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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나타가 부상으로 배구를 그만 둔 설정입니다



36.5




누나는 오늘 첫사랑과 결혼한다. 변변찮은 연애가 아닌 첫번째 사랑의 상대와. 그래서인지 누나는 행복해보였다. 아마도 오늘이 누나와 같은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마지막 날일 것이었다. 그럼에도 신부는 아쉬움 없이 웃고 있었다. 다정다감하고 애틋한 사이는 아니었다.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탓에 공감대도 적었고, 누나가 배구를 그만두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하나 뿐인 연결고리마저 없어진 듯 서먹했으니까. 그렇지만 자신만치 무뚝뚝한 누나가 어렸던 동생을 나름의 방식으로 아끼고 보살폈던 것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 누나가 결혼을 한다고 하니 처음엔 기분이 이상했다. 매형될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 맞긴 한건지 쓸데 없는 걱정까지 되었다. 하지만 저와 같은 까만 머리카락을 틀어올리고 새하얀 드레스보다도 새하얗게 웃고 있는 누나의 모습을 보고 카게야마는 걱정은 내려두기로 했다. 부모님의 옆에서 한참을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던 카게야마는 본격적으로 식이 시작되기 전, 신부대기실에 들렀다. 달리 거창한 말을 할 건 아니었다. 말주변도 없을 뿐더러. 그래서 한 마디 했다.


"누나. 행복하게 잘 살아."


누나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눈을 접어 웃었다. 미사여구 하나 없는 동생의 투박한 축하에도 기뻐 보였다.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아네."

"날 뭘로 보고."

"아니. 도토리 만하던게 언제 이렇게 커서 효도 하나 싶었지."

"효도는 무슨. 그리고 내가 한참 전부터 누나보다 컸거든."

"덩치만 컸지. 너는 아직도 나한테는 애기야."

"징그럽게."


입을 비죽이는 얼굴이 어릴 때랑 변한 게 하나 없었다. 결혼을 하는 것은 자신인데 정작 동생의 훌쩍 자란 모습에 미와는 괜히 가슴이 시큰거렸다. 정말 굴러다니는 밤톨같던 게 언제 이렇게 자랐을까. 얼굴은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했지만 차려입은 수트가 썩 그럴 듯하게 어울리는 것이 이제 부정 못할 청년, 남자의 모습이었다.


수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그럼 잘해. 그런 말만 하고는 정 없이 돌아서려는 동생을 붙든 건 반쯤 충동이었다. 오늘 같은 날, 이런 자리에서 꺼낼 말이 아닐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행복을 빌어준 동생의 행복을 빌어주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는 누나의 마음이었다. 동생은 혼자였다. 외로워 보였다. 이젠 얘도 다 커서 더 이상 자라지 않을 때가 되었는데. 하루가 다르게 쑥쑥 제 키를 앞서 나가던 사춘기의 소년처럼 메말라 보였다.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누나니까. 가족이니까. 쟨, 내 동생이니까.


"연락은 해?"

"……."


눈에 띄게 굳는 등은 부쩍 넓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상처 받은 어린 애 같이 작아 보였다. 사실 뭘 그런 걸 묻냐고 화를 내거나 무시할 줄 알았다. 그런데 동생은 머뭇거렸다. 아무한테도 털어놓지 못한 마음. 어쩌면 날이 날인지라 그도 조금은 센치해졌을지도 모른다.


"네가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당장은 조금 힘들더라도, 상처를 받는대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생은 어느 날부터 웃음을 잃었다. 웃어도, 즐거워도 찰나였다. 가슴에 남지 않는 기쁨들의 연속이었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예전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파헤쳐 비교하게 되니까. 지금이 얼마나 볼품없는지 깨닫게 되니까.


"후회는 안 해. 왜냐면 난 잘못한 게 없어."

"…그래."

"그냥. 늘 고민해."

"……."

"그러다 보니 4년이 지났어."


그게 다였다. 태어났을 때부터 배구공을 만졌고, 배구가 인생의 전부라 해도 부족하지 않을 놈이었다. 그런 애가 지난 4년, 아니 살아온 세월을 통째로 걸어도 그 시절의 3년과는 견주지 못할터였다. 그 3년만 붙잡고 살기에는 동생은 너무 어렸다. 살 날이 너무 많이 남았잖아.


