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료분입니다.

벌써 4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다가오는 5월,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매달 초에 하는 결심입니다만, 이번 달은 지난달보다 부지런히 살 겁니다! (제발;)

그래도 건강이 최고입니다! 건강하세요~!!



숨을 죽인 서재희가 인기척이 사라지자마자 가뿐하게 뛰어내렸다. 반동으로 흔들린 나뭇잎은 산을 넘어가는 바람 소리에 묻혀버렸다. 서재희는 나무 위에서 지켜본 대로 함정을 피해 바위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동쪽으로 열다섯 발걸음, 미행한 자와 같은 보폭으로 걸은 뒤 검집으로 바닥을 네 번 내리쳤다. 잠시 후 빗장이 풀리는 소리가 나더니 흙바닥이 위로 살짝 솟구쳤다. 서재희는 그 틈으로 검을 꽂아 넣고 판자를 들어 올렸다.


"누-!"


문지기가 큰 소리를 내 침입자를 알리기도 전에 목덜미에 가해지는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다. 서재희는 문지기의 정수리를 잡아 위로 끌어올렸다.


"전하. 저희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도술을 쓰는 자들이다. 경계를 늦춰서는 안된다."

"예."


서재희를 따라온 천용사 중 절반은 지상을 지키고 절반은 그와 함께 지하로 내려갔다.


굴이 깊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오래 머물 용도로 마련한 근거지는 아닌 듯 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도술을 악용하는 무리가 산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단은 파견 가능한 인력을 차출하여 도성 중심부터 사방으로 조사를 보냈고 그 결과가 이틀 전부터 속속 궐로 돌아왔다.


마침 서재희가 요양을 위해 도성 밖, 외가에 신세를 지내고 있었다. 약을 먹었음에도 하루에 한 번씩은 갑자기 찾아오는 극심한 편두통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보는 게 어떠하냐는 태의의 권유로 궐 밖, 아예 도성 밖으로 나온 것이다. 어릴 때나 들렀던 외갓집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크게 바뀐 게 없었다. 아직 정정하신 외조부모와 근심걱정 없이 지내길 1주일, 매일 주고받던 편지 속에 사태를 알리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마침 근처에 수상한 무리가 모여 있다고 하니 직접 가 처리해주길 바란다는 명령에 서재희는 곧장 검을 차고 방을 나섰다.


문지기가 한명인 것을 보아 하면 아직 체계가 덜 잡힌 소규모 조직인 것은 맞으나 그렇다고 재미 때문에 모여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서재희는 앞서가는 천용사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자신이 앞장섰다.


미세하지만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잡담을 통해 무언가 정보를 얻어낼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었다. 하염없이 기다리기엔 지상에서 망을 보고 있는 천용사들이 신경 쓰였다. 서재희는 검을 등 뒤로 숨기고 모습을 드러냈다.


서재희가 소리 없이 나타나자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경계했다. 성인 남성 열 명이 들어가면 가득 찰 법한 넓지 않은 공간이었다. 바닥에는 돗자리가 깔려 있고 그 위에 방금까지 함께 읽고 있던 책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여럿이 모여 함께 책을 읽고 연구하는 쪽으로만 활동해 왔다면 처벌 수위는 낮을 가능성이 높았다. 가진 무기도 없는 사람들에게 검을 겨누어 위협하는 대신 순순히 따라올 것을 타이르는데, 벽에 붙어있는 사람에게서 묘한 기류가 느껴졌다.


남자가 부적을 펼치고 주문을 외치려는 순간이었다. 눈앞에 붉은 장막이 쳐지더니 손에 감각이 사라졌다. 허공으로 튀어 오른 선혈은 얼굴과 옷으로 튀었고 부적을 쥔 손은 발치로 떨어졌다.


"으...으아아악!"


사라졌던 손의 감각이 통증으로 덮쳐왔다. 뼈와 살이 드러난 손은 제 신체가 아닌 듯 낯설었다. 고통과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사이, 다른 세 사람 또한 천용사들에 의해 무력으로 제압되었다.


서재희는 검에 묻은 피를 그의 옷에 닦아내었다. 쪼그려 앉아 피를 닦는데, 누군가의 발길에 차인 책이 옆으로 굴러왔다. 바닥에 흩뿌려진 피를 머금기 전에 빠르게 들어 올린 서재희는 휘리릭 책을 넘겨보았다.


