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저지르는거다.



조신한 신부감






뜨거운 공기가 식어감에 따라 가쁜 신음도 잦아들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입을 열지 않고 조용한 가운데, 먼저 움직인 건 만춘이었다. 사물의 목덜미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고 무너진듯 겹쳐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젖은 살덩이가 몸을 빠져나가는 질척하고 노골적인 소리와 함께 사물이 몸을 퍼뜩 떨면서 눈을 떴다. 



".........."



중간에 기억이 없어, 정신이 든 눈 앞에 보이는 천정이 무섭게도 낯설었다. 아직 식지 않은 액체같은 것이 다리사이에서 주르륵 흐르는 생경한 느낌에 몸을 일으키자, 만춘이 이불을 끌어와 몸을 감싸주었다.



"잠깐만."



대충 제옷을 걸치더니, 아직 불씨가 살아있는 화로에 놓아둔 주전자를 집어서 창가에 놓아둔 대야로 가져다 부었다. 그리고 손을 넣어보더니, 수건과 함께 들고 사물에게 돌아왔다. 



"괜찮습니다."



수건을 따뜻한 물에 적시고 사물의 팔을 잡자, 그는 제 손을 빼내며 고개를 저었다. 만춘은 그런 그를 보다가 잠자코 그 수건을 건내주었다. 얼굴을 닦은 사물이 이불을 내리자 울혈자국으로 가득한 몸이 드러났다. 



"도와줄까?"


"아닙니다. 혼자 할 수 있어요"



조심히 권해보았지만 나직히 거절했다. 만춘은 더 권하지 않고 그저 곁에 앉아 바라보았다. 제쪽에서 등돌린 아이가 천천히 몸의 상처를 닦아냈다. 비릿한 냄새와 함께 뚝뚝 떨어질만큼 젖어버린 잠자리와 몸에 끈끈하게 엉겨붙은 체액을 보고 흠칫했지만 그 이상의 동요는 없었다. 제법 많은 양의 생피가 묻어나오는 수건이 처음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사물."


".....네."



"너....."



"전 정말 괜찮습니다."




아까 밀어내다시피 떨어뜨렸던 상의를 주워 주자, 옷을 받아들더니 몸에 걸친다. 다른 옷도 주우려 몸을 일으키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만춘이 어깨를 잡자 사물은 흠칫 몸을 떨었다.




"나는..."


"아무말씀 마세요."



머리가 맑아졌습니다. 덕분에. 사물은 지금까지 중 가장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만춘은 말없이 손을 떼고 그런 아이를 바라보았다. 등불아래 드러난 사물의 표정은 거울처럼 맑고 무표정했다. 어떤 혼란도 불안감도 읽히지 않았다. . 



"늘 열에 시달렸습니다."



모두를 불태우던 악몽은 결국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공포와 분노의 열이었을 거다. 기억 대부분이 뜨문뜨문 사라졌지만, 꿈과 현실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던 환청이 꺼지던 순간은 똑똑히 기억했다. 사물은 바닥에 떨어져있던 단검을 주워들었다. 만춘의 마음속에는 죄책감이 생겨났으나, 사물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 불이 꺼진 기분입니다."



몸을 섞어 상대에 예민해진 만춘은 비로소 아이의 진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달콤하고 우아한 향기. 

온화하다. 맑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섞이지 않고 한결같다. 

향인의 향기는 그 사람 자체를 나타낸다. 


이게 아마 이 아이의 진짜 본성이리라. 



"성주"


"그래."



부름에 답하려 고개를 들자, 사물의 단검이 어느새 만춘의 목에 닿았다.



"......"



아까와 달리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신속한 동작이었다. 만춘은 조용히 그런 아이의 얼굴을 응시했다. 




"누굴 따르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하셨습니다."


"...그래."


"그럼 그냥 대막리지를 따르시면 되지 않습니까?"



"........"



"합하는 능력에 있어서 공정한 분입니다. 절대 성주를, 안시성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분인데, 왜 그분을 따르지 않는겁니까?"


당신의 뛰어난 능력과 성품을, 고구려와 안시성을 지키는 충심을 분명 알아줄텐데. 

