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우! 방학이라고 누워만 있지 말고 옆집에 이것 좀 가져다 주고 와.”

“아, 귀찮은데.”

“저녁 굶고 싶으면 알아서 해라.”

“다녀올게요.”


한가한 저녁이었다. 대학생의 여름방학은 이르다고 했던가. 6월의 끝을 달리고 있는 지금, 나는 거실 소파에 있는 힘껏 널부러져 누워있었다. 축 쳐진다 쳐져. 20살이 되기 전, 얼마나 성인이라는 타이틀에 갈망했었던가. 친구들과 작년 12월 31일 밤 11시 30분 부터 술집 앞에서 대기 타던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살의 반이 지나가 버렸다. 그렇게 성인이라는 것에 대한 열과 흥은 이미 폭삭 식은지 오래였다.

종강을 하고 나니 세상 무기력해진 나는 여름방학 삼일째 계속 소파에 기생 중이었다. 첫날과 어제까지는 그러려니 하던 엄마도 더이상 봐주기 짜증이 나셨는지 아까부터 계속 틱틱 대기 시작하셨다. 진짜 너무해. 이제 겨우 방학 삼일차인데.

별 수 없이 소파에서 귀신 귀신 일어나 식탁 쪽으로 다가갔다. 계속 누워만 있었더니 몸이 그새 누워있는 자세에 적응했는지 걷는 자세가 영 삐그덕 했다. 느리게 부엌으로 다가가 가져다 주라는 상자를 내려다 봤다. 먹을건가? 그런거면 나 먹으라고 하면 되지, 맨날 옆 집 주래.


“근데 이거 뭐에요?”

“치즈 타르트야. 엄마 친구가 사다줬는데 어차피 너도 안 먹고, 민규가 좋아하니까 가져다 줘. 그러고 보니 너 민규 본지 한참 됐지? 간 김에 얼굴도 좀 보고 오고.”

“..주고 올게요.”


한손으로 케이크 상자를 들고 헝크러져 있는 머리를 대충 정리하며 현관을 나섰다. 한 동안 들을 일 없던 김민규의 이름을 들으니 뭔가 반가우면서도 낯선 느낌이 들어 새삼 어색했다. 터벅 터벅 심술맞은 걸음으로 걷다가 김민규네 집과 우리집 사이에서 걸음을 잠시 멈추고 케이크 상자를 바라봤다. 예쁘게 장식 된 타르트가 상자 구멍 사이로 보이길래 물끄러미 보다가 어쩐지 나는, 심통이 나버렸다. 김민규 개자식, 그렇게 형아 형아  하면서 따를 때는 언제고, 어이가 없네. 왜 내가 네 이름이 낯설게 느껴져야 하는건데? 삐쭉하고 속절 없이 튀어나온 내 입술이 미웠다. 삐져서 툴툴대는 꼴이라니. 아니지, 이건 화가 난거지. 절대 삐지거나 그런 류의 감정은 아니라고.

김민규와 나는 흔하디 흔하게 널린 소꼽친구다. 물론 내가 한 살이 더 많긴 하지만 뭐. 그냥 계속 같이 자랐다. 유치원도 같이 가고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나이 차이때문에 학년이 다르고 반이 달라도 딱히 위화감없이 계속 같이 있었다. 가족들끼리도 친해서 여행도 같이 가고, 명절도 같이 맞이하고 새해나 연말도 함께 했다. 옆에 서로가 있는게 그냥너무 당연한 존재 정도? 그런데 이년 전 부터는 그런 일은 꿈도 못 꿨다. 게다가 내가 성인이 되서 대학을 가고 나서는 아예 얼굴 조차 마주칠 일이 없었다. 아, 오늘 김민규 얼굴을 본다면 대체 몇개월 만인거지.

김민규는 내가 모르는 사이 혼자 훌쩍 커버리더니 어느 날 부터인가 슬슬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요리조리 조금씩 나를 피하더니, 결국엔 제대로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고2, 김민규가 고1올라갔을 때 쯤? 영문도 모르고 피해대기에 화도 내보고 회유도 해봤지만 입을 꾹 다물고 계속해서 피하기만 하니 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나 또한 그때도 어렸고 지금도 허울만 성인인 불안정한 어른이라 덩달아 삐져서는 맞대응으로 본채 만채 하기 일쑤 였기 때문에 제일 가까웠던 우리 둘의 사이는 이렇게.


“파탄이 나버렸지...젠장.”

“원우야 거기서 뭐하니?”

“아, 이모! 안녕하세요.”


한창 가만히 서서 툴툴대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앞쪽에서 들려와 고개를 들어보니 이모가 서 계셨다. 내가 하는 말을 못 들으셨는지 해맑은 표정의 이모가 다가오셨다. 원채 친한사이라 아줌마 대신 이모라는 호칭을 쓰고 있었는데, 이 호칭을 이모는 꽤나 맘에 들어 하셨다. 쇼핑을 하고 오셨는지 한 손에 쇼핑백을 들고 있는 이모는 내가 반가우신지 연신 방긋 방긋 웃으며 내 어깨를 좀 세게 치시며 반가움을 표현 하고 계셨다. 아우, 우리 이모 진짜 힘조절 안 되는 건 여전하시네. 너무 아퍼.


“어머 얘, 너무 오랜만이다~ 어째 원우는 대학생 되더니 더 멋있어진 것 같다?”

“그건 저도 압니다. 맞다. 이거 엄마가 전해주라고 그러셔서.”

“타르트네? 민규가 좋아하겠다. 같이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 하고 가, 원우야. 안에 민규도 있을거야.”

“아니 저는,”

“들어가자.”


사근 사근한 표정과는 다르게 반 협박조로 들리는 이모의 목소리에 조금 쫄아 결국 반강제로 김민규네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오랜만에 만난 내가 반가운지 쉬지 않고 계속해서 말씀을 하시는데 사실 귀에 잘 들어 오지 않았다. 집에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김민규 때문에. 

