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아일렌이 황녀궁 앞에서 기다린 지 몇 분 정도 지났을까. 그녀에게 시녀 한 명이 찾아와 그녀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아일렌은 시녀를 따라 황녀의 집무실로 향하며 지금이 과거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피 웅덩이로 더럽혀졌던 복도는 깨끗하기 그지없었고, 그녀가 오러로 박살을 냈던 문 역시도 멀쩡했다. 아일렌은 황녀를 죽인 자리를 지나쳐 더 안쪽으로 들어가며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 기분 이상하네.”

 

그녀가 마지막으로 황녀 궁을 방문했을 때, 시녀를 비롯한 고용인들은 그녀를 보고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개중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녀의 검에 생을 마감한 이들도 있었다. 기사들은 도망가지 않고 그녀를 막아섰지만, 아일렌은 그들 역시도 쉽게 죽여버렸다. 그런데 그녀가 죽인 이들이 전부 살아있었다. 게다가 아무도 그녀를 막아서지 않았다. 이곳은 과거이고 지금 그녀는 황녀에게 적이 아니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 변화에 아일렌은 싱숭생숭한 기분을 느꼈다.

 

“엘케니스 전하, 아일렌 경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게.”

 

어느새 집무실 앞에 도착한 시녀가 발걸음을 멈추고 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녀가 문을 열고 아일렌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아일렌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 황녀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어느 때보다 절도 있고 단정하게. 마치 주군에게 하듯이. 그녀의 인사를 본 엘케니스는 옅은 미소를 띠었다. 아일렌의 성격이 성격이라 자신이 아닌 1황자를 선택하리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제 예상이 틀린 모양이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내 제안에 답을 하러 왔다지.”

 

아일렌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황녀는 마지막으로 본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5년 전이라 그런지 좀 더 앳되고,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아일렌은 순간 기억 속 자신이 황녀의 심장에 검을 내리꽂을 때가 생각나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다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황녀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 삶을 바꾸기로 했다. 타인이 아닌, 그녀의 손으로 직접.

 

“네. 저는 엘케니스 황녀 전하의 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저를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이의 곁에서, 명예를 따르며 정의를 수호하는 기사다운 기사로 살고 싶습니다.”

 

이 말은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을 것이다. 이전의 삶에서 1황자의 한마디가 그녀의 삶을 바꿔놓았듯 이 한마디도 그녀의 삶을 바꿀 것이다. 하지만 이전과는 명백히 달랐다. 선택에 얹어진 마음가짐의 무게도, 그녀가 따르기로 한 가치도 전부. 이상에 한없이 가까운 말이었지만 아일렌은 이 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녀의 말에 엘케니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기사다운 기사라니,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아일렌의 입에서 튀어나왔지만 그녀의 각오가 싫지는 않았다.

 

“지금…. 비웃는 겁니까?”

 

황녀가 크게 소리를 내어 웃자 아일렌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한없이 이상적인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설마 이렇게 크게 웃을 줄은 몰랐다. 아일렌은 불쾌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일그러진 그녀의 표정을 본 엘케니스가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몰라도, 아일렌이 자신을 따라준다면 좋은 일이었다. 정식기사가 되기도 전에 마스터가 된 천재라니. 그녀의 재능도 탐이 났지만 어린애 같을 정도로 이상적인 목표도 마음에 들었다. 본래 이루기 어려운 목표일수록 노력하는 보람이 생기는 법이니까.

 

“비웃는 것이 아니네. 단지 그대가 그런 말을 한 것이 예상 밖이라서 말이지. 기사다운 기사라. 말로는 쉬운 것 같아 보여도 어려울 걸세. 나 역시 명예나 정의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런 것들은 썩 효율적이지 못하거든. 그리고, 나는 적통일세. 내가 황제가 된다면 에스티오나 그대 같은 서출들은 설 자리가 부족해질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나?”

 

엘케니스의 마지막 말은 사실상 시험에 가까웠다. 엘케니스는 본인이 적통인 것을 내세우긴 했지만, 그것은 정치적인 장점일 뿐 사람을 혈통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황녀는 자신이 황제가 된다면 아일렌 같이 신분으로 차별받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할 생각이었다. 부모가 누구인지는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고작 신분 때문에 능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으니까.

