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의무실로 직행하여 약을 치덕치덕 바르고(아이든은 자신의 것이 아닌 약은 아끼지 않았다), 페기 카터와 체스터 필립스가 머무는 장교실에서(페기 카터는 아이든의 입술에 난 상처를 보고 잔소리 폭탄을 하려다가 비슷한 수에 당했다.) 간단히 인사와 복귀를 신고한 아이든은 하울링 코만도스가 사용하는 곳(그들은 작은 건물의 1층 반을 통채로 사용했다.)에 들어갔다.


"나 왔다, 이 놈들아."

"응? 헌터, 오랜만이네에! 상처 뭐야?!"

상처 뭐?"

"입술에!"

"터짐."

"그러니까 누가 그랬냐고!"


당연하게도 이런 신고식(?)이 치뤄졌다. 아이든 헌터는 스티브와 버키에게 설명할 거리를 얼렁뚱땅 넘겨버리고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목구멍에 쏟아부었다.


"크아... 겁나 시원하네."


아이든이 중얼거렸다. 그런 아이든에게 게이브와 자크가 한달음에 달려와 질문 세례를 시작했다.


"폭탄 테러범이 테러를 했다고?"

"그 사람 구속 됐나요?"


아이든은 둘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다른 하울링 코만도스들의 시선과, 스티브, 버키의 시선까지 훓어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 정도로 죽겠냐. 어딜 감히."


아이든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며 물을 냉장고에 넣었다. 그건 그렇고 구속 됐다라, 자신이 죽였다는 말은 안한 모양이다. 심약하구만. 아이든은 그리 생각하며 대충 팔을 보여주었다.

스티브 로저스의 아닌 듯 엄청났던 호들갑으로 칭칭 붕대까지 두른 팔은 한꺼풀 벗겨보면 약이 치덕치덕 발려있었다. 아이든 헌터는 풍족하게 공급되는 자원을 아끼는 편이 아니었다. 아끼다간 썩는다는 것을 잘 아는 탓이다.


"치료 끝, 테러했던 시발새끼는 뒤졌으니 됐어."

"그럼 다행이고.."


몽고메리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아이든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그나마 침착한 짐에게 물었다.


"달력 어디있냐."

"어? 달력? 따라와."


아이든이 짐을 졸졸 따라가는 동안, 스티브 로저스와 버키 반즈는 안 좋은 시선을 한번씩 주고 받았다.


사람을 죽였단다. 저 어린 애가. 하울링 코만도스의 임무를 따라간다고 할때부터, 체스터 필립스 대령과 이야기를 끝냈을 때부터 이미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살인이라는 게, 이렇게 가벼운 주제로 나올 말이던가.


아이든 헌터는 자신의 이야기를 극도로 아끼는 성격이었다. 천성인지, 만들어진 버릇인지는 알 수 없으나, 헌터가 툭툭 던지는 말은 대부분 말을 건네는 이에 대한 것이었으며, 희귀하게 내던지는 자신에 대한 정보는 지극히 단편적으며 또한 자잘한 것 투성이다.


그들은 아이든 헌터가 바닐라보다 초콜릿을 선호한다는 것으로 헌터의 과거의 유추해낼 수 없었다..

그리고 둘은 문득 깨닫는 것이다. 둘은 헌터의 세계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한편 '그' 아이든 헌터는 짐 모리타의 탁상 달력을 가지고 날짜를 계산하고 있었다.


"1월 13일, 2월 1일, 19일, 2월 5일, 23일."


1월 13일, 오늘.

2월 1일, 제임스 반즈의 실족사.

둘 사이의 기간 19일, 즉 2주하고 5일.

그리고 2월 5일, 스티븐 로저스의, 아마도 폭사.

오늘로 부터 23일.


내가 최대한으로 머물렀던 기간은 3주하고 이틀, 즉 24일.


아이든 헌터는 차분히 머릿속으로 날짜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이 세계의 죽음에 강제로 개입할 생각은 없다. 없는 기회를 만들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회가 온다면 망설임 없이 잡는다. 마땅히 명예를 누려야 할 이들의 죽음을 방관하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아.


