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합니다 크루크 제쉬바르”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이요, 에후르 마퀼 2세.”


두 사람이 악수를 하자 플래쉬세례가 이따라 이어졌다. 

입꼬리는 호선모양으로, 시선을 낮추되 오만하지 않게, 하지만 너그러움이라는 시그널을 표현해야할 미소가 어딘지 어색했다. 

깜빡이려는 눈꺼풀을 붙들어매었다. 손이 가볍게 흔들리다 카메라 밖으로 내려갈때까지, 이 미소를 유지해야한다.


파인더 너머로 지켜보는 눈동자들이 빠르게 셔터를 눌러 그 모습을 담아내었다. 

호기심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 화면 어딘가 평소와는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기자들은 열심히 셔터를 누르며 관찰을 지속했다. 

카메라를 든 손목의 각도가 점점 높게 꺾여가고 있었다.


찰칵찰칵, 무기질적인 소음이 뜨거운 박수소리에 녹아들었다. 

열정의 모습을 흉내내는 축하의 말소리가 홀 안을 가득 매웠다. 그 박수갈채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과연 누구인지 가려낼 길이 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간단한 진실일까 필사적으로 명암을 가리려는 가면에 대한 조롱이었을까.

서로 다른 어둠과 그림자에 숨어든 무리들은 관객들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총성대신 플래쉬가 반짝인다.




하지만 왕자는 오랜 세월을 넘어 여전히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에일레흐였다.

십수년간의 실무와 선천적인 재능으로 다져진 완벽한 업무용 미소가 이런 작은 패배하나에 무너질리 없었다. 

왕의 이름은 버렸지만 그래봤자 의자를 하나 내려온 것일 뿐.

여전히 사람들은 그를 우러러보고 그는 온화하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손을 흔든다. 

그런 거리감과 그런 각도차에 서있는, 그는 조명속에서 연기하는  배우와도 같았다.


그러나 오늘은 유난히 플래시가 밝은 날이었다. 

눈을 찌를듯 날카로운 시선들이 그의 얼굴에 쭉 내리찢어 한낯조롱거리로 만들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조롱에 가까운 시선들, 기자들은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당겨 셔터를 눌렀다. 

1/6초에 한장씩, 느릿한 스톱모션같은 연사가 이어졌다. 


에후르 마퀼의 미소가 깊어졌다. 짖궂은 어린아이들을 달래는 쓴웃음에 가까운 얼굴이다. 

평소보다 반뼘 무릎을 굽힌채 조금 더 높은 각도로 올려찍는 사진속에서는 어쩌할 도리가 없었다.

화려한 조명대신 그림자가 과장되게 찍히는것이 느껴진다. 

아무리 노련한 주니어라도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조명에 의해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걷어 낼 수는 없었다. 

시선이 흔들린다. 수많은 날들을 지나며 단 한컷의 b급 미소도 허락치 않아왔던 에일레흐였지만 오늘만큼은 완벽한 스마일을 지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저게 짓궂음이라고? 그냥 예의가 없는거지.  화면 너머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불쾌한 심정을 대변했다. 

와이드샷 화면 아래 삐죽삐죽 튀어나온 뒤통수 너머로 그들의 유치한 미소가 보이는 것 같았다. 

화면이 당겨지고 오디오가 넘어갔다. 카메라의 시선들도 화자를 따라 움직였다.


에일레흐에 비해 크루크를 찍는 카메라들은 평소의 시점보다 조금 더 멀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역시 가까이서 얼굴을 한 컷, 다시 가슴 아래까지 쭉 끌어당겨서 다시 멀리서 한 컷.

애매하기 짝이없는 거리감에 기자들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카메라속 화면과 실제의 모습을 비교한다. 

저쪽은 억지를 부려도 망가진 사진을 찍기가 어려운데 이쪽은 억지를 부려야만 제대로 된 A급 사진을 건질수 있는 모양이었다.


몇 장인가 손끝까지 섬세하다고 평가받은 몇몇 실력자들이 가까스로 사진을 찍어내었지만 이번엔 메인을 어디로 결정해야 할지 난감하다.

Vip들의 얼굴인지, 아니면 마주잡은 손에서 터져나오는빛나는 저 광채인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한번에 찍을 수 있는 것은 한 컷뿐이다. 

눈이 흔들리는 만큼 카메라의 초점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셔터를 눌러도 카메라들은 좀처럼 크루크에게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체격자체가 규격을 달리하는 사이즈였다. 

평소 한 컷에 찍기에도 버거운 어깨는 늘 걸치고 다니던 방한용 작업복이 아닌덕에 반쯤 줄어보인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하지만 여전히 그 골대가 남다르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발레스의 설원처럼 새하얀 상의는 안그래도 커다란 그의 어깨를 강조하고 있었지만 장인의 신들린 손길이 투박해 보일수 있는 체형을 유려한 선으로 커버하고 있었다. 


라인을 따라 떨어져 내리는 시선을 이끌어 고정시키는 것은 손목 근처의 까만 소매, 사람들은 시선은 대부분 그 한 치정도 되는 까만 손목라인에 머물러 있었다.

검은 배경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은백색의 커프스가 조명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굳이 눈썰미가 좋지 않더라도 한번쯤 눈길을 던질만한 부드럽고 은은한 은빛, 그리고 그 투박한 손가락을 빛내고 있는 또하나의 은색이 반짝이고 있었다.


힐웬으로 만든 왕가의 반지. 이렇게 작은 것은 힘들다며 우는 소리를 하는 장인들에게 억지로 고급 세공 도구를 쥐어며 짜낸 최고의 걸작품이었다.

시도하는 것에만 백만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1급 세공 기술을 몇번이나 반복해야했던가, 크루크의 손가락둘레에 딱 맞게 가공된 힐웬의 반지 상면에는 엄지손톱만한 작은크기의 바쉬베르의 문장이 세겨져 있었다. 

손이 가볍게 흔들리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끌어모으고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만으로도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완성된다. 

화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귓가에 짤막한 광고같은 것이 시작되었다. 어디선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자, 상상만해도 시린 눈보라를 머릿속에 떠올려보자. 

그 설원 어딘가에 외로이 지어진 작은 공방이 있을 것이다. 

광로에서 피어오른 열기에 내부는 뜨거운 수증기로 가득하고 창문에는 서리가 잔뜩 얼어붙어있다. 

얼음때를 벗겨낸 창문 너머로 고집있게 흑색의 광석을 두드리는 장인의 모습이 그림처럼 스쳐지나간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광석은 활화석과 비슷하지만 두드리는 망치의 강도는 차원이 다른 모습이다. 


수차례 두드리고 가공하기를 반복하며 검은광석이 백색이 되어 가는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는 장인의 얼굴을 다름아닌 크루크, 

완벽한 백색을 띄는 힐웬을 내려놓지만 그의 얼굴에는 고민이 가득하다.

빛이 들지 않는 공방 구석에 주저앉아 결정적인 생명력을 부여하지 못해 고뇌하는 설원의 장인에게 새하얀 부엉이가 날아들어왔다. 


편지를 펼치기도 전에 뛰어는 발소리가 공방의 문을 열어젖힌다. 

기적적으로 재발견된 실리엔을 가지고 돌아온 피오나의 단장이 크루크의 앞으로 당당하게 걸어나와 빛에 휩싸인 주먹만한 무언가를 내밀어보인다. 

둘은 굳게 손을 마주잡는다. 두 손이 겹쳐지는 순간 화면은 빠르게 뒤로 페이드 아웃. 

새하얀 배경에 미니어쳐같이 작아진 공방은 폭발적으로 넓어지며 날아오른 흰부엉이가 화면을 가린다. 

부엉이는 설원을 따라 하늘높이 날아오르고 저 멀리 하늘을 찌를듯 높게 솟아오르는 탑이 화면에 비춰진다. 


화면은 탑을 확대하며 돔형태의 유리 정원을 비추고 나선형으로 둘러쌓여진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계단을 비추며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던 화면이 멈추는 곳은 브류나크의 최상층, 외관을 비추며 천천히 화면이 어두워지는 것을 기다린다. 

밤이 내려 앉는 하늘에 작지만 찬란한 실리엔의 불빛이 밝혀진다. 

새하얀 빌딩은 그 자체가 발광하는 제질인양 빛을 밝히고 어둠속에서 숨을 죽이던 사람들이 환한 미소를 띄며 브류나크를 올려다 본다. 박수소리가 이어진다. 빛이 도시를 밝히고 있다.


새하얀 배경위로 브류나크의 문장이 떠오른다. 발레스와 에일레흐를 반반 섞어 만든것 같은 엠블럼, 

하지만 어쩐지 발레스가 에일레흐의 제단 위에 올라선것 같은 느낌의..




그으런 광고 말이지..! 룩은 신이난 목소리로 방금 만든 광고를 주절거리고 있었다. 

연이어지는 팀원들의 한숨소리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이어 완결내는 걸 보니 나름대로의 자신작인 모양이었다. 

뭐, 실리엔을 가지고 돌아온건 단장이 아니라 우리지만, 하지만 아무래도 톨비쉬로는 그 중후함이 살지가 않아서.. 흐음.. 룩은 아쉽다는 어조로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때? 이참에 수염이라도 길러보는건. 룩의 실없는 헛소리에 톨비쉬는 짧은웃음으로 대답을 회피했다. 

차라리 비숍은 어때? 바통을 넘겨받은 비숍도 매마른 웃음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니,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웃음소리였다.


룩이 입으로 광고를 한 편 찍거나 말거나 킹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확실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누가 따로 광고를 한것도 아니것만 생소한 모양의 바쉬베르의 문장이 그려진 작은 반지에는 저절로 발레스의 브랜드를 떠올리게 만드는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왕가와 비지니스, 설령 이름만이 남아있는 문장이라 하더라도 문장 자체를 파기해야했던 에일레흐와는 기반되는 배경이 다르다.


하지만 마법의 진짜 위력은 그런 광고탑의 효과 따위가 아니었다.

킹은 책상에 기대어 앉은 채 자세로 손을 들어올렸다.  한참 좋은분위기로 대화중이던 크루크와 에후르의 움직임이 멈춰섰다. 

손가락을 치켜올리자 화면위로 반투명한 원이 생겨나며 반시계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손이 돌아가는 속도에 맞춰 천천히 영상이 뒤로 되감겨 들어갔다.


아무런 의미없이 지나가던 군중들의 모션이 역으로 재생되자 어딘지 어색한 움직임처럼 느껴졌다. 

등돌려 앉은 그림자가 부산스럽게 흔들렸다. 되감기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입의 움직임과 눈의 깜빡거림이 더욱 이질스럽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 부자연스러운 영상속에서도 힐웬은 여전히 영롱하게 반짝이고 플래시는 연신 단상을 비췄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영상이 끄트머리에 다다랐는지 자리에 앉아있던 크루크와 에후르 마퀼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마치 셔터를 누르는 것 마냥 사람들의 시선은 한참동안 한 자리에 머무른채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크루크와 에후르 마퀼이 다시 손을 잡았다. 영상이 멈춰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곳은 어디?

동등하게 악수를 하고 있는 모습이지만 누가 주역인지 명백하게 드러나 있었다.


턱을 괸 상태로 역시 한방먹은거네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화면이 다시 재생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한번 봤던 영상은 뼈아픈 패배를 되세기게 하는 불쾌한 오디오일뿐, 흥미를 잃고 떨어지는 손가락이 영상을 통과하며 아래방향으로 선을 내리그었다.  크루크와 에후르의 사이로 깊은 골짜기가 생겨났다. 두갈래로 나뉘어진 영상은 손가락 하나만큼 떨어진 모습으로 여전히 재생되고 있었다. 

킹은 늘어지게 입을 벌려 하품을 내쉬었다.




한가로운 110층의 모니터룸, 전체적인 화면들과 요원들의 통신을 책임지는 통칭 관제실A.

에일레흐와 발레스가 쌓아올린 브류나크의 중심점에서 나른하게 땡땡이를 치고 있던 킹이 갈라진 화면 위로 검지손가락을 올렸다. 

사실 한방이라고 하기엔 이미 벌어진 점수차가 너무 크지? 얄미운 룩의 목소리가 발레스의 편을 드는것 마냥 속삭였다. 


하지만 오늘의 일은 어디까지나 브류나크 안에서 일어난 일일 뿐이다. 

이정도 차이는 미소 하나로 매꿀 수 있다는 것이 에후르 마퀼의 자신감이었다.

작디 작은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 하나넘겨주는게 뭐 그리 어려울까, 패자는 여유있게 발레스에게 중앙 자리를 권해보고 있었다. 

네가 과연 여기에 서는 압박감을 견딜 수 있을까? 

시험하고, 관찰한다. 어디까지나 선배되는 입장에서, 우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하지만 그렇게 영원히 가장자리로 밀려나면? 룩이 또 산통을 깨트린다. 

우연이라고 해도 기회는 기회, 전복될 위험이 아예 0인것은 아니잖아? 분하지만 맞는 말이었기에 킹은 대꾸없이 흥 하고 아니꼬운 시선으로 룩의 아이콘을 노려보았다. 

아이콘위에 작은 메세지 마크가 뜨더니 자동으로 열리며 혀를 낼름거리는 메세지로 변화했다. 

킹이 화면에 도착한 룩의 메세지를 삭제해버렸다. 룩의 웃음소리가 헤드폰가득 울리고 있었다.

룩의 말대로 우연이라고 해도 마냥 손놓고 바라볼 수 만은 없었다.

짜여진 각본속 리얼리티쇼와 별반 다를바 없는 기자회견이지만 엄연히 이쪽은 비지니스의 일환, 기자회견이 길어져봤자 이득볼것이 없는 에일레흐는 원만하게 질문을 마무리하고 아본의 극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속이 보이지만 딱히 꼬집기엔 뭐라 할수 없는 타이밍이었다. 

다음  행사장소가 거론되는 말에 약속이라도 해놓은것인지 성급한 몇몇 기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이야기의 주도권은 발레스가 쥐고 있지만 내일의 에일레흐에게 밉보여 나쁠것은 없다는 계산에서 나온 일종의 아부 퍼포먼스였다. 

굳이 좋은쪽으로 해석한다면 기자회견 뒤에 있을 쇼를 위해 엘리베이터가 잠시 정지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빠른 기자들이었을지도.

이유가 어찌되었든 동요하는 움직임만으로도 에일레흐는 만족스러운 효과를 거두어들였다. 

동시에 이야기를 주도하고 있던 반스트의 입매는 눈에 띄게 굳어졌다. 


멍청하긴. 킹이 혀를 차기 무섭게기자들이 재빨리 카메라를 들어 반스트의 얼굴을 기록한다.

그러나 높은 의자에 앉아있던 세월이 헛것은 아니었는지 바이데가 마이크를 끌어당겼다. 

낮은 웃음소리를 가장해 반스트를 질책하는것도 잊지않는 노련한 늙은 재상이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화자에게로 시선들이 움직였고 반스트는 조명밖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몇몇카메라는 여전히 반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울수 없는 명백한 실책이다. 

방금 반스트의 반응으로 발레스도 이 기자회견을 이어갈 이득점을 잃어버린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마다의 화면위로 한숨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분위기가 괜찮았다면 어느정도의 회견이 더 연장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이 장소에서 득을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발레스도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 한려는 건지 바이데는 에일레흐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꺼내놓고 있었다. 

모처럼 잡은 이야기의 흐름이 다시 에일레흐에게 옮겨가고 있었다. 

것봐, 괜히 에일레흐가 아니라니까. 룩이 입을 삐죽였다. 일이나 해. 

아 그래. 그건 맞는 말이지. 킹은 공중정원에 대한 이야기가 주가 되는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손가락을 들어 영상을 가리켰다.

원 대신 사방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떠올랐다.



툭 하고 영상을 옆으로 밀어내자 반으로 갈라진채 재생되중이던 기자회견의 영상은 1/4로 줄어들며 되어 한쪽 구석으로 이동되었다. 

사람들이 가장 기다리던 최고관심사의 이야기이니 시청률은 최고로 높아지고 있겠지만 관제실에 있는 사람들에겐 이미 보고 내려온, 혹은 지금도 보고있는 지루한 화면의 서술적 묘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이 궁금해 하는건 그런게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궁금해 해야하는 걸까, 

그리고 그 정보는 어디서 구해야 하는 걸까? 킹은 스스로의 직업에 대한 질문을 되뇌이며 양 손가락을 크게 펼쳐보였다.

톨비쉬는 벌써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너무 그러지 말라고? 나 지금 성실히 일하는 중이니까? 

킹의 변명아닌 진실에 비숍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대답이 필요없다는 긍정의 웃음이었다.




킹은 비워진 화면위로 펼친 손가락을 구부리며 시계방향으로 뒤집었다. 

마치 손끝에 뭔가를 걸어내어 깊은 곳에 숨어있던 무언가를 낚아내는듯한 움직임이었다. 

모션에 따라 명령어가 전달되고 비워진 자리로 또다른 영상들이 솟아올라왔다.

그렇게 다시 채워진 영상들은 또다시 기자회견장, 하지만 이번에는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촬영중이 아닌것 같은 묘한 각도의 모습이었다. 

이런곳에도 카메라가 있나 싶을 정도로 교묘하게 숨겨진 각도의 영상들은 다름아닌 브류나크의 보안카메라에서 촬영되고 있는 것들이었다. 당연하지만 합법적인 접속이었다.

킹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 관절들을 풀어내었다. 정말 최고의 직장이라니까. 


쓸데없이 기능이 뛰어난 보안카메라들은 본연의 기능뿐만 아니라 부가적인 기능도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평소보다 뽀얗게 보이는 손등을 클로즈 업하기도 하고 신묘한 커팅기술로 잘 관리된 수염을 따라 촛점을 움직이기도 헀다.

고된 수행으로 뭉툭해진 크루크의 손톱은 거스러미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더불어 희생당한 손가락털들은 모조리 뽑혀나가 횡하게 드러나버린 모공에게 잠시 묵념을. 


크루크의 파격적인 그루밍소식에 룩이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손가락 털이 다 뽑혔다고? 룩의 지나친 관심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밀레시안이 룩이랑은 상관없잖아요 라며 말을 끊었다. 

미래를 예건한듯한 반응에도 룩은 꿋꿋하게 심각한 분위기를 연기하며 속삭였다.

아니, 물론 나랑은 상관없지.. 하지만.. 그럼 궁금해지잖아. 적막이 찾아왔다. 


이대로 못들은척 넘기고 싶지만 룩이 타이밍을 헤아리는 콧김소리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이런경우 침묵이 길어질수록 후폭풍에 시달리는 것은 듣는 사람의 몫일뿐, 어떻게좀 해보라는 소리없는 압박감에 퀸이 마지못한 목소리로 무엇이? 라고 되물었다.

룩이 으음.. 하고 고뇌하는 신음소리를 삼키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크루크씨.., 발가락 털도 정리 했을까? 퀸과 밀레시안이 동시에 짜증을 내었다. 

룩은 원하는 반응을 얻었는지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발가락 털에서 시작된 더러운 잡담은 부츠와 통기성에 대한 이야기로 번져나갔고 조용히 있던 비숍의 입에서 질낮은 욕설이 나올때까지 계속되었다. 

