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전 얘기를 기억나는 대로 쓰는거라 약간 각색된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적어도 n년 전 이야기이니 지금은 어찌 지내실지 모르겠네요.



지인이 뱅가드를 입문시켜 주신다고 권해서 처음 가는 카드매장에 갔습니다. 

지인분도 오랜만에 뵙는 반가운 친구분이랑 게임을 하고 싶으시다고 해서 그럼 어차피 유희왕 하는 구역도 있고 덱도 가져왔으니 유희왕 한두판 하고 있을게요 편히 하세요~ 하고 혼자 떨어져서 듀얼 상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순진했고, 카드게임 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됐고, 태생이 둔감한 편이었습니다.


그 안의 분위기는 주말 낮이기 때문에 후끈후끈한 땀냄새가 슬슬 올라올 즈음이었습니다. 그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유일한 장점이 있다면,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정신없는 분위기인 나머지 저같은 여성유저를 깊게 쳐다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무튼, 한 아저씨가 저에게 듀얼을 권했습니다. 외모만 따지면 저보다 한 열살은 많아 보이는, 삼촌뻘같아보이는 아저씨였습니다.  

맨발에 슬리퍼, 소매나 밑단이 다 닳은 추리닝, 씻은 건지 안 씻은건지 의심되는 얼굴.

솔직히 약간 거부감들긴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저는 정말 세상 물정을 모르는 풋내기였고,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선 안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차피 시간도 남고, '네, 한판 할까요?' 라고 선뜻 허락했습니다.


수락의 말을 '요?' 까지 하기도 전에 잽싸게 자리에 앉은 그 아저씨는, 뭔가 덱케이스를 늘어놓으면서 플레이할 카드를 고르면서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제가 페이퍼를 쓰는데 페이퍼 써도 되나요?'




여기서 도망쳤어야 했는데...


카드게임 지식이 없는 분들을 위해 설명드리자면, 페이퍼는 원래 사용한다고 말해선 안되는 종류의 카드입니다. 왜냐고요? 대가없이 카드를 부정 사용하는 행태이기 때문입니다. 

페이퍼란, 보통 인터넷에서 해당 카드를 프린터로 뽑거나 종이로 대강 그려서 마치 실제로 그 카드를 갖고 있는 것처럼 임의 취급해 플레이하는 카드를 말합니다. 줄여 말하면, 짭카드입니다.

하지만 종종 실력을 키우고 싶은데 재정 사정이 안되는 분들은 임시로 비싼 핵심 카드를 페이퍼로 만들어두고 훈련하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그래서 어차피 친선 듀얼이고, 미리 양해를 구해주시기도 했고, 메인덱 카드도 아니고 엑스트라덱 카드 한두장정도면 괜찮겠지... 싶어서 오케이를 했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때의 저는 순진하고 착했으며 세상물정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아저씨가 꺼낸 '페이퍼' 의 실체는 충격적이었습니다.

하얗고, 테이프에 둘둘 말린 요상한 것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네, 그 아저씨는 심지어 프린터에서 뽑은 것도 아니고, 본인이 손수 에이포 용지를 잘라서, 삐뚤빼뚤 알아보기 힘든 글씨를 볼펜으로 휘갈겨 적어서, 스카치테이프로 둘둘 말아 코팅한 카드를 페이퍼로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가히 '딱지' 라고 말할 수 있는 형태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딱지' 로만 엑스트라 덱이 이루어져있었습니다.


근데 거기까지였으면 솔직히 저도 이 정도까지 말하지 않습니다. 거기까지였으면 그냥 좀 사고관이 이상하지만 이렇게 긴 수기를 쓸 정도의 빌런은 아니었겠죠. 하지만 이 아저씨는 하나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저씨는 그 페이퍼 카드의 훌륭함을 저에게 자랑했습니다.

그 페이퍼카드의 이름은 그 이름도 유명한, '샤이닝넘버즈 39 유토피아 더 라이트닝' (약칭 홒더라)이었습니다. 물론 이 카드는 당시 유능하고 우수하며, 구하기도 조금 까다로운 카드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묻지도 않았는데 그 원본 카드가 얼마나 희귀하고, 유능하며, 효과가 좋은지 저에게 줄줄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정말로 그 당시 곤란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해당 카드의 진품을 그 자리에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절판이라 더 구하기 힘든 편인 한글판 홒더라를요.

