳤던 콘 녀석이랑 어찌나 닮았던지 지금 생각해도 속이 상해 울화통이 터졌다. 

곁에 있던 데미안이 저 인간 왜 저래? 하며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모르는 척 하며 딕은 상냥하게 웃어주었다. 가엾은 슈퍼맨은 이걸 말해도 되나 말하면 안되는 건가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브루스와 상의를 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짧은 인사만을 남기고 허둥지둥 하늘을 날아올라 자취를 감추었다. 

좋다. 아주 좋아. 딕은 고담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빌딩의 꼭대기에 올라서서 세상에 외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 빌어먹을. 나 임신했다! 남자가 임신했다! 어쩔래!!!!


- to be...??

후일 뒷 이야기를 쓰면 이 뒤로 연결하겠지요....

 

가늘고 길게 덕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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