아이든 헌터는 1980년대의 텔레비전에서 본 다큐멘터리를 기억해냈다.


"...."


눈 앞에서 죽어가는 생명을 모른 척 할 정도로, 아이든 헌터는 모질지 못했다. 이익은 없다. 허나, 손해도 없다. 그것만으로 기꺼히 움직일 수 있었다.

아이든 헌터는 이 하울링 코만도스의 마지막 작전에 참여할 작정이었다. 일단 반즈 놈한테 가지 말라고 징징거려보고, 정 가겠다 싶으면 거머리처럼 붙어야지. 


헌터는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오만이라 해도 좋아, 아이든 헌터는 자신의 감을 믿었다. 동시에, 자신의 철저함과, 스스로가 느끼는 공포를 신뢰했다.


[설원, 달리는 열차에서 실족사..]


책에서는 실종이라고 기록하였으나, 아이든은 그가 실족사를 했으리라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아이든이 한번 미래를 바꾼 뒤에 버키 반즈는 외팔이가 되어 있었다. 낙하산 챙겨 놔야겠군.


아이든 헌터가 생각했다.










15일, 아이든은 버키의 잔소리를 들으며(주로 자신의 상처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팔과 뺨에 약을 바르고(버키가 모르는 것이 있다면, 아이든의 피멍은 온 몸에 있다는 것이다) 제 방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우연히 체스터 필립스와 마주친 아이든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하울링 코만도스의 새로운 임무 말인데, 아르님 졸라와 관련된 건가?"


그 말에 체스터 필립스는 미미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아이든이 이 세계의 미래를 봤음을 상기하며 납득했다.

그가 대답한다.


"그래, 아직 정확한 작전 지역은 정해지지 않았네만."

"아마 열차겠지?"

"...검토 중이네. 미래에는 열차에서 작전을 진행했나보지?"

"그래."


아이든 헌터가 팔짱을 끼고 차가운 벽에 몸을 비뚤게 기대며 말했다. 냉기가 옷자락을 뚫고 피부 위로 스몄다. 아이든의 태도는 굉장히 오만하였으며 다르게 보면 건방져 보였으나, 체스터 필립스는 신경쓰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헌터가 오버로드 작전 당시 세운 공을 보며 그런 태도를 지적하길 아예 포기한 차였다.

조금 미적거리다가, 체스터 필립스가 질문했다.


"작전은 성공하나?"


아이든이 픽 웃었다.


"왜, 아무리 대령이라도 미래는 궁금한가?"

"당연하지. 하울링 코만도스의 모든 작전 하나하나가 미국과 연합국의 패망이 걸려있는데."


미간을 찌푸리는 체스터 필립스의 얼굴에, 아이든은 교만한을 유지하며 역으로 물었다.


"내가 이 작전에 참가한다 해도, 이 작전이 실패할 것이라 보나?"

"..."


체스터 필립스는 뭔가 더 말을 덧붙이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네라면 다 때려 부수고서라도 성공시킬 것 같군."

"그거면 됐네."


아이든이 눈썹을 으쓱하며 벽에 기댁 몸을 바로 세웠다. 오만한과 거만함, 자신만만함을 적절하게 유지하는 것은 상대가 자신을 신뢰하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물론, 그 전에 실력을 보여놓았다는 전제 하에.

그리고 아이든은 그 교만함을 유지하면서도 신뢰받을 정도로 실적을 쌓은 상태였다. 아이든은 손을 휘휘 젓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아이든 헌터에겐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하울링 코만도스 전체의 생존, 그리고 그걸 위해서라면 임무를 실패해도 상관없었다. 내 세계도 아니고.


'..하지만 그걸 굳이 입 밖으로 꺼낼 이유는 없지.'








18일, 아이든 헌터는 페기에게 말해 낙하산을 몇 개 구했다.


"이건 뭐에 쓰려고?"


