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 대한 백 가지 이야기 



Marlin 作




“아메리카노?”

“아니, 카페라떼로. 휘핑크림도 잔뜩 올려서.”



지갑에서 막 카드를 꺼내고 있는 지민이 동작을 멈추었다. 


“의외네.”



지민은 입술을 오므린 채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점원을 향했다. 



“아메리카노 하나랑 카페라떼 톨 사이즈로요.”

“카페라떼에 휘핑크림, 초코시럽 올려드릴까요?” 

“네, 많이 올려주세요.”

“머그컵으로 준비해 드려도 괜찮으세요? 8300원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지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카드를 내밀었다. 이내 점원은 동그란 알림판, 카드 그리고 영수증을 내밀었다.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고 가장 구석자리 테이블로 향했다. 지민이 벽 쪽으로 앉고 지석이 그 앞에 앉았 다. 두 사람의 옆쪽 창 너머로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어지러이 움직였다. 



“지석이 너 아메리카노만 먹는 줄 알았는데? 그 사이 입맛이 바뀌었나?”



지민이 테이블 위에 손에 든 모든 것을 올려놓았다. 방금 전 종업원이 준 알림판 위로 빨간 불빛이 동그랗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석은 그 붉은 불빛에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면서 영수증을 쥐어 들었다.

 


“지금 상황도 쓰디쓴데 굳이 커피까지 쓴 아메리카노를 먹을 필요는 없 잖아.”

“많이 힘들구나. 요즘.”



지석은 지민의 눈빛이 부담스러워져 고개를 숙였다. 괜히 들고 있던 영 수증을 접어 사춘기 여학생들이 만드는 쪽지 모양으로 접고 있었다. 지민과 눈을 마주치지 않을 수 있는 핑계거리였다.



“현이는 요즘 어때?”

“뭐……. 딱히 좋진 않아. 이미 한번 입원해봤는데도, 전보다 더 무서 워하는 것 같아.”

“그렇지. 이번이 끝이 아니라 또 재발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테니 까.”

“신경외과 의사선생님이 어떻게 좀 못하려나? 불안감 줄이는 약이라던 가, 행복해 지는 약이라던가…….”

“내가 현이 한 테 처방해 줄 수 없을뿐더러. 나 정신과가 아니라 신경 외과거든.”

“그게 그거지 뭐.”



테이블 위에 있던 동그란 기계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대화를 피하고 싶 은 듯 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지민은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지석은 휘핑크림을 빨대로 퍼먹고 있었 다.



“현이도 현이지만. 너도 몸 관리 좀 잘해. 너도 이렇게 맨날 병원서 밤 새고 새우잠 자고 해서 버틸 만큼 튼튼한 몸은 아니니까.”



결국 다시 지민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매라 종종 그녀가 그의 엄마같이 굴 때가 있었다. 어린 시절 이런 잔소리가 싫 어 누나를 피해 다닌 지석이었는데, 나이가 들어서도 지민의 잔소리는 매 한가지였다.



“집에도 좀 들리고. 너 호적 파버리겠다고 협박하는 아빠지만, 아빠한 텐 아들이 필요하니까.”

“병원 일로도 바쁜 양반이 내 생각은 하겠어?”

“어휴, 아빠한테는 왜 이렇게 삐뚤게 나가는지 모르겠어.”



휘핑크림을 다 떠먹고 나서야 지석은 잔을 들었다. 너무 달았다. 말로는 세상살이가 고되기에 달짝지근한 커피를 마신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그 것은 지석의 상황이 얼마나 쓴가를 역설적으로 대변할 뿐이었다. 



“아버지한테 잘하는 건 누나가 다 알아서 하니까. 학생 때는 원하시던 데로 공부에만 전념했고, 직업도 의사로 선택했고. 나같이 기타나 붙잡고 곡이나 쓰고 있는 사람과는 차원이 다르지.”

“내 결혼도 그렇게 생각해?”

“뭐……. 그거야, 그 놈이 이상한 놈이었으니까.”

“아빠가 말씀하신대로 한 결혼, 6개월 만에 남편이 다른 여자 있는 것 알고 이혼하고. 그 이후로 나도 너처럼 불량아 노선 타고 있다니까.” 

“동생에게 불량아 노선이라니. 거참 너무하네.”

“왜? 넌 하고 싶은 건 다 하면서 살았잖아. 난 그런 네가 좀 부러웠 다.”



지민의 전 남편 이야기가 나오면서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급격히 냉각 되었다.


