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초 포스타입에 게재한 연성으로, 소장본 마왕이야기 회지에 다섯 번째로 실린 단편입니다. 소장본에 실린 교정/퇴고가 끝난 버전으로 재업로드합니다. 소장본 표지디자인 타르프님(tarf_design)


*주의 요소: 자살 시도에 대한 짧은 묘사가 있음.

-캐릭터 사망 요소 없음, 오픈-해피엔딩.






자기소개서에 취미와 특기를 쓴다면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독서, 진부하지만 좋은 답안이다. 음악? 나쁘지는 않다. 크게 이득도 손해도 될 것이 없다는 점에서는 그냥저냥 칸을 채우기엔 충분하다. 영화감상. 적당히 고고해 보이면서 문화를 즐기는 성숙한 취미처럼 보이지. 독서랑 비슷하지만 조금 더 활동적이고 보편적인 느낌도 준다. 피아노 치기? 관련 전공이라면 분명히 득이 될 내용이고 관련이 없다면 어느 정도 멋 부리는 효과만 주겠지, 취직에는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지만.

그마저도 김독자는 상기한 모든 취미에서 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나마 독서라면 책을 읽는다는 행위에서 친밀감을 느낄 수 있을 법도 한데, 안타깝게도 김독자는 자기소개서의 취미란에 도저히 ‘독서’를 적을 수가 없었다. 일단 적어 내면 면접관들은 한결같이 이름까지도 딱이시네, 무슨 책 읽었어요? 같은 질문을 남발하곤 하니까. 잘 다려진 정장을 입고, 깔끔하게 넘긴 머리에, 오랫동안 회사의 중역으로 큰 사업들을 이끌어온 사람들이 바라보는 앞에서 김독자는 도저히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요.’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당연히 다음은 ‘그건 무슨 책인가?’로 이어지게 되겠고, 어차피 들킬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 ‘…판타지 소설입니다.’하고 대답하게 되겠지. 에잉, 판타지? 하는 비꼬는 듯한 목소리는 덤으로, 속 시원하게 불합격을 받을 것이다. 김독자는 멸살법을 판타지 소설인지 아닌지, 취직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와 별개로 순수히 좋아했으므로, 그런 일련의 과정을 굳이 거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쓸모없다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으므로.

그럼? 멸살법을 읽는 것 외에는 김독자에게 취미가 없나? 당연히 아니었다. 김독자는 그래도 나름의 취미를 가지고 자신의 생활을 즐겁게 영위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불행히도, 이미 실패한 ‘독서’ 취미와 함께, 나머지 하나의 취미도 전혀 취직에 도움이 안 되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김독자는 누가 자신의 취미를 물어보면 없다는 한마디로 일관했다. 그렇게 대답한 후 집에 오면, 김독자는 혼자서 밥을 차려 먹고, 설거지를 하고, 밀린 빨래를 돌리고, 세탁기가 덜덜덜덜 돌아가기 시작하면 컴퓨터를 켰다. 금방 아이디를 입력하고, 로그인을 하여,

게임을 시작했다.



신의 탄생




김독자가 기억하는 최초의 게임은 두꺼운 구형 TV에 조이패드를 연결한 형태였다. 빨간 모자를 쓴 소년이 사자를 타고, 점프(A)키를 누를 때마다 방방 뛰었다. 앞에서는 불에 휩싸인 고리가 다가왔고, 김독자는 타이밍에 맞춰 소년이 고리를 잘 뛰어넘도록 무진 애를 썼다. 누군가와 같이 그 게임을 열심히 했던 것도 같은데, 잘 기억나지는 않았다. 그 게임팩에는 다른 게임들도 아주 많았다. 펭귄이 물고기를 먹으며 끝없는 빙판을 달려가는 남극탐험, 털잠바를 따뜻하게 여며 입은 아이가 망치를 들고 천장을 깨며 올라가는 아이스브레이커. 김독자의 어린 시절에는 여느 아이나 그렇듯이 그런 게임들이 있었다. 사실 김독자는 여느 아이보다도 더 많이 게임을 했다. 어쩌면 메마른 가족 분위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유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김독자는 게임을 좋아했고, 자주 즐겼다.

그다음은 뭐였더라. 철권 같은 종류였던 것 같다. 중간중간 테트리스나 보글보글 같은 게임을 플레이할 때도 있었다. 그런 종류의 게임들은 끝나고 나면 꼭 그 점수를 기록할 이름을 쓰라고 했고, 영어를 잘 몰랐던 김독자는 그냥 AAAA로 이름을 입력하고 끝내곤 했다. 어차피 점수도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김독자의 집에는 컴퓨터가 들어왔다. 인터넷이 연결되었다. 김독자는 생애 처음 인터넷이라는 걸 해 보고, 아이디를 만드는 법을 배웠다. 아이디를 만들고 나자 온라인 게임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온라인 게임에서는 할 수 있는 게 훨씬 많았다. 김독자는 홀린 듯이 게임 사이트들에 가입했고,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만들고 하나의 질문에 마주했다.


[닉네임을 입력하세요]


김독자는 인터넷에 닉네임의 뜻을 검색해 보았다. 나온 뜻은, 별명. 그곳은 아이디가 아닌 다른 이름을 쓰는 칸이었다.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은 여기서 자기 본명을 입력해버리는 실수를 하곤 했다. 그러나 김독자는 그 칸에 자기 이름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정확히 이해했다. 닉네임만이 아니라, 인게임에서의 캐릭터 이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게임을 하면 필연 자신의 아바타나 캐릭터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들엔 일일이 이름을 붙여줄 필요가 있었다. 언제부터 왜 그렇게 했는지는 잊었지만, 김독자는 늘 하나의 이름을 썼다.

유중혁.

김독자는 커가면서 한푼 두푼 모은 용돈으로 게임CD를 사는 일에 매진했다. 사고도 남은 돈은 온라인 게임에서 캐쉬 아이템 구매에 쓰기도 했다. 예외 없이 그 모든 게임 속 캐릭터들의 이름은 유중혁이었다. 어째서 그 이름에 꽂히게 되었는지는 김독자 스스로도 잘 설명할 수 없었다. 아마 추측하기로는, 그냥 맨 처음에 만든 캐릭터 이름이 어쩌다 보니 유중혁이었는데 그 이름을 쓰고, 다른 게임으로 넘어가 새 캐릭터를 만들 때도 또 그 이름을 쓰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그런 집착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김독자가 하는 모든 게임의 캐릭터 이름은 어김없이 유중혁이 되었다.