그럼 당신은 더이상 위협받지 않을 텐데, 나는 당신을 죽이려 하지 않아도 될 텐데. 


당신을 살릴수 있을 텐데.


당신을, 살리고 싶은데.




"사물."



"......"



만춘은 잔뜩 울어 붉어진 사물의 눈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이미 많은 상처를 달고 제곁으로 보내진 아이다. 어른들의 싸움에 휘말려 고통스런 이 아이를 보듬고 지켜줘야되는데, 자신은 오히려 그런 아이를 탐냈다. 탐내고 욕심내다 그 마음이 터져 기어이 아이를 품고 말았다.


이 아이가 원하는 말 그 한마디도 해주지 않을거면서.




"나는 고구려를 위해서만 충성하고 이 성을 지킬거다. 그게 내가 이 나라의 장수이자 이 성의 성주로써의 본분이고 내게 주어진 소명인 것이다."


연개소문이 고구려를 생각하는 정치가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판단과 생각을 우선시해서 자신의 본분을 잊었다. 만춘의 말에 사물이 물었다. 무엇이 그의 본분이란 말입니까.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하는 지도자의 본분."


"............"



"나는 그런 대단한 정치계산 같은 걸 하고싶지 않다. 나는 먼저 나의 본분을 다할뿐이야"



성민들을 지키고, 안시성을 지키고, 성을 지켜냄으로써 고구려를 지키는 것. 그것이 내 소명이다. 그 이상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어. 



"............성주..."



목에 댄 칼에서 힘이 조금씩 빠지는게 느껴졌다. 사물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차오르는게 보이자 만춘은 그의 얼굴에 손을 대려던 참이었다.




"성주!! 큰일났습니다!이세민이!!"



벌컥 문이 열리며, 추수지가 들이닥쳤다. 문을 부술듯 열고 들어온 추수지는 뜻밖에 단검을 목에 댄 사물의 모습을 보고 사자후를 터트렸다.



"뭐하는거야!!!!!"



수백의 당군을 꿰뚫었던 창이 사물을 향해 날카롭게 찔러들었으나, 간발의 차로 만춘이 뛰어들었다.



"성주! 이건 그냥 넘어갈수 없습니다!!"



"이세민이 먼저다!"


성난 사자같은 호통이 만춘의 단호한 목소리에 막혔다. 추수지가 이를 뿌득 갈며 만춘을 쏘아보았으나, 등뒤로 열린 문밖에선 이미 요란한 나팔소리와 군사들의 고함으로 시끄러웠다. 밤하늘에 어지럽게 빛을 수놓으며 날아오르는건 수많은 불화살이었다. 그걸 뒤늦게 깨달은 사물마저 습격입니다! 하고 외쳤다. 



"젠장!! 빨리 가셔야합니다!!"


서둘러 뛰어나가는 추수지의 뒷모습을 본 만춘이 시선을 돌렸다.



"성주!"


이미 기습에 대한 태세로 완전히 전환된 사물의 날카로운 외침에 만춘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나갈테니 내 뒤를 따르거라!"



"네!!"


 

제 무장을 챙기러 뛰어나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만춘은 제 검과 갑주를 챙겼다. 사물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한게 마음이 걸렸으나, 일단 기습을 막는게 우선이라 생각하며 처소를 나섰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그걸 후회했다. 


창을 맞고 쓰러지며 이젠 끝이라 여겼을 때, 떠오른건 사물의 얼굴이었다.


거창한 본분따위 이야기하지말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것을.


갑자기 어느날 날아든 네가 마음에 박혔다고 

네가 나때문에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 줄 알면서도 널 욕심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


"어서 먹어 오빠."


백하가 상을 들여왔다. 3일만에 정신을 차린 오라비의 식사가 어지간히 반가운 모양이었다. 전쟁통인데 때아닌 쌀밥에 고기반찬까지 있는게 성주님이 아프다고 다들 엄청 신경쓰는게 역력했다. 만춘은 이불을 걷더니 난처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다 뭐냐. 지금은 전시인데. 이 귀한 쌀이 얼마나 아까운데..."