톨비쉬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쪽에 호의적인지 모를 웃음소리에 룩이 한번더 설원에서의 생존방법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굳이 편을 가르자면 메마른쪽이었다. 톨비쉬가 웃음을 뚝 멈춘 채 속삭였다.


“킹, 관제실에 들어가는데 따로 권한이 필요하던가?”

“아니? 이쪽도 수시로 오고나가니까 딱히 제한하는 건 없어. 왜 여기 오게?”


“110층은 어제 사전설명때 돌아봤으니까 거긴 됐어.”


“뭐? 여길온다고? 아니야. 안와도 돼. 아니 오지 마..!”


톨비쉬의 가볍지 않은 농담에 룩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멀고 먼 관제실B까지 아무도 오지 않을것이란 믿음하나로 오늘따라 멘트를 막던지고 있던 그에겐 치명적인 농담이었다. 

일이 끝나고 나면 결국 1층에서 다시 마주쳐야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들어오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다. 룩은 설마 진짜 올건 아니지..? 하고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톨비쉬는 다시한번 소리낮춰 웃을뿐이었다. 부정을 하지 않는다. 룩이 입을 다물었다.




넌지시 던진 말이었지만 마냥 톨비쉬라면 허언으로 생각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룩이 화면을 끌어당겨 아본의 카메라를 빠르게 체크하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찾아낸 톨비쉬는 한가로운 분위기로 적당한 기둥에 몸을 숨긴채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도 적고 기자회견을 볼 수 있는 패널도 보이는 명당 포인트다.

몸을 숨기고는 있지만 슬쩍 난간위로 팔까지 걸친 것이 한동안 자리를 옮기지 않아도 된다는 여유가 느껴졌다. 

어라 저기서 저렇게 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이질적인 여유로움이었다.


순찰하던 몇몇 요원들도 그런 톨비쉬를 발견했는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순찰 스케줄을 확인하지만 저런 요원이 배치된 기억은 없다. 

하지만 곧 가슴의 명찰을 확인한 요원이 동료의 팔을 툭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해를 못하는 동료의 표정에 애매모호한 고갯짓으로 1층에 마련된 휴식용으로 마련된 카페테리아를 가리켰다. 


톨비쉬가 서 있는 기둥에서 멀지 않은 카페에, 대다수가 비어있는 새하얀 메르헨풍 커피테이블에는 톨비쉬와 같은 명찰을 단 다른 에이전트의 요원들이 지루함을 이기지 못한채 여기저기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난간에 기대어 서있는 정도면 얌전한 축에 속한다고 생각될 만큼 가지각색으로 앉아있는 모습들이 흥미롭기까지하다.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들도 호기심 어린 시선을 돌려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개중에는 사진을 찍는 사람도 섞여 있었지만 널부러진 무리에서는 딱히 반응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짓는 여유를 보이는 사람도 있다. 눈에 띄는 것을 꺼려하는 에이전트의 요원들 치고는 특이한 광경이었다.


톨비쉬는 커피는 제법 당기지만 저 사이에 끼고싶지는 않다 라는 표정으로 난간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쇼윈도우 안의 패널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도 지루함이 감돌고 있었다. 

이제 슬슬 이동해야하는 시간 아닐까? 하지만 시간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너무 이르다는 답변이 들려왔다. 

딱히 누군가가 소리내어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기자회견이 아직도 끝나질 않고 있었으니까. 

광고를 내보내야할 쇼윈도우 안의 스크린에는 아래층에서 진행중인 기자회견장의 모습이 띄워져 있었다.

다른 화면을 보고 싶지만 어디로 눈을 돌리든 모두 크루크와 에후르마퀼의 얼굴뿐인 지루한 시간이었다.




톨비쉬의 하품소리가 들려왔다.

룩이 기가죽어 있는 동안 킹은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잠시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세어나갔지만 크루크의 확 달라진 모습은 분명 평범한 변화는 아니었다. 

컨버터 생산라인을 시찰하다 새어나온 실리엔 연기를 들이마시고 기억을 잃은게 아닌 이상에야 그 크루크가 스스로의 얼굴에 크림따위를 찍어바를 리가 없지 않은가. 

섬세하게 덧그려진 아이브로우에 킹의 머리가 핑그르르 돌기 시작헀다. 


눈이 화면 구석구석을 훑어내렸다. 

이렇게 제품 외적 이미지에 공을 들이는 전략은 설원녀석들의 전공이 아니란 말이지.

소리없이 혼잣말을 달싹이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눈이 바쁘게 움직이고 열 가닥의 손끝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럼 누굴까. 그나마 세간의 시선을 신경쓰는 바이데? 그럴리는 없다. 

아들뻘인 크루크의 얼굴에 신경쓰기 전에 자기 얼굴부터 신경써야 하지 않을까. 

그럼 카르펜..? 아니아니, 그 아가씨도 당분간 이쪽에 신경쓸 여력이 없다. 

칼리번이 닿지 않는 먼 곳까지 나가있데다가 아무리 사이가 좋다 한들 제 오빠 수염모양의 각도를 심각하게 고민할만큼 살가운 타입은 아니니까.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손끝이 미세하게 멈출때마다 정신없이 회전하는 영상들 사이에서 수많은 외곽선이 그려졌다 지워졌다. 

눈이 닿는 곳마다 확대되었다 축소되기를 수십 차례. 이윽고 한 구석 교묘하게 가려진 기둥 뒤 공간에 기대어 서있는 아름다운 여성이 킹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카메라가 닿지 않는 아담하고 음습한 그늘밑이었다. 과연 이래놓고 우리한테는 온갖 생색은 다 냈단 말이지..? 

이미 자신들이 철저하게 다 체크했으니 사각지대는 없을 것이라 장담한 것과 달리 크루크와 에후르 마퀼이 서 있는 단상 아래 미묘한 위치에 자리한 기둥의 뒷편에서 은밀한 회의가 오고가고 있었다.


나름대로 보안카메라의 위치를 꿰고 있는 블랙레이븐이 교묘하게 수를 부린 것 같았지만 관제실에 앉아있는 킹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늘 들고다니던 담뱃대는 어디로 가고 백금빛 가느다란 펜을 신경질적으로 물고 있는 여성은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안드는건지 기자단과 크루크를 번갈아 보며 빠른 속도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언뜻 느껴지는 분위기로는 그다지 좋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섬세하게 각도를 틀어 제대로 된 영상을 확보하려 하지만 갑작스럽게 멈춘 카메라가 의도와는 다르게 고개를 떨어트렸다. 

킹이 선점한 카메라를 노리는 무리들이 관제실 곳곳에서 중복된 명령을 내리고 있던 탓에 오더가 충돌한 모양이었다. 

도전장이나 다름 없는 시비. 이봐, 이건 내가 찜했으니까 저리 꺼지라고. 

킹은 카메라에 달라붙으려는 동업자들을 모두 쫓아낸 뒤 주먹을 흔들어보였다. 

어디까지나 화면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위협의 의도는 충분히 전달되었는지 달려들었던 요원들은 눈을 세모낳게 뜨고는 다른 곳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분하지만 지랄맞은 것은 성질머리뿐만 아닌 실력도 마찬가지였다.


방해를 떨쳐낸 킹은 다시 천천히 카메라를 조작했다. 말의 속도에 비해 입술의 움직임이 너무 적어 무슨말을 하는지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어느정도 추측은 할 수 있지만 명확한 내용을 알 수는 없다. 톨비쉬라면 알아볼텐데 말이지. 

영상을 카피하고 싶지만 거기서부터는 그레이존을 벗어나게 되버린다. 뭐 트러블이라고 해도 우기면 떙이지만.

안그래도 카메라에 강제로 접속하고 있는 지금도 약간의 트러블을 감수해야할텐데 거기까지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과정이 조금 귀찮아지겠지만 아직까지는 업무의 연장선이라고 우길 수 있는 사안이었다.

애초에 일을 맞겨놓은 주제에 자기들이 대놓고 사각지대를 이용하면 우리더러 일을 어떻게 처리하라는거야? 

킹을 숨쉬듯 변명을 늘어놓으며 선두로 각기다른 카메라에 들어앉은 요원들은 줌을 당겼다.


아무리봐도 보안요원들이 할 행동은 모습은 아니었다.

일단 겉보기부터 불법같아 보이지만, 찾아내는 과정이 이미 조금 아웃라인이지만, 어찌되었든 그들이 할 일은 바로 그런 지점을 찾아내거나 수상한 움직임을 확인하는 일이었기에 그들은 당당하게 화면을 띄워놓고 있었다. 

수많은 블랙레이븐들이 관제실을 지나치며 몇몇 화면들을 바라보지만 그들의 일탈을 알아 챌 수는 없었다.

이미 자세부터가 글러먹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킹만해도 책상에 팔꿈치를 올린채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이었고 의자위에 쪼그려 앉은 사람도 있었다. 

의자에서 반쯤 흘러내린 사람은 양반이다. 엎어져 누워있는 모습으로 일단 일을 하고 있는 녀석도 있었다. 

하지만 이게 그들의 일하는 스타일이라니 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정보계열 요원들을 10명 모아놓는다면 7명이 불성실한 모습이었고 2명이 정상인이었으며 1명은 자리에 없다는 말은 절대 과장된 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요컨데 온라인으로 접속해있으면 되는거 아니냐. 

의자에 앉아있는 것만해도 감지덕지한 분위기에 힘입어 키리네의 모습은 다른 영상들 사이에 교묘하게 숨어들었다. 

그 고집있는 크루크를 프로듀싱한 설원의 여왕님이 반스트를 씹어먹을 기세로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가 한마음 한 호기심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스트 녀석 이제 박살난다 텍스트와 함께라는 웃는 모양의 이미지가 화면 구석을 연달아 지나가고 있었다. 

화면속에 숨겨진 또다른 관제실A는 거의 축제의 분위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나 모든 블랙레이븐이 관제실의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킹은 노골적으로 자신을 노려보며 헛기침을 반복하는 블랙레이븐을 흘겨본뒤 피식하고 헤드폰을 끌어올렸다. 

무언가 짧은 말을 속삭이자 킹의 시계속 아이콘들이 일제히 깜빡거렸다. 헛기침이 반복되었다. 

그는 킹이 사내 무전기를 내팽겨쳐 놓은채 자신의 헤드폰만 착용하고 있는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분명 내부의 정보교환은 중요하지만 킹은 무식하리만치 못생긴 블랙레이븐의 통신기를 받자마자 진절머리를 내며 선을 둘둘 말아 책상구석에 내팽겨친지 오래였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돼지꼬리 돌돌말린 유선이야..! 모든이의 마음을 대변한 격렬한 반응에 관제실의 희노애락이 엇갈리고 있었다. 

결국 누가 말하기는 했구나의 기쁨과 유서깊은 자사의 제품이 비판받은 분노, 저 성질드러운 인간이 이쪽담당이었구나하고 실감되는 슬픔, 애초에 주변분위기는 신경쓰지 않는 마이페이스들의 즐거움. 


이따금씩 그에게 전달되는 메세지가 깜빡거리긴 했지만 킹은 눈길한번 주지 않고 손등을 흔들어보였다.

어차피 통신기에 도착한 메세지는 모두 브류나크의 통신망을 거쳐 전달되기 마련, 

아닌게 아니라 지금 앉아있는 그 자리가 브류나크내의 통신과 보안의 중추인데 굳이 단말기를 새로 사용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깜빡거리며 미확인 메세지가 있다는 램프가 자체적으로 꺼지기를 수차례 반복되었다.

킹이 영상을 보고 있는 중간중간에도 화면에는 짤막한 메세지가 수도 없이 열렸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반수가 반스트 불쌍하네  라는 의미의 메세지였지만 일단 일에 관련된 메세지도 제대로 수신 하고 있다. 

딴짓을 병행하기 위한 최소치의 메일뿐이었지만.

헛기침을 하던 요원이 인상을 찡그리며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뒤에서 누군가 노려보던가 말던가 전혀 개의치 않아하는 킹과 같이 화면속의 키리네또한 수많은 카메라가 자신을 향해 돌아섰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채 펜끝으로 블랙레이븐의 요원을 가리키고 있었다. 

무언가를 확인하는건지 블랙레이븐은 쩔쩔매면서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대답했다. 

대답이 계속될 수록 키리네는 더욱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본다. 

무서운데? 킹이 웃음을 지으며 카메라를 조작했다. 별안간 신경질적으로 까딱거리던 펜끝이 우뚝 멈춰섰다. 

키리네의 입이 느리게 움직였다. 블랙레이븐이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몇마디 느리게 이어가던 키리네는 아예 입을 다문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더 뒷쪽을 보고 있는 걸까? 뭘 생각하는 것 마냥 느리게 펜끝이 움직였다. 

빙글빙글, 뭔가 흥미진진해지는 분위기에 킹이 욕심을 부려 카메라의 줌을 끝까지 잡아당겼다. 

두근거린다!!  끝없이 이어지는 텍스트들이 화면 가장자리를 반복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무리하게 머리를 뻗어 좀 더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 홱하고 돌아보는 키리네의 눈빛이 킹과 마주쳤다. 

워.. 순간적으로 카메라를 돌릴뻔했던 킹이 가까스로 손을 멈춰세웠다. 


들켰어?

두근거리던 텍스트들이 일제히 사라지며 3글자가 떠올랐다. 

들켰어. 

뒤이어 웃는 얼굴들이 메세지창을 뒤덮었다. 


하지만 이정도로 당황한다면 이 일은 일찌감치 떄려치웠어야 했다. 

무엇보다 킹의 팀원중에는 이렇게 카메라만 대쪽같이 잡아내는 귀신이 두마리나 끼어살고 있었다. 

밀레시안과 톨비쉬가 동시에 제채기를 하며 코를 훌쩍거렸다.

수십차례 깜짝카메라를 역으로 당해왔던 킹은 일단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은채 키리네의 시선에 온전히 붙잡혀 있었다. 키리네가 킹의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때 카메라를 움직이면 오히려 잡아 땔 수도 없게 된다. 그리고 스토킹을 하고 있던건 킹 혼자만의 일은 아니었다.

그의 예상대로 키리네는 이내 다른곳으로 고개를 돌리며 펜끝으로 몇몇 지점을 가리켰다.  

블랙레이븐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명백하게 당황한 표정들이었다.


킹이 침착하게 자신이 접속했던 흔적을 수정하는 동안 움찔거리는 머리 몇몇이 고개를 들어 관제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바보같기는. 들킨놈들은 꼭 티가 나기 마련이다. 

룩이 어디서 자기소개타임이 시작된거냐며 깐죽거리기 시작했다. 

킹은 상대가 나빴다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말장난을 할 타이밍이 되지 못했다.

상대는 카메라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입까지 다문 교활한 마녀, 키리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블랙레이븐이 누군가에게 무전을 보내기 시작했다. 

뒤이어 관제실의 블랙레이븐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킹은 태연하게 창을 내리고 확대한 각도로 카메라가 움직이도록 세팅을 수정해 놓았다. 


어디까지나 일의 연장선. 딱 잡아떼려는 킹의 행동에 인이어속 깐죽거리는 목소리가 킹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룩은 드물게 킹이 당황한것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일이라는 양 행복하게 들켜버린 나의 마음이라는 한물간 유행가의 후렴구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들켰나? 들켰네:( 들켜버렸어★ 두근거리는 나의 마.음>♡< 

킹이 나지막히 대답했다. 네 선곡센스 구려. 


킹은 다른 업무를 끌어당기며 성실한 요원을 가장했다. 

킹이 업무로 돌아가자 다른곳에서 일탈중이던 몇몇 요원들도 눈치껏 제 업무로 화면을 전환했다. 

시그널 올 그린, 뒷면에서 잠시 소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일단 관제실A는 더할나위 없이 원만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메세지창은 여전히 난장판이었지만 오프라인에서는 모두가 집중모드로 합심한 모습이었다. 

현장의 블랙레이븐은 애타는 마음 반 봉변당한 억울함 반으로 관제실의 요원들을 닥달해오고 있을 뿐, 난데없이 고함소리만 얻어먹은 블랙레이븐들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밑도끝도 없지만 상사가 그렇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난데없이 뒤집어쓴  불똥에 블랙레이븐들의 분위가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누군가 이 오해에 대해서 설명해줄, 혹은 진짜로 일어난 트러블에 대해 말해줄 사람이 필요했지만 마땅히 말을 걸만한 사람이 없었다.

누가 바쁜것인지 한가한것인지 알 수가 없다. 

방금전까지 의욕없이 널부러져 있던 인간들이 모두 빠릿하게 앉아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놈들이 뭔가 사고를 치긴 했구나. 하는 심증이 깊어져가지만 증거가 없다. 

하지만 이렇게 합심한 경우 물증을 잡아 낼 수 없다는 것을 탈틴의 엔지니어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이정도면 감지덕지지. 엔지니어는 입속에서 사탕을 도로록 굴리며 화면과 장비를 번갈아 체크했다.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으면서도 요청한 외부의 에이전트를 승락한것은 발레스. 

아무리 단장과 크루크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지만 그 개인주의 사고뭉치들이 윗사람들의 눈치따위를 보며 얌전히 앉아일을리는 없었다. 

더욱이 에일레흐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서라면 물불가리지 않는 타라가 그 뒤에서 음흉하게 앉아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평가가 엇갈리는 벨바스트가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오고 있었다.

그렇다고 발레스의 블랙레이븐들에게 머릿수로 밀리고 싶지 않다는 타라의 등쌀에 이기지 못하고 어거지로 끌려들어온 탈틴이 이 모든 난장판을 정리해야할 명분을 가지고 있을리도 없다. 

그저 못본척 조용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리는 수 밖에. 


사실상 일찌감치 외부담당으로 빠져나간 제로가 부러워 지는 순간이었다. 

피오나도 아닌데 이런 촌구석에 박혀있을 의리는 없다며 훌훌 떠나버린 선배의 조언이 오늘따라 왜이리 사무치는 건지, 나도 이직할까? 

엔지니어는 점점 거칠어져가는 블랙레이븐의 통신을 흘려들으며 남은 기기를 체크했다. 

램프 하나에 한숨이 하나 장비 두개에 욕설이 둘, 관제실내의 장비체크를 마친 에이전트가 체크 리스트를 갱신하며 몸을 돌려세웠다. 

시간에 여유가 조금 남아있으니 다음은 복도에 있는 장비들을 하면서 다른 동료들을 보조하는건 어떨까? 

엔지니어는 문득 수로쪽 체크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왜 소식이 이렇게 없지? 연락이라도 한번 넣어볼까?

하지만 생각이 마침표를 찍기전에 검은 인영이 발걸음을 가로막았다. 


갑자기 튀어나온 커다란 덩치의 블랙레이븐과 정면으로 부딪칠뻔한 탈틴의 엔지니어가 잔뜩 인상을 찡그리며 올려다보았지만 요원은 탈틴에게 사과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엔지니어를 지나쳐 계단쪽으로 걸어올라갔다. 

콧털뽑힌 사자의 얼굴이된 블랙레이븐이 거침없는 속도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킹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불쾌함이나 어딜가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경보등이 하나 둘씩 불을 밝히는 것 마냥 다른 에이전트의 요원들도 하나 둘씩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아, 이거 위험하다. 무언가 막을 방도를 찾는다급한 눈빛들이 블랙레이븐과 킹의 사이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탈틴의 엔지니어. 시선이 쏟아져왔다.

