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1. 


어느새 잠든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희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1t 같은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리자 어제와 꼭 같은 까만 정장을 차려입은 영인의 등이 보였다. 시선을 느꼈는지 영인 역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희수가 깬 걸 확인하고 걸어와 이불 위를 토닥였다. 정갈하게 이불을 덮고 있는 모습이 아무래도 영인이 일어나 다시 덮어 준 것 같았다.


"피곤하지. 더 자."

"으응. 같이 가…. 태워다 줄게."

"뭘 같이 가. 조금 더 자고 와. 나 집에 가서 공영현 차 타고 가면 돼."

"진짜 괜찮은데……."

"원래 일찍 일어나는 날 아니잖아. 어제도 고생했고. 조금 더 자고 와. 아침에는 할 일도 없어."

"으응. 일어날래."


영인의 바람에도 희수는 기어코 빨간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인은 눈썹을 모으며 걱정스러운 듯 볼을 쓸었다. 


"왜케 고집을 부려. 더 자지."

"…잘보이고 싶어."

"응?"

"너네 가족들한테, 할머님한테 잘보이고 싶다구."

"허어. 굳이? 이미 충분히 너 좋아죽는데."

"그래도….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어? 세수만 할게."

"못 말려. 응."


희수가 엉금엉금 욕실로 들어가자 영인은 낭패라는 듯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가 흐트러지지 않게 다시 슥슥 다듬고 살짝 고민하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 또 늦게 일어났어? 왜 안 와?

"희수가 깼어. 같이 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려서. 준비하고 여기서 갈게 조금 늦을지도 몰라."

- 어머. 얘는? 더 자게 두지. 애를 기어~코 깨워 가지고.

"내가 안 깨웠다고."

- 네가 얼마나 부스럭거렸으면 애가 깨니? 하여간. 

"나참……."

- 아무튼 어휴 마음이 너무 예쁘다. 

"응. 아, 오늘은 애 그만 볶아!"

- 우리가 언제 볶았다고 그래? 

"관심 좀 끄라고. 장례식장이 무슨 상견례장도 아니고 애 부담스럽게."

- 말 잘했다. 상견례는 언제 할까?

"내 말 귓등으로도 안 듣지. 에이씨. 이따 봐."

- 그래 아침 두 사람 거 남겨놓을게. 새아가 천천히 준비하고 오라고 그래.

"아 누가 새아가냐고!!"


성질을 버럭내는데 전화가 끊겼고 욕실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고 열렸다. 희수는 동그란 눈으로 영인을 바라보았다가 피식 웃었다. 


"어머님?"

"…어. 아, 무슨. 전근대적이게 새아가는 무슨."

"왜. 나는 괜찮아!"

"내가 싫어."


단호하게 말하는 영인에 희수는 말없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그 모습에 영인은 흠칫 하곤 바로 말을 덧붙였다.


"부, 부담스럽거나 그래서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그냥?"

"……너 쓰레기 식구들 생각나게 할까 봐. 그런 호칭. 쓰고 싶지 않았어."

"……아."

"싫지 않아. 좋아. 그래도 네가…. 아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진짜."

"가만 보면 네가 나보다 더 재석이 신경 쓰는 것 같아."


영인은 할말이 없는지 눈을 도르륵 옆으로 굴렸다. 희수는 마음이 놓였는지 영인의 얼굴을 쓸며 웃어 보였다. 


"나는 진짜 괜찮아. 신경 안 써 줘도 돼."

"정말?"

"응. 지금 너무 좋아. 너랑 너네 가족분들이랑. 다 너무 좋아. 그리고 재석이네 어머니는 나 새아가라고 안 불렀어. 그냥 이름 부르셨지."

"부르셔? 불렀겠지. 뭐 하러 높여? 망할 할망구."

"또 또 못되게 말하지. 어른한테."

"이익."

"진짜 괜찮고 좋아. 오히려 우리 가족한테 널……."

"그건 정말 신경쓰지 마. 나는 오픈했었고. 그건 다른 문제야."

