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틀어줘요(반복재생 필수 / 노래가 짧아요)






처음 이 세계에 빙의 했을 때 어땠더라. 눈으로 본 것은 뿌예진 시야 속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천장이었다. 손을 올려 더듬이면 생각보다 까칠한 천이 만져졌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다듬어 누워 있던 상체를 일으키면 까마득한 소성이 들렸다. 시야가 아예 차단 된 것은 아니라 어렴풋이 보이는 시각을 벗 삼아 절벽과도 같은 가파른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얼굴을 강하게 내리치는 듯한 감각에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눈을 감싸고 있던 천이 풀어졌다. 어둠 속에 있다 처음 빛을 본 사람 처럼 눈을 쉽게 뜰 수 없어 게슴츠레 아래를 내려다보면 점 같이 보이는 것들이 움직이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건 펠리시아 아이들의 웃음소리였다. 


"..루시, 너 지금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시야를 확보하려 눈가를 비볐을 때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루시? 그건 [구원의 성녀] 라는 소설 속에서 제대로 등장도 해보지 못 한 채 죽은 진짜 성녀의 이름인데. 눈을 두어번 깜빡이고 천천히 뒤돌아보면, 윤기 나는 금발이 눈을 사로잡았다. 그 금발 머리의 소녀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로 잔뜩 사나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리아?"


김여주 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이름이었다. 아리아. 구원의 성녀. 내가 지금 꿈을 꾸나. 혼란스러운 감정을 드러낼 새도 없이 아리아는 나무 식판 위의 잔뜩 메마른 빵과 우유를 내려놓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쿵쿵 거리며 다가와 루시의 팔을 세게 잡고. 


"내가 벗지 말라고 했잖아."


그때와 비슷한 악력. 


"...아..!"


그때 루시의 팔을 잡은 건 섬섬옥수였는데 지금 그녀의 팔목을 잡은 것은 잔뜩 굵어진 손마디다. 상념에 빠진 채 자꾸만 제 부리로 창유로 두드리는 금조에게서 순식간에 시야가 뒤바뀌었다. 서 있던 몸이 악력으로 인해 기울어져 등이 광상 위에 닿았다. 귓가를 찌르는 거친 숨소리를 따라 시선을 올려 세차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흉부를 그리고 그 위로 잔뜩 혼란스러운 듯 흔들리는 다갈색 동공을 마주했다. 신성력을 얼마나 부여했다고 벌써 일어나. 루시는 제 앞의 재현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무슨 짓을,"


이마 위로 땀이 맺혀 머리카락까지 스며든다. 잔뜩 다잡지 못 한 호흡을 따라 붕대를 감은 흉부가 사납게 움직여 루시는 눈을 둘 곳이 소공작의 얼굴 뿐이었다. 몸 상태가 아직 좋지 못 해 이정도 밖에 힘을 내지 못하는 건가, 결박하는 듯 위로 올라타 제 손목을 꾹 누르고 있는 재현의 아귀를 느낀다. 4년 전, 제게 아리아의 행적을 보고 해달라는 카엘룸에서의 소공작은 어딘가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다부진 체격 하며 굵어진 얼굴선이 유일무이한 제국 공작가 특유의 분위기를 풍겼다. 


"누구인지, 말해.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건지..."


외상은 어느 정도 신성력을 통해 치료 된 듯 보였지만 아직 독이 만연히 퍼진 내상까지는 미치지 못 한 듯 했다. 제 앞의 소공작도 독기로 인하여 아직 정신이 온전치 못 해 원래의 루시라면 허술하게 내리 누르고 있는 악력에서 충분히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이쪽도 피차, 신성력 소모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신성력을 감지해 찾아온 성찬의 금조의 시선이 느껴졌다. 금조가 앵무새가 아닌 게 다행이었다. 


"..지금은 휴식을 취하시는 게,"

"가야, 해."

"......"

"그 애가... 기다리고 있어."


