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포터."

 실은 해에에에리이이, 포오오 같은 발음이었다. 스네이프 교수는 제 어미에게 잡아 먹히기 직전의 햄스터처럼 축 처져 있었다. 투명해질지도 몰라. 스네이프의 핏기 잃은 얼굴이 빠르게 차가워졌다. 원래 차가웠으나 그보다 훨씬 더 차가워졌다. 냉기는 스네이프 교수를 표현할 수 있는 많은 말 중 하나였으나, 이제 유일한 단어가 되고 말 것이다. 그 전에 해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시체를 밟고 나아가거라, 해리.
 
 오직 네 삶을 뿌리치고. 그럴 수 있겠니?
 
 덤블도어가 인자하게 웃었다. 해리는 호그와트 5학년생이었고, 예언의 아이였다. 가끔 해리는 예언자들과 빌어먹을 마법에 숨이 졸리는 것 같았으나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죽음은 심판자처럼 언제나 해리의 곁에 바특 서 있었다. 해리만큼 절망과 순백색의 허무를 이해한 어린이는 없을 것이다. 왼쪽은 천국이었고, 오른쪽은 지옥이었으나 사실 둘 다 아무 것도 없었다. 해리는 선을 지키려고 싸웠다, 왜?, 선이 옳은 것이니까, 친구들을 구해야하니까. 볼드모트는 절대악. 그러나 해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다른 삶의 방식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싸웠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앗아간 적들.
 
 자각하지 못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론과 헤르미온느, 사랑하는 호그와트를 위해.
 
 나를 위해.
 
 감점, 감점, 감점, 감점!
 
 스네이프 교수는 금방이라도 호통칠 듯한 얼굴로, 해리를 응시했다. 해리가 스네이프 교수에게 워낙 많이 트집을 잡히다 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실은 평소대로였다. 해리는 스네이프 교수가 자신에게 쏟아낸 폭언을 기억해냈고, 다시금 피어 오르는 증오와 껄쩍지근한 부드러움을 느꼈다. 연민은 아니요, 사랑도 아니요, 우정이라고 하기에는 묵직하고 슬픔이라고 하기에는 차가운 그런 감정이었다.
 
 해리는 불분명한 상태로 스네이프 교수를 끌어 안았다. 늙은 교수는 초라했다. 해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마왕처럼 보였던 교수는 지치고 나이든 개처럼 헉헉댔다.
 
 아버지가 스네이프 교수를 괴롭힌 것과 스네이프 교수가 학생들을 괴롭히는 것은 상관 없었다. 스네이프 교수는 죽음을 먹는 자요, 덤블도어 교장선생님, 그 자애로운 분을 죽인 배신자다. 해리의 가슴 속에서 피어나던 꽃이 지고, 뭉게구름이 비를 뿌렸다. 스네이프의 손에 당한 마법사가 몇일까? 뻔뻔하게,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머리 자른 감정을 들고 사랑을 찾아 헤매는 비겁자. 이 손으로, 덤블도어 교장선생님을, 이 혀로, 불사조 기사단을, 아, 냉정하고, 끔찍한, 마법약, 교수.
 
 당신을 평생 증오하겠어.
 
 "날 봐라."
 
 해리는 고개를 들었다. 의자에 몸을 구부려 앉은 해리는, 나이와 덩치가 어울리지 않는 어린아이 같았다. 스네이프 교수 앞에서 해리는 언제나 어린아이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스네이프 교수는 야위고, 피로해 보였으나,
 
 살아 있었다.
 
 "누가 문을 열어주었지?"
 
 스네이프 교수는 맞은 편에 앉는 대신 한 켠에 서 있었다. 등을 돌린 채 말린 약초를 빻는 중이었으나 해리와 가까이하기 싫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때 스네이프 교수가 시선을 돌렸다.
 
 초록색 눈동자와 까만 눈동자가 마주쳤다.
 
 아지랑이 같은 흰 빛이 내리쬐었다. 스네이프 교수는 뽑아낸 기억을 해리에게 건네준 뒤, 숨을 거두었다. 스네이프 교수는 딱딱한 뱀이 되고 말았다. 뱀, 뱀. 해리는 미끌거리는 기억을 펜시브로 보고 말았다. 술 취한 아버지에게 구타당하는 세베루스 스네이프. 풀숲 위에 누운 자신의 어머니 릴리 에반스와 세베루스 스네이프. 호그와트에 입학하는 릴리 에반스와 세베루스 스네이프. 어둠의 마법에 빠져드는 세베루스 스네이프. 괴롭힘 당하는 스네이프. 릴리를 응시하는 스네이프. 애정에, 힘에, 상처에 취해 어둠의 마법에 빠져드는 스네이프. 제임스 포터에게 괴롭힘 당하고 있을 때 더러운 잡종! 이라고 구해준 릴리 에반스에게 말한 스네이프. 어둠의 마법을 포기하지 않는 스네이프. 릴리 에반스가 절교를 선언한 스네이프. 제임스 포터와 릴리 에반스가 사귀는 것을 지켜본 스네이프. 죽음을 먹는 자가 되어 예언을 볼드모트, 어둠의 마왕에게 전달한 스네이프. 그 때문에 위험에 릴리 에반스, 아니 포터를 살려달라고 볼드모트에게 비는 스네이프. 덤블도어를 찾아가 비는 스네이프. 대가로 무엇이든 하겠다는 스네이프. 덤블도어의 측근으로 스파이 활동을 하는 스네이프. 릴리의 아들이기 때문에 해리를 보호하는 스네이프. 언제나, 언제나,
 
