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격률청서

“아이고 됐네, 이 사람아. 내가 왜 그런 화를 부르나.”

거절은 일언지하에 나왔다. 일순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금세라도 검을 뽑을 수 있도록 검파를 쥐었던 손에서 힘을 뺐다. 대답이 찰나라도 늦었다면. 글쎄. 충현이 이번 생에서 윤윤이란 자를 다시 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검은 내 주력 무기가 아니다. 이 거리에서 무인의 목숨을 붙여 무력화 시킬 재주는 없었다. 발출되려던 힘을 급히 제동시키자, 손등의 뼈가 피부를 뚫을 듯 허옇게 치솟고 흥분한 혈관이 불퉁거렸다. 나는 분노했으나 흥분하지는 않았다. 아직. 아직은 아니다.

“다른 게 아니고 여기 머무는 게 공께는 재액인 듯 한데.”

그럼에도 나는 늘 놓치지 아니하는 호흡을 흐트러트리고 말았다. 나를 지칭하는 한 단어로 인하여. 재액. 나를 그렇게 부르며 저주하던 왕후장상은 여럿이었다. 이제까지는 그 말에 동요한 적이 없었다. 너희가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렸다면 왕조가 기마의 발굽 아래 스러진 뒤 백성들이 환호하며 성문을 열지도 않았으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지금은.

“주인어른, 잠시만요. 창을 닫지요. 이 날씨에도 한기가 드나 보군요. 어휴.”

윤격호는 월국에 드문 고수였다. 그는 미심쩍은 기색을 느낀 듯 창가로 오더니 주변을 한참 살피고는 창을 닫았다. 그런 그도 나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병적으로 조심성 많던 숙부를 죽일 때도 쓴 절정의 은신술이다. 실전의 경험이 드문 이는 전장에서 익힌 나의 기예를 뚫어보지 못했다. 나는 간자처럼 기운을 죽이고 창 바깥의 수목 그림자 아래에 선 채 방 안의 기척에 귀를 곤두세웠다. 아마도 내 눈엔 핏줄이 서 있을 것이다. 믿음을 모르는 자의 눈이다.

그렇다. 나는 문충현을 믿지 않았다. 그가 그리도 윤격호를 만나고자 하는 이유를 알아야 했다. 기정이 부러 자신이 애를 쓴 것처럼 생색을 내 진태감을 물러나게 했다. 매일 조석으로 자신의 상태에 대해 고해다 바치는 늙은 환관도 치우고, 나 역시 치워서 그가 진정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자 했다.

“내가 가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재액이 될 걸세. 그분은 이른 나이에 가족을 잃고 세상을 떠도신 분이네. 정 준 이가 적은 사람의 정은 깊고 진득한 법이야. 심지어는 아직 젊으시기도 하잖아. 황홀하면서도 폭렬한 시절이지. 이미 나는 한 번 잘못 판단을 했어. 두 번 같은 잘못을 할 순 없다네. 들어 보게 윤윤. 가질 만큼 가져야 없어지는 것이 욕심이네. 충분하다 넘쳐 지겹도록 주어지고 청하거나 애원할 필요도 사라져야 끝이 나는 걸세.”

폐부를 터트릴 듯 콜록이는 소리. 쌕쌕 몰아쉬는 숨. 그건 모두 자신을 구하겠다고 나선 이를 만류하기 위해 동원된 수고다.

“아이고 숨 넘어갑니다. 아무 것도 안 할테니 앉아서 여기 물 드십시오. 왜 진태감이 차도 아니고 물을 주나 했더니 원 목구멍으로 뭘 넘기는 게 다 일입니다 일.”

윤윤이란 자는 익숙한 기색으로 주인의 등을 도닥도닥 두드렸다. 충현의 숨이 바르게 되었다.

“다만 내가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고 있는데도 황상께 마음에 찰 만큼 온전히 가졌다는 느낌을 못 주는 게 재주의 모자람이야. 나는 내줄 거 다 내준 거 같은데 왜 아직도 뭘 덜 가져서 그리 허기진 눈을 하시는지 모르겠어.”

