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했던 애정 표현도, 어쩔 줄 모르게 만들던 스킨십도 더는 없었다. 박진혁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굴기 위해 노력했고 임도운도 그의 노력을 몰라주지 않았다. 계산을 끝내고 내려가니 미리 불러놓은 대리기사는 요청한 장소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고, 집에 도착한 박진혁은 간단한 인사 후에 제 방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일, 당연한 일인데 그 며칠 가까웠던 일들이 다 뭐라고. 혼자 들어서는 방의 느낌이 이상했다.

아니, 이게 맞아. 이게 맞는 거잖아.

솔직히 죄악감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해 보고 싶다고 들이댈 때 미리 거절을 했어야 했나. 원한 것은 박진혁이고, 그 장본인에게 미안해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가지고 놀았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원래의 그처럼 따지거나 화를 내는 일이 없어 더 그런지도 몰랐다. 시무룩한 얼굴은 어떻게든 받아 줄 수 있었지만 망연자실한 얼굴은 또 달랐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하게 받아주고 그 후의 일까지 무던하게 이야기하는 모습도..

한 번은 붙잡아야 하는 거 아냐? 그렇게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깜짝 놀란 것은 저도 모르게 한 생각이었다. 붙잡아 준다고 한들 잡혀 줄 것도 아니면서 대체 그런 생각은 왜 하는지. 애정을 받는 것이 익숙해져서는 그 자체를 즐기기라도 하는 거냐고. 임도운은 그가 느끼는 죄악감의 원천을 마주 본 기분이었다. 이럴 거면 당당하게 ‘새 출발’이나 ‘정해진 순서’ 같은 이야기는 하지 말 걸.. 그 누구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음에도, 아니,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더욱 후회스러웠다.

“아으으으. 왜 다정하게 굴어서는..”

속에서 누군가 버둥버둥 발버둥을 치는 것처럼 괴로웠다. 한 때는 그 얼굴에 고통이, 충격이 나타나길 바란 적도 있었다. 그 때, 오늘의 얼굴을 봤다면 잔인하게 웃어 넘겼을지도 몰랐다. 제 잘못 만회해 보겠다는 노력과, 끊임없는 사과를 몰랐다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비웃어주었을 일이었다.

“박진혁..”

이제는 불러 볼 일 없을 것 같은 이름을 소리 내어 불렀다.

“박진혀억..”

언제든 방문만 열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이것도 이제 끝이었다.

“박진혁.”

닫힌 문과, 그 너머에 또 닫힌 문이 있었으니 임도운의 목소리가 전해질 리 없었다. 심란해진 임도운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심란해져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는 선택을 했고 이것이 그들의 끝이었다.

 

*


꼭 뭔가 잘못한 것 같은, 좋지 않은 기분을 견딜 수 있게 해 준 유일한 사실은 우영이가 돌아온다는 사실이었다.

-엄마, 이제 세 밤 남았어요!

-두 밤 남았어요! 엄지하고 검지만 있어요. 우영이 보고 싶어요?

-엄마, 또 비행기 타요! 휘유우웅 날아가께요.

하루하루, 귀국이 다가올수록 아이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밝아졌다. 마치 잃어버렸던 생기를 쑥쑥 빨아들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임도운은 철저하게 아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하루는 방을 청소하고, 또 하루는 유치원에 가서 미리 상담을 받았다. 우영이가 쓰던 가방, 입던 옷, 보던 책. 아이가 비행기를 탔다는 소리를 듣기 전부터 모든 것이 전처럼 준비되어 있었다.

아이가 없던 사이 많은 일이 있었고, 또 큰 변화가 있을 예정이었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남아있다는 사실이 그를 안심하게 했다.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저 우영이에게는 존재감조차 희미하던 박진혁만이 사라질 뿐. 그들 사이에 있었던 짧은 추억은 아이를 키우다보면 금방 잊히게 될 일이었다. 그만큼 정신없고 신경 쓸 것이 많은 일이었으니까. 임도운은 어떻게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 왔다.

“어? 어쩐 일이야?”

우영이가 도착하는 것은 오후 세시. 느긋하게 나가볼까 준비하던 차에 박진혁이 돌아왔다.