"전하. 올라가시지요."

"......"

"귀인 전하?"


서재희는 나머지 책도 들고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 먼저 궐로 가 봐야겠는데."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바로 폐하께 독대를 청한 뒤 주변을 물리게. 곁에는 천용사와 도내관만 남기고 꼭 다 물려야 하네."


서재희가 가장 먼저 펼쳐보았던 책을 천용사의 품 안에 숨기며 속삭였다.


"쥐새끼가 있었다고."


***

"부황."

"오냐."

"아버지가 식사 중에는 밥만 먹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예외다."

"왜입니까?"

"황제라 밥 먹는 시간도 아껴서 일을 해야 하거든."

"지난번에 두 분이 세 시간 동안 후원에서 산책하신 거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이다. 재희가 돌아오면 함께 놀아야 하니 지금 미리 일을 당겨 하느라 매우 바쁜 것이다."

"치이..."


이단은 다시 젓가락질을 시작하는 아들의 입이 반 이상 튀어나온 것을 보았다. 하긴, 저가 같이 먹자고 불러 놓고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아들에겐 시선 한번 주지 않았으니 서운해하는 게 마땅했다. 이단은 붓을 내려놓고 대신 숟가락을 들었다.


"아버지가 보고 싶습니다."

"나도 그렇구나."

"일주일이나 남았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나도 과거의 내 입을 꿰매 버리고 싶다."

"아버지의 외가가 궐에서 많이 멉니까?"

"그다지 멀지는 않지만..."

"인사 드리러 가면 안됩니까?"

"안 돼."

"예. 그냥 해본 소리입니다."


이단은 이재인이 가시를 바르느라 고군분투 중인 생선을 제 앞접시로 옮겨 가시를 발라주고 다시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이미 큰 가시들은 정리되어 올라오는데도 이재인은 섬세하게 모든 가시를 제거했다. 그냥 씹어 먹어도 될 만큼 얇은 가시도 예민하게 느껴대는 혓바닥이라 어쩔 수 없었다.


"편식하지 말거라. 감시하려고 부른 것이다."

"부황께서도 편식하지 마십시오. 제가 다 보고 있습니다. 아직 연근조림은 드시지 않았습니다."

"이제 먹으려 했다, 이제."


이단이 연근을 한입 베어 무는 것을 똑똑히 보고 나서야 이재인이 장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에게서 저를 본 이단이 픽 웃었다.


"아 참, 부황. 청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냐."

"학사를 바꿔주십시오."


이재인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학사들과 공부를 했다. 태자가 학사와 마찰이 있었다는 보고는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단은 적잖게 놀랐다.


"학사 누구."

"전정수."


이름 석자만 부르는 것에서 이재인이 품은 깊은 분노가 느껴졌다. 이단은 전정수라는 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푹 꺼진 볼살과 고집스러운 성격이 드러나는 짙은 눈썹이 특징적인 노신이었다.


"그자는, 성현들의 말씀을 제 입맛대로 바꾸어 피력하는 간악한 자이옵니다."


이단 또한 그자에게 딱히 좋은 감정을 품고 있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간악'하다는 표현을 쓸 정도인지는 의문이었다.


"어찌하여?"

"유유상종이란, 인재가 저들끼리 모인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허니 인재를 모으기 위해서는 저부터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해석했습니다."

"헌데?"

"그자는 본래의 의미를 비틀고 퇴색시키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유유상종이 수준이 맞는 자들끼리 모여야 한다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까?!"


이재인은 주먹을 쥐고 분한 듯 제 무릎을 내리쳤다. 사선으로 치켜 올라간 눈썹과 씩씩대는 숨소리는 그가 매우 화가 나 있음을 보여주었다.


서재희는 주강과 석강을 선보윤과 함께했다. 이재인이 학사들과 마주 보고 앉고 선보윤의 자리는 학사들보다 뒤쪽에 마련되었다. 그는 누군가가 발언권을 주지 않는다면 그저 이재인과 학사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혼자 책을 봐야 했다. 본인은 크게 개의치 않아 했으나 선보윤의 수준을 아는 이재인은 늘 안타까웠다. 그도 함께 강의에 참여한다면 서로에게 더 유익한 시간을 보낼 것 같았으나 학사들의 대부분이 반대했다. 저희는 태자를 교육하기 위해 모인 것이지 일개 배동은 수업에 끼워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한술 더 떠서, 황제의 허락이 있었음에도 선보윤이 강의에 함께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학사도 적잖게 있었다. 그중 가장 노골적으로 배척하는 자가 전정수였다.