미와는 신부대기실을 빠져나가는 동생의 등을 보다가 고개를 내려 손에 들린 부케를 보았다. 제각기 싱싱한 꽃들이 다발로 묶여 신부를 빛나게 해줄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꼭 그녀의 첫사랑처럼. 동생이 행복을 빌어준 오늘, 그리고 앞으로의 수 많은 내일처럼.


시리게 찬란했던, 그들의 3년처럼.



* * *



그 날은 뭐가 달랐을까. 그저 운이 조금 나빴던 것일지도. 죽을만큼 억울하게. 아무도 탓하지 못하게끔. 정말 아무도 의도치 않았는데 일어나버린, 그건 말 그대로 사고였다. 고교 마지막 배구 대회. 드디어 서게 된 오렌지색 코트. 오랜 꿈. 작은 키를 한 거인의 등을 잡게 된 히나타의 꿈은 거기서 끝이 났다. 이 자리까지 오게 했던 동료들과 자신의 노력어린 땀 몇방울에 미끄러진 히나타는 오른쪽 다리가 박살났다.


공든 탑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무너진 탑은 시간이 좀 걸려도 다시 쌓으면 그만이었지만, 야속하게도 사람은 망가지면 거기서 끝이었다.


처음엔 비틀린 다리를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정신 없는 와중에 수술실에 들어갔다 나오니 무릎에는 두꺼운 붕대가 감겨있었고, 붕대를 풀었을 때 드러난 자신의 무릎에는 평생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남아있었다.


처음 며칠은 실감이 나질 않아 울지도 못했다. 꿈이라고 생각했다. 깨지 않는 악몽. 차라리 가위라도 눌려 꼼짝도 하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다시는 뛸 수 없을 거란 의사 선생님의 말에도 마치 남 얘기 같았다. 미끄러진 게 다였다. 고작 삐끗함 한 번에 남은 미래가 통째로 날아갈 수 있다니. 앞으로도 살 날이 많은 소년에게 현실이란, 터무니 없이 잔인했다.


어느 정도 회복을 하고 나자 동료들이 찾아와 덧 없는 희망을 건넸다. 재활치료 열심히 하면 다시 코트에 설 수 있을거라고. 자기 주변에 그런 사람 많다고. 이 정도 다치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의사도 아니면서 단언하는 말투가 저보다도 더 간절해 보여서 히나타는 그냥 웃었다. 말 없이 제 다리를 붙잡고 엉엉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망가진 게 자기 다리도 아니면서 뭐가 그렇게 슬펐을까. 나츠는 비좁은 병실 침대를 비집고 들어와 제 옆에 누워 하루를 꼬박 울더니 다음 날부터는 울지 않았다. 꽤 먼거리인 병원을 씩씩하게 찾아와서는 요새 저와 친하게 지내는 짝꿍 얘기만 했다. 동생은 여느 때처럼 귀여웠고 다리는 낫지 않았다.


켄마는 찾아와 하루종일 아무말도 없이 게임만 하다가 갔다. 야마구치와 츠키시마는 종종 찾아왔다. 야마구치는 시도때도 없이 과일을 깎아대며 쓸데없는 얘기를 했다. TV에 나온 연예인 이야기. 옆반의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고백했다가 차였다는 이야기. 앞집 강아지가 새끼를 낳았다는 이야기. 그런 걸 망연히 듣고 있자면 하루가 겨우 갔다. 츠키시마는 안 올것처럼 굴어놓고 꾸역꾸역 야마구치를 따라와 병실 한 켠을 지켰다. 그렇게 와서는 대충 야마구치의 말에 맞장구를 치거나 재미도 없어 보이는 책을 읽었다. 저를 등지고 앉아있는 손에, 이해 없이 넘어가는 책장을 알았다. 모두 자신을 배려하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고맙다가도 거기까지였다. 핸드폰은 꺼놓았다. 진심어린 위로들에 숨이 막혔다. 너는 끝이라고 매 순간 사형선고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입원한 지 한달이 되어가도록 카게야마는 찾아오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연락도 없었다. 그 녀석만 생각하면 치솟는 감정에 뭐라 이름을 붙여야 할 지 몰랐다. 막연히 생각했다. 아, 그 놈이 여길 오면 나는 그 날 정말 끝이겠구나. 차라리 얼른 와라. 그러다가도 영영 오지 않기를 바랐다. 졸업식도 가지 않았다. 졸업장을 건네주던 야마구치가 결국 참았던 눈물을 보였다. 지난 3년 간 고마웠다고. 너 때문에 행복했다고. 그 말은 앞으로는 그럴 수 없을 거란 저주같이 느껴졌지만 나도 그렇다 웃으며 되돌려주었다. 그리 말하지 말라고 화를 내고 원망하기엔 야마구치는 잘못한 게 없었다. 병실을 떠나기 직전까지 몇 번이고 카게야마 이야기를 꺼내려다가 마는 걸 눈치챘지만 모른 척 했다.