“우영이 데리러, 같이 가기로 했었잖아.”

마주쳐도 안부 인사나 한 마디. 새벽에 출근해 밤늦게 돌아오는 것이 다시 맞는 일상이었으니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 안 잊었네.”

“그걸 어떻게 잊어. 준비 다 됐어?”

정장차림 그대로 박진혁이 물었다.

“응. 근데 너 그러고 가게? 불편하지 않아?”

“괜찮아. 항상 입고 있는 옷인데. 가자.”

에스코트하듯 박진혁이 몸을 돌렸다. 임도운은 그가 유도하는 방향을 따라 움직였다.

“내 차 가져가야 해. 카시트가 거기에 있거든.”

“알아. 그래도 운전은 내가 하게 해 줘.”

싫다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어색한 차 안을 견디고 간 보람이 있게 우영이는 약속 된 시간에 정확히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 잡고 있던 윤슬기의 손을 미련 없이 놓아버린 채, 아이가 엄마에게로 달려 나왔다.

“엄마!”

“우영아!”

와락 안아들면 아이에게서는 맡아본 적 없는 냄새가 났다. 들쩍지근하고 느끼한 외국의 냄새. 키가 조금 컸나, 아니면 체중이 줄었나. 작은 엉덩이를 받쳐 들고 걱정스럽게 살피면 엄마의 눈에는 작고 어리기만 한 아들의 얼굴이 보였다.

“잘 지냈어?”

“엄마, 보고 싶었어요.”

“엄마도. 많이 보고 싶었어.”

못 본 새 어리광이 늘었는지, 아이가 임도운의 목을 꼭 끌어안고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미 박진혁과 눈인사를 끝낸 윤슬기가 임도운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수고 많으셨어요.”

“아닙니다. 아이와 떨어져서 마음고생이 많으셨죠? 더 잘 챙겨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다 지난 일인데요.”

“엄마, 나 빨리이.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응, 알았어. 집에 가자 우리 아들.”

한 품 가득 안긴 아이가 본격적으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스무 시간이 가까운 비행시간을 견딘 것만으로도 대견한 일이었다. 먼저 차에 가 있겠다는 말에 박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윤슬기와 몇 마디 말을 더 나누더니 아이의 짐을 받아들고는 느릿하게 그들을 따라왔다.

품에서 놓아서 카시트에 앉히는 데만 해도 끊임없는 칭얼거림이 있었다. 낯선 환경,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제 마음대로 못 했던 것이 불편하고 힘들었겠지. 임도운은 타박 한 번 없이 아들의 투정을 받아주었다.

“얼른 집에 가. 응? 엄마아..”

“알았어. 이제 갈 거야.”

“그치만 우영이 졸리는데..”

“졸리면 자면 되지요 아들. 엄마가 집에 도착하면 깨워줄게.”

“우영이 하늘색 침대에서 자고 싶어.”

“아구, 그랬어? 얼른 집에 가야겠네. 아빠 오면 붕붕 운전해서 집에 가자?”

“아빠?”

게이트를 나올 때도, 안겨서 이동할 때도 줄곧 뒤에 따라오고 있었는데 때마침 운전석에 올라타는 박진혁을 보고는 아이가 굳었다. 아빠라는 존재가 자신을 데리러 온다는 것. 익숙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이도 알았다.

“엄마가 붕붕 안 해?”

“응, 아빠가 붕붕 해 준대.”

다정히 쓰다듬으면 아이가 경계의 눈빛을 했다. 제 아빠를 보는 것 같지 않은 눈에 임도운은 난감했다.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박진혁이 시동을 걸었다.

“임도운, 너도 벨트 해.”

“응.”

“출발할게.”

철컥. 뒷좌석이 안전한지 확인을 끝내면 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졸리다 했으면서, 거물거물 무거운 눈꺼풀을 하면서도 우영이는 경계의 빛을 잃지 않았다. 그러다가 고속도로에 들어서서 내부의 움직임이 안정되면 그제야 엄마에게 물었다.

“왜 엄마가 붕붕 안 해?”

“응? 아빠가 붕붕 해 준대.”

“왜?”

