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고작 한 마리 키우는데 무슨 어항이 이렇게 커?”

 

어항을 들여다보던 린의 말에 시로는 애매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허리를 굽힌 린의 얼굴을 마주하며 보란 듯이 지느러미를 펼치고 있는 물고기가 온 몸으로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고작이라고 했느냐! 이 몸이 지내기엔 턱없이 부족하거늘! 뭐 이런 소리였음이 분명했다. 물고기의 의중을 알아챌 리가 없는 린은 연신 작은 어항의 곳곳을 기웃거리다가 톡톡, 유리벽을 살짝 건드려 보기도 했다. 한껏 성질을 부리던 노란 금빛의 물고기는 몇 번인가 빠끔거리며 공기방울을 올려 보내고 그대로 휙 돌아 유유히 헤엄치며 돌 뒤로 숨어버린다. 짜증을 부리다 못해 아예 안 보이는 쪽으로 몸을 돌렸음이 분명했다. 사납게 흔들리는 지느러미 뒤편으로 마지막 일갈까지 환청처럼 들렸다. “키우는 게 아니라 이 몸을 보필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물고기어 통역에 달한다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실없는 생각을 하는 시로의 눈에 이번엔 어항 안에 새끼손가락을 살짝 담가보는 린의 모습이 보였다. 앗! 하고 깜짝 놀란 시로의 단말마에 린은 담갔던 손가락을 빼고 그를 돌아보았다.

 

“뭘 그렇게 놀라는 거야?”

“아니……. 그런 거 싫어한다고 해야 하나.”

“싫어해? 이 물고기가?”

 

혹시 모를 어항의 부산물이며 이것저것을 치울 때엔 녹도 슬지 않는 스테인리스 집게를 사용한다는 시로의 설명까지 모두 전해 듣게 된 린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거늘 고작 물고기 한 마리, 라고 말하며 어항을 한번, 이쪽을 한 번, 연신 번갈아 쳐다보는 린의 뺨이 실룩거리고 있었다. 가늘게 눈을 뜨며 바라보는 린의 시선을 회피하던 시로는 슬금슬금 곁눈질로 어항을 살폈다. 알아, 안다고, 무슨 생각 하고 있을 지는 잘 알겠으니까.

 

“생각보다 애지중지 하고 있잖아? 이름까지 붙였을 것 같아 무서운데?”

“아 이름은—”

“우와, 진짜?”

“—길이야.”

 

길가메시, 라고 말해버리면 작정하고 놀릴 것 같은 느낌에 이번에도 시로는 애매하게 시선을 회피했다. 생각보단 단순한 이름이네, 라고 일축한 린이 그 이상을 묻지 않았기에 작은 한숨을 흘렸다. 저 발언에 돌 뒤에서 또 엄청나게 화를 내고 있을 물고기의 표정을 떠올려본다. 물론 사람으로 돌아와 있을 때의 그 심통 난 얼굴을 생각한 것이었다. 나이가 몇 정도인지는 알 수 없어도 생각보다 귀여운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런 감상까지 말하기엔 설명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고, 물고기가 귀엽다와 길가메시 또한 그렇다는 것을 연결시키기엔 많은 걸림돌과 반발이 많았다. 일단 본판이 어떤 반응을 할지 차마 무섭기에 직접 입에 담은 적도 없었다. 시로는 그저 슬쩍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냥, 우리 집 물고기가 좀 예쁘지. 이 정도면 그저 평범한 관상 물고기 매니아로 보일 법 했다.

 

‘가만, 내가 왜 애써 변명 같은 상상까지 하고 있는 거야?’

 

시로의 잡생각을 알아차릴 리가 없는 린은 돌 뒤로 숨어버린 물고기를 연신 기웃거리며 말했다.

 

“이 날씨에도 물은 꽤 따뜻하구나.”

“슬슬 추워지고 있었으니까. 안 그래도 작년 이 즈음엔 감기에 걸렸거든. 지금도 컨디션이 그리 좋지는 않아서 예민한 상태야.”

“물고기가?”

 

시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물고기가. 사실은 지금도 앓고 있는 중이란 것 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린은 이미 신기한 무엇인가를 발견한 양 시로와 어항 속 물고기를 관찰하고 있었다. “흐응~” 묘하게 늘어뜨리는 감탄사에 시로는 그저 묵묵히 간식거리를 내줬다.

 

“신기하네.”

“내가 할 소리야. 별안간 그 때 그 물고기는 어떻게 되었냐고 궁금해 하다니……. 이미 일 년도 넘게 지나서 그냥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토오사카.”

“무슨 소리? 아예 신경 쓰지 않을 거였으면 네게 전달하지도 않았다고. 뭐, 나야 날이 좀 싸늘해졌다고 물고기가 감기에 걸린다는 것 까지는 잘 몰랐으니 네게 맡긴 건 잘 한 거 같네. 꽤 오래 살고 있는 것 같고.”