엔지니어는 남아있던 사탕을 씹어 삼킨뒤 처음부터 그 방향에 볼일이 있었던 사람마냥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돌렸다. 이에 들러붙은 사탕조각은 순간적으로 치솟은 열기에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목구멍이 죄여들고 뒷목이 홧홧하게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이직이라니 강아지 풀뜯는 소리, 그냥 퇴사하고 싶다. 

누구나 가슴에 하나씩은 품고있다는 삼천원 짜리 봉투속 사직서와 늘 꼰대질만하는 타라와 에일레흐 사이에서 머리를 감싸쥐는 안드라스 부장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죄송해요 안드라스 부장, 하지만 위험수당에 이런 항목은 들가지도 못하잖아요. 

상상속의 안드라스가 침울한 푸른 조명아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현실의 붉은 알람이 꺼지는 것은 아니었다.

엔지니어가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는 동안에도 블랙레이븐의 요원은 성큼성큼 발을 뻑어 이미 킹의 자리옆까지 다가서 있었다. 

옆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달라지는 체구의 위압감, 거기에 검은색 일색의 제복을 입고 있기까지 하다.

누군가과 즐겁게 이야기하며 자신의 화면에만 집중하고 있던 킹도 분위기가 어수선한 것을 감지했는지 흥이 깨졌다는 얼굴로 헤드폰을 목으로 끌어내렸다. 


통신을 주고 받는 내내 헛기침을 하던 요원이 한걸음 가까이 다가와있었다. 

킹이 지금 뭐하자는 건데? 하는 말소리를 대놓고 중얼거리며 블랙레이븐을 올려다보았다. 

블랙레이븐의 눈이 가늘게 흐려졌다. 관제실의 대화소리가 점점 줄어들고 시선이 모여들고 있었다. 

누가 말통하는 블랙레이븐좀 데리고 와봐. 이미 갔어요 지금오고 있데요. 그럼 시간좀 더끌어보라고 해. 지금 가고 있잖아요. 저기 저 탈틴의..


서로가 노려보는 것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 긴장된 순간, 누가 먼저 말을 꺼내는지가 도화선이 타들어가는 방향을 결정지을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누군가가 환한 웃음과 함께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보고서 가지고 왔습니다-!”


“뭐.”


“어…음..A구역 체크가 지금 끝난 것 같아서 말이죠..?”


“같아?”


“아-, 아뇨아뇨아뇨. A구역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엄.. A구역은 끝났고요. 네, A는 끝났어요”


아직 체크가 전부 끝나지는 않았지만 지금 들고 있는 물건은 이것밖에 없었다.

엔지니어는 뒷통수가 뚫릴 것같은 따가운 눈빛을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태블릿을 들어올려보였다.

차례를 빼앗긴 블랙레이븐의 후폭풍은 무서웠지만 엔지니어에겐 최고의 방어력을 가진 이 태블릿이 있었다. 

이름은 명분, 부가효과는 업무의 우선권.

엔지니어는 최대한 간절한 마음을 담아 킹을 바라보았다. 봐주세요. 이건 수당에도 안들어간다고요.

 상상속의 시네이드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어보였다. 네 안됩니다. 가슴속 종이봉투가 파르르 떨리는 느낌이었다.


“그럼 전송을 하면 되는거지 왜 그걸 들고와서….”


이 최강방어태블릿의 단점은 박자가 안맞으면 종잇장보다도 못하게 되어버린다는 것. 

인상을 찡그리며 엔지니어를 쫓아내려던 킹이 아직까지도 돌아가지 않고 서있는 블랙레이븐을 올려다보았다.

반쯤 걸쳐져 있던 헤드폰에서 룩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관제실을 비추는 카메라는 없었지만 룩은 그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며 숨이 넘어가도록 끅끅 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냥 그대로 숨통이 넘어가버리면 좋을텐데. 킹은 미간을 꾹 누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제발요, 엔지니어가 들키지 않도록 살짝 화면을 흔들어보이고 있었다. 


“……… 아니야… 그래..그냥 거기 내려놔.”


“아…그런데.. 저기.. 그런데 말이죠..? 아직 그 다음구역은 안끝난거라서.. 다시 들고가야하는데…”


너 그럼 왜 들고 온거야. 킹이 고개를 번쩍 들어올리며 엔지니어를 노려보았다. 

또다른 블랙레이븐이 경보의 속도로 관제실의 문을 박차며 들어왔다. 

그야말로 기적의 타이밍, 벌컥 열리는 문소리에 시선을 돌렸던 킹도 뭔가 짚이는게 생각났는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헤드폰으로부터 사각사각거리는 잔소음이 어른거렸다. 

사람의 목소리이지만 음량이 작아 뭐라하는지 엿듣기는 어려운 작은 소음이었다. 

입을 벌렸다 턱을 앙다물기를 몇차례 반복하기를 십수초, 킹은 거짓말처럼 의자를 돌리며 화면앞으로 턱을 괴였다.

넘어가? 넘어가는 거야?! 모두의 염원이 정말로 통한것인지 킹이 퉁명스럽게 손을 내밀어 보였다. 

짜증은 팍팍 내고 있지만 어째 꿍짝을 잘 맞춰주는 상냥한 모습이었다. 

아니 이걸 상냥하다고 볼 수 있는걸까? 하지만 그 최악은 모면한 기적을 눈앞에서 목격한 엔지니어는 이제 다른 의미로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지금 이거 생명수당 지급되나요?! 상상속의 시네이드가 고민하고 있었다. 

일단 손에 든 그거나 내놔. 상상의 보좌관은 킹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얼른 내놔, 스캔하게. 끝나면 다음구역으로 내려가고.”


두번 재촉하는 목소리에 핫하고 현실로 돌아온 탈틴의 엔지니어가 얼른 태블릿을 내밀었다.

언뜻 들리는 헤드폰에서 누군가가 웃음섞인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고 있었지만 내용까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헤드폰 안쪽에서 웅얼거리는 소리일뿐.

태블릿의 정보를 옮겨가는 간간히 고개를 기울여 누군가의 음성에 대답하긴 하지만 내용이 너무 단편적이라 무슨말인지조차 추측할 수가 없었다.


응, 알아. 안다고. 지금 그래서 하고 있잖아. 누군가의 명령에 대한 응답도 아니고 부탁을 받아주는 것도 아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타이르는 누군가에게 툴툴거리는 분위기, 하지만 너무 대놓고 바라보았던 탓일까, 킹이 다시 헤드폰을 끌어올리고는 삐딱한 시선을 보내왔다.

아, 실수실수. 기껏 온화하게 업무로 복귀한 사람을 다시 들쑤셔 좋을 것은 없으니까. 

엔지니어는 딴청을 피우는 척 뒷짐을 지며 다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부루퉁한 얼굴의 블랙레이븐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엔지니어는 다소 여유가 생긴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었다.


블랙레이븐은 왜 저런 꼬맹이에게 쩔쩔매야하는거냐며 잔뜩 불만이 생긴 눈치. 

어쩌겠어요, 세상이 재능위주로 돌아가는 시대인데. 

엔지니어가 어깨를 으쓱거리는 동안 그의 뒤로 다른 블랙레이븐의 요원이 다가왔다. 

아 그럼 담당자에게 물어야지 누구에게 물어봅니까? 이쪽도 목소리를 낮출 생각이 없는건지 속삭이는척 쉰소리만 잔뜩 섞은 짜증이 터져나왔다. 

시기와 장소가 좋지는 않지만 확실히 그의 말이 옳다. 

엔지니어는 마음속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블랙레이븐의 말에 동의했다. 


맞다. 원래 이런 트러블이 일어나면 해당사항을 담당하는 요원에게 물어보는게 정석이겠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면으로 적혀진 딱딱한 잣대일뿐. 크고작은 에이전트들이 여럿이 모여 정형성을 잃어버린 난장판에는 맞지 않는규칙이었다. 

애초에 그들을 단속해야할 킹부터가 딴짓하다 걸리지 않았는가. 

이 일에 대해 물어볼 사람은 이쪽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다. 굳이 찾아야한다면 당신의 위, 킹의 아래 어딘가에 있는 우유부단하면서 유능한 그리고 부탁에 약한 환상속에 존재할법한 정보계열의 누군가. 그런 사람이 있을까? 

소란을 관찰하던 시선들중 하나가 집요하게 엔지니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지 안될말씀, 엔지니어는 헛기침을 하며 이름표를 슥슥 닦아내었다. 

나는 이것만 해결하고 다른구역으로 빠이빠이다..! 엔지니어는 눈을 부릅뜨고 두번은 휘말리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었다. 익명의 누군가들이 아쉽다는듯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킹이 의미없는 스캔으로 시간을 끄는동안 트러블을 막기 위해 급하게 관제실에 들어온 블랙레이븐은 동료의 어깨를 두드린뒤 무언가를 속삭여왔다. 

내용전달은 끝낸 블랙레이븐이 아이를 달래는 손길로 그의 어깨를 문쪽으로 돌려세웠다. 

돌아선 불랙레이븐이 헛기침을 두어번 큼큼 거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딱히 잘못된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자리이동을 권유받은 것이 어쩐지 불쾌한 모양이었다.

그를 멀뚱히 관찰하던 엔지니어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꺼내보였다.


“...사탕드릴까요?”



엔지니어의 호의에 블랙레이븐은 굉장히 기분이 상한 얼굴로 문을 향해 돌아섰다.

애도 아니고 삐지기는. 탈틴의 엔지니어는 눈을 세모낳게 뜨며 블랙레이븐의 뒷모습을 흘겨보았다. 

혹여라도 또 트러블이 일어날까 얼른 시선을 돌리긴 했지만 입이 튀어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사탕을 까넣었기 때문이지 불만이 남아서가 아니다.

이번 사탕은 좀 오래가기를. 하지만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기 무섭게 신경질적인 킹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아-! 아직 아무것도 안했다고..?! ”


그럼 그렇지. 그 성질머리가 그냥 참고 넘어갈리가 없지. 

깜짝 놀라 깨문 사탕이 반으로 쪼개져버렸지만 차라리 잘 되었다. 엔지니어는 납작해진 사탕을 입속에 잘 수납한뒤 아무것도 안먹은척 태연히 태블릿을 돌려받았다. 

여유시간도 사라지다 못해 오히려 시간을 빼앗겨 버렸다. 내부체크를 먼저 끝낸것이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얼른 복도로 도망가자. 그러나 엔지니어의 바램과는 다르게 킹은 태블릿을 놓지 않은채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킹이 헤드폰을 반쯤 잡아내리며 엔지니어를 돌아보고 있었다.


“야”


최소한 직함으로 불러주세요. 그래도 타 에이전트 요원인데.. 탈틴의 엔지니어는 눈물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네?”


나약한자여, 그대의 이름은 말단 일지어다. 탈틴은 태블릿을 꽉 끌어안으며 양쪽 어금니사이로 사탕을 숨겨넣었다. 

일하기 너무 힘든 직장이다. 물론 사탕먹으며 일할 수 있는건 좋지만서도.. 킹이 엔지니어에게 손을 내밀어보였다.


“...... 나는 왜 안 권해”


“....”


“나도 사탕줘”



킹의 손목에 채워진 네모난 액정속에서 체스말 모양의 아이콘 두개가 미친듯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엔지니어는 주머니속 사탕의 반을 털린채 울상이된 얼굴로 관제실을 떠나갔다

킹은 소복하게 쌓인 전리품을 만족스럽게 바라본뒤 다시 여유로워진 얼굴로 화면을 끌어당겼다.

까드득 부서지는 사탕의 소리가 이어폰 너머로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관제실의 요원들이 겸사겸사 기자회견 영상을 챙겨보는 것과 달리 달리, 

톨비쉬와 다른 요원들은 꽤나 당당하게 기자회견장의 영상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사전 설명을 들은 요원들은 별로 보고싶지 않은겠지만 안볼래야 안보일수도 없다는 것이 더 올바른 표현방법이었다.


공중정원 어디에든 광고와 디스플레이를 위한 크고 작은 스크린이 띄워져 있었고 회견이 시작된 직후부터는 모든 스크린이 크루크와 에후르 마퀼의 모습으로 가득 채워졌다.

방금전까지 생기있게 뛰어다니던 모델들의 모습이나 자연친화적인 이미지를 강요하던 밋밋한 영상들은 사라지고 칙칙하고 삶과 인간관계에 치여 찌든 영감들의 모습이 사방에 띄워져 있었다. 

톨비쉬는 이런 지루한 영상보다 4시간 내내 반복되는 꽃잎 흩날리던 영상이 더 재밌을것이라 투덜거리며 계단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래가 훤히 비쳐보이는 투명한 계단. 

빛의 가감으로 외곽선이 드러나 있었지만 웬만한 사람은 고소공포증이 없어도 내딛기 힘들어보이는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그런건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건지 계단은 한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일시적으로 불투명한 발판으로 변화했다.

발을 때면 다시 원래의 투명한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이들의 궁금증을 자극 하기 딱 좋은 발판. 

공포심보다는 호기심이 앞서나간다. 환하게 웃는 아이들이 부지런히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톨비쉬는 계단의 색이 변화하는 것에 매료된 아이들이 질서없이 뛰어다니는 것을 피해 계단 난간쪽으로 붙어섰다. 




브류나크의 121층. 

사방을 둘러싸는 투명한 계단과 얕은 물이 깔린 착각을 주는 바닥무늬, 

중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분수대, 거대한 사과모양의 조각상, 사방이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창조의 정원.

올라가는 높이가 높아질수록 점점 시야의 들어오는 아본의 모습에 톨비쉬의 시선도 바쁘게 움직였다.


정원의 외각을 한바퀴 빙 두르는 원형의 복도 사이에는 정원을 가로지르는 연결로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상가나 유희시설들은 모두 정원의 외벽으로 밀려나 복도를 따라 걸어가야 하기때문에 맞은편으로 빠르게 이동하기 위한 지름길인 모양이었다.

더불어 2층이며 3층이며 아본을 내려다볼만한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는 연결통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1층의 공연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2층으로 올라온 톨비쉬는 난간에 기대어 다른 구조들을 구경하는 사람들을 지나치며 3층으로 이어지는 연결로로 이동했다. 

지나가는 행인들 사이로 익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다리가 완전히 투명한건 아닌가보네? 

그들이 보는 대로 이 연결로들은 난간만이 투명한 모습, 바닥은 아본의 무늬가 세겨진 타일들이 깔려 있는 불투명한 재질이었다. 모든 다리가 꼭 투명할 필요는 없었지만 사람들의 실망하는 이유는 아마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연결로의 바닥이 투명한 유리재질로 보였던 탓일 것이다.

직접 올라와서도 아쉬움을 버리지 못하겠다는 건지 몇몇 사람들은 바닥의 타일과 한층위에 드리워진 투명한 연결로를 올려다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난간의 아래를 내려본다 한들 연결로의 바닥면이 보일리 만무, 위험천만한 행동을 하려다 잡힌 몇몇 아이들이 시큐리티요원과 보호자에게 혼쭐이 났는지 울상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톨비쉬는 머리위를 가로지르는 3-4층의 연결로를 무시한 채 다시 앞을 향해 걸어나갔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있는 검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그에게 가벼운 눈짓으로 인사를 보내왔다. 

몇몇 사람들의 경계심 어린 시선이 잠시 톨비쉬와 요원들에게 머무르지만 가벼운 눈웃음과 함께 고개짓을 해보이는 톨비쉬의 모습에 안심한듯 고개를 다시 돌려놓는다. 

여유롭게 블랙레이븐들과 인사를 나누는 그의 귓가에는 블랙레이븐들이 사용하는 인이어와 똑같은 것이 끼워져 있었다.

반대편에 있는 인이어는 낯선것이지만 아마 경호를 맡은 에이전트의 요원중 하나. 

톨비쉬는 사람들사이로 자연스럽게 섞여들며 남은 시선들을 떨쳐내었다.


“그럼 이 난간도 유리 아니야?”

“바보야. 아니라니까? 만지면 은색이잖아. 계단도 이 난간도 원래 은색이라니까.”


유리로 만들어진 계단이 아니라는 것에 실망한 어린아이가 시무룩한 얼굴로 손위의 형제를 올려다보았다. 

살짝 새초롬하게 눈을 흘기는 것이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의기양양하게 계단의 비밀을 밝혀낸 큰아이는 대단한 증거라도 되는양 난간을 붙잡은 채 두세걸음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아이가 잡고 걸은 길이만큼 난간은 본래의 새하얀 은백색을 띄다 다시 투명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작은 아이는 볼을 부풀릴 뿐이다.


“그럼 왜 안만질땐 투명하게 보이는데..?”

“그건.. 음.. 그건..”


계단들이 투명하게 보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난간과 계단 또한 다른 종류의 스크린이었을 뿐이었다. 

아래서 올려다보는 계단의 모습 또한 계단에서 올려다보는 윗 풍경을 그대로 흉내낸 영상일뿐. 

난간으로 사용된 소재의 굴절률이 다르다던가 전력이 차단된 다리가 사실은 저 아래 설치된 공연장과 같은 재질이라던가 하는 꿈도 희망도 없는 내용들이 톨비쉬의 혀끝을 간지럽혔지만 구태여 아이들에게 말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큰 아이는 제 나름대로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고 작은 아이는 목이 빠져라 위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관찰력이 좋은 아이라면 미묘하게 다른 하늘이 풍경을 발견할 것이고 사고력이 좋은 아이라면 투명해보이는 계단 밑면에 사람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는 것을 유추해 낼 수 있을것이다. 

작은 아이쪽의 관찰력이 더 좋았던 걸까? 톨비쉬이 발걸음이 멀어진지 몇 걸음 만에 작은 아이가 아! 하는 탄성을 터트렸다. 

작은 아이는 무언가를 확인해보고 싶다며 큰아이에게 무언가를 제안했다. 

큰 아이는 작은아이의 말을 곰곰히 듣고는 활짝웃으며 다시 난간을 붙잡았다.

 

나란히 서서 준비.. 하고 타이밍을 기다리던 아이들이 땅! 하는 신호음과 함께 뛰기 시작했다. 

작은 아이는 코가 닿을것 같이 난간에 눈을 바싹 붙인 상태로 뛰고 있었고 큰 아이는 반쯤 몸을 돌린채 보여? 보여? 하고 물으며 앞을 향해 뛰고 있었다. 

난간이 정말로 투명한건지 전기적 영상으로 처리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직접 몸으로 확인해보기로 한 모양이었다.

아이들의 호기심은 나쁘지 않았지만 장소는 그리 적합하지 않아보였다. 

행인들은 앞을 제대로 보지 않고 뛰는 아이들을 피해 걸음을 옮겨야 했고 몇몇 어른들은 불평을 터트렸다.

주변을 지나가던 요원중 몇몇이 고개를 돌렸다. 

제법 빠르게 달려나가는 아이들이 톨비쉬를 향해 뛰어들고 있었다.


아이들이 뛰어오는지 모른채 천천히 제 페이스대로 걷고 있던 톨비쉬는 마주오는 남자의 모습에 걸음을 늦추었다. 

여기도 있군. 사고력과 눈썰미보다 호기심이 앞서는 천진난만한 어른이가.

