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민 시점-> 정국 시점




  정국의 집에 다시 가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특히 정국이 집에 없을 때를 틈타 간다고는, 더더욱. 이혼 절차는 전체적으로는 서류도 넘어가고, 소송의 중간 절차 정도를 밟고 있었다. 이제 순조롭게 진행만 되면 이혼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순조롭게 넘어가려면, 꼭 필요한 물건이 있었다.


 " 진짜 바보네 박지민. "

 " 그래. 이번만큼은 나 바보인거 인정한다. "

 " 아무리 급했어도 그렇지 어떻게 도장을 잊고오냐. "

 " 이때까진 서명으로 버텼는데, 도장이 꼭 필요하다더라. "

 " 어..그것도 처음 알았네. "

 " 소송 결과 보고 구청에 신고서 제출할 때 필요하대. "

 " 와...은근 복잡하네, 이혼. "

 " 장난 아냐. 뭔 서류가 그렇게 많은지. 이거 통과하는 도중에 질려서 그만두겠더라. "


 그렇게 태형이에게 면박을 받았고, 그와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조용히 정국의 집에 다녀올 계획을 세웠다. 태형이가 어떻게 전정국을 붙잡고 있는 동안, 내가 정국의 집에서 도장을 찾아 오는 계획이었다.

어떻게 해서 붙잡을지 그건 몰랐다. 뭐 알아서 적당히 하겠거니 하고 나는 조용히 정국의 집에 다녀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와 함께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을 등지고 둘이 손잡고 어디론가 도망쳐야만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결혼식을 올리고 같이 살게 되었다. 찜찜한 구석은 뒤로 하고 그냥 좋다구나 하고 살았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손잡고 둘이 도망칠 걸 그랬나.


  그런 무의미한 생각은 지금에 와서야, 쓸모없었다. 고개를 털고 다시 새롭게 나아가야 할 곳에 신경써야 했다.

안 그래도 절차란 것이 사람을 피곤하고 모든 기운을 다 빨아당겼으니까. 이젠 새롭게 출발하는 거다, 과거에 발목잡히지 말자, 박지민. 조심하고, 내일 가서 걔가 없는 틈에 살짝, 가서 가져오면 그만인 거야.

 나는 그렇게 폰을 무음으로 해두고 잠을 청했다. 




 정국은 그때 철야를 하고 있었다. 비몽사몽한 간에 들어오는 글자는 흐리멍덩했다. 어떻게든 자판을 치고 있긴 한데 머리는 돌아가지 않았다. 카페인이 부족했나. 정국은 멍하게 글자를 보면서 흑백을 구분했다. 그리고 책상에 얹혀 있는 서류를 하나 꺼내들었다. 외면하고 싶어 밀어둔 서류였다. 중요 서류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든 이면지랑 섞여 떨어질 법하게 놓여 있었다. 사랑에 대해서만은 자신 있었던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서류였다. 정국은 아직까지도 희망없는 희망을 붙잡고 싶었다. 언젠가 그가 나에게 돌아와주지 않을까, 하는 아무 희망없는 이야기를.

그렇게 커피를 찾으러 가는 도중에 생각하며 터덜터덜 걸었다.


 사무실 내의 공간에 있는 미니 냉장고를 열었다. 그 안에 냉동실에 플라스틱 반찬통이 있었다. 이게 뭐지? 하고 꺼내보니 아주 오래 전의 샌드위치였다. 예전 지민이 자신을 보러 올 때, 사무실 냉장고 안에 무언가를 넣어두곤 했었다. 샌드위치나 김밥 같은 것들을 사다 오거나, 가끔은 자신이 만들어 오기도 했다. 거의 아주머니의 솜씨였지만 자신도 거들었다며 자기가 만든 것이라고 우기고는 했었다. 사실 전화만 하면 맛있는 것들은 금세 올라왔지만 정성이 고마워 꼭 챙겨먹었다. 사람이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자신 또한 그 사랑에 보답하고 싶었다. 자신이 바쁜 것을 옆에서 말없이 지켜보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위로해주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보답할 길은 잡음 없이 이혼에 합의해 주는 것이다.

 

 정국은 밀려오는 서러움에 지민을 붙잡고 이야기하고만 싶었다. 만약 지민이 지금 내 앞에 있다면 하고 싶은 이야기들. 알콜에 절여진 것도 아닌데, 솔직하고만 싶었다. 왜 나를 버렸는지, 또 왜 더 이상 만나주지 않는지, 나와 함께 했던 시절에 뭐가 제일 힘들었는지, 또...나를 만난 것 자체를 후회하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다.

 허망하게 내려다보는 샌드위치는 양상추는 이미 흔적도 없이 녹아있었다. 빵도 눅눅해져 군내가 났다. 곰팡이가 피지 않은 게 신기했다. 지민이 실수해 냉동실에 넣지 않고 냉장고에 넣었다면 이미 악취가 났을 것이다. 꽁꽁 얼어 차갑고, 아무짝에 쓸모없었다. 정국은 그대로 샌드위치를 들어 음식쓰레기통에 넣었다. 저게 음식쓰레기가 맞긴 한가, 거의 고체가 되어서 일반쓰레기가 맞을지도.