아직 맞은 어깨가 얼얼해 남은 한 손으로 슬슬 문지르며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김민규와 눈을 마주했다. 집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자 살짝 커지는 듯하더니 금새 원래대로 돌아온 김민규의 눈동자가 자존심 상하게도 나는, 조금 반가웠다. 서 있지 말고 들어오라는 이모의 말에 밍기적 신발을 벗으면서도 서로 눈을 피하지 않았다. 왠일로 눈을 피하지 않는 김민규에 나는 오기가 생겨 지지 않고 계속해서 눈을 마주했다. 근데 김민규 너는 왜 계속 나를 보고 있는거야?


"민규야. 원우 오랜만이지? 너희 몇개 꺼내 줄테니까 같이 먹고가."

"....안 먹어요."

"어머, 단거에 환장하는 애가 어딜 튕겨? 너 형이랑 오랜만에 봐서 쑥스러워서 그렇지? 쟤가 저래. 원우야."


엄마가 홍차랑 같이 방에 가져다 줄테니까 둘이 오랜만에 얘기도 좀 하고 그래. 한창 김민규와 눈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이모가 끼어드셨다. 인사 한 마디 없이 서로 노려보는 우리 둘을 유심히 보시더니 거의 막무가내로 우리 둘을 김민규 방으로 떠 밀었다. 분명 같이 먹자고 하시고서는 김민규와 나의 기류가 맘에 걸리 셨는지 따로 드시겠단다. 근데, 그럴만도 했다. 우리가 어릴 때 좀 친했냐. 아마도 벌어진 김민규와 내 사이를 안타까워 하시는게 분명했다. 이건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

그래서 결국 들어오게 되었다. 김민규 방에. 이게 몇년 만이지, 거의 이년만인 것 같은데. 김민규 방에서의 마지막 기억은 낮잠이었다. 진짜 이상했다. 김민규의 고등학교 입학식 전날, 평소와 같이 함께 게임을 하다가 낮잠을 잤었다. 잠에서 깨어나 지극히 평범한 저녁식사 자리 이후 김민규가 나를 피하기 시작했으니까.

뭔가 어색한 기분에 괜히 방을 빙 둘러봤다가 침대에 털썩 걸터 앉았다. 김민규는 아무 말 없이 그런 나를 눈으로 쫓다가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가 그대로 나를 등지고 의자에 앉아버렸다. 울컥, 짜증이 났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등을 지고 앉아?


"김민규, 오랜만인데 형한테 인사 안 하냐?"

"....별로."

"별로?"

"우리가 살갑게 인사하거나 그럴 사이는 이제 아니지 않나?"

"뭐 인마?"


기껏 말을 먼저 말을 걸었건만(물론 삐뚤게 나가긴 했지만) 돌아 오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욱해 버린 성질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 성큼 너에게 다가가 어깨를 확 잡아 돌려 버렸다. 힘없이 돌아가는 의자에 너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쳐 버렸다. 확실히 많이 변한 얼굴. 생김새가 변했다기 보단 선이 많이 굵어지고 더 남자다워져 있었다. 키는 원채 컸으니 위화감이 없었는데 가까이에서 마주한 너는, 어느새 어엿한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마디 해주려 억지로 김민규를 내쪽으로 돌려 놓고는 되려 내가 입이 막혀 버렸다. 새삼 낯선 너의 얼굴때문에. 기세 높게 김민규를 내쪽으로 돌려 놓고 잔뜩 당황해 입을 꾸욱 하고 있는 나를 네가 가만히 올려다 보다가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는 내 손을 차갑게 내려 쳐 냈다. 쳐냈다-, 라는 표현이 적절했다. 지금 나 친거야? 네 어깨에 손 좀 올렸다고? 너무 놀라버렸다. 눈을 피하고 없는 사람 취급당하는 것 과는 확연히 다른 이 거부당함은, 내 맘에 생태기를 잔뜩 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상처받은 눈을 하고 아무 말 없이 너를 쳐다 볼 수 밖에 없었다. 김민규 또한 너무 세게 쳐내렸다는 것에 놀랐는지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다가, 이내 원래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버렸다.


“손 대지마.”

“.....야..”


김민규의 차가운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손을 대지 말라고? 이건 처음 김민규에게 인사를 씹혔을 때보다 오조 오억배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나는 김민규 네가 사과를 할 줄 알았다. 미안하다고.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면서 사과를 해 올 줄 알았다. 상처 받은 눈의 나를 올려다 보면서 고작 하는 말이 손 대지마?


“너 너무 하다는 생각 안드냐?”

“......”

“생각을 해봐. 내 입장이 되보라고. 형제같이 자란 애가 하루 아침에 무시하고 상종도 안 하려고 들고 이제는, 내가 닿는 것도 싫다고?”

“......”

“이유라도 알려줘야지. 납득이 가게 만들어 줘야지 내가 포기를 하든 사과를 하든 뭘 하든 할거 아니냐고.”

“....그런 거 없어.”

“그런게 없어? 그럼 너 왜 그러는데. 너 사춘기야? 사춘기가 이렇게 오래 간다고?”

“전원우.”

“개새끼야. 내가 화 낼만 한거 아니냐고 이거!”

“나가.”

“시발, 나가지 말라고 해도 나갈거야.”


자존심 상하게도 눈물이 찔끔 새어나올 것 같았다. 이를 악 무는 내 표정이 우스울 거라는 생각이 자꾸만 났다. 눈에 힘을 너무 주었던 눈 언저리가 저린 것 같았다. 나가라는 김민규의 싸가지 없는 말이 이렇게 반갑기는 처음이었다. 그래도 자존심은 지켜 보자고 사납게 눈을 세워 김민규를 한번 노려봐 주고는 방문을 거칠게 열고 방 밖으로 나와 버렸다. 쟁반에 타르트와 홍차를 가지고 방으로 오고 계시는 이모와 마주쳤지만 최대한 얼굴을 가린 채로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당황한 이모가 뒤에 뭐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지만 벌써 시야가 흐릴 정도로 눈물이 차오른 상태라 뒤도 돌아 보지 않고 그냥 나와버렸다. 너무 창피하니까.

