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해. 안 들어오고.”

“…네? 하하하.”


여주는 기껏해야 제 가슴밖에 안 오는 수심에도 물 안으로 들어가기를 망설였다. 발끝만 넣었다 뺐다 하며 울상 짓는 여주의 모습에 재활을 담당하는 코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결심한 여주가 숨을 크게 들이켜며 사다리 위에 발을 올렸다.


“쌤. 저 빠지면 바로 구해 줘야 돼요.”

“어머, 여주야. 너 여기 발 닿거든?”

“그래도요. 진짜 무서워요.”


우여곡절 끝에 물 안으로 들어온 여주는 숨이 막혀 거친 호흡을 뱉었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을 본 코치가 손을 잡아 주고 나서야 여주의 호흡이 조금 진정됐다. 조심스레 손을 떼고 혼자 힘으로 발을 딛고 선 여주는, 코치의 구호에 맞춰 본격적인 재활을 시작했다.


“자, 일단 천천히 걸어 보자. 무릎 직각으로 세우고.”

“흐어어….”

“허리 굽으면 안 돼!”






재활 수영이 끝난 후 한참이나 넋이 나간 채 앉아 있던 여주는, 추위에 몸이 달달 떨려오기 시작하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타월을 뒤집어쓰고 나니 그제야 흘깃대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이상한 모양으로 굳어 버린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긴 여주가 샤워하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그냥 평생 유도만 해야지. 어휴, 못 하겠어.”


함께 훈련받기로 한 다른 학생이 오지 않아서 참 다행이었다. 코치가 여주 말고 다른 사람도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여주는 더 불안에 떨었을지도 모른다.

여주가 머릿속으로 왔던 길을 떠올리며 샤워실 문을 열었다가 뜻밖의 광경에 화들짝 놀라 그대로 굳었다. 문고리를 잡은 채 얼떨떨하게 서 있는 여주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뭐야?”

“아….”

“우리 학교 학생?”

“네.”

“구경하게?”


샤워실로 생각하고 들어간 그곳은 선수들 훈련이 한창인 경영용 풀이었다. 여주는 구경하러 왔냐는 남자의 물음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 들어온 걸 알자마자 곧장 나가려 했는데 의외의 수확을 얻었다.

‘정말 구경해도 되는 건가?’

여주가 긴장을 풀지 못하는 새 남자는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꾸벅 고개 숙이고 조심스레 그 안으로 들어서자, 확 퍼지는 물 냄새와 함께 선수들의 기합 소리가 왕왕 울렸다. 여주는 방해되지 않게 한쪽 구석에 앉아 타월을 꼭꼭 여몄다.


“점국이도 있으려나….”


여주는 빠르게 눈을 굴리며 점국을 찾았다. 다들 수영모와 수경을 쓰고 있어 누가 누군지 쉽게 구분할 수 없었다.

그사이 몸을 푼 선수들이 하나둘 다이빙대로 모여들었다. 왠지 모르게 긴장되어 침을 꼴깍 삼킨 여주는, 순간적으로 시선을 확 끄는 남자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코랑 입밖에 안 보이지만 저건 분명 점국이었다. 머리를 팡팡 치고 수경을 고쳐 쓴 점국이 팔다리를 털었다. 정교하게 잡힌 근육이 예쁘게 움직였다. 두 손을 꼭 모은 여주가 반가운 마음을 감추려 다급하게 입을 가렸다. 점국이 출발을 준비하며 자세를 잡자, 여주는 자기가 더 숨이 넘어갈 듯 긴장했다.

모든 레인이 선수들로 채워지고, 다이빙대 위에서 정지 자세로 자리 잡고 기다리길 몇 초가 지난 후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수영장을 울렸다. 여주는 깜짝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엄마!”


여주의 외마디 비명이 다행히도 다이빙 소리에 묻혔다. 여주는 단체로 수영을 시작한 선수들을 보며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전에도 점국이 수영하는 모습을 종종 봐 오긴 했는데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 자연스레 점국을 좇는 여주의 눈이 흥분으로 일렁였다.

