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걸까

꽤 오래 됐는데

언젠가 한번쯤

나를 알아봐줄까요

이대로 엔딩이 날 것만 같아

마음만 졸이죠

이름은 알까요 나는 Cameo

빛나는 널 볼 때 너무 아파요

나 소심해도 그대의/Spotlight 받고 싶은걸요

           -러블리즈  'cameo' 중에서 



***


보쿠토씨,

보쿠토씨는 먼 미래에 저를 어떻게 기억할까요.


당신의 인생에서 저는 조연이라도 될 수 있을까요?


먼 훗날, 당신의 시나리오에 저는 무엇이라 기록될까요.


지나가던 후배? 엑스트라1?


아,


존재하긴 할까요?



***



당신이 기억하는 처음은 언제인가요?

입학식?

아니면 첫 부활동?


저에게 처음은 당신의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어렸던 저는 넓은 코트에 설 수 없었습니다. 작았으니까요. 매번 선배들에 밀려 설 수 없었습니다. 당신을 보기 전까지는 그 마저 분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태생이 무심한 편이니까요. 그런데 당신이 코트에서 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처음으로 분했습니다. 당신이 호승심 넘치는 눈으로 바라보는 상대도, 분한 기색으로 노려보는 상대도, 모두 저였으면 했습니다.


악착같이 매달렸습니다. 겨우 코트 옆에 설 수 있었습니다. 비록 저에겐 단 한 번의 기회였지만 당신과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아주 찰나의 마주침이었습니다. 당신은 그 때의 저를 기억하십니까? 저는 그 때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형형한 눈빛이 저를 꿰뚫었거든요. 그 때 저는 아, 이대로 져도 좋아 생각했답니다. 그래서인지 한 번의 마주침으로 끝나버렸지만요.


연습시합에서 볼품없는 모습을 보여서 일까요. 당신을 처음 보았던 코트에 올랐을 때쯤, 당신은 더 높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이 있는 곳으로 향하기 위해 발버둥 쳤습니다. 저의 처절한 몸부림을 누군가가 보았나 봅니다. 드디어 저는 당신이 있는 무대로 갈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서있는 무대는 저에게 버거웠습니다. 당신은 무대에서 마음껏 날아다니는 주연이었다면, 저는 그 밑에서 열심히 무대를 만드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당신의 앞에 섰지만, 당신은 저를 보았을까요? 당신의 눈은 저를 향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당신과 같은 무대에 설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오로지 당신만을 보며 아등바등 기어오르던 곳인데. 다른 수많은 지망생들이 떠나갈 때, 저도 떠나고자 했습니다. 당신만 아니었다면요.


“나이스 토스!”


의례적인 한 마디.

어쩌다 올려준 단 한 번의 토스.

거기에 따라오는 한 마디의 기합.


저는 떠나려던 마음을 접었습니다.

다시 당신을 향해 아등바등 기어오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수많은 엑스트라들처럼, 고만고만한 실력으로 여전히 무대를 바라보는 지망생이었고, 어쩌다 한 번 같은 무대에 오르는 카메오가 되었습니다.


몇 번의 카메오 출연 이후, 저는 더욱더 독해지기로 했습니다.

하다보면 카메오 신세는 면할 수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드디어!

드디어 당신의 옆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조연이지만, 당신의 옆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욕심쟁이였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더 좋은 배역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하루를 좀 더 독점하고 싶었습니다. 짧은 부활동 시간은 저의 욕심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떨리는 심정으로 당신의 앞으로 간 저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단 하나의 대사만을 반복하던 저는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다시, 심기일전하고 당신의 앞으로 가려했습니다.

당신의 앞에 미리 서있는 존재가 저를 막았습니다.

겁쟁이인 저는 도망쳤습니다.


도망쳤기 때문일까요.

당신의 옆에는 제가 아닌 다른 존재가 당신과 함께 했습니다.


다시 당신의 상대역을 구하는 오디션이 암암리에 열렸습니다.

그 역할을 노리는 수많은 존재들이 도전했고, 한 때 스쳐가는 카메오들이 되어갔습니다.

그 때마다 제 심정은 참담했습니다. 당신의 옆자리를 잠시라도 차지한 배우들은 한결 같이 작고 여리여리한 배우들이었는데. 경쟁하는 작고, 여리여리한 배우들 중에서 저만 크고 듬직한 배우였으니까요.


그렇게 당신의 주위를 맴돌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당신이 떠났습니다.

당신이 떠난 무대는 저에게 의미가 없었습니다. 덩그러니 남겨진 저는 텅 빈 무대를 지켰습니다. 간혹 당신이 방문하는 작은 무대였으니까요.


당신이 떠난 무대를 지키며 제 역할을 겨우겨우 해내던 제게 당신은 자랑스럽다고 했습니다. 그 보잘 것 없어 보이던 무대의 볼품없던 제가, 주연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당신과 나의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새로운 무대를 찾는 저에게 당신의 무대는 오를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당신에게 있어서 스쳐가는 존재였습니다. 1년. 과연 당신의 시나리오에서 몇 장면으로 표현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찬란한 시절의 시나리오에서 저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그런 존재겠지요.


저는 마지막으로 발악해보려 했습니다.

당신을 찾아갔습니다. 어쩌면 어느 한 구석에라도 서 있을 수 있을까 했습니다.

당신은 새로운 주연과 함께 빛나고 있었습니다.

제가 봐도 너무 아름다운 한 쌍이었습니다.


저는 관객이 되었습니다.