'범의 무리에 개가 끼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있으십니까? 없으시겠지요.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이것 또한 유유상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미를 확장해보자는 얘기입니다. 성어라는 것이란 게 본디 의미의 모임인데 한 글자 안에도 여러 뜻이 있거늘, 그것들이 모여 이룬 말도 여러 의미로 해석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명확히 정해져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고를 확장해가는 것은 성군이 갖춰야 할 자질 중 하나이지요.'


말을 이것저것 갖다 붙이며 결국 하는 말은 '선보윤과 그만 어울리라'는 것이었다. 처음 저의를 이해했을 땐 화가 났으나 스승이니 대들 수 없다는 이성으로 손만 부들부들 털었다. 그 다음은 제가 알고 있는 유유상종의 뜻은 그렇지 않다며 웃어 넘겼고, 대충 웃음으로 얼버무렸고, 정색하며 대꾸도 하지 않기까지. 이재인은 몇번이나 참아 넘겼다. 그 옆에 선보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보윤은 몇몇 학사들의 멸시에도 불구하고 늘 제 자리를 지켰다. 이재인은 더이상 그가 상처받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젓가락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다시 반복했다.


"학사 전정수에게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이단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파악했으니 일단 지켜보겠다면서 당장은 이재인의 청을 받아주지 않았다. 식사 후 태자전으로 돌아온 이재인은 곧바로 전정수와 대면해야 했다.


오늘은 선보윤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그의 모친에게서 편지가 세통이나 왔기 때문이다. 두통까지는 답신으로 가지 않겠다 버티던 그도 더는 무리였는지 아침 해가 뜨자 밥도 먹지 않고 궐을 나섰다.


"오늘은 선가의 자제가 없군요?"


전정수가 눈에 띄게 기뻐했다. 매번 불만 가득히 찡그리고 있던 미간이 평평해지고 입꼬리가 올라가며 앞니가 드러났다. 주름진 얼굴에도 미소가 곁들 수 있다는 것에 적잖게 놀란 이재인이 대꾸도 못하고 멍하니 전정수를 바라보았다.


"...학사는, 보윤이가 있는 게 그리도 싫었소?"


그렇지 않고서야 학사에게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미소를 하필 지금 볼 수가 있나?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간 폐하께서 허락하셨다고는 하나, 배동이 이 나이껏 태자전하와 함께 강의를 듣는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지요. 애초에 선가의 자제가 끼어 있을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 애초라는 것은 누가 정하는 것이오? 선대께서 그리해 오셨으면 나도 그리 해야 하는 것이오?"

"선대께서 그리해 오신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난 잘 모르겠소만. 말이 나온 김에 말하는데, 전 학사. 내가 그동안은 그저 웃어 넘겼지만 사실은 학사가 보윤이를 두고 하는 말들, 듣고 있기 불편했습니다. 앞으로 그런 말은 삼가셨으면 합니다."

"무슨 말을 삼가란 말씀이시옵니까?"


이재인이 모르쇠 하는 학사를 향해 눈을 번뜩였다.


"보윤이를 두고 한 모든 말들. 더는 참지 않을 것입니다."


선보윤이 돌아오기 전까지, 이재인은 학사와 담판을 짓기로 결심했다.

***

선보윤이 궐에서 지내는 기간이 길어지고, 서가와 황실에서 도술을 배우기 시작하자 선세랑도 더 이상 숨어 지낼 수는 없었다. 도성에서 두 시간 거리의 조용한 곳으로 이사를 한 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에서 궐을 지켜보았다. 아들과도 간간이 서신을 주고받았고 지용군으로 근무중인 제자들에게 아들과 관련한 이런저런 얘기도 전해 들었다. 대체로 문제없이 지내고 있는듯 하였으나 가끔 털이 쭈뼛 설 정도의 소식도 들려오곤 했다.


"어쩌자고 발설했느냐."


이제 막 문지방을 넘기 시작한 선보윤에게 대뜸 타박부터 내뱉는다. 그만큼 소식을 들은 이후 줄곧 애를 끓였으리란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라, 선보윤은 곧장 눈을 내리깔았다. 선보윤은 저를 홀로 궐에 보내고 매일 속을 태웠을 모친을 향해 절을 올렸다.


