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시착 낭만



1.


누구의 인생이든 리즈 시절은 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눈이 부시게 서 있으면서도 전혀 높이를 느낄 수 없는 순간, 그 순간을 사람들은 소위 가장 잘나가는 순간이라 말을 한다.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반짝거렸고,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내 발밑에 있었다 믿었던 순간, 그래서 나는 그 아래가 무섭지 않았다. 떨어진다 해도 내가 밟고 올라올 것은 얼마든지 있을 줄 알았으니까. 아니 어쩌면 나는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있는 그곳이, 당연히 내 자리인 줄 알았을 때의 나는. 떨어지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자만은 곧 화려함과 반짝임을 무기로 눈을 가렸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순간의 내가, 사실은 그것들에 눈이 멀어버렸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끝을 알 수 없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난 뒤였다. 그렇게도 간절하게 애써 올랐던 그 높은 곳은, 이미 부서져 버린 채.


“.....”


오롯이 빛나는 스크린을 제외하고 사방이 어둠에 잠겨 있던 공간이 차근차근 밝아지기 시작했다. 까만 화면 위로 정신없이 올라가는 글자들을 빤하게 바라보던 나는 이제 그만 나가달라는 정중한 신호에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를 정리하고 나서는 사람들의 소음에 그제야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느긋하게 나가려는 나를 문 앞에 선 직원이 응시하고 있는 듯 했다. 평일 점심시간을 넘긴 애매한 시간에 상영하는 영화는 천만 영화라 해도 관을 꽉 채우긴 힘들었다. 더군다나 언제 개봉을 했는지도 알 수 없는 유럽 어느 나라의 영화는 체면치레로 얻어 낸 그 상영관마저 잃을 지경에 놓여 있었다. 그 속에서 진짜 이 영화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스크린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앉은 몇 사람뿐이었다.


“.....”


다음 상영 시간표를 맞추기 위해 중앙에 앉은 몇몇이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직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높은 곳, 가장 구석에 앉아있다 느리게 계단을 내려서는 나를 향해 그저 의식적으로 꾸벅 묵례하며 다시 제 삶의 순간으로 돌아가 버리는 사람들을 지나쳐 완전히 밖으로 빠져나온 나는 곧 길게 늘어선 화장실 줄을 힐끗거리고는 이내 그대로 점퍼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모자를 꺼내 들었다.


“아, 죄송합..”

“괜찮아요.”


좁은 주머니 속에서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던 것을 잘 펼쳐 막 머리 위에 뒤집어쓰려 팔을 끌어 올린 순간이었다. 모든 것은 이렇게 찰나의 순간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모자를 쓰는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앞도 보지 않고 무소처럼 달려드는 사람과 부딪히기까지 해야 하는지.


“......”


그리고 막상 따지고 보면 달려든 건 내가 아니라 상대방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먼저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는 말을 해버린 건지. 순간 입에서 튀어나간 말을 뱉어내면서도 잘근 입술을 깨물었던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나를 보지도 않고 손을 휘휘 저으며 대번에 괜찮다 나를 향해 넓은 아량을 베푸는 얼굴을 뒤통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니...”


참나, 지만 괜찮으면 다야? 나는 안 괜찮은데? 쌍방과실이면 쌍방이 합의를 해야지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냐는 듯 눈을 큰 껌뻑거리던 나는 아직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모자를 집어 들기 위해 그대로 상체를 숙였다. 다리는 왜 이렇게 쓸데없이 길어서 바닥으로 향하는 길이 이렇게 먼지 모르겠다는 정체 모를 짜증까지 섞어가며 바닥에 떨어진 것을 집어 들던 나는 갑작스레 들려오는 비명에 가까운 함성에 그대로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


북적거린다 생각했던 게 화장실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나와 부딪힌 뒤통수가 멈춘 곳의 구름 같은 사람 떼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외치며 달뜬 호흡들이 오가는 곳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이내 한 뭉텅이의 사람들이 우르르 움직이는 것을 보자마자 손에 든 모자를 그대로 뒤집어쓰고 빠르게 나를 아래로 실어 줄 부지런한 기계 위에 올라탔다. 나와 반대로 올라가는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하지 않으려 꼿꼿하게 앞만 바라보던 고개가 움직이는 기계 위에서 잠시 내려섰을 때, 별수 없이 느리게 움직였다.


“.....”


돌아본 곳엔 어쩌면 어제의 나, 혹은 꿈이었을지도 모르는 순간의 내가 있었다.


“나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거든? 넌 일 안 해?”

“야, 할 때가 되면 다 하고 어? 밥 시간엔 밥을 먹고.”

“저런 걸 민중의 지팡이라고 믿고 살아야 하다니.”

“그래도 급해 봐, 제일 먼저 내 생각 날 걸.”