“흠. 더 지겹고 질리게 구질구질한 꼬락서니를 보여줘야 하나 보죠.”

“볼 꼴 못 볼 꼴 충분이 다 본 거 같은데. 토하고 지리고 눈이 훼까닥 넘어가고. 보통 사람이면 역해서 다신 손 안 댈 것 같은 꼴 수없이 보였네. 인젠 아주 약재냄새나 풀풀 나는 목내이가 됐는데도 해결이 안 나는 게 좀 의아해.”

“이 윤모가 의견을 올리자면, 어차피 문공의 말라 비틀어진 생김새는 사태에 영향이 없는 듯 하니 그 방면의 노력은 포기하란 겁니다. 벌써 흑백무상이 혼과 백을 거두고 흩으려 대기하고 있는 꼴입니다. 더 하면 저승 문턱 곧장 넘겠는데요. 식사나 잘 챙겨서 기를 좀 보하십시오.”

“내가 일부러 식사를 거르나? 아닌 거 잘 알지 않나! 허, 참.”

“그러니까 노력의 방향을 달리 하여 황상께 연모라도 속삭여보라고요. 집착 많은 노인네가 아름다운 황상을 사랑하여 저를 두고 가기도 원치 않고 항상 곁에 있으셨으면 한다고요. 여기 보물 많네요. 청자며 분채를 깨고 비단이라도 찢으면서 울어 보시죠. 다른 이들은 돌아보지도 말라고 투기를 하고요.”

“아하. 이럴 줄 알았담 조왕의 호귀비에게 사람 질리게 하는 애원을 어찌 하는지 물어 볼걸 그랬네.”

“고향으로 돌아갔다던데. 지금이라도 한 번 수소문 해볼까요?”

“이 사람. 농이네 농. 애초에 말이다, 그런 얄팍한 말이며 행동에 넘어 가줄 분이면 내가 아직도 붙잡혀 있지 않겠지?”

“허. 시도는 해 봤습니까?”

“윤윤아. 내가 한 십 초 정도 생각해봤는데, 벌써 녹두죽 먹은 게 올라오려고 한다. 마디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중늙은이가 그런 역한 짓을 하면 보는 분은 무슨 죄냐? 나 같으면 단칼에 추물의 목을 잘라 치우겠네… 만, 하긴 그것도 나쁘지는 않은데?”

“아, 장난치십니까. 제가 이미 여기 들어오느라 얼마나 수고를 했는데. 외손자 얼굴은 보셔야죠. 죽는단 소리 금집니다.”

“뭐? 영아한테 기별이 왔어?”

“서역으로 떠났던 풍술사가 딱 그저께 당도를 했는데, 월국 기가 내려간 걸 보고 슬슬 밤에 항구에 스며들었다 후딱 나가면서 서신은 줬습니다.”

“영아는 무탈하다고 하나? 어쩌면 좋나. 그 애가 친정에도 못 오고 그 먼 땅에서 혼자 몸을 풀었구나. 어떻게 지낸다고, 아이는 건강하고?”

“영아야 뭐 어르신 안 닮아서 건강하죠. 무사히 낳았고 애는 손자랍니다. 그 소식 들은 매매가 말린 미역과 전복을 한 짐 지고 갔습니다.”

“내 하늘에 감사한다. 매매에게도.”

“그러니 그때 왜 석명전에서 뛰어내려가지고. 잘못하면 외손자도 못 볼 뻔 했잖습니까.”

“몰랐으니 그리 했지. 이제는 정말 힘을 내서 살아야 할 판이구나.”

“안심했습니다. 그래도 살아서 손자를 보고 싶은 마음 정돈 있으셨군요? 내 공께서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가진 줄 이십년 만에 처음 알았습니다.”

“너는 늘 나한테 그러더구나.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 매도하지. 하지만 괜찮다. 윤윤 네가 인영이 소식을 가져와줘서 다 상계됐다.”