 

사실 몰랐다. 가을이 다가오고 기온이 떨어지면서 비실거리는 걸 보고 걱정한 시로가 무얼 가져다 바친 들 코빼기도 안비치려고 했던 저 물고기가 자기 성질을 못 이기고 비 오는 날 튀어나와 버럭버럭 화를 내다가 엎어진 적이 있다는 것도. ‘말을 한다고 해서 믿어줄 리도 없고, 잘 한 짓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시로는 그저 대충 얼버무렸다. 린의 눈에 ‘의외로 물고기 한 마리 돌보는 것에 정성들이는 모습’으로 비친다고 하더라도, 그 말이 틀리지도 않았을 뿐더러 도리어 그렇게 보인다고 하니 뿌듯하던 차였다. 그럼, 잘 돌보긴 했지.

지난 저녁 물 아래 담근 시로의 손가락을 툭하니 부딪치고 지나갔던 길가메시를 떠올리며 조금은 웃음도 났다. 물이 더러워진다는 둥, 불경하다는 둥 화를 냈던 여름이 지나고 물고기에게 들었던 정은 솔직히 말해서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번 있었던 일은 그 후로도 제법 여러 번, 이제는 아예 그 잠깐 이마를 부딪치고 가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일부러라도 손가락을 담가보기도 했다. 보란 듯이 일부러 그러는 것이냐며 사람의 모습으로 코를 훌쩍이며 불평과 잔소리를 받아들이는 와중에도 그것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섭섭할 지경이다. 솔직히 많이 잘 생기긴 했잖아. 잔소리가 많고 까다로운 건 원래 성격이니 어쩔 수 없지만, 어항 안에서 지느러미를 펼치고 성질을 내는 모습이나 나와서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것을 주문하는 손가락질이나, 그래도 챙겨주면 기분 좋은 티가 나는 것 하며……하필이면 그런 예쁜 물고기로 태어나게 된 것도, 신들이란 분들 또한 별 수 없을 선택지로 택한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끼고 싶지 않은 게 없다. 그건 그가 어쩔 수 없이 사람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물고기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어쩌면 물고기가 아닌 그저 길가메시에게 정이 들었을 수도—

 

“에미야. 얼굴이 빨간데? 감기야?”

“어, 아니. 그럴 리가. 조금 더운 것 같아서.”

“그래? 난 좀 추운 것 같은데.”

 

가을비가 내리는 서늘한 날이었다. 비가 그친 뒤 돌아가는 게 좋지 않느냐는 말에도 린은 그저 손을 휘저으며 차 한 잔을 다 비운 뒤 제 집으로 돌아갔다. 조용해진 집안의 뒷정리를 하고 있는 시로의 등 뒤에 코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다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후였다. 불퉁한 표정을 감추지도 않으며 담요를 몸에 둘둘 만 채로 자리에 앉은 길가메시는 앉자마자 린의 험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 말괄량이 계집 말이다. 보면 볼수록 그 지독한 여신이 생각난단 말이다. 물론 인간 하나를 그 여신에게 빗대기엔 늘어놓을 말이 별을 세 바퀴 돌아도 모자란다만. 얼굴을 볼 때마다 떠오르게 되는 것이 꽤나 측은하게 느껴지긴 하는구나.”

“……누구인진 잘 몰라도 정말 싫어했다는 건 알겠어. 그래도 토오사카는 괜찮은 애야.”

“흠, 얼굴은 제법 봐줄만 하더구나. 괜찮게 볼만도 하겠지. 혹여 비루한 네놈이 연심이라도 품어본 계집이더냐?”

“그런 적 없어!”

 

후하하하 기세 좋게 웃고 있는 길가메시는 생각보다 눈앞의 상대를 놀려먹기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다른 때였다면 대충 맞장구를 치거나, 얼른 끊고 다른 대화로 돌렸을 시로는 어쩐지 다른 때 보다 힘이 덜 들어간 길가메시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토오사카랑 그럴 일 있을만한 것도 없지, 같은 클래스이길 해, 부활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간 가장 많이 시간을 보냈다고 하면 길가메시가—.

 

“그 토오사카 린이라는 녀석 말대로 감기라도 든 게냐?”

 

뭐가. 시로는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잠시 눈을 돌렸다. 들지도 않은 감기 이야기는 오늘 몇 번이나 듣는담.

 

“얼굴이 붉구나. 무슨 생각을 하기에 열이 올랐지?”

“별로…….”

 

또 뭘 가지고 골려먹을 생각인 것인지, 비뚜름히 웃어 보이는 길가메시의 말장난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고는 오늘 아침 찾아본 일기예보를 떠올렸다. 비는 오후까지 온다고 했다. 린의 말대로 제법 서늘하게 느껴지는 날씨이기도 하다.

벽장에서 가벼운 담요 한 장을 꺼내고 길가메시의 무릎 위를 덮어주며 살펴본 그의 얼굴은 나른함과 졸림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끔뻑거리던 눈꺼풀 아래로 바닥을 응시하고 있던 붉은 눈동자가 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로는 그만 웃어버렸다.

 

“역시 이제는 어항 안이 더 편한 거 아냐?”

“흥, 네놈이 방 안을 치우거나 채우는 것에 있어서는 도저히 그 센스가 늘어날 생각이 없는 듯하니, 지루한 것 보단 낫지 않느냐.”

“그럼 일단 눕지 그래?”