"그런 거야. 영인아. 너도 나 신경쓰지 말라고 하잖아. 나도 신경쓰지 마. 진짜 좋아. 과분해."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 영인에 희수는 활짝 웃으면서 볼을 조물조물 주물렀다. 영인은 볼을 주물리면서도 계속 희수를 먹먹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응."

"나 스킨 발라 줘."

"별걸 다 시켜."

"나는 어제 너 머리도 말려 줬잖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영인은 희수가 꺼내놓은 파우치에서 기초 화장품을 꺼내 듬뿍듬뿍 발라 주었다. 희수는 간지럽다고 웃었다.


"화장은 안 해도 예쁘니까 하지 마. 나만 더 욕 먹어."

"그것 때문은 아니고 더 기다리시게 하기 싫으니까 가서 할게."

"나 풀코스로 욕 먹이려고 작정했네. 아주."

"왜애애."

"귀여워…. 이씨."


팔짱을 낀 희수를 영인은 밉지 않게 째려보고선 적당히 가방을 챙겨서 호텔을 나섰다. 



51.2. 


"와 이거 맛있어요. 이게 뭐예요?"

"깨죽! 서울서는 이런 거 안 먹나?"

"네. 처음 먹어 봐요. 고소하다."

"아유. 맛있으면 맛있다 말도 잘해. 너무 예쁘다."


엄마는 맛있어도 도통 맛있다고 잘 안 하는 아빠와 영현, 그리고 맛있다의 기준이 무지 높은 영인을 흘겨보았다. 세 사람은 모르는 척 시선을 피했다. 영인 역시 빈속에 깨죽이 맛있었는지 말 없이 냠냠 퍼먹고 있었다. 그리곤 반찬 하나를 먹어 보더니 희수쪽으로 밀었다. 


"야. 이거 맛있다. 먹어."

"아, 응. 고마워."

"어머."

"아 하지 마?"

"영현아, 봤어?"

"안 본 눈 사고 싶어. 우웩."

"밥 먹는데 진짜."


영인은 성질을 팍 냈다. 희수는 영인이 내민 우엉강정을 먹고 맛있다며 히이 웃었고 공씨 세 명과 신 씨 한 명의 애간장을 녹였다. 영인은 좋아하다가도 가족들의 표정이 띠꺼웠는지 쏘아보곤 아빠에게 물었다.


"오늘 작은 고모도 온댔지?"

"밤에 온대. 비행기 표가 있어야지."

"그래도 바로 구했네."

"여행사 백 곳에 전화했다나 봐."

"캐나다가 멀긴 멀어."

"이따 영현이가 큰 고모네 진우랑 픽업 가기로 했어."

"수고링~"

"개열받게 말하네."


네 사람의 대화를 듣던 희수는 살짝 민망해 하며 죽을 먹고 있었다. 거의 바닥을 보이자 엄마는 더 먹으려냐고 의사를 물었다. 희수는 괜찮다며 정중하게 사양했다. 오히려 영인이 더 먹겠다고 그릇을 들고 갔고 그게 신기했는지 엄마는 국자로 박박 긁어 죽을 담아 줬다. 


"잘 먹네."

"죽은 소화 잘 되니까."

"하긴 너 기숙사 살 때 깨죽 먹고 싶다고 막 난리를 쳤었지."

"내가 언제 난리를 쳤어."

"아, 대학교 때요?"

"아니. 고등학교 때! 너 말 안 했니?"

"했어. 나 고등학교 서울에서 나온 거."


영인은 무심하게 죽그릇을 긁으며 대답했다. 희수는 영인이 서울에 있는 특목고로 진학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하숙을 했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지만, 고등학교 때 기숙사에 살았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고등학교도 기숙사가 있었어요?"

"우리 학교 경기도 애들도 많고 했으니까."

"기숙사에서 근데 쫓겨났잖아. 언니."

"………닥쳐?"

"어머. 그래서 얘기를 안 했구나?"

"아 조용히 해? 듣지 마. 조희수."

"영인이가 쫓겨 났다고요?"