방금 전 지나온 아이들과는 다르게 이 남자는 위험천만하게 고개를 위로 치켜든채 비틀비틀 앞을 향해 걷고 있었다. 입이 멍하니 벌어진줄도 모른채 천천히 걸어나오는 남자의 모습에 톨비쉬가 짧게 눈을 굴려 다른 방향을 바라보았다. 귀찮은데.

톨비쉬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정원 내부의 카메라를 확인하던 룩이 낄낄거리며 그의 마음속 소리를 흉내내어 말을 걸어왔다.



“나이트 지금 귀찮다고 생각했지?”


“……”


“에이. 안되지 안돼. 저렇게 방치하다가 큰일이라도 생기면 옴팡 뒤집어쓸텐데..?”


“………”


“크으, 자기 담당 구역 아니라고 깔끔하게 무시하는구나. 폰에게 일러야지”


“그만둬..”


톨비쉬가 짜증스럽게 대꾸하는 사이 비틀거리는 남자와 톨비쉬의 거리가 제법 가까워졌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그냥 피해버릴까.

주의를 주는 과정에서 또 한바탕 시끄러워질 것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더이상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아이들은 시무룩해지면 그만이지만 이런 사람들은 체면까지 생각해줘야한다. 체면을 차리려면 일단 자기 자신부터 잘 간수하란말이야.. 한숨이 흘러나온다. 

오른쪽일까, 정면일까. 톨비쉬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이렇게 가까워졌는데도 톨비쉬가 앞에서 다가오는지 모르는것 같았다. 

톨비쉬가 시선을 내리며 몸을 비틀기 위해 발을 멈추었다.

그 순간이었다. 


“봤어? 보여?”


방금 지나쳤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바로 뒷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톨비쉬는 비트는 고개를 좀 더 돌려 뒷편을 확인헀다. 

뒤를 돌아보며 달리는 큰아이와 톨비쉬를 발견한 작은아이가 바로 그의 뒤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대로 발을 빼면 부딪치지 않겠지만 문제는 자신이 아닌 앞에서 다가오는 남자.

 남자는 아직도 위를 보고 있었고 큰아이는 이제서야 앞을 돌아보고 있었다.

톨비쉬의 한숨소리와 룩의 웃음소리, 그리고 킹이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앗, 죄송합니다.”


“아니 뭐야. 당신..!”


오른쪽도 정면도 아닌 왼쪽으로. 본의아니게 비틀거리는 모습으로 남자를 멈춰세운 톨비쉬가 난간을 짚으며 아이들과 남자사이에 끼어들었다.

톨비쉬의 다리에 부딪친 아이는 곧바로 사과를 건내왔지만 남자는 매우 불쾌하다는 얼굴로 톨비쉬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앞을 보지 않은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교통정리에 끼어들게된 톨비쉬는 일단 남자에게서 한발자국 물러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보는 과정에서 훤히 드러나게된 귓가에 인이어가 꽂혀져 있자 남자가 살짝 태도를 누그러트렸다.




톨비쉬는 남자에게 대답하는 대신 자신의 허리 아래쪽을 내려다 보며 조심하렴. 하고 미소를 지었다. 

아이는 깜짝놀란 얼굴로 남자와 부드럽게 미소짓는 톨비쉬를 한번씩 바라본뒤 고개를 끄덕였다. 

뒤따라오던 작은아이는 뒤늦게 나타난 보호자에게 달려가 폴짝 안겨들었다. 

아이의 보호자는 아이를 달래며 톨비쉬들쪽을 바라보았고 작은 소란에 근처에있던 요원 몇명이 반응한듯 보였다.

아이들이 보호자에게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는 동안 남자는 애들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이렇게 버릇없이 뛰어다니는 거냐며 큰소리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일어난 사소한 소란에 대부분 무슨일이 일어난 것인지 궁금해하는 눈빛이였지만 몇몇은 그가 다른사람과 부딪쳤는지를 알법하다는 눈빛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톨비쉬는 그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남자는 커지기 시작한 목소리로 톨비쉬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말로 하면 되는 것을 일부러 그의 앞에 끼었다는게 불쾌함의 주된 이유였다. 

톨비쉬는 말로서 제지하기엔 너무 가까웠다고 대답했지만 남자는 들을 생각이 없는듯 보였다. 

톨비쉬의 무전이 울리고 그 모습을 예의 주시하던 룩이 바로 상황에 대한 설명을 아래로 내려보냈다.

전후 상황과 톨비쉬의 말을 교차해 확인하는 동안 남자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뭘 그렇게 중얼중얼하냐며 톨비쉬의 옷깃을 낚아챘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고 있었다. 

일이 커질것 같은 느낌.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안했다고? 아이쪽이 더 나쁘잖아? 

생각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남자는 도르륵 굴러가던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이 상황을 벗아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 네가 처음부터 잘 정리하기만 했어도.. 하고 흐려지는 눈빛을 보며 톨비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붙잡힌 옷깃을 잡아내렸다.

손은 다소 강압적이었지만 실례했습니다. 아이를 멈춰세운다는게 그만.. 이라며 자신을 낮추는 태도에 남자가 자신감을 얻었는지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톨비쉬를 향해 입을 열었다.

딱, 입만 열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별 일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계속 위만 보고 걸어가시는게 위태로워 보이는 찰나에 아이가 그 앞으로 뛰어가고 있는것을 방지하려던 찰나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톨비쉬는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려고 했었다는양 물흐르듯이 대답했다. 그리고는 남자가 뭐라 말하려는 것에 흥미도 없다는건지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려 블랙레이븐들을 바라보았다. 

블랙레이븐 측에서도 이미 상황파악이 끝난 뒤 지시를 내린 것이기 때문에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남자의 주변을 둘러싸며 자리를 옮길것을 종용했다.

남자는 마치 압박받는 것 같은 분위기에 반발했지만 블랙레이븐들은 익숙하다는 접대용 미소로 남자를 설득했다. 

톨비쉬는 그럼 이만, 이라며 온화하게 대답한뒤 몸을 돌렸지만 그의 모습은 블랙레이븐들에게 가려져 잘 보이지도 않는 분위기였다. 


잠시 뒤 블랙레이븐들이 천천히 자리를 옮겨 2층 외곽으로 자리한 출입구로 빠져나갔다. 

남자는 블랙레이븐들과 함께 움직인건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평온하게 정리된 것 같아 보였지만 다시한번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그의 손목에서 미친듯이 깜빡거리는 아이콘들이 점멸하고 있었다. 

흐트러진 손목선을 가다듬는 척 차례차례 아이콘을 눌러나간 톨비쉬 애써 표정을 흐트러트리지 않기 위해 먼 곳을 바라보았다. 

무심하리만치 파란 하늘이 창밖으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팀원이라고 애지중지 함께해봤자 다 소용이 없다. 

세상 믿을 아이콘 하나밖에 없다며 감상에 잠겨있는 동안 고요해진 인이어로 부터 짧은 코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내가 잘못들은거지? 세상 다 잃은 얼굴로 계단아래를 내려다보려는 톨비쉬에게 자력으로 뮤트를 풀어낸 킹과 룩이 다시 신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80%는 놀려먹는 내용이었고 남은 10%는 룩의 자화자찬에 대한 내용이었다. 나머지 10%는 일이 마무리되고 남은 주변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내용. 

톨비쉬가 팀원들에게 시달리는 동안 사람들은 자리에서 얼마 벗어나지 않은 톨비쉬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연결로의 끄트머리에 다다라 3층으로 올라섰지만 사람들의 호기심은 거둬질줄을 몰랐다.

톨비쉬는 킹의 조언을 받아들이며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해 올라섰다. 

이런 이렇게까지 올라갈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톨비쉬는 어쩌다 올라온 꼭대기 층에서 공중정원 아본을 내려다 보았다. 




4층은 하늘위를 떠다니는 환상을 테마로한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위치였다.

1층의 정원이 메르헨틱한 환상을 주제로 하고 있었다면 상부는 그 동화를 멀리서 바라보는 독자, 혹은 관찰자들의 시점으로 변화해나가는 것이 특징, 층을 거듭해서 올라올 수록 복잡하게 얽혀있던 계단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며 매듭의 모양을 형성하고 있었다.

동그란 원을 그리며 외곽을 한바퀴 도는 복도들을 이어주는 것이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크게 보자면 길이 나 있는 동선은 마름모를 그리며 얽혀가는 매듭무늬의 일부들.

2층과3층을 잇는 다던가 3층과4층을 잇는다던가, 언뜻 보기엔 평범해보이는 계단사이에는 2층과 4층을 연결하는 위치한 거대한 에스컬레이터도 섞여있다.

얼기설기 서로를 가로지르며 부지런히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계단들은 은근히 동선을 비틀어내며 거대한 미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투명한 계단이라는 것도 동화풍의 정원에 어울릴법한 모습이긴 했지만 사실은 이 미로를 만들기 위한 눈속임의 일환인것이 분명했다.

쓸데없이 말이야.. 톨비쉬는 뒤를 돌아 난간에 기대어 서며 남쪽에 자리한 극장을 바라보았다.

모처럼의 절경을 가리고 선 커다란 극장의 이름은 글로브 극장, 북쪽의 엘리베이터와 대칭되는 아본의 주요 건물로 1층과 4층에는 극장의 뒷편으로 돌아가는 전망로가 이어져 있었다.


전망로가 있는1층과 4층은 나란히 이어지는 길을 끼고 돌아 다시 외곽상가로 순환하는 구조였지만 2,3층의 창문은 극장안으로 연결되어있었다.

출입구는 좌우로 1쌍씩. 동선이 끊어지기 때문인지 2층과 3층의 시설은 대부분 북쪽으로 몰려있어 비교적 한가해보이는 풍경이다.

별일은 없겠지만, 혹은 없어야하지만, 담당하는 구역의 까다로운 출입구조를 보자니 가슴이 턱막혀오는 기분이었다.


아름답지만 유사시를 생각하자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구조.., 톨비쉬는 몸을 돌려 난간 깊숙히 몸을 기대어섰다. 

광고용으로 떠다니던 화면에는 여전히 기자회견장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분위기는 마무리단계에 들어가는 분위기였지만 시간상 바로 아본으로 올라올 수는 없는 타이밍이었다.

톨비쉬는 아까부터 상층에서 멈춰있는 엘리베이터를 보며 시계를 확인했다. 

예정된 대로 공연시간에 맞춰 고정된 엘리베이터에는 R이라는 글씨가 떠올라 있었다. 


준비되었든 제한이 되었든 엘리베이터가 멈춰있는 동안에는 더이상의 관객은 올라올 수 없었다.

꿈같은 세계 라는 공간의 아이덴티티를 강조하기 위해 모든 이동 수단은 엘리베이터에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고 정원으로 출입해야하는 자재가 드나드는 화물용 엘리베이터나 직원용 통로가 외곽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뿐. 

비상계단을 제외한다면 마땅한 이동수단이 없는것이나 마찬가지였다.


VIP들은 직원용 통로로 이동한다 하지만 기자들과 아직 올라오지 않은 객빈들을 기다려야 할테니 극장이 열리는 시간은 적어도 공연이 끝난 이후.

톨비쉬는 2층과 3층에 있는 직원용 출입구를 번갈아 바라본뒤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아무일도 안일어나야 할텐데 말이지. 아름다움만을 중시한 나머지 안전은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은 화려한 정원을 내려다보는 톨비쉬 눈에는 피로감만이 가득했다.


톨비쉬가 눈을 비비다 고개를 들어올리는 즈음 정원의 바닥무늬가 화려한 덩쿨의 무늬로 바뀌고 있었다. 

15분마다 변화하는 바닥의 7번쨰 무늬였다. 톨비쉬가 부평초마냥 자기 임무지로 들어가지 못하고 떠다닌지도 2시간 가까이 되었다는 소식이기도 했다.

이제 슬슬 내려가 볼까? 집합장소는 2층이었으니 1층 카페에 널부러져 있던 다른 요원들과 합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타이밍이었다.


룩은 걱정도 별스럽다며 타박을 해왔지만 톨비쉬는 지각이라도 해서 체면을 구기는것 보다 낫다며 웃음으로 흘러넘겼다. 

하지만 일찍가면 사진같은거 찍히지 않아? 뭔가를 먹고있는 것인지 약간의 잡음이 섞인 킹의 목소리가 톨비쉬의 걸음을 멈춰세웠다. 

똑똑한 지적이었다. 2층에 있을적에 널부러져 있던 요원들의 모습을 떠올린 톨비쉬가 3층 연결로에서 발걸음을 돌려 난간쪽으로 다가갔다.

몸을 기울이자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카페테리아에 사람들이 삼삼오오씩 모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톨비쉬와 마찬가지로 기자회견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극장담당 요원들이 널부러진 카페테리아의 테이블은 늘어지다 못해 녹아내릴것 같은 나른함이 감돌고 있었다.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긴장 바짝넣고 들어와 바로 자신의 담당지역으로 이동 할줄 알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아, 내부는 지금 장비 체크랑 이것저것 할일 많으니까 나가 계세요.라는 매몰찬 한마디 뿐이었다. 

사전탐사도 끝났고 리허설도 얼추 맞춰놨으니 따로 볼일이 없지 않냐는 말은 맞긴 했지만 설마 진짜로 2시간 넘게 방치될 줄이야. 

쪼그라든 의요과 함께 바람빠진 풍선처럼 널부러진 요원들은 설마 공연까지 보고 들어갈까.. 라며 서로에게 내깃돈까지 걸기 시작했다.

결국 엘리베이터에 R이 뜰때까지 끝나지 않는 기자회견영상을 보며 몇몇은 눈물을 지었고 몇몇은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얼굴들은 하나같이 다 멀쩡하게 생겨서는..”


룩의 딱하다는 감상평 한줄로 톨비쉬도 마음을 정리한 뒤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난간에 팔을 걸쳤다. 

긴 날숨을 쉬는 톨비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채 공연장으로 시선을 돌리며 손목시계를 움켜쥐었다.

같은 취급 받고싶지 않다는건지 자기까지 저런 모습으로 초췌하게 비치고 싶지 않다는 것인지 모를 속내이지만 말을 하지 않으니 알 수없을 노릇. 

몇가지를 확인하던 킹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아, 나이트 또 시계 전원꺼놨어! 누가 가서 전원 좀 끄지 말라고 해!”


누가 가서, 라고는 말하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멀리 이탈할 수 없는 것이 뻔한 사정, 굳이 그중에서 같은 층 수에 있는 팀원이 움직인다 하더라도 해당되는 사람은 단 두명밖에 없었다.

그중에 톨비쉬에게 말할만한 사람이라고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단 한명. 

퀸의 눈짓에 불만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빨리, 라는 킹의 신경질적인 재촉에 발을 내딛기는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알고 찾으라는 것인가. 

밀레시안이 아본내의 카메라를 관리하는 룩에게 톨비쉬의 위치를 물어왔다.

룩은 굳이 찾아갈 필요가 뭐가 있냐며 묻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좀 더 앞으로 나오라는 말만을 반복했다.

밀레시안은 눈을 가린채 목적지를 찾아가는 술래처럼 더듬더듬 정원 중앙의 긴 수조근처로 이동했다.


계단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가지 색을 헤아리던 톨비쉬가 반갑게 미소지어보이는 것도 그즈음의 일, 

자신을 찾고있다는 사실을 기가막히게 알아챈 톨비쉬가 난간을 잡고 있던 손을 떼어 손목에 있던 시계를 감싸쥐었다.

잠시 후 새까맣던 화면 위로 나이트의 아이콘이 반짝였다.


“폰, 잠깐 그 자리에서 위로 올려다 볼래요?”


가서 말할 필요도 없이, 1층에 있던 밀레시안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보일리가 있겠냐.”


밀레시안의 대답을 대신한 것은 톨비쉬가 전원을 키기만을 기다리며 칼을 갈고 있던킹의 목소리였다.

한번만 더 전원을 끄면 백업이고 뭐고 다 날려먹을줄 알라는 살벌한 협박을 날리는 동안 아래층에서 진행중이던 기자회견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기자들과의 회견을 끝내고 vip용 통로로 빠져나온 크루크와 에후르 마퀼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져 각자의 대기실로 들어섰고 관제실과 블랙레이븐이 vip들을 체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외부와 아래층을 맡은 제로들이 기자들을 통솔하며 엘리베이터 근처에 대기하는 모습이 킹의 화면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극장에 출입 할 수 있는 기자들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기자들은 발길을 돌리는 모양이지만 몇몇 기자들은 극장의 외관이라도 찍기 위해 아본으로 올라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브류나크는 그런 기자들까지 알뜰하게 써먹기로 생각했던건지 쇼의 시각을 기자회견 직후로 배치, 

앞등장씬은 놓칠 수 밖에 없지만 외관만 찍고 돌아가기 아쉬울 기자들이 빈손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지루해하던 객빈들도 무언가가 시작할 것같은 부산스러움에 들뜬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덕분에 덩달아 바빠지는것은 안전을 책임지는 요원들의 몫. 

같은 분위기에 한껏 풀어져 있던 요원들이 관중들의 움직임에 섞여 천천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요원들 속에는 밀레시안과 퀸도 포함되어있었기 때문에 막간을 이용해 눈이라도 마주쳐보려 했던 톨비쉬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높이차가 상당한 연결로 뒤에서 그 쬐끄만한 얼굴이 보일까 킹이 타박을 하지만 밀레시안은 못할것도 없다는 표정, 소리내어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퀸의 중계방송에 톨비쉬가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내며 난간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회견장이 움직이는 것에 따라 간간히 블랙레이븐이나 다른 피오나의 내부경호 담당이 톨비쉬에게 연락을 취해오지만 그것도 아주 짧은 내용일뿐. 내부에 들어가기 전 준비된 정장으로 갈아입어야한다는 지시를 받은 톨비쉬는 짧게 내용을 재 확인 한뒤 한적해보이는 화단 옆에 멈춰섰다. 


쇼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서인지 객빈들은 대부분 1층이나 2층으로 내려가버린 탓에 3층은 꽤나 한산해진 분위기었다. 

톨비쉬가 잠시 눈을 땐 사이 정원을 구성하는 유리패널들에서는 아주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보그르르 피어오르는 낯선 물방울들이 기대감을 간지럽히듯 피어올라왔다.

유리의 투명함과 빛의 산란을 강조하기 위해 정원 여기저기 설치된 분수대나 수조애도 마찬가지로 맑은 공기방울들이 주입되며 물이 어디론가 세차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전달해왔다.

보글보글 피어오르는 거품꽃을 보며 이게 무엇일까 한껏 기대하던 사람들이 저마다 가까이 있는 수조를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탄성의 시작은 성급하게 뛰쳐나온 물고기 한마리가 수조속에 멍하니 서 있는 모습, 

누군가 와 물고기! 하고 소리치기 무섭게 물고기들은 삽시간에 불어나 정원 전체로 퍼져나갔다.

거품과 함께 물결이 흔들리는 바닥을 따라 쏜살같이 내달리는 물고기들은 진짜와 가짜가 뒤섞인채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고 있었다. 

하늘을 주제로하던 반투명한 정원은 순식간에 하늘위의 아쿠아리움으로 변화, 하늘과 2,3층 벽면에 달린 패널에도 수많은 물고기의 영상과 홀로그램이 떠올라있었다.