지석과 달리 지민은 어릴 적부터 부모님들이 원하는 모범의 정석이었다. 늘 군말 없이 시키는 일은 잘 따랐다.


피아노를 배우라면 배웠고, 공부해서 1등을 하라면 하는 타입이었다. 의사인 아버지의 말 따라, 좋아하던 미술 공부도 포기하고 의학 공부를 시 작했었다. 부모님의 지민이라는 선례에 근거한 기대는 그에게는 큰 무리 가 되었고, 그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지석은 집안의 외톨이가 되어갔 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완전 해방을 선포하고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을 시작했다.



지민의 결혼 또한 아버지의 동료 아들인 유명한 외과의사와의 정략결혼 수준이었다. 6개월 만에 파토 난 그 결혼 생활 이후, 지민은 부모님이 주 선하는 선도 마다하고 자유로운 연애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누나. 정말 지금 만나는 그 분이랑 더 진지하게 만나 볼 생각은 없는 거야?”

“진지하게 결혼이라도 말하는 거니?”



지민은 머그컵을 내려놓았다. 컵의 윗부분에서 커피가 흘러내리면서 종이 받침대에 동그랗게 모양을 남겼다. 이 분위기가 어색한지 지민이 머그 컵에 남은 자신의 립스틱 자국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뭐……. 결혼이 될 수도 있고.” 

“결혼은 이제 지긋지긋해.”

“굳이 나도 결혼이란 걸 말하는 건 아니야. 그냥 누나를 보고 있으면 철벽으로 꽁꽁 싸매고 있는 것 같아. 누나가 그 사람을 극복하고 행복했 으면 좋겠는데.”

“어쩌면 인생에서 다른 실패를 경험해 보지 못해서 이러고 있는지도 모 르겠다.”

“그래. 맞아. 누나는 너무 승승장구였어. 살면서 실패도 해보고 해야지 굳세어 지는데. 그 남자가 뭐 대수라고.”

“비싸봤자, 온실 속의 화초란 거야?



지석이 콧방귀를 꼈다. 어린 시절에는 무엇이든 잘하는 지민이 마냥 부럽기만 했었는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산 자신의 삶도 그다지 나쁘 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벽에 부딪칠 때 마다 주저앉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과거를 거울삼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강한 심장을 가질 수 있는 경험이 되었다.



반면 지민은 늘 승승장구 하는 삶이었기에 아직도 부서진 가정의 파편에 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조그만 실수라도 그녀에게 는 인생 전체를 실패한 것 같은 쓰디쓴 패배감을 줬던 것이다.



다시 그 파편이 상처를 긁어내고 지민은 이야기를 돌린다. 



“너랑 현이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난 참 좋아.”



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아현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서로의 눈동자 너머 아픈 그녀의 모습을 보게 되어 두 사람의 대화는 늘 이렇게 바닥으로 치우쳤다.



이제는 익숙해 질 법도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아픈 것은 적응되기 힘든 문제다.



지민이 컵 바닥에 남은 커피를 마저 들이마셨다. 



“아. 나는 이제 올라가 봐야겠다. 다 마셨지?”



지민이 지석의 머그잔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한두 모금 정도의 연갈색 커피가 지석이 컵을 돌리는 박자를 타고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지민의 말에 지석이 급하게 남은 커피를 마셨다.

 


“나도 아현이 보러 올라가봐야겠다. 먹지도 않고 있을까봐 걱정되네.” 

“그래. 수고해. 너무 억지로는 그러지 말고. 애도 그걸로 스트레스 받겠다.”

“그래도 먹어야 기운을 차릴 테니까……. 누나도 들어가 봐.”



지석이 두 컵을 쟁반 위에 올렸다. 반납하는 곳에 쟁반을 올려 둘 때까 지 지민은 그 뒤에서 그대로 팔짱을 낀 채 지석을 기다렸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지석과 지민은 인사 없이 각자의 일로 발길을 돌린 다.



커피숍에서 나온 지석은 곧바로 혈액암센터 병동으로 향했다. 지금껏 빼 놓은 마스크를 다시 쓰고 닫힌 문을 통해 지나가는데 한순간 갑갑함이 파 도처럼 몰려왔다. 병의 재발은 아픈 아현 뿐만 아니라, 그런 그녀를 바라 보지 밖에 못하는 지석까지도 겨울가지처럼 말라가게 했다.