희수는 전혀 몰랐던, 21살의 뚱했던 영인의 과거의 모습. 게다가 쫓겨 나기까지 했다는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영인은 얼굴을 붉히며 말하지 말라는 듯 가족들을 노려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퇴학 안 당한 게 다행이었어~ 정말 창피해서는."

"왜…요? 영인이 야도, 아니다. 그 무슨 사고쳤어?"

"언니 너 야동 봐? 진짜 가지가지 한다."

"아니거든. 안 본다고. 조희수. 뭔데?"

"어허. 이 자식이 지 엄마에 이어서 와이프한테도 싹바가지 없게 구네."

"머리 나빠진다고. 그만 때리라고!"


영인은 꿀밤을 맞은 자리를 쓸며 성질을 바락바락 냈다. 희수는 순간적으로 어린 영인이 창피한 사고를 쳤으면 야동밖에 없을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뱉은 걸 후회하고 영인에게 미안하다는 듯 팔을 쓸었다. 영인은 신경질을 내며 팔을 튕겼다가 아빠에게 한 대 더 맞았다. 


"아 그만 얘기해."

"왜. 희수 엄청 궁금해하는데."

"원래 말하다가 끊는 게 젤 나빠. 바보네 너."

"언니한테 자꾸 너라고 하지?"

"학교에서 술 만들다가 걸려서 퇴학당할 뻔한 게 그럼 바보지. 안 바보야?"

"뭐?!"

"그렇다니까? 아니 무슨 배고플 때 먹는다고 햇반을 한 상자를 보내달라고 하더니만……."

"아 무슨 옛날 일은. 10년도 전이야!"

"10년도 더 전이니까 문제지. 영인아. 17살이잖아. 고1이면."


요는 1학기가 끝난 여름방학. 기숙사에서 자습을 하던 학생들에게는 늘 일탈이 필요했다. 그러나 통금도 있고 당연히 반입품 검사도 심했던 기숙사에서 일탈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개중에는 물론 외고 날라리도 있어서 몰래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영인은 입맛을 버리고 냄새도 지독한 담배는 생각도 없었다. 다만. 


"여름에 막걸리 맛있긴 하지."

"당신 닮아서 그래요. 애가 아주. 어우. 나 정말 그때 창피해서. 아직도 막 얼굴이 화끈거려."

"어떻게…. 아니 뭐 제대로 된 부엌도 없지 않아?"

"………전자렌지랑 햇반이랑 있으니까. 효모야 몰래 필통 같은 데에 넣어오면 되고…. 알코올은. 그, 보건실에 소독용 알코올 스왑 있으니까."

"미쳤다. 진짜. 미쳤어. 고3도 아니고?"

"계획범이라니까. 초범이라고 봐 주긴 했는데."

"알고 보니 초범도 아니었다며."

"나는 거의 입도 못 댔다고. 고3 언니들한테 다 뺏겨서. 뭐 처음 만든 건 별로 맛 없었어."


희수는 자포자기한 듯 당시 상황을 늘어놓는 영인이 기가 막혔다. 창피해는 했지만 전혀 반성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영인답다면 영인다웠다. 희수는 서울로 유학을 보낸 딸이, 여름방학 때 기숙사에서 막걸리를 담그다가 걸렸다는 말을 듣고 서울로 올라오셨을 영인의 어머니의 마음이 너무나 이해가 됐다. 올라와서 이런 태도를 취하고 있었을 17살 공영인을 보고 또 어떤 심정이셨을지. 


"정말…. 이렇게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요."

"어휴. 새아가. 뭐든 말해."

"우리 가족 너무 하지? 네가 좀 얘기해."

"속 터지셨겠어요."

"허어?!"

"어머. 웬일이야. 내 마음을 아는구나…!"

"진짜…. 왜 그랬어. 영인아."

"야. 고삐리가 술 좀 마시는 게 뭐…. 고3들도 다 백일주 마시는데. 너도 마셨을 거 아냐."

"뭐? 안 마셨는데? 미성년자가 술 마시면 안 되지!"

