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그냥 인사치레인 줄 알았어. 그런데 피닉을 합쳐서 생각해보니 엄청난 의미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게... 갑자기 떠올랐어.”


 “홍수에서 살아남는 걸 감명깊게 봤다면... 이번에도 이걸 이용하겠지?”


 나는 손에 물을 묻힌다. 물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건 캐피톨에서 나중에 카메라에 담긴 입 모양까지 분석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혹은 그저 신중을 기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내 손을 본 피타가 고개를 끄덕인다.


 “경기장에 물을 가득 담을 거야. 그럴 만한 장소는 바다 아니면 호수일거고. 그리고 그런 장소에서 먹을 걸 구하기에는 4번 구역 조공인들이 가장 유리하겠지. 다프네, 네가 피닉을 선택한 건 결과적으로는 옳았어. 동정심인지, 전략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사실은 전생의 기억 때문에 선택한 거야. 이런 말을 하면 나는 정신병동에 갑자기 감금될 테니 하지 않는다. 불쑥 궁금해진다. 판엠에도 정신병동이 있나? 있어도 근대의 그것에 비할 만큼 안 좋은 데일지도 모른다. 캐피톨의 ‘귀족’이 아니라면 무조건 그런 데에 갇히겠지. 애니 크레스타가 어떻게 멀쩡히 우승자 자격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피닉과 이야기를 더 나눠 볼려고. 내일도 이런 모임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1시 모임이 아니라 10시 반 모임이면 좋겠네.”


 피타는 동의를 표하며 수도꼭지를 잠근다. 누군가 언질을 줬으려나? 그건 알 수 없지만, 1시 참석자와 10시 반 참석자의 면면이 다른 것은 피타도 충분히 알 것이다.




 그 뒤로는 선물과 경기장의 모습에 대해 논의한다. 선물은 이견이 없다. 경기장에 있는 물은 마시면 좋지 않은 바닷물이나 독이 있는 물일 테니, 물을 공급할 수 있는 도구를 보내자고 한다.



 경기장에 대해서는 플루타르크의 조언이 많은 도움이 된다. 피타는 시계를 보고 어느 정도 유추한 것 같다. 경기장이 12개의 구역으로 나눠져 있다는 걸. 시간이 특수한 역할을 한다는 것도 알아차린 것 같지만, 각각의 구역에 무슨 함정이 있는지는 당연히 미지수이다.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한걸. 그나마 재잘어치와 피의 비, 거대한 파도, 독안개는 기억하고 있다. 그것들이 각각 몇 시에 일어나는지가 기억나지 않아서 문제지.



 이런 내용들을 암호와 암시를 통해 대화하려니 엄청 힘들다. 물을 트는 것도 한두 번이지, 자꾸 그러면 캐피톨이 의심할 거고. 우리들을 카메라가 주시하고 있으니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안 된다. 옥상은 처음부터 제외다. 거기는 특히 캐피톨이 예의주시하고 있을 테니까. 그나마 간단한 단어를 쓰는 건 타인의 입장에서 유추하기 힘드니 다행이다. 물론 카메라에 비치지 않게 살짝 적고, 카메라에 드러나게 생기면 볼펜으로 까맣게 지운다.



 6시가 조금 넘자, 엘리베이터가 움직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먼저 보이는 건 설리반이다. 피타가 인사를 하자, 그는 못마땅한 눈으로 우리를 흘겨보더니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쾅 닫는다. 피타는 해탈한 표정으로 얼마 후 도착한 캣니스에게 인사를 건넨다. 캣니스는 지친 얼굴을 하고 간신히 우리 둘에게 인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간다.


 “작년처럼 조공인들끼리 친한 척하기는 글렀는데?”


 나는 피타에게 말한다. 피타는 피식 웃는다.




 저녁 식사는 세 명이서 하게 된다. 에피는 우리에게 훈련에 대한 조언을 온전히 맡기겠다며 자기는 후원자들과 식사를 할 거라는 쪽지를 보내 온다. 설리반은 자기 방에서 주문한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는 모양이다. 멘토로서는 조공인의 생활을 잘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지만, 조공인이 그걸 거부하니 어쩔 수 없다. 저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죄책감이 마음속에서 찰랑인다. 그러나 분노와 절박함이 그것을 덮어 누른다. 일단 여기서 살아남는 게 급선무다.