그 누가 보아도 기허한 듯한 재현은 공작저로 돌아 가야 한다며 숨을 헐떡였다. 그 애가 기다리고 있다면서. 공작저를 떠난 지 일주일이 넘었다. 나흘이면 충분 하다며 떠나기 전날 아리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던 재현은 다량의 업무 보고로 인하여 조금 늦게 도착 할 것 같다며 아리아에게 간찰을 넣었다. 나흘 이후로는 단 한 순간도 잠이 들지 않고 업무를 보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공작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리아에게 가기 위해서. 마차가 기울여지는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더라. 깨질 듯한 두통과 뻑뻑한 안구에 목까지 메여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겨우 눈을 여러 번 깜빡하고 숨을 가다듬어 자신이 결박하고 있는 이를 내려다봤다.


"....."


어렴풋이 보였던 빛은 달이 아니었나. 아래 깔려 널브러져 있는 포단도, 제 아래의 여인의 외관도 온통 새하얗다. 머리도. 눈도. 순백하지 않은 게 없었다. 수도를 그렇게 돌아다니고 방금까지 타 지역까지 다녀온 재현은 생전 처음 보는 볼품에 미간을 찌푸리기도 잠시 어딘가 모르게 유습 해 입을 달싹거렸다. 마치 카엘룸 안 대성당의 루치아의 상 같기도 해. 재현은 버거운 숨을 겨우 고른 채 눈을 게슴츠레 뜨며 느껴지는 기시감을 확고히 했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시려면 지금은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사제님께서 제 눈과 귀가 되어주시는 겁니다." 


아리아의 행적을 밟기 위해 고결한 신전 카엘룸에 비밀리에 숨겨 놓은 검디검은 머리칼의 사제. 


"마차는 준비 되었으니 회복하시는 대로 출발 할 겁니다."

”..갑자기 사라졌다 합니다.” 


루시라는 자에 대해서 알아 봐주십시오 

아리아의 격렬한 악몽을 만들어내는 심인. 그리고 지금 제 앞의 순백한 모습의 여인까지.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뭉쳐져 가리키는 곳은 하나였다. 단편적인 기억들이 파노라마 처럼 펼쳐지면 재현은 눈을 도로 하며 두 자를 입에 담았다. 


"..루시?"


루시 그 두 자에 명모라 불리어도 손색 없는 희디흰 눈동자가 극대화 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더욱 극적인 반응을 보니 재현 또한 혼란스러운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자신의 눈과 귀가 되어 달라 청 했던 카엘룸 속 무수한 사제들 중 하나일 뿐이던 이가, 아리아가 악몽을 꾸게 만든 루시 라는 심인이라니. 이걸 우연이라 봐도 되는 것인가? 


"..힘을 빼세요, 상처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월색을 담은 눈동자가 다시금 수축 되어 시선이 어딘가로 잠시 옮겨졌다. 재현이 루시의 팔목을 결박한 손에 힘을 주니 임시방편으로 치료 했던 가슴팍 위 상처가 벌어져 붕대 위로 새빨간 혈흔이 스며들었다. 루시가 덤덤한 낯으로 작게 읊으니 제 손을 강하게 누르던 힘이 조금 풀어졌다. 혼란스러운 기색을 금할 길이 없는 재현의 눈길을 루시는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마치, 이 모든 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악몽.."

"....."

"정말, 악몽 같군요."


이게 악몽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재현은 헛웃음을 띈 채 비틀거리며 루시의 위에서 내려왔다. 자신을 살린 이가 아리아가 꾸는 악몽의 주간 잔류*라. 마치 누군가 음모라도 하는 듯해 재현의 입가에서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만 잔재했다. 광상에서 천천히 일어난 루시는 그 모습에도 특별한 내색 없이 성찬의 전서조가 있던 자리를 흘겼다. 어디로 가버린 건지 텅 빈 창 뿐이라 시선을 도로 한 채 혼잡한 기색이 역력한 재현을 올려다봤다. 

*주간 잔류 : 심리 악몽의 원인이 되는, 지나간 경험의 남은 기억.


"이거 하나만 말씀 드릴게요."


이게 진실이라는 듯, 이건 악몽 따위가 아니라는 듯. 마주한 눈동자가 너무나도 적력해 재현은 할 말을 잃었다. 


"이 모든 건 불순한 고의가 아닙니다. 그저, 우연찮을 뿐입니다."


편히 쉬세요. 가능하면 내일 곧바로 출발 하겠습니다. 사용인이 할 법한 그 말을 끝으로 루시는 일어나 미련 없이 문을 닫고 나갔다. 홀로 남은 재현은 그제야 벌어진 상처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따른 고통을 느꼈다. 울컥 터지는 혈흔이 뜨겁다. 