"오빠가 혼잣몸인줄 아나. 할만하니까 했지. 빨리 일어나야 다들 안심을 할거 아냐. 먹어야 힘을 쓴다잖어"


활보의 입버릇이 고스란히 옮아온듯 수저를 놓아주며 백하가 잔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만춘은 백하 몰래 더운 한숨을 쉬었다. 먹지 않으면 안갈 기세다. 만춘은 고민하다가 문가에 서있는 사물에게 시선이 닿았다.


"어 그래 사물 너도 이리오너라"


"네?"


그러자 전혀 제가 불릴 줄 몰랐던 사물은 깜짝 놀랬다. 백하가 돌아보자 만춘이 손까지 흔들며 곁으로 오라고 부른다.



"혼자 먹으면 무슨 맛이야. 이왕 차린거 같이 먹자."


"성주 혼자 드시는 식사에 제가 어찌 끼어듭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 오빠. 사물이도 부담스럽지~"


"아니다. 둘이 긴히 할말도 있고...나도 도움받은게 있으니 감사를 표해야지."


저만 보면서 집요하게 권하니 사물은 할 수 없이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러자 백하가 알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둘이 할말이 있다니 같이 먹어. 사물. 성주가 잘 드시는지 꼭 확인해  꼭!!"


"아..네."



백하가 빠르게 일어나 방밖으로 나가자, 그녀의 성격대로 문이 요란하게 닫혔다. 

만춘이 그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여튼 방정맞기는..."


"기쁘셔서 그럴겁니다."


3일내내 성주 곁에서 간호하셨습니다. 이리 일어나시니 당연히 기쁘시지요. 사물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방울소리같은 백하의 목소리가 떠나고 적막한 방안에서 낮고 간결한 바람같은 사물의 목소리는 듣기가 편안했다. 허나 아이는 상곁으로 다가앉긴 했지만 만춘에게 닿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워했다. 그가 저를 편히 보지 못하는걸 아니 만춘 역시 신경쓰일 수 밖에 없다. 


"너도 들거라."


수저를 건내자, 사물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고 성주부터 뜨세요.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가까이 다가온 사물의 온유향에서는 정말 우아하고 차분한 향이 풍겼다. 신경쓰지 않으면 맡을수도 없을만큼 은근하지만 알싸한 단약냄새에 감춰진 달콤한 기리향이 있는게 점점 분명하게 느껴졌다. 안시성 내에 이 아이앞에서 이런 불편함을 느끼는건 나 뿐이겠지. 


"하..."


"왜그러십니까."


한수저 밥을 넣으려다말고 한숨을 쉬던 만춘은 제 손만 보고있던 사물에게 밥그릇을 민다.



"역시 나는 못먹겠구나. 너무 졸려서..."


3일이나 누워있던 몸은 아직도 고통과 피로를 호소했다. 정말 오랫만에 호되게 앓았는지 입맛까지 껄끄러웠다. 졸음을 핑계대며 만춘은 상 뒤로 물러나 수저를 사물 앞으로 놓아주었다.


"성주- "


"아무일도 안하고 3일이나 잤는데 배고플게 다 무에냐. 아직 많이 커야되는 너나 많이 먹어라."


손을 휘저으며 아이에게 권유했지만 제말에 제가 찔리고 말았다. 아 그래. 근데 나는 아직 많이 커야되는 애를 건드렸지. 하- 만춘은 속과 더불어 마음도 불편해졌다. 하지만 제속이 어떻건 이 밥상은 빈 그릇으로 나가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성주의 안위에 이목이 집중된 주변인들 모두에게 걱정을 끼치게 될거다. 사물을 제 손에 쥐인 수저를 보더니 만춘의 안색을 읽었다.


"그럼 잠깐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응?"


"잠깐이면 됩니다."


사물을 밥상을 들더니 방밖으로 나섰다. 만춘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대로 그냥 침상에 몸을 눕혔다.


"흐으...."


아직도 어깨가 쿡쿡 쑤셔왔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피곤하고 머리는 깨질듯이 아팠다. 3일을 잤다지만 하나도 잔거 같지 않았다.  만춘은 눈을 감고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정말 딱 죽는구나 싶었는데 아직도 살아있다. 하지만 눈을 뜨니 다시 산지옥이다. 