페기가 거의 다 나아가는 아이든의 입술을 한번 훔쳐주며 물었다. 아이든 헌터가 당당하게 말했다.


"로저스 그 머저리가 낙하산 타고 내리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아서 이걸로 때려팰려고."

"...."

"...농담이었어."


페기 카터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젠장, 이게 바로 아이든 헌터가 농담을 하지 않는 이유였다. 대체 왜 무슨 말을 하기만 하면 다 진담으로 알아먹는데?






19일이었다.

아이든은 하울링 코만도스를 굴렸다. 데굴데굴.

버키 반즈가 항의했다.


"왜 나한테만 이렇게 낙법을 연습시켜?!"

"그래?"


그리고 아이든 헌터는 하울링 코만도스 전원에게 낙법을 연습시켰다. 참고로, 아이든 헌터는 36m 상공에서 떨어져도 멀쩡할 자신이 있는 인간이었다.




23일, 아이든 헌터는 페기 카터에게 종이를 하나 쥐여주었다. 미래에 가장 성공할 인간 같아서였다. 로저스랑 반즈는 버려.


"..이게 뭐야, 아이든?"


페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이든은 아무 말 않고 페기의 손가락을 접어주었다.


"유성 펜이니까 물에 번질 일은 없겠지. 어디 백업해둬."

"아이든?"

"맘 같아선 비트코인이라도 사라고 해주고 싶다만.."


아이든이 중얼거렸다.


"여기 이 회사들, 주식 꼭 사라.. 대박날거야."

"...아이든 헌터?!"

"음, 누구 알려주지 말고."


아이든은 페기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그리고 미래에 다시 만나면 디즈니 주식만 나 떼줘."

"???"

"수고해."


그렇게 페기 카터는 당첨이 확정된 복권을 얻었다.


"???"






27일.

작전 브리핑, 간단한 정보와 납치할 인물 신상 기록.

납치 대상은 아르님 졸라라는 이름의 하이드라 과학자.

아이든 헌터는 저 아르님 졸라라는 놈이 어째 쎄했다. 아씨, 왜 생포지? 그냥 죽이면 안되나. 


참고로 이날 아이든 헌터의 푸르딩딩하던 손톱이 빠졌다.




그리고, 대망의 2월 1일이었다..

임무에 가지 말라며 잔소리잔소리를 해댔지만(내가 너보다 쎄다고, 내가 네 몫까지 한다고, 좀 가지 말라고.) 결국 버키 반즈는 의지를 불태우며 임무에 참가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설원, 절벽, 낭떨어지와 협곡, 아이든 헌터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버키 반즈를 야렸다. 저놈에 개놈새끼는 지 목숨 챙겨줘도 지랄이야.

게이브가 말했다.


"야, 너 죽는거 아니야?"

"안 죽어, 괜찮아.. 설마 날 죽이겠어?"

"진짜 죽일 것 같은데요."


자크가 중얼거렸다.


"..."


아이든 헌터의 분노 섞인 강요로 결국 낙하산을 착용한 버키 반즈가 한숨을 내쉬고, 스티브 로저스의 옆으로 피신했다.


아이든은 김이 서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입김에 한이 서린 것은 기분 탓일 것이다. 창백한 뺨이 차가운 바람을 맞아 더욱 창백해졌다. 새빨갛게 얼어붙은 양 귓볼, 콧망울, 아이든의 속눈썹에 약간의 서리가 맺혔다.


아이든은 자신의 발 아래에 높인 거대한 협곡과 그 사이에 건설된 높다란 철도를 바라보았다. 시린 자연의 풍경이 헌터를 압도하는 것 같았다. 이대로 소리지르면 메아리가 대답할까,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아이든 헌터는 말을 더럽게 안처듣는 한 꼬맹이에게 쌍욕을 퍼붓고 메아리를 들으라며 절벽에 매달아놓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든은 그러지 않았고, 대신 감각을 집중하여 저 멀리 다가오는 열차의 철커덕 거리는 바퀴소리를 들었다. 협곡 사이에 건설된 거대한 철도에서 느껴지는 진동이, 아이든 헌터의 레이더에 잡혔다.