“..꿈이 너무 뜨거워서요.”


이게 극열한 악몽과 다를 게 뭔지. 


"....."


분명한 악야*다. 재현은 밤하늘이 들이찬 창유를 보며 그리 확신했다.

*악야 : 악몽을 꾼 밤




짭성녀

: 로판을 비틀겠습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뜬눈으로 밤을 새운 루시는 재현을 찾았다. 문을 몇 번이나 두드렸지만 답이 없어 역시 어젯밤 무리를 한 걸까 싶은 마음에 상태를 확인 하려 문을 열자 어제와 그대로인 광상 위로 미리 이곳의 사용인에게 부탁해 가져다 놓은 의복을 입은 채 앉아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보다 수척한 얼굴을 보니 재현 또한 밤을 새운 모양이었다. 당연히 혼란스럽겠지. 어젯밤, 알려 준 적도 없는 알리 없는 이름을 입에 담은 순간 무언가 들킨 것 마냥 벌렁거리는 심장을 방을 나와서야 겨우 진정시켰다. 소공작이나 되는 이가 카엘룸의 속한 사제의 이름을 아는 게 무슨 놀랄 일이냐 싶겠다만 루시는 워낙 특이한 케이스 였지 않나. 현재 아리아와 가장 긴밀한 사이인 재현이 그 이름을 안다는 것 자체가 큰 리스크라면 리스크였다. 루시가 주춤거리며 쉽게 들어오지 못 하자 광상 위에 앉아 단단한 제 허벅다리 위로 팔꿈치를 올려놓은 채 상념에 빠진 듯한 재현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 당장 출발이 가능한가요?"

"..마부에게 이르죠."


한시가 급하시겠지. 돌아오겠다 약조한 날이 훌쩍 넘었음에도 소식이 없는 제 오라비를 걱정할 아리아에게 어서 가야겠지. 루시는 재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매너 하우스 한쪽에 리암이 준비해둔 마차와 마부 한 명. 루시는 정우가 일전에 건네주었던, 지난 4년 동안 사람이 즐비한 광장에 갈 때나 입었던 로브를 꺼내입었다. 로브를 입은 채 2층을 걷다 문득 걸음을 틀어 안쪽에 위치한 정우의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그리고는 정우의 침대 근처에 자리 잡은 협탁 위 새벽 동안 양피지에 끄적인 단신을 올려두었다. 안에 적힌 글은 그동안 고마웠다는 안부 인사 정도였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요동친다. 괜스레 주인 없는 방을 눈에 담아봤다. 

당신이 죽지 않는다면 우린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을 애써 깊숙한 곳에 묻어 둔 채 정우의 방을 굳게 닫았다. 


2층을 내려가는 길 마주한 리암은 루시가 말을 꺼내지 않았음에도 모든 준비는 마쳤다는 말 만을 꺼낸 채 그녀를 지나쳤다. 루시는 몸을 틀지 않은 채 멀어져 가는 리암의 발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고서야 입을 열었다.


"그동안, 신세 많았어요. 감사해요."


그 여린 목소리는 중얼거렸다 할 만큼 작았지만 2층을 다 오르고 코너를 돌려던 리암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기 충분했다. 루시의 발자취가 아득하니 멀어져 사라졌음에도 꽉 쥔 주먹을 풀지 않았다. 


"넌 이곳에 남아 지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자신의 주인을 끝까지 보필했다는 소임을 다했다는 이유로 공작가의 사용인을 죽였다. 그럼 정우의 소임을 끝까지 행하지 못 한 자신은. 죽어 마땅 하지 않을까. 꽉 쥔 주먹에서 부터 시작해 온 몸에 피가 통하지 않았으면 좋겠더라. 리암은 두 눈을 질끈 감다 제 앞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 곳 주인이 누구지? 이름을 말해주면 돌아가 사례를 하도록 하지." 


처음 봤던 그 끔찍한 몰골을 씻어낸 소공작은 고고하게도 고개를 빳빳이 든 채 그리 일렀다. 사례? 리암은 고개를 돌린 채 지나가라는 듯 옆으로 비켜섰다. 


