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드 인.

W. 수미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 것일까.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지만 이건 너무 한 것 아닌가. 제 손은 이미 가득 들린 노를 저을 수가 없는데. 남들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라고 하겠지만 경수에게 주어진 일감들은 정말이지 더 받을래야 받을 수가 없이 포화상태였다. 여태 바쁘다 바쁘다 했어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올 한 해 대형 스튜디오에서 거의 1~2년에 한 번씩 내어주는 시리즈물을 벌써 한 두달 간격을 두고 몇 차례나 쏟아낸 것이 원인이었다. 히어로가 단체로 쏟아져 나오는 세계관을 지닌 작품은 각 고유 히어로 캐릭터들의 단독 무비도 시리즈를 입혀 내보냈는데- 나왔다 하면 기본적으로 두터운 팬층을 이루고 있으니 모험보다 손해 보지 않는 쪽에 투자하는 배급사 또한 많았기에 영화관들은 앞 다투어 스크린을 확보하고 종일 대형 스튜디오의 영화들을 유치했다. 화려하게 쏘아 올리는 CG들과 풍부한 액션, 과하지 않은 스토리가 함께 담기는 영화는 경수 또한 간간히 유쾌하게 즐겨보는 장르에 속했지만 단기간에 여러 세계관의 복합적인 유대 관계를 머릿속에 그려내며 봐야하다 보니 영화를 보기 전 지난 편 복습도 덩달아 따라왔기에 자신이 쓰는 것이 평론인지, 리뷰인지, 혹은 이 영화들의 논문인지 모를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게 또 쿠키영상이 몇 개야..”



본편과는 별개로 숨겨진 메시지가 가득 담긴 쿠키영상은 짧게는 몇 초, 길게는 수 분 가량. 그마저도 개인차에 따른 해석이 존재해 참으로 난제라고 경수는 난색을 표했다. 다 좋아, 흥미롭지. 재미도 있고 뭐 가끔 감동도 있어. 그런데- 이게 참 뭐랄까 경수의 입장에서는 씁쓸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최근 영화판은 가격이 많이 오르기도 하고 불법 다운로드나 유출 등의 문제가 심각해 판이 조금 축소 된 느낌이 강했는데- 이러한 시리즈물의 연이은 흥행으로 다시금 영화관에 관객들이 늘고, 활력이 늘어난 것은 맞다. 순기능이 분명 존재했지만, 역으로 이건 아니다 싶을 정도로 독과점 또한 심했다.



“참, 좋은 영화였는데- 너무 주목 받지 못하고 상영하는 관이 작았지.”



이름이 주는 신뢰가 있었기에 관객들 또한 값비싼 돈을 주고 실패할 영화는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장르에 되도록 편견 없이 애정을 쏟고 있는 경수는 상당히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꼭 알아야만 했을 그런 이야기들이 세상에 나올 때마다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졌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삶도 참 각박한데, 즐겨야 하는 문화생활마저 우울함 가득한 이야기를 보아야 겠느냐, 라고 말한다면 감히 권유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처음부터 이렇게 까지 상영관이 축소되어 나올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개봉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상영을 종료한다는 이야기가 아쉬웠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보고 온 영화 중 따로 인터뷰는 진행하지 않았지만 많이 보아주셨으면, 하는 영화가 하나 있어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현재 상영 중이나 관이 작아 곧 막을 내린다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실제 상황을 담고 있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현재에도 실존해 계시는 인물이고요. 어쩌면 ‘의인’ 의 삶을 다룬 영화, 어쩌면 당시의 ‘참담함’을 담은 영화. 그래서 더욱 잊어서는 안 되는, 끊임없이 회자되며 세상에 소리를 내어야 하는 그런 영화. 촬영 기법 들은 여타 비슷한 주제를 다룬 영화들에 비해 간결합니다. 불필요한 회상장면은 그저 상황에 맞는 대화로 대체. 간간히 웃음 지을 수 있는 속 이야기도 함께입니다. 제가 감히 평가해도 된다면, 별 다섯 개 그보다 더 가치 있다고 말씀 드리고 싶네요. 잊지 않으면 언젠가 세상은 바뀌어 갑니다. 오늘도 좋은 저녁 보내세요.]