점국의 전신이 쉼 없이 물을 강하게 가르며 전진했다. 시종일관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쉬이 떨어지지 않는 속력이 강점이었다. 단 하나도 그냥 만들어졌을 리 없는 근육이 톱니바퀴처럼 정확히 맞물려 추진력을 더했다. 유려하고 우아한 몸짓에 반해 금세 다가와 집어삼킬 듯한 박진감도 느끼게 했다. 모든 게 맞아떨어져 오차 없이 움직이는 단단한 성 같았다. 성의 주인이 문을 뚫고 나와 유영하는 듯, 그 누구도 점국의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했다. 그의 말갛고 순한 눈을 수경이 가린 건지 물결이 가린 건지, 말 걸기 힘든 포스를 풍겼다. 여주는 벽을 찍고 턴해서 돌아가는 점국의 전신 근육이 물 밖으로 튀어 오르는 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같은 종목이 아닌데도, 평생 못 이길 벽을 마주친 것처럼 압도되었다. 낯선 기분이 피를 돌게 했다.


“와….”


콩닥콩닥, 심장이 빠르게 뛰다 못해 터져 버릴 것만 같은 여주였다.






오랜만에 다 같이 학생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 쌍둥이들은 형제끼리 둘씩 짝을 지고 마주 앉아 식사를 이어 갔다. 배가 고팠는지 말없이 숟가락질만 하는 세 명과 달리, 여주는 젓가락을 입에 문 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어느 순간 빤한 시선을 느낀 점국이 흘깃 고개를 들자, 여주가 화들짝 놀라며 젓가락을 떨어트렸다. 점국은 다행히도 식탁 위로 떨어진 젓가락을 주워 여주 앞에 놓아 주었다. 그 모습을 본 정국과 태형은 잠시 관심을 주는가 싶더니 다시금 식판에 고개를 박았다.


“여주야. 왜 그래?”

“점국아….”

“응.”

“너 진짜 너무 멋있는 것 같아.”


그 말과 함께 배시시 웃는 여주의 모습에 태형이 똥 씹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주는 밥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고, 아예 턱까지 괴고 점국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게 좀 부담스러운 점국이 민망하게 웃음 짓자, 태형이 여주의 팔을 툭 쳤다.


“김여주. 너 그거 폭력이야.”

“뭐래.”

“점국이 괴롭히지 마라.”


정국은 가장 먼저 식사를 마쳤다. 수저를 내려놓고 팔짱을 끼더니, 의자에 등을 기대며 점국과 여주를 번갈아 봤다. 어딘지 모르게 불만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궁금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도 점국에게서 시선을 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여주는 눈웃음까지 지으며 연신 헤실거렸다.

태형은 제육볶음을 슬쩍했는데도 반응이 없는 여주를 보며 믿기 힘들어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에 결국은 웃어 버린 정국이지만, 남몰래 무표정으로 변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점국이에게



길었던 재활이 드디어 끝났다. 운동할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재활에만 매달린 여주는, 하루하루 지날수록 좋아지는 몸을 보며 힘들어도 이 악물고 버텼다. 몸 상태가 아주 좋다며 그동안 수고했다고 토닥이는 코치의 손길에, 너무 기쁜 나머지 소리까지 질러 버렸다.


“오늘이 마지막인데도 숨을 못 쉬겠더라니까.”

“발이 땅에 닿아도 그래?”

“응. 점국아, 나 이제 다시는 수영 재활 못 할 것 같아.”


여주는 재활을 마치자마자 4층 쌍둥이 집으로 와 신세 한탄을 했다. 울상 지은 채 물에서의 훈련에 대해 쫑알쫑알 고충을 토로했다. 점국은 마치 제 일인 것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공감해 주었다. 여주는 이제 재활이 다 끝나서 더는 물에 들어갈 일이 없는데도, 이번 기회에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하던 것이 와르르 무너져 속상했다.

여주의 덜 마른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회색 후드티에 문양을 새겼다. 점국은 마른 수건 하나를 가져와 여주의 어깨에 둘러 주고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그 옆에 앉아 티브이를 보던 정국은 시시각각 변하는 여주 때문에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아 냈다. 여주는 웃다가, 울상을 짓다가, 몸을 부르르 떨다가, 다 나열하기 힘들 만큼 반응이 다양했다. 순간 무언가 떠오른 점국이 반가운 낯으로 여주에게 물었다.


“여주야. 그러지 말고 나한테 수영 한번 배워 볼래?”

“수영? 나 수영은 절대 못 해.”