제 딴에는 목소리를 줄인다고 줄였는데, 속닥이는 것이 잘 되지 않아 전부 들렸다. 뭐라고 대답해줘야 하나, 또 한 번 난감해졌다.

“아빠가 해 주고 싶어서.”

들리게 하고 싶지 않는 아이의 노력을 모르는지 박진혁이 눈치 없이 대답했다. 그러면 우영이는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슬쩍 눈치나 보았다. 돌아와서도 맞게 되는 ‘낯선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이가 선택한 것은 ‘무시’였다.

“엄마, 나 배고파요.”

“정말? 비행기에서 아무것도 안 먹었어?”

“먹었어요, 달걀이랑 빵이랑 콩도 있었어. 근데 당근은 싫었는데 선생님이 먹으라구 했어. 여섯 살이면 당근도 먹어야 한 대. 진짜야?”

“그럼, 골고루 먹어야지.”

사실은 저도 당근을 좋아하진 않지만 임도운이 웃으며 말했다. 온전히 제게만 집중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 좋은지. 칭얼대던 아이가 처음으로 밝게 웃었다.

“응! 그래서 먹었어요. 주황색 골라내지 않고 냠냠 씹었어요.”

“푸흐. 잘 했어요, 내 기특이. 집에 가서 뭐 먹고 싶은 건 없었어?”

“음..”

피곤한 눈을 하고는, 고 작은 손이 야무지게 제 턱을 감쌌다. 고민할 때 하는 행동은 책 속의 삽화를 따라하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귀여운 모습에 임도운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질 못했다.

“햄버그!”

“햄버그? 집 앞 도시락 가게에서 매번 사 먹었던 거?”

“응! 그거 먹고 싶어요.”

“알았어. 집에 가는 길에 사 가자.”

슬쩍 눈빛을 보내면 미리 알아차린 박진혁이 룸미러를 통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것이 척척 이루어진다는 생각에 아이가 해맑게 웃었다. 이제야 세상 부족한 것 없어 밝고 순수한 얼굴이었다. 아들은 한참동안 최근의 관심사를 읊어대었다. 당근을 먹었다는 것 외에 혼자 씻었다는 것, 옷을 갈아입었다는 것, 숙제를 스스로 챙겨 해 보았다는 것. 전부 윤슬기가 도와주었을 일이지만 모르는 척 임도운은 맞장구를 쳐 주었다.

한바탕 제 성과를 자랑하고 나면 무겁던 눈꺼풀이 완전히 가라앉았다. 한 번 가 보았던 곳이라 그런지, 박진혁은 쉽게 도시락 집을 찾았다. 차를 세워도 아이는 깨지 않았다.

“내가 갔다 올게.”

“메뉴, 뭔지 알아?”

“어린이 정식 말하는 거지?”

임도운이 고개를 끄덕이면 박진혁이 망설임 없이 나섰다.

“저, 박진혁!”

“어, 말 해.”

“내 거랑 네 것두 사와. 같이 먹자.”

“그럴게.”

굳이 시간 내어 기억해 주었는데, 가족끼리 밥 정도는 먹어도 될 것 같았다. 자고 있는 우영이의 눈치를 보며 박진혁이 밖으로 나섰다.

눈을 다 뜨지도 못하면서, 아이는 부득불 밥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아.”

“아아.”

아기 새 같은 조막만한 입이 귀여웠다. 미국 물을 먹으면 원래 이렇게 귀여워지나. 실없는 생각에 임도운이 혼자 클클 거리다가 슬쩍 박진혁의 눈치를 봤다. 무슨 생각인지, 어린이 정식을 세 개나 사온 그는 집중해서 제 몫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햄버그 좋아하는 게 부전자전인가..

“우영아, 졸리면 자고 일어나서 먹어도 돼. 이따가 다시 데워줄게. 응?”

“우으응. 먹고 잘래요. 아.”

금방 입에 넣어준 것이 다 넘어가지도 않았는데, 아이가 한 입을 더 졸랐다. 배가 고프고 잠이 부족한 것보다 사랑이 더 고픈 모양이었다. 임도운은 작게 자른 조각을 한 번 더 잘라 입 속의 여백에 넣어주었다. 우물우물 조막만한 입술이 잘도 움직였다.

“임도운, 너도 먹어.”

