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헛기침을 하며 지하철역을 향해 걷고 있었다.

 

최근 보컬 트레이닝을 하면서 성대를 혹사했더니 목 상태가 좋지 않았다.

 

‘병원에 가봐야 되나......’

 

그때 파란 스포츠카가 조심스럽게 여름의 옆에서 멈췄다.

 

“여름 씨. 회사 가세요?”

 

은영이었다. 여름은 깜짝 놀라서 멈춰 섰다.

 

“이사님!”

 

창문을 내리고 여름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은영은 말했다.

 

“타세요. 마침 할 말도 있고.”

 

여름은 주위 눈치를 살피다가 얼른 은영의 옆에 올라탔다.

 

여름이 차에 타자마자 은영은 물었다.

 

“헤디는...... 언제쯤 저희 회사를 방문한다고 했던가요?”

“다음 주 수목금 즈음이요. 그때 점심시간 쯤 해서 이사님이 편한 시간으로 잡아달래요.”

“수요일하고 금요일은 일이 바빠서 안 되겠고...... 목요일이 좋겠군요.”

 

은영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신호등 앞에서 차를 잠시 세웠다.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살피던 은영은 물었다.

 

“여름 씨 생각은 어때요?”

“네?”

“여름 씨는 만약 헤디가 우리 회사로 오면 좋을 것 같아요?”

 

여름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은영은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요. 나는 솔직한 사람을 좋아해요.”

“저는 싫어요.”

 

여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왜요? 사이좋은 언니가 같은 회사에 있으면 좋잖아요? 아. 그냥 좋은 사이가 아니지....... 어쨌든 그러면 여름 씨도 조금 회사에서 트레이닝 받는 게 편하지 않겠어요?”

“아니에요. 저는 지금도 벅차요. 에바 언니도 그렇고......”

“여름 씨. 그건 여름 씨가 싫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제가 여름 씨랑 오래 알고 지냈던 건 아니지만 그거 하나는 확실히 알겠어요. 여름 씨는 언니들한테 사랑 받을 타입이에요. 헤디랑 에바가 그렇게 여름 씨한테 목매는 것도 이해할 것 같아.”

“......”

“나도 여름 씨가 마음에 들어요. 뭐랄까. 너무 순진하고 솔직해서 방어해제가 되는 느낌이거든요. 만약 여름 씨가 지금 성격 그대로 연예계에 데뷔할 수 있다면 여름 씨도 나름대로 팬층을 확보할 수 있을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딴 것보다 착한 거에 엄청 민감하거든요. 스타일이 구리거나 노래가 구린 건 봐줘도 착하지 않은 사람은 봐주지 않아요. 연예계에서 착한 사람은 오래 가죠. 탑은 찍지 못해도.”

“그러면 탑은 어떤 사람이 찍는 건지......”

 

은영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여름을 슬쩍 바라보며 대답했다.

 

“탑은 착한 사람도 아니고 순진한 사람도 아니고 독한 사람이 찍는 거예요. 헤디 자주 보셨으면 알 거 아니에요?”

 

여름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은영의 스포츠카는 화이트로드 본사에 있는 넓은 주차장에 도착했다.

 

“여름 씨. 트레이닝 들어가기 전에 지하 카페에 잠깐 들를래요?”

“네? 트, 트레이닝 늦으면 보컬 선생님이 뭐라고 할 건데요?”

“저랑 잠깐 이야기하느라 늦었다고 하면 뭐라고 할 사람 이 회사에 아무도 없어요. 잠깐 여름 씨랑 수다 떨면서 머리를 비우고 싶어서 그래요. 요즘에 일이 많아서 바보가 된 느낌이거든요.”

 

스포츠카 시동을 끈 은영은 바로 지하 카페로 향했다. 여름은 기가 죽은 표정으로 은영의 옆에 붙어 따라갔다.

 

은영이 지나갈 때마다 여기저기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목에 사원증을 건 직원들, 간부들, 트레이너들 모두 은영을 보자마자 가볍지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회사에서 은영의 위치가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다. 은영은 그런 인사들이 익숙한 듯 일말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카페 테이블에 앉자 은영이 물었다.

 

“여름 씨. 혹시 꿈 자주 꿔요?”

“네? 꿈이요? 잘 때 꾸는 그 꿈이요?”

“네. 꿈이요. 드림.”

 

커피를 마시며 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은 기억을 뒤지다가 대답했다.

 

“삼 일에 한 번은 꿔요. 이렇게 말하니까 자주 꾸는 것 같네요.”

“자주 꾸는 거 맞아요. 저는 원래 일 년에 두어 번 꾸거든요. 그런데 요즘에는 피곤해서 그런지 꿈을 자주 꿔요. 보름에 한번 정도 꾸고 있으니 저 치고는 자주 꾸는 거죠.”