구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못 살 만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절판이지만 중고매물은 꽤 나오는 카드였고, 가격도 만 얼마? 아무리 비싸도 2~3만원 이내였던 걸로 기억해요.  

그래서 그런지 진짜 안궁금하고, 진짜 곤란했습니다. 네. 근데 이렇게 안물어본거 줄줄 얘기하는 사람이 당시 매장 다닐때 한둘이 아니었어서 그게 여기선 당연한 건가 싶어서 저도 당시엔 그냥 익숙하게 먹금했습니다.

그래서 하하, 그래요? 그렇군요... 하면서 덱을 셔플했습니다... 어차피 매장이 시끄러워서 뭔 소린지 들리지도 않았고요.


제가 그 당시에 사용하던 덱은 마스크드 히어로 덱에 4축 엑시즈를 섞은 무난무난한 덱이었습니다. 너무 강한 티어덱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약하지도 않고 딱 괜찮은 수준의 덱. 당연히 4축의 우수한 용병인 홒더라도 엑덱에 잘 들어가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리진 않았습니다 상대가 쪽팔려할까봐... 


어찌저찌해서 지옥같은 듀얼 열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듀얼!


상대방의 덱에 대해서 자세히 몰라서 첫 판은 좀 방어적으로 했습니다. 

근데 상대방 덱을 대하면 대할 수록 요상했습니다. 버제스토마가 섞여있기도 해서 버제스토마인가? 싶어 경계를 하면 그것도 아니었고요. 

뭔가 유행이 엄청 오래 전에 지난 카드들이 잔뜩 나오는 것입니다. 당시 흔히 쓰이는 테마가 들어있는 것도 아니고 웬 듣도보도 못한 올드한 카드들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상대하면 상대할 수록 빡쳤습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첫판을 져버렸습니다. 왜냐?

이 덱의 구조는 상대를 빡치게 하는 것에 집중한 굿스터프 메타덱이었기 때문입니다.

네. 안에 들어있는 카드들이 뭐 일시휴전, 화목의 사자, 빛의 봉인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메인몬스터들은 죄다 리버스 몬스터라서, 뒷면표시 상태에서 치면 내 몬스터들이 없어지거나 뭐 그런 빡치는 효과들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카드들은 슬슬 기억이 안나지만 몬스터들 드디어 다 치우고 다이렉트 어택 하려니까 화목의 사자 떴던건 충격적이어서 기억합니다.

화목의 사자. 2003년 최초 발매. 효과:  이 턴에, 자신 몬스터는 전투로는 파괴되지 않으며, 자신이 받는 전투 데미지는 0 이 된다.


저의 행동을 제약함과 동시에 깔짝깔짝 공격력이 높지도 않은 잡몹들이 때립니다. 그리고 여유가 되면 엑덱의 페이퍼 (ㅠㅠ) 를 꺼내서 피니셔. 근데 몬스터가 필드에 남아있지도 않고 (당연함... 제 턴에 제가 터뜨림...) 메인덱 몬스터 레벨을 맞춘 것도 아니라서 엑시즈가 잘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근데 제 전개를 막아버리니까 패도 없고 몬스터도 동이 나서 제가 져버렸습니다.

메타 전법도 훌륭한 전술 중 하나니까 보통의 저는 이런 덱을 썼다고 빡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를 정말로 빡치게 한 것은 이겼다고 계속 나불나불대고 까불거리는 그 태도였습니다. 

어떻게든 이기기 위해 여러 방면에서 고심하고 심혈을 들여서 덱 연구를 한 사람들의 덱에 비하면 조잡한 덱인데다가, 페이퍼를 쓴다는 비매너 행동을 마음 넓게 이해해준 상대에 대해 그런 태도였습니다. 상대를 빡치게 하기 위한 연구를 했다면, 그것은 대성공이긴 합니다.

보살이었던 저도 슬슬 졸라 빡쳤습니다. 제 듀얼리스트의 영혼이, 저런 페이퍼 따위나 쓰는 잡놈에게 진다는 건 프라이드가 상한다고 속삭였습니다. 