그대로 김민규네 집 앞에서 쪼그려 앉아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사실 이렇게 까지 오바할 거 없었다는 거 안다. 그저 지나간 인연이겠거니 하거나, 시간이 지나면 풀릴 거라고 생각만 하면 될 텐데 20살 먹어서는 옆집 동생때문에 우는 내 처지가 너무 우스웠다. 하지만 신경을 꺼버릴 수도 외면할 수도 없었다. 내 처지가 그랬다. 

20살이 되어 대학교에 들어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또 다른 사람을 맘에 담으면 될 거 라고 생각한 내가 멍청했다. 안 보면 그저 그렇게 무뎌질 거라고 생각을 왜 했을까, 다시 마주하자 마자 똑같은 감각이 심장을 치고 가는데. 눈물로 축축해진 소매가 찝찝했다.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슬쩍 들어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봤다. 젠장, 왜 저녁 노을은 사람을 이렇게 추억에 젖게 하는거야 괜히 봤잖아. 김민규와 즐거웠던 어린 시절이 머리 안을 훅훅 치고 지나갔다. 아마 난 안 될거야... 이런 찌질한 내가 너무 짜증이 나지만 나도 나를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김민규를 좋아한다.


-

내가 김민규를 좋아한다는걸 알게 된 건 중학교 2학년 때 였다. 여름방학 시즌이라 가족들 끼리 다같이 바다로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바베큐시간이 끝나고 어른들은 술자리를 가지기 시작하셨고 우리 둘은 펜션 앞 바다 모래 사장으로 가 돗자리를 펴고 기세 좋게 누워있었다. 펜션의 불빛이 은은하게 밝혀주고 있었고 어른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고 있으니 뭔가 가슴 속에서 벅차 오르는 행복감이 느껴졌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한 가득 얼굴에 웃음을 담고서 고개를 돌려 김민규쪽을 돌려 봤다. 하지만 김이 빠지게도 김민규는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는데, 새삼 이렇게 편하고 가까운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김민규가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지더라. 

가만히 김민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잔잔한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검은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돌려 김민규의 얼굴을 바라 봤었다. 중학교에 올라간다고 꽤나 크게 산 교복을 입고 왔던 김민규는, 그 반년 사이에 또 많이 자라있었다. 그게 너무 신기했다. 마냥 나보다 어린 동생이었는데 점점 변해 간다는게. 물론 나도 성장하면 빼 놓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김민규는 내가 크기 무섭게 본인이 더 크곤 했었으니까. 

펜션 불빛에 은은하게 비친 김민규의 얼굴은 잘 생겼었다. 새삼 감탄사를 내뱉었다. 같은 남자지만 잘생긴 건 잘 생긴거니까. 나와는 다르게 조금은 어두운 피부톤의 김민규는 머리 카락도 유난히 새까맸다. 조금 답답해 보이는 김민규의 앞머리를 손을 뻗어 정리해 주다가 나도 모르게 이마부터 콧대, 그리고 김민규의 입술로 흘러가듯 시선을 옮겼다. 몇분 간을 그렇게 김민규의 입술만 빤히 쳐다 보다가, 나는 너무 놀라 헐레벌떡 일어나 신발도 제대로 챙겨 신지 않은 채 일어나 펜션쪽으로 달려갔다. 김민규는 어디 두고 혼자 오냐는 어른들의 말에 대꾸도 못한 채 방으로 뛰쳐 들어가 그대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제발 나 자신이 스스로 정신을 차리기를 바라며 붉게 달아오른 양 볼을 두손으로 연신 부채질 해댔다. 가라앉지 볼의 열감에 머리카락을 쥐어짜며 침대 위로 뛰어들어 이불 속에 파 묻혔다. 어쩐지 이 열감은 얼굴에서 나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에서 나는 것인지 조금은 헷갈렸던 것도 같았다.

그날은, 내가 처음으로 김민규에게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한 날이었다.


-

"왜 이렇게 빨리 왔어?"

"그냥 뭐..."

"너 아직 민규랑 화해 안 했구나? 너가 형인데 먼저 다가가서 말도 좀 걸고 그래라. 응?”

“네..”


엉엉 울어버려 엉망이 된 얼굴을  대충 수습하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그냥 모든 게 다 귀찮아져 엄마의 말에 반박을 하려다가 그만 두고 방으로 올라갔다. 방금 먼저 말 걸었다가 내쳐지고 오는 길이거든요 엄마. 귀한 아들이 쫓겨 나듯 도망온거라는걸 아시나요. 방에 들어서자 마자 그대로 침대위로 다이빙 하듯 엎어져 누워버렸다. 엄마가 예전부터 물어봤던 우리가 싸운 이유에 대해서 나는 대답할 수 있는게 없었다. 아는게 없으니까. 일방적으로 내쳐진 신세에 왜 이렇게 되버렸는지도 모르는 내가 입을 열어 설명할수 있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

김민규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도 나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원래가 기분이나 생각이 표정에 많이 티가 나는 편도 아니었으며 무표정은 내가 잠 자는 것 다음으로 자신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김민규를 대할 수 있었다. 사실을 깨닫고 나서 혼란은 왔었으나 딱 하루 뿐이었다. 여행가서 깨닫은 날, 딱 하루. 그냥 편하게 인정하기로 했었다. 다만 좀 더 높은 시선으로 김민규를 바라 봤을 뿐.

반면 겉이 티나지 않았을 뿐 마음은 늘 요동치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았던 간단한 스킨쉽들이 뭔가로 내려친 듯 정신을 빼 놓기도 했고 살짝 손끝이라도 스치는 날에는 밤마다 밑으로 뻗어 나오는 열감에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기도 했다. 그냥 치기어린 시기의 열병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조금 오래 가는 열병.