“기쁘고 자시고 당장은 석명전 외문도 못 넘고 거진 네 달이 지나긴 했습니다. 이 정도로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걸 보면 황상의 욕심인지 뭔지 당분간은 끝날 것 같지 않는데요.”

“그래도 끝나기는 하겠지. 돌연, 예고도 없이, 깎아지른 듯. 내게 이 장소를 허락하는 근거는 오로지 총애라는 놈인데, 그건 형태도 보장도 없는 것이네. 사람의 마음이 바뀌면 모든 것이 끝이다. 다만 추락이 부드럽기를 바라서 이리저리 애를 써 보는 게지. 아기야 뭐 자라는 데 이십 년이 걸린다. 그 전까진 볼 방도가 생기지 않겠나.”

“그러니까 당장은 답이 없단 얘기군요.”

“내 그래서 요즘은 매일 열심히 산보도 하고, 참말 애를 쓰네. 부친보다 다섯 해나 오래 살았는데 명을 더 늘리자니 쉽지 않네. 자네 아들이 귀향하면 잔치를 벌여준다고 했는데 그도 여의치 않으니.”

“그거는 허가만 해 주시면 전표를 제가 쓰죠. 우등졸업이라는 게 말입니다, 우리 함안반도로 치면 급제 첩보를 받은 격입니다.”

“허! 그럼 더 크게 잔치를 해야지. 비용은 아끼지 말고 알아서 잘 빼가게. 어차피 내가 집에 없으니 하인들 봉급 나가는 거 말곤 돈 쓸 일도 없잖아.”

“아무려면요. 나중에라도 소, 닭, 양, 염소, 돼지 다 잡고 전복, 해삼, 건화 실컷 쓸 겁니다. 주인어른 돈으로. 상석에 앉을 준비 하시고요.”

“좋네. 거스름돈 남기지 말고 다 쓰고, 집 안팤으로 정리도 하고, 고향으로 가겠단 하인이 있으면 노잣돈 넉넉히 주어서 보내. 그런 다음 좀 덜 분주해지면 다실은 정리를 해 줬으면 해.”

“역시 그게 본론이었죠? 그 이야기 안 하나 했습니다.”

“내가 자네 아니면 누구한테 부탁을 해. 자네가 구한 것이니 자네가 흩어버리게.”

“주인어른 신세가 참 안 됐습니다. 그런 걸 찾아 달란 것도 비참한데 없애라고 또 명을 내려야 하고. 풀려나면 이 모든 수고가 없어도 됐을 건데.”

오랜 세월을 공유해온 이들 사이의 대화는 도주를 언급한 뒤로도 내내 한적하게 친밀했다. 특별히 정다울 것 없는 툭툭거리는 말씨가 외려 그들 사이의 가까운 거리를 과시하는 모양새였다.

“나도 그 귀중한 소장품을 다 없애야 한다니 속이 아프네. 비참한 건 그게 비참한 거지. 허나 내가 도주를 했다면 오히려 집을 더 샅샅이 뒤졌지 않겠나. 지금이 최선이야. 아까 하던 말을 뭘로 들었느냐. 물러나는 게 최악의 수다.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네. 안 먹고 싶던 거라도 그릇 치운다고 그러면 젓가락질 한 번이라도 더 하게 돼. 사람도 짐승도 똑같다. 아니 주었으면 몰라 내주었다면 그냥 끝까지 줘야해.”

나는 헛되게 웃는다. 웃음이 쓰다. 

'그 끝이 평생인 것을 당신만은 모르는군.'

그냥 모르도록 하시오. 알면 더욱 절망스러울 테니.

나는 결코 하지 못할 답을 심저에 가라앉힌다. 한철로 만든 화살촉이 머리를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부서진 금속 부스러기가 눈 뒤의 신경을 타고 지나간다면 이러할까. 어느새 흰자의 핏줄이 완전히 터트려져 시야가 불그레했다. 




도망 안 가도 마상 잘만 입히는 문공. 

야오이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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