“응? 응. 먹을게.”

“우으응. 엄마 나 다음엔 옥수수 주세요. 옥수수.”

“알았어. 일단 지금 입에 있는 거 다 먹고 먹자.”

우영이만으로도 정신이 없는데, 박진혁이 한마디 거들면 아이의 보챔이 심해졌다. 거의 다 먹어치운 그들의 도시락에 비해 임도운의 것은 포장을 뜯지도 못했다. 박진혁은 이미 제 몫을 다 끝낸 후였다. 아이들 먹으라고 만들어놓은 식사였으니 어른들 양에 맞을 리 없었다.

“모자라면 내 것도 먹을래?”

“아냐, 너 먹어야지. 또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을 거 아냐.”

“엄마, 엄마. 나 이제 다 먹었어요. 아. 옥수수. 아.”

짧은 문답사이로 아이가 또 다시 치고 들어왔다. 임도운은 얼른 숟가락에 콘 샐러드를 가득 담아 아들의 입에 넣어주었다. 본인 손으로 수저질을 못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평소라면 받아주지 않을 어리광도 오늘은 유별나게 예외였다. 박진혁은 군말 않고 임도운의 도시락 포장을 뜯어주었다.

“아, 고마워.”

“너도 좀 먹어.”

“우으응. 엄마, 나. 내꺼. 빨리이.”

이쯤 되면 우영이의 의도가 완전해졌다. 아이는 아빠가 엄마에게 말 거는 것이 못마땅했다. 둘 다 눈치 없는 편이 아니었으니 눈이 마주치면 임도운은 그저 난감하게 눈웃음만 지었다. 괜히 챙겨주려 들었다가 아이의 미움을 사 임도운을 더 힘들게 하는 것 같아 박진혁은 말을 아꼈다. 그는 아이를 타이를 입장도, 임도운 대신 아들을 봐줄 입장도 되지 못했다.

“다 먹었으면 들어가 봐도 돼.”

“괜찮아. 여유 있어.”

“우웅, 엄마. 나 저거.”

“알았어, 알았어.”

어리광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내내 이어졌다. 박진혁의 얼굴은 태연했다. 그들 사이에 끼어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영이는 끝까지 아빠의 존재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후아암.”

다 먹은 입 주변을 닦아주면 아이가 크게 하품했다. 그러다가 놀라듯 입을 틀어막고 아빠의 눈치를 보았다. 아무래도 잠들면 엄마를 빼앗긴다는 생각이라도 한 것 같았다.

“우영이 졸려?”

“아니, 안 졸려요.”

“하암. 엄마는 졸린데? 엄마랑 같이 낮잠 자지 않을래?”

“우..웅.. 엄마가 졸리면 어쩔 수 없고..”

“그러면 우리 치카하고 한 숨 자자?”

“응! 조아요.”

육아 경력이 몇 년인데, 임도운은 베테랑이었다. 얌전히 목에 안겨 화장실로 가는 아들을 보며 박진혁이 감탄했다. 아들이나 아버지나 참 읽기 쉬워 다행이라고, 임도운은 티나지 않게 속으로 웃었다.

“책 읽어 주세요.”

“응. 뭐 읽어줄까?”

“아기 코끼리.”

“아기 코끼리의 모험 이야기? 알았어. 누워 봐. 저 멀리 지구 반대편에, 아기 코끼리 왈라가 살았어요. 왈라는 귀가 짝짝이인 특별한 코끼리였어요.”

다행히, 박진혁은 우영이 방까지는 따라오지 않았다. 엄마를 노리는 눈앞의 적이 없어진 것에 아이는 안심한 듯 또박또박 책을 읽으면 연거푸 하품을 했다. 동화책의 시작하는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가 잠의 바다에 빠졌다.

“잘 자, 아들.”

쪽. 작은 이마에 뽀뽀하면 감겨가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저 안심하고 자면 될 텐데, 눈꺼풀이 채 뜨이지 못하게 안쓰럽게 떨렸다.

“엄마.. 나 자는 동안 어디 가면 안 돼.”

“안 가니까 코 자.”