카게야마가 찾아온 건 퇴원 하루 전이었다. 아주 늦은 밤. 로드워크 중이었던 게 뻔히 보이는 복장을 하고 병문안 오는 사람의 성의도 없이 빈손으로 덜렁 찾아와 한참을 문 앞에 서 있었다. 할 말을 고르는 거였을지도. 그렇게 꺼낸 말은.


"머리, 많이 자랐네."


이게 다였다. 한 달만에 만나서 한다는 말이 고작 그게 다냐고. 핀잔을 줘야 하는데. 목구멍이 꽉 막힌 것처럼 아무런 말도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애꿎은 머리칼만 비비 꼬았다. 많이 자라긴 했네.


카게야마는 천천히 다가와 병실 침대에 앉아있는 히나타의 곁에 섰다. 그리고 그 몸을 끌어안았다. 남사스럽게 뭐 하는 짓이냐고 밀어내려고 했다. 겨울 바람에도 식지 않은 몸을 하고 저를 끌어안아 오는 온기에, 그제야. 다리가 망가지고 처음으로 눈물이 나왔다. 정신없이 우느라 그 때 카게야마가 어떤 얼굴을 했는지는 볼 수 없었다. 둘 다 말 없이. 한 명은 창 너머 캄캄한 밤을 하염없이 보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소리 없이 울었다.


카게야마는 그 뒤로 저를 그 자리에 버려놓고 훨훨 날았다. 다신 잡을 수 없을만큼 빠른 속도로 앞을 나아갔다. 그걸 제 정신으로 볼 자신이 없어서 다 버리고 도망쳤다. 아무도 찾을 수 없게 꽁꽁 숨었다. 살기 위해선, 최선이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 * *



식장은 따뜻한 기운으로 넘실거렸다. 행복하게 살겠단 누나의 다짐에 부모님은 결국 눈물을 보이셨다. 슬픈 일도 아닌데 눈물을 보이는 광경이 어쩐지 신기했다. 평생 우는 일이 없었던 누나도 따라서 눈물을 보였다.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애틋하게 서로를 끌어안는 것일까. 카게야마는 멀리서 그 장면을 관망했다. 수많은 사람들 속 저만 홀로 동떨어진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은 이미 충분히 익숙해서 오히려 편했다.


그 녀석의 소식을 누군가가 물어온 건 오랜만이었다. 마치 금기처럼 제 앞에선 모두들 그 이름을 꺼내는 걸 두려워했다. 죽은 사람도 아니고 어딘가에 멀쩡히 살아있을 놈을 뭘 그리 어려워하는지.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잘 살겠거니 했다.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단 사실은 진작에 알고 있었으니까. 카게야마는 할 수 있는 일에는 매진했지만, 할 수 없는 영역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 녀석은 이미 제 손을 떠났다.


이제는 카메라 앞에 서는 날이 더 많았지만, 여전히 카메라 앞에 서면 어색하기만 했다. 동생분 얼굴 좀 푸세요! 매형이 영 못 미더운가보다~ 사진사의 익살스런 농담에도 자연스레 웃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누나의 평생 남는 결혼사진. 그럴싸한 얼굴을 하고싶었다. 행복했던 날들. 어쩔 수 없이 옛생각을 했다. 사진사가 한결 낫다고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슬퍼졌다.


사진을 찍고 나자 누나의 친구들이 식장 앞으로 와글와글 모였다. 부케를 던지려는 모양이었다. 카게야마는 핸드폰을 들어 동영상을 찍었다. 즐거워 보여서. 나중에 부모님과 누나 에게 보여 줄 생각이었다. 멀리서 줌을 당겨 누나의 모습과 왁자지껄 좋은 자리를 선정하기 위해 다투기 시작한 누나의 친구들 모습을 번갈아 담았다. 뒤를 돌아서 던질 준비를 마친 누나가 갑자기 머뭇거렸다.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던 카게야마는 갑자기 화면 속 누나가 제게 손짓을 해서 놀랐다. 나?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입모양으로 되물었지만 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리로 오라고 손을 흔들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신부에게서 오늘 날 아무것도 아닌 신부의 남동생에게 쏟아진다. 부케를 받을 생각에 들떠있던 누나의 친구들은 갑작스런 상황에 영문 모를 얼굴을 했지만 누나는 아랑곳 않았다. 카게야마는 멋쩍게 삐걱거리며 누나를 향해 버진로드를 가로질렀다. 잘 빠진 수트에 세팅해 넘긴 머리. 잘생긴 얼굴이 새신랑같아 보이기도 했다.


