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처음 뵙겠습니다. Rêve의 총괄 셰프 박지민입니다.”



처음 뵙기는 개뿔이.



체형에 딱 맞는 블랙 수트 차림의 박지민이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와 악수를 건네는 바로 그 순간에도 집 나간 현실감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인간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지금 파리에서 한창 꿀잠 자고 있을 시간인데···. 아니, 이게 아니지. 늘상 보던 흰 와이셔츠 차림이 아닌 정장 마이까지 갖춰 입은 세련된 수트 핏을 보자 내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역시 남자는 수트 빨··· 이 아니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박지민 이 개연성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왜 이리 신출귀몰이야? 자기가 괴도 루팡이야 뭐야. 우연의 일치라고 단정 짓기에는 너무나 절묘한 상황이 아닐 리 없다. 고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마 난, 이 구미호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젠장 맞게도. 



“박지민ㅆ-”



-씨가 왜···.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커다랗게 확장된 박지민의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다. 흉흉한 눈빛이 꼭 ‘어디 한번 박지민 씨라고 불러보시지,’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난 순간적으로 좀 쫄았다. 



“··· 아니, 즈인님, 아니 아니, 박!?”



시팔···. 이번 생은 제대로 망한 게 분명하다. 미쳤지. 미쳤어. 지금 이 순간 수치사로 세상을 하직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이건 진짜 평생 이불킥 감인데······. 나의 횡설수설이 끝나자마자 무섭도록 고요한 정적이 레스토랑 내에 내려앉았다. 주인님은 뭔 젠장맞을 놈의 주인님. 이게 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박지민의 눈빛 때문이야. 한 달 동안 그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으려 열심히 입에 달고 살았던 문제의 호칭이 자동반사적으로 튀어나올 줄 나라고 알았겠냐고. 땅굴이라도 파서 틀어박히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여주 왜 사냐. 죽어 진짜. 그때, 박지민 뒤에 서 있던 세 명의 셰프들이 속닥거리는 것치고는 꽤 커다란 목소리로 소란을 떨기 시작했다. 



“내 귀가 이상한 거야? 저 사람 방금 짐니한테 주인님이라고 하지 않았어?”

“스읍- 나도 그렇게 들었는데.”

“원래 알던 사인가 본데여?”



“뭐야 뭐야? 무슨 사이길래 주인님이야-”

“형, 제발 호들갑 좀 떨지 마요.”



“민솊. 넌 이 형님이 좀 흥분할 수도 있지 계속 그렇게 하나하나 꼬투리 잡을래?”



저기요. 인간들아. 그렇게 대놓고 쳐다볼 거면 아예 볼륨을 낮추지 마세요. 그래봤자 다 들리거든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박지민과 나를 번갈아 보는 것은 비단 레브의 셰프들뿐만이 아니었다. 양옆에 서 있는 팀원들의 시선이 느껴지고, 정적이 깨진 틈새로 수다쟁이 셰프 셋이 쓰는 드라마가 생중계되기 시작하자 극심한 쪽팔림이 나를 덮쳤다. 이것보다 더 말도 안 되는 판타지를 써 내려가기 전에 이 상황만은 절대적으로 내가 끝을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어수선하던 공기에 찬물이 끼얹어지듯 다시 한번 숨 막히는 고요가 찾아왔다.



"주임님!"



순간적으로 고개를 휙 돌리며 줄곧 내 오른 편에 서 있던 인호 씨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인호 씨가 박 씨인 게 얼마나 다행이야 진짜···. 등 뒤로 한줄기의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 그럼 그렇지. 역시 잘못 들었네,"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촉새 셰프 삼 인방. 내 절절한 부름을 듣고서 느낌표와 물음표가 공존하는 얼굴로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인호 씨에게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 박 주임님부터 순서대로 자기소개를 해 볼까요? 앞으로··· 서로 얼굴 볼일 많을 것 같은데.”



이제껏 내내 잠잠하던 박지민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뒤로 젖히며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알리 없는 다른 사람들은 저 인간이 왜 저러나, 하는 얼굴로 눈만 껌뻑거렸다. 난 초조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경직된 미소를 유지했을 뿐이고. 그래, 박지민. 마음껏 웃어라. 그쪽이 웃건 말건 난 신경 안 써. 지금 나한테 중요한 건 딱 하나. 이 잣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나가냐는 건데. 즈엔장. 답이 없다. 한참을 호쾌하게 웃어대던 박지민이 느닷없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더니 홱, 내 손을 잡아끌었다. 밀려드는 당혹감으로 인해 얼굴 가득 열기가 들어차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이 도른자야! 여기 다른 사람들 잔뜩 있는 거 안 보여?!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흥미롭다는 듯 한참을 빤히 응시하던 박지민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가 악수하려고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아무래도 잊어버리신 것 같아서요.”



새삼 정상인처럼 들리는 이 남자의 말투에 그야말로 사레들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아는 박지민이라면, ‘이 몸이 먼저 악수를 청하는데 감-히 기다리게 만들었겠다?’ 아니면 적어도, ‘내 손을 잡아볼 수 있다는 걸 엄청난 영광으로 알라고. 평범한 오여주,’ 따위의 밥맛없는 대사를 늘어놓아야 맞는 건데 말이지. 혹시 이 인간, 박지민의 쌍둥이 형제나 뭐 그런 거 아니야? 엉터리 소설 같은 허무맹랑한 상상이긴 하지만 일단 이 상황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 



파리에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언제 어디서나 부내를 풍기고 다니던 박지민. 사는 곳이나 하고 다니는 것만 봐도 돈이 어마 무시하게 많을 거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따로 들은 적이 없으니까 난 당연히 본업이 신흥 재벌, 부업이 요리사겠거니, 하고 지나갔지. 아, 굉장한 부자인가 보구나? 이런 인간이랑 아는 사이가 되다니 정말 신기하다. 이런 생각들을 덤으로 하면서. 그런데 그 박지민이 국내 재계 순위 1위인 PJ 그룹의 3세일 줄 누가 알았겠냐고. 거기다가 세상에, 이 인간을 한국에서, 그것도 일터에서 만나게 되다니. 말이 되고 안되고를 떠나서 단 0.1 퍼센트도 예상하지 못했다. 