<파는 것 : 낭만> 이라는 유치하다 못해 우스운 간판이 흔들리는 가게 안은 낭만은커녕 지루한 익숙함이 사방에서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손님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가게 안은 잔잔하게 깔리는 클래식이 더 요란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안으로 들어서며 낭만 대신 익숙함을 한 번 더 보탠 나는 곧 가게 정중앙의 테이블에 앉아 열심히 밥을 먹고 있는 녀석을 보며 그대로 미간을 구기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맛있어?”

“너는 황민현이 한 밥이 맛있을 것 같아?”

“근데 왜 여기서 먹어.”

“그래도 배는 차. 음식이라.”


혼자 먹는 것보단 이게 낫다는 듯 열심히 눈앞의 것을 밀어 넣는 강동호를 바라보던 나는 곧 뭐 줄까? 하며 쏙 얼굴부터 내미는 황민현을 향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어디 갔다 왔어?”

“그냥, 영화 봤어.”

“영화? 혼자? 나랑 같이 보지.”

“.....”


근데 손님이 이렇게 없어서 어떡하냐, 내가 고개를 젓는 것과 동시에 그대로 테이블과 제가 있는 공간을 막아 두었던 문을 열고 나온 민현은 이 시간엔 원래 이런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그 얼굴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나는 곧 어제 한 번 구워봤다며 먹어보라 내미는 쿠키를 집어 들고는 곧 무슨 영화 봤는데? 하며 되묻는 황민현을 흘깃거리고는 다시 시선을 떨어뜨렸다.


“뭐 볼만한 영화가.. 야, 너 설마.”

“어, 설마.”

“또 꿈꿨어?”

“어.”


기억 어디 즈음 아무렇게나 매장당해 묻혀 있는 것이 있다. 나는 그것을 묻어 버린 적이 없으니 당했다라는 표현에 상당히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그런 식으로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는 기억이 있다. 언제부터인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 기억은 저 깊숙이 저를 묻은 많은 것들을 밀어내고 나를 만나러 왔다, 고생스럽게 왔다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매번 단정하고, 매번 선명하게 간밤의 나를 만나러 온 것은 그러나 사라질 때 만큼은 결코 조용히 물러나지 않았다.


“꿈? 무슨 꿈?”

“너 요새도 그 꿈 꿨어? 엄청 오랜만이지?”
“아, 사람이 묻잖아. 무슨 꿈? 어? 무슨 꿈.”

“무슨 꿈은 무슨 꿈이야, 최민기가 맨날 꾸는 그 꿈이지.”


그 꿈? 그 꿈이 뭔데? 냄새가 나는 반찬이라곤 그나마 깍두기가 전부인 밥상을 앞에 두고 우적우적 밥을 밀어 넣는 강동호를 가만히 응시하던 나는 곧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며 이내 손에 들고 있던 쿠키만 한 입 깨물었다.


“야, 설마 너 그 꿈 말해? 너 아직도 그랬어?”

“아직도 그랬어? 라니, 너무 관심이 없는 거 아니야?”

“아니 말이 되냐? 그렇게 같은 꿈을 계속 꾼다고 누가 생각을 해.”

“그게 관심이 없다는 거에 변명이 된다고 생각해?”


마뜩잖은 얼굴로 미간을 바싹 구긴 황민현이 곧 나를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야, 무슨 저런 애랑 친구를 했어? 친구가 정말 쟤밖에 없어? 어떻게 친구라는 놈이 네가 아직도 그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제대로 몰랐냐는 듯 양껏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는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나는 울컥 한소리를 하려고 타이밍만 보고 있는 동호를 흘깃거리며 이내 손에 들고 있던 과자를 내려놓으며 자세를 고쳤다.


“얘가 모를 만도 해, 나도 이제 안 꾸는 줄 알았으니까.”

“얼마 만이지?”

“마지막으로 영화 보러 갔을 때가 한겨울이었으니까 1년 좀 못 됐나.”

“뭐 생각했어? 자기 전에?”

“몰라, 그냥 똑같았어.”


계절은 다시 겨울의 초입이었다. 묵직한 점퍼에 몸을 의지해도 좋을 바깥의 날씨는 기온이 뚝 떨어져 있었다. 그 풍경을 의도하는 바 없이 그저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곧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근데 진짜 같은 꿈 계속 꾸는 거 병원 가야 하는 일 아니냐?”

“뭐 악몽도 아니고, 실제로 경험한 일이 다시 꿈에 나오는 것뿐인데, 뭐.”

“그래도 토시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 꿈을 몇 년 동안 꾸는 건 좀 무섭지 않냐?”


난 좀 무서운데. 어느새 깨끗하게 비운 밥공기를 내려놓으며 그제야 다시 진지하게 이야기에 참전한 강동호가 곧 어깨를 부르르 떠는 시늉을 했다. 덩치값 좀 하자, 덩치값 좀. 제가 먹어 치운 밥그릇을 잠시의 여유도 없이 냅다 정리하기 시작하는 황민현을 향해 선입견을 버리라며 내내 노리고 있던 타이밍에 한마디 한 동호는 듣는 시늉도 하지 않는 얼굴을 보며 그저 침만 꼴깍 삼켰다.