강박은 다른 캐릭터를 만든다고 벗어지질 않았다. 유중혁이라는 캐릭터가 이미 있고, 또 그 게임에서 부계정을 만들거나 두 번째 세 번째 캐릭터를 만들어도 이름은 정해져 있었다. 결과적으로 김독자의 게임 계정은, 언제 어느 게임에 접속하더라도 [유중혁]과 [유중혁1], [유중혁2] 혹은 [유중혁01], [a유중혁]과 같은 이름들이 주욱 나열된 다소 웃기고 괴상한 풍경을 연출하게 되었다. 심지어 김독자는 프린세스 메이커 같은 게임을 플레이할 때조차 가문명을 [유], 이름을 [중혁]으로 정했다. 딸 유중혁이 리본 원피스를 입고 자라나더니 사윗감을 데려오고 급기야 이혼까지 해버리는 엔딩을 보며 김독자의 기분은 굉장히 이상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엔딩을 보기 위해 다시 플레이할 때조차 김독자는 이름 칸에 유중혁을 입력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 무슨 해괴한 강박인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그쯤 되면 그냥 그러려니 했다. 처음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지만, 중혁이라는 이름의 여자아이를 몇 달째 길러보자 김독자는 그것이 딸에게 붙일 수 있는 최고의 이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김독자는 참으로 성실하게 게임을 플레이했다. 그 이름에 마법이라도 걸려있던 모양인지, 유중혁이라는 이름은 참 마법 같아서, 김독자는 캐릭터에게 그 이름을 붙여주고 나면 애정이 많이 갔다. 계속 신경이 쓰였고, 로그아웃을 해도 생각이 났다. 더 잘 키워주고 싶었고, 더 강해지게 하고 싶었다. 객관적으로 김독자의 게임 실력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평균치 정도 되었으나 게임은 노력을 배신하지 않았다. 김독자는 매일 조금씩이라도 게임에 접속해서 꾸준하고 성실하게 레벨을 올렸다. 마치 매일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이빨을 닦듯이, 아니, 아니 그것보다는 조금 더 신성하게, 운동하고 공부를 하는 것처럼 굉장히 의미 있는 어떤 의례 절차를 거치듯이 김독자는 게임을 했다. 꾸준히 이루어지는 플레이 속에서 레벨은 끊임없이 올랐다. 김독자는 유중혁으로 플레이한 게임 대부분에서 제법 상위권의 레벨과 캐릭터 스펙을 달성할 수 있었다. 중학교에 가며 성능이 좋은 터치폰이 생기면서 모바일 게임이 늘어나자 그것도 놓칠 수 없었다. 등하교 중 짧은 시간은 모바일 게임의 시간이었고, 모바일 게임을 플레이할 배터리가 없으면 집에서 할 온라인 게임의 공략을 보며 캐릭터를 키울 방향을 생각하고 외웠다.



그때쯤 온라인의 유명한 인터넷 게임 커뮤니티들에서는, [유중혁]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소문이 안 돌 리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인지도가 있다 싶은 유명한 온라인 게임의 만렙 유저 목록에선 항상 [유중혁]이 눈에 띄었다. 만약 만렙이 랭킹 1~100위 정도만 들 정도로 레벨 기준이 빡빡한 게임이라면 못해도 랭킹 이삼천 명 안에는 유중혁이 있었다. 유중혁들의 접속 시간대는 각각 달랐지만, 죄다 일정하게 상위권을 유지하고 꾸준히 접속했다. 어떤 게임이 클베 했더니 재밌다더라, 요새 좀 뜬다더라는 소리가 돌고 오픈베타 테스트가 시작되면 농담처럼 게시판에 ‘우리 중혁이도 가냐?’하는 글이 올라갔다. 무엇보다 회자되는 것은 그 한결같은 이름뿐만이 아니었다.

김독자의 [유중혁]은, 어느 게임에서나 외형마저도 흡사하게 만들어졌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에 약간의 웨이브가 들어가 있고, 늘 가장 눈썹이 짙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형이 선정되었다. 대체로 어디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 소설 주인공 같은 날카롭고 수려한, 고전적인 미남상이었다. 종종 테X즈위버나 트릭X터처럼 아예 직업별로 성별과 외모가 정해져 나와 외모 커스터마이징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최대한 비슷한 이미지의 캐릭터를 잡아 유중혁으로 플레이했다.

김독자의 키가 몇 뼘씩 커지면서, 게임 역시 발달해 갔고 점점 더 자유도도 높아졌다. 나중에는 블레X드 앤 소X부터 시작하여 검X사X같은 외모 커스터마이징의 자유도가 높아진 게임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김독자는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유중혁의 이미지를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었다. 쌍꺼풀을 넣었고, 턱선을 깎았다. 눈의 가로 길이는 길어졌고, 냉랭한 분위기는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나 잘생기게!―김독자의 목표는 한결같았고, 게임의 발전과 함께 김독자가 어떤 게임을 처음 시작할 때 들이는 시간은 (커스터마이징 때문에) 조금 늘어나 버렸다. 그 외모에 대한 이미지도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연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김독자의 마음속에는 항상 [유중혁]의 이상적인 이미지가 그려져 있었다. 김독자는 언제든 그 얼굴을 생각해낼 수 있었고, 자연스레 그에 맞춰 캐릭터를 만들게 되었다.

사람들은 [유중혁]의 외모가 한결같음을 금세 알아차렸다. 누가 보기에도 알 수 있는 모양새였다. [유중혁]에 대해 긍정적인 게임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드물지 않게 ‘야 오늘 던바X 광장에 유중혁 떴다’든지, ‘마X전 전기용 레이드에서 유중혁 봄. 투석기 에임 ㄱㅊ던데’ 같은 말과 함께 캡처가 올라왔다. 누군가는 그 캡처들을 한데 모아 조잡하게 묶었다. 외형이 직업에 붙어 고정되어 나오는 게임이 아닌 이상, [유중혁]은 한결같이 웨이브가 들어간 검은 반곱슬에 잘생긴 냉미남의 상이었다. 외형이 고정되어 있는 게임이라면 그 게임에서 가장 유중혁을 닮은 단 한 명의 캐릭터는 김독자의 원픽이었다. 파티원들이 아무리 힐을 해달라, 탱을 서달라, 여긴 메즈기 있는 직업 필요하다 애원해도 가차 없었다. 김독자는 유중혁을 닮지 않은 캐릭터를 유중혁의 이름으로 플레이할 생각이 없었다.

유중혁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그런 종류의 게임에선 [유중혁]이 들어오자마자 중혁이때문에 딜 넘치네! 그럼 제가 탱할게요, 같은 채팅을 자진해서 입력했다. 유중혁 목격담이 올라오고 나면 덧글란에는 ‘유중혁 이새끼 존나 취향 한결같은 변태다ㅋㅋㅋ’부터 시작해서 ‘혹시 여자 아니냐 자기 이상형 넣는’, ‘ㄴㄴ 남자라던데’, ‘게이 아냐?’같은 글들이 따라붙기도 했다. 하지만 많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게임 플레이어들은 유중혁의 존재를 재미있어했고, 적당히 호의적이었다. 무엇보다 유중혁의 게임 실력이 나쁘지 않고 어느 게임에서나 플레이에 성실하다는 게 호평이었다. 적어도 [유중혁]은, 파티에 넣으면 펑크는 안 낸다. 1.5인분은 한다, 그런 보증 수표 같은 존재였다.


사칭도 없을 수 없었다. 가끔 어떤 게임이 처음 오픈베타를 하면 본래의 [유중혁], 즉 김독자를 놀리듯이 꼭 유중혁의 이름을 먼저 선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름만 먼저 선점한 유중혁 유저는 김독자와 플레이 스타일이나 채팅 스타일에서 지나치게 차이가 났다. 김독자는 인게임 내에서도 거의 말을 안 하고 성실하게 게임만 하는 편이었고, 대체로 유중혁을 선점하려던 사람들은 철저하게 관심을 원했기에 아무 말이나 하다가 들켜서 자멸하기 일쑤였다. 일부 사람들은 자진해서 '사사게'(사건사고게시판) 같은 불량유저 신고 게시판에 ‘얘 찐 유중혁 아님 선점사칭임’같은 글을 올려주기도 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 글을 보며 ‘찐중혁’이 누군지 구분하며 알아봐 주었다.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유중혁은 점차 하나의 ‘밈’이 되어갔고 ‘상징’이 되어갔다. 김독자는 게시판에 그렇게 올라오는 [유중혁]의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봐 주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유중혁을 알아주면 알아줄수록 기분이 좋았다.

그건 김독자에게 참 힘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게임 속 세상은 절대 현실이 아니다.