“수영까지는 아니더라도 물에 대한 거부감을 좀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점국의 제안에 잠시 고민에 잠긴 여주는 얼마 지나지 않아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것만은 못 하겠는지 울상 짓는 여주의 모습에, 점국이 침착한 말투로 조곤조곤 설득을 시작했다.


“내가 절대로 물에 안 빠지게 할게. 여주 너는 코치님이 널 놔 버릴까 봐 무서웠다는 거잖아?”

“응….”

“나 못 믿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너 안 놓을 건데?”


담담하게 뱉는 점국의 말에 설득이 될 듯 말 듯 하던 여주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점국을 믿는다는 뜻이었다. 그 모습에 살짝 웃음이 날 뻔한 점국은 행여나 제 조언이 가벼워 보일까 염려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내 여주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였다.


“당장 대답할 필요 없어. 한번 잘 생각해 봐. 너만 괜찮으면 너희 전지훈련 갔다 와서 해 보자.”

“알겠어, 점국아. 고민해 볼게.”






자기 몸집만 한 배낭 한가득 짐을 채우던 여주가 힘에 부쳐 뒤로 발라당 몸을 뉘었다.

‘또 뭘 챙겨야 하더라.’

방 천장을 보고 누워 전지훈련에 필요한 물건을 고민하는 표정이 꽤 진지했다. 다시 몸을 일으킨 여주가 옷장을 활짝 열어 유독 아끼는 운동복 몇 장을 챙겼다.


“아, 맞다. 단체 티!”


여주는 딱 두 장 남은 단체복을 세탁기에 넣어 놓고 빨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내일 있을 전지훈련에는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다 모이기 때문에 단체복은 기본 중 기본이었다.

‘어떡하지.’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던 여주가 너무 당연하게 정국에게 전화를 걸었다. 뻔뻔한 표정으로 신호음을 듣고 있는 모양새가 미안함이나 망설임이라곤 모르는 사람같이 보였다. 금세 신호가 끊기고 무신경한 목소리가 들렸다.


-왜.

“정국아. 단체복 몇 장 있어?”

-몰라. 너 줄 건 없어.

“이런….”


여주는 순간 욕이 나올 뻔해 필사적으로 입술을 물었다. 간신히 입을 틀어막고 몸을 홱 돌려 창 쪽으로 향하면서 억지웃음을 꾸몄다. 정국이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웃기 위해 노력하던 여주는, 블라인드를 걷고 창문에 손을 가져다 대며 최대한 착한 말투로 말했다.


“아이고, 은인님. 제발 한 장만 빌려주세요. 일주일 동안 잘 빨아서 입어 보겠습니다.”

-없다니까.

“왜 그러세요. 장난하지 말고요.”


창문을 열자마자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질끈 감은 여주는, 멈칫하던 것도 잠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후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뻥 뚫릴 만큼 쾌청한 날씨에 여주의 머리칼이 쉴 새 없이 방 안으로 날렸다. 어느덧 땅거미가 내려앉은 집 앞 골목에는 가로등 불빛만 홀로 빛나고 있었다.


-나도 주고 싶은데 진짜 없어.

“아, 전정국! 진짜 치사하게 그럴래?”


결국 참지 못하고 터진 여주의 호통에 전화기 너머 정국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정국은 그런 게 아니라며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이미 믿지 않는 여주가 연신 투덜대며 불만을 표했다.


“나 감독님한테 맞아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아, 오버 좀 하지 마.


정국은 질려 버린 목소리로 답했다. 남모르게 입술을 삐죽인 여주가 시무룩해져서 입을 꾹 다물었다. 말 없는 여주가 웃겨 실소를 터트린 정국이 물었다.


-빌려주면 너는 뭐 해 줄 건데.

“친구끼리 뭘 또 그렇게 각박하게 구냐?”

-끊을게.

“아, 알았어! 잠깐만.”


여주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민을 시작했다. 안 빌려줄 거면 그냥 그렇다고 할 것이지 갑자기 웬 협상인지 몰랐다. 정국답지 않은 발언이라고 생각했다.

창틀에 팔을 올려 턱을 괸 채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여주는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안이 떠오르지 않아서 입술을 물었다. 잘근거리는 입술이 답답한 마음을 대변했다. 결국 기다림에 지친 정국이 푸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됐어. 챙길 테니까 잠이나 자.

“진짜? 고마워. 나중에 너도 원하는 거 있으면 꼭 말해.”