나의 고등학교 입학식날, 2년만에 비로소 그 생각을 간단히 접어 버릴수 있었다. 학생대표로 입학해 단상위에 올라가 상을 받고 내려온 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환하게 웃으며 꽃다발을 내미는 아직 중학생이었던 김민규의 웃는 얼굴에, 이것은 치기어린 열병이 아닌 사랑이라는 걸 걸국엔 인정해 버렸다.

뭐가 그리 기쁜지 연신 예쁘게 입 동굴을 만들며 웃는 김민규의 얼굴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아플만큼 내 심장을 뛰게하기에 충분했다. 잔뜩 얼은채 무표정으로 꽃다발을 냉큼 받아 들고 돌아서는 빨개진 내 귓볼을 김민규가 알아볼까싶어 빨리 걸어 들어갔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로부터 정확히 일년 후, 나와 같은 고등학교로 입학을 한 김민규가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

김민규와 다투고 들어온 후 나는, 조금 앓았다. 결국 저녁도 먹지 않은 채 새벽 내내 비 맞은 고양이 마냥 끙끙 댔다.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탓도 있었지만, 꽤나 깊은 맘의 열이였는 지라 평소보다 더 앓아 버렸다. 여름이 한창 다가오는 6월이었지만, 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겐 새벽은 아직 춥게 느껴져이불에 둘둘 쌓여 잠들었다. 엄마도 더이상은 나에게 김민규 얘기를 꺼내지 않으셨다.


-

집에서 뒹굴 거리며 흥청망청 하루하루를 보냈더니 어느새 7월달로 들어서고 있었다. 정말 착실히 여름방학을 낭비중이었다. 어차피 1층으로 내려가 거실에서 뒹굴거리나 방에서 뒹굴거리나 잉여인 것은 변함이 없었으나 엄마 눈에 띄어봤자 좋은 소리는 못 들을게 뻔하니 계속방 안에서 기생중이었다. 

아무렇게나 누워 방 안의 티비를 틀어 놓고 멍하니 화면을주시하는데 방치 해 놓았던 폰에서 짧은 진동들이 느껴졌다. 귀찮아서 보지 말까 하다가 문뜩 무료해진 기분에 손을 뻗어 화면을 확인했다. 권은준? 꽤나 친하게 지낸 무리속에 속해있던 대학 동기였다. 시간을 확인하니 술마시기 딱 적합한 시간이었다. 아 분명 술먹자고 전화한게 뻔하겠지. 이 알콜중독자들. 살짝 고민을 하다가 그냥 전화 모양 아이콘을 눌러 버렸다. 어차피 끼리 끼리 논다고, 결국 나도 알콜중독자 무리 중 하나라 슬슬 다시 술이 생각 나던 참이었다.


“뭐냐.”

‘와 미친. 야 야 전원우 전화 받았어.’

“너네 벌써 모여서 한 잔 하고 있냐? 이 미친놈들.”

‘지금 벌써 3일 연짱으로 음주 중이시다. 누구는 연락이 안되서 함께 하지 못 했지.’

“삼일 째? 진짜 징한 놈들. 어딘데.”

‘사거리로 와서 연락해. 구석진데 있는 술집이라 너같은 길치는 절대 못 찾아와.’

“갈게, 끊어.”


대충 옷을 챙겨 입고 1층으로 내려갔다. 엄마와 아빠가 거실에서 티비를 보시다가 나가려는 나를 붙잡고 거하게 용돈을 쥐어 주셨다. 드디어 외출을 하는거냐며 제발 집에만 박혀있지 말고 놀러 좀 다니라는 아이러니한 말을 들으며 거의 등떠밀리 듯이 집 밖을 나섰다. 진짜 내가 외출을 안 하긴 안 했나 보다. 학기 중에는 그만 좀 싸돌아 다니라고 등짝 여러번 얻어 맞았었는데, 어쩌다 보니 술 약속을 환영받는 아들이 되어있었다. 덕분에 두둑히 받은 용돈을 주머니에 찔러 놓고 시내 쪽으로 걸을음 옮겼다.

해가 다 져버려 어둑 어둑해진 골목길 사이를 가로 질러 가고 있었다. 골목길 사이로 가로등이 켜진 채로 즐비해 있었다. 주택가라 그런지 가로등이 있어도 어두운 공간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바로 저 골목 처럼.

왠 학생으로 보이는 남,녀 둘이 골목 벽에 붙어 키스를 선보이고 있었다. 교복을 걸치고 있으면서 대놓고 밖에서 스킨쉽이라니, 나로서는 해본 적도, 해 볼 생각도 못 했던 일이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눈앞에서 펼쳐지기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지켜봤다. 와 요즘 고딩들 진짜 대담하네, 간땡이가 부어 터졌네 터졌어. 좀 처럼 볼 수 없는 관경이라 눈치 없이 계속 구경하다, 결국엔 키스 중인 남학생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대로 굳어버린 나는, 너무 놀라 도리어 빨리 자리를 피할 생각을 못했다. 그대로 키스 중인 남학생과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나는 눈을 피하지 못 했고, 남학생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어서 자리를 떠야겠다 싶어 눈을피하고 시내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점점 빨라지는 걸음에 어쩐지 호흡이 가빠오는 것 같았다. 머리가 멍해지고 자꾸만 피가 차가워 지는 것 같은 느낌에 진저리를 치며 빨리 주택가를 벗어나기만 바랬다.

여전히 나는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왜 김민규가 저런 골목에서 키스를 하고 있는지.


-

“전원우, 사거리 다 왔으면 전화를 하라니까 왜 멍청하게 가만히 서있냐.”

“어, 왔냐.”

“망할 전원우...됐다. 가자 저 쪽 골목이야.”


정신을 차렸을 땐 사거리 편의점 구석에 가만히 서있는 내가 있었다. 아무것도 못하고 가만히 서있는데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 올려보니 조금은 상기된 얼굴의 권은준이 인상을 구기고 나를 보고 있었다. 새끼, 꾸민 것 좀 봐라. 머리도 올리셨네. 실없이 웃으며 대꾸하는 나를 권은준이 난처한 눈으로 보다가 내 머리를 좀 거칠게 헤집더니 그대로 내 팔목을 잡고 골목길로 끌었다.