“근데 넌 영화 봤단 소리만 듣고 어떻게 바로 꿈꿨다는 걸 아냐?”

“그걸 왜 몰라, 얘 그 꿈 꾸는 날은 맨날 영화 보러 가잖아.”

“그래? 그랬어?”

“너는 진짜 내 친구였으면 절굔데, 우리 민기 친구라 그럴 수가 없네?”

“너도 우리 민기 매니저만 아니었으면 내가 상대도 안 했어, 인마.”


아, 그만 좀 해라, 이러다 싸우겠다. 강동호의 흔적을 바로 씻어내려는 대번에 설거지까지 시작한 황민현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던 내가 결국 한마디 하자 순간 멈춘 입이 다시 열리는 덴 순간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전화 오잖아, 안 받아?”

“어.”

“왜?”

“모르는 번호야.”


최민기, 전화 온다. 내가 한 입 먹고 놓아버린 과자를 집어 입안에 밀어 넣으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엎어놓았던 휴대전화를 슬쩍 돌려 액정을 확인한 나는 곧 저장되지 않은 번호에 그대로 휴대전화를 통화 방향과 반대로 밀어버렸다.


“야, 그러다 중요한 전화면 어떡하려고.”

“중요한 전화, 뭐.”

“캐스팅?”

“..너 나 놀리냐?”

“사람 일 모르잖아, 어디 한 3년 외국 나가 있어서 국내 사정을 전혀 모르는 나이 많은 감독이..”


내가 농담이 심했다, 그치? 그래도 받아보지 그러냐는 듯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정말 아무 소리에나 이른 말이 일순 멈추었다. 싸늘하게 닿는 시선 끝을 억지로 피하며 어색하게 입꼬리만 겨우 올려 양껏 웃어 보이는 얼굴을 빤하게 바라보던 나는 곧 다시 울리기 시작하는 휴대전화를 완전히 집어 들었다.


“아, 진짜 집요하네.”

“왜, 또 오냐?”

“어, 벌써 일주일 째야.”

“차단해.”

“그런다고 안 오겠어? 다른 번호로 걸겠지.”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 그건 스토커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세를 바꿔 앉으며 세상 태평한 소리를 늘어놓는 놈을 향해 모르면 말라는 듯 입술을 비죽거린 나는 알아서 끊어지는 전화기를 다시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그래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뭐 부동산이나 그런 곳 일 수도 있잖아.”

“부동산에서 나한테 전화할 일이 뭐가 있어. 안 봐도 뻔해, 기자야.”

“기자? 무슨 기자?”

“무슨 기자긴 무슨 기자야, 연예부 기자겠지.”

“연예부 기자가 너한테 전화를 왜 해?”


뭐야, 기자가 나한테 전화도 하면 안 돼? 막 내 몫의 자몽주스를 내오며 중얼거리는 황민현의 마지막 말에 내 고개가 빠르고 날렵하게 돌아갔다. 그런 나를 보며 아니, 그게 아니라 하며 다시 입을 열려는 녀석을 있는 대로 노려보자 곧 냉큼 강동호가 먼저 불쑥 입을 연다.


“그게 전직 매니저란 놈이 할 소리냐?”

“닥쳐, 너 황민현 말에 고개 끄덕끄덕 하는 거 봤거든?”

“아이고, 과자가 맛있네.”

“거짓말하지 마, 황민현이 만든 게 왜 맛있어.”


파는 것은 낭만이었지만 사실상 음료를 제외한 모든 디저트는 팔지 않는 것에 가까웠다. 여기는 다른 디저트는 없냐 묻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음료 맛을 느끼게 해드리기 위한 선택이라며 공손하고 신뢰 가는 얼굴로 거짓을 파는 황민현이 이번에도 아니냐는 듯 제 과자를 느리게 집어 들었다.


“근데 진짜 기자가 전화 온 거면 문제 아니냐? 뭐 어디서 또 일 터진 거 아니야?”

“내가 일 터질 게 아직도 남았니?”

“남기야 남았지, 그거.”

“야.”

“아니, 그니까 나는 조심을 하면 좋지 않냐는 뜻에서..”


그냥 제발 닥치라는 듯 강동호의 허벅지를 퍽퍽 때리는 황민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들고 있던 과자를 한 입 베어 물더니 곧 그대로 뱉어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기자들 중에 간혹 있어, 괜히 과거에 잘나갔던 누구 하면서 단독이네 뭐네 하는 기자들.”

“제목 진짜 자극적으로 뽑아서 되게 뭐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기사 쓰는 나쁜 놈들.”

“맞아, 우리 민기 그래서 졸지에 박사 됐잖아. 몰락한 인기스타 최민기, 미국에서 박사 과정 중.”

“웃겨, 내가 고등학교도 제대로 안 다녔는데.”


그때 생각난다며 박수를 치며 웃기 시작하는 강동호의 정강이를 같이 손뼉을 치며 웃다가 시원하게 걷어찬 나는 곧 아, 기자라면 진짜 치가 떨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니까 왜 학업에 열중하고 싶다는 인터뷰를 하고 미국을 가냐, 미국을.”