수조속 물고기들은 기껏해야 손바닥만한 작은 크기가 대부분이었지만 이 높은곳까지 물고기가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냈다는 것에 좀더 깊은 탄성이 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물고기들에게 시선을 빼앗긴사이 정원을 구성하던 조명이 아주 조금 어두워졌고 요원들은 반사적으로 긴장태세에 들어갔다. 

사방이 유리로 이뤄진 구조라 충분히 주변을 식별할 수 있는 밝기였지만 그래도 인공의 조명이 어두워진것은 주의할만한 요소였다.

살짝 어두워진 유리바닥은 투명함을 잃은 모습이었지만 모든것은 쇼의 일부분이었다. 


물고기를 따라 움직이던 어느 발자국아래에서 소리없이 꽃 한송이가 피어났다 흩어져 버렸다.

무작위로 피어나는 건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발밑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눈치이지만 물고기들은 꽃잎을 먹이로 알고 있는건지 곧바로 반응을 보이며 꽃잎이 흐트러진 발자국을 따라 무리를 지어 모여들었다. 

자유롭게 노닐던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무언가를 쫓아가는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퐁 하고 실시간으로 꽃이 피어났다 흩어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발밑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객빈들이 아닌 직원들도 있었고 경호를 맡고있던 요원들도 있었으며 밀레시안도 그 인원들중 하나였다.


“네, 거기입니다. 이제 거기서 돌아서주세요.”


톨비쉬의 목소리를 따라 중앙수조까지 걸어나온 밀레시안이 자리에서 멈춰섰다.

돌아보라는 방향지시에 따라 고개를 두리번 거리는 동안 수조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밀레시안의 발치로 모여들었다.

여기저기에서 꽃발자국의 존재를 알아낸 사람들이 함박웃음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의 일이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한 자리에서 이리저리 방향만 바꿔가며 제자리걸음을 반복한 탓인지 밀레시안의 발치에는 수북하게 꽃무리가 피어올랐다. 사람들이 시선이 밀레시안에게 모여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발밑을 확인한 밀레시안이 한숨을 내쉬었고 톨비쉬의 당황한 사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킹이 책상을 두드려가며 웃음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땡땡이 치는 사람은 어디에 누구?”


룩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밀레시안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너요, 너. 지금 나를 보고 있는 너. 고개를 들어 현재의 자리가 가장 잘 보일법한 카메라를 쿡찍어 가리키자 킹의 웃음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의자가 밀려나는 소리에 킹이 폭소를 터트리며 책상위로 엎어졌다.


잠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의자를 끌어당기기까지 수십초가 필요할 지경이었다.

심호흡을 하면서도 차마 창을 올려다 볼 용기가 나지 않는지 몇ㅜ번인가 입과 턱 주변을 손바닥으로 문질러내렸다.

주변에 지나가던 다른 관제실의 요원들이 괜찮냐고 물어오는 소리가 들려오자 숨을 죽여 룩의 근황을 엿듣고 있던 살펴보던 킹이 숨이 넘어갈듯한 웃음소리를 삼키며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킹의 주변에 있는 관제실 직원들도 그를 걱정스럽게 돌아보고 있었다.

킹이 신경쓰지 말라며 손을 저어 보이는 동안 둘 다 똑같은 놈들이라고 투덜거리는 것은 퀸의 몫이었다.

룩은 멋쩍은 표정으로 주변 요원들을 안심시킨 뒤 목소리를 낮춰 킹에게 쏘아붙였다.


“나만 놀란거 아니라는거 다 알거든?”


룩이 창을 끌어올리자 카메라에 접속해있던 킹의 아이콘이 스르륵 사라져버렸다.

무슨말인지 모르겠다며 은근 슬쩍 발을 빼는 뻔뻔함은 덤, 룩이 증거를 들이대어가며 킹을 추궁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런거 긁어낼 시간에 막아보기라도 하라며 이죽거림뿐이었다.

룩이 짜증을 내며 화면을 흩어내었다.


“내가 너를 막으면 퍽이나 막아지겠다”

“아-, 그거 항복선언? 항복하는거야?”


늘 반복되는 입씨름이 이어졌다. 

평소라면 라디오 방송을 듣는 것마냥 흘려넘기겠지만 지금 중요한것은 그게 아니었다.

밀레시안은 숨이 넘어가려는 킹을 부르며 손목시계를 툭툭 건드렸다. 보고만 있지만 말고 좀.


본디 요원은 이벤트 대상에 포함되지 않지만 위치선정이나 타이밍이 너무 좋지 못했다. 

아무래도 중앙 수조에 가까이 간 것이 화근인것 같았다.

킹이 약간 조정을 가하자 밀레시안의 꽃은 곧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호기심은 아직 거둬지지 않고 있었다.

엄마, 저 누나 봐봐. 아이의 호기심어린 손가락 끝에는 밀레시안이 걸려 있었다. 


스쳐지나가는 블랙레이븐의 눈이 차갑고 날카로웠다.

톨비쉬가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지만 이미 늦어버린일. 이에 대한 후처리는 알아서 하라는 냉랭한 대꾸와 함께 밀레시안이 나이트의 아이콘을 차단시켰다.

끊임없는 사과의 말로 가득차있던 오디오가 휑해졌지만 퀸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빈 오디오를 매꾸고 있었다.






“한바퀴 돌고와.”


내가 변명해줄테니까, 라는 말은 알아서 생략. 

사람들의 시선 혹은 타 에이전시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밀레시안은 빠른걸음으로 수조를 등진채 외곽에 자리한 쇼 행사용 캐노피속으로 숨어들어갔다.

시계가 흔들리며 톨비쉬의 문자가 떠올랐다.


‘아니, 내가 정말 미안하다니ㄲ..’


문자의 내용이 조금 더 남았는지 램프가 깜빡였지만 밀레시안은 전부 읽지 않은채 화면을 연타해 텍스트를 생략시켰다. 남은 것은 미확인 메세지의 램프뿐.

두어번 빛을 깜빡이던 시계는 업무모드로 전환하는 것으로 마지막 빛을 잃어버렸다.

얕은 불빛에 번들거리는 화면조차 보기 싫었던 것인지 밀레시안은 언짢은 표정으로 시계를 손목 안쪽으로 돌려버렸다. 누군가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런, 뭔가 트러블이 생기셨나봐요?”


어둠이 내려앉은 천막속에서 굉장한 미성이 들려왔다. 

어둠이 흔들리는가 싶던 찰나 가면의 위로 후드까지 깊게 눌러쓴 남성이 임시로 쳐놓은 분장실커텐을 걷어내며 얼굴을 내밀었다.

미스테리함을 강조하려는 손에는 새하얀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얕은 빛이 세어나오던 커텐뒤로 강렬한 오렌지빛 조명이 비쳐들어오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유일한 광원을 등진 붉은 후드의 금수가 빛나고 있었다. 쇼의 MC의 코스튬으로는 훌륭한 분장,

 하지만 밀레시안은 그의 가면을 응시하며 걸음을 멈춰섰다. 닮지도 않은 날렵한 모양새의 반가면이지만 연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신중하게 상대의 신원을 살펴보는 시선이 뒤따라 이어졌다.


친근하게 말을 걸려던 진행자는 멋쩍어졌다는듯 케이프 안쪽에 가려진 이름표를 꺼내보였다. 

말로, 사전에 연락받았던 극장 MC와 일치하는 이름이었다. 

ID카드에는 후드도 가면도 쓰지 않은 갈색의 미청년이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사진이 붙어있었다. 

사진을 빤히 내려다 보던 밀레시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말로는 다시 카드를 품속에 집어 넣었다.


“그래서, 어쩐일이신가요? 음... 그러니까.. 피오나?”


신분증명까지 마쳤으니 이제 질문은 말로의 턴, 특별한 용건 없이 불쑥 찾아들어온 밀레시안의 등장이 갑작스럽기만 하지만 말로는 여유로운 태도를 잃지 않은채 잔잔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누군가와 닮았네. 밀레시안은 이런식으로 웃으며 타인을 경계하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냥 들려봤다라고 하기엔 불쑥 들어와 경계부터 했던 자신의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힘들었고 뭔가 변명을 하기엔 타이밍이 늦었다.

밀레시안은 순순히 사실을 이야기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벤트선정에 오류가 생겼는지 꽃이 나한테 왔더라구요. 사람들의 시선을 떨칠겸 잠시 몸을 숨기려고요”

“음? 피오나의 요원이 이벤트 대상자로 지정되었다구요? 이상하다.. 분명 요원들의 동선은 대상선정에서 제외했는데요.”


말로는 그럴리가 없다며 어깨를 으쓱 들어올려보였지만 곧 장난스러운 눈웃음을 지어보이며 검지손가락을 세워 입술을 가로막았다.


“저런, 근무지 이탈중에 딱 걸리신거로군요?”

“본의는 아니었지만요”


“모두 그런식으로 말을 하곤 하죠.”


밀레시안은 잠시 가면너머의 말로의 눈빛을 응시했다. 

말꼬리 잡는것도 닮았네. 그가 조금 젊었을 시절, 그러니까 앞머리가 후퇴하기 전이라면 저런 느낌이었을까?

하지만 궁금증과 별개로 단장과 같은 타입이라는 것은 결국 말을 오래 섞어봤자 휘말리기만 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오랜 경험 끝에 달관의 경지를 체득한 밀레시안은 긍정의 반응도 부정의 반응도 보이지 않은채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말로가 손가락을 구부리며 턱끝을 매만졌다.


“이런, 첫 손님부터 이렇게 부루퉁한 반응이라니. 오늘은 좀 더 열심히 기합을 넣고 나가야겠군요.”


“아직 쇼를 시작하기 전이니까 나는 카운트에서 빼주지 그래요?”

“글쎄요? 쇼의 시작을 어디로 보는지에 따라 카운트의 기준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밀레시안이 다시 고개를 들어올리자 말로는 키워드를 잡았다는듯 고개를 숙여 낮은 목소리로 속삭여왔다.

어느새 걸음은 한뼘 가까이, 지독하리만큼 매끄럽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어둠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생각해보세요. 이 쇼의 시작은 어디서부터가 시작일까요? 부저가 울렸을때? 조명이 내려갔을때? 물고기가 헤엄쳐 나오고 스텐바이 15분전 바닥의 무늬가 변했을때? 카운트 시계가 붉은 램프를 올렸을때는 어떨까요? 라니에르에게는 엘리베이터에 R의 표식이 떴을때부터였겠지만 당신에게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밀레시안의 경계가 풀려가는 것을 눈치챘는지 말로가 어둠속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든 것을 통틀어도 내가 만난 사람은 당신뿐이지만요. 

어깨너머로 흘러나온 분장실의 조명이 밀레시안의 눈썹끝을 스쳐지나갔다. 

점점 밝아지는 빛무리를 따라 말로의 어깨가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말로는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밀레시안을 향해 손을 내밀어보였다. 

이쪽관련 인간들은 다 이런 자세가 디폴트인걸까, 밀레시안이 편견가득한 생각을 접어 넣으며 말로의 손끝을 응시했다.

퐁하는 소리와 함께 아무것도 없던 손끝에서 작은 꽃한송이가 튀어나오며 타-다-, 입효과음이 들려왔다.


“꽃을 선물받은 것으로 시작하는 것도 꽤나 로멘틱하지 않습니까?”


가면속에서 한쪽눈을 찡긋해보이는 익살에도 밀레시안은 눈하나 깜짝 하지 않은채 부동의 자세를 유지했다.


“나는 카운트에서 빼달라니까요”


하지만 꽃을 받아들때까지 움직이지 않을 분위기에 밀레시안이 한숨을 내쉬며 꽃을 받아들었다.

오늘일은 유난히 사람에게 치이는 일들뿐이다.

밀레시안이 종이로 만들어진 꽃을 손끝으로 빙그르르 돌리다 자켓 안쪽에 조심히 집어넣었다. 

눈앞에서 선물받은 꽃을 내던질정도로 모질지 못한 탓이었다. 꽃을 소중히 간직하는 모습에 말로가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 웃음은 진짜다. 

밀레시안은 영문을 모를 사람이라며 미간을 좁히고 있는 사이 말로는 구겨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고쳐묶는 후드끈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시선이 생각보다 높은느낌이었다.

가까이 다가섰기 때문인가, 숙여있던 자세와 일어섰을때의 머리높이가 미묘하게 엇나간 느낌이었다. 

밀레시안이 말로와의 신장차이를 의식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말로가 밀레시안의 등을 가로막으며 고개를 기울여왔다. 

생각을 읽은 것 같은 깊은 갈색의 눈동자가 오렌지빛의 불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흐음,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보통은 아무도 못알아채는데..”


“아무말도 안했는데요”

“사실은 이 구두, 교역센터에서 가끔씩 수입된다는 비밀의 키높이 아이템이거든요. 티는 안나지만 한뼘은 더 커져보이는 마법의 아이템..! 제가 아는 인맥중 작고 영악한 부서의 누군가에게 긴히 부탁을 해서 하나구해왔죠.”


그거 킹이 무지 좋아하겠네. 밀레시안의 흐려진 표정에 말로가 걸려들었다며 잽싸게 진실을 덧붙였다.


“는, 거짓말입니다. ”

“......”


역시 단장같은 사람이었어. 밀레시안이 온 세상 신뢰를 다 후려친 눈빛이 되어 말로의 팔을 밀어내었다. 

누군가 케노피 앞에서 무전을 주고받고 있었다.


“저는 상반신에 비해 다리가 긴편이거든요. 그래서 앉은키랑 일어섰을때랑 신장차이가 많이 나는… 앗, 어디가십니까? “


밀레시안의 표정을 무너트렸다는 기쁨 때문인지 조잘조잘 말을 이어가던 말로가 서운한 표정으로 밀레시안을 붙잡았다.

언제 봤다고 이렇게 친근하게 구는 것인지 밀레시안이 시간을 가리키자 말로가 엇차 벌써 시간이 이렇게? 라며 넉살좋은 미소를 띄어보였다.


“시간 다되었어요”

“아 벌써 그런시간이 되었군요. 아쉽게되었네요. 그럼, 나중에 또 보도록 합시다.”


“그럴일은 없을 것 같은..”


“말로씨, 슬슬 준비하셔야죠?”



“네, 나갑니다.”


밀레시안이 그럴리가 있겠냐고 대답하려 했지만 말로는 전부 듣지 못해 미안하다는 손짓과 함께 스태프를 따라 케노피 밖으로  돌아섰다.

순식간에 휩쓸리고 지나가버린 기분이었다. 

멀뚱히 남겨져 있던 밀레시안이 신경쓰였는지 천막을 나가기직 전 말로가 자신의 케이프 위를 툭 건드리며 눈을 찡긋 거려보였다. 

밀레시안이 꽃을 집어넣었던 자켓 주머니와 비슷한 위치였다.


“.........”




주인이 나가버린 케노피에서 빠져나온 밀레시안은 훨씬 한적해진 주변을 둘러본뒤 기둥을 돌아 퀸이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한참동안 시야에서 사라진 밀레시안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 거리던 퀸이 반갑게 밀레시안을 맞이했다.


“어디까지 갔었어?”

“그냥, 요 앞에요”


밀레시안은 말로가 머물던 케노피와 행사장 근처를 가리키며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메세지를 확인했냐는 말에 밀레시안은 어깨를 으쓱 거리며 시계를 들어올렸다.

업무모드로 변환된 시계속에는 나이트의 아이콘만 바쁘게 움직일뿐 소리나 빛은 흘러나오지 않는다. 

과연 그렇게 된 것이었냐며 납득하는 퀸과 달리 밀레시안의 인이어로 직접 메세지가 연결되었다. 

누가했는지 묻지 않아도 가능 한 사람은 딱 두명 뿐이었다.


“폰, 요요요요 거짓말쟁이….”

“내가 뭘요”


천막속의 대화를 엿들었을것이 분명한 킹이 음산한 풍으로 목소리를 내리깔며 때이른 귀신에코를 넣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여왔다.


“나이트에게 이를꺼다...”


뭐가 이를 것이 있다는건지 밀레시안이 맘대로 하라며 통신을 끊어버리자 퀸이 의아해 하며 밀레시안을 돌아보았다.

연결이 끊기자 마자 옆에있던 퀸에게 바로 연락을 돌린것인지 밀레시안은 짜증나는 표정으로 통신을 다시 연결했다.

킹은 밀레시안의 냉대에도 지지 않고 음산한 목소리를 유지하며 질척하게 들러붙어왔다.


“비밀을 원한다면 나에게 그 물건에 대한 정보를 넘겨라…”


“물건?”

“구...두...말이다…”


역시 목적이 따로 있었구만,  킹의 간절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밀레시안이 줄 수 있는 정보는 몇가지 안되었지만 킹은 그것만이라도 어디냐며 열심히 메모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을 거쳐 하나 구했다는게 뭐 그리 중요한건지, 킹은 실제의 사례가 있는 것과 소문의 차이는 크다며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격렬한 감정의 폭발에 밀레시안이 잠시 인이어를 뽑아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여전히 나이트의 아이콘이 점멸하고 있었다.


소문이 흘리고 다니던 실제의 꼬리를 잡았다는 흥분감 때문인지 킹은 퀸과 연결했던 메세지를 끊는 것을 깜빡한채 밀레시안과의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본의아니게 당당하게 이야기를 엿듣게된 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냥 본인에게 물어보면 어때?”


“업무용 연락처밖에 공개되지 않았는데? 소개받지 않은 개인 연락처로 물어보면 퍽이나 대답해주겠네”

“폰의 소개라고 말하면?”


“아니, 나도 딱히 소개받거나 하지는 않았는데요”


밀레시안의 대답에 퀸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이상 방법이 없다는 제스쳐였다.


“그러고 보니, 너 뭔가 받았다며”


“지금 이게 도청기인지 무전기인지 헷갈리기 시작하네요”

“뭔가 받았다며어…!”


킹의 끈질긴 질문에 밀레시안은 품속을 뒤적거리며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그냥 종이꽃 하나라며 버리기 뭐해서 받아두었다는 꽃을 꺼내 퀸에게 확인시켜주기 위해 자켓안쪽을 살피던 밀레시안이 손을 멈추며 주머니 안에 들어간 낯선 종이를 꺼내들었다.


꽃모양으로 접어놨던 종이인지 구깃구깃 해진 종이 한장이 손에 들려져 나왔다.

누군가의 개인적인 번호가 밀레시안의 손에 들려있었다.

밀레시안은 끝에 끝까지 낚였다는 사실때문인지 살짝 굳어버린 눈치였다. 

아니면 자신의 소지품이 바뀐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는것이 충격적이었다거나.


“........”


“뭔데? 뭔데?!”


“꽃이였어요.”

“꽃이였던 모양이네”


“뭔데 그게?!”


진실과 거리가 조금 있었다 뿐이지 거짓은 아니었다. 

퀸은 나중에 쓸모가 있지않을까? 라고 입모양으로 대답해 보였다.

쓸모는 무슨 쓸모라는건지, 밀레시안은 그럼 퀸이 가져가라며 억지로 종이를 퀸의 손에 쥐어주었다. 


뭔데? 왜 갑자기 말이 없는건데 라는 말을 반복하는 킹의 말을 무시한채 소리없는 아우성이 오가고 있었다.