"뭐야, 얼른 안 던지고. 뭐 필요해?"

"이거. 너한테 주려고."


누나가 부케를 제게 내밀자 카게야마는 당황으로 어쩔 줄 몰라했다. 이걸 왜 나를 줘. 난 괜찮으니까 빨리 던져. 친구분들 기다리시잖아. 카게야마가 작고 빠르게 속닥거렸지만 누나는 고개를 저으며 내민 손을 거두지 않고 꿋꿋하게 부케를 건넸다. 제 친구들을 돌아보고 미안, 심심한 사과를 건네며 웃기도 했지만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옆에서 매형이 그래, 얼른 받아 토비오군. 하자 주변의 분위기도 휩쓸리기 시작했다. 엉겹결에 받아들자 박수가 쏟아졌다.


"토비오. 누나는 행복해. 앞으로도 그럴거야."

"응."

"누나는 너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새신부는 싱그럽게 웃었다. 부케와 함께 건네진 어쩐지 간절한 바람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벅참을 누르고 카게야마는 퉁명스레 물었다.


"지금 나한테 뭘 준 건지 알긴 하는거야?"


응. 단호한 대답에 확신이 가득했다. 그건 바로.


"첫사랑."


정의 할 수 없었던 3년에 선고가 떨어졌다. 카게야마는 잠시 굳었다가 웃었다. 사랑이라… 부정할 수 없었다. 만면에 들어찬 미소에 사진사가 저도 모르게 카메라를 들어 그를 찍었다. 부케로 얼굴을 가리고 한참을 웃던 카게야마는 누나를 한 번 끌어안았다. 고마워. 그렇게 말하며.


식을 마치고 신랑신부는 허니문을 떠났다. 두 사람을 태운 흰 색의 고급 세단이 힘차게 나아갔다. 창문 너머 고개를 빼고 손을 흔드는 누나에게 마찬가지로 손에 들린 부케를 흔들어보였다. 그제야 누나가 마음을 놓고 창문을 올렸다. 이제는 혼자가 아닌 영원히 둘일 사람. 카게야마는 여적 남아있는 부케의 생명력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켰다. 삶의 냄새가 났다.


돌아가 가족들끼리 식사나 하자며 저를 붙드는 부모님에게 카게야마는 볼일이 있다고 거절했다. 누나를 보내고 나서 섭섭함을 지우지 못한 얼굴에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카게야마는 마음이 급했다. 오늘같은 날 가족들과 함께 있지 않고 어딜가냐는 물음에 그저 손 안의 부케를 흔들어보일 뿐이었다. 남자의 설렘에 주변 사람들이 저절로 그를 돌아볼 정도로 그는 사랑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미련없이 뒤를 돌아 걸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도망친 길을 되짚어 달려가 얘기 할 작정이었다.


아무래도, 너 없이는 못 살겠다고.



* * *



"머리, 잘랐네."


손에 들린 부케. 바람에 살짝은 흐트러진 머리. 남자는 결혼식장에서 신부를 버리고 도망친 듯한 행색이었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 발갛게 튼 볼을 보니 꼭 첫사랑의 설렘에 가슴 벅찬 소년 같기도했다. 그 꼴을 하고 얼마나 여기서 자신을 기다린 걸까. 익숙한 골목에서 그 만이 이질적이었다. 다짜고짜 내뱉어진 말은 꼭 마지막 밤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 4년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한 마디에 산소가 모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너랑 내가 무슨 사인지 생각해 봤어."


담담한 말투였다.


"사실 몇번이고 연락을 하고싶었는데…."


거짓말. 미련없이 저를 버리고 떠났던 주제에, 연락을 하고 싶었다. 그리 말한다. 누가 속을 줄 알고.


히나타는 몰랐다. 2015년 1월 10일 토요일. 아직도 날짜며 날씨, 풍경, 냄새까지 생생한 오렌지 코트의 꿈이 이루어졌던 날. 자신의 꿈과 함께 카게야마의 꿈도 끝이 났다는 걸. 잔뜩 겁 먹어 도망친 건 자신 뿐이 아니었다는 걸. 그래서 꼬박 네 번의 365일이 지날 동안 수 천번을 고민했다는 걸. 그 때는 몰랐다.