어느 날 어른이 된 김독자의 현실을 보자면, 점점 더 유명세를 타는 유중혁과 다르게 김독자의 현실은 비참했다. 월세는 아슬하게 밀리다 말기를 반복했고, 수십 수백 장은 넣은 것 같은 자소서는 언제 보냈냐는 듯 아무런 소식도 가져오지 못하고 그대로 우체통 속에서 종적을 감췄다. 가정이 무너진 지 오래되어 알바로만 생계를 근근이 이어가던 김독자에게 계속되는 취업 실패는 치명적이었다. 몇 번의 막노동 일당은 그날 작살난 몸에 쓸 병원비로 무섭게 빠져나갔고, 편의점은 좀 오래 했지만, 어느 날 술 취한 진상 노인이 소주병을 휘두른 그 날 결국 그만둬야만 했다. 풍요가 멀고 빈곤이 지척이었다. 삼각김밥을 살 때는 큰 차이도 없는 몇백원을 위해 2+1을 고르거나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된 제품을 얻어갔다. 김독자는 실시간으로 몸이 나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했으니 최대한 시급이 높은 것을 찾아 야간 알바를 했지만 밤낮이 뒤바뀐 생활은 김독자의 건강도 아래서부터 위로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 대롱대롱 매달린 통장에서 김독자의 핏물이 똑, 똑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나날이 서러움만 늘어 갔다. 그럴 때마다 김독자는 버릇처럼 이야기했다.


나는 유중혁이다.


그 말은 참 힘이 되었다.

김독자는 게임이 좋았다. 알바를 하고, 자격증 공부를 하고, 딱 남는 하루 두어 시간을 게임에 투자했다. 그때쯤 되어 어른 김독자에게 게임에 현질을 할 만한 돈은 없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게임은 정직했고 배신이 없었다. 시간만 열심히 들이고 조금 노하우만 쌓는다면 금방 상위권에 올라갈 수 있었다. 김독자는 하도 오래전부터 게임을 해 와서 그런지 적당히 어떤 포인트를 공략하면 빠르게 레벨업을 하고, 비싼 아이템을 얻어 랭킹에 들 수 있는지 대충은 알았다. 정말 급할 때는 비싼 게임 아이템을 현금으로 팔아서 생활비를 충당할 수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김독자는 중얼거렸다.

중혁아 미안, 네 것 좀 쓸게.

누군가가 본다면 당연히 뭐라 할 만한 일이었다. [유중혁]의 것도 김독자 본인이 플레이해서 얻은 노력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독자는 강박적으로 유중혁과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했다. 무엇을 노력해도 계속 실패하는 김독자와는 다르게 유중혁은 노력만 하면 뭐든 할 수 있는 무적의 사람이었다. 그것도 꽤 운도 좋았다. 좋은 아이템도 자주 먹고, 사람들의 호의도 많이 받았다. 유중혁은 아주 키가 크고, 건강하고, 힘도 세고, 강하고, 돈도 많고, 그리고 아마……. 행복했다. 행복할 것이다. 게임 커뮤니티의 사람들도 대부분 유중혁을 좋아했고 유중혁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김독자를 본다면 더없이 보잘것없는 물건을 본 듯 취급할 것이다. 낮에는 자고, 가끔은 자다 깨서 면접을 갔다 와서 다시 자고, 밤에는 알바를 뛰고, 새벽에 비몽사몽 한 시간쯤 대충 도움이 될지 안 될지조차 자신이 없는 토익 책을 훑어본 다음에는 게임 커뮤니티 게시판을 들어가 ‘유중혁’을 검색했다. 유중혁 목격담이나 유중혁과 4인팟 뛴 썰이 재밌는 이야기처럼 환영받고, 유중혁과 함께했다는 일이 그 자체로 부러움을 사는 광경을 보다 보면 김독자는 기분이 좋아졌다. 직후에는 게임에 로그인해서 유중혁으로 한 두 시간을 플레이한다. 괴리가 생기지 않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김독자는 유독 그런 일들을 멈추기 힘들었다. 누군가는 중독이라고 욕할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미쳤다고 할 터다. 게임을 끄고 나면 몰려오는 공허감 속에서 제3의 김독자가 현실의 김독자에게 중얼거리곤 했다. 쓰레기 새끼야. 이럴 시간에 자소서라도 한 장 더 쓰지 그래. 잠이나 자서 몸을 챙기든가. 니가 게임에서 유중혁으로 사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 그냥 단순한 중독일 뿐이잖아.

김독자는 제3의 김독자가 하는 모든 말을 흘려들으려고 애를 썼다. 아니, 흘려야 했다. 그리고는 또다시 중얼거렸다. 그 모든 말을 떨치지 못할 때마다, 통장에서 떨어지는 잔금 액수를 볼 때마다, 세금 고지서가 날아올 때마다, 꼬깃꼬깃 접은 지폐를 집주인에게 내밀고는 못내 아쉬워 대문간을 떠나지 못할 때마다, 알바처에서 진상에게 시달리고 나서 화장실에서 찬물로 세수를 할 때마다, 중얼거렸다. 힘없는 말이었다.

나는 유중혁이다…….




그래도 사람에겐 버티지 못하는 때라는 게 오기 마련이었다.

그날은 한 남자가 김독자의 얼굴에 콜라를 뿌렸다. 주문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게 이유였다. 김독자는 본인이 제대로 오더를 넣었다고 생각했고, 테이블에서 떠나기 전에 주문 확인도 두 번 세 번을 했다. 남자는 한 번 말하면 못 알아듣냐며 빈정대었고, 김독자는 굽신거리며 충분히 사과했다. 그러나 한참 후, 남자는 자신이 시킨 적이 없는 메뉴라며 돈을 낼 수 없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이미 그 남자의 가족이 음식들을 반쯤 먹은 상태였다. 얼굴에 콜라가 흘러내리고 있어서 김독자는 도저히 울 수가 없었다. 그날 퇴근하면서 김독자는 같이 일하던 알바생과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알바생은 이내 통금이 있다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변명을 하며 자리를 떴다. 함께 해줄 만한 우정의 데드라인이 딱 저녁 11시 정도였나보다. 당연한 일이었다. 김독자는 말이 많지 않았고 친구가 없었으며, 우울하고 음침했다. 항상 삶에 쫓기는 피곤함이 얼굴에도 드러나는 모양이었다. 김독자에게는 그 어두움을 감출 여력도 없었다.

알바생 ‘친구’(김독자는 이 호칭을 붙일 수 있기는 한지 한참 고민했다.)가 자리를 뜬 이후, 김독자는 그 편의점에서 소주 한 병을 더 샀다. 안주까지 살 돈은 도저히 없었다. 깡술을 마시는 게 위에 해가 되고, 속이 아프면 또 병원에 가서 약값이 나갈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김독자는 술이 좀 필요한 것 같았다. 알콜이 더 들어가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그러나 한 잔을 마시고, 괜찮아지지 않았기에 두 잔을 더 마시고, 그래도 괜찮아지지 않아서 김독자는 석 잔을 더 마셨다. 눈앞이 뱅뱅 돌아가고 길이 조금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아, 너무 마셨어. 이제 집에 가야 하나 봐. 김독자는 그래도 생각은 제대로 했다. 천천히 일어나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병을 우악스럽게 처박고는 길로 걸어갔다. 발밑이 빨갰다. 별로 맘에 안 드는 색이었다. 왼쪽으로 몇 발짝만 더 가면 까만 바닥이 있었다. 김독자는 주저함 없이 그쪽으로 걸어가 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김독자의 어깨를 휙 잡아당겼다.

김독자는 몸의 중심을 잃고 그대로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눈앞에서 차가 한 대 쌩, 스쳐 지나가며, 운전자가 쌍욕을 했다.

…왜 쌍욕을 하지?