결국 종이를 떠넘기는데 실패한 밀레시안이 오만상을 찡그리며 옷매무새를 고치고 있는 동안 자리 이동을 위해 블랙레이븐이 다가왔다. 

엘리베이터의 하강램프가 점등되었고  현장에 있던 요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올려 서로의 정보를 확인했다. 대기 위치를 변경하기 전, 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밀레시안에게 조언을 건네왔다.


“나이트에게 메세지라도 하나 보내”

“내가 왜요..”

“보내 놔...!”


밀레시안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손목을 들어올렸다. 

버튼 하나 분량의 아이콘를 남은 메세지가 나이트의 아이콘으로 빨려들어갔다.






하늘이 한층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조명을 어둡게 하기 위해 전면이 유리로 되어있던 극장 뒷편의 커다란 전망창에 반투명한 필터들이 덧씌워졌다.

소리없는 암운을 몰고온 사자인양 극장의 장식용 첨탑 사이로 검은 헬기가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소리는 커녕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는다.

톨비쉬는 먹통이 되어버린 인이어를 만지작거리며 헬기를 바라보았다.

밀레시안에게는 차단당했고 킹은 뭐가 잘 안들리지 조용히하라며 떠나버렸다. 퀸은 좀 기다려보라며 응답을 미루고 있는 상태.

일을 하러 들어간 룩을 부를 수도 없고 남은 것은 저 헬기에 있을지도 모르는 비숍뿐,

이래서야 전원을 끄던 키든 똑같지 않느냐는 푸념이 입가에 쓴맛을 남긴다.


“비숍?”


“어”


여전히 바람소리와 잡음이 시끄러운 것으로 보아 접근했던 헬기는 비숍이 타고 있는 헬기가 맞는 모양이었다.

접근해오면서 톨비쉬의 확인을 예상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비숍은 곧장 대답을 보내왔다. 

팀원 모두에게 무시를 당하는 시점에서 비숍의 대답이 유난히 반갑게 느껴진다는 사실은 지울 수 없지만 톨비쉬가 비숍을 호출한 것은 잡담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헬기는 그대로 정원 근철을 돌아 상승하며 남은 체크포인트를 순환, 이후 오후팀과 교대할 예정, 딱히 다른 통신이 들어오지를 않는 것을 보니 외부팀도 순조로운 모양이었다.

머릿속으로 외부순찰팀의 일정을 복기하던 톨비쉬가 시선을 돌려 꽃잎이 흩날리기 시작하는 1층의 공연장을 바라보았다. 지금인가? 톨비쉬가 흘끗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정오를 지나 반시각을 알리는 알람소리가 울려왔다. 

밀레시안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고 비숍의 헬기는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짜르르하게 귓가를 울려오는 심벌즈의 소리가 들려왔다.


음악을 알리는 북소리를 시작으로 R에서 머무르던 엘리베이터들이 일제히 하강램프에 빛을 밝혔다.

꽃가루가 휘날리고 기자회견장 이후 제각기 다른 광고의 화면으로 돌아갔던 화면들이 일제히 파란 화면을 띄워올렸다. 

진짜 하늘을 가리고 거짓의 하늘을 조명하는 전시회장, 하늘을 수놓는 꽃들사이에도 거짓이 숨어있었다. 

이 꽃은 진짜 꽃일까? 아니면 가짜의 환상일까.

톨비쉬는 머리위에 떨어진 은백색의 반짝이 종이를 떼어내었다.

옷은 갈아입을테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머리가 흐트러지는 것은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꽃가루가 묻지 않을 법한 장소가 어디 있을까, 천장이나 인적이 좀 드문 장소를 물색하던 도중 문득 1층의 카페테리아를 떠올렸다.

이정도 시선끌기용 이벤트가 시작되었으면 이제 슬슬 카페테리아의 관중들도 흩어졌을 시간이었다.

인테리어용 파라솔이 꽂힌 카페테라스의 좌석과 늘어져있는 다른 에이전시의 요원들의 모습들, 옷을 갈아입을 만한 여유분의 시각, 몇가지 요소들을 헤아리던 톨비쉬가 잰걸음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진짜 꽃가루와 홀로그램의 꽃가루가  어두워졌던 조명을 밝혀왔다.




내려가는 도중에도 밀레시안에게 보내는 메세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다시한번 메세지를 보내지보지만 여전히 읽지 않았다는 반응만이 되돌아올 뿐이었다.

톨비쉬의 입꼬리에 쓴웃음이 걸렸다. 분명 순간적인 욕심으로 불러낸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서도..,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발치에 피어난 꽃을 발견했을때의 표정이라던가 살짝 풀어지며 발을 통통 구르며 확인을 거듭하던 모습,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정색하는 타이밍이라던지.. 비틀렸던 미소가 온전한 곡선을 그리며 입가에 번져나갔다.

8시 방향에 있던 벨바스트가 11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간에 손을 얹은채 계단을 따라 내려가선 톨비쉬의 눈이 가늘게 흐려졌다.


2시에 있던 타라는 5시로 이동하고 있었고 비숍이 탄 것으로 보이는 헬기는 이제 엘리베이터의 뒷쪽 창문을 가로지르며 상승하고 있었다.

피오나 쪽도 확인하고 싶지만 구조물에 가려진 피오나의 위치가 잘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살펴볼 광원이라고는 은은하게 빛을 내는 외벽과 계단, 난간등에서 피어나는 섬세한 꽃무리들 뿐이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쨍하니 울리는 심벌즈의 소리에 맞춰 터져나왔다.

북소리와 함께 연주되는 현악기의 선율이 사사로운 소리를 가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비춰지는 스포트라이트가 공연장에 내리꽂혔고 시선은 한 지점으로 모여들었다.


엘리베이터가 아본으로 내려왔다. 

엘리베이터의 간접조명이 위아래로 오르내리며 화려한  카운트다운을 헤아렸다.

이제 곧, 속으로 타이밍을 헤아리던 톨비쉬가 카페테리아의 요원들과 합류했다.

요원중에선 마지막으로 도착한 꼴이되었지만 시간에 늦은것은 아니었다. 

톨비쉬는 마지막으로 남은 극장내 진행 MC를 기다리고 있다는 정보를 전달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업무적인 대화 이후 의례것 남게되는짧은 침묵이 흘렀다. 


톨비쉬는 습관적으로 시계를 들여다는 보던것을 멈춘뒤 팔을 문질러내리며 소매끝으로 시계를 덮어내었다.

정말 시간을 확인하기 위한 행동이었나?스스로에게 엄중한 경고의 기준을 들이대고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답장은 도착하지 않았다. 읽었다는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다. 




톨비쉬는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며 업무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머지는 나중에, 다음에, 일이 끝난 이후에 만나면 되는 일이다.

동쪽 직원용 출입구에서 이어지는 어둑한 길목쪽으로 부터 붉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호리호리한 체형의 청년이 이벤트 스탭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극장의 진행자였다.


청년은 마지막으로 도착한 것이 멋쩍은지 가볍게 농담을 섞어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함께 도착한 스탭이 18명의 요원들의 얼굴과 명찰을 일일히 확인하는동안 극장내에 들어가있던 제로의 엔지니어로 부터 준비가 끝났다는 연락이 전달되었다.

응답을 받은 것은 톨비쉬의 곁에 서 있던 제로의 요원, 귀에 걸린 피어스로 보아 이쪽이 디바측의 인물일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이쪽이 멀린의 요원이고 다른 두명은 디바측인 모양이었다. 

멀린에게 이런 요원이 있었던가? 톨비쉬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한참 소리를 낮춰 빠르게 말을 주고받던 멀린의 요원이 가느다란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톨비쉬도 당황한 기색없이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치레로 얼버무리지만 기묘한 느낌이 남은 인상이었다.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 것같은 낯익은 눈매였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에는 없는 사람이다. 톨비쉬는 자신의 기억이 틀렸을리 없다는 확신을 가지며 고개를 돌렸다. 

끊어지지 않은 시선이 끈적하게 늘어져왔다. 이런식으로 대놓고 사람을 떠보는 미소를 잊어버릴리가 없는데.. 

톨비쉬는 다른 피오나들에게 합류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들중에서도 그 요원과 일선에서 만난 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왜? 의문을 해결할 시간도 없이 새로운 지령이 전달되고 있었다.


지루하던 대기시간의 끝이 났고 남은 것은 아득히 길게 느껴질 업무의 시간뿐, 요원들은 요란하게 스트레칭을 하며 풀어졌던 얼굴표정을 가다듬었다. 말로와 이벤트 스탭들이 먼저 2층의 동쪽 입구로 이동했다. 

나머지 요원들은 서쪽의 입구로 이동한뒤 상의를 바꿔입고 극장안으로 들어설 예정, 톨비쉬는 예정되로 팀의 인이어를 해제한다는 메세지를 킹에게 전송했다.

극장내에서는 지정된 통신장비만을 사용해야하기 때문이었다.

킹은 가볍게 오케이 사인을 보내왔다.


톨비쉬들이 극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예정된 시각이 찾아왔다. 

확하니 밝아지는 정원의 빛이 온 세상을 푸르게 물들이고 있었다. 

은빛을 표현하기 위한 암막은 이를 위한 사전설정, 사방으로 가득차는 하늘의 빛위로 붉고 옅은 꽃잎들이 정원가득 날아오르고 있었다. 

승리와 개선, 축복과 영광, 얼어붙은 은색의 광물위에 생명력 가득한 박수세례를.


환호소리에 맞춰 등장한 낭랑한 여성 진행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지만 두터운 극장의 문에 가로막히며 침묵속으로 잠겨들었다. 

어둠속 짧은 복도를 밝히기 위해 발목언저리의 작은 조명들이 불을 밝혔다. 

유난히 창백한톤의 푸른 빛이 톨비쉬들의 얼굴을 역으로 비춰올렸다. 

두번째 문에 들어서기전 톨비쉬가 한쪽의 인이어를 빼내었다.







세세하게 따지자면 톨비쉬가 가지고 있는 시계나 몇몇 장비들은 개인장비에 속하는 물건이었다. 

떄문에 원칙적으로는 시계까지 풀러내야했지만 블랙레이븐은 그렇게까지 따진다면 한도끝도 없겠다며 제로들을 가리켜보였다. 

디바는 웃었고 멀린은 넉살좋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제로들은 그렇기 때문에 외부로 모든 인력을 돌리려하는 것이라며 은근슬쩍 내부로 지정된 인원을 빼내려했지만 다우라의 손짓 한번에 서류는 다시 테이블위로 끌려나왔다.

낮게 혀를 차는 다우라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의 빛을 밝힐 브류나크가 그렇게 째째하게 굴 수만은 없는 노릇이지.”

“글쎄, 우리쪽 교수님은 째째한게 느슨한것보다 좋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잔소리를 해서 말이지.”


“내 말을 그렇게 잘 듣고 있는줄 알았으면 평소에도 1g정도 실천해보지 그랬나”

“아 진짜 손발 안맞아서 못해먹겠네.”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에린이 사용하는 모든 기술은 결국 칼리번의 예측 범위 안에 들어있는 시간의 증거물들이었다.

칼리번은 지식을 모아 발전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 결과를 예측한다. 사람들은 결과에 맞춰가듯 기술들을 발표했다. 과거의 결과와 현재의 상태를 반영하여 미래를 예측. 예언과 증명, 사람이 기술을 만드는 것인지 기술을 사람을 만드는 것인지. 그 시작점은 이미 모호해졌다.

칼리번에 의해 생활의 방향이 달라져 왔고 사람들의 취향에 의해 칼리번의 방향이 결정되었다.

지루하지만, 실패없이 안정적인 발전이었다. 칼리번의 연산속도에 맞춰 진행하기만 하면 무난한 성공의 궤도에 오르게 된다.

때때로 누군가가 변화의 움직임을 시도했지만 결국 그 변화의 시도조차 칼리번의 시야 안에서 일어나는 일.

사람들은 안락함을 느꼈고 동시에 조금씩 갑갑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 때 생겨난 변수가 바로 피오나의 실리엔, 칼리번조차 예상하지 못한 실리엔의 부활과 더불어 발레스의 개화가 시작되었다.

평생을 설원 속 대장장이로 썩어버릴 것이라 생각했던 암울한 과거와 달리 화사하게 빛이나는 실리엔은 새하얀 설원에 또다른 색채를 더해주었다.

칼리번에 등록되지 않은 힐웬의 정제기술은 빠르게 변화했고 에일레흐는 그 변화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시한번 변화를 꾀했다.


에일레흐는 그동안 축적되어왔던 칼리번의 지식을 토대로 그 예상범위 안에서 벗어나는 것을 시도했다. 

발레스는 그 기반이 되었고 그 결과 태어난 것이 바로 브류나크.

기존의 칼리번의 예상안에서 벗어나면서 대등한, 혹은 그를 넘어서는 새로운 에린의 중심부를 만드는 것이 두 왕가의 목표이자 경쟁하는 레이스의 결승 골이었다. 

떠오르는 발레스와 시대에 걸쳐 군림하던 에일레흐, 그리고 그 사이에 끼여버린 기타 여러 에이전시들이 발레스의 다우라를 바라보았다.

다우라는 엄지손가락과 검지손자락을 펼쳐 느릿하게 원을 그리며 말을 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폐하로부터의 전언은..”


시네이드가 헛기침을 하며 저희 이사장님도 함께 말씀하셨습니다만, 이라고 첨언하지만 다우라는 개의치 않아하며 손가락 총을 들어 천장을 향해 발사했다.

찡긋 거리는 한쪽 눈 윙크가 익살스럽지만 흉터가 그어진 푸른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어디한번 들고올테면 들고와보라 이거야.”






“그거 프로포즈?”


“역시 그렇게 들리지?”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톨비쉬의 전언에 킹과 룩이 동시에 의자를 기울이며 톨비쉬를 돌아보았다.

이럴때는 참 꿍짝이 잘맞는데 말이지. 톨비쉬는 뻐근해진 어깨를 앞뒤로 돌리며 냉장고를 향해 걸어갔다. 

이름표가 붙어있는 맥주캔이 7개, 톨비쉬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두개의 캔을 꺼내들며 성의없이 대답했다. 

넥타이가 거슬렸다. 


“그렇게 들린다면 그런모양이지”


베베꼬여있는 정보계의 감상따위 이해할 수가 있을까. 

톨비쉬의 무성의한 대답에 룩은 한층 높인 가성과 함께 양뺨을 살짝 감싸잡았다.


“어머어머어머, 우리 지금 헤드헌터 들어온거야?”


“아니지, 나는 헤드헌팅, 너는 테일헌팅”

“어머어머어머, 이렇게 작은데? 이렇게 쬐끄만데? 우리팀 용가리는 머리가 이-렇-게 작아서 어따쓴다니?”


“너 잡는데. 네놈 잡은데 쓴다, 이자식아.”


섬광이 튀어올랐다. 킹은 시험작이었던 나이프을 휘둘렀고 룩은 강화중이던 간이 실드를 펼쳐들었다. 

파지직 거리며 튀어오르는 스파크는 둘째치고 이동모드로 되어있던 룩의 의자가 빠른속도로 미끄러지며 거실 반대편으로 밀려나갔다.

원흉끼리 떨어지는 것으로 일단락되는가 싶었지만 이 속력을 기다렸다는 외침과 함께 룩이 자세를 전환, 반대편 벽을 발로 걷어차며 원하던 속도를 얻은 룩이 힘차게 기술명을 외치며 킹에게 달려들었다. 

가속을 받은 방패의 모양이 재 구성되며 유선형의 모양으로 변경되었다.


“먹어라 돌진..!”


“나 지금 인두잡고 있는데?”

“헉 안돼, 기스나면 안돼..!!”


룩은 급하게 의자를 멈춰세웠고 킹은 아깝다는 표정으로 인두를 내려놓았다. 

룩은 우는 소리를 길게 내며 실드를 접어넣었다.


“인두는 살인미수야! 이 아이는 아직 출품신고도 못했는데!!”

“그러면 괜찮지 않을까? 아직 비공식이면 아슬아슬하게 허가범위가 아닐까?”


새파랗게 질린 룩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킹이 빙글거리며 인두를 내려놓았다. 

헤치는 대상이 사람인지 물건인지 알송달송한 대화가 퍽이나 멍청하게 느껴졌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일에 익숙해진 미스터 융통라인은 엄중하게 손날을 세워 왼편의 의자를 밀어내었다. 환호성과 납득할 수 없다는 비명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일단 나이프에서 전기 튈 때부터 이미 아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 놈 실드 폼 못봤냐?! 진짜 달려들 생각이었다고?!”


“신고 이전 제품이기 때문에 변형된 폼에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문의해주십시오.”


“오예!!”

“오예가 아니지?!”


“신고 이전 제품이기 때문에 변형된 폼에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문의해주십시오.”


톨비쉬는 들고있던 맥주캔을 마이크 삼아 자동응답기마냥 대답하기를 반복했다.

킹은 억울하다는듯이 손모양을 꿈틀거리며 허공을 움켜쥐었지만 글러브도 끼지 않은 제스쳐를 인식할리 없었다. 

끄으윽거리며 주먹을 움켜쥐던 킹이 한숨으로 말을 삼켰다. 나이가 한살이라도 많은 자신이 참겠다는 태도였다.

룩이 다시한번 양손을 힘차게 뻗어올리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트레이닝실에서 나오던 퀸은 안봐도 뻔하다는 얼굴로 톨비쉬들을 바라보았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킹의 얼굴에 옅은 웃음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잘 참았어. 이제 꼬맹이장단에 휘둘릴 나이는 지났지?”

“그렇지. 이제 앞자리가 바뀐이 얼마 안되었다는 변명 효력이 떨어져가고 있으니까. 반은  정말 아니잖아, 반은.”


오른쪽을 차지하고 들어온 톨비쉬와 함께 왼쪽도 가로막힌 킹이 의자위로 다리를 끌어모아 올렸다. 

인내와 심기는 다른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 있다는 웅얼거림과 함께 목울대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니들도 곧이야. 사람가는데 순서없다는 것만 알아둬.”

“그건 아니지, 보내버리면 안 바뀌는 거니까...”


그 소란속에서도 느긋하게 누워있던 비숍이 침묵을 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파뒤에 감쪽같이 누워 맥주만 들이키던 비숍은 비어버린 한쪽팔을 소파에 걸치며 까치집이된 더벅머리를 벅벅 긁기 시작했다. 

비어있는 손이 소파 뒷편으로 흘러내렸다. 까딱까닥 하는 폼이 뭔가를 원하는 모양이었다. 


“여기”


톨비쉬가 들고있던 다른하나의 맥주캔을 던져주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와중에도 뒷통수에 날아들어오는 맥주캔은 어찌 그리 잘 알아채는 건지, 비숍은 가볍게 캔을 잡아내어 머리 위로 캔을 들어보였다.

경쾌한 탄산소리와 함께 비숍의 목울대가 꿀렁거리고 있었다. 

단번에 반을 캔은 한결 가벼워진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아침에 깨끗하게 치워놓고 나갔던 테이블 위에는 높디 높은 캔맥주의 탑이 쌓여져 있었다.

 바람이라도 불면 그대로 흐드러질 것같은 아슬아슬한 첨탑, 비숍은 7번째 캔을 어떻게 올릴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역시 최연장자! 지혜의 깊이가 다른 연륜의 조언이네..!”