"소자, 어머니를 뵙습니다. 그간 기체 강녕하시었사옵니까."


야단 칠 일이 있을 때나 불러 매섭게 혼을 내는데도, 안녕하셨냐며 공손히 인사를 하는 아들을 보고 있자면 묵직한 돌덩이가 첩첩이 쌓여 가슴을 짓눌렀다.


"어찌하여... 어쩌자고..."


아들 입단속을 잘 시키라는, 밑도 끝도 없이 짤막한 황제의 경고가 서신으로 도착했을 때 선세랑은 곧바로 서신을 보내 선보윤을 호출했다. 제 잘못을 알기는 아는지 두 번이나 빼던 아들은 결국 세 번째 서신을 보내고서야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들이 조정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알게 된 경위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어른이, 늙은이에 가까운 것들이 차마 태자에게 할 수 없었던 말들을 만만한 배동에게 털어놓은 것이겠지.


"폐하께선 뭐라 하시던."


궐이란 무서운 곳이었다. 사방이 막힌 곳에서 작게 속삭인다 하여도 금방 궐의 쥐와 새들이 곧장 황제에게 퍼 날랐다. 귓속말로 했어도 모자랄 판에 들으란 듯이 또박또박 얘기했으니 거의 첫마디부터 마지막 말까지 고스란히 황제의 귀에 들어간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아주 불경한 말들이었다. 이재인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태자전으로 돌아가고 나서, 반대로 선보윤은 후회를 곱씹었다.


가장 먼저 선보윤을 불러낸 것은 황후였다. 하지만 황후전으로 가는 도중 황제의 집무실로 방향을 틀었다. 언제 가도 숨이 턱 막힐 만큼 위압적인 곳이었다. 드디어 크게 경을 치겠구나 싶었다. 어떤 벌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위험한 말들이었으니 목이나 붙어있으면 다행이었다.


장형까지는 당연하게 예상하고 황제 앞에 넙죽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이마를 바닥에 붙이고 들지 않았다. 머리를 들어도 좋다는 허락이 없었기 때문에 계속 자세를 유지했다. 꿇어 앉은 다리는 저리고 낮아진 이마에 피가 쏠려 눈 뜨는 게 버거워질 때쯤, 황제에게서 허락이 떨어졌다.


'네가 생각 없이 그런 소리를 할 아둔한 머리는 아닐 터인데. 덕분에 뭐,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던 것 같긴 하다만.'

'그 정도 충격은 드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불경한 말들이었으니 폐하께는 송구합니다. 어떤 벌을 내리시든 달게 받겠습니다.'

'내 아들이었으면 종아리를 치든 곤장을 치든 했을 텐데, 그럴 수도 없고.'

'저는 괜찮-'

'조만간 선가의 가주가 부르지 않겠느냐. 나나 황후가 아니어도 널 혼낼 사람은 따로 있는 듯 하니, 그때 가서 달게 받거라.'


황제와의 대화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선보윤은 고개를 저으며 별말씀 없으셨다 답했다.


"후......"


선세랑은 미리 꺼내 둔 회초리를 들었다 내려놓길 반복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밥은."

"아직입니다."

"방에 들어가 있거라."


경시와 멸시를 홀로 감당하고 있을 아이가 안타까운 마음에 결국 회초리를 들지 못하고 내려 놓았다.


***

"...태자 전하."


서고의 한 구석에 웅크리고 누운 이재인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전하. 이만 돌아가심이 어떠하신지요."

"안 가."

"허면 지성전은 어떠하십니까? 그리 이불도 없는 곳에 누워 계시다 감모라도 걸리실까, 심히 저어되옵니다."

"...보윤이도 없는데 거길 왜."

"그래도 이리 냉한 서고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아님 다른 전각으로라도 가시지요."

"...보윤이가 자기도 없는데 함부로 들어왔다고 기분 나빠하면 어떡해?"