 

도톰한 이불 위를 톡톡 치며 웃는 시로의 권유에 길가메시는 별 다른 대꾸가 없었다. 여전히 이불을 둘러맨 채로 꾸물거리며 따뜻하게 데워진 잠자리 아래로 파고들 뿐이었다. 돌아눕는가 싶었던 그는 얼마 되지 않아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며 앉아있는 시로를 바라보았다.

 

“눈치는 꽤 좋아졌구나.”

“하루 이틀은 아니니까.”

 

시로는 처음으로 아팠던 길가메시를 떠올렸다. 그 첫 해, 여름이 지나고 마루에 불어오는 바람이 서늘하다고 느낄 무렵 바닥에 죽은 듯이 누워 기운이 없던 황금색 물고기를 보고 혼자 난리 법석을 떨었던 때의 기억이었다. 어쩐지 빛이 바랜 듯한 반짝이는 비늘이며, 먹을 것을 보고도 시큰둥한 모습이라던가, 무엇보다도 예쁘기만 했던 꼬리 지느러미에 몇개의 흰색 반점이 돋아난 걸 발견하고 정말 큰 병이라도 걸린 줄 알았다. 으아아, 길가메시! 하고 머리를 쥐어싸매기만 했던 날이다. 돌이켜보면 어설픈 물고기 돌보미의 초보적 실수였기도 했지만, 물고기들에게 붙이는 수많은 병명을 제쳐두고 길가메시 본인이 말하길— 그때의 그것은 그저 단순한 감기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기어코는 시로의 무지함에 화를 내지도 못하는 몸을 끌고 물 밖으로 튀어나와 파들거리는 것을 어떻게 잘 추스르고 먹이고 재운 뒤에야, 물고기 길가메시의 가벼운 감기와 그보다 더 심각했던 짜증이 비로소 모두 나을 수 있었다. 황금색 물고기, 길가메시는 열대어였다. 따뜻한 물속에서 활발하고 건강하게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기초적 상식이었으나 물고기를 객식구로 처음 맞이했던 그때의 시로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 이후로 날이 싸늘해지는 때가 있더라도 길가메시의 어항에 차가운 물이 담긴 적은 없었다. 감기도 걸린 적이 없다. 계절이 바뀌고 벽에 걸린 달력이 교체될 동안 길가메시가 병에 걸리는 일은 그 뒤로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가을을 맞이한 길가메시는 따뜻한 물속을 배회하면서도 기운이 없었다. 입은 지치지도 않고 떠들기를 좋아하고 화를 내는 것도 여전하며, 까다롭게 이것저것을 요구하는 것 또한 매 한가지였으나 그와 한 해를 지낸 시로는 잘 알 수 있는 변화였다. 물고기로서의 대부분의 생을, 비 오는 때에 사람의 모습으로 기적처럼 생활하고 있는 길가메시였으나 그의 탄생이 물고기였듯이 그의 시간 또한 물고기의 시간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일 년의 시간, 조금 더 여유가 있지 않았을까 싶었던 때도 있었으나 물고기 길가메시를 처음 만났던 시로는 그가 자신을 만나기 전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가를 알지 못했다. 아쉽다. 단순히 감상이었을지도 모를 그 한마디가 목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갈 일은 없었다. 대신에 흙이라도 삼킨 것 처럼 버석하게 목구멍 안을 굴렀다. 가슴께 언저리에 떨어진 채 자꾸만 무겁게 굴러간다. 그 까칠한 감촉을 지우지도 못한 채 시로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조금 다른 쪽이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뭘 말이냐.”

“물고기 말이야. 어차피 물고기로 태어나게 할 거였다면 좀 더 오래 사는 쪽으로……. 메기라던가, 고래라던가.”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지 않느냐, 멍청이. 그보다 메에기이? 이 몸은 싫다만.”

 

못생겼다. 와중에 되돌아오는 가차 없는 평가를 들으며 시로는 또 한 번 웃었다. 하긴, 물 밑 바닥을 헤집고 돌아다닐 거대한 흙빛의 물고기 길가메시는 어떻게 떠올리더라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금빛의 잉어라면 모를까, 생각해보면 똑같이 커다란 물고기였어도 오래 사는 것들은 많았다. 사계절 내내 튼튼하고, 겨울에도 아플 일 없이, 아름답게 물을 헤치며 돌아다니는 물고기는 다른 것도 꽤 많았을 것이다.

 

“왜 하필 작은 열대어였나 싶어서. 기왕 다시 태어날 일이었으면, 오래 살아도 좋잖아.”

“전에도 한 번 말했던 것 같다만, 시로. 신들이 그러한 편의까지 봐줄 작정이었다면 그건 저주가 아니라 그저 단순한 장난질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에둘러 말하는 시간의 안타까움을 분명 알아들었음에도 길가메시는 태평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그가 셀 수도 없이 받아들였던 시간의 끝을 시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길어봐야 2년, 길지도 짧지도 않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오래도록 함께한 순간을 떠올리기엔 그저 한순간일 수도 있을 그 시간이.

 

“아직 이지만 말이다. 가을과 겨울은 꽤 성가시지. 분하지만 이 몸은 추운 날씨엔 기를 펴지 못하는 법이니, 때가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칠 수는 있는 법이다.”

“뭐야, 뜬금없이.”