이 아저씨는 그 나이먹고 나이 어린 사람이랑 게임하면서 강해지기 위해 카드게임에 돈 쓰는거는 아깝고 실력도 없으니 자기가 이길 것 같은 만만한 사람만 골라서 듀얼함으로써 자신의 우월감은 표현하고 싶은 어처구니없는 자식이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재정 사정은 다르고, 누구나 각자의 사정에 맞게 게임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본인이 사정이 안되서 이런저런 제약이 있는 상태로 플레이 중이고 상대의 배려를 입어야 한다면 겸손하기라도 해야하는거 아닐까요?

계속 안 물어본 룰 설명이나 페이퍼카드의 효과나 대단함을 얘기하는 그 입을 꼬매버리고 싶었습니다. 자신이 그 덱을 짜는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등등... 여성유저라 지금 게임 잘 모를거라고 훈수질 하는건가 싶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판이 시작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무난하게 이겼습니다. 사실 너무 싱겁게 끝이 났던걸로 기억해서 이겼는지 졌는지 기억이 잘 안나는데, 제가 기억하기론 아마 상대가 패가 말렸느니 어쨌느니 나불나불거리면서 서렌더를 했던거 같습니다. 

이 두번째 판에서 두 명의 남자 고등학생이 곁에서 관전을 하러 왔던 것은 기억합니다. 한 남학생이 매장이 처음인 듯해보였고 다른 남학생은 카드게임을 잘 아는 것 같아보였습니다. 친구에게 설명을 줄줄 하면서 관전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제일 중요한 건 세번째 판이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저는 중간에 사이드를 갈았습니다. 본래 제 덱에는 상대방의 특수소환을 견제하는 카드들이 많이 들어있었는데, 상대가 특수소환은 별로 안 쓰고 마법카드나 함정카드를 많이 써서 마함 파괴 위주로 사이드를 갈았습니다.

상대방은 사이드를 별로 갈지도 않았고, 그냥 엑덱 페이퍼들을 몇개 갈았을 뿐입니다. 자기한테 타타갤 (넘버즈38 희망괴룡 타이타닉 갤럭시) 페이퍼가 있다고 자랑질을 중간에 했는데, 대체 왜 한지 모르겠습니다. 덱이 8축덱도 아니면서 대체 왜 만든건지 의미불명일 뿐... 게다가 타타갤은 저한테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몇판 했으므로 상대방의 패턴이 익숙해졌습니다. 

마함은 무조건 파괴, 몬스터는 낭비하지 않고 파괴되어도 다음 전개가 가능할 정도로 아꼈습니다. 상대 몬스터를 귀찮게 하는 리버스 몬스터가 대부분이므로 제 필드가 몇번 비어있어도 맞아 죽는 일은 없었습니다. 중간에 문제의 페이퍼 홒더라가 뜨기도 했었지만, 소환 시 함정을 발동해 나락으로 보내버렸습니다.

그지같은 리버스 몬스터들은 앱솔루트 제로로 치우고, 웬만한 마함들은 애시드로 치웠습니다. (애시드에서 별 반응 없더라구요. 애시드도 구하기 힘든 편인데...) 몇몇 카드들은 적당한 타이밍에 다크로우로 차원 너머로 매장시켜 버렸습니다. (제외존에 있다는 뜻)

상대방의 라이프가 슬슬 깎여가고, 제 턴이었습니다.

상대방 몬스터 존은 비어있고 마법 함정 존에 카드를 잔뜩 깔아두었습니다. 화목의 사자같은 걸 깔았나?

저는 제 패를 보았고, 드디어 때가 왔음을 직감했습니다.


그래. 홒더라 좋아하지? 어디 맛좀 봐라.

그리고 저는 참지 않았습니다. 세번째 판까지 아끼고 아꼈던 그 카드를 위해, 4레벨 몬스터 2장을 꺼냈습니다. 

오버레이 네트워크 구축! 엑시즈 소환! 유토피아!

그리고 샤이닝 엑시즈 체인지! 샤이닝 넘버즈 39, 유토피아 더 라이트닝!

(실제로는 이러한 대사 따윈 말하지 않았으며 그냥 말없이 척척 카드를 올려두었습니다.)


마함존에 카드가 잔뜩 덮여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약간의 도박이었습니다.