“내가 그걸 그렇게 연결할 줄 알았냐.”

“뭐 다른 거 한다고 하지 그랬어.”

“다른 건 폼이 안 나잖아. 인생은 간지라고.”

“덕분에 진심 간지 폭발 박사님 됐지.”


그런 순간의 과장으로 웃을 수 있는 일도 있었다. 그때의 나는 아직 그럴 가치가 있었고, 겨우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한 번 소비되면 그만인 세상에서 언제까지나 그런 가십들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수는 없었다. 보이지 않는 순간, 잊히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래서 또 기자한테 전화 받으면 이번엔 뭐라고 할 건데.”

“뭘 뭐라고 해. 솔직하게 말해야지.”

“뭐라고?”

“잘 먹고 잘 논다고.”

“폼 안 나게?”

“왜 폼이 안 나? 3년을 넘게 쉬었는데도 아직 먹고 놀 만큼 돈이 많은 게 얼마나 폼 나는 일인데.”


그렇지, 바로 그거지. 우리 민기는 아직도 돈이 되게 많지. 그러니 나는 걱정 없다며 더 놀라는 듯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황민현의 손길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뱉어낸 나는 순간 들려오는 종소리에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왜, 어디 가게.”

“집에 가야지. 손님 오잖아.”

“밥 안 먹고가?”

“사 먹는 게 제일 맛있어.”

“그럼 사 먹어, 나랑.”


다행히 완전히 파리가 날리는 건 아닌지 가게 안으로 들어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는 손님들을 보며 반사적으로 벗어두었던 모자를 집어 든 나는 곧 그것을 눌러 쓰며 나를 붙잡는 황민현을 향해 살짝 웃어 보였다.


“순경, 너 놀 거면 민기 데려다줘. 아, 아니다 안 놀아도 데려다줘.”

“아, 됐어. 내가 애냐? 걸어서 15분이면 되는데.”

“그래도, 강동호 써먹어. 놀면 뭐하냐. 이런 거라도 시켜야지.”
“순경, 넌 공무원이면 일 좀 해. 얘한테 시달리지 말고.”


야, 나 오늘 비번이거든? 강동호의 말에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얼굴로 대꾸도 없이 나를 바라보는 황민현을 보며 손을 흔든 나는 정말 데려다줄 요량으로 따라나서는 강동호를 그대로 돌아보았다.


“나 차 가지고 올게, 잠깐만.”

“나 진짜 혼자 가고 싶어서 그래, 좀 걸으려고.”

“걷는 거 싫어하잖아.”

“운동해야지. 살쪘어.”

“난 네가 말하는 살쪘다는 기준을 모르겠다.”


너는 모르는 그런 게 있다는 듯 싱긋 웃으며 그대로 먼저 간다는 말과 함께 걸음을 옮긴 나는 이내 경쾌하게 움직이던 다리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더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다시 앞으로 돌아온 시선이 느린 걸음을 걷는다.


“.....”


누구에게나 있는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도무지 부족한 것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하고 충분하다고 믿었던 시절은 그래서 더 쉽게 깨져버렸다. 어느 곳 하나 틈이라도 있었다면 미리 고쳤을 시절은 너무나 완벽해서 필연적으로 연약할 수밖에 없었다. 금이 간다고 느낀 순간 모든 것은 이미 와장창 무너져내렸다. 원망할 곳은 없었다. 왜 내 세상이 이렇게 단숨에 무너졌냐고 아무한테도 억울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 진짜.”


내가 그 꼭대기에 오르는 동안, 꼭대기에 올라 화려함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동안 누군가는 분명 나를 향해 말했었다. 떨어지면 아프다고, 그러니 적당히 내려와 있으라고.


“아니 진짜 스토커야, 뭐야.”


그게 싫으면 너를 붙잡고 있는 그 뒤에 주렁주렁 매달린 사람들이라도 떨쳐내 버리라고. 그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겨우 그 말을 떠올리며 나를 붙잡고 있던 사람들을 향해 살려 달라 고개를 돌렸을 때, 그때의 내 뒤엔.


“진짜 차단해 버릴까.”

“최민기씨.”


생각이 느리게 흘러가는 만큼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다 문득 떠오르는 상념에 잠겨 있던 나는 순간 나를 부르는 소리에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저요?”

“네, 그쪽.”

“아, 저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그래요?”

“네.”


푹 눌러쓴 모자가 혹시 바람에 날아간 건가 하는 생각에 반사적으로 머리로 손을 올려 쓰고 있는 모자를 확인한 나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집을 눈앞에 두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내가 괜찮다 여기는 영역 속의 사람을 제외하고 누군가가 먼저 내 이름을 부른 것은. 그래서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던 나는 그보다 더 빠르게 온몸에 방패를 둘러버렸다.


“최민기씨.”

“아, 사람 잘못 보셨다구요.”

“..맞는 거 같은데.”

“아니라니까요.”