“한낱 인간에게는 힘든 일이겠으나……. 그러나 받아들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평범한 인간의 삶으로는 몇 번을 다시 태어난다 해도 얻지 못할 깨달음일 테니까 말이다. 세상 모든 태어나는 것들에겐 정해진 삶과 수명이 있는 법이다. 그것이 인간이든, 혹은 물고기라 해도.”

 

때가 되면 사라질 자리. 시로는 비어있는 어항을 바라보았다. 인간 길가메시가 이 자리에 함께하기에 비어있는 텅 빈 어항이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이 방안에 떠들고 있을 누군가도 없이 마찬가지로 비어있게 될 어항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더 허락이 되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시로는 그 말 한마디 대신 손을 뻗어 누운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길가메시의 이마를 짚었다. 부드러운 금발이 손가락을 스친다. 활발하게 어항 안을 돌아다니던 때와 마찬가지로 누워있는 길가메시의 머리칼은 한결 같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물 아래에서 흔들리던 지느러미처럼 길가메시의 머리칼은 시로의 손이 움직일 때 마다 그 사이를 부드럽게 굽이치고 있었다.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얕게 스치는 물결처럼 일렁이는 듯한 기분도 든다.

미지근한 온기를 느끼며 반듯한 이마의 촉감이 아쉬워질 무렵이 되어서야 슬며시 떨어지려는 손바닥 아래로, 길가메시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손가락에 잠시 부딪히고 갔던 황금빛 물고기처럼, 길가메시는 시로의 손바닥에 한참동안 제 고개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




비가 내리고 있는 날이다. 점심 때 부터 내리기 시작해 쉬이 그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이 비는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물줄기였다. 기다렸던 장마의 시작과 함께 그 끝도 다가오고 있었다. 시로는 해마다 돌아오는 여름의 난리 속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눅눅한 잿빛의 하늘, 어둡게 내리는 비, 어쩌면 며칠간 지겹게 이어져 온 장마철에 딱 어울리는 감상이었을 수도 있었다. 눅눅함이 가시지 않을 계절이었지만 그것이 나쁘지 않다고 느끼게 된 때가 있었다. 2년 전 여름 어느 날의 저녁부터 시끄러웠던 것이 그랬고, 한사람 몫의 식사에 다른 한사람몫을 추가한다는 것이 그랬다. 부득불 자리를 깔고 누워 제 옆에 대자로 뻗어 자는 누군가가 귀찮지 않다고 느낄 무렵, 시로는 여름의 더위 속에서 그 지독한 장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기대했던 계절의 끝.

하늘을 올려다 본 시로는 우산을 펼치고 서둘러 발걸음을 돌렸다. 우산 위를 두들기는 빗줄기가 시야를 방해할 정도로 엄청난 기세였다. 사방이 물 안에 갇힌 것만 같다. 이런 계절을 두고 길가메시는 꼭 말 한마디를 덧붙여 불평하곤 했다. 일광욕을 생각할 수도 없는 마당에 비가 오는 것은 마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따뜻한 것을 좋아했고, 햇볕 쬐는 것도 즐긴다고 했다. 들판을 가로질러 산을 오르는 것은 물론이요 언덕 위에서 바다가 보이는 곳까지 돌아다니기 일쑤였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애꿎은 일이었다. 생의 대부분을 작은 물속에서, 두발로 걷는 시간 동안엔 태양이 없는 하늘 아래에서, 사방에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서 길가메시는 사람의 모습이 되어도 물고기의 때와 별 반 다르지 못하다. 자유롭지 못한 행동반경은 물고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계절이 바뀌고 되돌아온 여름의 장맛비 속에서 시로는 새삼스레 그 불만족스러웠던 계절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신발 아래 끌리는 젖은 바닥이 무겁게 달라붙는 것만 같았다.

집으로 돌아온 시로는 조용히 제 방문을 열었다. 아침에 일기예보를 확인한 직후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방 한가운데에 두터운 잠자리를 펼쳐 두고 나간 그였다. 푹신한 이불 한 가운데가 볼록하게 솟아 있었다. 그 안에 길가메시가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기다리던 계절은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길가메시가 굳이 알리지 않았으며, 시로도 맞이하길 원치 않았던 시간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

 

“다녀왔어, 길가메시.”

 

유난히도 기운이 없던 지난 가을과 겨울을 보내고 되돌아온 봄, 서운하다싶을 정도로 그 해의 봄엔 비가 지독히도 내리지 않았다. 이제야 겨우 맞이한 폭우 속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길가메시의 모습이었다.

그간 어항 속에서도 헤엄치며 돌아다니는 것 보단 어딘가에 기대어 누워있는 모습을 많이 보이던 길가메시는 더운 여름 장마가 시작되고 오랜만의 인간 모습을 한 채로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가을을 기점으로 길가메시는 마치 있어야 할 일을 맞이하는 것처럼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그저 기운이 없을 뿐이란 것을, 그리고 기운이 없는 이유도 그저 시간이 문제라는 것을 알기에 시로는 말없이 손을 뻗어 길가메시의 뺨을 쓰다듬었다. 창백하게 질린 부드러운 뺨은 마치 어느 날부터 빛바래 가던 황금빛 물고기의 비늘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부드럽게 굽이치던 지느러미와 같이, 그의 머리카락은 금빛이었다.