"그 무엇을 주신다고 해도 제 주군은 만족하지 않으실 겁니다."






깊은 산 속에 자리 잡았던 정우의 거처 였기에 돌아가는 길이 여간 거칠다. 덜그럭 거리며 움직이는 마차 안은 고요했고 루시는 마차 안 저와 함께 있는 이는 재현 뿐임에도 로브를 깊이 눌러쓴 채 였다. 출발 한지 몇 시진이 지났음에도 적막만이 가득했던 공간 루시가 먼저 넌지시 재현의 의중을 물었다.


"궁금한 게 많으신 것 같았는데 묻지 않으시네요."


다리를 꼰 채 마차에 달린 작은 창을 통해 온통 푸른 나무 뿐인 풍경을 바라보던 재현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하려던 때 루시는 재빠르게 시선을 먼저 피했다. 감정을 곧이 곧대로 드러낸 어제의 재현은 온데간데없었다. 무감하기 그지 없는 이성만이 자리 잡은 듯한 시선을 오롯이 받기는 무리다.


"막연하게 상경을 할 사이는 아닌 듯한데 그렇다고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

"이를 어쩌면 좋을까요, 사제님."


등을 붙였던 재현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루시와의 거리를 좁혔다. 살짝 옆으로 돌렸던 고개를 모로 하면 재현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처음 카엘룸에서 아리아에게 구원을 받았다는 그 벅차오르던 눈을 기억했다. 아리아를 향한 맹목적인 신앙과 다소 비틀린 애정. 루시 안의 김여주는 제 앞의 재현이 아리아에게 느끼는 심정을 알고 있기에 한 마디 한 마디가 조심스럽다. 사랑이든 신념이든 뭐든 과하면 독이 된다. 재현이 자신에게서 제일 묻고 싶은 게 뭘까, 이 모든 게 악몽이라 느껴지던 원인은? 재현의 마음속에 가장 깊숙이 자리 잡은 것은?


"아리아와는 오래 전부터 익히 알던 사이입니다."


아리아 그 석 자에 순식간에 뒤바뀐 분위기가 매서워 로브 안으로 손을 말아 쥐었다. 네가 아리아에서 누구를 투영하는지 알아.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건 구원을 가장한 덫일걸. 충격적이기 그지없는 그 모든 진실을 감춘 채 천천히 내뱉는 말임에도 재현의 미간은 펴질 줄 몰랐고 더욱 험악해져 갔다. 


"송구스럽지만 만날 길이 없어, 감히 귀하신 소공작께 전언을 부탁드려도 될런지요."


거친 비탈길을 지나는 마차는 곳곳에서 불안정한 소음으로 뒤덮였다. 마차를 이끄는 엽자의 울음소리든, 흥분한 엽자를 다루는 듯한 마부의 소리든. 그 모든 소음들을 뒤로 한 채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재현과 루시는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루시가, 많이 보고 싶었다고요."


기어코 무감했던 낯이 산산이 조각났다. 





짭성녀

: 로판을 비틀겠습니다





이른 아침 출발 했지만 마찻길이 아닌 거친 비탈길이었기에 엽자가 중간에 솟은 나뭇가지에 가죽을 쓸리기도 했고 마부대가 말썽이었던 지라 생각보다 훨씬 늦게 수도에 도착했다. 정우의 거처가 정말 멀었나 보지. 땀을 뻘뻘 흘린 채 마차를 이끄는 마부를 바라보았다. 머지않아 공작가에 도착 했을 때 분에 넘치는 삯을 받겠으니 길게 그를 안쓰럽게 여길 필요는 없었다. 공작가로 향하던 도중 중간 광장에서 내리겠다는 루시의 말에 재현은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아까와 같이 밖을 응시했다. 재현은 전언하지 않을 것이다. 알았기에 그런 말을 뱉었다.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소공녀를 끔찍이 여기는 소공작이 그녀가 혼절할 만한 말을 전할 리가. 그렇게 미련 없이 멀어지는 마차를 눈에 담았다. 새카만 야공 아래 광장의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고 낮에 피어오르던 분수대는 잔잔하다. 야기가 꽤 마음을 차분히 만들어 좋았으나 더욱 밤이 늦어지면 위험하니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4년 만의 수도 중심지에 와 조금 까마득했지만 익숙한 상점을, 길을 따라갔다.