"더 이상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 연락할 구실이 없잖아."

"……."

"팀메이트… 파트너 아니니까. 이제 우리."


너랑 아무 사이도 아닌 것 같아서 연락할 구실이 없었다는 말에 울고 싶었다. 이제 두 사람은 그랬다.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지나간 3년, 이름과 나이. 그 정도를 빼면 아무 것도 아닌 사이. 핸드폰 번호도 몰라서 다짜고짜 찾아와 무작정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그런 사이.


"근데 친구도 아닌 거 같아서."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고 묻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 두 사람에게 자신의 거처를 들키자마자 얼마 안 가 이렇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은 했다. 그래도 이건 너무 빨랐다. 신이 있다면 저를 가지고 장난질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을만큼.


이제 카게야마 뿐만 아니라 다들 동료가 아니었다. 그대신 친구가 되었는데. 어째서 얘랑은 그 흔한 친구조차 되지 못했을까. 핸드폰 번호가 아닌 주소를 물어 찾아온 게 그 답다면 그 다웠다. 기약없는 답장을 기다리기 보다도 당장 만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사이. 어떻게 여태 보지 않고 견뎠는지 모를만큼 사무치는, 그런 사이. 이런 걸 뭐라고 부르는 지 히나타는 몰랐다.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그도 정답을 찾지 못했는지 묻는다.


"이제 뭐 할래?"


제 앞으로 내밀어진 꽃다발은 어딜 봐도 부케였다. 하얀 손 끝이 마디마디가 발갛다. 아무것도. 너랑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뭐가 되든 너는 첫번째가 될 것 같아서 무섭다고. 그 맘을 아느냐고.


망가진 무릎이 시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꽁꽁 숨을 걸. 왕자같은 행색에 신데렐라라도 된 기분이다. 왕자님이 유리구두를 들고 찾아와 제 발에 신길 줄 알았으면 죽어도 구두를 챙겨왔어야했다. 아니면 두 쪽 다 버리던가. 잃어버린 건 오른쪽 구두였다. 왕자님이 그걸 들고 찾아와 이제 뭐 할 거냐고 묻는다. 한숨이 나왔다.


"이걸 들고 와서 어쩌자고. 결혼이라도 할래?"

"할까?"

"미친 놈."


청혼이라도 하려는 걸까. 그럴꺼면 반지라도 들고 오지 그랬냐. 이 새끼는 예나 지금이나 예의가 없다. 히나타가 부케를 받아들 기미가 없자 한 걸음 다가온 카게야마가 손을 끌어 히나타의 손에 쥐어주었다. 뿌리치고 싶었지만 손이 무섭도록 차가워서 저도 모르게 그 손을 잡아줄 뻔했다. 그럴 수 없어서 대신 부케를 받아들었다. 여지를 주면 안되는데 실수했다.


"친구 할래?"

"너같이 성질 더러운 애랑 내가 왜."

"그럼 뭐해."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 맘대로 해."

"나 네 말 잘 듣잖아."


웃긴 새끼. 언제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었냐고 뭐라고 하기엔, 늘 툴툴거리고 시끄럽다 욕하면서도 꼬박꼬박 제 말을 다 들어주었던 놈을 알아서 어찌할 수 없었다. 알아. 아는데. 날 더러 어쩌라는 거야. 왜 이제와서 나한테.


"…아주 가끔 만나서 밥먹는 사이."

"알았어."

"알았으면 이제 가."

"연락 해도 돼?"

"하지 말래도 할 거 잖아."

"잘 아네."


아무사이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굳이 해야된다면. 언제 어떻게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인연이고 싶었다. 근데 고작 그걸로도 행복해 보였다. 왜 행복해. 나는 아직도 이렇게 슬픈데. 너만 왜 행복해. 불공평해. 왜, 왜 다 가지려고 해. 왜 나까지.


간다.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서는 등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지 등이 들썩였다. 가끔 뒤돌아보고는 아직도 서있는 저를 보고 깜짝 놀라 걸음을 바삐하는 게 무척 어려보였다. 그 등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히나타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결국 몸에 열이 올랐다.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집에 가자 마자 약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손이 무거워 내려다 보니 행복했던 기억이 들려있었다. 행여 꽃잎 한 장이라도 잃을까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바보같아서 죽고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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