길가메시가 눈을 떴다. 시로가 없던 사이 언제부터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채 얼마만큼 잠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눈을 뜬 이 순간도 막 잠이 들 것 같이 무거워 보이는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고 있었다. 몇 번인가 뺨을 매만지는 시로의 손길을 얌전히 내버려두던 길가메시가 툭하니 내뱉듯이 말했다.

 

“네 놈은 친구도 없는 게냐?”

“잘은 모르겠지만 너한테 그런 소릴 들으니까 당황스럽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야. 버럭 발끈한 척 길가메시의 말장난을 받아주기엔 그렇게 툭 뱉은 한마디가 무척이나 기운 없다. 길가메시는 또 한 번 느릿느릿 눈을 감았다 떴다. 마치 말 하나를 꺼내기 위해 오랜 시간 숨을 들이쉬고 힘을 내는 것처럼, 그러나 무엇 하나 허물어지는 발음 없이 똑바로 시로를 바라본 채로 말하고 있었다.

 

“네 놈, 그래보여도 곁에 두고 있는 자들은 꽤 있어 보이니 별로 상관없을 일일지도 모르지만.”

“뭐야 갑자기…….”

“지난 것을 너무 그리워하게 되서는 안 될 일이지. 잊거나 잃어버릴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뭐든 지나치면 분에 넘치는 것을 찾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너도 그런 적이 있어?”

“이 몸은 잡종들과는 다르니 얻은 것도 있었지만 말이지.”

 

어이구, 어련하시겠어. 부러 어이없다는 듯 으쓱해 보이는 시로를 바라보던 길가메시가 몸을 일으켰다. 절반 정도는 그의 등 뒤를 시로가 받쳐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 가슴팍에 기대어 앉힌 채로, 시로는 오랫동안 누워있음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짐 없는 그의 금발을 쓰다듬듯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말없이 움직이는 손짓이 한참이었다. 길가메시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시로는 그의 반듯한 이마와 손아래 물결치는 금빛 머리카락만을, 정수리를, 그리고 그 위를 스치는 제 손만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듣기는 한 것이냐, 시로.”

“응.”

 

힐끗 내려다본 시선 아래로 불만스럽게 인상을 찌푸린 길가메시의 표정이 보였다. 마치 결을 반대로 쓰다듬은 바람에 화가 난 고양이와도 같은 눈빛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계속 머리카락만 쓰다듬었구나. 깨달았을 때 시로는 이제 그만 그의 머리칼에서 손을 떼려고 했다. 그때 그런 시로의 손목을 길가메시가 붙잡았다. 힘 들이지 않은 가벼운 손짓이 시로의 팔을 잡아끌고 그대로 제 뺨 위로 끌어 당겼다. 슬그머니 손바닥 아래에 그는 제 스스로 자신의 얼굴을 기대고 있었다. 길가메시의 뺨은 지난 시간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어항의 물과도 비슷하게 미지근했다. 어쩌면 그저 자신의 손바닥이 지나치게 뜨거웠기에 그렇게 느꼈던 것일 수도 있었다. “뜨겁지 않아?” 저도 모르게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따뜻하다만?”

 

잠들어가듯 희미한 목소리가 들린다. 물 밑 아래로 가라앉아 흩어져버릴 것만 같은 그 목소리에 시로는 무심코 가슴팍에 닿은 길가메시의 몸을 끌어안았다. 어깨를 들썩이며 길가메시가 웃고 있었다. 따뜻하구나. 이어가는 목소리는 희미했어도 똑똑히 들려왔다.

 

“부족한 점은 명계바닥에서 하늘만큼 쌓아올려도 모자랄 정도로 많았지만, 노고를 아껴주마.”

“노고라고 할 것 까진, 없었는데. 오히려…….”

 

오히려 부족했을지도 몰라. 그러나 시로는 입을 다문 채로 길가메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어느 방해도 없이 한마디씩 느릿하게 뱉어지는 그 목소리를 똑똑히 모두 담아두어야 할 것만 같다.

 

“미물로 태어나 한 톨 쌀알만 한 생명줄 이었다만. 이 정도로 보필한 놈은 네놈이 처음이구나. 짧다고 한들 나름 이 몸의 평생에 함께한 것 아니냐.”

 

물고기의 시간. 여름이라는 계절과 함께 나타난 물고기의 삶에서 시간이 어떠한 형태로 흘러가는 것인지, 시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길가메시는 그런 물고기의 시간을 마치 사람의 것과 다르지 않은 양 빗대어 말하고 있었다. 짧지만, 무엇보다도 길었던 시간이라는 듯이, 느릿한 숨에 담아 넘치지 않는 단어들을 흘리며 말한다.

 

“칭찬해주마.”

 

시로는 그저 길가메시를 내려다보았다. 가슴에 기댄 채로 올려다보고 있는 길가메시는 그저 잠에 빠지기 직전의 수마를 억지로 물린 채 버티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만 한다. 턱이 뻐근했다. 저도 모르게 힘주어 입을 다물고 있었기에 그랬다. 스스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마 보란듯이 형편 없을 것이다. 길가메시의 눈이 웃고 있기에 그렇게 생각했다. 우스운 것을 볼 때, 그것을 한사코 놓치지 않고 골려먹으려 하던 그 때의 표정과 같았기에 그랬다.