“......”


룩이 깨방정을 떨며 양 손으로 손가락 총을 만들어 비숍을 가리켰다. 

아부라고 하기엔 조준점이 저멀리 빗나가버린 칭찬이었다.

분위기가 잠시 차가워졌지만 비숍은 매마른 웃음소리를 한번 흘려주고는 들고있던 캔을 입으로 가져가며 스르륵 소파아래로 흘러내렸다.


원하던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이상 끼고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은근슬쩍 바보들의 행진속에서 이탈하는 비숍의 노련함에 킹이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는 눈앞의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하는 표정이었다.


“웃으면 되는걸까? 웃으면 되는 거야? 아무리 홧병이 날 것같아도 웃어넘기면 되는걸까?”


“아직 4년은 더 화내도 괜찮아.”

“4년뒤부터는? 그때부터는 웃어야 하는걸까?”


퀸은 한번 빠진 머리카락은 칼리번도 구해줄수 없다고 엄중하게 경고하며 방치되어있던 킹의 화면을 끌어당겼다. 

청색으로 뒤덮여있던 나이프의 단면도가 사라지며 가라앉아 있던 검은 화면이 떠올랐다.

아본의 조감도와 브류나크의 정면도 옆으로 6개의 체스말이 떠올랐다.


반투명한 화면에 가려졌지만 톨비쉬는 머리를 움켜쥐고 있던 킹의 손아귀가 슬쩍 벌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죽은 모근을 되살릴수 없다는 것 뿐이지 여타 다른방법은 아주 많이 마련되어 있다는게 좀 더 정확한 진실, 하지만 킹은 손바닥으로 옆머리를 꾹꾹 누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단장의 헤어스타일은 싫어”


단장이라는 말에 톨비쉬들은 아- 하는 탄성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모자로 가리고 있지만 알아챌 수밖에 없는 진실, 사실 본인이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거 아닌가싶을정도로 단장은 자신의 외형이나 일상도구에 대해 고리타분한 기준을 준수하고 있었다. 

이제는 보기힘든 기름이 든 라이터라던가 가끔 편지를 부엉이따위로 날려보낸다던가. 그러면서 새로운 기기에 대해 잘 모르는건가 싶으면 또 그건 아닌 것인지 요원들이 시험삼아 만들어온 물건들도 곧 잘 능숙하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다못해 지금은 듀얼건을 직접 지도하고 있지 않은가. 톨비쉬는 문득 시간을 떠올리며 시계를 확인했다. 트레이닝 시간이 한참 지난것 같은데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톨비쉬가 2층의 복도를 두리번거리는 동안 티비가 잠시 지직거리는 소음을 낸 뒤 정상의 상태로 돌아왔다. 

비숍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채널을 돌리다가 룩들을 돌아보았다. 

퀸과 함께 숨죽여 웃고있던 룩이 말안해도 안다는듯 어깨를 으쓱 들어올려보였다.


“아, 그거 아-무 이상도 없는데 가끔 그러더라. 방법이 없어”

“멀쩡한거야. 전에 한번 다같이 모였을때 회의주제로도 올려봤는데 원인 불명이야”


다 같이? 모였다고? 농담이지? 세 사람의 목소리가 다중 합창처럼 서로다른 타이밍에 시작해 한 지점에서 끝을 맺었다. 말도 말라는 건지 손을 휘휘 내젓는 킹의 표정이 설명을 대신하고 있었다.


“뭐라그랬었지? 10명이 모이면 8명이 사라진다고 했나?”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 49명이 나타나는것보다 훨씬 더 마음 편하겠어.”

“평소의 이미지로는 49명쪽이 훨씬 현실감이 있는데”

“헛소리말고 시계나 내놔”


킹의 재촉에 톨비쉬가 왼손을 내밀었다. 시계를 찬 손이 화면에 닿자 아날로그식으로 째깍거리던 시계가 흐려지고 배경속 나이트의 체스말이 바닥면부터 천천히 하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오늘 있었던 회의의 결과를 업데이트 하는 동안 꼼짝없이 한 손이 묶여있게 된 톨비쉬는 아쉽다는 눈으로 맥주캔을 내려다보았다. 룩이 톨비쉬의 캔을 받아들었다. 


“그러고보니 폰이 아직 안돌아온 것 같은데..”

“어.. 그러고 보니까 아직도 안돌아왔네?”


룩은 따개를 열어젖힌 맥주캔을 되돌려주었다. 

톨비쉬가 가볍게 고개를 기울이며 맥주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한모금을 마시기도 전에 화면을 뚫고 불쑥 튀어나온 오른손이 톨비쉬의 맥주를 강탈, 

한순간이나마 허를 찔린 톨비쉬가 진심으로 짜증을 내며 불투명해진 검은 화면을 노려보았다. 

스쳐지나간 범인의 오른 손목의 특징은  톨비쉬와 같은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는 것.


톨비쉬는 시계속에 검은색 킹의 체스말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한사람을 노려보았다.

잠깐 스쳐지나간 디지털 시계속 화면에는 여러개의 알람과 메세지표시가 점멸하고 있었다. 

벌써 다음버전인건가? 톨비쉬는 하얗게 변한 나이트가 다시 검게 칠해지는 것을 확인했다. 

막 따자마자 빼앗긴 캔맥주는 어쩐지 한김 미지근해진 맛이라는 혹평과 함께 머리위로 들어올려졌다. 

범행을 방관하고 있던 왼쪽의 보호자가 남은 맥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내꺼 줄테니까 눈에 힘풀어”


“안마셔. 안 마시고 다른값으로 청구할거다.”


“네에-네에-. 폰을 찾아오라 이거지?”


“그럼 나도! 나도 도전이야!”

“네이-네이-, 마음대로 해라”


킹은 안들어도 알만하다면서 내팽겨쳐져 있던 글러브를 끌어당겼다.

톨비쉬가 손을 대고 있는 큰 화면 대신 작은 화면을 꺼내들고 몇번을 까딱이자 금세 밀레시안의 위치가 확인되었다. 아무리 직장내 스캔이라지만 정말 너무하다 싶은 속도였다.


룩이 질렸다는 표정과 함께 킹의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룩의 화면도 일단 동일한 화면속 위치는 띄워놓긴 했지만 영상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들이었다. 

킹은 보안용 카메라를, 룩은 엑세스된 보안기록의 흔적을, 룩은 고개를 설래설래 내저었다.


“질렸다.. 이래서는 빼도박도 못하게 범죄형이잖아.”


“어허, 왕도와 범죄는 원래 한끗차이라는거 모르나.”


킹이 자신의 화면을 톨비쉬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순순히 넘겨줄리가 없지. 

톨비쉬는 패턴을 파악하고 있다는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아니나다를까 맥주 한캔에 너무 비싼 인력을 부려먹은거 아니냐는 거드름과 함께 실시간으로 재생되던 화면에 사진처럼 정지되었다.

살살 웃으며 톨비쉬의 옆구리를 찌르는 폼이 퍽이나 익숙해보이는 일련의 흐름이었다.


행동과 마음가짐, 그리고 결과물까지. 차라리 이정도면 범죄의 경계로 넘어가주는 것이 마음에 편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차라리 범죄영역이라면 깔끔하게 저쪽에 넘겨버릴텐데.

톨비쉬는 나지막히 속마음을 흘리며 화면을 끌어당겼다.


의도된 혼잣말은 마법의 주문처럼 얼어붙은 화면을 녹여내었고 킹의 입은 한사발 부루퉁하게 내밀어졌다. 

7년지기 새파랗게 어린놈을애지중지 키워봤자 세상 쓸모없다. 

큰 화면속 회의내용을 읽고있던 퀸이 한쪽 손을 내려 머리를 쓰다듬어왔다.


“아 범죄라고 하니까 생각났는데. 아까 말한 49개 접속기록말이야. 그거 사실 킹이 만든 더미 아이디 로그아웃하는걸 잊은거였..!”


쓸모없는 거라면 룩의 눈치가 더 쓸모없지 않을까.

갑작스러운 폭로를 막기 위해 데이터소거보다 빠른 발놀림이 룩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평소에도 저 반만큼의 행동력으로 스트레스를 발산한다면 이 성질머리가 좀 덜하지 않았까 싶은 매섭고도 강렬한 한방이었다.

인두로부터 실드를 지키기위해 의자를 고정시켜놓았던 룩은 100%의 데미지를 그대로 다리뼈 두가닥에 받아내며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부산스럽게 깽깽이를 뛰는 룩을 피해 톨비쉬가 자리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한쪽손을 화면에 고정하고 있던 탓에 자세가 어중간해진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이 화면속 밀레시안에게 박혀있는 표정이 사뭇 진지했던 탓에 킹은 쓴웃음을 지으며 글러브를 벗어던졌다. 

아무렇게나 내던진 글러브가 아직 꺼지지 않은 인두를 치고 미끄러졌지만 네사람중 아무도 글러브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다. 

킹이 글러브를 아무데나 던져놓는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었고 그렇게 갈아치운 글러브도 한두벌이 아니었다. 

킹은 옆머리를 벅벅 긁으며 퀸이 들고있던 화면을 살펴보았다. 시계속 체스말이 모두 까맣게 물들어있었다.


“오케이, 이제 손 때도 좋아.”


톨비쉬가 왼손을 털어내며 팔을 거두어들였다.

밀레시안이 앉아있는 장소는 예의 그 카페테리아의 좌석으로 옆자리에는 누군가의 음료수 잔이 놓여져 있었다.

개인면담이 있다는 소리는 들은적이 없었는데.., 톨비쉬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룩이 불쑥 머리를 집어넣으며 톨비쉬의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자세가 기울어진 탓에 생각의 흐름이 끊겨버린 톨비쉬가 눈쌀을 찌푸렸다. 

룩은 베시시 웃으며 양손을 모아보이고는 최대한 간드러진 목소리로 늘상 하던 변명을 늘어놓았다.


“알잖아. 궁금한건 참기 힘들다는거.. ”


“그럼 그럼.”


킹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닌척 하고 있지만 큰화면을 양손에 들고 회의의 내용을 읽고있던 퀸도 꽤나 관심이 있었는지 중간중간 눈을 돌려 작은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파너머에서 비숍이 팔걸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나도.”


톨비쉬는 귀찮다는 얼굴로 룩에게 팔을 빼내었지만 다른 한손으로는 작은 화면을 흔들고 있었다. 

소파를 향해 흔들어진 화면이 비워지고 한참 비숍이 빠져있던 일일드라마의 재방송이 사라졌다. 

잠시 검게 변한 티비 화면위로 카페테리아의 전경이 떠올랐다.

톨비쉬들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메뉴가 나왔던 것인지 자리를 비웠던 음료수잔의 주인이 새로운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가지고 자리에 돌아오고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상대는 피오나의 단장, 익숙한 빵모자의 등장에 룩이 다시 입을 열었다.


“킹도 이 참에 모자를 하나 구입해보는건?”


안타깝게도, 발이 닿지 않는 거리였다.

킹은 접어넣었던 나이프을 펼쳐들며 톨비쉬를 올려다보았다.


퀸이 나이프을 빼앗기 위해 잠시 시선을 뗀 사이 커다란 화면에 잠시 노이즈가 흔들리다 사라졌다. 좌우로 흔들리는 신호장애가 아닌 위아래로 파형이 흔들리는 기묘한 노이즈였지만 5명중 아무도 화면의 이변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무장해제를 당한 킹이 정당한 권리를 요청해왔다.


“이건 정당방위지? 정당방위인거지? 정당방위라고 해줘!!”


“어...아… 음, 그래. 오늘자 미스터 융통성의 영업시간이 끝났다는걸로.”





너희들끼리 알아서하라는 말을 남긴채 톨비쉬가 소파쪽으로 걸어나갔다.

단장은 밀레시안의 옆자리에 앉아 자신의 몫의 간식을 나눠주었다.

카메라를 등지고 앉은 탓에 입술의 움직임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표면적인 이유로는 창밖을 바라보는 것이 좋아한다는 것 이였지만 창문에서 조차 입술의 형태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밀레시안은 간식을 먹느라 쉴새없이 턱을 움직이고 있었고 단장은 턱을 괴고 앉은 탓에 볼과 입꼬리가 눌려있었다.

본능이라고 해야할까, 톨비쉬는 알 수 없는 기시감에 휩싸인채 소파에 기대어섰다.

화면속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는지 비숍이 고개를 들어 톨비쉬를 올려다보았다.

소리없이 입술이 달싹여졌다. 비숍은 말없이 시선을 티비로 돌렸다.


“오디오가 없으니까 무슨 대화인지 모르겠네…, 나이트, 무슨대화가 오가고 있는거야?”

“......”


톨비쉬의 대답대신 퀸이 손가락이 들어올려보였다. 

길게 뻗은 검지손가락은 내쉬어지는 얕은 한숨을 두갈래로 흩어내며 낮은 바람소리를 내리눌렀다. 

고요하게, 침묵을 강요하는 소리없는 의지가 방안을 휘감고 있었다. 

톨비쉬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은 채 화면속 옅은 창그림자에 집중했다. 책상에 기대어 티비화면과 톨비쉬의 등을 바라보고 있던 킹이 작은 전기적 소음에 고개를 돌렸다. 


방금 쓰고 벗어놓았던 글러브 위로 램프들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분명 벗는 즉시 대기모드로 돌아가게 설정해 놓았는데? 킹이 글러브를 집어들었다.

철컥이는 소음에 룩의 시선이 킹에게로 향했다.


‘...럼...이야기로...가자’


화면속 대화를 추측하는 것은 순전히 운에 달린 일이었다. 

톨비쉬는 기억속에 남아있는 단장의 입모양을 최대한 떠올리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이야기라는 말을 즐겨쓰는 단장의 입버릇만이 유일하게 제대로 읽어낸 단어였지만 사실 그것도 반쯤 때려맞춘 추측에 가까웠다.

밀레시안이 시선을 돌려 단장을 바라보았다. 포크가 케이크를 떠내고 있었다.


‘..과의….활….떠니..’


짧은 질문이었는지 밀레시안은 곧장 입술이 움직였다. 

한입 가득 떠넣은 포크는 말끔하게 비워진채 입술끝에 머물러 있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포크는 햇빛에 반사되면서 강한 빛을 드리웠다. 밀레시안이 무슨 대답을 했는지는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단장이 미소짓고 있었다. 입꼬리가 아닌 눈매가 부드럽게 풀리는 웃음이었다.


‘그럼 다음 질문,’


단장은 턱을 괴고 있던 손에서 얼굴을 들어올리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밀레시안을 바라보았다. 

본론인건지 이전 질문에 대한 파생질문인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밀레시안은 포크를 입에서 내린채 남아있는 케이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질문이 무엇인지 예상되는걸까? 밀레시안은 곰곰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반쯤 갈라진 케이크에 손을 뻗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이지만 단장은 당황한 기색 없이 질문을 시작했다. 푹하고 들어간 손가락은 한마디 정도의 크림을 떠올렸다.


‘그들은..’

“그들은..”


톨비쉬가 무의식적으로 단장의 말을 따라읽고 있었다. 

보통 이정도로 집중하지는 않지만 본능처럼 경고등을 울리는 불안감과 기시감이 집중도를 최상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비숍이 톨비쉬를 돌아보았다. 톨비쉬는 패브릭 소재의 소파를 양손 가득 잡은채 티비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톨비쉬의 어깨너머로 글러브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는 킹과 그런 킹에게 뭔가를 속삭이는 룩이 보였다.

퀸도 화면에서 눈을 때고 킹들의 소란을 지켜보고 있었다.


킹은 굉장히 불쾌한 표정이었고 룩은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똑딱, 비숍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아날로그 초침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거실에 시계소리를 낼만한 물건이 있던가? 골동품에 관심이 많은 밀레시안과 룩의 방이라면 모를까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공용거실에 그런물건이 나와있을리 없었다. 하지만 분명 지금도.

비숍은 두번째 똑딱 하고 울리는 초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톨비쉬는 여전히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톨비쉬를 방해하지 않을 범위 내에서 주변을 살펴보던 비숍은 톨비쉬의 팔목에 채워진 아날로그 모양의 시계화면을 발견했다.


모양은 옛날 동그란 시계의 모양이지만 어디까지나 영상에 불과한 모조품, 

시침소리의 사운들를 따로 넣을 수도 있지만 구태여 그런 성가신 재현까지 구현해 넣을리가 없었다. 

변덕이나 룩의 주장에 못이겨 그런 소리를 넣어놓았다 한들 톨비쉬가 그런 설정을 세팅해 놓았을리가. 

더욱이 들려오는 초침소리는 일정한 한격이 아닌 간헐적인 파음이었다. 


찰카닥거리는 소리에만 집중한다면 무언가가 단계적으로 감겨가는, 태엽소리에 가까운.., 똑딱. 똑딱. 세번째와 네번째의 초침소리가 연달아 울려왔다.

이건 카운트소리다. 소파에 기대어 앉아있던 비숍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톨비쉬의 긴장감이 옮았던 걸까, 비숍은 손을 뻗으며 톨비쉬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들은, 요즘도? 여즉히? 아니야, 여전히.. 여전히.. 그들은 여전히..너에게…”


똑딱. 


“톨비쉬.”



똑딱.


비숍은 나이트라는 닉네임대신 톨비쉬의 이름을 부르며 손등으로 왼팔을 툭건드렸다. 

톨비쉬는 비숍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건지 빠른속도로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너에게.. 숭고..수고..성공..성..장...소.., 소유..소...중..”


“톨비쉬.”


대놓고 점멸하는 글러브를 지켜보던 킹이 글러브를 손에 끼며 룩의 화면을 끌어당겼다.

무엇이 그들의 방에 들어와 있는지 직접 확인해보겠다는 의도였다.

룩은 그만두는게 좋겠다며 말리고 있었고 퀸은 톨비쉬에게 글러브건에 대해 말하기 위해 소파로 다가갔다.


“그들은 여전히 너에게 소중하니?”


딱.








킹이 글러브를 낀 손을 룩의 화면에 통과시켰다. 

무거운 문고리를 잡아내듯 한손 가득 무언가를 움켜쥔 손동작이 역시계 방향으로 돌아간뒤 앞으로 꾹 내밀어졌다. 

화면이 움푹 패이는가 싶은순간 검게 변한 화면 위로 하얗고 깨알같은 글씨들이 수도없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룩과 킹이 빠른속도로 올라오는 글자들을 읽고있었다.


비숍은 톨비쉬의 시계를 바라보고 있었고 톨비쉬는 화면속의 밀레시안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끝의 온도에 녹아내리던 크림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밀레시안이 창문으로 손을 뻗었다. 

정확히 자신의 입술이 비칠만한 자리에 희뿌연 크림을 문지르며 무언가의 대답이 끝을 맺었다.


밀레시안의 돌발행동에 놀란것은 화면을 지켜보고 있던 톨비쉬와 퀸, 그리고 한박자 늦게 고개를 돌린 비숍뿐. 

한없이 계속될것 같던 글자들의 향연이 일순간 팟하고 꺼진뒤 제멋대로 재시작의 기동음을 내기 시작했다. 

룩들의 화면이 끊어지는 순간 티비의 화면도 갑자기 종료. 