숨이 살짝 벅차오를 만큼 빠르게 서두르니 저 멀리 오밤중임에도 새하얀 성채가 보인다. 역시나 만개한 목련으로 뒤덮인 채 성의 끄트머리만이 보였다. 벌써부터 목련 향이 코 끝에서 넘실거렸다.


"누구냐!"


후작가 성문에 다다르면 여느 때처럼 후작가를 지키고 있던 보초병들이 있었다. 로브를 깊이 뒤집어쓴 행색이 여간 수상한 게 아니라 코 앞에 들어온 날카로운 칼 끝에 루시는 두 걸음 정도 뒤로 물러났다. 보통 출입문을 지키는 보초병(문지기)들은 후작가의 기사단에서도 말단 중에 말단이었지만 제 아무리 병아리, 말단 기사라 한들 무기를 지닌 성인 남성과 대치하는 것은 충분히 위험하다. 귀족의 거처에, 그것도 이 야밤에 닥친 이를 누가 반길까. 당연히 이를 예상 못 한 것도 아니었기에 루시는 손을 움직여 로브 안쪽을 뒤적였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계속해서 지니고 있던 후작가의 녹석을 찾기 위함이었다.


"...아."


두고왔다. 분명 갑작스럽게 소공작이 들이닥치기 전 서랍 속에 있던 녹석을 본 기억이 있는데 재현에게 자신의 방을 내어줌에 따라 챙기지 못 했나보다. 뜻밖의 경우의 수에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4년 전 아주 잠깐 머물렀던 이방인을 기억할 리 만무했다. 후작가 내부의 기사단의 수도 꽤 많았기 때문에 그때 루시를 본 자가 아닐 수도 있고. 대안을 마련 하기도 전에 더욱 깊숙이 다가온 칼날에 숨이 멎는다. 그때 처럼, 재민이 나올 때까지 버텨야 하나. 지금은 4년 전의 어린 아이도 아니고, 옆에 동혁 또한 없는데 어떻게. 메마른 입술을 적시면 끼익 하고 성문이 열렸다. 재민인가? 고개를 들어보면 2명 뿐이었던 보초병들 사이로 다수의 기사들이 터져 나왔다. 루시를 기준으로 둥글게 포위하는 꼴이 퍽 골치 아파진다. 


"어서 정체를 밝혀라!"


완전히 무장까지 한 기사단 일부가 그리 외쳤다. 소란을 일으키고 싶은 건 전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간과했다는 게 맞았다. 녹석을 미쳐 챙기지 못 한 것은 둘째고 안일한 생각으로 후작가에 출입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이제는 어엿한 소후작이 됐을 재민이 집에 눌러 앉아 있을 거라는 그릇된 생각이 이런 번거로운 상황을 만들어냈다. 루시가 작게 탄식하고 두 손을 들었다. 녹석을 찾으려던 루시의 손짓을 보고 보초병 하나가 위험이라도 감지한 건지, 통신기를 통해 다른 기사들을 불렀나보다. 사방에 퍼진 칼날에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베이겠다. 후작가가 루치아를 광적으로 섬기는 가문이라는 것을 내세워 로브를 벗고 싶어도 코 앞의 칼날이 자신을 벨 것 만 같아 그러지도 못 하겠더라. 루시가 할 수 있는 것은 재민이 어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모두 정렬!"


대치가 얼마나 지속 됐을까 로브를 쓴 탓에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외침이 아득하다. 그와 동시에 순식간에 루시를 포위하여 칼을 들이밀고 있던 이들이 무기를 거두고 전부 양 옆으로 정렬했다. 마치 귀한 누군가를 맞이하 듯이. 가까워지는 말굽 소리에 절로 몸이 돌아갔다. 새하얀 마차 위 후작가의 문양이 박혀 있었다. 그 마차 안에 있는 이가 어렴풋이 예상 되었다. 잘만 가던 엽자들이 루시 라는 장애물 덕에 멈춰 서니 마차 문이 열리고 그 아래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계단이 펴졌다. 