 구역 간의 화합을 위해서는 구역 안에서의 화합부터 먼저 도모해야겠지만, 상황은 전과 다르다. 인터뷰 때라도 구역 간의 화합을 잠시나마 확인한 그 순간을 이끌어 낸 원작의 캣니스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곳에서는 우승자가 다시 경기장에 들어가지도 않고, 비운의 연인도 없다. 이렇게 계속 비교해봐야 소용없지. 상황은 이미 달라졌고, 나는 달라진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



 문득 저 옛날의 어느 사상가가 떠오른다. 그의 이상과 이론이 담긴 책에 매달려서, 그의 나라가 부패하는 광경을 애써 무시하다가, 나라가 정말 권력과 욕심에 지배되기 전에 온 용기를 내 연설을 하러 다닌 사람. 그의 이상이 승리했다면 좋았겠지만, 그는 결국 권력가에게 패배하고 목이 잘려 군중 앞에 전시되고 말았다.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 지금 상황에 대한 답을 애써 미루지 말고, 그것을 직면해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내자고. 경기장을 무너뜨리고, 캣니스를 무사히 경기장에서 구출하는 것. 일단 그것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오늘 체육관에서는 어땠어?”


 “네가 말했던 대로 매듭 묶기, 불 피우기 같은 생존 기술 위주로 배웠어. 무기는 도끼랑 칼을 연습했고.”


 캣니스는 대답하며 양고기스튜를 입에 가져간다.


 “이야기를 나눠 본 조공인은 없어?”


 “그다지 없지. 근데 3번 구역 남자아이가 말을 걸어서 같이 케이블을 엮는 방법을 배웠어.”


 피타와 나는 서로를 바라본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임을 눈치챈 거다. 캣니스는 우리의 반응을 보고 조금 당황한다.


 “왜 그래? 그 아이가 좀 특별한가?”


 “뭐, 경기장에서 잘 살아남을 것 같아서 그래.”


 나는 서둘러 대답한다. 캣니스가 13번 구역의 작전을 알고 경기장에 들어가는 것이 좋을까? 카메라와 마이크로 가득 차 있고, 감시를 받는 와중에? 또 13번 구역은 작전을 조공인에게 노출시키는 건 좋아하지 않겠지. 내가 고민하는 사이 피타가 말을 덧붙인다.


 “그 아이에게는 자신감 같은 게 있달까? 우리가 분석해 본 바에 따르면 그런 아이들이 으레 우승을 하거나 오래 살아남았거든.”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 아이가... 아냐. 그래도 3번 구역 아이가 얼마나 야생에 익숙하겠어. 경기장이 그런 환경이라면 말이지만.”


 캣니스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멈추고 비판적인 견해를 내놓는다.


 “너희는 내가 그 아이랑 동맹을 맺길 원해?”


 “그건 순전히 네 선택이야.”



 피타가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서 동의의 뜻을 표한다.


 “사실 내가 동맹을 맺고 싶은 아이는 따로 있거든.”


 캣니스가 망설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4번 구역 여자아이. 왠지 모르겠지만 혼자 다니고, 좀.. 지켜주고 싶은 모습이라.”


 캣니스는 무심한 척을 하지만,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녀가 벌써 4번 구역 여자아이를 마음에 들어하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아이가 13살이었던가? 갈색 머리에 파란 눈, 하늘하늘한 몸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추첨되어 나와서는 팔을 약간 벌리고 뒤꿈치를 들고 서 있었지. 마치... 마치 루처럼. 내가 애써 무시하려던 사실이다. 그 아이에게 마음이 쓰이는 것을 어린 나이와 4번 구역의 사정 탓으로 돌려 왔다. 내 표정이 좋지 않은지 캣니스가 눈치를 본다.


 “역시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지? 우승에 유리한 동맹이 아니니까.”


 “아니야. 그런 건 아니야. 그 아이도 아주 좋은 선택이지. 4번 구역이 프로 구역에서 밀려났지만, 그래도 훈련은 받았을 테니까.”


 “4번 구역이 프로 구역이 아니라고? 언제부터?”


 내가 무심코 흘린 말에 캣니스가 궁금증을 보인다. 아무리 그래도 캣니스는 이쯤은 알 자격이 있다.


 “우리 때문이래. 저번에 우리에게 처참히 당해서.”


 피타가 서둘러 말한다.


 “12번 구역 같은 구역들이 저번처럼 잘한 적이 거의 없었지.”


 캣니스가 담담하게 이야기하지만, 이렇게 미소를 지은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이번에도 그러도록 노력해야지. 어... 너에게 부담 주려는 건 전혀 아니야.”