-네 물건 중에 탐나는 게 있을까 싶다.

“야. 이,”

-끊는다.


마지막 말과 함께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여주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검게 변한 핸드폰 화면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이내 입술을 한 번 삐죽이고는 창문을 닫고 방을 향해 돌아섰다. 귀를 긁적이며 방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기고서, 마지막으로 배낭 지퍼를 끝까지 채웠다.






점국이에게



평소보다 30분이나 일찍 눈을 뜬 여주는 피곤한 몸을 반으로 접고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쭉 뻗은 다리 위에 뉜 상체가 액체처럼 흐물거렸다. 좀 더 빈둥거리고 싶은데, 절대로 늦지 말라던 코치의 말이 떠올라서 번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빠르게 씻고 나와 머리를 대충 말리고 바나나를 먹었다. 식탁 의자에 홀로 앉아 연신 멍하게 오물거리는데, 누가 봐도 잠에서 덜 깬 사람의 모양새였다. 태형을 깨우지 않으려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준비를 마친 여주가 바나나를 하나 더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몸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양치하기 위해 화장실로 향하는 찰나, 굳게 닫혀 있던 태형의 방문이 열렸다.


“…미안. 시끄러워서 깼어?”

“아니. 너 배웅하려고.”


태형은 잔뜩 부은 눈을 비비며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트레이닝복 바지만 입은 태형이 소파에 쓰러지듯 누워 여주를 올려다봤다. 어느덧 양치질을 시작한 여주가 신기한 듯 눈을 깜빡였다. 아침잠 많기로 유명한 태형이 5시 30분에 기상한 게 놀라웠다. 믿지 못하는 표정으로 쏟아지는 여주의 시선에 태형은 얼굴을 긁적였다.


“짐은 잘 챙겼지?”

“응. 당연하지! 하루 이틀인가.”


양치질을 마치고 나온 여주가 읏차 소리 내며 배낭을 멨다. 태형이 가방 밑바닥을 받쳐 주며 더 편히 들 수 있게 도와줬다. 소풍이라도 가는 듯 조금 들떠 보이는 여주의 모습에 태형은 짐짓 엄하게 주의를 줬다. 여주는 그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지만 표정만큼은 진지한 척 연기했다.


“항상 부상 조심하고.”

“응.”

“일주일이나 가는 거니까 엄마한테 전화 자주 하고.”

“응.”

“전정국 조심하고.”

“응…. 응?”


기계적으로 대답하던 여주가 뒤늦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뜻으로 태형을 봤지만, 태형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국을 조심하라니, 여주는 웬 황당한 말인가 싶었다. 어이없어 터진 여주의 웃음에 태형이 급기야 정색까지 했다.


“아무리 운동이 힘들어도 둘이 막, 어?”

“뭐래.”

“야, 김여주. 나 진지하거든.”

“됐어. 나 간다.”

“아니,”

“갔다 올게, 오빠.”


해맑게 던진 여주의 작별 인사에 태형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개울가에 아이를 내놓는 듯 현관까지 따라 나가 끝까지 당부했다. 여주가 질린다며 눈을 질끈 감고 손수 문까지 닫아 주자, 굳게 닫힌 현관 너머로 “잘 다녀와!” 하는 외침이 들렸다. 기분 좋게 미소 지은 여주가 가방을 고쳐 메며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야. 김여주.”

“네, 선배님?”

“이거 차에 실어라.”


체육관 앞에 주차된 버스에 몸을 실으려던 여주가 선배의 부름에 황급히 돌아보았다. 대뜸 배낭을 던지는 선배 때문에 그걸 받느라 뒤로 주춤 밀려나야 했다. 여주는 순간적으로 욕이 치밀어 오르는 걸 필사적으로 참으며 선배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저 새끼는 맨날….’

사사건건 여주만 보면 시비를 거는 탓에 저 선배에 관한 것이라면 무척이나 예민해졌다.

‘가방은 또 드럽게 무거워요.’

미간을 잔뜩 구긴 여주가 터덜터덜 짐칸으로 향하는 그 순간, 난데없이 손이 가벼워지며 가방이 위로 들렸다. 의아한 표정으로 사태 파악을 하기 위해 힘쓰면, 어느새 코앞에 다가와 가방을 가져가는 정국이 보였다.