 

“말했듯이 지나친 욕심은 때로 인간의 일생에 화를 부르는 법이다만……. 네 놈은 인간이 한 번 정도 가져도 될 스스로의 소망조차 모른 채 멍청히 있더구나.”

“길가메시, 나는……. 그저 네가 잘 지냈던 거면, 괜찮을 거야.”

 

그랬다면 괜찮아. 시로의 말에 길가메시는 제 뺨에 붙이고 있던 시로의 손을 놓고 대신에 시로의 얼굴 위로 제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댔다. 그가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음에도 시로는 그의 손이 제 얼굴에 닿기 쉽도록 조금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별안간 기분이 좋았는지, 길가메시의 눈은 한층 더 휘어진 채 웃고 있었다.

 

“왕이 된 몸으로 그저 말로만 노고를 칭찬하는 것도 안 될 일이지.”

 

그는 마치 빈 손 안 가득 시로를 담아두듯 양 뺨을 감싸며 말했다.

 

“그러니 그간 네놈이 제일 소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멍청하게 못 알아챘던 것 하나 정도는 선물로 남겨주마.”

 

붉은 눈동자가 똑바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빛이 부딪힌다고도 생각했다. 점점이 다가오는 빛 무리들에 지나치게 눈부시다고 생각하면서도 시로는 눈을 감지 못했다. 이마에 닿아 흩어지는 간질거림이 느껴지는 때가 되어서야 시로는 제 뺨을 붙든 길가메시의 손을 따라 그에게로 깊숙이 고개를 숙였음을 알았다. 아름답게 굽이치던 황금빛 물고기의, 드레스 자락과도 같았던 꽃잎을 닮은 몸짓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손가락 끝에 닿았던 물빛과도 같은 숨이 부딪힌다. 미지근하면서도 더없이 따뜻했던 것이 있다. 그런 물에 잠기는 것만 같다. 온통 붉거나, 온통 빛나는 금빛의 물 밑, 물속을 유영하던 아름다운 물고기의 세계로 잠겨간다. 태어나 처음 호흡하는 작은 물고기와 같이 시로는 입술을 벌려 그 세계의 숨을 삼켰다.

여름날 손끝에 부딪혀 온 작은 물고기처럼, 길가메시는 오래도록 시로의 입술 끝에 머물렀다.


새벽이 지날 무렵, 하루 종일 내리던 비는 그쳐 있었다. 장마의 끝이었다.




시로가 눈을 뜬 것은 허전함 때문이었다. 분명 팔 안에 감겨 있던 한 사람 분의 무게가 사라진 것에, 시로는 막힌 숨을 삼켜 내뱉듯 헉 하고 눈을 떴다. 햇살이 비치는 방 안에 이불 바깥에서 부터 팔을 뻗어 내어 주었던 그 곳엔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겨울 이불만이 덩그러니 펼쳐져 있었다. 있던 것이 사라진 자리엔 분명 누군가가 누워있었던 것처럼 얕게 눌린 흔적만이 남아있다. 장마의 끝, 한 계절의 토막이 지난 자리가 허전하다. 뻗은 팔의 손가락을 몇 번인가 까닥거린 시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툼한 겨울 이불을 정리했다. 벽장 안에 고이 포개어 넣은 뒤 창문을 열고 바닥을 쓸었다.

주말과 함께 비가 그쳤다. 하루 종일 맑을 것임을 예감하는 햇살이 지나치게 반짝거리는 것도 같았다. 이불을 말려두기엔 딱 좋을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시로는 넣어두었던 겨울 이불을 도로 꺼내두었다. 더운 여름 계절에 그러안은 탓인지 아직도 따끈하게만 느껴졌다.

마당에 이불을 펼치고 돌아온 시로는 제 방문을 열자마자 선반에 놓인 어항 앞으로 갔다. 아침나절부터 허전했던 팔 안쪽에 자꾸만 스치던 부드러운 감촉을 떨칠 수가 없었다. 스탠드 조명을 켜고 시로는 우두커니 어항 앞에 앉아 비어버린 작은 물 속 세계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걱정했던 것도 있었다. 사람의 모습으로 갈까, 혹시 그는 물고기의 모습으로 되돌아갈까. 어느 쪽이든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던 순간이지만, 그는 결국 물고기로 되돌아가 제 시간의 끝을 알렸나보다. 그는 물고기였고, 물고기의 시간을 살았던 인간이었으므로, 어쩌면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또한 그 처음의 모습을 간직한 채 되돌아가는구나 싶었다. 그 모습은 어항 안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 솔직히 그의 배려란 것은 알아본 적이 없으므로 — 마지막 순간은 어항 구석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누워서 맞이했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한다. 한참을 바라보던 시로는 문득 코가 시큰거려왔다. 바보같이 빈 어항을 보고 울컥 올라온 게 있다고 하면, 아마 토오사카가 들으면 그때보다 더 놀려먹겠지. 시로는 결국 한참동안 바라보던 어항을 치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면 분명, 어딘가에 영원히 잠들어 있을 그의 금빛 물고기가 보일 것이다. 제 집의 넓은 마당 중에서도 햇볕이 가장 오래도록 내리쬐는 한 자리를 기억하고 있던 시로는 어항 안을 굽어 보면서도 이제 곧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어항이 들어갈 만큼 정도로 땅을 파려면 꽃삽 정도로는 안 되려나, 하는 등의.