“뭔데 전화도 안 하고 거기 서 있었어? 온다던 애가 전화도 안 받아서 튄 줄 알았잖아 인마.”

“몰라.”


뭐 맨날 모른데. 궁시렁 거리는 권은준에게 팔목을 잡힌 채 타의로 걸으며 앞서 걷는 권은준의 뒷모습을 보고있었다. 나는 지금, 권은준의 어깨와 등을 보고 김민규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 김민규 키가 딱 지금 권은준이랑 비슷했지. 아니 더 컸던가. 시발 저렇게 키가 크니까 키스하는 상대가 발뒤꿈치를 들고 있지 시발 시발. 다시 떠오르는 아까의 장면에 심통이 나버렸다. 아까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더니 이제는 짜증이 확 솟구쳤다. 누구는 싸우고 나서 은둔생활을 지속했는데 누구는 속편하게 연애를 해? 그것도 고삼주제에?

괜히 짜증이나 애꿎은 권은준의 정강이를 냅다 차 버렸다.악-. 하는 소리와 함께 내 팔목을 놓은 권은준이 자신의 정강이를 감싸며 주저 앉았다. 아 뭔가 속이 좀 나아진 것 같아. 주머니에 손을 넣고 조금은 껄렁하게 서서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는 권은준을 내려다 봤다. 


“뭐.”

“뭐어?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뭐.”

“..됐다. 말을 말자. 빨리 오기나 해.”


억울한 표정의 권은준은 당당한 내 태도에 또 시작이냐는 듯 인상을 썼다. 뭔가 더 말을 하려 하다가 됐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무릎을 탁탁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은준은 간혹 억지를 부리는 나를 볼 때마다 봐준다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자신보다 어린 동생 달래 듯 구는 것도 그렇고. 짜증나, 이것도 김민규랑 참 비슷하단 말이지. 너도 존나 골목길에서 키스하는게 취미냐?

입술을 빼쭉 내민 나를 권은준이 다시 잡고 끌고 갔다. 아마도 대화가 안 통할 것이라는 걸 알아서 그런지 또 왠 땡깡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이렇게 덩치와 키에 안 맞게 어리광을 부리는 내 버릇은 철저히 김민규가 만든 버릇이었다. 분명 내가 형인데, 남들이 보면 형과 동생을 바꿔서 보는 경우가 어릴 때 부터 종종 있었다. 나는 또 나를 동생 대하듯 다루는 김민규가 싫지 않아서, 이따끔 말도 안되는 고집을 부리곤 했었다. 아까와 같이.

골목길을 좀 더 들어가자 술집이 보였다. 와 진짜 나 혼자 왔으면 길 잃었을 듯. 그걸 아는 애가 혼자 그렇게 가만히 서있냐. 응. 미친놈아. 둘이 티격 태격하며 술집으로 들어서자 동기들이 큰 테이블 하나를 잡고 무리지어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라며 반기는 동기들 사이에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눈앞에 즐비해 있는 안주들을 쳐다 보고 있다가 술잔에 술을 받아 먼저 들이켰다.

싸한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 진짜 존나 맛없다 술. 이런 걸 다들 왜 마시는 거지, 물론 나 포함. 저녁을 먹지 않은 속이라 한잔만 들이켰는데도 얼굴이 달아 오르는게 느껴졌다. 맞은편에 자리 잡은 권은준과 여럿 동기들이 안주를 내쪽으로 밀어 주는게 보였다. 딱히 입맛이 없었다. 말을 걸어오는 옆자리 동기와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다시 또 술을 들이켰다. 사람이 많아 시끄러운 분위기가 참 맘에 들었다. 계속 해서 내 머릿속을 헤집는 김민규의 생각을 지우기에는 딱인 자리였다.


-

결국 주량을 넘겨 버렸다. 그다지 술이 약하지 않은 스타일인데 아무래도 안주는 거의 손대지 않고 술만 연신 들이켰더니 머리가 어지롭고 시야가 흐릿했다. 새벽2시, 술자리가 파하고 모두가 각자의 집에 돌아가고 나랑 권은준만 남았다. 분명 내 몸인데 말을듣지 않아 그냥 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다. 


“야, 야 전원우 정신 좀 차려봐.”

“왜?”

“아니 좀 일어나 보라고. 여기 지금 길바닥이거든?”

“왜 길바닥이야?”

“....젠장.”


권은준이 내 눈높이를 맞추고 앉아, 내 볼을 툭툭 건드리며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이미 제대로 사고가 될 리가 없는 나와 대화가 가능할리는 없었다. 내가 어쩌다 전원우 뒷처리 전담반이 되버린거지? 아오. 결국 뭔가 결심을 한 듯 권은준은 뒤를 돌아 등을 나에게 내밀어 보였다. 뭐야 어쩌라고.


“업혀라 망할 전원우야.”

“내가 왜?”

“너 걸을 수 있냐?”

“아니?”

“그럼 닥치고 안 업힐래? 어?”


어쩐지 대답이 하기 싫어 뚱한 표정을 지은 채 가만히 있었더니 권은준이 한숨을 쉬며 억지로 자신의 어깨에 내 팔을 올리기 시작했다. 결국 강제로 업혀진 나는 생각보다 편안한 승차감에 만족을 하며 얌전히 업혀 있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권은준에게 업히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건 주변동기들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너 또 권은준 등에 전세냈다고. 우리집의 위치를 아는 유일한 놈이기에 늘 내 뒷처리는 권은준이었다. 한번 제대로 마시면 늘 있는대로 취해버리는 나때문에 이미 여러번 나를 집으로 데려다 준 전적이 있었다. 니가 그렇게 나 챙기니까 내 전담반이 되버린거야 알고 있어? 야, 권은준 내 말 듣고 있냐? 아니 미친 챙겨줘도 지랄이야. 나도 너 챙기기싫거든? 근데 네 등치를 챙길 수 있는 사람이 나 밖에 없을 뿐이니까 제발 얌전히 있어라. 쓸데없이 길쭉한 놈. 지가 더 길쭉하면서 병신.