단단히 잡혀있는 손을 두어 번 흔든 후 빼내려고 힘을 줬지만 박지민은 그렇게 순순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돌겠네.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일까. 눈을 치켜뜨고서 장난기가 그득그득 붙어있는 반지르르한 얼굴을 노려보니 박지민은 그제서야 내 손을 놓아주며 도톰한 입술을 한쪽으로 말아 올렸다. 



“오여주 대리님. 맞으시죠?”



철천지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도 아니거늘. 이 남자와 마주하고 있는 일분일초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속 시끄럽게 내적 갈등이 심화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도 그럴게··· 파리에서 작별한 후, 박지민과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이 남자로 말할 것 같으면, 타지에서 한 달 가까이 내 은인 노릇을 자처했던 사람이라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그의 저택에서 한 달간 '가정부'로 착실히 일하면 차 수리비를 퉁쳐 주겠다는 조건 아래에 시작된 관계였지만 결국 노동력을 빌려주긴커녕 출국 전까지 주구장창 신세만 입다가 돌아왔으니 염치 불고한 것은 바로 나겠지. 박지민이 처음 제시했던 차 수리비 천오백만원은 옆집 개 이름이 아니었다. 그가 마음을 고쳐먹고서 일부라도 갚으라 할 수 있으니 예의상 번호 정도는 남겨두고 왔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으로 마주치는 건 지나치게 극적인 서프라이즈 아니야···? 뿐만 아니라, 이 남자는 불과 지난주에 오여주 인생 최초로 함께 즉흥적인 하룻밤을 보낸 상대이기도 했다. 그 밤을 떠올리며 뻥뻥 차버린 이불이 벌써 몇 채인데, 초연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언제나 쉽게 쉽게 감정에 지배당하는 난, 당혹감에 빠져 한동안 말문을 잃었다. 완전히 모르는 척하는 게 나으려나? 나중에 다시 인사하더라도 일단 보는 눈이 많은 지금 굳이 내 쪽에서 아는 척하는 건 오바다.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누가 물어보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아 네, 제가 사실 박지민 씨 전 가정부랍니다,” 이럴 거냐고. 암. 박지민도 모르는 척하려는 것 같으니까 최선을 다해서 맞춰주는 거야. 지금부터 철저히 이방인 코스프레로 간다. 결론을 내리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난 박지민을 모른다. 이 마가린 내 풀풀 풍기는 남자를 나는 오늘 처음 본 거야. 



그제서야 난, 여느 클라이언트들을 대할 때처럼 싱긋 웃으며 명함을 내밀 수 있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셰프님. 대박 식품 기획개발 1팀 오여주 대리입니다. 저희 팀장님이 오늘 자리를 비우실 수가 없어서, 당부하신 대로 회의에 참여할 최소 인원을-"

"뭔가 착오가 있었나 보네요.”



내 말을 단박에 끊은 박지민이 살포시 입꼬리를 올리며 한 손을 정장 바지 주머니에 꽂았다. 



“네? 무슨···.”

“회의 인원은 한 명이면 충분하다고 김남준 씨한테 미리 당부해놨었는데."



“저희도 현장 나와서 회의하고 역할 분담하는 데 필요한 적정인원이라는 게 있거든요. 사실, 세 명도 그리 많은 인원은 아니에요.”

“오 여 주 대리님."



"···?" 

"저희는 아무 방송에나 출연해 레시피 공유하고 손뼉 치면서 유명세를 타려는 여타 음식점들과 다릅니다. 레시피와 운영 방침을 포함한, 이제껏 누구에게도 오픈한 적 없는 Rêve의 구석구석을 공개하는 거잖아요. 파트너라도 비밀유지가 생명인 건 당연한 일이죠. 그리고 그 비밀유지란 게, 여러 사람을 데리고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 피하고 또 피하던 집요한 시선이 결국 나를 옭아맸다. 아주 끈질기게 따라붙는 깊고도 그윽한 눈동자를 보며 나는 새삼스럽게 자신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은 처음부터 우연 따위가 아니었다는 것을. 치밀한 계획 아래 절묘하게 만들어진 상황이었다는 것을.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만 달싹이는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박지민은 이내 특유의 여유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견학 시켜드릴 수는 없어도 오늘 힘든 걸음 하셨으니까 저희 셰프들 인터뷰 정도는 하셔도 좋습니다. 오픈 시간까지 넉넉하게 남았으니까 편안히 앉아서 말씀 나누세요. Suga. Jin. 저 두 분이 실질적으로 Rêve의 풍미에 관여하는 수 셰프들입니다. 그럼 전 이만.”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박지민은 주방 입구 쪽 대리석 기둥에 기대어 서 있던 두 명의 수솊들에게 눈짓을 하는가 싶더니 곧장 옆으로 난 계단을 향해 부드럽게 몸을 돌렸다. 그래, 오늘은 셰프들 인터뷰만 따고 다음엔 김남준이랑 같이 와서 본격적인 회의를 하던가 하자. 아니지. 굳이 내가 올 필요 없잖아? 아무래도 난 단단히 잘못 걸린 것 같으니까 여긴 나 대신 김 대리님 오시라고 해야겠다. 인호 씨와 세연 씨를 따라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어울리지 않게 과한 나긋함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오 대리님, 어디 가세요? 회의 안 하세요?”

“··· 저, 제가요? 저랑요?”



“다른 분들은 인터뷰하느라 바쁠 예정이니까요.”

“아니, 저기··· 제 생각엔 다음, 내일쯤 팀장님이랑 다시 와서 제대로 회의를 진행하는 게 아무래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멍청하게 횡설수설하는 동안 계단 옆에 서 있던 박지민은 어느새 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박지민이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늘 생각했던 거지만 오여주는 말이 참 많아. 어디 한번 계속 버텨봐. 내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싶다면.”



미, 미친. 내가 뭐랬어. 그 박지민 맞잖아.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양팔을 걷어붙이는 시늉을 하며 불량스럽기 그지없는 눈빛을 내게 고정시켰다. 보는 눈이 이리도 많은 곳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위를 둘러봤지만 다른 사람들은 진작에 분주하게 움직이며 각자 할 일에 빠져있느라 이쪽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였다. 버터를 잔뜩 바른 듯 느끼하면서도 우수에 찬 눈빛이 내게 진득하게 고정되었다. 이 인간 진심인가 봐. 