 릴리 에반스만을 사랑한,
 
 세베루스 스네이프.
 
 스네이프 교수가 사발을 내려놓았다. 해리는 시간을 가늠했다. 마법적 공간 안에서 시계를 보는 것 만큼 의미 없는 행동이 있을까. 해리는 당장 자신이 돌아가지 않으면 마법부가 비상 사태에 돌입하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해리는 물론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 것, 또 그가 한 영웅다운 행동을 한 것은 높게 평가하고 약간은 감동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웃으며 악수를 청하지는 않았다. 딱 그 만큼의 거리였다.
 
 "맥고나걸 교수님이 팔찌를 주셨어요."
 
 스네이프 교수는 불편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하루만 지나면 내 생존설이 저자거리에 돌아다니겠군."
 
 스네이프 교수가 해리를 응시하는 잠깐 동안, 그의 얼굴에 찌든 불안이 걷혔다. 해리는 스네이프 교수가 뭘 봤는지 알았다. 자신의 녹색 눈동자. 어머니의, 어머니 밖에 모르는, 결국 자신은 언제나 해리 포터가 아니라,
 
 "여긴 어떻게 된 거죠?"
 
 "무덤."
 
 스네이프는 별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해리는 맥고나걸 교수, 아니 전 교수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젖은 나무 냄새가 났고, 빛에 인어의 노랫소리 같은 포근함이 깃들어 있었다. 스네이프 교수가 입은 검은 로브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해리의 두 발은 더 이상 간지럽지 않았다. 해리가 탁자에 머리를 기댔다. 딱딱했다. 손가락으로 쓸어 보니, 먼지가 묻어 나왔다. 스네이프 세베루스가 지팡이로 불을 일으켰다. 가루가 된 약초가 타올랐다. 다람쥐가 설산을 가로지르는 듯한 위안이 풍겼다. 냄새가 닿는 곳마다 자신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어떤 단단한, 방어막, 아니면 귀 같은 것들이 일제히 뭉쳐서 사라졌다. 스네이프 교수는 여전히, 서 있었다.
 
 "어떻게....... 살아 계신 거죠?"
 
 해리는 속삭이듯 말했다. 스네이프 교수의 로브가 공연 시작을 알리는 커튼처럼 흔들렸다. 해리는 자신이 다시 작아진 것 같았다. 작아서, 너무 작아서 손바닥으로 꽉 눌러 죽일 수 있을 만큼.
 
 해리의 물음은 왜 죽지 않았냐고 묻는 것 같기도 해서, 스네이프 교수는 기분이 나빴다. 해리는 릴리와도, 제임스와도 다른 표정을 지을 때가 가끔 있었고, 자신은 그런 순간이 사무치도록 싫었다. 골방에 처박아둔 쾌쾌한 엽서를 끄집어내는 듯 불쾌했다. 나와서도, 기억해내서도 안 될 무엇이었다. 스네이프 교수는 이제 성인이 된 영웅을 바라보았으나, 그의 눈에는 철 없는 멍청이로 비칠 뿐이었다.
 
 해리는 살아 있었다. 스네이프 교수는 의무를 완수했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했다. 릴리는 기뻐할 것이다. 해리는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반쯤 눈을 감고 있었다. 와인에 불을 붙이듯 급작스럽게 힘이 타올랐다. 해리의 시선은 서리처럼 스네이프 교수에게 내렸다. 찝찝했다. 스네이프 교수는 해리 개인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었고, 그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으면 했다.
 
 "아로마...인가요?"
 
 스네이프 교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짧게 해리가 죽기 직전의 자신을 움켜쥐는 순간이 떠올랐다. 해리는 어떤 표정이었지?
 
 절망? 환희?
 
 찰나, 그 얼굴이 번개처럼 떨어지며, 스네이프 교수를 뒤흔들었다.
 
 스네이프 교수가 시선을 돌렸을 때, 해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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