지석이 병실에 들어오자 곧바로 침대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아현이 보인 다. 아까 전 점심 식사를 하느라 45도 정도 세워둔 침대에 그대로 기대어 있었다. 고개를 제 어깨에 파묻고 잠들어 있는 아현은 아까보다 몸무게가 반은 줄어있는 것 같이 보였다.



지석은 침대를 천천히 밑으로 내렸다. 아현은 꽤나 깊은 낮잠에 빠져 들 었는지 일말의 미동조차 있지 않았다. 침대를 평평하게 만들고 그는 조심 스레 그녀의 머리 밑으로 베개를 집어넣었다. 자세의 변화가 생기자 아현이 꿈틀하며 몸을 돌려 누웠다. 척추 뼈가 보일 것 같은 아현의 앙상한 등줄기는 볼 때 마다 지석의 마음을 쿡쿡 찔렀다.



부르튼 입술이 시발점이 된 듯 아현의 마른 팔, 마른 다리, 창백한 얼굴 그리고 거칠어진 피부 모두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울지 말아야지 하며 그는 눈을 세차게 깜박였다.



아현이 몸을 움직이자 쇄골에 꽃아 놓은 히크만 선이 팽팽해졌다. 지석 은 제 손을 안달복달 하다간 아현의 어깨를 천천히 잡아 돌렸다. 지석을 등지고 누워있던 아현의 등이 침대 위에 붙으며 다시 선이 느슨해졌다.



“어……. 나 잠들었나보다.”



아현은 그다지 깊은 잠은 아니었는지 지석의 작은 접촉에 눈을 떴다. 



“내가 깨웠어?”

“아냐. 많이 잤어. 이따 밤에 못 잘라.”

“밥은 잘 먹었어?”

“응. 끝까지 다 비워냈으니까 그놈의 밥 타령 좀 그만해.” 

“착하네. 우리 현이.”



지석의 눈이 둥글게 굽어졌다. 그가 쓰고 있는 마스크 때문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미소로 입 꼬리가 잔뜩 올라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석이 아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현은 자신의 민머리가 만져지자 본 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지석이 머쓱한 듯 손을 거두었다.



“그래도 조금은 까슬까슬해 진 것 같다.” 

“그래 봤자 대머리인데.”



아현의 말도 까슬까슬했다. 잔뜩 찌푸리던 아현이 갑자기 머리를 쥐어 잡았다.



“또 머리 아파?”



지석의 몸이 침대 쪽으로 수그려졌다. 손으로 차광막을 친 채 지석의 시선을 막던 아현이 한참이나 있다가 다시 손을 내렸다.



“괜찮아?”



한참을 말없이 있던 아현이 길게 입을 열었다.



“지석아. 머릿속에서 누군가 망치질을 해대는 것 같아. 가만히 누워있 을 때도 머리가 징징 울려. 어떤 사람은 그러더라. 머릿속에서 개구리가 울어대는 것 같다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그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그녀의 작은 머리통을 감싸 안아줄 뿐이었다.


친한 동기의 등단 소식을 들어서인지 오늘따라 더 저기압으로 보이는 아현이다.



“근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그 망치질로 부서지는 것 같아. 이렇게 가만히 누워서 머리의 울림을 느끼며 한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다시 글을 쓸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 그럼 또 무서워 져서 책이고 뭐고 닥치는 대로 읽으려고 해. 그런데 글씨는 아무런 의미 없이 읽히고 금세 잊혀져. 다시 보려하면 기운이 빠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지석아. 나 무서워.”



아현의 눈이 붉어졌다. 우는걸 보이기 싫은지 그녀는 그대로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쇄골에 연결된 히크만 선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녀가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괴로워 할 때에도 항암제는 끊임없이 그녀 의 몸으로 흘러들었다.



지석이 다시 아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움츠리지 않았 다.


병마는 희망을 갉아 먹고 가슴 밑바닥에 깔려있던 두려움을 들어 올렸다.


지석은 그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읽어줄게 책.”



지석은 요 며칠 동안 아현이 읽고 있던 소설책을 집어 들었다. 꽤 오래 읽은 것 치고는 몇 장 넘어가 있지 않았다. 접혀있는 페이지를 펼쳐 지석 은 천천히 글을 읽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목소리가 자신의 울음소리를 감추어 주기라도 하는 듯 아현은 입을 앙다물고 끅끅 거렸다.



지석의 말소리가 점점 느려지다가 사라졌다.

 


헤테로 빙의글을 쓰고있는 말린입니다 다른 글들도 종종 쓰고있습니다 읽으면 행복해지는 글을 쓰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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