그때야 김독자는 깨달았다. 자신이 가려고 했던 곳은 차도였고, 지금 자신은 차도까지 나가려고 했다가 누군가 막아줘서 산 직후였다. 그 생각을 하자 술이 조금 깼다. 김독자는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 인도로 다시 한 발짝 더 들어온 뒤, 고개를 돌렸다. 혀는 꼬였지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야 했다. 해야 했는데,

너 누구…….

말을 꺼내던 김독자는 너무 놀라서 뒤를 잇지 못했다. 김독자를 구했던 남자는, 검은 머리가 살짝 구불거렸고,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썹이 짙었으며, 쌍꺼풀이 있고, 유려한 선을 가진 굉장한 미남이었다. 누구냐고 내뱉긴 했지만, 김독자는 그를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수백 번도 더 입속으로 중얼거렸던 바로 그 이름.

나는,

너……?

유중혁이다.

그 말을 한 직후 유중혁은 태연하게 김독자를 잡아당겼다. 아니, 잡아당겼다는 표현을 쓰기에는 무안할 정도로 부드럽고 상냥한 움직임이었다. 허리와 어깨를 팔로 둘러주어, 비틀거리는 김독자가 쓰러지지 않게 부축하며, 유중혁은 김독자를 인도 안쪽까지 데려갔다. 조금 전까지 지나가던 차들이 일으키던 약한 바람과 타이어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안쪽까지 들어오자 유중혁은 김독자가 어느 골목 안쪽을 바라보도록 돌려세웠다. 김독자는 유중혁한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유중혁은 그대로 짤막한 한 마디만 던졌다.

조심해.

그러고는 사라져 버렸다.

김독자는 어안이 벙벙해서 눈을 크게 떴다. 진짜 유중혁이었다. 그리고 그가 김독자의 몸을 잡아 돌린 방향은, 김독자의 집으로 가는 바로 그 방향이었다.




그날 김독자는 집에 와서 물 몇 잔을 마셨다. 술기운이 확 깰만한 일을 겪긴 했지만 아무래도 마신 양이 양이다 보니 정신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술에 절은 뇌로는 도저히 방금 본 유중혁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김독자는 한편으론, 자신이 술에 전혀 취하지 않고 물만 마신 상태였다 하더라도 과연 그 유중혁이 ‘어떻게’ ‘왜’ 나타났는지 알 수 있었을지 의심스러웠다. 아마 절대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자신이 술에 취해 헛것을 보았다는 게 나은 가정이었다. 어쩌면 불우한 인생사를 불쌍히 여긴 신이 내려보낸 수호천사 같은 걸지도 몰랐다. 게임 속의 유중혁이 살아났다는 생각보단 그게 더 납득이 갔다.

사고의 흐름이 알콜을 타고 속절없이 흘러갔다. 김독자는 대충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워서 불우에 대해서 생각했다. 자신의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계속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김독자의 인생은 참 불우했다.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그는 아버지가 휘두른 폭력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팔을 휘두르고 발을 뻗으면 어머니는 고통스러워했다. 처음엔 김독자는 그것이 고통인지도 몰랐다. 어머니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아버지가 어떤 동작을 하고 나면 어머니가 몸을 조금 구부리고 움츠린다는 게 보이는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김독자는 잠시 친적집에 맡겨졌다. 또래의 사촌과 어울려서 놀던 김독자는, 문득, 아버지를 따라 해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손을 휘둘렀고, 사촌이 울었다. 다급하게 달려온 고모는 화를 냈다. 친구를 때리면 어떡하니! 때리면 아프잖아. 김독자는 그제야 알았다.

…이건 때리는 거에요?

그럼!

아픈 거에요?

그럼.

양 손에 손을 얹고 말하는 고모에게, 김독자는 어눌한 발음으로 물어보았다.

그러면……우리 아빠는 엄마를 때리는데요?

당시 고모의 표정이 어땠는지 김독자는 생각나지 않았다. 후에 그 집에 다시 맡겨진 적은 없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고, 항상 그래왔듯 누구도 김독자의 가정에 관여하지 않았으니 고모의 표정이 어땠을지는 뻔했다.

김독자가 아버지의 행동이 폭력이라는 걸 안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김독자는 너무 어렸고, 아버지를 말릴 힘도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어머니 이수경은 일부러 그랬던 것인지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김독자를 옆집에 맡겼다. 지금 어른이 되어 다시 생각해보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옆집은 시도 때도 없이 오는 김독자를 참 반겨주었다. 왜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하여간, 그런 식으로 옆집에 도피해 있던 김독자는 평화롭게 가정의 모든 것을 유예했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그 유예된 길이만큼 불어터진 상처에 뒤덮인 이수경이 있었다. 독자는 최대한 옆집에 오래 있고 싶어 했다. 그 긴 시간 동안 옆집에서 대체 뭘 하고 놀았는지는 기억이 묻어버린 미스터리였다.

그리고는……어떻게 되었더라? 아마 무슨 일이 있어서 그 집이 이사를 했던 것 같기도 했다. 어머니는 갈 옆집이 없어진 김독자에게 게임을 사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김독자는 게임을 시작했고 빠져들었다. 그리고 유중혁이라는 이름의 캐릭터를 무지막지하게 많이 만들었고……많이 키웠고……그렇게 자라다가 변변한 직업도 없는 이런 몹쓸 성인이 되어서는……유중혁을 만나버렸다.

김독자는 누운 채 피슬피슬 웃었다. 씨발, 내가 헛것을 봤나 보다. 누운 채 고개를 뒤로 젖혀보니 침대 머리 쪽에 있던 창문이 보였다. 한밤중이라 그런지 창문이 온통 새까맸다. 김독자는 관성적으로 생각했다.

아, 보고 싶다.

그리고는 이내 몰려드는 졸음에 여느 때처럼 그날도 별을 보지 못하고 잤다.

꿈속에서……누가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했다. 아이들 목소리였다.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나는…키가 엄청 크고 싶다. 근육질의 몸에……엄청나게 강한 사람으로.

야 그거 짱이다. 내가 너……게.

니가 무슨 수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김독자는 눈을 떴다. 때가 한낮이었는지 방안이 들어온 햇빛으로 인해 노랗게 가라앉아 있었고, 바깥에서는 하교하는 초등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 꿈. 그래, 유중혁도 꿈이었나 보다. 김독자는 핸드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했다. 문자가 와 있었다.


[불합격 통보]


익숙한 텍스트에 김독자는 조용히 화면을 껐다. 익숙한 실패에 이젠 오히려 안정감까지 들었다. 변화 없는 바닥의 삶……. 그래, 유중혁도 꿈이었다. 이제는 꿈에서 깨어나, 집을 치우고 알바 갈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러나 유중혁은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중혁이 주로 나타날 때는 김독자가 가장 힘들 때였다. 술을 마시고 죽고 싶을 때도 유중혁은 나타나서 비틀거리는 자신을 부축했고, 너무 힘든 막노동을 뛰고 나와 집에 가다가 도저히 걸을 수 없어 거리에서 주저앉았을 때는 커다란 손이 자신의 다리를 주물렀다. 김독자가, 혹시나 유중혁이 사라져 버릴까 봐 너무나도 조심스럽게 …유중혁? 하고 불렀을 때 유중혁은 고개를 끄덕였고, 김독자가 다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한참을 옆에서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가 사라졌다. 그렇게 김독자는 몇 번의 죽고 싶은 나날들을 넘겼다. 마치 상처투성이 손으로 도저히 더는 인생의 손잡이를 잡을 수 없을 때, 어디선가 뿅 하고 생겨난 작은 밴드처럼 유중혁은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그는 많은 말을 하진 않았다. 그가 구태여 말하지 않았기에 김독자 역시 말하지 않았다. 아니, 그 위압감과 침묵 속에서 말을 꺼내면 그가 사라져 버릴까 봐 김독자는 필사적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것에 가까웠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나타난 시간 동안은 그가 사라질까 아주 조용히, 얌전히 그가 해주는 대로 받고 있었다.