“헐, 전정국!”

“치사하게 혼자 가냐?”

“너 먼저 간 줄 알았어.”


정국은 선배의 가방을 대신 들어 짐칸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 모습에 웃음이 터진 여주가 혹여 누가 봤을까 눈치 보며 입을 가리자, 정국이 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여주의 머리 위에 얹었다. 순간적으로 앞이 깜깜해진 여주가 허둥거리며 물건을 끌어 내리니, 이제 막 빨기라도 한 듯 진한 향기를 풍기는 단체 티가 보였다. 그것도 두 장이었다.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며 향기를 만끽하던 여주는 제 할 일을 마치고 자리를 뜨는 정국을 급히 따랐다.


“고마워.”

“어.”

“근데 이거 향 되게 좋다. 언제 빨았어?”

“어제.”


정국이 그 말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


“어제?”


여주는 그 말을 따라 하며 고개를 갸우뚱해 보였다. 분명 여주가 정국의 집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빨래는 하지 않던 형제였다.

‘도대체 언제 빨래를 했다는 거지. 설마 어제 내 전화 때문에 일부러 한 건가.’

곧장 버스 계단을 올라 정국을 찾는 여주의 움직임이 꽤 다급했다. 중간쯤 앉은 정국을 발견한 여주가 자연스레 그 옆에 자리 잡으며 정국의 팔을 톡톡 쳤다. 정국은 차에 타자마자 이어폰을 꽂고 눈을 감았다가, 내리까는 듯 살짝만 다시 떠 보였다. 여주는 정국의 오른쪽 귀에 꽂힌 이어폰을 조심스레 빼고 조용하게 물었다.


“빨래를 어제 했다고?”

“어.”

“….”

“나도 없다고 했잖아.”


정국은 담담하게 답하며 여주 손에 들린 제 이어폰을 가져갔다. 다시금 눈을 꼭 감고 잠을 청하는 정국을 보며 여주는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없다는 거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조금 진정된 여주가 안전벨트를 채우며 옆을 흘깃 보았다. 많이 피곤했는지 금세 잠들어 버린 정국이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픽 웃음 지은 여주는 조심스레 정국의 머리를 받쳐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와… 여길 또 오다니.”

“미친. 벌써 땀 냄새 나는 것 같아.”


서울에서 한참을 달려 도착한 전지훈련 장소에는 대한 체대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모인 버스들이 줄지어 있었다. 여주는 이젠 우리 죽었다며 벌벌 떠는 동기들 사이에서 왜인지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재활도 잘 마쳤겠다, 컨디션이 최상이라 솔직히 훈련이 조금 기대됐다. 입 밖으로 꺼냈다가는 미친 사람 소리를 들을 것이 분명하니 입을 꾹 다무는 여주를, 여자 동기가 대뜸 툭툭 쳤다.


“야, 김여주. 저기 네 라이벌 온다. 한진 체대.”

“야… 무슨 라이벌이야. 쟤는 국가 대표인데.”


행여 누가 듣기라도 할세라 동기의 입을 틀어막은 여주가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동기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눈을 맞추더니 호들갑스럽게 여주의 어깨를 흔들었다. 너무 어지러워서 멀미가 날 것 같은 여주가 그만하라고 외치고 나서야 놓아주는 동기들이었다.


“마지막 선발전만 이겼어도 네가 국가 대표 됐을 거잖아.”

“졌잖아.”

“중고등학교 6년 내내 네가 이겼잖아.”

“결국 졌잖아.”


여주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담담하게 뱉는 여주의 대답에 속이 타들어 가는 건 오히려 동기들이었다. 동기들은 욕심 없어 보이는 여주의 태도가 답답한 듯 어깨동무하고 귓가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여주는 제 귀에 무어라 중얼대는 동기의 말을 들으며, 때마침 앞을 스쳐 지나가는 문제의 동료와 눈을 맞췄다. 여주가 청소년 대표 시절 만나는 족족 한 번도 진 적 없는 상대이자, 동시에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 붙어 보기 좋게 패한 상대였다. 가벼운 묵례가 이어지고 곧바로 떨어진 눈 맞춤 끝에 여주 입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다 느껴지는 인기척에 놀라 시선을 옆으로 향하면, 잠에서 덜 깬 정국이 눈을 꼭 감은 채 목을 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동기는 아직 할 말이 다 안 끝난 모양인지 계속해서 속삭였다.