“피곤한 사람은 꿈을 자주 안 꾼다고 그러던데요. 꿈을 꿀 사이도 없이 깊이 잠들어서 그렇다고......”

 

여름이 그렇게 대답하자 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는 잠자는 일과도 일처럼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매일 정해진 시간에 자고 정해진 시간에 일어났어요. 요즘에는 회사 일이 많아서 그런지 멘탈적으로 좀 흔들렸어요.”

“이사님이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지금이랑 똑같으실 것 같은데요?”

 

여름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아차 싶었다. 실례되는 말을 한 게 아닐까?

 

다행히 은영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제가 이렇게 무감각해 보여도 생각보다 감성적이고 멘탈도 약한 인간이에요. 아이스 프린세스라는 별명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저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은영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기지개를 쭉 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감정이 없는 인간은 아니에요.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조금 잊어버린 것뿐이죠. 이런저런 일을 겪다보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가령 여름 씨랑 친한 에바만 봐도 얌전한 가면을 쓰고 아닌 척 하고 있죠. 실은 누구보다 감정적이고 뜨거운 성격인데.”

“맞아요. 동감해요.”

 

여름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영은 여름을 자세히 바라보고는 말했다.

 

“여름 씨는 왜 언니들한테 이쁨 받는지 이제 알 것 같아요. 여름 씨는 말을 굉장히 잘 들어주는 재주가 있네. 말을 듣는데 표정도 자기 일처럼 진지하고. 저 원래 이렇게 개인적인 이야기 술술 늘어놓는 사람 아니에요. 그런데 여름 씨 앞에 있으니까 이야기가 술술 잘 나오네요. 여름 씨 혹시 상담치료사 같은 거 생각해본 적 없어요?”

“네? 아, 아니요. 그런 일 하려면 공부를 잘해야 하는데...... 저는 공부를 못해서요.”

“역시 솔직해서 좋네요. 저는 미국에서 대학교 졸업했거든요.”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대학굔지 물어봐도 되나요?”

“구체적으로는 안 알려드릴게요. 아이비리그 쪽이에요. 그런데 그런 거 의미 없어요.”

“네?”

“공부라는 거...... 요즘에 정말 자신한테 필요해서 열심히 하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요. 필요해서 한다기보다는 일종의 자기증명 과정일 뿐이죠.”

 

은영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나마 여름이 봤던 은영의 표정 중 사람다운 표정이었다.

 

“여름 씨. 지금까지 우리 회사 어떤 거 같아요?”

 

여름은 입을 다물고 신중하게 대답을 생각했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솔직하게 말했다.

 

“모르겠어요. 제가 있을 회사는 아닌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요?”

“제 재능에 맞는 회사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이 회사는 연예계 쪽으로 잠재력이 엄청난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에요. 저는 그렇지가 않거든요.”

“여름 씨. 이럴 때는 그렇게 솔직하지 않아도 돼요.”

“네?”

“허세도 부리고 생각보다 별 거 아니라고 거짓말을 해도 괜찮단 뜻이에요. 이건 여름 씨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세상은 이럴 때 솔직한 사람들을 만만하게 보거든요.”

 

***

 

“김은영을 만난다고?”

 

카페 ‘꿈의끝’에서 헤디는 민경을 만났다. 헤디는 커피잔을 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김은영 알아?”

헤디가 묻자 이번에는 민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화이트로드에서 런칭한 걸그룹 애들한테 안무를 만들어준 적이 있어. 내가 직접적으로 김은영을 만난 건 아니야. 그런데 계속 김은영이 내가 만든 안무 빠꾸 먹였거든.”

“진짜? 언니 안무 만드는 실력으로 빠꾸 먹이는 사람이 있어?”

“한 스무 번 정도 빠꾸 먹은 거 같아. 나중에는 오기가 생기더라. 페이 세게 댕겨 준다고 해서 그쪽 일 받아줬던 건데. 그때 이후로 화이트로드 쪽은 쳐다도 안 봐.”

 

그렇게 말하고서는 차를 마신 민경은 조용하게 말했다.

 

“김은영 우습게 보지 마. 안 좋은 소문도 많은 사람이야. 그 젊은 나이에 다른 이사들 머리 밟고 그 자리에 올라간 사람이기도 하고. 화이트로드 회장 조카라고 하긴 하는데 그렇다고 핏줄 잘 만난 게 다가 아니야.”

“그건 알고 있어. 그런 사람을 다루는 건 나도 어느 정도 익숙해. 나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거든.”

 

그렇게 대답한 헤디는 저편을 바라보고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고 여름이가 걱정이네.”

“여름이가 왜?”

 

헤디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여름이가 김은영 앞에 서면 사자 앞에 선 아기사슴 같을 것 같아. 김은영 같이 야망 많고 흑심 많은 사람이 여름이를 어떻게 이용하려고 들까? 여름이는 그런 사내 정치나 정치질하고는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인데.”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한 찻잔을 바라보던 민경이 말했다.

