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침묵보다 나은 것들


바깥에 무슨 일이 있거나 말거나 우리는 공방에 처박혔다. 나는 1층 일리자의 방에서 환자 상태를 볼 겸 아이디어 낙서를 할 겸 노트와 연필을 안고 침대 옆에 붙박이로 지냈다. 노트가 빼곡하게 들어찼다. 하지만 도저히 완성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하나도 선을 따지 못했다. 그냥, 나중에 마음 편히 하고 싶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는 바람에 약속했던 도장 디자인도 끝냈다. 류트, 검, 펜 아이콘을 합친 형태였다. 당연히 일리자가 사용할 이미지는 류트가 맨 앞, 알렉은 검, 내 건 펜 아이콘이 메인이 되도록 그렸다. 마찬가지로 선은 나중에 딸 생각이다.

너무 과하게 일하지 않나 싶긴 했지만 마법진 그리는 일을 제외하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일리자 옆에 멍하니 앉아있으며 오늘도 뼈저리게 깨닫는다. 그놈의 마력. 이 세상에는 마력과 체력이 전부다.

여기는 병간호도 마법으로 했다. 몸의 노폐물 제거에 청결 응용 마법, 호흡기와 점막 관리에 습도 조절과 공기 순환 마법 등등.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몸을 돌려주거나 죽 떠먹이기, 주기적으로 호흡이나 심장박동을 체크하기 뿐이었다. 현대 사회보다 편한데 도울 일이 많지 않으니까 슬펐다. 마력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냐.

희미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일리자의 몸을 오른쪽으로 돌아 눕혔다. 그리고 이불을 잘 정리해 주었다. 2시간 단위로 들려서 알람으로 쓰기 좋았다.

혹시나 싶어 생각날 때마다 전완근과 손가락도 마사지했다. 예전에 재활 동영상을 한참 눈여겨 보던 시절이 있어서 따라하는 게 별로 어렵지 않았다. 밤에 교대하는 간병인에게도 가르쳐주고 가끔 해 달라고 부탁했다.

1층 방인데도 쾌적하고 해가 잘 들었다. 지대가 높아서 그런가. 아무리 마법이 있어도 진짜 바람보단 못하겠지 싶어 창문을 열었다. 도형이 잔뜩 그려진 노트 페이지가 팔락거렸다.

일리자를 공방으로 옮겨둔 지 삼 일째였다.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식사 꼬박꼬박 나와, 세탁이나 청소 안 해도 돼, 어려운 병간호는 마법이 다 처리해. 몸은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은수야, 집사랑 교대. 산책 갔다 오자.”

“네.”


오늘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알렉이 얼굴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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