그러나 얼마안가 또다시 허락없이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이 멎었다. 아니, 최민기 아니라니까. 왜 자꾸 나를 최민기라고 부르냐는 듯 모자를 더욱 깊이 눌러쓰며 미간을 있는대로 찌푸린 채 슬쩍 모자 너머로 눈만 흘기던 나는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고 그 자리에 선 채로 나를 뻔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살짝 돌리고 있던 고개를 다시 비스듬히 정면으로 가지고 왔다.


“...아씨 뭐야, 또.”

“받아요, 전화.”


차림새를 봐서 기자는 아닌 것 같고, 얼핏 본 차가 굉장히 좋았으니 나한테 돈 꾸러 온 모르는 누구도 아닐 테고. 그렇다면 나도 모르는 지하에 남은 내 팬 중에 하나인가. 설마 진짜 스토커.


“...네?”

“받으라구요, 전화.”

“.....”


정체가 뭐길래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시간 이 평화로운 공간에서 찾을 이유가 없는 최민기를 찾는 것인지 갖가지 수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던 나는 순간 또 멋대로 울려대기 시작하는 전화에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빼 들었다.


“지금 전화 오잖아요.”

“그걸 그쪽이 어떻게 아는데요?”


더이상은 참을 수 없다고, 차단을 해버려야겠다는 굳은 다짐과 함께 전화기를 손에 쥐었던 나는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대로 빙글 완전히 몸을 돌려 섰다. 그리고는 곧 한 쪽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꽤나 삐딱한 자세로 서 있는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애써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야 내가 걸었으니까.”

“....”

“최민기한테.”


정확히 최민기라 적힌 이름이 떠 있는 휴대전화를 내게 내밀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하는 상대를 향해 애써 당황을 감추며 손에 든 것을 서둘러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은 나는 곧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내가 최민기가 아니라는데.”

“그쪽이 최민기가 맞아요.”

“아니라니까요?”

“최민기 진짜 못생겼다.”

“와, 나 진짜 그런 말 태어나서 처음 들어요, 처...”

“봐요, 맞잖아.”


습관은 무섭고 세뇌는 더 무서웠다. 다 못해도 얼굴 하나 잘한다는 소리만 믿고 버텼던 시절들이 만들어 낸 세뇌가 지하 깊숙이 파묻혀 있다 불쑥 튀어나온 찰나를 제어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뱉어버린 나는 이내 그대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놓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 뭐 그래서 어쩌라구요. 내가 최민긴데 뭐, 기사라도 쓸 거예요? 최민기 못생겼다고?”

“기삿거리는 돼요?”
“진짜 말 되게 서운하게 하네? 그럼 되지, 안 되겠어요? 최민기가 못생겼다는데?”

“지금 열 받은 포인트가 그건가?”

“그럼 안 받아요?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소린데? 봐요, 내가 못생겼나. 보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있냐며 이제 감출 것도 없어 꾹 눌러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눈을 부라리며 얼굴을 바싹 들이대자 잠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상대가 이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골치 좀 아프겠네.”

“뭐라구요?”

“들었으면서 왜 다시 물어요, 또 듣고 싶어요?”

“내가 왜 골치가 아파요.”

“당신 말고 내가 아프겠다고.”


그건 더 영문 모를 소리라는 듯 있는대로 미간을 구기며 입술을 비죽거린 나는 곧 그래서 본론이 뭔데요? 날 왜 찾아왔는데? 하는 물음과 함께 자세를 고쳐 섰다.


“나한테 그렇게 전화를 하고 찾아오기까지 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있죠, 이유.”

“그니까 뭔데요.”

“계약합시다, 나랑.”

“..아, 계약.”


별 같잖은 이유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손을 있는 대로 노려보고 있던 나는 곧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를 입안에서 반복하다 곧 가볍게 실소를 뱉어냈다.


“그쪽 설마 진짜 부동산?”

“....”

“황민현 용하네.”

“....”

“미안한데, 난 딱히 살 계약도, 팔 계약도 할 게 없네요. 제가 돈은 많은데 부동산엔 관심이 없는 스타일이라.”


그러니 나 말고 다른 호구 꼭 찾으시길 바란다는 듯 영업용 미소와 함께 슬그머니 먼저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하자, 그보다 빠른 손이 내 팔을 붙잡아 세웠다.


“아, 진짜 안 한다니..”

“.....”


이거 안 놓으면 나 당장 신고할 거라는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내 앞으로 훅 나타나는 네모난 것을 억지로 손에 쥐었다. 절대 받고 싶지 않지만 억지로 쥐어 주니 어쩔 수 없이 받아버렸다는 얼굴로 상대방을 노려보던 나는 이내 그제야 자유로워진 두 팔로 그것을 꼭 쥐었다.


“...엔터테인먼트.”

“.....”

“대표요? 그쪽이?”

“거기 이름도 있는데.”

“.....”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글자들의 향연이었다. 그래서 손바닥만 한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나는 곧 내 앞으로 쑥 내밀어지는 손에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김종현입니다.”