 

“글쎄. 나는 그쪽으로는 별로 걱정 안 해.”

“왜?”

“여름이는 그렇게 영민하게 머리를 굴리는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는 재주가 있거든. 왜 아무 생각 없이 툭 던졌는데 허를 찔리는 느낌 있잖아. 내 생각인데 김은영이 여름이를 이용하려고 들면 그 여자도 고생 좀 할 거야.”

“그럴까? 정말 그렇게 되면 좋을 건데......”

“걱정하지 마. 나는 정말 궁금한데. 김은영이 여름이랑 무슨 대화를 할지.”

“나도 그래.”

 

헤디는 그렇게 대답을 하고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말을 덧붙였다.

 

“여름이가 좀 귀엽잖아.”

 

***

 

오전 보컬 트레이닝을 마친 여름은 혼자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한창 숟가락을 뜨려는 찰나 저쪽에서 누군가가 쭈볏쭈볏 다가왔다.

 

“저기...... 보컬 트레이닝 팀에 구여름 씨 맞죠?”

 

여름은 시선을 돌렸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거 같은 여자 아이들이 그곳에 서 있었다. 네 명이었는데 네 명 다 나이는 비슷해 보였다.

 

“네. 맞는데요. 누구신지......?”

 

여름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대답하자 말을 걸었던 여자 아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혹시 내년쯤에 또 저희 회사에서 걸그룹 런칭하는 거 아시나요? 소문으로는 데뷔조도 다 정해졌다고 그러던데......”

“아니요. 금시초문이에요. 저는 아이돌 팀이 아니에요. 댄스 트레이닝도 안 받고 보컬 트레이닝만 받고 있어요. 정말 죄송하지만 그쪽으로는 하나도 모르겠어요.”

 

여름이 정중하게 대답하자 말을 걸었던 여자아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최고이사님한테 알아봐주실 수 있나요? 구체적인 정보를......”

“네?”

 

여름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자 그 여자아이는 말을 이었다.

 

“저희한테는 인생이 걸린 일이거든요. 어떻게든 데뷔조에 들어가고 싶어요. 여름 씨, 아니 여름 언니. 최고이사님이랑 친하죠? 연습생들 사이에서 모르는 사람 없어요.”

“뭐라고요?”

 

여름이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반응하자 그 여자아이는 말을 계속했다.

 

“저희 회사에서 데뷔조는 최고이사님이 최종 결정해요. 데뷔조, 컨셉, 안무 디렉팅, 뮤비 모든 분야에서 김은영 이사님 결정이 안 들어간 부분이 없어요. 저....... 혹시 여름 언니가 이사님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으면.......”

“정말 없어요. 하나도 몰라요. 전 저희 회사에서 걸그룹 또 데뷔시키는 것도 지금 알았어요.”

 

여름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대답하자 여자 아이들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여름에게 말을 걸었던 여자 아이는 간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이건 알아봐 주실 수 있나요? 김은영 이사님이 저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제 이름은 김지나라고 하는데......”

“지나 씨. 정말 미안해요. 저 김은영 이사님이랑 그런 이야기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 아니에요. 그냥 출퇴근길에 몇 번 차 얻어 탄 게 다에요.”

“왜 거짓말 하세요? 지난번에 저쪽에 있는 카페에서 이사님이랑 커피 마시면서 이야기도 하셨잖아요. 여름 언니가 아이스 프린세스랑 친하다고 하던데.”

“그때는 잠깐 이사님이 보자고 해서......”

“여름 언니!”

 

지나는 여름의 밥그릇이 있는 테이블을 두 손으로 세게 치며 소리쳤다.

 

여름은 깜짝 놀라서 몸을 흠칫 떨었다.

 

“제가 말했잖아요. 저희한테는 인생이 걸린 문제라고...... 제발 부탁해요. 무엇이든 좋아요. 내년 런칭하는 걸그룹에 대해서 아무거나 알아봐 주세요. 김은영 이사님 의중을요. 네? 저 지금 연습생 신분이라 폰이 없거든요. 대신 저희 엄마 폰 번호 알려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는 지나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여름은 이 아이가 얼마나 오래 연습생 생활을 했으며 어떤 고생을 했는지를 단박에 느낄 수가 있었다. 그만큼 지나는 간절했다.

 

여름은 생각했다.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됐지? 나는 잘난 것도 하나도 없는데. 주위 사람들이 잘났단 이유만으로 나한테 이런 부탁을 하고 사정을 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지?

 

여름은 지난번 자신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연민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여름은 결국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도는 해 볼게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고마워요. 여름 언니.”

 

지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여름의 손을 꽉 잡았다.

 

여름은 고민했다.

 

이걸 어떻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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