작은 손이 엄지를 잡고, 토닥토닥 두드리면 아이가 깊은 잠에 빠졌다. 푸식푸식 숨소리는 몹시도 피곤한 사람의 것과 닮았다. 힘 빠진 손에서 엄지를 빼내고 돌아서면 언제부터였는지 박진혁이 그들을 보고 있었다.

“밥 먹어. 치워야 할 것들은 내가 다 치웠어.”

“응, 고마워.”

식탁으로 돌아가면 먹던 것 외에도 세가지, 반찬이 더 나와 있었다. 아무래도 아이들 도시락이니 부실하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너도 같이 먹어. 부족하지 않아?”

“괜찮아. 저녁에 약속 있어서 많이 먹을 거야.”

“그렇구나, 잘 먹을게.”

천천히 임도운이 식사를 시작했다. 다시 들어가 봐야 한다면서, 박진혁은 그의 맡은 편에 앉았다. 슬쩍 눈치를 보면 그가 다 먹는 것을 보고서 가겠다는 의지가 확실했다. 그에 대충 몇 입 먹고 말려던 임도운은 바로 앉아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했다.

“우영이 말이야.”

“응.”

“원래 저렇게 아기 같아?”

아빠가 아이를 대상으로 할 수 있는 질문인가, 순간적으로 떠오른 의문은 의미 없는 것이었다. 임도운은 줄곧 그러던 것처럼 난감하게 웃었다.

“아냐, 의젓해. 차에 타면 안전벨트도 스스로 채우고, 안기는 것도 안 좋아해. 자기 이제 아기 아니라고 어찌나 성화인데, 양치도 혼자 곧잘 하고.”

“그럼 오늘은..”

“피곤하고 힘드니까 그렇지. 어른도 힘든 장거리 비행을 아이가 어떻게 견디겠어.”

“그렇구나.”

박진혁의 말에는 일말의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대답할수록 임도운의 말투는 조금 날카로워졌다. 아이 교육 문제에 있어 예민하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을까. 잊고 있었던 아이에 관한 그의 무심함이 떠올랐다. 그 이후로 그는 따로 말을 걸지 않았다. 그저 임도운이 양껏 먹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임도운이 수저를 내려놓고서야 어색한 대치가 끝이 났다. 만류에도 불구하고 박진혁은 손수 먹은 자리를 전부 치워주었다.

“고맙다. 이렇게까지는 안 해도 되는데..”

“해 주고 싶었어. 우영이한테도 너한테도 도움 되는 게 없는 것 같아서.”

“무슨, 운전 해 줬잖아.”

아무리 무심했을지라도 변하고 싶다고, 우영이에게 좋은 아빠로 남고 싶다고 했던 소리가 그제야 퍼뜩 떠올랐다. 임도운은 저도 모르게 민망해졌다.

“쉬어. 나 다시 회사 가 볼게.”

“어... 응.”

미련 없이 돌아서는 뒷모습에 말 한마디가 목구멍에 턱 막혔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막상 내뱉으려고 보니 그게 뭔지 몰랐다.

“저.. 박진혁.”

“어, 왜.”

“아니, 어. 집, 집은 금방 비울게. 내가 자꾸 눈앞에 있으면 너도 안 좋을 거 아냐.”

상기시키듯 임도운의 말은 잔인했다. 박진혁은 올라가지 않는 입 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다만 상처 받은 듯 눈은 마주치질 못했다.

“그래, 편할 대로 해.”

말 해놓고도 헉하고 속으로 놀랐다. 힘없는 어깨가 뒤를 돌았다. 임도운은 그를 두 번 불러 세우지 못했다.

 

 

우영이는 활기찼다. 꼭 원정 나갔다 돌아온 선수처럼 제게 익숙한 모든 것을 여유 있게 즐겼다. 열두 시간 이상을 쉬고 나니 예민하게 굴던 것도 본래의 의젓함을 되찾았다. 아이는 알려주기도 전에 제 가방을 싸고, 유치원 버스가 오는 시간에 맞춰 먼저 엄마의 손을 이끌었다. 이 활기가 며칠 가지 못하고 본래대로 돌아올 것은 알지만 임도운은 지금 이 순간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곧 나갈 집, 청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박진혁에게 말했던 대로 새로 살 집을 구하는 것이었다. 주이열에게 주거 자금으로 융통 가능한 금액을 통보 받은 뒤, 임도운은 열심히 매물을 찾아다녔다.