잠시뒤 간결한 전원알림소리와 함께 비숍이 보다 말았던 드라마의 다음편이 방송되기 시작했다.


룩은 킹이 집어던진 화면을 받아 다시 샅샅히 들여다 보았지만 킹은 소득이 없을 것이라며 글러브를 벗어던졌다. 

킹이 글러브를 끼는순간 녹색으로 고정되었던 램프들은 일순간 까맣게 흐려지며 원래의 평범한 모습으로 되돌아가버렸다.




드라마는 흔해빠진 판타지 드라마로 사랑을 모르고 태어난 호문클루스가 처음 만난 특별한 존재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죽어버린다는 내용의 결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준비된 장소로 불러내는대 성공한 호문클루스가 시약을 들고 외치고 있었다.


[“사랑합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받아주지 않더라도, 세상 모든 인간들이 이게 사랑이 아니라 부정한다 할지어도. 나는 지금 이 순간, 이 그림자의 시간만큼은. 나는 내 마음이 당신을 위해 그리고 당신의 의해 살아가고 있는겁니다.


하지만.., 네. 알고있습니다. 이 관계는 당신과 내가 아닌 나의 의한 일방적인 고백이라는 것을. 

이건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 아니겠지요.

해결될 문제는 없고 나아갈 출구도 없을 것이며 아무런 결과값을 내놓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은 나를 경멸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절망까지 포함해서 나에게는 사랑입니다. 

이루어질 가능성이 한없이 0으로 수렴한다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기적입니다.

거기있는 라이칸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 어떻게 사랑이냐고 물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느낄 수 있는겁니다.


이 아픔을, 이 고통을, 이 애절함과 절망감을. 

그리고 정작 이 사랑을 받아줘야할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이 이기심까지.

이 모든 것이 나를 사람으로 만듭니다. 


당신이라는 빛이 내 어두운 일면을 선명하게 드러내게 만들고 있어요. 

선하지만 않은 호의, 하지만 악의라고 할 수 없는 진심. 

옳고 그름을 정의 내릴 수 없는 에너지의 본질이자 나의 생명, 나의 이름.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


사랑합니다.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사랑을 갈구하던 시기가 있었고 내가 당신앞에 서 있을 수 있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이 마음을 고백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내가 살아있던 찰나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다름아닌 내가, 누구도 아닌 무엇도 아닌 나 스스로가. 나의 의지로”]


시약이 떨어지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검은 태양이 떠오른 회색빛의 하늘에 생동감 넘치는 붉은 구름이 꿈결처럼 섞여들고 있었다.


[“당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 낼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만족합니다.”]


바람이 불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잎이 피어나고 흩어졌으며 세상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멀어지는 시점과 화면 가득 보이는 숲의 전경, 

흩날리던 꽃잎을 찍던 화면이 넘어가고 주인공의 얼굴이 나타났다.


킹은 두어번 양쪽의 머리를 강하게 쓸어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라마에 푹 빠진 것처럼 얼어붙어버린 세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다. 

킹은 티비쪽으로 다가며 성의없는 사과를 건네왔다. 말과 시선과 행동이 모두 분리된 즉흥 캐스팅된 엑스트라의 서툰 연기 같았다.


“미안해. 인두 전원을 꺼놓는다는것을 깜빡해서 옆에 있던 글러브가 과열되었나봐”


거짓말. 분명 아무렇게나 던져놓았지만 열기따위에 망가질 물건은 아니었다. 한참 방열을 시험해본답시고 오븐장갑대용으로 사용하질 않나 아예 구워버리질 않나. 혹시나 방패가 미완성일까봐 온도를 낮추던 모습까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던 톨비쉬는 무슨 의도인지를 눈으로 물으며 대답했다.


“그러네, 뭐. 읽을수 있는 정보도 거의 없었으니까”


이것도 거짓말. 톨비쉬는 분명 질문을 읽어내었다. 

추측하건데 그 이전의 질문은 분명 최근의 생활에 대해 물어본 것이었고 그 다음질문은 그들과의 관계성에 대해 물어보는 질문이었다. 

맥락적으로 생각하자면 여기서 그들은 분명 톨비쉬들을 가리키는 단어일터. 

하지만 이와 같은 질문은 벌써 여러번 면담에서 되풀이되었고 개중에는 몇번인가 대놓고 팀원들앞에서 물어본 적도 있었다. 그럼 그때 대답과 속마음은 달랐던건가? 


톨비쉬는 손가락끝으로 소파를 두드리며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그때 밀레시안의 표정에는 거짓이나 연기의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진심으로 성가시고 귀찮다는듯이 잔소리가 심해요. 라는 대답을 했을뿐.

그리고 또 뭐라고 했었지? 재미..? 즐거움..? 우리들의 관계도는 양호한 수준이었던가?


하지만, 그렇지만. 톨비쉬는 몇번이나 뒤집히는 생각을 추스리며 자신이 정말 제대로 질문을 읽어냈는지를 의심했다. 여전히 라는 말과 소중이라는 말이 까끌거리는 비늘처럼 혓바닥에 달라붙은 느낌이었다.

여전히 소중한가? 톨비쉬는 드라마속 남자의 대사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우리들은 서로의 이름앞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아본적이 없습니다. 


서로의 어렴풋한 시선을 같은 마음이라 믿어왔고 그 믿음의 증거가 없다는 공허함을 운명과 계시라는 이름으로 틀어막아 왔었죠.

맹신이었고 일종의 자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과 나란히 함께 서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손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속박하지 않으려, 아니 생각하지 않으려 했었습니다.


그래요. 나는 스스로를 부정해 왔습니다.

이게 사랑일리 없다고 이런게 사랑일 수는 없다고, 나는 부정하고 또 부정해왔습니다.

동정이나 동경, 연민이나 연심의 착각이라고 스스로를 억눌러왔습니다.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당신과 내 마음이 어긋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내 마음을 파고들어가 피어있던 확신마저 시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젠 스스로의 감정도 확신할 수 없게되어버렸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비겁함도 사랑일까요? 

곁에 있는 동안에도 느껴지는 고독함이 행복일까요?


나는 정말 당신을, 아니 당신은 나에게서 한번이라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본적이 있었습니까?”]


한번도, 밀레시안은 톨비쉬들과의 관계에서 소중하다는 말을 꺼낸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관계에서 정말 정의 요소는 없는 것일까?


호문클루스의 죽음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벚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사랑을 울부짖었던 만들어진 생명체의 마지막 기적, 삶의 흔적. 사랑하고 기원하고 슬퍼했다는 생의 기록문. 만들어진 꽃잎이 흩어지는 그림자의 세계를 배경으로 그 사랑의 대상에 되었던 주인공은 천천히 머리끈을 풀러 손에 감았다.


[“그렇다면 믿어주실래요? 아니면 아니라고 대답해도 믿을 수 있겠나요?”]


사랑하는 감정에 반응한다는 마법의 리본, 녹색으로 물든 리본이 입술에 닿는다.

주인공이 대답했다.


[“나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아요. 

인간이 아닌 삶, 그러면서도 한없이 인간이 되려 발버둥치는 나약한 마음. 

처음부터 보답받지 못할거라고 생각해 왔어요. 다시한번 기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이 사랑이 온전히 이어질리 없다고. 시간의 흐름이 다르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요.

느끼는 감정, 지켜야 하는 대상, 부르는 이름과 불려지는 칭호. 

그 무엇도 같을 수 없고 그 무엇도 함께 할 수 없어. 


그래도 당신은 내게 말했죠. 함께해주겠다고. 끝까지 같이 서 있겠다고.

내 옆에서. 내 곁에서. 내 마지막을 봐주겠다 맹세했었죠.”]


손에 묶인 리본의 색이 붉은 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손등에 입을 맞춘 주인공은 말했다.


[“나에겐 그 말 자체가 사랑이었어요.”]





우리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몰랐을뿐, 혹은 알면서도 모른척 했을뿐. 

내 삶은 그때부터 당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말과 함께 길었던 이야기는 끝이났다. 

이따금씩 비어있는 편성시간에 2-3편씩 몰아서하는 재방송이 눈에 밟혀 저게 뭔데? 하는 정도의 드라마.


남자주인공이 지나치게 톨비쉬와 비슷한 이미지여서 인지 톨비쉬는 이 드라마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한번쯤 진지하게 저 드라마가 유행시킨 색이 변하는 리본의 파생상품을 구매하려 검색한적 있었다.

그런식으로라도 상대의 마음을 확인 할 수 있다면 마음이 놓이지 않을까? 

킹은 톨비쉬의 진지한 고민에 폭소했고 리본을 구성하는 화학약품과 원리에 대해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너는 아예 만들어볼 시도를 했다는 거로군. 킹이 입을 다물었다.

지나치게 자세했던 설명은 거기서 끝이났다.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 판타지는 판타지.

톨비쉬는 스스로도 정확한 대답을 찾지못해 입을 다물어버리는 작은 손을 움켜쥘 수가 없었다. 

다그치는 것처럼 느낄까봐 한번도 강하게 손을 끌어당길 수 없었다. 

소중하고 또 소중한.. 톨비쉬는 단장의 질문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여전히라고 말하기 전에 한번이라도 소중하게 여긴적 있는지를 물어야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화면속의 단장은 아득히 먼 건너편에 있는 톨비쉬들이 바라보듯 먼 창문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지금 이 질문과 대답은 너희들이 들어도 되는 질문이 아니야.

그것은 분명 연결된 대화였다. 그 눈빛을 마지막으로 화면속 시계가 멈춰섰다. 

연결은  끊어졌고 룩의 화면도 깨끗하게 비워져버렸다.


화면이 끊기기 직전, 창문에 케이크를 문질러 입을 지워낸 밀레시안과 그런 밀레시안의 행동을 차분히 지켜보던 단장의 모습이 수초간 화면에 머물러 있었다.

고개를 들어올린 단장은 창문에 비치는 카메라의 렌즈를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 대답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확인을 끝낸 룩이 화면을 테이블 위로 돌려놓았다. 룩은 드물게 팀원들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몰라서 카메라 접속 기록도 다 살펴봤어”

“어때?”


“깨끗해”


깨끗할리 없지만. 하지만 이 대답만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킹이 남겼을법한 작은 흔적이나 조각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이것뿐만이라면 수고를 덜었다며 웃어넘겼을지도 모르지만 사라진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글러브가 열어낸 비상구 너머의 복잡한 기록도 함께 사라져있었다. 

룩은 그 기록이 무엇이었는지 묻고싶었지만 느낌상 지금은 그것을 물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눈치였다.

퀸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비숍을 불렀다.


“그건 그렇고, 톨비쉬를 왜 그렇게 불렀던 거야?”


톨비쉬를, 이라는 말에 톨비쉬가 고개를 돌려 비숍을 바라보았다. 

다른 맴버들이라면 몰라도 임무를 준비중인 이 기간에 비숍이 맴버들의 본명을 부르는 것은 드문일이었다.

비숍은 아, 하고 입을 연뒤 잠시 말을 가다듬었다.

드라마가 끝이 나고 다음화를 준비하는 동안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까칠해보이는 양갈래의 주황색 머리 소녀가 화면 가득 손바닥을 펼쳐보이며 귀여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목에 걸린 커다란 펜던트가 시선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딱, 7초만 기다려 보라니까?”


7초동안 관심을 불러일으킬만한 춤을 추던 소녀의 자리에 광고하려던 물건의 이름이 떠올랐다. 

결국 무슨 물건을 알아보려면 직접 검색해 보라는 호기심 유도형 광고, 

소녀가 걸어나와 카메라를 확인하고 7초를 선언한뒤 글자를 띄워올리기까지 23초 정도가 지난뒤 비숍이 입을 열었다.


“시계.. 시간이 잘 안맞는 것 같던데 확인해 보는게 좋을 것 같아서”


“아침에 제대로 맞췄는데…?”

“아까 업데이트 했잖아. 혹시 흐트러졌을지도”


비숍의 집요한 조언에 톨비쉬가 들고있던 작은 화면에 왼손을 집어넣었다.

화면이 까맣게 변하고 나이트 체스말의 모양이 화면속으로 복사되었다.

화면위로 비치는 시계속 시간과 화면 구석에 표시된 정규서버의 시간이 미묘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6초.., 아니 약 7초 정도의 오차. 톨비쉬는 소파위에 화면을 올려놓은뒤 두개의 시계를 동기화 시켰다.


“그러네. 업데이트 때문에 흐트러졌나보다”


그럴리가 있겠냐며 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톨비쉬는 비숍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새로 맞춘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시계은 여전히 아날로그의 모형이었다. 초침을 예의주시해서 지켜본다한들  약 7초가량 늦어진 초침을 알아챌리도 없지만 비숍은 천만에, 내 시계랑 묘하게 달라보이길래. 하고 대답하며 왼쪽 어깨를 털어보였다. 

오른손에 채워진 비숍의 시계가 왼쪽 어깨위에 올려졌다. 시계속 비숍의 시간은 숫자로 이뤄진 디지털 모형이었다.







“아-”


킹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스럽다는 비명을 토해냈다.

킹의 짜증은 점점 높은 옥타브로 치솟다가 이내 땅이 꺼질듯한 한숨과 함께 뒷목으로 손을 넘겨버렸다.

한참 뒷목을 꽉 움켜쥐고 있던 킹이 고개를 들었다.


“시계, 다시 재조정할테니까. 다들 잠깐 반납해봐”


오늘은 야근이네.. 룩이 침울하게 속삭였다.


그렇게 전체적으로 재 조정된것이 지금의 시계와 인이어였다. 

지금의 장비는 들키지 않는 선이라 할 수 있는가? 그에대한 대답은 그런 동시에 아니기도 하다였다.

톨비쉬는 뺴낸 이어폰을 자켓안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만들기로 작정하면 피오나도 얼마든지 제로의 디바들과 같이 이어커프형이라던가 자잘한 악세사리의 모양으로 인이어를 생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킹은 일부러 잘 보이는 형태를 선택했고 톨비쉬들은 그 선택에 수긍했다.

보이는 것을 내어주고 사소한 것을 드러낸다. 그런다고 해서 시계에 대한 경계심이 아주 가시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대놓고 보여지니 수상한 짓을 할 이유도 없다-라는 의사표현은 확실히 보여줄수 있다는게 선택의 이유였다.

스탭용 통로 한켠에는 개인의 소지품과 상의를 갈아입을 수 있도록  임시 설치된 캐비넷들이 놓여져 있었다.

사전에 연락받은 요원들의 이름과 함께 내부에는 전달받은 치수로 지어진 상의들이 걸려있었다.


“과연,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은 이유가 이거였네요”


제로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멀린의 요원이 친근하게 말을 붙여왔다.

넉살좋게 안면을 튼다기보다는 자신을 아는지 떠보는 느낌이 강한 인사였다. 

어떻게 대처할까, 톨비쉬는 여전히 그의 얼굴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내지 못한 상태였고 그는 그런 톨비쉬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눈치였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다른 피오나의 요원들도 어쩐지 머릿속이 복잡하다는 표정으로 이쪽의 상황을 엿듣고 있었다.

도와주기는 커녕 톨비쉬의 대답에 따라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다리고 있겠다는 관찰자의 시선이었다.

아는척을 하든 모르는 척을 하든 어쩔수 없이 독박을 써야하는 분위기에 톨비쉬가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제로를 바라보았다. 유난히 새파랗게 질려있는 스카이블루빛 시선이 톨비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러 눈동자는 잊으려해도 잊기 힘들텐데 말이지. 

아무렇게나 둘러댄 대답을 입에 담으려는 순간, 대기 모드였던 시계가 가볍게 진동을 울리며 재기동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입김이 닿은 강제모드가 분명했다.


“아, 실례.”


분명 더이상의 반응이 없도록 꺼 놓았던 시계의 진동에 톨비쉬는 이전날의 이변을 떠올리며 신중하게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다행히도 일반적인 전원마크를 생략하고 킹의 아이콘이 크게 화면을 밝히고 있었다.

재 기동된 시계는 시간표시를 생략한채 곧장 메세지함으로 연결되었다.

메세지의 수신자를 확인한 톨비쉬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관찰하던 새파란 시선이 불쾌함으로 뒤틀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양해를 구한 무시에 대한 불쾌함은 반절정도, 나머지 반절은 호기심으로 채워진 시선이 톨비쉬의 어깨 언저리에 머물렀다.

다름아닌 그 톨비쉬가 표정이 확 변하는 메시지라니, 무슨 메세지인지 궁금증을 가지지 말라는게 더 수상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호기심을 드러내기에는 다른 피오나의 요원들의 경계심이 이쪽으로 옮겨오고 있었다.

더이상 파고 드는것은 무리일지도, 제 나름대로의 결론을 얻은 멀린의 요원은 어깨를 으쓱 해보이며 뒤로 물러섰다. 애초에 뭐라 대답하든 그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알고 싶었던 것은 그가, 그리고 그들이 나를 기억하는가에 대한것. 

하지만 그 누구도 아아, 너는.. 하고 예상된 반응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정도면 충분했다. 

잊혀지고 지워지고 파묻혀진 이름의 반응이 충분히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제로는 타이밍 좋게 지나가는 스탭을 잡으며 피오나를 등진채 자신의 케비넷으로 걸어나갔다.

어렴풋하게 무언가를 기억해내려는 피오나의 시선이 케비넷의 이름칸에 머무르지만 옷을 갈아입는 디바측 요원의 방해에 제대로 살펴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빤히 보고 있던 피오나를 보며 명백히 비꼬는 의도의 비소를 돌려받았을뿐.


갑작스러운 비호감에 반응 할 새도 없이 제로는 정말 바쁘다고 발을 동동거리는 스탭을 잡아 끌며 거울쪽으로 몸을 돌렸다. 등돌려 선 모습이 어디의 누군가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바로 옆자리에서 뒤늦게 옷걸이를 꺼내들고 있는, 그런 누군가와 비슷한 의도가 느껴지는 뒷모습이었다.


“여기, 이 피어스들은 사전에 허가 받은거니까 안빼도 되는거죠?”


스탭은 그걸 물어보려고 이렇게 붙잡은 것이냐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로는 제대로 피어스의 숫자를 확인해달라고 실랑이를 벌이며 양쪽 귀를 기울여보였다.


괜히 나중에 하나 두개 더있네 없네 하면서 트집잡히고 싶지 않다는 등쌀에 스탭은 가지고 있던 개인 단말기로 제로의 양쪽 피어스를 찍어 확인을 요청했다.

오른쪽에 4개 왼쪽에 7개. 모양과 갯수가 사전에 연락받은 정보와 일치한다는 대답을 들은 다음에야 스탭은 겨우 제로의 손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렇게 중요하면 카페에서 확인받지 그랬냐며 잔소리를 해오는 디바들에게 멀린의 요원은 콧노래를 부르며 상의를 꺼내들었다.

나도 알아. 소매를 정리하던 톨비쉬가 스쳐지나가는 입모양을 읽어내고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지시받은것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톨비쉬를 기다리고 있던 피오나들이 스탭을 따라 내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세번째 문이 열리고 극장의 내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2017.12.19
https://twitter.com/teclatia_con/status/943058729469075456

대충 살자... 길은 없지만 대충 어떻게인가 유니콘스럽게 건너갈 방법은 있는 베그절벽처럼 https://spinspin.net/teclatia 칭찬박스

베그절벽 지박령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