소환에 성공해서 배틀 페이즈로 무사히 이동하면 저는 확실하게 이깁니다. 그러나 소환무효화 함정이나, 메인 페이즈에 발동하는 몬스터 파괴 함정이라도 발동하면 이 다음은 조금 힘든 행군이 되었습니다.

약간의 정적.

... 상대방은 선언이 없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습니다. 사실 없을 것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조금 전에 한창 나불나불 짜증나게 입을 털면서, 통고나 신의 심판같이 비싼 카드는 넣고 싶었는데 못 넣었다고 투정했었거든요. 

그리고 이 덱은 한 장에 500원이나 넘을까 말까하는 카드만 잔뜩 넣어둔 잡덱. 발매된지 오래된 카드 위주로 들어있으니 카드풀도 한정적입니다. 아마 드레인 실드같은 카드로 전투페이즈를 넘길 생각이었을 겁니다.

즉... 소환 방해나 파괴 효과를 가진 카드 매수는 극히 한정적이라는 얘기였습니다.

그것을 제가 미리 빌드업 과정에서 대부분 묘지나 제외 존으로 치워버린 것을 확인했었기 때문에 이 도박은 성립했습니다. 


곁에 있던 남고생이 친구에게 해설을 속사포처럼 시작했습니다. 

아, 끝났네. 저게 지금 소환 성공했네. 방법이 없어. 안봐도 이 판은 끝난거야. (친구: 어... 그래?) 왜냐하면 어쩌구저쩌구 (이하 효과) 


아저씨의 표정이 썩어들어가고, 말수가 적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 와 같이 당황한 소리도 냈습니다.


마함따위 알게 뭐냐. 체인은 없었다!

네놈이 쓸데없이 혀가 길었던 것, 그것이 네놈의 패인이다!

유토피아 더 라이트닝은 전투 실행 시 상대가 카드의 효과를 발동할 수 없다!

'사라져라, 사이버스!' 라고 외치는 리볼버

죽어라!!!!!

(속으로만 외쳤습니다.)



마음같아선 이렇게 패버리고 싶었습니다. 지금이라도 패드릴 수 있으니 언제든 연락주세요.

오버레이 유닛을 2개 제거하고, 공격력 5천의 빛나는 죽창이 된 홒더라는 그렇게 상대방을 찌르고 저를 승리로 이끌어주었습니다.


현실에서도 크아아악! 하고 만화처럼 쓰러져줬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차분하게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인사와 함께 덱을 정리하는 사람들만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끝난 후, 제법 저는 후련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이 무개념짝퉁불법유저를 진품으로 후려 팼다는 쾌감. 그것이 저를 살아있게 만들었습니다.

어떠냐. 좀 쪽팔리냐? 자기가 자랑했던 카드로 엿먹은 기분은 어때.

상대방도 약간 어벙벙해보였습니다. 당연함. 홒더라 있다고 말 안하고 마지막에 가서야 보여줌. 아하하 제가 이거 진품이 있어서요 한글판이고 이거... 하면서 수줍게 몇마디 했습니다 저는.

즐거워진 저는 선심 쓰듯 '한판 더 하실래요?' 라고 물었지만, 상대방은 똥이라도 씹은 듯 찜찜한 표정으로 거절하기도 했고 슬슬 제 지인도 돌아와서 듀얼은 여기서 마무리되었습니다.




읽는 데 즐거우셨나요? 즐거우셨다면 다행입니다.

일부러 웃으라고 좀 오글거리게 적었습니다. 그래야 웃어넘길 수 있을거 같아서요 하하...

가끔씩 이 빌런이 생각나서 썰을 푸는데, 매번 길게 적기 귀찮아서 아예 포스타입에 백업하기 위해 기록합니다. 

페이퍼 아저씨가 다음부턴 카드는 사서 쓰던가 아니면 혼자 집에서 휴지로 쓰던가 하셨으면 좋겠네요.

여러분은 카드게임을 하시되, 꼭 혼자 가지 말고 친구랑 함께 가세요.

카드게임은 재밌지만 몇몇 사람은 재미있지 않거든요.


제가 갖고 있는 문제의 홒더라와 유토피아, 그리고 타타갤을 자랑하며 이만 줄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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