 

“효율적이지 않은 삶을 한번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요. 그리고…. 혈통을 신경 쓰는 분이시다면 제게 기사가 되어달라 청하진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황녀의 말마따나 명예나 정의는 효율적이지 못했다. 아일렌은 효율이 곧 명예이며 정의로 이어진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친구를 내치고, 의문을 가지는 것을 포기할수록 그녀는 명예나 정의와는 멀어졌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다르게 살고 싶었다. 까짓거 비효율적이면 어떤가. 제대로 된 명예나 정의를 좇는 삶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일렌은 기억하고 있었다. 사라진 미래에서 엘케니스가 얼마나 끈질기게 그녀에게 기사가 되어달라 권유했는지. 지금 그녀가 수습기사인 시점에서는 단 한 번 권유했을 뿐이지만, 사라진 미래에서는 아일렌이 정식기사가 되어 1황자의 친위대에 들어간 이후로도 몇 번이나 그녀에게 소속을 바꾸지 않겠냐고 권했다. 그 당시의 자신은 그저 황녀를 짜증 난다고만 생각했지만 실은 알고 있었다. 황녀는 신분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 이였으며, 자신을 얕보지 않았다. 그러니 몇 번이나 스카우트 제안을 했던 것이겠지.

 

“그대는….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군.”

 

엘케니스는 묘한 확신이 담긴 아일렌의 대답에 살짝 놀랐다. 그녀를 시험하는 말이긴 했지만, 단 한 번 기사가 되어주지 않겠냐고 한 것으로 그런 생각을 하다니. 사실 아일렌은 눈치가 빠른 것이 아니라 그녀가 겪었던 대로 얘기한 것뿐이지만, 그 사실을 엘케니스가 알 리 없기에 엘케니스는 아일렌의 평가를 살짝 높게 조정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라니. 칭찬인지 욕인지 모호한 말이었지만 아일렌은 일단 떨떠름하게 감사하다며 얘기했다. 황녀는 어색한 그녀의 감사 인사에 피식 웃었다. 저번에 그녀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찾아갔을 때는 가시 돋친 태도를 보이기에 그녀가 제 밑으로 들어올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틀렸다는 것이 제법 재밌었다. 저번과 비교하면 누그러진 듯하면서도 때때로 성질을 드러내는 저 태도 역시도 엘케니스의 흥미를 자극했다.

 

“딱히 칭찬은 아니었네만. 뭐, 상관은 없겠지. 그렇다면 그대는 정식기사가 된 뒤에 바로 내 친위대에 들어오고 싶나?”

 

아일렌의 태도가 재밌다는 생각에 황녀는 굳이 칭찬이 아니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칭찬이 아니란 말에 그녀는 눈에 띄게 표정을 찌푸렸다가 겨우 표정을 가다듬었다. 황녀를 주군으로 모시기로 결정은 했지만, 여전히 황녀가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엘케니스를 적으로 두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성격이 안 맞는 것인지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제 자신의 주군이니 최대한 태도를 바르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일렌은 성질머리를 꾹꾹 억눌렀다.

 

“... 아뇨, 신임 기사가 바로 친위대에 들어가는 것은 반발이 있을 수도 있으니 경력을 쌓은 뒤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래, 어차피 그대가 친위대에 들어오고 싶다고 해도 순순히 들여보내 줄 생각은 없었네. 그대의 말마따나 반발이 있을 테니까. 그대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경험은 다른 문제이기도 하고. 그러니 1년만 다른 기사단에 있다가 오게.”

 

그럴 거면 왜 물어본 겁니까. 아일렌은 할 말을 잃고 잠시 침묵했다. 아일렌이 1황자를 모실 때에는 다른 기사단에 속하지 않고 정식기사가 되자마자 바로 1황자의 친위대 소속이 되었다. 비리니 뭐니, 시비를 걸어오는 놈들이 있으면 실력으로 깨부쉈다. 그럼 보통 조용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괜한 싸움으로 평판을 떨어트리고 싶지도 않았고, 기사다운 경험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친위대는 기사이긴 하나 황족 개개인의 사병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으니까.