천천히 움직이는 툼툼한 악마의 부리. 어떻게 할래. 입 모양만으로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난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오여주. 침착하고 정신 바짝 차려야 해. 내가 여기서 당황하거나 쭈굴한 반응을 보이는 게 바로 박지민이 원하는 거니까. 날 놀려먹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변태 같은 인간이잖아. 하. 내가 지난 한 달간 그랬던 것처럼 호락호락하게, 고분고분 넘어갈 줄 알고? 주인님 놀이는 이미 끝났어. 박지민의 개인 노예 생활은 이미 청산한 지 오래라고. 생명줄이라도 된 듯 두 손으로 꽉 붙들고 있던 가방끈을 과감하게 놓은 후 턱을 치켜들며 뾰족한 눈초리를 그에게 보냈다. 



“내 발로 갈 거니까 앞장 서요.”



푸흡, 다시금 밥맛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머리를 쓸어넘긴 박지민이 계단을 향해 한쪽 팔을 뻗었다. 



“회의실은 이쪽.”
















추천 BGM | 마마무 - Double Trouble Couple
















두 층을 올라 마주한 공간은 한쪽 벽면 전체가 커다란 창으로 되어있어 볕이 아주 잘 드는 곳이었다. 내 키의 여덟 배는 됨직한 높은 천장과 창밖으로 보이는 탁 트인 예쁜 경치에 폐 깊숙한 곳까지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잘 관리된 초록빛 잔디밭을 보고 홀린 듯 창가로 다가갔다.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레스토랑 건물과 분리된 아담한 규모의 유리 온실이 보였다. 온실의 작은 옥상에 꾸며진 공중정원이 꼭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올라오는 길에 본 1, 2층과 달리 3층은 식당같다기보다는 좀 더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였다. 나무로 된 마룻바닥. 전체적으로 브라운 계열인 심플한 디자인의 가구와 벽지. 아무리 봐도 회의실이라기보단 그냥 개인 공간 같은데.



“여기서 사세요?”

“처음 만난 사람한테 하는 질문치고는 꽤나 과감한걸.”



쳇. 누가 들으면 자기는 나한테 아는 척 한 줄 알겠네. 먼저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말문을 연 게 누군데. 하지만 습관은 어쩔 수 없는지 무의식적으로 쭈구리 오여주가 튀어나왔다. 



“··· 오랜만이에요. 박지민 씨.”

“그치. 매일 보다가. 오랜만이지.”



“어··· 완전 놀랐어요. 여기서 뵐 거라곤 상상도 못해서요. 어떻게 된 거예요? 분명···,”

“하룻밤 보내고 나서 감쪽같이 사라진 누구누구 덕에 나도 놀랐어. 밤새 나랑 있던 게 신데렐라였던 건가 싶더라니까.”



그런 얘기를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한다고? 사람 민망하게 시리. 바짝 열이 오른 얼굴은 금세 뜨거워졌다. 미묘한 긴장감에 눈 한 번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도 박지민은 조금의 동요 없이 팔짱을 낀 채 계속해서 집요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 그날은···,”

“···.”



“우리 둘 다 꽤 취해있었으니까··· 아무래도 실수,”

“실 수-?”



눈동자만 살짝 올려서 확인한 박지민의 눈매는 역삼각형 꼴로 변해있었다. 나도 참 뻔뻔하지. 머릿속에서 초고화질로 생생하게 펼쳐지는 그날 밤의 기억으로 인해 비행기에서 내내 정신 못 차릴 정도의 거대한 후폭풍을 겪은 주제에 눈 한번 깜박 안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니. 역시 오여주 사회인 짬밥은 무시 못 한다 이거야. 그치만 실수라고 하는 건 좀 심했나? 맞네, 아무리 그래도 실수는 좀 심했다. 절대 박지민한테 쫄아서 말을 바꾸는 게 아니야. 



“-는 아닌 것 같고요.”



인간 오여주에게 묻는다. 왜 아직까지도 놈의 앞에서 비굴함을 떨쳐내지 못하는가. 



“그래서.”

“그러니까 그날은··· 서로가 의식이 흐릿해진 상황에서 이뤄진 작은 사고랄까,”



“아하. 사 고-?”



순식간에 표정을 싸악- 굳힌 박지민이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젠장. 젠장. 젠장. 오여주. 또 수습해. 빨리 수습해.



“-라고 단정 짓기엔 제 정신이 상당히 온전했던 것 같은데요? 아하하··· 나 진짜 뭐라는 거지···. 제 말은··· 쌍방 동의하에 일어난 아주 쿨한 원나잇이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네요. 네.”



이게 말이야 방구야. 내 입술에서 실시간으로 지껄여지는 망발을 이젠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박지민은 별 대꾸 없이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척 보기에도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속으로 신명 나게 비웃고 있겠지. 



“흠, 쿨한 원나잇이라···. 의외네, 오여주. 전혀 그렇게 안 생겨서는 마인드가 상당히 개방적이야.”

“어휴, 그럼요 그럼요. 전 그 누구보다 개방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에요. 그날 일? 저한테는 전-혀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이거죠. 그러니까 그날 아침에도 딱히 별말 없이 간 거고요. 자, 모든 궁금증이 풀리셨다면 이제 회의를 시작해 보실까요?”



양손을 펼치고 어깨를 으쓱하며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천연덕스러운 몸짓을 선보였으나 얼굴의 열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다면 박지민의 시야에서 내 두 볼은 아직도 새빨간 사과처럼 물들어 있겠지. 뻔할 뻔 자였다. 고로, 그가 내 말을 믿을 거라는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다. 뭐가 어떻게 됐든,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나의 호들갑스러운 물음에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박지민은 이내 건방진 썩소와 함께 턱을 살짝 치켜들며 내게로 다가왔다. 불현듯 약 한 달 전, 그의 저택 방 한편에서 구석으로 몰리던 기억의 끄트머리가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다. 그에게 밀려 한발 두발 뒷걸음질 치다가 얼마 가지 못하고 소파에 발이 걸렸다. 당시 그의 방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공간에서 도망치자니 그럴 수밖에. 종이 인형처럼 휘청대던 몸은 이미 소파 위로 넘어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타이밍 좋게 내 허리를 감아온 박지민의 단단한 팔이 아니었더라면. 