스윽, 고개를 들기도 전에 마차를 이끄는 엽자들이 아닌 바로 뒤에 있던 또 다른 엽자의 발굽이 바닥에 닿으면 귓가를 찌르는 서늘한 소리가 선명했다. 마치 바람을 가르는 듯한 그 소리가 통렬해 절로 몸을 떨며 눈을 꼭 감았다. 그와 동시에 퍼지는 서늘한 봄바람이 온 몸을 감싸면 새하얀 후작가와 같은 백발이 흩날려 양쪽 일렬도 서 있던 기사들은 두 눈을 확장 시킨다.

소름 끼치는 칼날이 정확히 루시가 쓰고 있던 로브를 벗긴 것이었다. 워낙 매섭고도 해백한 몸짓이었기에 루시의 오른 쪽 볼이 날에 베여 만연히 공중에 퍼지는 백 가락들 일부에 혈흔이 묻었다. 


"....."


쨍, 날붙이가 볼품 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 소리를 따라 눈꺼풀을 올리면 바닥에 널브러진 날붙이 아래 그립(Grip)에 묶인 새하얀 천이 보였다. 아. 절로 탄식했다. 천천히 고개를 올리고 항복의 표시로 치켜든 두 팔을 내렸다. 정처 없이 흔들리는 동공이 너무나도 뚜렷하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을 맞대하면 동혁은 이 모든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 표정이었다. 어릴 때 마주했던 그 모습이 남아 있어 기분이 이상했다. 나를 돌보겠다는 그 말투, 내 이름을 거칠게 부르짖던 그 외침.


"..아프잖아."


그리워하는 듯한 너의 그 표정도 여전하구나. 아프다는 루시의 말에 숨을 참고 있던 동혁은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울컥거림을 막을 길이 없다. 


"..너,"


말도 제대로 잇지 못 하는, 파테르의 뒤를 이어 새로운 단장으로 임명된 동혁의 그 모습에 기사단들은 혼란스러운 눈길을 한 채 웅성거렸다. 그도 잠시 열린 마차 입구에서 내리는 이를 보며 눈을 아래로 처박고 고개를 숙인다. 

기사들은 보지 못 할 것이다. 머지않아 이 새하얀 후작가의 주인이 될 고상하기 그지없는 소후작의 일그러진 표정을. 오롯이 그 가운데 루시만이 동혁 뒤의 재민을 마주 할 수 있었다. 왜 실종 되었다 생각했던 내가 가장 먼저 이곳에 들렀는지. 넌 알 거야. 


"....."


재민은 가만히 루시를 응시 했다. 그때 콘벤티오 대시장에서 함께 있던 그 남자는 누구인지, 도대체 이때까지 어디에 있었던 건지. 4년이 지난 지금 루시는 어엿한 숙녀가 되어 그 외관을 맘껏 뽐냈다. 재민은 앳된 아이의 모습은 어디 가고 성숙한 여인이 되어 온 루시를 보자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내가 진짜 루치아가 되어서 네 어머니를 살릴게." 


목련이 만개 할 때가 되어서 정말, 루시는 후작가로 돌아왔다. 자신의 어머니를 살리겠다는 말을 하고 사라졌을 때, 그 이름을 명부에서 확인 했을 때, 콘벤티오 대시장에서 우연히 일방적으로 그녀를 마주쳤을 때. 그 모든 순간들을 상기했다. 너를 미워하고 싶어. 너를 원망하고 싶어. 내게 미안했으면 좋겠어. 

내 어머니를 살리겠다는 그 약속을 어겨서 평생을 죄책감 속에 살았으면. 그리하기라도 하면 이 응어리 진 애증을 감당할 듯 싶었다. 그러나 정말 약조를 지키러 온 루시를 보자 재민은 온 몸의 힘이 빠졌다. 


"..루치아께서 재림하셨다."

"....."

"성문을 열어."


철창으로 이루어진 성문이 큰 소음을 내며 열린다. 

삿된 신앙이 아니었다. 재민은 깨달았다. 이제까지 자신의 신앙은 명백한 언약 신앙*이었음을.

*언약 신앙 : 구원에 대한 신의 약속을 믿고 따르는 신앙. 






짭성녀

: 로판을 비틀겠습니다


제국의 저주 받은 황태자황가와 대립하는 공작가의 소공작루시를 선망하는 빈민가의 개새끼신전 카엘룸의 추기경상단 제일 가는 후작가의 하나 뿐인 후계자황가와 맞먹는 크기의 마탑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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