개인적이란 말을 붙이긴 했지만 본인이 가진 영향력이 조금 작용할 것을 대비해 이 글을 확인하는 즉시 찬열에게 걱정 어린 잔소리를 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등록]을 미련 없이 누르던 경수가 생각했다. 체력이 되는 대로 급한 칼럼 원고들을 마감하고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며 마감이 코앞인 일들을 마친 뒤 시간을 보니 벌서 새벽 두시를 알린다.



“아직 촬영 중인가.”



백현이 연예인임은 눈으로 보고 있는 아우라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정말 잘나가는 톱스타라는 것은 제 앞에서 너무도 소탈하여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었는데- 근래에 백현이 TV나 인터넷만 보아도 흡사 우르르 쏟아지는 것 같아 그 인기와 더불어 쉴 틈 없다 엉엉 우는 소리 하는 것이 거짓은 아니라는 걸 경수는 몸소 체감했다. 실제로 시간대가 맞지 않아 직접 만나는 것은 무리였고 그나마 경수가 서재에서 작업 하는 저녁~새벽 시간대- 혹은 백현의 스케줄이 간혹 일찍 마무리 된 저녁, 잠시 짬이 난 새벽 등의 통화나 메시지가 서로의 부재를 채워주는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여보세요?”

-잤어요? 내가 깨웠나? 목소리가 잠겨 있는데.]

“마감이 있어서 작업했어요. 그럴 리가. 전화 기다렸는걸.”

-가끔 훅 치고 들어오면 내가 마음이.. 너무 좋네.]

“알아주니 좋네요.”



그 사이 변한 것이 있다면 점점 자연스러워지는 반 존대 랄까? 

함께 있어주지 못한 미안함은 티내지 않으며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 안부를 묻고,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 서로를 의지하며 믿음을 쌓고. 간혹 사이좋은 연인이 그렇듯 티격태격 하며 장난도 나누고.



-날이 너무 더워서, 야외 촬영 하는데 죽었지 뭐에요. 나 죽었어.]

“목소리 쌩쌩한데? 물 많이 먹어요. 어떡해. 우리 집은 에어컨 빵빵해.”

-지금 약 올려요?]

“네, 그럼요. 그 심오한 뜻을 이제 아나?”

-...못 이기겠다니까. 아, 참 나 선물 있는데. 받았는지 모르겠네?]

“선물?”



그때였다. [띵동] 경수의 집 벨이 울린 것은.

이 늦은 새벽, 택배가 올 리도 없고. 어쩐지 기시감이 일어 경수가 핸드폰을 든 채 현관을 향해 걸어 나갔다. 


문을 열기 무섭게 보이는 익숙한 얼굴. 백현이 목에 샛노란 리본을 묶고 성큼 현관으로 발을 디뎠다.



“짠. 내가 선물.”

“반품 할 수 있을까?”

“...고객님, 죄송하지만 한정판이라 교환 환불 어렵습니다.”

“그것 참 아쉽네요.”

“뭐야, 저 안 안아 줄 거에요?”

“그럴 리가.”



기특하지 않냐며 경수를 향해 양 팔을 벌린 백현을 한 걸음 다가간 경수가 꼬옥. 다정하게 마주 안아 주었다. 품에 느껴지는 온기가 좋아서 조금 더 안고 서 있었을까. 낮게 웃던 백현이 제 목에 두른 리본을 풀어 경수의 손목에 다시금 묶어 주었다.



“너무 귀엽다. 어쩌죠. 도경수 미치게 섹시한데.”

“도대체 어디..."



다가오는 백현의 입술에 경수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짧게 머물다 떨어지기 무섭게 아랫 입술을 감쳐물며 혀끝을 옭아매는 백현에 경수가 낮게 신음했다. 꼭 껴안은 두 팔은 급할 게 없는데, 입술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점점 뒤로 밀리는 듯한 느낌과 숨이 차올라 경수는 백현의 등을 살짝 쳤다. 후우- 아쉽다는 듯 떨어진 입술을 보며 안도하기 무섭게 백현의 눈빛이 가라앉았으나 경수는 둘렀던 손을 풀어 시야를 차단했다.