어느 정도 적응된 권은준의 등이라 다리를 왔다 갔다거리며 즐기고 있었다. 술에 취한 채라 몽롱한 기운에 몸이 편안하니 기분이 좋았다. 아 누구 등에 업히는 거 진짜 좋은 거 같아. 권은준의 등에 볼을 대고 문지르자 하지 말라며 권은준이 소리를 질러댔다. 새끼, 이런다고 닳냐 닳냐고. 

고개를 들어보니 앞을 보니 어쩐지 붉어보이는 권은준의 귓볼이 보였다. 원채 피부가 하얀 놈이라 또 이런건 잘 보이지. 너도 취했니?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어 권은준의 귓볼에 손을 가져다 댔다. 


“으아아!”

“악!”


내 손끝이 닿자마자 그대로 어부바를 풀어버린 권은준 때문에 나는 그대로 뒤로 벌러덩 내팽겨 쳐지고 말았다. 아 존나 아파! 미친놈아 갑자기 풀면 어떡해! 네, 네가 내 귓볼 만졌잖나! 전원우 변태새끼! 귓볼이 뭐! 시발! 

얼얼한 엉덩이때문에,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술 기운 때문에 설 수가 없었던 나는 쭈구려 앉은 채로 권은준을 노려봤다. 자신의 귓볼이 매우 소중하다는 듯 두손으로 귓볼을 쥐고 있는 권은준은 이제 얼굴까지 빨개져 있었다. 


“전원우 변태새끼...”

“대체 뭐가 변태라는 건지..”

“됐고, 이제 일어나. 어차피 너네집 거의 다왔어.”

“..다리에 힘 안 들어 가는데.”


아니 노력은 해보고 하는 말이냐. 짜증나게 하지말고 슬슬 일어나라. 권은준이 붉어졌던 얼굴을 대충 가라앉혔는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내밀어진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가 손을 내밀어 잡자, 권은준이 힘을 주어 나를 일으켰다. 불안정한 두다리로 서있으려니 다리가 절로 덜덜 떨리는 것 같았다. 거봐, 이제 설 수 있지? 시발 네 눈에는 내가 지금 정상적으로 서있는 걸로 보이냐?


“서긴 했는데 못 걷겠어.”

“아니야, 할 수 있어. 나는 널 믿어.”

“...나 때문에 귓 볼 빨개진 놈이 뭘 믿는다고.”

“아 시발.”


권은준이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힘껏 수치스러워 하고 있었다. 아 또 귓볼 빨개졌다. 어쨌든 민페를 끼치고 있는 건 사실이라 다리에 힘을 주려 노력했다. 정신도 좀 차려야지 라는 생각에 볼을 여러번 손바닥으로 꾸욱 꾸욱 누르며 술을 깨려 노력했다. 아 핑핑 돈다 돌아. 그래도 오늘은 다른 날에 비해 좀 덜 취한 느낌이었다. 원래는 누군가의 등에 업힌 기억만 있지 전체적인 기억은 없곤 했으니까.


“너 그 이상한 버릇 좀 고쳐라 전원우 진짜!”

“이상한 버릇? 아 머리아파.”

“너 그 은근한...은근하게 앵기는..? 그 막 있잖아! 은근한 스킨쉽 진짜 별로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건데.”

“막 아무렇지 않게 여기저기 터치하는거나, 은근히 어리광부리고 그러는 것도 그렇고. 그거 사람 좀 되게 기분 이상하게 만들거든? 알긴 아냐?”


후 시발, 내가 동생을 키우는 건지, 친구를 사귀는 건지 존나 모르겠고. 이마를 집고 고개를 좌우로 도리도리하는 권은준을 보며 나는 저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다. 앵겨? 스킨쉽? 내가? 도통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늘어 놓는 터라 내가 이해 할 수 있는 말은 전혀 없었다. 아 공기가 후덥지근 해서 더 술이 안 깨는 것 같아. 


“너 저번에 보니까 그 옆집 동생한테도 엄청 치대던데, 진짜 고쳤으면 좋겠다. 이거 엄청 진심이다.”

“옆집 동생? 아 권은준 천천히 말해봐 무슨 말 하는 건지 하나도 못 알아 먹겠으니까.”

“하 참. 내가 너 데려다 줄 때마다 마주치는 니 망할 놈의 옆집 동생말이야.”


옆집 동생? 김민규? 순간 후덥지근한 주변 공기가 싸하게 느껴졌다. 쟤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지, 나는 대학들어오고 나서 김민규랑 마주친 기억이 어제빼고는 한번도 없는데. 


"너는 존나 취해 있었으니까 기억 못 하겠지. 인사불성된 놈이 뭐가 보이겠냐?"

“.....하.”

“내가 너 술먹인 것도 아닌데 괜히 내가 잘못한 것 같았다고.”

"진짜로?"

"어! 맨날 부리부리한 눈으로 째려 보면서 너 건내 받는데, 사실...좀 무서웠다...새벽 늦은 시간에 와도 늘 골목 앞에 서있더라 졸라 무서워.”


권은준은 정말 소름이 끼친지 양손으로 몸을 감싸고 부르르 떨었다. 저 덩치에 저 액션이 가당키나 하겠냐만은, 나라도 어두운 골목 앞에 서있는 김민규를 떠올려 본다면.. 좀 무서울 것도 같았다. 게다가 부리부리하게 째려 본다면. 아니 근데 왜 걔가 나를 데리러 나오지? 그것도 새벽 시간에, 어떻게 알고? 머릿속에 수 많은 물음표가 떠다녔지만 알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리고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나는 진짜 창피해서 죽어버릴지도.


"거짓말...말도 안돼."

"아 몰라, 말이 되든 안 되든 이제 너 혼자 가라. 저 골목만 지나면 집 맞지?"

"어...."