제 마음을 담은 꽃다발이 축하의 꽃다발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무대에 제가 설 곳은 없었습니다.


저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았습니다.

당신의 무대에 한 번만이라도 더 오르고 싶었습니다.


욕심 많은 저는 무대 아래서 당신을 애타게 울부짖었습니다.

당신은 그런 저를 보았을까요?

어두컴컴한 무대 아래, 수많은 이들이 연호하는 당신의 이름을 애타게 외치는 저의 목소리를 들었을까요? 작디작은 제 목소리를 알아차렸을까요?


보쿠토씨.

저를 봐 주세요.

당신의 곁을 내주세요.


당신의 전성기 장의 막이 내렸습니다.

많은 관객들이 극장을 나갔습니다.

저는 떠날 수 없었습니다.


열릴 생각이 없는 막을 보며, 그 뒤에 있을 당신을 연호했습니다.

앙코르를 외치는 저의 목소리가 당신에게 닿기를 바랐습니다.


목이 쉬어라 외쳤습니다.

아직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관객이 있노라고.


어느새 혼자 남았습니다.


다시 슬그머니 욕심이 차올랐습니다.

당신을 이제 혼자만 볼 수 있지 않을까.


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막이 열렸습니다.


혼자 서있는 당신이 보였습니다.


어두운 극장 무대의 당신과 그 아래 관객석의 저.

둘 만이 조명을 받고 있는 듯 했습니다.


저를 기억하시나요?


당신은 당신의 오랜 팬을 기억했습니다.


제 이름을 아시나요?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다정한 당신은 스쳐간 저의 이름을 기억했습니다.


“뒤늦게나마 말해요. 첫눈에 반했어요. 저랑 사귀어주세요.”


저를 반겨주는 당신에게 오랜 시간 품어왔던 대사를 읊었습니다.

그 어린 날 왜 그리 떨었는지 이해되지 않을 만큼, 담담하게, 쉽게 말했습니다.

그 때의 마음과 다른 것은 없는데, 오히려 더 커졌던 마음인데

나이를 먹었던 탓인지 저는 노련한 배우가 되어있었나 봅니다.


당신은 손을 내밀었습니다.

당신의 손에 기대어 높디높은 무대를 올랐습니다.

막상 올라가보니, 높지 않았습니다.

욕심이 많은 만큼 겁도 많았나봅니다.


드디어 당신과 한자리에 섰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당신의 상대역이 되었네요.

당신과 나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가 너무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납니다.



***


있잖아, 아카아시. 나 너 중학생 때부터 알았다?


시합에서 나만 졸졸 따라다니던 시선을 쫓아갔더니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아카아시가 있더라. 그 때 참 귀여웠어.


그 다음으로 본 건, 연습시합이었지? 핀치서버로 나왔었는데, 한 번으로 끝나서 나도 좀 아쉬웠는데. 적이었는데 이런 소리하는 건 좀 그런가? 근데, 눈을 반짝이면서 들어왔는데 나중에 나갈 땐 울상이어서 좀 미안했어.


그 뒤에 공식경기에 안 나와서 아쉬웠지만,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좋았어. 근데 나 볼 때 마다 계속 울상이어서 다가갈 수가 없었어. 오죽하면 감독님이랑 코치님이 너 괴롭히냐고 물어봤다니까?


어쨌든 너는 뛰어난 세터였으니까. 결국 주전까지 올라와서 얼마나 반가웠는데. 주전되고부터는 나랑 말도 잘하고. 드디어 친해졌구나 생각했어.


언제인가 아카아시가 불러냈을 때, 사실 나도 좀 두근두근했다? 근데 아무 말 없어서 지레 내가 마음을 접어버렸어. 미안해. 내가 겁이 많았어. 그래서 많은 사람들과 만났던 거야. 이제와 이런 얘기 하는 거, 전부 핑계인데. 그냥 그랬다고 말하고 싶었고, 사과하고 싶었어.


근데 꾸준히 나를 봐주는 네가 계속 눈에 밟히더라. 그래서 더 열심히 했어. 아카아시, 네가 실망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래서 더 열심히 했는데, 나이는 못 속이나봐. 결국 볼품없어져 버려서 아카아시도 떠났을 줄 알았어. 배구를 하지 않는 나는 상상한 적이 없어서, 너무 무서워서 숨었어.


그런데 계속 누가 부르는 것 같더라. 아카아시가 부르는 것 같아서 내 착각인 줄 알았어. 그래서 더 숨었는데. 계속 들리는 것 같아서 누가 부르는지 찾았는데, 아카아시였어.


나는 다 마음을 접은 줄 알았는데, 아카아시를 보고, 아카아시가 나를 불렀구나 하니까 숨어있던 마음이 나 여기 있었지롱 하는 거 있지? 그래서 내가 고백 해야겠다 했는데. 아카아시가 먼저 선수를 쳐버렸어. 멋지게 하고 고백하려고 했는데. 나 너무 볼품없었지….


청혼은 내가 할 거니까. 기다려주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게.


근데, 아카아시.

네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어.


나도 첫눈에 반했어.

언제나 네가 제일 반짝반짝 빛났어. 늘 후광이 따라다니는 줄 알았다니까?


***


볼품없을 리가 없잖아요.

언제나 당신은 빛나는 존재인걸요.

당신에게는 늘 조명이 따라다녔어요.

제 인생의 주인공은 당신이니까요.


당신의 엔딩에 내가 있어서 참 기뻐요.


*** 


엔딩이 아니야, 새로운 막의 시작인 거지. 


그런가요.


그런거야.


soya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