모난 것 없이 둥글었던 예쁘고 작은 돌들, 잎사귀가 두껍고 커다랬던 수초들을 들어 올리는 손이 분주했다. 가로 30cm 내외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어항을 비우는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도 않아 시로는 손을 멈추고 또 다시 어항 안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이번엔 그저 멍하니 허전함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몇 가지의 물건을 빼고 듬성듬성 보이는 공간 아래로, 분명 제 눈이 찾고 있던,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어딘가에 분명 가만히 있을 금빛의 물고기가 없다.

길가메시가 없다.

 

“어째서?”

 

수초 사이사이와 구석을 눈으로 살펴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급기야 벌떡 일어선 채 물 아래를 휘저어보는 손길에도 닿는 것이 없다. 설마 싶은 마음에 시로는 급기야 방금 청소했던 방 구석구석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어항을 둔 선반 아래, 방 끝의 모서리, 바보 같은 생각이라 느끼면서도 방금까지 개켜둔 이불을 넣어놓았던 벽장이며 다다미 아래 사이까지. 그러나 지난 시간 스스로 그렇게나 아끼며 예뻐했던 금빛의 물고기는 어디에도 없이 보이지 않았다. 장마가 끝나고 더운 여름의 공기 아래 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며 몇 시간씩 뒤지고 나서야 그것이 소용없는 일임을 알았다. 허탈한 마음에 시로는 빈 어항을 두 번째로 멍하니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열린 방문 너머 등진 햇빛이 따가웠다.

햇살이 잘 드는 마당에 어항과 함께 묻어줄 생각이었다. 잎사귀가 크고 잘 자라는 식물을 하나 심어 두고, 햇살 받는 것을 좋아했다고 했으니 그렇게 해야겠다고 어느 무렵부터 마음먹었던 일이었다. 언젠가 또 다시, 그와 같은 금빛의 물고기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 없는 생각도 했다. 길가메시는 언젠가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던 만남을, 어느 날 여름 손에 들려 집 안의 한 공간을 차지했던 길가메시와의 만남이 우연이었듯이, 어쩌면 또 다시 우연히 발견한 금빛의 물고기의 재회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마법과 같은 일이었기에 시로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을 뿐이었다. 사람으로서는 짧지만 물고기로서는 정해져 있던 그 시간을 기억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기억하고 싶었던 그의 마지막은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었다.

아쉬움이라고 치부하기엔 한없이도 무거운 감정들이 아프게 눌러왔다. 물 먹은 감정이 자꾸만 명치를 짓눌렀다. 모습조차 남지 않는 결말이라니, 정말로 지독한 저주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잠들지 말았어야 했다. 이름을 부르며 숙인 얼굴 아래로 그림자가 졌다. 해가 이토록 빨리 질 수도 있을까, 아니면 그저 우울한 기분이 그렇게 착각이 들게 끔도 하는 것 같다. 해가 비추던 방안에 길고 긴 그림자가 들이치고 있었다. 어둡게 비만 뿌려대던 장마가 지나갔음에도 시로의 방안엔 그늘만이 가득 채워져갔다. 추를 달아 늘어뜨린 것처럼 목소리가 잡아 끌렸다. 그러나 그렇게 꽉 막힌 목으로도 시로는 낮게 이름을 부르고야 말았다. 사랑해 마지않았던, 작은 금빛 물고기의 이름을.

 

“길가메시…….”

“불렀느냐?”

“응……뭐?”

 

화들짝 놀라 급하게 일어난 바람에 제 발치에 있던 어항도 잊고 걸려 넘어져버렸다. 아파! 단말마 엄살 뒤에 예의 그 요란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흐하하하하하하하! 하루도 지나지 않아 멍청한 꼴이구나!”

“길가메시……?”


확인이라도 하는 것 처럼 두 번째로 불러 본 그 이름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가메시가 방문에 기댄 채 서 있다.

시로는 엎어져 눌린 바람에 빨개진 코를 붙잡으면서도 입을 벌린 채 햇살을 등지고 선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를 처음 봤을 때, 아마도 그날의 일을 시로는 말도 안되는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두 번째, 그 말도 안되는 일의 또 다른 시작 또한 우연이라고 한다면, 혹시나 우연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기적과도 같은 것 아닐까.

기적은 때로 현실이 되어, 혹은 되돌아 올 수도 있음을.

시로는 벌떡 일어나 그 만남이라고 하는 것, 기적의 다른 이름을 불렀다.

 

“길가메시.”

 

일상이 되어버린 기적이 고개를 까닥이며 이쪽을 바라본다. 엉망스럽게 구겨진 표정을 보면서도 그의 눈은 웃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방금 막 꿈에서 깨어나 긴 잠 뒤에 개운한 모습으로, 햇살같이 눈부신 금빛이 어느 날 흔들리던 금빛 물고기와도 같이 반짝였다.