유중혁이 어떻게 나타나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드디어 게임에 쏟아부은 시간으로 인해 어떤 유중혁의 사념체라도 생겨서 자기 주인을 찾아오나 싶기도 했다. 김독자는 이것이 결국 미쳐버린 자신의 환상인지 아닌지 너무 궁금했다. 근처에 있는 사람이라도 불러서 얘 보이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유중혁이 있을 때는 기가 막히게 주변에 사람이 없었고, 아니라고 하더라도 불러서 물어봤을 때, 그것이 정말 김독자의 환상이라는 것이 증명되면―김독자는 더는 절망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참으로 무서운 일이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 겨울 수도관이 동파되었다. 보일러도 고장인 것 같았다. 방 안에 다가오는 겨울의 차가운 냉기가 가감 없이 그득했다. 김독자는 수리기사를 부르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고, 집주인은 월세를 자주 밀리는 세입자의 연락을 잘 받지도 않았다. 집에 있으면 자꾸만 기침이 나오고 가래가 끼기 시작했다. 추웠다. 해도 해도 너무 추웠다. 김독자는 알바를 나가고 돌아올 때 차라리 알바처에 더 머물고 싶었다. 일하는 곳보다 집이 훨씬 더 추웠다. 되는 대로 옷장에서 이불과 옷가지 더미를 잔뜩 꺼내 둥지처럼 침대 위에 모으곤 그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몸이 으슬으슬했다. 몸살기가 몸을 타고 올라오는 벌레처럼 몰려들었다.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이마가 뜨거웠다. 좆 됐다.

그날 밤 김독자는 자다가 몇 번을 깨어났다. 겹겹이 쌓인 옷가지 덕에 그렇게 춥진 않았지만, 어떤 종류의 옷인지 모를 각종 종류의 천에는 김독자의 식은땀이 흥건히 배었다. 몸을 몇 번 뒤척이자 쌓인 옷가지가 무너져 어깨의 어느 부분은 찬 공기에 훤하게 드러났고 어느 부분은 또 더웠다. 아팠다. 눈을 뜰 수도 없게 아팠다. 그 모든 차갑고 고요한 공간 속에서 아픈 김독자만 혼자였다.

순간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도둑인가 생각했지만, 솔직히 도둑이 들어와도 훔쳐 갈 것도 없을 게 뻔했다. 김독자는 움직일 힘도 없어 눈만 깜박거렸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몸 위에 놓인 옷가지들을 하나씩 덜어내고 있었다. 그냥 더는 게 아니라, 차곡차곡 가져가서 바로 손으로 살짝씩 접어서 옆에 놓고 있었다. 왜 내 옷을 개 주지, 생각도 끝나기 전에 차가운 손이 이마에 다가왔다. 크고, 거칠고, 차가운 손이었다.

아, 시원하다…….

김독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예전에도 이 손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다리를 주물러주던 감각이나, 손을 잡아주던 감각. 어깨를 부드럽게 틀어쥐고 잡아 당기던 그 힘. 김독자는 입안으로만 웅얼거렸다.

……유중혁.

옷이 다 걷자 유중혁은, 옷장을 열어 옷을 집어넣는 것 같았다. 그 어둠 속에서, 옷가지가 다 사라지고 이불만 남자 김독자는 추위를 느꼈다.

…개 줘서 고마운데 중혁아, 나 너무 추워…….

김독자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닌지, 유중혁은 여전히 말 한마디 없이 김독자 곁으로 다시 다가왔다. 스륵, 무언가 천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독자는 그 감촉과 목께에서 구부러진 카라 때문에 자신에게 덮인 게 유중혁이 입고 있던 코트구나 알았다. 코트는 마치 온열 기능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상하게 참 따뜻했다. 무슨 화염 저항 달린 아이템인가. 김독자는 시답잖은 생각을 했다. 유중혁이 다시 한번 차가운 손으로 뜨거운 김독자의 이마를 쓸었다.

자라.

김독자는 그날 너무 편하게 잤다. 꿈도 없는 깊은 잠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 코트는 온데간데없었다. 김독자는 또 자신이 아픈 와중에 꿈을 꿨나 생각했다. 하지만, 김독자가 일어난 침대 자리는 멀쩡한 매트리스라고 믿을 수 없게 뜨거웠다. 마치 누가 전기 장판이라도 켜 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일어나 보니, 부엌에는 마법처럼 흰 쌀죽이 끓여져 있었다.

…고마워.

죽을 한 그릇 국자로 뜨면서 김독자는 조금 울었다. 눈물 때문에 소금간이 되어서인지 죽은 너무 맛있었다.



그렇게 몇 번, 유중혁은 몇 번을, 더 나타났다.

유중혁이 나타났기에 김독자는 그 순간들을 겨우 버텨냈다.



그러나, 유중혁이 나타나 매 순간을 넘긴 김독자는 점점 더 죽고 싶어졌다.



유중혁이 나타나고 나면 김독자에게는 거짓말처럼 정신적인 여유가 생겼다. 조금 숨을 돌리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력이 생겼다. 그러나 기력이 꼭 좋은 결과만을 불러오는 것은 아니었다. 한 발짝 떨어져 생각해 본 자신의 삶은 완벽한 실패작이었다. 가진 것 중에 특출난 것은 게임 레벨뿐이었으며, 아는 인간관계는 없었고 취업은 계속 실패했다. 김독자에게는 그 어떤 인생의 가치도, 친구도 가족도 없었다.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절망적이었을까 싶었다.

문득, 이수경이 생각났다. 언젠가 교도소에서 나온 이수경이 자신에게 연락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왜냐면 이수경이 수감된 동안 김독자는 끊임없이 이수경을 면회했으니까. 그러나 연락은 끝내 오지 않았다. 김독자는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어머니는 보고 싶지 않았다. 찾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번호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자식인 자신이 굳이 먼저 연락해야 하는가의 지점에서 김독자는 굉장한 배신감과 분노, 회의감을 느꼈다. 이 얼마나 불우한 인생일까. 아버지는 폭력을 상습적으로 휘두르는 알코올 중독자로 죽었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로 수감된 이후 김독자를 버렸다. 써놓고 봐도 참 삼류 신파 소설같은 이야기였다. 신이 있다면 이럴 수가 없었다. 신도 구원할 수 없을 종류의 인생이었다. 김독자는 진부한 자신의 삶을 살 돈이 없던 풍선껌 대신 되씹었다. 졸음이 올 때 쓴맛 나는 삶은 훌륭한 각성제였다.




그렇게 삶을 여러 번 되새김질하던 김독자는 어느 날 자살 시도를 했다.

맨 처음은 가장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밧줄로 올가미를 매는 방법은 쉽게 나왔다. 목매는 모양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다소 떨렸지만, 김독자는 의자를 가져와 전등갓에 밧줄을 매었다. 의자를 차고 목이 졸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컥, 하면서 폐에서 숨이 빠져나갔다. 끈 좀 부드러운 거로 할걸, 목이 너무 아프다. 그런 생각을 하던 김독자는, 그대로 떨어졌다.

아니, 떨어지는 몸을 누군가가 받아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 손에 끊어진 밧줄을 든 유중혁이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화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김독자는 깨달았다. 유중혁이 밧줄을 고의적으로 끊은 게 틀림없었다.

다시는.

김독자는 태어나서 유중혁의 그런 목소리는 처음 들었다. 단호하지만 떨림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애초에 살면서 유중혁의 목소리를 몇 번 들은 적도 없었지만, 김독자가 듣기에 그 목소리는 정말로…….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라.