“지금 눈에 음란마귀가 들어앉았네요.”

“그거 누구나 마음에 하나쯤 있지 않나요.”

“난 아직 없어서.”

“거짓말.”

“음, 거실에서 이럴 건 아닌 것 같아서.”

“그럼 방은 괜찮아요?”



... 내가 왜 말로 밀리지.

고개를 갸웃이던 경수가 이내 백현의 등을 욕실로 떠밀었다. ‘씻고 자요. 벌써 세 시야.’ 그러나 그대로 물러 설 줄만 알았던 백현을 간과한 경수는 몰랐다. 갈아입을 옷을 챙겨와 내밀자마자 자신 또한 욕실로 들어가게 될 줄은.



*



단 한 번도 이렇게 써 본적이 없는, 욕실에 괜히 자리만 차지했다고 불평한 큰 욕조가 오늘은 왜 이리 다행인지. 좁았더라면 더 큰 사달이 났겠지 싶어 경수는 그저 데굴, 눈을 굴렸다. 무릇 제 덩치의 사람이 넷은 족히 발을 뻗어도 될 크기의 욕조 안 끝과 끝, 서로를 마주 본 채 앉은 경수는 어쩌다 제가 이 욕조에 앉아 있나. 첨벙. 채워진 물을 손바닥으로 찰싹였다.



‘갈아입을 옷 여기 둘..’

‘같이 씻어요.’

‘...무슨..’



저는 참, 백현의 시무룩한 얼굴에 약하단 사실을 새로이 알았다. 한번만. 응? 한 번만. 하며 축 처지는 눈을 보자니 오랜만에 보기도 했고, 몸이라면 이미 튼 사이 아니던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 불과 오 분 전이었는데. 금방 끝날 것이라 생각했던 샤워가 어째서 욕조에 물이 찰랑이는 지는 경수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패기롭게 욕실로 경수를 이끌고 욕조에 물을 받아 앉혀놓았으면서 어색하기는 백현도 매한가지였는지 시선을 맞추기 무섭게 뽀그르, 물속에 얼굴을 담궈 물보라를 일으켰다 고개를 들었다.



“아. 집에 이런 거 있었는데.”

“..소금?”

“언론 시사회 때 배급사에 선물 받은 건데. 색이 예뻐서요. 피로가 풀린다고 하던가.”

“분홍색이 반짝반짝 하네요.”


 

그러나 난관은 존재했다. 이런걸 뭐 사용 해봤어야 알지. 어떻게 얼마나 넣는 거지? 작은 글씨에 눈을 찌푸려보았으나 습기도 가득, 안경도 없어서 글자가 보일 리 만무했다. 이에 백현이 제가 읽어보겠다며 손을 뻗은 사이 경수가 한 발 빨리 우르르. 말끔한 얼굴로 한통을 모조리 물에 부어버린 뒤라 거품이 조금 일다 반짝이는 분홍색 물로 변하는 것을 보곤 한참을 빵 터져 욕실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소금 과다 복용 아닙니까.”

“먹는 건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먹지 마세요. 피부에 양보하세요?”

“...음. 예쁘잖아요. 반짝 반짝. 솜사탕 같네.”

“좀, 위험하긴 하네요.”

“..? 네?”

“눈앞에 당신이 참 반짝거려서.”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찰랑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백현에게 다시금 삼키어지는 제 입술과 감기어지는 시야 너머로 경수는 생각했다. 사실 백현은 불이 꺼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아무래도 소금이 활활 타오르는 기폭제가 된 것 같았다.