박상궁은 '궐에서 태자 전하가 못가시는 곳은 없다. 지성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는 폐하와 태자전하의 은덕으로 머물고 있을 뿐, 주인이 아니다.' 라는 말을 삼켰다. 이재인이 주강을 피해 서고에서 나오지 않는 이유가 바로 선보윤을 일개 배동 취급한 전정수 때문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전하께서 이리 냉골에 누워 계시는 것을 더 걱정할 아이 아닙니까. 고뿔도 잘 걸리시는 분이 이리 고집부리시면 저희 같은 아랫것들은 물론, 보윤이도, 어른들도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궁인의 간곡한 부탁에 이재인은 선보윤이 없는 지성전에서 이불을 깔고 누워 멍하니 시간을 죽였다. 강의를 거부하기는 처음이라 심장이 벌렁거렸다. 석강을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태자전으로 돌아간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 다시 일과에 집중했다.





"오셨습니까, 귀인 전하."

"다녀왔네. 별일 없었지?"


예정일보다 서둘러 도착한 서재희가 흘러가는 말로 물었다. '그럼요. 별일 없었습니다.' 하고 돌아왔어야 할 대답이 없자, 서재희는 옷을 갈아입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그것이...큰 일은 아니옵니다만...태자전하께서 주강을 거부하고 계십니다. 그 일로 근무전에 불려가신 참입니다."

"폐하께 곧 인사드리러 가겠다고 전하게."

"예, 전하."


서재희는 궐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이마를 짚었다. 속이 이리도 답답하니 한숨을 안 쉴 수도 없었다.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 쉬고, 입다 만 옷을 마저 입었다.


서둘러 근무전으로 향하자 기다리고 있던 궁인들이 막힘없이 문을 열었다. 마지막 문이 열리고, 동그란 뒤통수와 그 너머로 황제의 심드렁한 얼굴이 보였다.


"폐하, 태자전하."

"아버지!"


이재인은 서재희의 소식을 듣지 못했는지 깜짝 놀라면서도 활짝 웃으며 반겼다. 저에게 달려와 안기는 이재인을 안아 들고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분위기가 걱정한 것만큼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이단 또한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서재희가 반가워 당장이라도 껴안고 싶었지만 단란하게 끌어안기엔 방금까지 이재인을 꾸짖던 중이라 난감했다.


"태자전하. 주강 시간 아니십니까?"

"...맞습니다."

"헌데 왜 여기 계십니까."


방금까지 헤실헤실 웃고 있던 이재인이 입을 딱 다물었다.


"땡땡이 치는 중이다."

"이유가 있습니다!"


발끈한 이재인이 배신감이 담긴 표정으로 이단을 째려보았다. 전정수는 이재인이 가만있지 않겠다고 선포한 다음날, 어김없이 그의 속을 긁었다. 친구를 가려 사귀어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말들은 그를 자극했고 수업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오게 했다. 벌서 나흘째, 이재인은 주강을 거부하는 상태다.


"부황께선 약속도 안 지키시고!"

"지켰다. 전 학사에게 그날 바로 자중하라 일렀거늘."

"허면 그자가 황명을 어긴 것 아닙니까?"

"전 학사를 다시 불러 한 번 더 경고할 테니 이만 주강에 참석하거라."


이재인은 더 할 말이 남아있었지만 서재희가 어깨를 꽉 붙잡아서 위를 먼저 올려다보았다.


"일단 태자전으로 돌아가 있으렴.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단다. 못다 한 얘기는 저녁에 하고."


이재인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이내 물러나야 했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서재희의 낯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이 내관.”

“예, 전하.”


아직 주강 시간이었기 때문에 태자전 대신 지성전으로 가던 이재인이 돌연 이내관을 불렀다.


“저녁은 아버지와 먹을 거야. 수라간에 진수성찬으로 준비하라고 일러 둬. 그리고…소화가 잘 되는 음식들로, 질기거나 자극적인 피해서.”

“속이 불편하십니까?”

“나 말고, 아버지가. 표정이 안 좋으셨어. 괜히 또 체 하실까 봐 걱정이야.”

“예. 허면 태의에게도 혹시 모르니 준비하라 일러두겠습니다. 그리고 식전에 소화를 도울 만한 약재를 올리라 전달하겠습니다.”

“그래. 오랜만에 궐에 돌아오셨으니까 즐겁게, 많이 드셨으면 좋겠어. 보윤이도 어서 돌아왔으면 좋겠다. 편지라도 쓸까?”

“다 쓰시는 대로 바로 전하겠습니다.”

“응!”


이재인이 나흘간 태자전을 대신해 머물고 있는 지성전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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