 

 찾고 있는 커피는 없었다. 수확은 없는 채로 책상으로 돌아오니 폰에 알림창이 떠 있었다. " 늦은 시간 죄송합니다만 이혼동의서에 직인을 찍어 주셔야 합니다. 그 외에 가족관계증명서 또한 첨부해 등기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 징징거리는 폰의 알림이 짜증이 났다. 그나저나 지금 시간이 밤 두신데, 이 사람도 잠을 안 자는 모양이지? 하긴 어차피 낮밤의 구분이 없이 일한다고 말하긴 했었다. 잘나가는 변호사여서 그렇겠지. 이 사람의 카톡 프사는 화목한 가정의 모습이었다. 누구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프사를 확대해서 보면 예쁘고 귀여운 딸을 중심으로 해 예쁜 아내도 인자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역시 유전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너무하네...이혼 전문 변호사면서 자기는 결혼해서 잘살기 있나. 나도 모르게 불만이 나왔다.  

 

 남의 집 딸을 보는데도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우리가 그렇게 싸워댔던 이유 중 하나였지. 아이. 나는 지민이에게 낳자고 설득했고, 지민이 형은 낳기 싫다고 했고. 난 그때 당시 낳을 수 있는 충분한 환경이 되는데도 안 낳는다고 한 형이 미웠다. 어서 아이를 낳아서 인정을 받고, 좀 더 여유로워져서 가정에 시간을 더 많이 쏟고. 그러고 싶었다. 지민이 형의 커리어는 아이를 낳고 1~2년 후에 다시 복귀시켜 주면 되니까. 육아도우미를 쓰든, 아예 유모를 붙이든 그렇게라도 할 생각이었다. 아예 몸 자체가 변해서 안 될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고.


 지금 와서 생각하면 부질없다 할지라도, 지금 생각하는 것의 이점은 분명히 있었다. 과거의 사실들을 좀 더 객관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졌는지 좀 더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관찰할 수 있다. 그것이 특히 남에게도 그렇지만, 나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그 때 당시에는 감정이 앞서 막나갔던 행실과 언행 또한 되짚어볼 수 있다. 아마 이번에도 후회할 건덕지가 잔뜩 있을 것이다.


 다시 논점을 찾으면, 지민은 아이에 대해서 절대 반대했다. 아이 자체에 대해서 싫어하지는 않았는데. 초기에는 아예 본인이 먼저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친한 친구의 경우, 벌써 아이를 낳은 집이 있었는데 그 아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린 아이가 너무 이쁘고 귀엽다고, 그 아기가 웃으면 부모 표정이 환하게 밝아진다고. 그리고 집안 분위기도 다르더라고. 사실 그 친구가 결혼후에 마음이 많이 힘들었는데 아이가 태어나면서 마음이 많이 바뀌었다고 했다. 지민이도 그렇게 이야기했다. 지금 우리가 조금 불안정한 것도, 아이를 낳으면 달라질 수도 있다고.


 그땐 그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같은 것에만 미쳐서 기뻐하기 바빴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불안정하다는 그의 말에 많은 의미가 숨어 있었다. 물론 결혼 전부터 우리 집 쪽은 반대했지만, 그래도 적나라한 반대는 아니었다. 난 그때 결혼한다는 생각에 빠져 허허로웠다. 그저 미래에 대한 기대와 기쁨에 허우적대기 바빴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그 이유에 대해 생각했어야 했다. 보통 사람이 아닌 우리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아내야 했었다. 내가 그렇게 웨딩 마치에 정신팔려 있을 때 지민이는 어머니에게 또 어떤 압박을 받았을 수도 있다. 


 또 결혼 전에 절연을 선포하신 지민의 집안 문제도 그를 괴롭게 했을 것이다. 비록 그의 아버지가 어릴 때 그를 힘들게 했을지라도, 부모는 부모라고 했다. 특히나 지민의 어머니는 지민을 우리 집안에 보내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 생각하셨을 것이다. 결혼이 조건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몸소 깨닫고 계셨으니까. 사업이 망하기 전에는 지민의 집안 또한 잘 살던 집이라고 들었다. 다만 IMF 이후에 잘 되지 않아 힘들었지만. 

안타깝게도, 지민의 어머니가 걱정하신 대로 우리의 결혼은 순탄치 않았으며, 결국 끝은 이혼으로 귀결되어 버렸다.


 나는... 과연, 지민의 눈물에 떳떳한 인간인가?


 다시금 밀려드는 가슴의 통증에 나는 그만 주저앉아버렸다.