*



젖은 머리에 수건을 얹고 나온 경수가 티셔츠를 들추며 온통 붉게 물든 제 몸을 보곤 따라 나오는 백현을 흘깃 째려보았다. 멈칫 하던 백현이 경수의 눈치를 보며 하하. 웃는데- 반들 해진 깐 달걀 같은 그 얼굴이 어찌나 뽀얀지. 백현의 볼을 손가락으로 쿡 찔러보다 경수가 거실 소파에 앉으면 그 옆으로 걸터앉은 백현이 얹혀진 수건을 들어 살살, 경수의 젖은 머리칼을 말려 주었다.



“생각해봤는데-”

“뭘?”

“같이 살면 안 됩니까?”

“전 지금이 좋아요.”

“너무 칼 같이 거절하니 좀 상처받는데.”



물기를 닦던 손이 의기소침하게 멈추니 경수가 그 모습을 보고 픽- 웃다 말을 이었다.



“당신, 방문이 기다려지는 설렘이 있잖아.”

“..예?”

“그리고 각자 존중할 수 있는 것도 좋잖아요. 어쩌면 우린, 직업적인 부분 때문에도 시작이 고민이었었는데- 그런 만큼 앞으로도 적당한 ‘선’이 있는 건 좋을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그건 반박할 여지가 없죠. 맞는 말이니까.”

“그리고 신념이 흔들리고 싶지 않아요. 아직은. 그러니까, 아직은.”



아직이라는건 -

백현이 눈을 반짝이니 경수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기다려 줄 수 있겠냐고. 일과 사랑을 분리하는 건 참 어렵지만 그래도 자신들은 일과 사랑이 섞여서는 절대 안 되는 본분 이란 게 있는 사람들 아닌가. 그러니 되도록 조금만 더 이런 시간이 있었으면 했다. 같이 살게 되는 편이 얼굴도 자주 볼 수 있고 좋은 점이 훨씬 많겠지만. 못 이루어질 일은 또 아니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백현이 기다려준다면 경수는 준비가 되는 대로 함께 해 줄 의향이 차고 넘쳤으니까.



“아까, 제가 선물이라고 했잖습니까.”

“네, 노란 리본 달고 말이죠.”

“진짜 선물이 하나 더 있어요.”



현관 한 켠에 놓아두었던 쇼핑백을 가져와 내밀었다. 언젠가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서 처음 애정을 갖게 된 영화 한 편이 있다고 소개 했었다. 당시에는 DVD가 나오기 전이라 비디오 테잎을 구해서 보고 또 보고. 그러다보니 테잎이 늘어나 지금은 서재 서랍장 한 구석에 조용히 모셔놓고 있는 애정 가득한 영화. 시대가 많이 바뀌었어도 이 영화는 DVD로 재판 될 예정이 없었기에 영화를 보며 간간히 떠 올렸던 기억이나, 감정들만이 추억으로 남아 있었는데- 그 테잎을 백현이 경수에게 선물 한 것이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아니, 이런 건 백현씨 마법사에요?”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사랑의 힘이란 못할 게 없어요.”

“무적이네요. 든든하네. 도경수 애인이 천하무적 변백현이라.”



경수는 그저 웃음 지었을 뿐이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반짝여서 백현은 일순 동작을 멈추었다. 전해주며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으니까. 어쩌다 이렇게 보물같이 빛나는 사람을 제가 사랑하게 되었는지, 마음을 나누는 것을 허락 받을 수 있었는지. 그 인연에, 운명에 감사한 순간이 얼마나 많던가. 말하기에 앞서 떨려오는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쉬- 내뱉었다.



“경수씨, 간지러울 수도 있겠지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들어 줄래요?”

“그럼요. 얼마든지.”

“많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제게 마음을 주고, 마음이 가는 것을 허락해줘서 고마워요. 만나게 된 날들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지금이 얼마나 감사한 나날들인지 몰라요.”

“꼭, 프로포즈 받는 기분이네요.”

“세미 프로포즈라고 하죠. 그냥, 경수씨가 제 앞에 있는 게 고맙고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인걸요.”