정말로 자신을 걱정해주는 어떤 사람 같아서, 너무 기분이 이상했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침대에 데려다 뉘였고, 밧줄을 빼앗아 버리고는 주변의 모든 뾰족한 물건을 어디론가 치워버렸다. 살짝 깨진 전등을 수리한 유중혁은, 이내 그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김독자를 바라보다가 또다시 사라졌다.

유감스럽게도 밧줄과 뾰족한 것이 치워졌다고 인생까지 깨끗하게 치워지진 않았다. 김독자는 삼백스물여섯 번째로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점주는 사소한 일로 김독자에게 물건을 던졌고 소리를 질렀다. 세상이 자길 너무 미워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김독자는 또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고 싶어졌다.

며칠간 김독자의 자살시도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김독자가 시도하는 자살마다, 유중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유중혁은 목에 걸린 밧줄을 끊고, 목에 꽂으려던 칼을 한 손으로 가볍게 날을 부러뜨려 버렸다. 김독자가 알약을 입에 틀어넣자마자 나타나서 김독자의 등을 치며 알약을 토하게 만들어버렸다.

김독자는 이 모든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김독자는 자신을 죽지 않게 하는 유중혁을 위해 몇 주간 충동을 참았다. 그동안 유중혁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리고 문득 어느 날 방에서, 김독자는 생각했다.


……죽으려고 시도하면 유중혁을 또 볼 수 있지 않을까?


김독자는, 그제야 알았다.



아, 내가 외롭구나.

아 내가 너무 외롭구나. 아 내가 너무너무 외롭고 외로워서……그랬구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참을 침대에서 끅끅거리는데 누군가의 손이 눈물을 닦았다.

김독자.

강한 팔이 김독자를 끌어당겼다.

김독자.

유중혁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독자는 그것이 죽지 말라는 신호임을 정확히 알아들었다. 자신을 껴안는 유중혁의 존재를 느끼면서, 사람의 살덩이를 느끼면서, 김독자는, 그동안 유중혁이 나타났을 때마다 자신이 강박적으로 지키던 불문율을 깼다. 어쩌면 자신이 미친 것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건 정말 환상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살고 싶다는 의지가 환상을 만들어내서 이중인격처럼, 아무도 없는 이 방에서 유중혁을 보여낼 수도 있었다. 김독자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멍하니 유중혁에게 말을 걸었다.

중혁아.

응.

나 너무 외로웠어.

안다.

중혁아.

응.

나는 잘 하려고 했는데.

듣고 있다.

아무것도 안 돼.

응.

똑같이 노력했는데, 게임처럼 노력만큼도 되지 않아.

그래.

중혁아.

응.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안다.

중혁아. 나는 잘 살고 싶어.

안다.

누구보다 잘 살고 싶어.

알고 있다.

행복하고 싶어.

유중혁은 아주 가만히, 천천히, 김독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는 그렇게 될 거다.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너는…….

그건 참 마법 같은 말이었다. 이제껏 그 누구도 김독자한테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하는 유중혁의 말은 분명한 근거가 있다는 듯 힘이 실려있었다.

너는 내 ■■■니까.

김독자는 그 마지막 말을 잘 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다시 되물었지만 여전히 들을 수가 없었다. 마치 누가 지우개로 지워낸 것처럼, 온 우주가 김독자에게 그 말을 도통 들을 수가 없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그랬다.

너는 내 ■■■. 너는 내 내 ■■■야. 너는 내…….

김독자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김독자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멍하니 일어났다. 유중혁은 자리에 없었다. 그러나 김독자는 잠들기 직전까지, 유중혁이 이제껏 나타난 그 어느 순간보다 가장 오래 자신의 곁에 있었음을 알았다. 유중혁은 없지만, 침대 옆은 누가 오래 누웠다 간 것처럼 낡은 매트리스가 푹 들어가 있었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고, 애매하게 새벽이 어둑어둑했다. 침대 머리 쪽 창문에, 어두컴컴한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의……별.

내가 별을 봤던 게 언제더라.

김독자. 나 별 보고 싶다.

김독자는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은 항상 언제나 거기 있었다는 듯 반짝반짝 빛났다. 이상하게 또다시 눈물이 주루룩 쏟아졌다. 한참을 울고 난 김독자는 생각했다.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고, 내 인생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데…….

김독자는 도저히 유중혁의 모든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게 남은 게 뭐가 있지.

김독자는 새벽녘부터 동이 틀 때까지 멍하니 방안을 쳐다보았다. 한참 후에야 눈에 들어온 것은, 밥상 위에 얌전히 놓여 있는 자신의 핸드폰이었다. 마치 거기에 일부러 그렇게 두고 간 듯, 정중앙에 딱하니 손길을 기다리며 놓여 있었다.

김독자는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었다.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는 많지 않았다. 알바처 사람들과, 직업소개소, 그리고…아주 사적인 번호가, 딱 하나 있었다.

사실, 그랬다. 김독자의 인생에 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건 아니었다.

김독자는 망설이다가 번호를 눌렀다.

―어머니, 저예요.





이수경에게서 받은 주소는 그렇게까지 멀진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노선도를 멍하니 바라보면서도 김독자는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생각했다. 집값이 싼 동네 구석의 자그마한 빌라. 마치 옛집처럼 작은, 소규모의 다세대 주택.

김독자는 문을 두드렸다.

네가 오다니 별일이구나.

이수경은 그렇게 말하며 차를 내왔다. 마침, 이수경이 집 정리를 하던 중이었는지 집 안의 물건들은 난잡하게 널려 있었다. 꺼내진 책들과 펼쳐진 옷더미들. 김독자는 은근슬쩍 눈을 굴려 이수경의 살림살이들을 확인해보았다. 만약 이게 모든 물건을 꺼내놓은 거라면 놀라울 정도로 살림살이는 간소했다. 아마 이수경도 김독자처럼 잡다한 삶을 이고 살아갈 여력은 남지 않아서이리라.

차는 밋밋하고 맛이 없었다. 적당히 목만 축이며 김독자는 자신과 다를 것 없이 비좁은 집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편하게 있다가 가렴.

솔직히 말해서 몇 년 만에 처음 본 사람이 할 만한 대사는 아니었다. 그것을 이수경도 말해놓고 아차 했는지, 잠시 후에 어색한 몇 마디를 던져왔다.

…그러고보니 어쩐 일이니.

어쩐 일인지를 묻는 것이었지만 너무 의례적이라서 오히려 그렇지 않았다. 무슨 일 생겼니, 같은 능동적인 어투가 아니었다. 그런 걸 물을 정도로 서로의 안부를 잘 주고받던 사이도 아니었을뿐더러……. 이수경은, 김독자가 무슨 일이 있어서 온 걸 뻔히 아는 눈치였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김독자 역시 이수경이 일부러 적당히 의례적인 말만 하는 것을 알았지만 건드리지 않았다.

그냥 오랜만에…….

할 말이 없어진 김독자는 미적거리기만 하다가 뭐라도 보면 이 어색한 대화가 끊기겠다 싶었다. 이수경은 너나 나나, 하고 말끝을 흘리고는 대화를 포기했는지 김독자가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는 것을 막지 않았다. 차라리 두 사람에게는 다른 대화 주제라도 꺼내는 게 나았다. 마침 근처에 있던 책더미로 손을 뻗자, 표지가 굉장히 낡아 버석거리는 매우 큰 책이 있었다. 책이 아니라 앨범이었다.

이상하게도 김독자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앨범이었다.

그거 너 열 살 때까지야. 가장 말도 많고 활발했을 때지.