박지민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얼굴 위쪽에서 느껴지던 그의 숨결이 조금씩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호흡을 늦췄다. 이건 아니지 않나···?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의식과 반하게 심장은 쿵쿵 뛰었다. 동시에 불이 붙은 듯 두 볼이 뜨거워졌다. 이 남자에게 내 심장 소리가 들릴까 부끄러웠다. 고개를 푹 숙이며 두 손으로 가슴팍을 밀어내자 박지민은 힘을 준 내 손이 허무해질 정도로 쉽게 떨어져 나갔다.



“오 대리님.”

"네······.”



“박지민이라는 존재를 알게 된 사람들이 내게 빠지는 건 언제나 불가피한 일이지만, 그래도 너무 깊이 빠지진 마요.”

“······.”



“혼자서.”



예전이었다면 마음속으로 마가린 대가리, 정화가 필요한 악마의 주둥이라며 이런저런 욕지기를 퍼부어 댔을 텐데 지금은 그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나쁜 짓을 하다 현장에서 빼도 박도 못하게 걸린 것 같은 기분에 눈을 내리깔고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부끄러움에 박지민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 



“··· 죄송한데요, 회의는 역시 팀장님이 오셨을 때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전 그만 내려가 볼게요.”



시선을 발끝에 고정하고서 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시크하게 몸을 돌려 이곳에서 빠져나가려 했건만, 이번에도 나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발을 떼기도 전에 내 손목을 틀어쥔 박지민으로 인해서. 웃음기가 가신 음성으로 그가 나직이 말했다. 



“확인 한번만 해보고.”

“뭘···.”



주머니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꺼낸 박지민은 한 손으로는 여전히 내 손목을 단단히 쥐고서 나머지 손으로 폰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내 주머니에서 흘러나오는 진동 소리를 확인한 박지민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는가 싶더니 손목이 자유로워졌다.



"나한테 준 번호. 맞는 번호였구나."

"···."



“그럼 또 봐요.”

“···.”



“아주 솔직하고 개방적인 오여주 대리님.”



만날 때마다 롤러코스터를 오르내리는 듯 오락가락한 기분을 겪어야 한다면 별로 또 보고 싶진 않습니다만. 이런 게 쌓이고 쌓여서 화병이 나는 거라고요. 그에게 또다시 손목을 붙잡히게 될까 봐 어깨 아래로 늘어진 가방끈을 단단히 붙들며 1층으로 서둘러 내려갔다.
















BGM OFF
















15



PJ 백화점의 본점. 거대한 금빛 건물의 중앙현관 앞으로 잿빛 고급 세단 한 대가 부드럽게 속력을 줄이며 들어왔다. 깔끔한 정장 차림의 주차 요원들이 자연스럽게 뒷좌석 문을 열었다. 바짝 날이 선 얼굴로 차에서 내린 지민은 조금도 주저 없이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먼지 한톨 없는 실내가 눈이 부시도록 번쩍거렸다. 접근이 제한된 VVIP용 엘리베이터 근처는 한산했다.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까지도 이렇다 할 변화를 보이지 않던 그의 얼굴이 미세하게 구겨진 것은 멀지 않은 곳에서 보이는 누군가의 실루엣 때문이었다. 닫힘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실외가 훤히 보이는 투명 상자는 오롯이 그의 차지가 되었다. 


아주 잠시일 뿐이라도 갑갑한 머릿속을 가라앉힐 시간이 절실했다. 이곳에 힘든 걸음을 할 때마다 지민이 온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스트레스는 쉽게 익숙해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기에. 바뀌는 층수를 확인하며 그는 의식과도 같이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단 하나의 오피스가 위치한 20층에 다다랐다. 엘리베이터 앞 복도부터 백화점 그 어느 명품관보다도 화려하게 장식되어있는 20층. 오랜만에 찾아온 곳임에도 그의 낡은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장소와 정확히 일치했다.



지민이 거대한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비서실장 배지를 단 여직원 하나가 상기된 얼굴로 데스크 뒤쪽에서 걸어 나왔다. 



“안에 알리겠습니다.”



그는 이렇다 할 대꾸 없이 문가에 가 섰으나, 곧바로 이어진 비서의 말은 그의 신경을 거스르기에 충분했다.



“사장님, 아드님 오셨습니다.”



조심스럽게 지민의 옆으로 다가간 여비서가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문이 열렸음에도 들어갈 생각이 없는지 지민은 문고리를 잡은 여자의 얼굴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영문을 모르는 비서실장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올랐다. 초조함에 말라버린 입술을 간헐적으로 적시며 자리를 지키는 비서실장을 가만히 응시하던 지민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비서님은 가보셔도 됩니다.”

“아, 네. 들어가신 다음에···,”



“아뇨. 집에 가시라는 겁니다.”

“네? 그게 무슨,”



“더는 여기로 출근할 필요 없습니다. 위로금은 위에서 섭섭지 않게 챙겨줄 테니 걱정 마시고. 부당 해고라고 생각하면 고소해요. 피고소인은 PJ 백화점 진분홍 사장으로.”



얼빠진 얼굴의 여자를 뒤로하고서 그는 열린 문이 아닌 반대쪽 문을 열고서 방에 들어섰다. 방안을 가득 채운 석류 향이 후각을 찔러오자 지민의 미간에 다시금 미세한 주름이 졌다. 핑크를 테마로 꾸며진 듯한 거대한 오피스. 한 여인이 방 중앙에 위치한 물소 가죽 소파의 상석에 앉아 우아하게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왔구나.”

“잘 계셨어요.”



“다음 주까지 PJ 식품 사장 자리 비워둘 테니까 들어와.”

“오랜만에 아들 얼굴 보고 할 이야기가 그런 것뿐이에요?"



“1년 만에 귀국해서 본가랑 회사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하는 아들이 있는데, 이런 엄마도 있어야지.”

“못 뵌 동안 많이 유해지신 것도 같고.”



연한 웃음기가 묻어있는 부드러운 표정의 지민과 달리 여인의 얼굴은 작은 미소한 점 없이 싸늘했다. 



“잘못 본 것 같구나.”

“···.”