“너랑 전정국은 꼭 이런 것도 닮았어.”

“….”

“너희 둘 다 전국 체전을 휩쓸면 뭐 하냐. 마지막에 삐끗하는데.”

“약 올리냐?”

“정신 차리라고. 이번에는 꼭 이겨 버려.”


여주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지금 대회 아니고 전지훈련 온 거거든?”


어이없는 듯 이어지는 여주의 말에 정국의 시선이 흘깃 닿았다. 정작 여주와 정국은 아무 생각이 없는데 동기들이 더 경쟁심을 불태웠다. 정국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한 표정으로 보자, 여주가 고개 저으며 정국의 팔을 끌었다.


“전정국, 가자. 얘네랑 어울리지 마.”






점국이에게



훈련은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눈을 뜨자마자 산을 타는 것부터 시작해서, 끝이 안 보이는 러닝과 웨이트에 대련까지, 옆에서 누가 구역질해도 이상하게 생각 안 할 정도로 고된 일정이 계속되었다. 여주는 이제 겨우 나흘이 되었을 뿐인데 벌써 볼이 홀쭉해진 것 같아서 양손으로 꾹 눌러 보았다. 정국은 밥을 먹다 말고 그런 여주를 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국아. 나 살이 좀 빠진,”

“아니. 전혀.”

“뭐… 몸무게는 그대로더라.”


여주는 민망한 듯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금세 수긍했다. 그래도 걱정과 달리 체중이 오버되지 않아서 만족했다.

밥을 다 먹은 여주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하자, 정국도 덩달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주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참이나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 속을 좀처럼 헤아리기 어려운 정국이 결국 다시 식판으로 시선을 옮길 때까지 말이다.






“다들 오늘도 수고 많았습니다. 밤늦게 너무 시끄럽다는 민원이 많으니까 주의해 주시고요. 남녀 선수 단둘이 붙어 다니는 일도 자제해 주시길 바랍니다. 주의 사항은 이 정도만 하면… 예?”


단상에 서서 주의 사항을 전달하던 코치 대표가, 어디선가 들어온 의견에 마이크를 가리며 황급히 귀를 갖다 대었다.


“빨리 씻고 싶은데….”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볼에 잔뜩 바람을 넣은 여주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사이 다 전달받은 코치가 다시금 마이크를 들었다.


“아… 식사 시간에 선수들이 너무 한꺼번에 몰려서 힘들다는 민원인데요. 학교별로 순서를 정해 줬으면 좋겠다는 의견입니다. 순서를 어떻게 정하면 좋을까요?”


밥. 가장 예민한 사안에 순식간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얼마나 전투적으로 먹어 댔으면 이제 겨우 이틀 남았는데 공지까지 하나 싶었다. 여주는 풋, 터진 웃음에 어깨까지 들썩였다.


“밥은 절대 양보 못 해. 시방 우리는 한 마리의 위험한 짐승이여.”

“아, 하지 마.”


장난스러운 동기의 말이 너무 웃긴 나머지 여주가 그러지 말라며 팔을 퍽퍽 쳤다. 그러면서 자꾸만 정국을 밀어서, 정국은 힘없이 몸을 팔랑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까부터 단상 옆에서 무어라 말하던 감독 하나가 급기야 위로 올라가 마이크를 대신 잡았다. 장난기 넘치는 감독의 표정에 여주는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 설레는 표정 뭐지? 게임이라도 할 기세야.”

“설마… 김여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그럼 나 여기 다 엎어 버린다.”

“올. 지켜본다.”


지도 교사들 사이에서도 유독 목소리가 큰 한진 체대 감독이었다. 한진 체대 학생들은 자기 학교 감독이 단상으로 올라오자 환호성을 질렀다. 갑자기 분위기가 레크리에이션 같았다.

이 상황이 흥미롭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한 여주가 쉴 새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 순간 드디어 감독이 첫마디를 떼었다.


“에, 보니까는, 가나다순으로 나열을 했을 때, 대한 체대가 가장 앞 그리고 한진 체대가 가장 뒤입니다.”

“네. 그렇죠.”

“우리가 누굽니까? 에, 장차 나라를 대표할 유도 선수 아닙니까? 승부를 즐기는 무도인!”

“하하, 맞죠.”