“.....”


돌아보았을 때, 내 눈앞엔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나를 붙잡고 있던 많은 것들은 오히려 나를 보지 못한 척, 외면하고 있었다. 당연히 내 편이라 믿었던 모든 것이 적으로 바뀐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와줘, 살려 줘. 나는 그 말을 하지 못 했다.






생각할 시간 필요하겠죠. 달라고 한 적도 없는 하루의 시간을 멋대로 주고 돌아가 버린 김종현이 남긴 것은 달랑 명함 한 장이었지만, 그것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김종현이 돌아가자마자 집으로 뛰어들어오다시피 한 나는 이내 두 손을 모으고 그 명함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한테 계약을 하자고? 왜? 도대체 왜 나한테? 그런 온갖 생각을 하다 혹시 사기꾼일지도 모른다는 아주 현명하고 합리적인 의심에 다다랐다.


“그래서 오늘 만나기로 했다 이거지?”
“어, 시간이 없다고 당장 오늘까지 결정해달래.”

“그래서 생각은 해봤고?”

“생각할 게 뭐가 있어.”


꼬박 3년이 넘도록 숨어만 지낸 나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숨어지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의 시야에서 멀어져 있었다. 유일할 것이라 믿었던 나라는 사람은 얼마든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었다. 굳이 나를 찾지 않아도, 굳이 내가 없어도 아쉽거나 서운할 것 없는 특별한 세상의 시간은 그렇게 잘도 흘렀다. 처음에는 내가 스스로 감추었던 나는, 어느 순간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잊혔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설마 계약하는 쪽으로 결정한 건 아니지?”

“내가 미쳤어?”

“안 미쳤으니 다행이야.”


그런 내게 어느 날 갑자기 난데없이 나타난 김종현은 어쩌면 나를 놓아버린 수많은 사람들 중 가장 처음으로 내게 손을 내민 사람일지도 몰랐다. 아무런 명분도 없이, 이유도 없이 무턱대고 나를 다시 그 세상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손을 내민 아주 낯설고도 이상한 사람.


“원래도 복귀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그 사람이랑 절대 안 해.”

“그게 맞는 거긴 하지, 근데.”

“근데, 뭐.”

“아쉽지는 않아? 이런 기회 자주 오는 거 아니잖아.”


계약을 하자고 했다고? 밤새 한숨도 자지 못 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무시하고 살았던 나와 다른 세계의 이야기가 갑자기 내 앞에 다시 내 것처럼 다가서자마자 나는 다시 와르르 무너진 그 탑 위에 서 있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설렘이 아니라 공포와 두려움으로 쿵쾅거리는 것을 다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거리던 나는 낭만의 문이 열리는 시간에 맞춰 그대로 침대를 벗어났다.


“기회가 아니라 후회가 될까 봐 안 하는 거야.”

“.....”

“같은 실수 두 번 절대 안 하려고.”


연락도 없이 나타난 나를 보고도 놀라는 기색 없이 외려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온 황민현은 일단 그대로 나를 붙잡아 앉혔다. 너 놀라지 말고 들어라. 진짜 놀라지 마.


“하긴, 네가 재벌한테 당한 게 얼만데.”

“안 해야 할 이유가 너무 많아. 재벌이 아니어도 그 인간이랑은 계약 안 해.”

“왜.”

“아, 재수 없어. 스토커 마냥 전화 해 댄 것도 재수 없고 남의 집 불쑥 찾아온 것도 재수 없고.”

“그것도 좀 소름 돋긴 해. 어떻게 알아냈을까.”

“젊은 놈이 싸가지도 더럽게 없어. 야, 나한테 못생겼대. 그게 말이 돼?”


태한그룹 계열사래, 이 회사. 재벌이라고, 재벌. 내가 뭐든 알아볼 테니 일단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리라던 황민현의 목소리는 내가 김종현의 이야기를 전할 때 보다 더 흥분 상태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놀라지도 못한 채 빤히 황민현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곧 그 다음 말에 그대로 실소를 터트렸다.


“지는? 참나, 생긴 건 꼭 거북이 같이 생겨서 누가 누구한테 못생겼대.”

“거북이? 목이 없어? 그 사람?”

“아니, 그 거북이 말고 그.. 아, 직접 봐. 보면 알아.”

“어쩐지 그런 소리를 들어서 이렇게 빡세게 꾸미고 나왔구만?”

“뭐, 나 원래 이 정도는 해.”


근데 이 회사가 생긴 지 딱 한 달 됐다는데. 누가 봐도 이상하고 수상한 이야기에 터트린 실소를 가만히 지우며 입술을 삐죽인 나는 곧 가늘게 눈을 떠 황민현을 바라보았다. 이것들이, 또 나를 가지고 노는 것 같지.


“그래서 여기서 만나자고 한 거야? 그 사람 얼굴 구경시켜주려고?”

“그건 아니고.”

“그럼.”

“여기가 내가 아는 카페 중에 제일 사람이 없어서.”

“.....”