“그래도 정혼자라고, 세리 얘기 듣고서 바로 한국 들어온 걸 보면 드디어 정신을 차린 모양이지. 이제라도 정신 돌아왔으면 주방에서 깔짝대면서 시간 버리지 말고 더 늦기 전에 정리해. 그나마 있는 네임밸류까지 잃어버리기 전에 마무리하고 회사로 들어오란 말이야.”

“오래전에 집에서 나갈 때 이미 말씀드린 걸로 아는데요. 쓸데없는 쟁탈전에 껴서 시간 버리고 싶지 않다고.”



“너한테 권유 따위 하자고 부른 것 같니? 이건 지시고 명령이야. 네 조부와 외조부가 함께 세운 회사를 본 핏줄도 아닌 것들한테 도둑맞을 생각이야? 네 친할아버지 잘못되시면 그 자리 차지할 자격이 있는 것도, 그 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것도 너야. 쟁탈전 같은 건 필요도 없지. 장손이면 그만한 책임이 있는 걸 왜 몰라."

"······."



"유유자적한 시간은 그동안 버린 걸로도 충분해. 네 어린 날의 치기와 일탈을 눈감아 준 것도 나. 너 편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그 같잖은 요리 공부할 수 있게 해준 것도 나라는 걸 명심해야지.”

“하하. 우리 진 여사님은 그때도 끝까지 말리셨으면서 그런다. 몰래 빠져나가지 않았으면 난 아직도 집안에 감금된 상태일 텐데.”



여인은 얼음장과 같은 냉기가 흐르는 시선을 자신의 아들에게 고정했다.



똑똑- 



경쾌한 노크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사이로 지민이 불과 몇 분 전 엘리베이터 앞에서 봤던 인물이 걸어들어왔다. 또각. 또각.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지민이 연신 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런 그의 옆으로 세련된 단발머리의 여자 하나가 다가와 앉았다. 



지민과 세리의 정혼 관계는 두 사람이 만나기도 전인 다섯 살 이전부터 이어져 왔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 집안일 것. 진 여사가 지민의 짝을 찾을 때 일 순위로 놓은 조건이었다. 친가는 자동차 산업으로는 국내에서 따라올 기업이 없는 대기업. 외가는 오랜 기간 국회에 몸을 담고 있는 정치계의 큰손. 세리는 그야말로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진 집안의 외동딸이었다. 진 여사의 고민은 지민 뿐이었다. 20년이 넘도록 이어지는 정혼 관계를 달갑지 않게 여기며 일방적인 관계로 만들어버리는 철없는 투정이 늘 그녀의 신경을 거슬렀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서 지민을 티 안 나게 곁눈질하던 세리가 유쾌함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오자마자 비서실장은 왜 해고한 거야?”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두 분 모쪼록 좋은 시간 보내세요.”



세리가 제 옆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지민은 그녀에게 찰나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진 여사가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찻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당장 앉아.”

“어렵겠는데요. 제 심미안을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나는 공간에서 오래는 못 있거든요.”



지민의 얼굴에 짧게 떠오른 서늘함은 세리를 향해있었다. 그것을 세리 또한 모르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에게 없는 사람 취급을 받은 순간부터 세리의 속은 분노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진 여사의 날카로운 눈총에도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딛던 지민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세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희 집안이 원하는 건 내 껍데기가 아닐 텐데 아직까지 나한테서 미련을 못 버리는 이유가 뭐지? 혹여나 내가 경영에 뛰어들지 않을까 기대치를 높이고 있다면 접어둬. 그럴 일 없을 테니까. ”

"···."



“그리고, 집 나갈 때 재산분할 얘기 다 끝난 건 너도 모르지 않겠지. 확실히 알아둬. 내 몫이었던 주식, 부동산, 저택들. 이제 전부 진 여사님 명의로 되어있거든. 그것들이 탐난다면 선택지는 하나야. 우리 진 여사님이랑 결혼하던가.”

"지민이 너 정말···."

"제대로 연 끊으려면 진 회장님이 네 앞으로 남겨주신 토지랑 별장까지 깔끔하게 포기하고 떨어져. 그럴 자신 없으면 기회 줄 때 들어와서 일부터 배워."



"그건 외할아버지가 제 앞으로 남겨주신 어머니 관할 밖 재산이에요. 제가 그걸 포기할 이유는 없죠."



“지민아, 오늘 너한테 말해주려고 부르신 거야. 사실,”

“세리야, 거기까지. 넌 나가.”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단조로운 음성에 지민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문을 향해 나아갔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구나. 어릴 때 넌 그리 어려운 아들이 아니었는데.”

"글쎄요, 그렇다면 앞으로도 알게 되시는 일은 없지 않을까요."



지민이 문고리를 돌리며 덧붙였다.



“어머닌 제게 늘 어려운 존재였어요. 이제야 비로소 평등해진 것뿐이죠.”








.


.


.








“대표님, Rêve로 가시겠습니까?”



운전석에 앉아 백미러에 비친 지민의 모습을 확인하던 이 비서가 물었다. 누가 봐도 저조한 기색으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지민이 푹신한 시트에 뒷머리를 묻으며 답했다.



“아니.”

“···.”



“이번엔 또 얼마나 붙은 거야.”

“지난번이랑 비슷한 것 같습니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들어올 때마다 감시원을 한 부대씩 갖다 붙이면서 한국에 들어오라고 그리 성화시니.”

“···.”



“오피스텔에도 진을 치고 있겠지. Rêve는 물론이고.”

“그렇습니다.”



“우선 최대한 따돌려 봐. 그동안 어디로 갈지 생각 좀 해보게.”

“알겠습니다.”



이 비서가 엑셀에 발을 올리며 차의 속력을 높였다. 차는 엔진 소음하나 없이 아스팔트 길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갔다.
