이수경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꾸는 꿈처럼 들려왔다. 김독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은 늘 책만 읽고 조용하여 친구도 없고 활발했던 적도 없었다.

그런가요.

별로 신뢰를 담지 않은 채 대답하고, 김독자는 낯선 앨범을 펴들었다. 아주 아기 때의 자신이 있었고, 걷는 자신. 막 유치원에 다니는 자신. 그리고 몇 장을 더 넘기자……두 명의 아이가 찍힌 사진들이 가득 있었다. 김독자는 흠칫 놀랐다.

익숙한 인상. 어린아이답지 않게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 살짝 고불거리는 검은 머리. 약간 퀭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한눈에 확 들어오는 강렬한, 짙은 얼굴선. 많이 어렸지만 그건 틀림없이 유중혁이었다. 설마.

어머니, 얘는 누구죠?

…….

이수경은 잠시 말이 없었다.

…여전히 기억 못 하는구나.

예?

그 있잖니. 우리 조그만 빌라 살 때. 네가 자주 갔었던 옆집 애.

김독자는 미간을 좁혔다. 여전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하지 못해도 큰 상관 없지. 너무 오래전 얘기고 걔는…….

―아주 어릴 때 죽었으니까. 생각지 못한 묵직한 말에 김독자는 눈을 깜박였다.

얘……얘는, 이름이 뭐죠?

조금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수경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고, 이수경이 그 첫 발음을 꺼낼 때 김독자는 이미 그 마지막 글자를 알아버렸다.

유중혁.




김독자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김독자는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듯 사진 속 아이를 바라보았다. 떨리는 동공 속에 보이는 그 남자아이는 참으로 태연하게 김독자와 함께 앉아 있었고, 김독자는 매우 신나고 당연하다는 듯이 브이 자를 그려 보이며 웃고 있었다. 유중혁의 표정은 별로 밝아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어쩐지, 지금까지 김독자가 무수히 많이 만든 게임 속의 유중혁과는 다르게……상당히 말랐고, 별로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생각을 증명해주듯 이수경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 애는 많이 아팠어.

김독자는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고 이수경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애가 아파서 집에만 있으니까 친구가 전혀 없었고…네가 걔의 유일한 친구였다. 덕분에 그 집 사람들은 널 좋아했지. 나는 네가……. 거기서 많이 사랑받아서 좋았다.

떨어지는 말끝이 이상하게 서늘했다. 내용은 분명 좋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수경은 전혀 좋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 같지가 않았다. 어쩌면 김독자가 있던 그 모든 시간 동안 이수경이 모든 폭력을 감내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어 올린 시선 끝에 있는 이수경은 미묘한 눈으로 김독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가에, 김독자가 참 싫어하는 것이 그득했다. 사람을 참 비참하게 만드는 이유 모를 동정들. 주어와 목적어가 거꾸로 뒤집힌 세상 속에서 김독자는 도무지 이유를 찾지 못했다. 왜, 내가 아닌 당신이, 나를 그렇게 보지?

네가 더 기억나지 않는다면…….

아니,

김독자는 다급하게 말을 끊었다.

…더 얘기해주세요.

이수경은 잠시 김독자를 바라보며 한참을 침묵했다. 마른 먼지처럼 정적이 바닥까지 내려앉았을 때, 수경은 고요히 중얼거렸다.

너는 너무 어렸어. 그 애도 많이 어렸고. 둘 다 어린아이가 그만큼 아프다는 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잘 알지 못했지.

김독자는, 문득 생각했다. 별을 본 지 얼마나 되었지. 그리고는 수경의 이어지는 말과 함께, 김독자는 기억해냈다.

김독자, 나 별 보고 싶다.

중혁이가 집에만 있다 보니 굉장히 답답해했던 모양이더라고. 너한테 밖에 나가고 싶다고 얘기한 것 같아. 그래서……둘이 역할을 바꿨지.

김독자는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유중혁이 김독자보다 살짝 키가 크긴 했지만, 유중혁의 아픈 몸은 도저히 살이 많이 붙질 않아서 둘의 체구는 엇비슷했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처음으로 가진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 날 유중혁의 가족은, 늦은 시간 아이가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에 유중혁의 방으로 들어갔지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든 듯한 아이의 모습에 조용히 불을 꺼주고 방문을 닫았다. 독자가 집에 갔나 보구나, 하는 중혁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독자는 이불 속에서 최대한 유중혁을 흉내내어 웅얼거리며 답했다.

그날은, 날이 유난히 추웠다.

김독자는 그것을 아주 재미있는 시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중혁이가 잘 나가지도 못하는 밖에서 아주 오랜만에 쏟아질 듯한 별을 보며 만족하고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다. 유중혁은, 확실히 좋았던 모양이긴 했다. 좋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오래 어둔 밤 찬바람을 맞아가며 밖에 있었을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확실히 어렸고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유중혁은 아주 오래 별을 바라보고 싶었고, 김독자는 유중혁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김독자는 사람이 어릴 때는 그렇게 쉽게 죽을 수 있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다.

…….

김독자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수경은 김독자의 얼굴을 흘긋 보더니 차분히 덧붙였다.

그건 사고였어.

유중혁의 방은 아이의 건강을 고려해 훨씬 따뜻하고 습하였다. 침대에 누워서 필사적으로 자는 척 있던 김독자가 잠들지 않기엔 너무나 포근한 환경이었다. 반대로 바깥은 매우 춥고 건조했다. 김독자가 잠들던 바로 그 순간, 유중혁은 바깥에서 파랗고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독자야.

끝없이 이어지던 기억을, 이수경이 단호히 끊었다.

너는 그 애의 유일한 친구였다.

……친구. 독자는 입안에서 생소한 발음을 주억거렸다. 아마 김독자 인생에도 유중혁은 유일한 친구였다. 어쩌면 계속 나타나던 유중혁이 나한테 말하려던 건 친구라는 말이었을까. 김독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수경은, '친구'를 말하는 것과 참으로 비슷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너는 나의…….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를 말하려던 수경이 입을 닫자, 김독자가 순서를 받아들듯 입을 열었다.

어머니.

김독자는 그녀가 하려는 말이 무엇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 김독자의 앞에는, 이수경이 있었다.

저 여기서 다시, 살아도 될까요.

그녀는 김독자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 어느 봄날 김독자는 다시 이수경의 집으로 돌아왔다. 십 년 만에 같이 사는 모자의 사이는 어색하기 그지없었지만, 적어도 김독자가 서류를 제출하고 면접에 치이다 돌아온 날에도 집에는 온기가 있었다. 김독자는 더이상 자살 시도를 하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지나치게 취하지도 않았다. 그에 따라 유중혁도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김독자는, 종종, 그러고 싶은 기분이 들 때면 조용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참을 별을 보고 나서 집에 들어가서 평소처럼 인사를 하고, 이수경과 함께 늦은 저녁을 먹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러면 또다시 아침이 오고 해가 떴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고 그 어느 날 김독자는 합격 통보를 받았다. 크지도 않지만 작지도 않은 적당한 한 중소기업의 일자리였다. 김독자는 바로 받아들였고, 또다시 두 달이 지나갔다. 출퇴근을 하고 돈을 벌고, 적당히 저축을 하고, 그러면서.

그 어느 날 김독자는 다시 별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참으로 놀랍게도.

어쩌면 신도 자신에게 주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던 평화가 깃들고 있었다.





니네 엄마 요즘도 교회 가서 기도해?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김독자는 교회니 절이니 하는 것이 연이 없는 아이였다. 그 집안 꼴을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세속의 폭력에 휘둘리는 인생에 무슨 종교의 이상이 있을 리가. 혹시 그런 데에 마음이 생겼나? 유중혁은 가늘게 눈을 떠서 김독자의 얼굴을 훑었지만, 친구의 얼굴은 언제나 그랬듯이 천진난만할 뿐이었다. 중혁은 한숨을 쉬고 가볍게 이야기했다.