눈 밑이 약간 붉어진 백현이 고개를 숙였다. 이에 경수 또한 줄곧 소파 옆 스툴에 놓아두었던 상자를 가져와 백현에게 내밀었다. 바쁜 일정들이 모두 끝나 백현을 만나는 날 전해주려고 놓아 둔 것이었는데- 지금 건네주어야 할 타이밍인 것 같았다.



“하하. 이거 진짜로 구해 주신겁니까?”

“갖고 싶어 하셨잖아요? 어렵게 구한거에요.”

“잘 입을게요.”



첫 키스의 추억이 담긴 티셔츠를 모를 리가 있나. 백현이 품안에 소중히 갈무리하자 가까이 다가 온 경수가 귓가에 속삭였다.



“안에, 쪽지가 하나 있는데요.”

“예.”

“우리 집 비밀번호야.”



아직 꺼질 불이 남았던가.

속삭이던 경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리를 감싸오며 맞닿아오는 입술의 호흡이 거칠었다. 일으켜 세워 거실을 뱅그르 돌면서도 떨어지면 따라붙고 통통하게 부어오르는 아랫입술을 진득하게 빨아올리며 침대로 향하는데- 퍼뜩 정신 차린 경수가 백현의 손등을 찰싹 찰싹 내리치며 급히 입술을 떼어냈다.



“오늘은, 진짜 일이 넘쳐요. 아까도 했잖아. 자기 전에 봐야 할 영화가 있단 말이야.”

“..가끔은 직업정신이 뒤로 밀려도 된다고 생각해.”

“그러지 말고 같이 보면 안 돼?”



경수가 백현의 축 늘어진 얼굴에 약하다면 백현은 경수의 깜박이는 두 눈에 참으로 약했다. 그렇게 급히 달아오른 불이 식으며 침대에 나란히 꼬옥 붙어 경수가 추천한 영화를 보았다. 조금 툴툴거리며 투정하긴 했지만 백현 또한 영화를 너무도 사랑했으니- 도입부가 지나자 커플 아니랄까봐 둘 다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영화에 무서울만치 집중했다. 



“저기선 상황을 좀 더 강조 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하지만 효과음이 센 편이니 화면까지 당겨 잡았으면 과한걸.”

“본 주제를 자칫하면 잊을 수도 있으니까.”

“담고 있는 메시지가 워낙 강렬해서 괜찮지 않나.”



그래, 백현과 경수 사이에는 이런 즐거움이 존재했다. 잘 맞은 취미생활, 그것이 무엇이든 취향에 국한되지 않고 느꼈던 모든 것들을 이야기 하고 공방을 주고받으며 브레인 스토밍을 이어나가는 일련의 과정들. 분명 많이 다른 두 사람인데, 이런 점은 거울을 보는 듯 참 많이 닮아 있었다.



“잠은, 못 자고 가겠네요.”

“.. 이렇게 늦었는데?”

“사실 다섯시까지 가겠다고 하고 나와서.”

“지금 다섯시 넘었잖아요.”

“네, 핸드폰이 좀 뜨겁네요. 오전 중에 스케줄이 잡혀있어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럼, 정말 좀 잤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피곤하겠다.”

“음, 경수씨 곁에 있어서 충분히 충전 되었어요. 저 지금 에너지 풀.”

“말이라도 다행이네요.”



어슴푸레 동이 터 오려는 새벽- 경수의 배웅을 받으며 백현이 스케줄을 하러 떠났다. 닫힌 문 앞에 한참을 서 있던 경수는 어쩐지 허전함을 느꼈다. 같이 사는 것도 정말 나쁘진 않을 것 같네. 중얼거리면서.



*



[B관, D열 04번.]



경수는 자리가 쓰인 표를 들고 영화관에 들어섰다. 불은 모두 환하게 켜진 채 였는데 경수가 들어서자 출입문이 닫혔다. 전부 40석 뿐인 프리미엄관이라고 듣기만 했지 관객이 저 하나 뿐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경수가 주변을 두리번 거렸으나 역시나 저 혼자 뿐이었다. 얼떨떨한 기분에 잠시 서성거리다 자리에 앉으니 조명이 약하게 소등 되었다. 아주 찰나의 침묵이 흐르고 어느 새 스크린 앞에 백현이 바로 서서 경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렇게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서서 오로지 경수만을 향한 시선. 달싹이던 입이 열린다. 이곳에 저들 두 사람뿐이라 크게 이야기 하지 않아도 소리는 충분히 들려왔다.