물러가지 않은 당나라 군사들. 포기하지 않을 이세민, 저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연개소문. 


이젠 속까지 울렁거리는 기분이다. 



"성주- 일어나보세요."


"으응?"


정말 잠깐 눈붙이고 있었나 싶었는데 사물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팔을 건드리는 작은 손이 조심스러웠다. 만춘이 눈을 뜨자 사물이 옆에 두었던 상을 만춘 앞으로 끌어당겨왔다.


"이게 뭐냐?"


"차죽입니다."



반찬은 없고 죽그릇 두개만 놓여 있었다. 만춘은 그릇을 들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아주 좋은 향기구나."


"청차입니다. 그리 좋은 건 아닙니다만..제가 가지고 있던 겁니다."


사물은 수저를 다시 만춘쪽으로 밀어 주었다. 만춘은 그릇을 내려놓고 말했다.


"평양성 귀족들 음식이구나."


"....."


만춘은 전시 상황일때는 항상 일반병사들과 똑같은 음식을 먹었다. 지금도 훈련소에 있는 배식소에서 삼시세끼를 먹는다. 생사고락은 다른 이들과 똑같이, 지휘자에 대한 예우 같은건 나약한 짓이다. 그는 그게 옳다고 믿었다. 그래서 쌀밥과 고기를 가져온 백하의 성의도 달갑지 않았었고. 사물은 그런 만춘을 보더니 제몫의 수저를 집었다.



"그렇게 생각하실수도 있겠네요."


"....."


"귀족의 음식은 맞지요. 이건 저희 어머니가 직접 만드시던 음식이니까요."


"어머니?"


사물을 죽을 떠서 입안으로 넣었다. 

휘저어진 죽안에서는 향긋한 차향기가 더 진하게 올라왔다.


"저희 어머니는 음식을 할줄 모르셨지만, 이건 항상 손수 만드셨어요."


아버지가 전장에서 돌아오셨을 때. 사물을 나직히 말을 이었다.


"자고 있던 저를 깨워 데리고는 아버지께 가셨죠. 제가 차죽을 먹고싶어한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먹는 김에 아버지께 같이 드시라고 하셨었어요. 그땐 너무 어려서 어머니가 왜 그러시는지, 왜 그런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뛰어난 장수였던 아버지는 늘 변방의 전쟁터에 종군하느라 집에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사물은 이제 아버지의 얼굴도 목소리도, 어머니에 대한 추억도 희미하다. 하지만 이 차죽의 맛은 기억했다. 

사물은 고개를 들고 만춘에게 다시 놓아버렸던 수저를 쥐어준다.


"이럴 때를 위한 음식이었나봅니다. 문득 기억이 났어요."


"......"




차분하고 조용한 공기속에 사물이 이따금씩 뜨는 수저소리만 났다. 

왠지 모르게 등줄기가 불편해졌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드는걸 느꼈다.  



"제가 먹고싶어서 한 김에 같이 드신다고 생각하세요."



사물의 말에 만춘은 그의 얼굴을 보다가 수저를 들고 죽을 떠 입안에 넣었다.



"....."



"드실만하십니까?"



"...그래."



입안에서 도는 따뜻한 밥알과 차맛에 목구멍을 넘어가자, 비로소 속이 편안해졌다. 만춘이 밥술을 뜨기 시작하는 것을 지켜보던 사물이 다시 저도 죽을 입에 넣었다.


"진나라 위제때 차죽을 파는 할머니가 있었다고 합니다."


"차죽을 파는 할머니?"


"네. 그녀는 퍼내도 줄지 않는 차죽을 나누어 굶주리고 아픈 백성들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시기한 사람들이 신고하여 감옥에 그 할머니를 가두었는데, 그녀는 다음날 차죽을 들고 하늘로 승천했다 합니다."


"보살이라도 되었나보구나."


작은 죽 한그릇이 만춘의 몸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점점 두통이 가시고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가 차죽을 먹을때마다 해주시던 이야기입니다."


"...그랬구나..."


지금껏 지켜봐왔던 사물의 모습 중 가장 말이 길었던 순간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만춘은 어느새 죽한그릇을 비웠다. 