16



다음날 회사로 출근하자마자 현장에 절대 나가지 않겠다 못을 박는 내게 김남준은 이유를 말하기 전까지 변동 사항은 없을 거라며 대화를 단절시켰다. 이러다가 정식 미팅 날에도 끌려갈 각인데. 불행 중 다행으로 레브 측에서는 어떤 영문에서인지 벌써 삼 일째 미팅 날짜를 미루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들이 너무 손해 보는 장사라서 미리 손을 떼려는 건가? 그렇다면 조금 짜증 나긴 하지만 내가 봐주겠다 이거야. 계속 마음 졸이며 구미호 같은 남자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느니 차라리 기획 2팀에 찾아가서 두 팔 걷고 도와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며칠간 레브와 레브의 메뉴, 웹상에 공개되어 있는 셰프들의 프로필, 거기다가 그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개발했다는 스페셜 메뉴까지 빠삭하게 공부하며 회사에서의 시간을 보냈다. 무료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으나 어쩌겠는가. 첫날 갔을 때 작은 성과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그날 한 거라곤 당황해서 어버버거리다 결국 혼자서 불타오르던 것 뿐이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날 본 셰프는 박지민을 제외하곤 수 셰프 두 명에 왜 주방보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고스펙을 가진 주방보조 하나였다. 하지만 두 명이 더 있다고 들었는데···? 한창 궁금해하고 있던 차에 함께 갔던 팀원 두 명이 손을 들었다. 



"안 그래도 보조 셰프 두 분 정보는 온라인에 너무 없길래 물어봤어요. 자기 메뉴 올리기 전까진 프로필을 공개하지 않는 게 원칙이라나. 언제든 다른 곳으로 갈 수 있게요. 서양 쪽 보조 셰프인 한 분은 그날 안쪽에서 요리 재료 손질하고 있었는데, 원래 시끄럽게 몰려다니면서 인터뷰하고 이런 걸 안 좋아한대요. 그리고 또 중화요리 실력자라는 또 다른 보조 셰프는 중국에 나가 있다나 봐요."



일주일 내내 레브에 관한 얘기만 하고 있으니 멀미가 나올 것 같았다. 일에 도무지 진전이 없어서 그런 게 더 큰 것 같지만. 근데 레브에서 한번 먹어보고 싶다. 박지민이 힘 빼고 만들어준 밥도 얼마나 맛있었어. 진짜 각 잡고 해준 요리는 더 맛있겠지. 배도 고프고, 퇴근 시간이고, 목요일이고. 에잇. 퇴근이나 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남과 동시에 팀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여러분,"



각자 자리를 정리하던 팀원들의 시선이 반듯하게 웃고 있는 김남준에게로 향했다. 



"내일이 불금인데 오랜만에 배에 기름칠 좀 합시다."



누가 식품 사업 종사자들 아니랄까 봐. 카드를 흔들며 멋들어진 미소를 날리는 팀장 김남준을 본 팀원들은 하나같이 책상을 두들기며 열렬히 환호했다. 아주 굶주린 짐승들이 따로 없었다. 워우워우어- 팀장님 짱-! 물론 나도 포함. 내일이 불금인 것과 배에 기름칠을 하는 것에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좋은 게 좋은 거잖아? 가벼운 마음으로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서 일어나는데 핸드폰이 연속으로 짧게 울렸다. 각기 다른 사람에게서 온 세 통의 문자. 이런 거지 같은 타이밍이 또 있을까. 



[ 오늘 시간 되지. 퇴근하고 얘기 좀 해 ]



[ 방금 최서방한테 연락 왔다. 상견례 날짜 받아왔다며? 싸우면서 감정도 단단해진다고 그날 이후로 속전속결이네 ^^ 그러니까 왜 결혼 안 한다고 동네방네 울어쌌어. 올해 다 가기 전에 하게 돼서 다행이다! ]



[ 지금 너네 빌라 앞

 올 때까지 기다릴게 ]



이건 또 뭔 놈의 지랄맞은 조합일까. 빡치게. 삽시간에 어두워진 내 얼굴을 본 건지 김남준이 물었다. 



"오 대리님, 괜찮으세요?"

"네? 아, 그럼요. 괜찮고말고요."



신경질적인 손길로 짧은 머리를 빗어 내렸다. 



"근데 어떡하죠. 난 오늘 회식 빠져야겠다."

"실화예요 대리님? 오 대리님 빠지면 누가 분위기 메이커 해."



"몰랐어? 인호 씨가 내 후임이잖아. 사실 나보다 한 수 위라니까."



내 우스갯소리에 마음이 놓인다는 표정으로 "가려면 날 밟고 가요"하며 내 소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팀원들을 온 힘을 다해 떨쳐내고 문 쪽으로 향했다. 



"다들 미안요. 나 없이도 즐겁게 놀아요."
















추천 BGM | 식샤를 합시다 2 OST - Behind
















언제나처럼 집 앞 골목 근처에 있는 공원 앞에 차를 세웠다. 운전석에서 내려 집 쪽으로 걸어가는 내내 내가 어떤 말을 듣게 될지, 또 어떤 말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빌라 입구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익숙한 인영과 바닥에 놓인 커다란 쇼핑백 여러 개가 시야에 들어왔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피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연락이 오면 만나지 말고 자신에게 먼저 알리라던 수영이의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몇 년간 연락 한번 없다가 느닷없이 찾아온 걸 보면 내가 알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헛웃음이 나왔다. 이미 다 끝난 일인데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떤가.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들었는지 화들짝 놀라며 장초를 시멘트 바닥에 떨군 인형이는 얇은 굽으로 불씨를 몇 번이나 지르밟았다. 



"여주야."

"······ 어쩐 일이야."



"오랜만에 보고 싶어서."

"······."



수영이한테서 네 얘기 듣기 전까진 네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도 몰랐어. 이렇게 갑자기 날 찾아온 이유가 뭐야. 할 말은 많은데 꿀 먹은 벙어리마냥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훗. 우리 벌써 몇 년 만이지. 내가 2학년 때 유학을 갔으니까······ 한 8년 정도 됐나?"



여전히 늘씬한 몸매와 인형 같은 얼굴. 도자기처럼 뽀얀 그 애의 얼굴에 한 가지 흠이 있다면 화장으로 가렸음에도 티가 나는 눈가의 푸르뎅뎅한 멍이었다. 쯔쯧. 수영이한테 심하게 맞았나 보구나. 



"그 정도 됐겠네."

"섭섭하다. 난 되게 많이 보고 싶었는데 넌 왜 그렇게 싱거운 반응이야."