 

  

 지민은 정국에게 사람을 붙여 못 오는 게 하는 게 좋은 일인지 망설여졌다. 하지만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정국은 보통 일찍 출근해 7시에 집을 나갔고, 퇴근은 8시 정도에 했다. 그렇게 늦은 편도 아니지만 같이 살 때는 저녁 먹으러 와야 한다고 일찍 오곤 했다. 보통 저녁 시간은 한참 지났지만 그게 최대한 당겨 온 거라고 했다. 그래서 그 때는 나도 그를 위해서 8시까지 배고픔을 미뤄놓고 있었다. 정 안 되면 간식을 먹고 버틴 적도 있었다. 그때, 한 번 아이를 가진 줄 알고 착각했던 때. 그 때도 그랬었다. 


 그때는 참, 뭘 안 먹어도 행복했는데. 지금은 돼지가 된 것처럼 이것저것 주워먹기 바쁘다. 가끔씩 간식을 먹고 나면 내가 벌써 이만큼 먹었나, 하고 놀랠 때도 있다. 스트레스 때문이겠거니 해도 마음 한구석은 불안하다. 그만큼 내가 허한가 싶어서. 


 어쨌든 그와는 끝난 사이다. 그렇게 다시 마음을 굳게 먹고 단단해지려고 노력했다. 이젠 나도 혼자인데, 이 정도는 강해져야지 싶어서.  그렇게 마음을 먹고 정국의 집에 갈 준비를 끝냈다. 차키를 챙기고 가방을 들고, 운동화를 구겨신었다. 요즘 굽 높은 신발은 불편해져서, 낮은 단화를 신거나 운동화를 신었다. 집에 오래 있다보니 잘 붓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집을 나와 차를 몰았다. 정국의 집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차로 15분이니 말다했지. 사실 걸어갈 수도 있는데 귀찮아서 그냥 차 끌고 가는거다. 또, 빠르게 튀어야 되니까.

그렇게 끌고 가다 차가 밀렸고, 그때를 틈타서 태형이에게 전화했다.

 

 " 어떻게 됐어. 정국이 잘 붙잡고 있니? "

 " 음, 지민아 그게. 조그만 문제가 생긴 거 같은데. "

 " 엥 뭐야. 설마 놓쳤어? "

 " 아니 그건 아니라, 음. 아예 우리 예상을 벗어났는데. "

 " 뭐 그럼 어떡해? 나 좀 있으면 도착하는데. " 

 " 어떡하긴. 그냥 정면돌파해. "

 " 야!!!!!!!! "

 " 비서분한테 물어보니까 어제 늦게 철야해서 오늘 월차썼대. 낙하산은 팔자 좋다. 그치. "

 " 널 믿고 왔건만, 또 나 자신을 믿어야 하는구나. "

 " 인생은 원래 혼자야~ 알아서 잘 해봐. 철야하고 왔대니까 자겠지. "

 " 어. 아주 고~맙다 고마워. 오늘 후기나 기대해라. "

 " 응~ 대기타고 있을게 잘 싸우고 와! "

 " 야 !!!!!김태형!!!!! "

 

 뚝-하고 전화가 끊겼다. 아니 이거 완전 또라이아냐? 자기가 판 깔아준대서 가놓고 망친 게 한두번이 아니다. 그리고 그걸 이제까지 믿는 내가  제일 병신이지 병신! 그냥 내가 다 병신이다! 이혼한 전 남편집에 뭐 찾으러 가는 사람이 어딨어? 진짜 무슨 택배회사도 아니고, 그거 찾으러 가는것도 웃기다. 저...제가 뭘 좀 놔두고 갔는데요, 좀 찾아도 될까요? 누가 봐도 엄청 수상해! 이게 왜 문제냐고 묻기에는 너무 한눈에 봐도 이상해! 하..이렇게 나는 전남편 집에간 사람 1호가 되는 걸까? 지금 심장이 엄청 두근거리는데, 이건 설렘이나 기대가 아니라 그냥 화가 나서 그런 거 같다. 기대는 기대지. 그렇게 또 개싸움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기대? 하, 미치겠다. 정말. 지금은 그냥 제발 그 인간이 처 자고 있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다.

 

 나는 그렇게 한숨을 쉬면서 정국의 집 앞에 도착했다. 과연 이 인간이 비밀번호를 안 바꿨을까? 제발. 진짜 틀려서 경보 울리고 그러면 난 뭐되고 마는 거다. 본전도 못 찾고 남의 집 앞에 도둑으로 몰릴 순 없어! 괜찮아, 숨을 한 번 들이키고...



 ******


 하고 많은 비밀번호 중에서 집 비밀번호는 우리 결혼기념일이었다. 160624.

너무 오랜만이어서 멈칫할 줄 알았는데, 또 막상 보니까 눌러졌다. 그래, 어떻게 잊겠어. 그걸 쉽게 잊을 순 없지. 

 띡띡띡.띡띡띡 하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아주머니는 안 계시는가? 싶어 신발장을 확인하니 여자 신발이 없었다. 조용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조심히 문을 닫았다. 닫고 나서 생각했다. 어차피 곧 나갈 건데 왜 문을 닫았을까? 소리도 나고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습관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습관을 무시하려 애썼다. 몸에 밴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거진 2년을 살았는데 그걸 잊을 순 없잖아?



 오랜만에 오는 집은, 아직까지도 내게 집인지는 의문이지만, 정말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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