많은 말들이 혓바닥 위에서 뒤엉켰다. 몇몇은 삼키고, 몇몇은 뱉어야했음에도, 시로는 그 모든 말들을 한번에 끄집어낼 수가 없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햇빛을 담고 있었다. 물결처럼 일렁이며 금발이 흔들린다. 바보같이 엎어졌던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선 채로, 시로는 손을 뻗어 길가메시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조용히 감겨오는 온기는 지난 밤 제 팔목 위에 남아있던 그 온기와 꼭 닮아있었다. 그가 남긴 선물을 되돌려 줄 시간이었다.

 

“일단 옷 좀 입자.”

 

꽉 끌어안은 그 품안에서 길가메시가 떠나가라 웃기 시작했다.




***




— 안녕~ 금삐까. 죽은 줄 알았지? 아 사실 그 직전이긴 하지. 꿈을 좀 꾸는 중이겠지만? 그나저나 여기 왜 물 속이야? 너 죽기 직전엔 이런 꿈꾸는 구나? 아무튼 간에 저 멀리 신대에서 구경 좀 하다가 누가 먼저 알릴까 다들 내기 걸던 차에 내가 세치기 하고 이렇게 나타났어. 감사하게 생각하도록 해. 그래도 지금 네가 태어난 시대엔 나랑 꽤 상성 좋은 인간이 있더라고. 지금은 그 모습을 빌려서 네 꿈에 잠시 나타났지. 뭐 어때? 어떤 모습으로 비교하든 난 나니까, 여신에 대한 경배는 바라지도 않으니 우러러 감상하도록 해. 악!! 뭐야 너 지금, 던졌겠다? 취소한다? 취소할 거라고? 뭐? 어차피 꿈이니 얻어맞아도 별 것 없고 알고 있으니 헛소리 말고 꺼지라고? 흐흥~ 그렇단 말이지, 알고 있단 말이지~ 이거 아쉽네? 생전에 있을 일이었다면 두고두고 회자되어서 기록으로 남겼을 텐데 말야. 왜 그런 거 있잖아, 네가 악기를 잃어버려서 울고불고 했던……어머, 지금 눈 돌렸지? 맞지? 흐흠, 듣기 싫어하는 것 같으니 더 이어 볼까. 축하해, 저주는 풀렸어. 어떤 저주인지는 상세히 말해줬더라도 푸는 방법은 알려주지도 않았었지, 아마. 너도 딱히 궁금해 하지 않아서 웃겼고 말야. 뭐 이 시대에 전해지는 동화엔 그런 것도 있더라고. 잠들어 있는 공주님을 깨우는 사랑의 키스라던가? 개구리에게 키스했더니 멋진 왕자로 변한다던가? 어머, 뭐니, 너 또 뭘 던지는 거야! 아항~ 그렇구나. 사.랑.이란 말이 꽤 열받는가봐? 뭐? 시끄러우니 꺼지라고? 지금 네가 소리 지르는 게 더 시끄러운 거 알아? 뭐? 내 입에서 사랑 소리가 나오다니 천지가 뒤집어지다가 두무지가 내 엉덩이 두들기는 꼴이라……? 이 금삐까! 역시 취소해야겠어, 너는 앞으로 한 수천 번은 인간 손에 짓밟히고 굶어 죽던가 말라 비틀어 죽던가 썩어봐야 정신차리—


— 흠흠, 길가메시. 하늘의 여신이 지나치게 흥분을 하여 대신 말을 전합니다. 저주는 풀렸어요. 사실 우리들의 내기가 이렇게까지 길게 이어질 줄은 몰랐답니다. 어쨌든 당신은 인간을 사랑하니까요. 아, 이 저주는 어차피 풀리게 할 생각이었어요. 어쨌든 우리도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음, 표정이 좋지 않군요. 역시, 이건 그냥 장난질 아니었냐구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당신도 인정해버리는 것 아닌가요? 그래요, 결국은 우리도 당신을 살피고 싶었으니까요. 뭐, 중간에 우리 중 누군가 술 판 벌이고 제정신이었다면 될 일이었는데 이게 누군가의 사랑이 필요하게 될 일인 줄 알았나요.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얻은 것이 있으면 이번엔 마음 껏 아끼길 바랍니다. 음음……. 그래요, 사실 그 인간이 당신을 한껏 아꼈던 것이니까요, 이건 말을 더 할 필요는 없겠군요. 그럼, 금성의 여신이 눈이 맛이 간 채 날뛰고 있으므로 우리의 만남은 이 꿈에서 끝내도록 합니다. 결국은, 당신이 바라는 바로군요. 그럼 이만, 당신의 인간이 무척이나 슬퍼하고 있으므로, 오랜 시간 붙들고 있지는 않겠어요.

이제는 우리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마음껏 아끼고 사랑하길 바랍니다.












  • 2018년 여름에 풀었던 트위터 썰 기반…….
  • 길가메시가 살았던 어항 안엔 그 뒤로 매번 한 마리의 물고기가 새로이 채워졌고, 시로의 집엔 한 명의 화려한 인간과 물고기라는 식구가 늘어났다고 합니다. 둘이서 기르는 물고기는 베타 전문가 시로 덕에 어찌나 관리를 잘하는 지 매번 장수 했다고 하네요. 메데타시 메데타시.

잡식성 독거 오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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