"쟤는 아주 지가 막가파라고 다 막나가는 줄로 알아."


영인은 아빠에게 한 대 더 얻어 맞았다. 수능 백일 때 얼큰하게 취해서 들어왔던 영현은 다른 곳을 보는 척 딴청을 피웠다. 영인은 뻥이라고 항변하려다가도 조희수라는 사람은 정말로 안 마신 걸 수도 있겠다 싶어 꿀밤 맞은 자리만 애처롭게 만지작거렸다. 


"청소년기에 음주를 하면 성장에도 안 좋고, 전두엽에도 안 좋아서 학습을 방해한다구!"

"선생다운 말이다……."

"어머. 희수 선생님이니? 그때 졸업식 땐 회사 다닌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 그…. 네. 지금은 대학 때 선생님이 소개시켜 주신 학원에서 영어 가르치고 있어요."


다소 불안정해 보이는 직업에 혹시나 밉보일까 봐 희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역시나 영인의 가족들은 덤덤했지만 반응이 좋았다.


"와. 외고 나온 우리 딸보다 낫네!"

"이 녀석은 뭐 가족 여행 가도 한 마디를 못해. 불어든, 영어든."

"낯가리는 거거든."

"낯을 4박 5일동안 가리냐. 개웃겨. 진짜."

"아 공영현. 싸물어. 지는 Fine. thank you밖에 못하면서."

"영인이 불어 잘하지 않아? 저랑 '초급 프랑스어 1' 같이 들었는데, 되게 잘했어요."

"봐. 낯가림이라고."

"너는 3년씩이나 불어 배워 놓고, 대학가서 그걸 또 들어?"

"정말 등록금 아깝다."

"아 내 맘이지. 엄마 아빠 딸 A 받았으면 됐지."


분명히 교수가 첫 시간에 외고 출신이나 프랑스어 수학 경력이 있으면 나가라고 했지만 꿋꿋하게 제 옆자리에서 수업을 (듣지는 않았지만) 수강했던 영인이었다. 양민학살한다고 그 당시에도 지수와 유민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지만, 정작 시험도 성적도 희수가 더 잘 나오긴 했다. 


"희수가 그리고 더 잘 봤어. 얘는 A+이었다고. 난 A-였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어?"

"내가 양민학살한다고 욕 개먹었는데…. 정작 성적은 네가 더 잘 나왔잖아. 넌 뭐 위로한답시고 태도 점수가 0점이었을 거라는 위로 같지도 않은 소리 하고."

"아? 내가 그랬어……? 미안."

"야 이 자식아. 자랑이다. 자랑이야!"

"아프다고 몇 번 말해!"


영인이 왈칵 화를 냈다. 영현은 눈을 빛내며 희수를 바라보았다.


"언니도 그러면 선생님이에요? 저도 어린이집 선생님이에요!"

"야. 코흘리개 가르치는 너랑, 고딩들 가르치는 우리 희수가 똑같은 줄 알어?"

"아 뭐래. 지랄이야."

"영인아!"

"아 또 왜 또."

"그런 비교가 어디 있어? 그리고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나 같은 학원 강사보다 훨씬 중요하고 힘든 일 하시는데. 말을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해."

"어….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돼?"

"쓰레기 되는 거지. 쓰레기. 와. 희수 언니 진짜 최고다. 와~ 저 진짜 진심으로 사이다 5병 마신 거 같아요."

"우리 딸이… 모자라다고 하늘에서 이런 애를 보내 주셨나 봐."

"내가 무슨 모자라다고."

"저 봐. 지가 모지리인 줄도 모르고."

"창피하다. 딸아."


가족들의 파상 공격에 영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영현은 기어코 "그렇게 말하지 마! 희수 언니네 부모님은 무슨 죄셔. 얼마나 속상하시겠어."라고 덧붙였다가 영인에게 얻어 맞았다. 희수는 자신의 가족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지만, 편안한 (영인은 기뻐 보이진 않았지만 또 상처를 받는 것 같진 않았다) 분위기에 마음이 놓였다. 

백식빵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