잠깐 머물 곳이라도 우영이 유치원 문제가 있었으니 살던 동네를 벗어날 순 없었다. 추천받은 공인중개사는 아침부터 열심히 집을 보여 주었다. 마음에 드는 곳은 비워지는 날짜가 너무 늦고, 위치가 좋으면 예산을 쉽게 초과했다. 애초 언제 미국으로 가버릴지도 모르는데, 집을 사려니 망설여지고, 전세로 가는 것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호기롭게 나서서 하루 종일을 돌아다녔지만 우영이가 돌아올 때에는 녹록치 않은 현실감각만을 가지고 돌아왔다.

“엄마! 오늘 유치원에서 친구들이 선물 줬어요.”

작은 손바닥 위에 알록달록한 포장의 사탕과 초콜릿이 가득. 아이가 활짝 웃으면 임도운도 웃으며 화답했다.

“와, 우리 우영이 인기가 많구나. 그건 밥 먹고 먹어야하니까 엄마한테 맡겨놔.”

아이는 워낙 단 것을 좋아해서 충치가 잘 생겼다. 평소라면 싫다고 고집을 부렸을 우영이가 기분이 아주 좋은지 순순히 받은 것을 넘겼다. 모르긴 몰라도 반 정도는 이미 먹었을 것이라고 임도운이 추측했다.

“미국에서 배웠던 노래도 불렀어요! 영어 노래 시간에 선생님이 하라고 했는데, 우영이가 아는 노래 선생님도 알고 있었어.”

“와, 대단한데? 엄마도 한 번 들어볼까?”

겨드랑이 아래를 간질이면 아이가 까륵,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혀 짧은 발음으로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임도운은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다. 무릎에 앉혀서는 건성건성 박자를 맞춰주면 미처 몰아내지 못한 현실감각이 떠올랐다.

금방 나가주기로 했는데.. 마음에 드는 매물을 못 찾으면 어쩌지. 잠깐일지라도 본가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데.. 아예 박진혁 말대로 여기 눌러 살고 있다가 바로 나갈까..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금방 마음이 약해졌다. 임도운은 저도 몰래 화들짝 놀랐다. 미쳤지. 그건 아니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허탈한 그 얼굴이 떠오르면 절대 해선 안 되는 생각이라도 한 것 같았다.

“엄마?”

움찔거림이 꽤 컸으니, 우영이도 충분히 느꼈다. 아이가 그를 궁금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응, 미안. 미안해. 우리 우영이 노래 잘한다!”

“그치? 친구들도 나 잘한다고 그랬어! 설희가 그래서 나한테 초콜릿 줬어요. 노래 알려달라고 했어요.”

“좋았겠네, 우리 우영이.”

“응! 좋아!”

당장 넘어야 할 산은 여기도 있었다. 갑작스러운 이사를 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래도 아빠의 존재를 많이 어색해하는 것 같으면 그들의 분가를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있었다. 마침 오늘 기분도 좋은 것 같고. 임도운은 재잘거리는 아들의 말에 맞장구 쳐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할 타이밍을 노렸다.

“음.. 우영아.”

“네?”

어설픈 존댓말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보는 아이는 이럴 때보면 박진혁을 참 많이 닮았다. 임도운이 사랑해마지않는 아들과 너무도 닮았으니 어쩌면 그를 온전히 미워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려면 지금 아이에게 해야 하는 말은 슬프고, 잔인한 것이었다.

“우리 이사를 가야 할 것 같아.”

“이사?”

“응, 우영이랑 엄마랑 다른 집으로 가야 해.”

“왜?”

순진한 얼굴에 불안이 스쳤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변화를 거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최근의 경험이 많이 힘들었던 탓이겠지. 마음이 아파왔다.

“음.. 엄마하고 아빠하고 따로 살기로 했어.”

“왜?”

“엄마하고 아빠는 서로 사랑하지 않아서 같이 살 수가 없어.”

아무리 세상을 모르는 아이라도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임도운의 말에 아이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이내 조그만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이해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왜 안 사랑해?”