“는 그냥 해본 말이고, 혹시 그 사람이 나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어떡해. 무섭잖아.”


아니라는 말을 섣불리 하지는 못하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황민현을 바라보다 나는 곧 그대로 휴대전화를 꺼내 빠르게 키패드를 눌렀다.


“근데 몇 시 약속이야? 그 사람 왜 안 와?”

“아직 10분 남았네.”

“오, 시간을 딱 맞춰 오는 매너.”

“거북이 매너.”


뭐 잘못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니꼽다는 듯 입술을 비죽거린 나는 곧 앞에 놓인 레몬에이드를 집어 들다 이내 어? 하며 고개를 쭈욱 빼는 황민현을 따라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어, 가게 앞에 주차하면 안 되는데.”

“.....”

“나가서 말 좀 하고 올게.”

“왔다, 거북이.”

“어?”


내 말에 막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가려던 황민현은 서둘러 제가 앉았던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그대로 주문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세요. 그리고 마치 전혀 몰랐다는 듯 정중한 목소리로 김종현을 맞이하는 목소리에 다시 모른 척 정면을 보고 있던 나는 그제야 천천히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일찍 왔네요.”

“제가 원래 약속시간에 늦고 그런 예의 없는 행동을 제일 싫어해서요.”

“저도 그래서 5분 일찍 왔습니다.”

“누가 뭐래요?”


두리번거릴 것도 없이 들어서자마자 눈이 맞을 자리에 앉아있는 나를 향해 또각또각 걸음을 옮긴 김종현이 곧 나도 무슨 소리를 듣자고 한 건 아니라는 듯 대꾸도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대뜸 손에 들고 있는 하얀 봉투 하나를 내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계약섭니다.”

“아니 무슨 앉자마자, 숨 좀 돌려요.”

“숨은 알아서 쉴 테니까 확인해보세요.”

“뭐라구요?”

“계약서입니다, 계약서.”


이게 뭐냐는 듯 저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향해 혹시나 내가 이해를 못했을 까 다시 한 번 친절하게 계약서라고 일러주기까지 하는 김종현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곧 기막힘에 터지는 헛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상체를 살짝 끌어당겨 앉았다.


“지금 뭔가 착각한 것 같은데 생각해볼 시간을 준다고 한 건 그쪽이었어요.”

“알아요.”

“근데 왜 대뜸 계약서부터 내밀어요?”

“어차피 할 거잖아요, 계약.”

“내가 왜요?”

“안 할 이유가 없으니까.”


황당하다 못해 화가 날 정도로 당연하다는 듯 지껄이는 김종현의 목소리에 순간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으려 애써 시선을 틀어 허공을 바라보던 나는 곧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 죽겠다는 듯 주문대에 선 채로 내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황민현과 눈이 마주쳤다. 왜, 뭔데. 나를 향해 덩달아 심각한 얼굴로 소리 없이 중얼거리는 녀석을 바라보던 나는 곧 앞에 놓인 계약서를 그대로 집어 들었다.


“안 할 이유가 없다고, 내가.”

“.....”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내가 3년째 놀고 있어서? 아니면 그 바닥 사람들이 나는 꼬시면 무조건 넘어온다고 했나?”

“.....”

“아, 여기서 내가 말하는 바닥은 당신들 노는 그 바닥. 내가 놀았던 바닥 말고.”


그리고 봉투 속에 들어 있는 것을 꺼내 제대로 보지도 않고 휙휙 넘기던 나는 곧 그대로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사정없이 찢어버렸다.


“미안하지만, 나는 재벌이랑은 일 안 해요.”

“.....”

“내가 아는 바닥 중에 제일 더러운 바닥이 그 바닥이거든.”

“.....”

“그러니까 여기서 이렇게 건방 떨지 말고 그거 먹힐 사람한테나 가봐요. 내가 당장 당신 돈 없으면 굶어 죽을 사람도 아닌데 자선 사업을 여기서 하면 되겠어?”


그리고 손에 든 것을 그대로 허공에 내던지듯 집어 던진 나는 곧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는 김종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그늘이 진 살짝 팬 얼굴이 차갑게 굳어 나를 바라보았다. 분노도 화도 담지 않은 채 그저 오로지 바라본다는 목적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시선에 순간 주먹을 꽉 쥐었다 놓은 나는 곧 입고 있는 재킷 안쪽으로 손을 넣는 것과 동시에 들려오는 의자 밀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아이스 바닐라 라떼 하나 주세요. 요새 재벌들은 사람도 막 패던데 가슴팍에서 총이라도 꺼내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어깨까지 슬쩍 움츠렸던 내게 들려오는 음성은 뜻밖의 것이었다. 아, 네. 우리의 이야기에 몰두해 덩달아 멍을 때리고 있던 황민현이 다급하게 계산을 하는 양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나는 곧 그대로 나를 향해 돌아서는 김종현을 보며 다시 전혀 겁먹지 않은 사람처럼 도도하게 표정을 바꾸었다.