"준비해, 10분 쯤 있음 오겠네."

"어우 추워.. 빨리 안 오나?"


짐이 투덜거렸다. 긴장이라도 되는지 농담이라도 던지는 모양새다. 덤덤과 버키가 웃기지도 않는 그 농담에 웃어주었다.


아이든은 대충 쭈그려 앉아 바닥에 쌓여있는 눈덩이를 뭉쳐 토끼 비슷한 덩어리를 만들었다.


"토끼."

"귀엽다."


캡틴 아메리카가 푸근하게 웃어주었다. 아이든은 말없이 토끼를 캡틴 아메리카의 헬멧 위에 올려주었다.


"큽.."


짐이 쿡쿡 웃었다. 나머지도 조금씩 웃고 있다. 캡틴 아메리카는 조금 당황한 듯 싶었지만, 본인의 희생으로 동료들이 긴장을 푸는 것으로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아이든은 친절히 캡틴 아메리카의 헬멧에 앉아 있는 눈토끼를 다시 치워주었다. 자크가 중얼거렸다. 토끼 죽었어..




철커덕- 기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선명하기 들렸다. 최소한 아이든의 귀에는 그랬다. 이제 정말 거의 다 왔다는 소리에, 아이든이 경고했다. 거의 다 왔네. 마침 캡틴 아메리카의 무전기에서 무전이 온다. 거의 다 와가네, 준비하도록.


아이든은 말 없이 제 등에 매인 삽을 들고, 다른 이들의 어깨에 매인 낙하산을 한번씩 봐주었다. 게이브가 조금 웃었다. 작달막한 아이든 헌터의 걱정이 귀여워보였던 탓이다. 아이든 헌터는 '그러다 네가 한번 떨어져봐야 그 소리를 못하지.' 라고 생각했다.

참고로 아이든은 실제로 떨어진 적이 있었다. 다리뼈가 깔끔히 부러진 덕에 살았지만.



철컹 철컹 철컹 철컹-


아이든은 저게 증기기관차일까 하고 생각했다. 몽고메리가 제 망원경으로 달려오는 열차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열결되어 있던 밧줄에 손잡이를 걸친 캡틴 아메리카가 하울링 코만도스를 한번씩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든, 자네는 가장 마지막에 오게."


아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철컹 철컹 철컹 철컹-


열차가 달려온다. 장갑을 낀 손으로 통짜 철로 만든 삽을 꾹 쥔 아이든이 군모와 마스크를 다시 한번 고쳐 썼다.


타닥-


푸른 전투복을 입은 캡틴 아메리카가 먼저 도움닫기를 하며 점프했다. 공중으로 발을 내딪어, 단단한 밧줄에 몸을 맡긴 채 그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방패를 등에 매고 있어야 했기에, 그는 낙하산을 차고 있지 않다.


찡긋-

버키 반즈가 윙크를 하며 공중으로 뛰었다. 아이든은 썩은 표정을 지었다.


타닥-


절벽에서 발이 떨어지고, 멀어져가는 그의 등 뒤로 아이든이 불편하지 않도록 개조해준 낙하산이 매달려있다. 상황이 위험할 때는 총알 세발 쯤은 막아줄 것이다.


그리고 차례차례, 짐 모리타, 덤덤 듀간, 게이브 존스와 자크 데르니에, 그리고 몽고메리 펠스워스가 뛰어내린다. 그들의 등 뒤에 하나같이 달려있는 낙하산은 아이든 헌터의 작품이었다. 칼질 몇번이면 찢어지는 천조각이지만,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에서 그들의 목숨을 한번 정도는 구해줄 것이다.


"하아."


아이든 헌터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희게 얼어붙은 숨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마스크를 다시한번 고쳐쓰고, 손잡이로 밧줄을 탈 필요가 없는 아이든은 하울링 코만도스가 기차에 거의 착지하는 것을 보며 밧줄 위에 올라탔다.

지구가 망해도 밥은 먹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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