 내가 말한다.


 “무기하고 식량이나 제때 보내줘.”


 캣니스가 장난스레 말한다. 이윽고 캣니스는 게임 운영자들의 눈초리가 기분 나빴다는 이야기를 한다. 특히 가장 높아 보이는 사람이 그랬다고. 플루타르크구나. 반란에 도움이 될지 평가하고 있었던 걸까?




 훈련 둘째날도 비슷하게 흘러간다. 설리반이 어슬렁거리며 우리 대화를 들으려는 것을 빼고. 그는 우리와 비슷한 시간에 식당에 나와 아침 식사를 하는데, 아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그를 신경 쓰지 않고 대화한다. 가끔 그에게 훈련과 다른 조공인에 대한 질문을 하기도 하는데, 대답은 거의 하지 않아도 장족의 발전이라 할 만하다.



 10시부터 18시까지, 우리는 전략에 대해 집중한다. 계속 물을 틀어 놓으면 의심을 받을 수 있으니 펜과 암호에 의존한다. 캣니스는 우리가 질문하는 것에 대해 답하는 걸 점점 힘들어하기 시작한다. 그래도 헤이미치가 지시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지시하는 것이 캣니스의 참을성을 유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3번 구역 남자아이(이름이 아라브이다)와 4번 구역 여자아이(이름이 이솔렛이다)와 그렇게 친하게 지내지는 않지만, 훈련을 같이 받거나 바로 뒷순서면 쓰던 무기를 건네주거나 하는 것 같다.



 다음 날을 걱정하는 캣니스에게, 나는 활을 쏘기 전에 연습을 먼저 해보라고 조언해준다. 작년에 써보니 활이 좀 다르다고 하면서. 설리반은 또다시 방에 처박힌다.


 “뒷순서일수록 게임 운영자들이 술에 취해 있을 거야. 그 사람들이 너를 무시하는 게 화가 나겠지만, 의외로 우리를 관찰하고 있더라.”


 플루타르크는 이번에 어떻게 할까? 기존의 방식을 유지하지 않고 원작에서처럼 집중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최고 게임 운영자에 대해 내가 받은 인상은, 그다지 술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던데. 그냥 누가 보고 있는지 신경 쓰지 말고 잘 쏘고 와.”


 내가 무심하게 말한다.


 “음... 그 사람이 작년에 술에 취해서 펀치 통을 두드리고 있었던 거 이야기했었나? 권주가에 리듬을 넣고 있었어.”


 피타가 말한다. 큰 웃음이 터진다.




  그다음날, 설리반은 숙소에 올라와 방문을 쿵 닫고 들어가 버리고, 캣니스는 숙소에 올라와 쏜살같이 방에 들어가 버린다. 훈련 점수를 위해 모인 포샤, 시나와 헤이미치는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에피와 피타는 캣니스의 이름을 부르지만 대답이 없다. 설마 게임 운영자들에게 화살을 쏜 건 아니겠지?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이따가 저녁 먹을 때 부릅시다.”


 헤이미치가 상황을 정리한다. 사람들은 애써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캐피톨에서 수급이 안 되었던 물건들, 일기예보 등등. 나는 추임새를 넣거나 웃으며 대화에 어울리지만, 도저히 집중할 수 없다. 그러다가, 세네카 크레인 이야기가 나온다.


 “세네카 크레인인가, 그 전임자 있잖아요. 어제 자살한 채로 발견되었다는데? 거실에서 목을 맸대요.”


 포샤가 말한다.


 “끔찍해라.”


 에피가 눈살을 찌푸린다.


 “세네카 크레인이 플루타르크의 전임자였나요?” 


 “그랬지. 아마 너희를 우승시킨 장본인일 거다.”


 헤이미치가 말한다. 뭔가를 암시하는 말투다. 우리를 우승시킨 대가로 대가를 치른 거라는 암시. 그걸 눈치챘는지 에피가 주제를 돌리려고 한다. 



 근데 왜 지금일까. 우리가 우승한 때와 어제 사이에는 시간이 충분히 있었지 않나?

 

 “이제 다른 주제로...”


 그러기 전에 내가 끼어든다.


 “그것에 대한 대가일까요?”


 “다프네, 그건 금지된 생각이야. 이제 다른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에피가 서둘러 말하지만 그녀의 말에 따르는 사람은 없다.


 “시간이 맞지 않아. 섣불리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지.”


 시나가 말한다. 헤이미치는 동의하지 않는 것 같지만, 어깨만 으쓱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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