“그러니까는 우리 길게 뭐 할 것도 없이, 에, 대한 체대 한 명이랑 한진 체대 한 명이 붙어서, 에, 대한 체대가 이기면 앞에서부터 쭉 한진 체대가 이기면 뒤에서부터 쭉 먹는 걸로, 그렇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뭔 소리야.’

여주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연신 웃음 띤 채 말을 이어 가는 감독의 제안에, 단상에 선 코치도 좋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긴 뭐가 좋아. 둘 다 한진 체대 소속이니까 좋겠지.’

그와 동시에 대한 체대 유도부 학생들의 시선이 정국과 여주에게 꽂혔다. 여주, 정국과 1, 2등을 다투는 두 선수 모두 한진 체대 소속이라는 걸 다들 잘 알았다.

여주는 미간을 구긴 채 공갈 사탕을 물었다. 정국의 라이벌인 선수는 일정 때문에 전지훈련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여주가 대련을 할 가능성이 높았다. 정국이 그런 여주의 눈치를 보며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그보다 더 빠른 코치가 여주 옆으로 와 어깨를 토닥였다.


“여주야?”

“아… 코치님. 진짜 해야 돼요?”

“그냥 대충 해. 괜찮아.”


코치도 이 상황이 내키지 않지만 이미 분위기가 형성된 터라 차마 찬물을 끼얹지 못했다. 풀어헤친 여주의 도복을 꼭꼭 여며 주며 다독이는 코치의 말에, 여주는 급격하게 밀려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심장이 미친 듯 쿵쾅대는 걸 느꼈다. 이 공간에 있는 모든 학생이 여주와 상대 선수를 번갈아 보았다.

‘재밌냐? 이게 재밌어?’

한껏 예민해진 여주가 불만을 속으로만 삼키고 단상 쪽으로 걸었다. 정국은 그런 여주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쟤 김여주다. 52kg급 1등.”

“아냐. 선발전은 한진 체대 이듬이 이겼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여.”

“처음은 맞아도 마지막은 아니지. 원래 저런 에이스들 한 번 기세 꺾이면 몰락하는 거 한순간이야.”


그사이 학생들은 중앙 매트 외곽으로 둘러앉았다. 여주는 다 들리게 속닥거리는 사람들의 말에, 표정이 한껏 굳어 도복 끈을 동여맸다. 정국은 코치에게 가서 자기가 대신 하는 게 어떠냐고 물어볼까 했지만, 말을 꺼낸 감독이 애초부터 여주와 자신의 학생을 붙여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흥미로운 눈빛으로 팔짱을 끼고 선 한진 체대 감독을 보며 정국이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감독은 은연중에 자기 제자가 무조건 이길 것으로 기대를 품고 있는 듯했다.


“선수 간 인사.”


드디어 마주 보고 선 두 명의 선수가 심판의 수신호에 맞춰 허리를 숙였다. 여주가 긴장되는 듯 후 한숨을 내뱉자마자 심판의 외침이 떨어졌다.


“시작!”


여주는 그와 동시에 망설임 없이 상대 쪽으로 걸어갔다. 견제도 없이 바로 깃을 잡기 위해 다가오는 여주의 모습에, 상대는 당황한 듯하면서도 재빨리 자세를 취했다. 왜인지 모르게 급해 보이는 여주를 눈치챈 탓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장 소매를 잡는 여주를 보며 상대가 아무도 모르게 씩 웃음 지었다. 빗당겨치기. 여주의 주특기를 쓸 것으로 확신했다. 빠른 속도로 여주의 수를 다 읽은 상대를 보며, 한진 체대 감독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

“….”

“….”

“…한판!”


상대는 자연스레 소매를 내주고 여주가 방심한 틈을 타 목깃을 잡고 안다리를 후리려고 시도했다. 곧이어 들리는 매트의 둔탁한 소리, 그리고 한판승을 외치는 심판의 판정. 너무 빠르게 끝난 시합 때문에 경악스러운 표정의 여러 얼굴이 바닥에 드러누운 사람을 빤히 보았다. 허탈하게 누워 승자를 올려다보는 패자의 눈빛 끝에, 도복 끝을 잡아당기며 후 한숨을 뱉는 여주의 모습이 보였다.