“저와, 경수씨의 인생이 함께한 시간이, 그리고 우리의 연애가 영화라면 평론가 도경수씨는 어떤 평론을 남겨주실 생각이십니까. 별 몇 점짜리 인가요.”



이 남자가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어 이 자리를 만들었나. 지난 주말 세미 프로포즈라며 눈가를 붉히던 얼굴이 생각나 경수는 입을 뗀다. 충분히 원하는 대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당신이 내게 하는 프로포즈라면 자리를 빌려 제가 선수를 쳐도 될 법하지 않나.



“제 평론 신념이 조금 흔들리네요. 주관적인 의견이 많이 섞여도 됩니까. 아주, 지나치게 많이. 이건 정말 사담이군요. 할 정도로 눈살 찌푸려지게.”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후. 떨리네요. 그 어떤 인터뷰보다 더욱.”



숨을 고른 채 백현을 향해 말했다.


제게 있어 최악과 최고를 함께 선사해 준 작품이라 칭하고 싶다. 최악은 당신을 놓쳤을 지도 몰랐을 과거의 나에게- 최고는 그 때 간절하게, 혹은 든든하게 나를 붙잡아준 당신에게. 앞으로의 인생에도 모쪼록 당신이 내 곁에 있어 바뀌어 가는 계절도, 흐르는 시간도 모두 함께였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봄을 닮은 시간에는 당신과 마주보고, 청량한 여름에는 내민 손을 꼭 잡고, 해가 지는 가을엔 다정한 품을 토닥이며, 새하얀 겨울은 따뜻한 입맞춤을 나눌 수 있기를.



“평론보다는 바람이 많이 섞인 것 같지만, 그렇게 우리 특별한 이슈는 없어도 잔잔히 오래. 색이 바래지 않는 그런 연애를, 영화를 써 내려가고 싶어요. 힘이 들까요?”

“그럴리가요. 경수씨가 원하면 저는 늘 그저 그렇게 할 뿐인 걸요.”



백현이 조금씩 앞으로 걸어 올라오며 팔을 뻗어왔다. 이에 좌석에서 일어난 경수 또한 걸음을 움직인다. 스크린 아래에서 위로, 좌석에서 아래로. 서로를 향해 뻗어가는 걸음들이 거리낌 없었다. 성큼 성큼 망설임 없이 발을 옮기고 드디어 품에 마주 앉았을 때, 잔잔하게 켜져 있던 조명의 불이 모두 한 순간 까만 어둠을 드리우며 꺼졌다.



“계절을 함께해도 되겠냐는 말 기억 합니까?”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에요.”

“그럼, 평생을 함께해도 되겠냐는 말 해도 될까요?”

“너무 매력적인 조건이네요.”



맞닿은 숨결이 진득하게 이어졌다.



변백현과 도경수. 앞으로의 수많은 계절을 함께할 두 사람.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마주 볼 수 있어서 사랑스럽다.



우리의 이야기는 이렇게 ‘페이드아웃’ 되지만 불 꺼진 스크린 속에서도 

우리의 남겨진 사랑 이야기는 ‘페이드 인’ 중이다.  







**


그동안 많이 부족할 수도 있었을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페이드인은 포스타입상에서 전체 관람가이며, 앞서 언급했듯 18.08.18 백공 온리전에

19세 이상 관람가로 수정 편집 될 예정입니다. 지난 6편도 그리고 이번 완결 편에서도

유독 아쉬운 부분이 있으셨다면 바로 그 부분입니다 하하.....

단편으로 시작했던 이야기를 많이 좋아해주셔서 조금 더 풀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남겨진 사랑 이야기 또한 이어질 예정입니다. 백공온에서 만나요!

감사합니다! 


잠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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