“커피는 안 마셔도 될 것 같고, 뭐 다른 거라도 먹을래요?”

“네?”

“여기 디저트 같은 건..”

“아니요! 안 먹어요!”


어차피 그런 거 있지도 않지만 절대 안 먹을 거라는 듯 소리를 버럭 지르는 나를 향해 다시 서둘러 고개를 돌린 김종현이 이내 알겠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렸다.


“빵 같은 거 안 먹나 봐요, 배우라서 그런가.”

“되게 좋아하는데 여기선 안 먹어요.”

“....”

“아니, 여기서는 안 먹.. 네, 배우라서요.”

“....”


무슨 소리야, 이게. 나는 내가 해놓고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에 살짝 미간을 구기며 곧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는 김종현을 힐끗거렸다. 그리고는 곧 머신이 돌아가는 소리에 맞춰 크게 심호흡을 한 나는 입술을 감춰 물었다가 놓으며 그대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나는 그쪽하고 계약을 안 할 거라는 거예요.”

“내가 재벌이라서요.”

“...네. 복귀할 생각도 없고.”

“내가 재벌이 아니면 할 겁니까?”

“아니요, 그렇지만 확률이 0.1 프로 정도 올라가긴 하겠죠.”


그러니까 다시는 볼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다행히 총도 무엇도 꺼내지 않은 채 오히려 더 부드러워진 얼굴로 바라보는 김종현에게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중얼거린 나는 이내 주문한 것을 가지고 오는 황민현을 힐끗거렸다. 그리고는 김종현의 눈치를 보며 테이블 아래로 조심스레 왼손의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성공.


“내가 재벌이라 나랑 계약할 수 없다는 게 이유라면 어쩔 수 없네요.”

“말이 통하는 분이라 다행이네요.”

“....”

“뭐, 제가 워낙 재벌한테 당한 게 많아서 선입견이 좀 있어서요. 그래서 그런 거니까 제 말에 너무 상처는 받지 마시고요.”

“상처 안 받습니다, 대신 좀 아쉽네요.”


앞에 놓인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집어 들어 한 모금 입안에 가두자마자 구겨지는 미간에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덩달아 미간을 구기며 여전히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는 황민현을 향해 시선 옮겼다. 맛없나 봐. 꼭 그런 얼굴로 황민현을 바라보자 순간 싸늘하게 변하는 녀석의 얼굴을 보며 나도 모르게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었던 나는 곧 다음에 들려오는 말에 그대로 미소를 지우며 시선을 돌렸다.


“..뭐라고 했어요, 지금?”

“당신도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으면 내가 이렇게까진 안 했을 테니까요”

“.....”

“나는 재벌이라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에겐 다른 방법을 써요.”

“그게 무슨.”


최민기씨도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으면 편했을 텐데. 그리고는 이내 들고 있던 잔을 내려 놓으며 다시 재킷 가슴께로 손을 밀어 넣은 김종현이 그 안에서 꺼낸 것을 손에 든 채 나를 향해 방향을 바꾸었다.


“계약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이게 무서워 못 하는 거겠지.”

“당신 뭐야? 그 사진을 어떻게..”

“제일 더러운 바닥에 사는 사람이 이거 하나 가지고 있는게 뭐 대수라고 놀라요.”

“......”


도와달라 소리를 질러도 나를 모두 외면하던 사람들이 나를 떠나 들러붙은 곳은 나보다 훨씬 더 크고, 강하고,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왕궁이었다. 내가 서 있던 탑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으리으리하고 거대한 것의 속에서 나를 향해 눈을 흘기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래서 도와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사진, 이 방향에서 찍은 원본 가지고 있는 사람 나 밖에 없어요.”

“....”

“생각 잘해요. 내가 어떻게 나올지,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

“나는 기회를 충분히 줬다고 생각하는데요.”


내 모든 것은 순식간에 물거품으로 변해버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것도 아닌 내가 되었을 때 나는 조금씩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내 얼굴을 덮고 있는 화장도, 화려한 장신구도, 입고 있는 옷마저 거추장스러워졌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모든 것은 무너졌는데 나는 한 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기회? 무슨 기회요? 이딴 사진으로 나 협박하는 게 당신이 말하는 기회야?”

“.....”

“이딴 게 기회라고? 당신한테 이게..”

“최민기씨가 필요합니다.”

“.....”


톱스타 최민기의 몰락. 나는 가라앉아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됐다. 나는 몰락해야만 했다. 그게, 그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도와줘요, 최민기씨.”

“.....”

“당신이 있어야 해요.”

“.....”


아니, 나는 살려 달라 말했다. 도와 달라 몸부림쳤다. 단지,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을 뿐. 내가 가진 모든 것, 그렇게 내 마지막 음성마저 물거품이 되었다.







&


1편이라 좀 어수선하고 내용도 말만 많습니다. 

그래도 써보고 싶었던 내용이라 써봅니당.  

그냥 흔한 연애 이야깁니당!

현생이 바빠 자주는 못 오겠지만 얼른얼른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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