"그럼 난 간다. 집 들어가서 연락해라."

"어...."


망설임 없이 뒤 돌아 가는 권은준을 멍하니 바라봤다. 뭔가 홀가분해 보이는 뒷모습이 부러워 짜증이나 가운데 손가락을 살며시 들어 올려줬다. 지금 폭탄발언하고 가시면서 지는 속이 아주 편하신가봐요. 저는 지금 패닉인데요.


“아....진짜 전원우 병신아..”


엄마는 왜 나한테 말 안해줬던거지. 저 새끼도 그래. 그렇게 중요한 걸 지금 알려주면 어쩌자고. 권은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자시 자리에 쭈구려 앉아 버렸다. 지금 이 지구상에서 가장 창피한 건 바로 나일거야 아마..

꽤 날라간 술기운에 정신이 들어 더 쪽팔렸다. 그 동안 얼마나 고주망태의 엉망인 나를 봐왔던 걸까 너는. 게다가 고삼인데. 나는 지금 너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그렇게 피해다니던 상대를 챙겨야 했던 너에게, 너무 미안했다. 아니 그러니까 어쩌다가 나를 그렇게 챙겨주게 된건데? 내가 기억 없이 집에 들어온게 저번학기에 몇번이더라..? 속으로 수를 세어보다 그냥 포기했다. 왜냐면 존나 많아서.


“또 술마셨지.”

“아씨! 깜짝이야.”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나 버렸다.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멈춰서 앞을 보니 김민규가 서있었다. 아까 권은준이 말한 광경이 저건가, 진짜 심장 떨리게 놀라긴 했다. 게다가 좀 무서웠다. 기척도 없이 언제 나타난건지. ...웬일이냐 너가 여기에. 나? 글쎄, 왜 내가 여기 있을까? 의문투성이인 말을 하는 김민규는 가로등 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가로등 불 빛이 반만 비치는 김민규의 얼굴은 술을마셔 엉망일게 분명할 나와는 다르게 단정하고, 그리고 잘생겼다.


“오늘은 그 사람이 안 보이네. 맨날 너 데려오는 사람.”

“...저기 골목 앞에 까지 왔다가 갔어. 근데 너 왜 이 시간에,”

“오늘은.”

“어?”

“오늘은 적당히 취했나 보네. 늘 엄청 술에 쩔어서 왔었는데.”

“너가 그걸...”


어떻게 아는거야? 차마 뒤의 말이 다 나오기도 전에 김민규가 성큼 성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술 냄새가 날까 순간 숨을 참으며 뒤로 살짝 물러섰다. 얘는 키가 커서 그런지 걸음걸이가 너무 컸다. 내 의도를 알았는지 김민규가내 얼굴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살짝 내리며 말했다.


“내가 너 술냄새 나는거 하루 이틀 맡은 줄 아나...”

“...아니,”

“그래도 오늘은 다른 사람 등에 업혀오는거 안 봐서 좋네.”

“...야.”


왜 안 어울리게 다정한 말투지, 며칠 전에 세상 제일 싸늘하게 쳐 냈던게 누구더라? 나를 헷갈리게 하는 이중적인 김민규의 태도에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근데 또 웃긴건, 이렇게 더운 여름날의 새벽인데 내 바로 눈 앞에서 아른 거리는 김민규의 잘 생긴 얼굴 때문에 더운 줄도 모르겠는 나.

그러다 번뜩, 아까의 장면이 떠올랐다. 키스 중이던 골목길 안의 김민규가. 시발, 김민규 진짜 짜증나네. 오늘은 내가 너때문에 취한 거거든, 개새끼야. 김민규의 가슴팍을 두손으로 밀어 내게서 떨어지게 만들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멀어지던 김민규는 오른쪽 다리로 중심을 잡더니 내 두 팔을 잡아 왔다. 그것도 꽤나 세게.


“전원우 무슨 생각하는지는 알겠는데,”

“야, 이거 안놔? 손 대지 말라더니 너는 왜 나한테 손대는데, 존나 웃기는 새끼야!”

“여자친구 아니야.”

“뭐?”

“여자친구 아니라고 아까 그 여자애. 너 지금 오해하는 거야.” 


왜 묻지도 않는말에 대답을 해? 그거 때문에 지금 나 민거 아니야? 맞지. 전원우 너 그거 맞잖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넘겨 집지마. 그리고 너는 왜 사귀지도 않는 애랑 키스를 해 쓰레기야. 내 마지막 말에 입을 꾹 다물어 버린 김민규가 너무 미웠다. 말 없이 김민규를 노려봤다. 옆집동생이 다른 여자와 스킨쉽하는 장면에 화를 내는 옆집형이라니,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웃겼지만 나는 진지했다. 그래서 뭔데?


“시험..같은 거였어, 내가 다른 사람이 가능한가에 대한.”

“너, 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게 왜 신경쓰이는데?”

“...”


말 문이 막혀버린 내 손목을 더 꽉 붙들은 김민규가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잡힌 손목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더운 공기때문일까 아니면, 너의 온도때문일까. 마주치고 있던 눈을 도저히 계속 보고 있을 수가 없어 피해버렸다. 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계속 보고 있다간 내가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그만 둬버렸다. 그런 내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너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내 어깨로 손을 옮겨 잡고 고개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이모가 너 집에만 있는다고 걱정 하셨어. 그거 혹시.....그거 나 때문이야?”

“......”

“....왜 그랬는데? 왜 나 때문에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만 있고, 나랑 싸우고 새벽 내내 아팠어?”

“.....”

“그리고 왜, 아까 그 일 때문에 화가 났어?”

“.......하.”

“대답...해줘. 나는 지금 네 대답이 너무 중요해 정말...”

“.....”

“눈 좀 봐줘, 응?”