아이의 편견 없는 질문이야말로 핵심이었다. 부부인데 왜 사랑하지 않아. 그렇다면 여태껏 살아온 것은 다 뭐였어. 질문하게 된 이유 같은 건 마음 속 자신이 덧붙여 설명했다. 뭐라고 해야 아이가 상처를 덜 받을까. 엄마, 아빠는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았어? 아니면 본래는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그러지 못할 일이 생겼어? 어느 쪽도 아이가 받아들이기에 좋은 대답은 아니었다.

“유치원에서.. 결혼은 사랑해서 하는 거라고 배웠는데.”

아이의 얼굴이 심상치 않아졌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흐려지다가 결국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이 눈물샘을 터트리는 한 마디는 쉬웠다.

“우영아, 울지 말고 들어 봐.”

후드득, 제 눈동자보다 더 큰 눈물방울이 볼 위로 떨어졌다. 임도운은 얼른 아들을 끌어안았지만 때는 늦었다.

“으흐... 으으으..”

“우영아. 그런 게 아니야.”

“으.. 시러어. 시러! 이사 가기 시러! 안 가! 아빠 없는 건 더 시러! 으아앙!”

아이는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아빠의 존재를 어색해 했으니 설명도 쉽겠지, 헤어지는 것 아무것도 아니겠지, 어른의 기준으로 짐작한 것들은 하나도 의미가 없었다. 존재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걸 간과한 것이 본인이라니, 믿기질 않았다. 임도운은 멍청한 자신을 탓하며 아이의 등을 두드렸다.

“아빠 없어지는 거 아니야. 그냥 따로 사는 거야. 우영이가 아빠 보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어. 응?”

“응, 으흥. 왜애, 왜 그래야 하는데.. 같이 살면 되잖아, 응? 지금처럼 같이 살면 되잖아아..”

“그게 아니라 우영아..”

아이가 들썩이면 안고 있는 품도 들썩였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질러 버린 걸까. 그간의 일들을 제대로 설명할 능력도 없으면서 저질러 버린 것을, 단순한 아이의 행동만 보고 판단 착오한 것을, 울음이 서러워질수록 후회스러웠다.

“엄마아, 나 싫어. 응? 싫어어헝. 끅, 다들 아빠 있잖아. 가족은 같이 사는 거랬어. 우영이만 아빠 없는 거 시러.”

“아빠 없는 게 아니야, 그냥 아빠하고 우리하구 떨어져서 사는 거야.”

“그러니까 왜애, 아빠랑 따로 사는 거 싫단 말이야!”

임도운이 정정하지 않으니 아이는 더욱 안달이 났다. 목을 끌어안고 방방 뛰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임도운은 속이 상해서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힘에 달리지도 않는데, 아이의 움직임에 따라 몸이 아무렇게나 흔들렸다.

“우영아, 아빠는 항상 집에 없었잖아. 이런 건 가족이..”

아니라고 말 하려다가 멈칫했다. 정말로 우리가 가족이 아니었나. 박진혁이 가장 힘이 들 때, 건넸던 진심어린 위로 한마디, 제게 애정을 갖게 된 계기라던 위로가 정말로 그저 했던 말이었나. 자괴감이 들었다. 하던 말을 멈추고 멍하니 있으면 아이의 설움이 짙어졌다. 엄마의 입에서 나온 믿을 수 없는 사실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잘못해서 혼나는 것이라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아이는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지 않았을 일이었다. 결국엔 임도운이 졌다.

“알았어. 엄마가 잘못했어. 우영아, 응? 그만 울어.”

그만 울라는 말은 신호탄이었다. 줄어들던 울음소리가 폭발하듯 커졌다. 꺼이꺼이 목 놓아 울기까지 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말하지 않았다. 아니, 이럴 줄 알고서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임도운은 난감해졌다.

“그럼, 흡! 우리, 흡! 아빠랑, 따로 사는 거, 끕! 아니지?”

한참을 등을 두드리면 경기하듯 딸꾹질을 하며 되묻는 이야기가 돌아왔다.

“그래, 엄마가 잘 못 말했어. 미안해.”

아이는, 제 집에 돌아와 유독 기분이 좋았던 아이는 반시간을 울고, 항복의 말을 받고서야 겨우 울음을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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