좋은 차 한잔을 제대로 마신 것 처럼 맑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고맙다."


기분이 나아졌다. 만춘은 솔직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왠지 사물을 대하는것도 편해진 느낌이었다. 

사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근데 너야말로 왜이리 깨작깨작이냐. 조금이라도 많이먹지 않고.."


자신과 달리 죽이 반정도 남은 사물의 그릇을 본 만춘은 무심결에 그의 팔을 잡았다.



"성주-"


".....어?"


깜짝 놀라 팔을 뿌리치는 아이때문에 놓쳐버렸지만, 만춘은 다시 손을 뻗어 어깨를 쥐었다.


"너...."


"놔주십시오"


단순히 만춘이 두려워서 하는 행동이라기엔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죽을뻔했다가 일어났어도 아이의 몸에서 신열이 난다는 정도는 알수 있었다. 만춘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너..어디 아픈게냐?"


"아닙니다...이거 놔주세요."


아픕니다. 사물이 인상을 쓰자 천천히 손아귀에서 힘이 빠지며 어깨를 놓아주긴 했지만, 만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동안 뭘한게야. 어디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지."


"...그런게 아닙니다. 성내에 지금 부상자 천지고, 성주는 돌아가실 뻔했는데 이런 건 별거 아닙니다."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제서야 안색도 썩 좋지 않다는게 보였다.


"그래도 열이 나는건 좋은게 아닌데, 어딜 다친거냐."


백하에게 말해서 약이라도...하며 누군가를 부를듯한 만춘의 행동에 사물이 황급히 말했다.



"제가...처음이라서..!"


"뭐?"


그토록 차분하던 아이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괜찮긴 한데...전혀 아무렇지 않은 건...아니...라서..."


"아..."




만춘은 돌아보다가 아....하고 불연듯 깨달은 얼굴을 했다.



"그랬...구나..."


그를 안았을때 이미 깨달았던 거였는데, 너무 무심했다. 처음인 아이를 함부로 몰아붙였던게 바로 본인이었다. 만춘은 가라앉았던 마음이 죄책감과 미안함이 뒤섞였다.



"별건 아닙니다."



너무나 급작스럽게 이뤄졌던 정사였다. 감정적 흥분이 지나쳤던 상태로 그와 처음 몸을 섞었고, 그대로 기습 때문에 전투에 뛰쳐나갔다. 그뒤로 3일간 만춘이 깨어나지 못했을땐 걱정때문에 제 심신을 돌볼 여유따위 없었다. 모두와 함께 그의 곁을 밤잠을 설치며 지켰다. 

하지만 그렇다해서 아프지 않은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아래에서부터 욱신거리는 통증이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을 퍼져나갔고, 식은 땀이 날정도로 복통이 일었다. 오래 참으니 이젠 신열마저 났다. 그래도 어디 이야기 할수도 티낼 수도 없으니 그저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제대로 쉬지도 않았겠구나..."


"모두 똑같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반쯤 고개숙이고 차분히 대답하는 아이는 전과 분위기가 달라졌다. 딱 뭐라 말하긴 어렵지만 불안감이 지워졌다는 건 알수 있었다. 


"이건 치우겠습니다."


"사물."


상을 걷으려는사물이 만춘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네."

"내가 그때..."


뭐라 말을 이으려는 순간, 에헴- 하고 상당히 작위적인 헛기침 소리가 났다.


".....추수지냐"


"네. 성주."


문가에서 엄청나게 못마땅한 표정의 추수지가 묘한 얼굴로 둘을 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본 만춘은 올게 왔다는 표정으로 사물을 놓아주었다.


"이것만 치우고 가서 자거라. 제대로 못잤을텐데..."


"....네. 두분 말씀 나누세요."





사물이 상을 가지고 나가자, 추수지는 문을 닫더니 빠른 걸음으로 만춘의 곁으로 다가왔다. 


"성주. 미쳤어요? 돌았죠? 죽고싶죠?"


"나 안미쳤고 안돌았고, 죽을뻔했는데. 결론만 말해주겠나"


"아니 제가 얼마나 기가 막혔는줄 아세요?"