놀랍게도 그 순간 바닥에 메쳐진 건 여주가 아닌 상대였다. 순간적으로 공격을 피한 여주가 빠른 속도로 몸을 돌려 상대의 몸통으로 등을 밀어 넣었다. 눈을 내리깐 채 손을 내미는 여주를 향해, 상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맞잡았다. 업어치기. 그건 바로 상대의 주특기였다.






여주는 어느 건물 앞 계단에 앉아 신경질적으로 아이스크림을 흡입했다. 채 녹지 않은 쭈쭈바 때문에 신경질 난 여주가 인상 팍 쓰며 불평하자, 옆에 앉아 있던 정국이 아이스크림을 뺏어 들어 손으로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돌처럼 딱딱한 아이스크림을 힘주어 누르던 정국은 기분이 별로인 여주를 살피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진짜 짜증 나.”

“….”

“재수 없어.”


여주는 대련 자체에 불만을 갖는 것이 아니었다. 그 대련이 성사되기까지의 과정과 그들이 자신을 깔보는 듯한 분위기에 짜증 났다. 그 누구도 소리조차 못 지를 정도로 멋지게 이겨 놓고 입이 댓 발 나온 여주를 보며, 정국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여주의 억울한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내가 그냥 동네북이고 만만의 콩떡이지.”

“만만의 콩떡이 뭐야?”

“몰라.”

“여주야. 그거 만만하다는 뜻 아닐걸?”


이 와중에도 콕 집어 지적하는 정국의 말에 여주가 원망하는 듯 눈을 흘겼다. 정국이 큼큼 헛기침하며 어느덧 말랑말랑해진 쭈쭈바를 건넸다. 여주는 곧장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렸다.


“그래도….”

“….”

“이겼으니까 다행이야.”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뒤로 젖힌 여주가 쭈쭈바 끝을 톡톡 쳤다. 정국은 여주의 시선이 하늘을 향하자, 그제야 마음껏 여주를 빤히 보며 웃음 지었다. 무릎 위에 팔을 얹고 턱을 괸 채 여주를 바라보던 정국은 순간 자기가 뭘 하는 건가 싶어 번뜩 정신을 차렸다.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는 정국의 앞으로, 저 멀리 코치 세 명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화들짝 놀란 정국이 다급하게 여주의 팔을 잡고 건물 뒤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왜. 왜 그러는데?”

“코치 떴어.”


남녀 단둘이 돌아다니는 것을 자제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터라 굳이 숙소에서 멀리 떨어진 체육관까지 온 두 사람이었다. 놀란 눈을 한 여주는 정국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기며 건물 뒤편의 작은 틈 안으로 몸을 숨겼다. 두세 사람은 거뜬히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인데, 온갖 잡동사니가 있어 조금 좁게 느껴졌다. 코치들의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 정국이 천막을 살짝 끌어 내리자 두 사람이 완벽하게 가려졌다.


“….”


행여 소리라도 날까 숨을 죽이고 바깥으로 귀를 쫑긋 세우던 여주는 순간적으로 등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깜짝 놀라 앞으로 튀어 나갔다. 덕분에 안 그래도 가깝게 마주 보던 정국과 딱 붙는 자세가 되었다. 그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정국은 여주의 어깨를 반사적으로 잡아 받쳐 주었다.


“왜 그래?”

“차가워…. 벽에 물 있나 봐.”


소곤소곤 이어지는 여주의 말에 정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뒤늦게 목 아래부터 허벅지 중간까지 빈틈없이 딱 붙어 버린 여주의 몸을 느꼈다. 정국은 순간 온몸이 저릿하고 손과 목울대에 힘이 들어갔다.

여주는 그런데도 정국에게 밀착해 있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바깥의 소리에만 집중했다. 코치들의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여주가 슬쩍 고개를 들었을 땐,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정국의 얼굴이 코앞까지 와 있었다. 여주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정국이 빌려준 티셔츠에서 나던 향기가 백배는 더 강하게 풍겨 왔다.

여주가 무언가 말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자 가슴께도 함께 일렁였다. 정국은 다급하게 말을 끊으며 여주의 어깨를 살며시 밀어냈다. 미간을 잔뜩 구긴 정국이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왜 그러나 싶어 의아한 여주가 가만히 서서 숨을 죽였다. 정국은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심호흡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김여주.”

“응?”

“너 뒤로 가.”

“….”

“미안한데 좀만 떨어져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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