 

그런 아일렌의 마음을 모르는 황녀는 그저 떨떠름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작게 웃었다. 본래 성격이 좋지 않다는 말을 종종 듣긴 해도 장난기가 많은 성격은 아니나, 이 기사의 반응이 제법 흥미로웠다. 가시를 삐죽 들이댈 것 같다가도 화를 억지로 억누르고는 하니 재미없을 수가 있나. 황녀는 올라간 입가를 매만지며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경력만 있었어도 바로 자신의 친위대에 집어넣었겠지만, 아쉽게도 아일렌은 스물하나밖에 되지 않았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한들 햇병아리 신입 기사에게는 현장 경험이 필요했다.

 

“그럼, 그대는 어디에 들어가고 싶나? 미래의 내 호위를 위해 소속 정도는 마음대로 조정해줄 수 있네. 원하는 곳이 있으면 말해보게. 그대의 실력이면 어느 기사단이든 거절하지 않을 것 같긴 하지만.”

 

황실에는 기사단이 여러 개 있었다. 소수 인원으로 이루어진 각 황족의 친위대 여섯, 그리고 세 개의 기사단. 각 기사단은 규모도 맡은 임무도 제각기 달랐다. 친위대는 황족 개개인의 사병과 비슷한 것이 특징이었다. 주군이 내리는 명령만을 따르는 이들이 친위대 소속 기사들이었고, 아일렌은 1황자의 친위대장이었다. 하지만 아일렌은 1황자의 친위대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미 갈 곳을 정해두었다.

 

“저는 3기사단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제 3기사단은 가장 수가 많았지만, 가장 꺼리는 기사단이기도 했다. 각각 1기사단은 황궁을, 2기사단은 수도를, 3기사단은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인원수도 수호하는 단위만큼 차이가 있었다. 황족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친위대를 제외하면 각 기사단에는 병력의 차이가 있을 뿐 실질적인 대우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기사들이 3기사단을 꺼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3기사단은 제국을 수호한다. 그 말은, 황궁이나 수도를 수호하기에 멀리 갈 일이 없는 1기사단과 2기사단과 달리 파견 임무가 있다는 말이었다. 파견 나가는 지역은 때마다 달랐지만 3기사단 병력의 반 정도는 북부에 상시 주둔하고 있었다. 또한 각종 재해 지역이나 전쟁터에 나가는 것도 3기사단이었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온갖 험한 일을 도맡아 한다는 소리였다. 3기사단은 인원수가 가장 많은 동시에 가장 피하는 기사단이었다. 그런 기사단이 그만한 인원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수습기사들은 선택권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떤 기사단을 가고 싶은지 신청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들어갈 수 있냐 없냐는 순전히 실력과 인맥으로 결정된다. 아일렌같이 실력이 뛰어난 이라면 어딜 지원하든 갈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자진해서 3기사단에 들어가겠다는 말에 황녀는 다시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나를 주군으로 모시고 싶다면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 1기사단이나 2기사단이 나을 텐데.”

 

“황녀 전하를 주군으로 모시고 싶은 것은 맞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때가 올 때까지는 제 재능으로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싶습니다.”

 

“그대가 그렇게 봉사 정신이 넘치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의외군.”

 

“알고 있습니다.”

 

아일렌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봉사 같은 비효율적인 짓이라면 진절머리가 난다. 아무리 바뀌겠다는 결심을 했어도, 무급봉사를 즐겁게 할 만큼 근본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일렌은 기사다운 기사가 되겠다고 맹세했다. 기사다운 기사. 멋들어진 말이지만, 그녀는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기사다운 기사가 어떤 기사인지 알지도 못했다. 그래서 아일렌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기사다운 기사는 어떤 것인지, 명예와 정의를 좇아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몸소 체험할 시간.

 

그녀는 죽음을 통해 잘못을 깨달았고, 과거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트리고 새로 쌓기로 했다. 황녀를 주군으로 모시는 것은 분명 제 삶을 바꿀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한순간에 재정립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일렌은 천천히, 하나씩 다시 쌓아가기로 했다. 황녀를 주군으로 모시는 것은 하나의 목표였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그 첫발을 내디뎠다. 황녀를 주군으로 모실 1년 후에 자신은 기사다운 기사에 얼마나 가까워져 있을까. 아일렌은 아직 기사다운 기사의 정의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1년 후의 자신이 어떤 모습일지 조금은 기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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