사물이 칼을 만춘의 목에 칼을 대고 있는 장면을 보고 들어왔을때 사물을 죽여버리겠다고 화를 냈으나, 차근차근 머릿속으로 아까 본 장면을 복기하면서 추수지는 사물대신 만춘을 죽이고 싶어졌다. 자기도 나이 먹을만큼 먹었고 혼인하여 자식도 여럿인 어른인데 그 미묘한 광경을 해석하지 못할 리 만무했다. 

딱봐도 금방 정사가 끝나 엉망이 된 잠자리, 비릿한 밤꽃 냄새, 제대로 옷을 입지 못한 사물의 몸에는 누가 물어뜯어놓은 것 같은 울혈이 가득했다. 관뚜껑을 덮기 직전까지 절대 다시 보고 싶지 않을 광경이었다. 


"불쌍하다매요.잘해줘야된다매요."


"그런데 뭐. 왜."


"근데 애를 덮쳐요? 첫사랑이 이루어졌으면 저만한 애가 있다면서요!? 그런 새파란 어린애를 건드리면 어쩝니까?"


".........."


추수지의 노골적인 말에 만춘은 대답이 없었다. 가슴을 두드리며 소리를 치던 추수지가 갑자기 뭔가 깨달은듯 목소리를 낮췄다.


"설마......."

"설마 뭐냐"

"억지로 하신거에요? 강제로?"


"뭐라고?"


만춘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추수지를 쳐다보았으나, 추수지는 안광이 흉흉해졌다.



"상하관계의 강제성으로 겁탈이나 추행을 하면 군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하신 분이 성주라고요!! 죄질에 따라서 목을 치겠다고 하신 분이 어떻게 이러실수가 있어요?! 그것도 태학도를?"


"아아앗 진짜!! 아니라고!! 아니라니까!!"


3일을 기절해있다가 소리를 지르니 머리가 핑 돈다. 만춘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런거 아니다. 아니니까 제발 조용히 해라. 골 울려."

"헐......"


아까 나가던 사물의 표정은잔물결 하나 없이 고요했는데, 만춘은 보아하니 거의 태풍 수준의 풍랑이 친다. 이건 또 무슨 두서없는 상황전개야. 


"....그래서 합의에 의한 관계다?"


".......그런걸로 하자...제발..."


부상의 후유증이라기엔 묘하게 기가 죽었달까 풀이 죽었달까. 

성질을 버럭버럭 내던 것도 절로 식는다. 추수지는 머릴 감싸쥔 성주를 보며 혀를 찼다.


"이 전시 상황에 참...."

"그냥 좀 모른척 하면 안되겠어?"


아 그럼 그렇게 끙끙대고 주저앉아있지말고 멀쩡한 척이라도 하던가. 

추수지가 말없이 그를 욕할때 만춘이 고개를 들더니 물었다.



"혹시 또 아는 사람있나?"


"없어요. 없어. 없을거임."


이와중에 사물님도 대단하지. 사실 성주 부상당했다고 들쳐업고 처소로 돌아와서 문 열 때 아차싶었는데, 그와중에 자리를 다 정리하고 나오셨더라고요. 아까 그 광경을 다른 사람들이 봤어봐.어휴. 추수지는 순간 쫄깃해졌던 제 간을 쭉쭉 피면서 죽을뻔한 성주를 도로 성밖으로 갖다 버리고 싶어졌었다. 


"3일 내내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셨는데 전혀 티나지 않으셨어요."


"....그래."


"이게 뭐에요 진짜."


분명 사물이 성주에게 칼을 겨누는걸 봤고 만춘도 인정한 부분이었는데, 그꼴을 봤으니 추수지는 애매해졌다.  더군다나 기습에서 쓰러진 성주를 온몸으로 지키는 모습을 봤으니 더더욱 애매해졌다. 그가 성주의 목숨을 노렸다고 입이 찢어져도 말할수 없게 되었다. 


"사물님은 마음을 정하신거에요?"


"글쎄다..."


그가 날 죽일지 살릴지 아직 모르겠다. 만춘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성주는 마음을 정하신겁니까?"



"글쎄......"



내 마음. 정할 수나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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