수영이가 잘못 안 건 아닐까? 대학 때와 다를 바 없이 동생이 너무 예뻐 어쩔 줄 모르는 언니라도 된 것처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인형이의 모습이 친구의 남자를 빼앗은 인간의 태연한 연기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수영이가 잘못 알았는지도 몰라. 본인한테 확인해 봐야겠지···? 그러나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학 새내기 시절 신나게 이곳저곳 몰려다니며 맛집 탐방을 하던 것, 시험 기간에 과방에서 함께 시켜 먹던 야식. 셋이 모였다 하면 이 세상에 무서울 게 없던 즐거웠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아직까지 기억 속에 생생히 숨 쉬고 있는 인형이와의 좋은 추억들이 나를 더 망설이게 하는지도 모른다. 



"··· 오랜만이잖아."

"우리가 이렇게 어색해질 줄 상상이나 했겠어? 그래도 오랜만에 보니까 좋다. 그치."



커다란 눈을 찡긋거리던 인형이가 예쁘게 웃으며 팔짱을 껴왔다. 말하려면 지금 해야 돼, 오여주. 그치만 어떤 식으로? 



고등학교 때부터 나와 절친하던 수영이는 온유를 원하든 원치 않든 —수영이는 온유를 볼 때마다 질색하며 내게 말하곤 했다. "그 새끼 무표정일 때도 웃는 상인게 기분이 존나 더러워"— 잘 알고 있었지만, 인형이에게는 온유를 소개해 줄 기회가 전혀 없었기에 둘은 대학 시절, 서로를 알지 못했다. 학부생 시절에도 실험실과 도서관에만 짱박혀 있었던 탓에 첫 두 해 동안은 여자친구인 나조차 캠퍼스에서 얼굴을 보기 힘들었던 온유와, '학교에 오는 이유가 혹시 난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게 착 달라붙어 있던 인형이의 동선이 겹쳤을 리 없고. 그럼 두 사람이 만나기 시작한 건 인형이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라는 건데. 



골목을 빠져나가는 내내 내 팔을 꼭 붙들고서 옆에서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인형이의 말에 전혀 집중할 수가 없을 정도로 나는 혼자서 의미 없는 추리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밥 먹었어?"

"아직."



"웬일이야, 여태 밥을 안 먹고? 밥 제때 안 먹으면 분노 게이지 올라가는 애가. 그럼 일단 뭐 좀 먹고 쇼핑 좀 하자. 영화까지 보면 완전 좋고. 너무 늦,"

"인형아. 그러지 말고 우리 저기 가볼래?"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길 건너편에 보이는 신장개업한 카페 & 베이커리를 가리키며 너와 밥을 먹고 싶은 기분은 도저히 아니라는 것을 넌지시 어필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순수한 기쁨이 어려있는 인형이의 미소였다.










*










"겨울이니까 넌 모카 라떼 마실 거지?"

"어? 어···."



"레귤러 아메리카노 하나랑 모카 라떼 하나요. 모카 라떼 캐러멜 시럽 추가에 휘핑크림 가득 뿌려주시고요. 아, 피넛 페스츄리 하나 시킬까? 아님 레몬 무스 케이크?"

"일단 음료 받고 정하자, 그건."

"그래 그럼."



진동벨을 가지고 비어있는 안쪽 자리로 이동하는 인형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짧지 않은 시간 떨어져 있던 인형이의 모습이 대학 시절 내 취향을 A부터 Z까지 줄줄 꾀고 있던 그 모습과 겹쳐 보여 기분이 이상했다. 맞은편에 앉아 꽃받침을 하고서 날 빤히 바라보던 인형이가 흐뭇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주 넌 여전히 예쁘네. 기집애. 볼따구까지 어쩜 그대로냐. 완전 초딩같이 생겨가지구. 나만 나이 먹지, 나만."

"너한테 그런 말 들어봤자 하나도 안 기쁘네요. 아까 너 서 있는데 빌라 앞이 다 환하더라 야."



진동벨이 울릴 때까지 우린 한참을 서로의 근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5개월 전쯤 한국에 들어와 잉여롭게 지내고 있다는 인형이는 뭐가 그리 궁금한지 내 일상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회사 일이 얼마나 잣 같은지부터, 우리도 이제 삼십 대라는 게 믿어지냐, 대학 동기들이랑 연락은 하고 지내냐는 둥, 여러 주제가 오고 갔으나 서로의 연애사나 수영이의 안부는 단 한 번도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인형이도 민감한 주제를 피하기 위해 수면 아래에서 열심히 도망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온유가 새로 만난다는 여자가 실은 인형이라던 수영이의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여기서 더 바뀌는 것은 없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인형이를 피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고, 막상 만나 추억 놀음을 해보니 내 결정이 옳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이는 뭐 이런 호구가 다 있냐며 내 뒤통수를 후려칠지도 모르겠지만, 지난 일에 열 받으면 뭐해. 기차는 이미 떠났는데. 스트레스 받아서 피부만 상하겠지.



자기가 한꺼번에 받아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난 인형이는 곧 음료 두 잔을 양손에 들고 돌아왔다. "아- 따뜻해. 조오타,"하며 양손으로 자신의 컵을 감싸는 인형을 보니 웃음이 터졌다. 생긴 것과 다르게 말투나 행동이 털털해 아저씨 같다며 매일같이 놀리던 것이 생각나 키득거리던 난 문득 시야에 들어온 그 애의 손을 보고 자연스럽게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왼손 약지에 낀 다이아 반지. 생긴 건 누구보다 화려하게 생겼으면서 걸리적거린다며 모든 종류의 액세서리를 질색하던 인형이었기에 상징성을 가진 듯한 반지는 내 안에서 또다시 이유 없는 불안감을 키웠다. 상관없잖아. 어떤 의미건. 마음 접었잖아. 떠난 기차라며.



"왜 그래. 배고파?"

"아니, 반지··· 예뻐서."



그래? 인형이가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제 손을 확인했다.



"그냥 싸구려야. 선물 받은 지 얼마 안 돼서 잠깐 끼고 다니다 버리려고."

"커플링 아냐?"



아- 인형이가 샐쭉 웃으며 즐겁다는 듯 말했다. 



"좀 불편한 얘기긴 한데, 내 말 끝까지 들어봐 줄래?"

"···."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인형이의 입술이 열렸다.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이 슬로모션으로 움직였다. 인형이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만 보고 그 애가 무슨 말을 꺼낼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이거 준 사람,"

"···."



"최온유야."

"···."