아니, 절 간다더라.

그렇구나. 역시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거지?

질문은 정직했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신이고 뭐고, 도움은 무슨. 유중혁은 속으로 제 부모를 비웃었다. 어릴 때부터 끝없이 아파온 아이는 몸 대신 머리가 빠르게 컸다. 그런 일들이 더는 자신의 건강에도 큰 소용이 없으리라는 건, 정기 검진을 받으러 갈 때마다 혀를 차는 간호사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바보스러운 어른들. 그러나 유중혁이 그런 생각을 하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필히 모를 것이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생각을 정통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신은 뭐든지 할 수 있다잖아. 중혁이 널 위한 신이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여러 사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중혁이 그렇게 아픈 걸 보면, 유중혁을 위한 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유중혁은 굳이 그 사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절에 가는 엄마나 한의학을 알아보는 아빠는 지긋지긋했지만, 김독자는 지긋지긋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독자의 그 바람이 부모와는 달리 그 어떤 자의적 욕망도 투영하지 않은 순수한 호의임은 유리처럼 투명했으므로. 김독자는 유중혁이 강해지고 싶다, 더 커지고 싶다는 욕망을 말할 때 절대 불쌍하게 보지 않았다. 동정하지 않았다. 순수하게 이루기를 바라줄 뿐이었다. 유중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신이라는 이야기에 고개까지 끄덕여줄 만큼 친절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김독자는 매사에 여느 아이가 그렇듯이―아니, 여느 아이보다도 더 심하게, 남의 불친절을 알아챌 줄을 몰랐다. 어쩌면 그 아비가 지나친 '불친절'을 쏟아내서 무뎌진 걸까. 아니, 아니면 김독자는…유난히 유중혁한테만 무딘 걸지도 몰랐다.

또 어느 날, 책을 읽던 김독자는 이야기했다.

중혁아, 우리가 신을 만들자.

뭐?

이번에는 어린 중혁도 저도 모르게 대꾸해줄 만한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김독자가 어느 동화책이나 어린이용 판타지 만화책을 보고 온 날에는 반응을 해주지 말아야 이야기가 길어지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 유중혁은 잠시 후회했고, 그런 다음에는 그 시간을 즐겼다. 사실 유중혁은 김독자의 그 시답잖고 순진한 이야기들을 너무 좋아했다.

신화나 전승 있잖아, 사람들이 그 신화나 전승을 들어서 알고 믿잖아. 신은 누군가가 믿는 믿음의 크기만큼 존재한대. 그러니까, 응, 간절히 믿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 강해진대. 누군가 그 신을 알아주면 그게 신을 탄생시키는 거라고.

어쩜 쟤는 멍청한 것 같은데 이야기를 할 때면 저렇게 눈이 빛날까.

유중혁은 가만히 응, 했다.

그러니까 믿는 것에 이름을 붙이고……. 존재한다고 믿고, 믿고 또 믿으면, 그게 언젠가 정말 사람들의 믿음으로 만들어 낸 신이 된다는 거야.

그래?

유중혁은 시큰둥했다. 사실상 이제 자신에게는 신도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신도 줄 수 없는 건강과 평화. 무엇보다도 이미 삐딱선을 탄 마음을 신도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유중혁은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지나 잘 할 것이지 김독자.

그러거나 말거나 김독자는 재잘댔다. 어쩌면 밤하늘 별들이 신인 걸 수도 있어. 너 밤하늘에 별 봤어? 하늘에서 막 반짝반짝하는데 사람이 죽어서 별이 된대. 그러니까 별은 사람일 수도 있고…그리스 신화에서는 막 영웅이 죽어서 별도 되고 별자리가 되고 신에 대한 별도 있어. 그러니까 별은 사람도 되고 신도 되고 그래서 사람은 별도 되고 신도 될 수 있고…….

김독자의 이야기는 끊이질 않고 자기 혼자 신나서 놀이기구처럼 뱅글뱅글 돌았다. 유중혁은 한참 동안 듣고만 있었다. 멈추지 않아도 좋았지만, 듣다 보면 멈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화내지 않았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어느 순간 그 회전목마에서 내린 김독자는, 항상 그래왔듯 잊지 않고 다시 유중혁 곁으로 돌아와선 유중혁을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중혁아,

김독자의 눈이 또다시 반짝였다.

내가 널 위한 신을 만들어줄게, 꼭.

유중혁은 아마 그런 김독자의 눈 같은 게 별일 거라고 생각했다.

네가 아주 건강해질 수 있도록.

유중혁은 처음으로 별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김독자의 이야기는 너무나 허무맹랑했지만 어쩌면, 어쩌면 김독자라면 정말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김독자는 정말 신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유중혁은, 자신도 김독자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유중혁 인생에 첫 동경이었고, 사랑이었다.




그 어느 봄 김독자는 얼굴 한구석에 피멍이 든 채로 유중혁의 집에 놀러 왔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놀랄 법도 한데, 김독자는 태연했다. 유중혁의 어머니와 아버지 역시 태연했다. 저 집은 하여간 또, 하며 쯧쯧거리는 소리를 몇 번 냈을 뿐이다. 중혁아! 그러거나 말거나 김독자는 말갛게 웃으며 유중혁이 누워있는 침대로 왔다. 여전히 김독자는 유중혁을 볼 때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이었다.

유중혁은 그런 김독자를 보면서 생각했다. 날 위한 신은 존재하지 않아도, 나는 죽어서 김독자를 바라보는 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다면, 유중혁은 김독자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밤하늘 그 수많은 별무리 아래에서 살아가는 김독자는 영원히 안전할 것이다.

유중혁은 자신이 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믿었다. 처음으로 별을 바라보던 그 순간까지, 심장이 두근두근 뛰다가 어느 순간 딱 멈춰서 차갑게 식어가던 그 순간까지, 의식을 잃기까지,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그리고 어느 날 정말 그렇게 되었다.



그 어느 날, '유중혁'의 이름이 한 번 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유중혁이 불리기 시작했다.

그 다다음 날도, 그 다다음 날도.

유중혁의 '존재'는 계속해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인가부터 유중혁이라는 이름이 기억되기 시작했다.

키보드를 통해 입력되는 수천 번의 이름. 유중혁. 유중혁. 유중혁. 유중혁. 유중혁. 유중혁.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신화는 그 어느 날인가 전기 자극을 타고 전송된 ㅇ이나 ㅕ, ㅠ와 같은 지극히 디지털의 세상에서 시작되었다.

유중혁. 생성. 로그인. 플레이. 로그아웃. 다시 로그인. 플레이. 로그아웃. 로그인.

플레이. 로그아웃. 유중혁. 생성. 로그인. 플레이. 로그아웃.

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가 로그인과는 관계없이 '유중혁'을 말하기 시작했다. 어느 곳에서 '유중혁'에 대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유중혁을 말하고, 또 말하고, 또 말하고, 게시판에 '유중혁'을 찾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그와 동시에 또다시 어느 곳에서인가,

유중혁, 생성, 로그인, 플레이…….



0과 1로 이루어진 수많은 부름 끝에 어느 날 기어이 '유중혁'은 눈을 뜨고야 말았다.

그는, 별이었다.



유중혁은 맨 처음 별이 되어 다시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람을 제일 먼저 알아보았다. 유중혁은 누가 자신을 신으로 만들었을지 분명히 알았다. 그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김독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탄생한 신의 첫 언어는, 짧고 간결했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김독자,


...내 창조주.


결국 어디에 한눈을 팔아도 글쓰기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문의는 side_n_tab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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