귀에 들리는 김민규의 음성에서 점점 자신감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마지막에는 거의 애원하듯 조르는 말에 결국 고개를 들어 김민규와 눈을 마주했다. 둘 다 서로의 눈을 보고 아무말도 없었다. 오랜만에 가까이에서 본 김민규의 눈은 여전히 크고 예뻤다. 고양이 상인 나와는 다르게 멍멍이 같은 눈을 보니 나는, 다시 김민규와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버렸다. 그것도 강렬하게.

분위기가 묘했다. 사실은, 아까부터 우리의 대화는 굉장히이상했다. 절대로 옆집형,동생이 할 대화의 종류는 아니었다.그래서 괜찮을 것 같았다. 왠지 너가 나를 밀어 내자 않을 것 같아서, 나는 김민규의 턱을 잡아 당겨 그대로 입을 맞췄다. 이건 일종의 대답이었다. 너가 가진 의문들이 다 사실이라고.

내가 먼저 입을 맞추자 기다렸다는 듯이 김민규가 어깨 위에 있던 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 안고 더욱 깊숙하게 입을 맞춰왔다. 아까의 기억은 흐릿해 지는 것 같았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지금 김민규와 입을 맞추는 건 바로 나니까.


-

“개새끼야 딱 불어. 너 왜 나 피했어.”

“..눈치 모르냐?”

“어, 몰라 그러니까 얘기해.”


이미 술은 다 깨버린지 오래였다. 입술을 떼었다 붙였다를반복 했더니 벌써 30분을 넘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둘 다 침으로 번지르르 해진 입술을 보고 한참을 웃어버렸다. 그러다 지쳐서 대충 바닥에 주저 앉은 나는, 궁금했던 이유에 대해 물었다. 왜 그랬는지 알고 싶어서.


“...고등학교 입학 전날, 꿈에 너가 나왔어.”

“그걸 이유라고 얘기하냐.”

“아무것도 안 입은 채로 나왔어.”

“.......”

“알몸으로 내 몸 위에 올라타더니 갑자기 내 바지버클을 벗기기 시작,”

“그만.”

“.....그래서 피했어. 그때 알았거든. 내가 형, 너 좋아하는거. 피해 주고 싶지 않았어. 그냥 그때는 그랬다.”

“...그래.”


부끄러운 말을 한 건 김민규인데 어쩐지 내 얼굴이 달아 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너 중2때부터 좋아했는데 안 피했거든. 이게 너와 나의 눈높이다 새끼야. 피식 웃으며 김민규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나를 보고 있었는지 그대로너와 눈이 마주쳤다. 앞으로도 나는 절대로 너에게 내가 널 좋아하게 된 시기를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내가 너무 빨리 알아버린게 자존심이 상하니까. 

내가 놓친 열 일곱, 열 여덟의 김민규의 모습이 조금 아까웠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열 아홉의 김민규부터는 내꺼니까. 서로 말없이 가만히 바라 보고 있다가 다시 천천히 고개가 가까워 지고, 그대로 두 입술이 맞닿았다. 대체 집은 언제 들어가려나.


-

고요한 주말 아침, 눈을 뜨고도 한참을 누워 있었다. 이건 숙취도 두통도 아니었다. 그저 어제 대체 무슨일이 있었던 것인가에 대한 고찰이었다. 꿈은..아니겠지? 아니겠지. 아닐거야. 두손을 번쩍들어 내 볼을 툭툭 아프지 않게 두어번 쳤다. 역시 꿈이 아니었다. 맙소사. 


“그만 일어나야지.”

“아, 엄마.”


순간 문이 벌컥 하고 열리며 곱게 접힌 옷들을 들고 엄마가 들어 오셨다. 상체를 일으켜 앉으려는데 옷을 책상 위에 둔 엄마가 내 쪽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여셨다.


“얘는 정말..엄마가 진짜 걱정이 많아요. 너 어제도 민규가데리고 들어 왔지? 엄마가 너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다 얘기했다. 둘이 좀 화해 하라고.”

“...엄마 진짜! 아 그리고, 나 취해서 들어오면 김민규가 맨날 부축했다면서요!”

“너 초저녁부터 엄청 취해서 들어 온 날, 민규가 너 부축하고 나더니 다음부턴 이런일 있으면 자기한테 말해달라고 하는거야 글쎄. 내가 별 수 있어야지.”


엄마는 이상하게 민규한테 약해 지더라. 원우 너도 그렇지? 꼭 그 너 대학동기? 은준이라는 애랑 통화하고 나면 민규한테 연락해줬지. 너 취했다고. 사실 한 두번 챙길 줄 알았더니 계속 너 챙기는 모습 보고 엄마는 감동했어 진짜. 원우 너는 진짜 동생 하나 잘 뒀어 얘. 동생이라는 엄마의 말에 잠시 뜨끔 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우리 엄마도 참 대단했다. 고삼한테 그런 일을 시키다니.


“엄마! 걔 고삼이야! 진짜 민페인거 알아요?”

“어머나 세상에 민페는 너가 제일 민페지! 그리고 민규는 어차피 너랑은 다르게 공부도 알아서 잘 하는데 뭐.”

“.......근데 왜 나한테는 말 안 해줬어요?”

“민규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엄마 진짜 누구 엄마야?”

“어머, 당연히 우리 원우 엄마지. 어서 일어나기나 해. 밑에서 민규 기다리고 있어.”


김민규가?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충 세수를 했다. 언제 또 잠옷으로 갈아 입고 잤는지는 모르겠지만 딱히 옷을 갈아 입을 여유는 없었기에 그냥 그대로 1층으로 가는 계단에 발을 내딛었다. 좀 들뜬 것 같은 발걸음으로. 그래서 김민규, 우리는 대체 무슨 사이야? 계단에서 내려오자 소파에 앉아 있는 김민규의 실루엣이 보였다. 푸흐 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 역시, 또 괜한 고민이었나 보다.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는, 아마도 뒤를 돌아 나를 보고 빨개진 너의 귓볼이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제 시작이라고. 엄마, 나 고삼이랑 연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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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미묘에요 :)

월간민원 2월호! 참여한 글입니다.

외전...꼭 들고 와보도록 할게요 ㅇ.< (꾸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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