두 눈이 천천히 감겼다 떠졌다. 멍청하다 진짜. 이 거지 같은 상황에 대해선 화도 나지 않았다. 자기 상황도 모르고 센척하던 나 자신이 한심해서 실소가 터져 나왔을 뿐. 맞은편에 앉아있는 인형이의 표정은 변함없이 밝았다. 난 왜 아직도 여기에 앉아있는 거지. 허탈한 웃음을 흘리는 나를 보며 인형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알고 있던 거 아니었어? 박수영이 다 말했을 거 아냐."

"맞아. 수영이가 말해줬어."



"···."

"근데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지."



"여주야,"

"내가 걔랑 만나는 거···, 넌 몰랐지? 모르고 만난 거잖아."



자존심도 없나 봐. 진짜 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쓸데없는 질문은 걸러지지가 않았다. 이것도 병인가?



"몰랐으면 내가 걜 왜 만나. 알고 만난 거야."

"······ 너무 당당하게 나오니까 뭐라 할 수도 없네. 그래, 너 대단하다. 내가 완전히 떨어져 줄 테니까, 아니, 이미 떨어져 나왔으니까, 둘이 행복해. 난 일어날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내 팔을 붙잡은 인형이가 나를 다시 앉혔다. 무슨 수작이야 이건 또. 줄곧 태연한척하던 가면이 벗겨지고 분노만 남아 떨리는 눈동자로 인형이를 노려보았다.



"여주야, 나 독신주의야. 알잖아."

"··· 그게 뭐 어떻다는 거야."



"너 그 남자랑 오래 사귄 거 알아. 지금이야 얼마 안 됐으니까 내가 원망스럽고 기분도 많이 상하겠지. 그래도 내가 거머리 같은 놈 떼준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될까?"



뭐?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골이 띵- 하고 울렸다. 네가 뭘 해?



"하. 뭐라고 했어, 지금?"

"최온유, 너랑 안 어울려. 오랜만에 만난 동기 애들이 너 결혼할 사람 있다 그러는 거 듣고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어.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너무 아깝길래 시험해본 거야. 너랑 함께할만한 사람인지 내 선에서 확인해 보려고 했어. 내가 조금 건드렸더니 바로 넘어오더라. 그럼 실격 맞잖아."



뿌듯한 얼굴로 말을 마친 인형이가 살짝 미소 지었다. 미쳤구나 김인형.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어. 도대체 얘는 왜 이러는 거야?



"야. 김인형."

"···."



"대체 왜,"

"···."



"그걸 도대체 왜 네가 판단하는데···?"

"난, 네가 그 정도로 진심일 줄은 몰랐어. 그리고 그런 놈한테 진심이면 안 된다고 생각해."



미친 사람처럼 터져 나온 실소를 멈출 수가 없었다. 올해가 30일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 아홉수 자유이용권을 끊어준 건지 아주 제대로 맛이 갔구나, 내 인생. 



"처음엔 너한테서 떨어뜨려 놓으려던 게 다였어. 계속 질척대던 건 그 남자야. 며칠 잠수 탔더니 12년 된 여자친구랑도 헤어졌다고 하는데, 그때까진 나도 네가 그 남자랑 그렇게 오래 만났는지 몰랐어."



더 이상 이 넌센스를 들을 이유가 있을까. 대답은 '아니'였다. 나 자신이 초라하다 못해 경멸스러웠다. 오랜 시간 예쁘게 함께했다고 믿었던 우리의 끝. 그 뒤에 이런 이야기들이 있었구나.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걸. 대체 뭐가 '내 결정이 옳을지도 모르겠다'야. 뼈저리게 후회했다. 쿨한척하며 인형이를 만나러 온 것을. 혼자 감당할 자신도 없으면서 일의 모든 전말을 알고 싶어 했던 것을. 인형이의 손을 뿌리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주야. 인형이가 옆에 내려놓았던 쇼핑백 더미를 들고 날 따라나섰다. 



"이거. 그동안 너 생각날 때마다 샀던 거야. 집까지 들어줄 테니까 일단 너 기분 좀 나아지면 다시 얘기하자."



얼굴에 떠오른 불쾌감을 더는 감추지 않았다. 싸늘한 시선을 그대로 받은 인형이는 고개를 돌렸지만 내 팔을 붙잡은 손을 풀지는 않았다. 



"널 위해서였어. 사과는 안 해."

"그런 사과, 필요 없어."



"네가 너무 힘들면··· 다시··· 보내줄 수도 있어. 여주야, 그러니까,"



나 미워하지 마. 인형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뱉어낸 뒷말은 들릴 듯 말 듯 허공으로 흩어졌다. 자기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라는 사람을 조각조각 부서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긴 한 걸까. 그 애의 손이 닿아 있는 팔에서 구더기가 기어 다니는 듯 불쾌감이 일었다. 그 손을 잡고 가까스로 털어냈다. 내 품에 안겨준 쇼핑백 더미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따라오지 마. 따라오면 다신 너 안 봐."



인형이는 더 이상 나를 붙잡지 않았다. 넋이 빠진 상태로 카페를 나섰다. 언성이 높아지지도, 험한 소리가 오고 가지도 않았다. 눈물 바람으로 악을 써대는 일도 없었다. 그렇지만 난, 괜찮지 않았다.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눈물만 나오지 않았을 뿐이지 심장이 이미 너덜너덜해진 느낌이었다. 이게 뭐야. 거지 같아. 진짜 미친 것 같아.


불현듯 회사에서 확인했던 메시지 중에 최온유의 문자도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엄마의 문자. 상견례 날짜라니, 무슨 말이야. 분명 최온유가 자기 살길 찾으려고 아무 말이나 지껄인 거겠지. 최온유를 향한 내 감정에 분노 이외의 감정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분노보다 더 큰 배신감이 생겼다. 결국 그게 그건가. 



완벽하다 믿었던 우리의 관계가 늘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는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 비참했다. 인형이도 정상은 아니지만 그 애가 아니었더라도 우린 결국 어떤 식으로든 끝을 맞이했겠지. 최온유는 물론이고 이제껏 그와 함께한 시간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미련 속에 살던 나 자신마저 증오스럽게 느껴졌다. 더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잔뜩 고조된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핸드폰을 들었다.
















별 헤는 밤 복사나무 꽃 아래서.

노을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