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맨 밑에 있는 결제창은 소장용 입니다.



네오한 빌런 사무소





"저거 예뻐요?"

"아뇨아뇨아뇨!"

"계산해주세요."




 나의 눈길 한 번이면 없던 코트가 생기고.




"예쁘네요. 이걸로 주세요."




 남자의 손짓 한 번이면 없던 가방이 기어코 생긴다.




"제발, 이걸로 계산해주세요. 제발."




 궁극에는 카드를 쥔 남자의 손을 말리고 애원하기에 이르렀다. 당신 어쩌자고 나에게 이러한 것들을 사주는 건지. 혹시 취미 혹은 특기가 기부 아니면 자선사업인지도 궁금했다. 손에 들린 쇼핑백의 개수가 들어갈수록 양심을 파고든다. 걔네들이 쇳덩이처럼 무겁게 내려앉는다. 아, 사장님 저 진짜 이러다가 불겠는데. 나의 원활한 직장 생활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받으면 안 된다는 느낌이 왔다. 우리 엄마가 세상에 공짜는 절대 없다고 그랬다. 이건 뭐. 손에 들린 물건과 남자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번갈아 살피고는 고개를 저었다. 제발, 이걸로 계산 부탁드립니다. 제가 정중하게 부탁드릴게요. 저 진짜 이런 거 필요 없거든요.


 맨날 누가 나한테 100만원씩 주고 이거 다 못 쓰면 200만원 줄 거야! 라고 협박하기를 손꼽아 기다렸는데, 막상 아무 이유 없이 돈을 막 퍼다 주니까, 이거는 좀 아닌 것 같다. 차라리 문대표 카드로 시원하게 결제를 날렸으면 기분이 하늘을 날아갈 듯 째졌을 거 같긴 한데. 흐음, 입술을 꾹 깨문 정재현씨는 몸을 돌려 나와 눈을 맞췄다. 그의 손가락에는 당장이라도 결제를 갈길 법한 카드 한장이 끼워져 있었다.




"그럼, 그거 말구요."

"예?"


"연락처 줄래요?"

"제, 제 연락처는 왜요…?"




 기다려도 하도 연락이 안 와서. 가만히만 있어도 예쁜 두 눈이 예쁘게 휘어진다. 그 아래로 시원하게 뻗은 입매마저 감탄스럽다. 아, 근데 그건 그거고.




"연락처요…?"




 나의 연락처. 내 전화번호. 내 개인번호. 연락처… 말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이걸 말하면 안되지 않나. 나나는 심지어 회사용 휴대전화랑 사생활용 휴대전화가 나누어져 있다던데. 아니, 돈도 넘쳐나는 저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내 휴대폰 기록 싹 다 터는 거 아닌가. 아, 그럼 좆되는 건데. 머리가 복잡한 찰나에 남자가 재촉이라도 하는 듯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카드를 쥔 손을 앞으로 더욱 뻗어냈다. 어어, 아뇨아뇨.




"그게."

"네."

"그…. 제가 연락처가 없어서요!"

"…."




 얼탱구 없는 내 대답에 정재현씨는 입을 다물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의 착각인지 뭔지, 그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꼭 경찰이 눈빛만으로 범인을 쏘아대는 것처럼. 그에 입안이 빠삭빠삭 마르고, 왜 그런 대답을 한 것인가에 대한 후회가 마구 밀려왔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런 백화점 명품관에 블랙카드를 들고 나타난 인물이 그 흔한 휴대폰이 없다는 게 말이 안되는 것 같다.




"…."




 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저 깊은 눈동자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머릿속에서는 당장이라도 경찰청창살쇠창살에 끌려 들어가 제발 한 번만 선처를 바란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비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니까, 그게…."

"…."

"워낙에 제가 폰을 자주 잃어버려가지고…."




 고민에 고민을 걸친 끝에 나온 말이 고작 이거라니.. 거짓말도 머리 좋은 놈들이 한다더니 스스로가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마음 같아서는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머리를 처박고 싶었다. 불편한 옷을 꾸역꾸역 입은 것처럼 이 모든 상황과 현실이 벅찼다. 저 그냥 여기서 나가게 해주세요. 그냥 평소처럼 7층 영캐주얼이나 갔어야 했는데, 괜히 여기에 와서.




"그럴 수 있죠."




 조금의 시간이 흐른 다음, 정재현씨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웃었다. 딱 그 모습만 보아서는 한 점의 거짓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선량하기 그지없는, 맑디 맑은 눈빛과 그 미소. 그에 홀린 듯이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워낙에 좀 칠칠찮아서. 어렸을 때는 세뱃돈도 잃어버리고 하하. 원래 다 그런 거죠. 하하. 하고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잠시만요."




 정재현씨는 그런 나를 앞에 두고 웃어대다가 재킷 안쪽을 뒤적여 본인의 휴대전화라고 추측되는 것을 꺼내 들었다. 케이스도 씌워지지 않은 검은색 아이폰이 금세 내 앞으로 다가왔다.




"저, 이건 왜…?"

"가져가요."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정재현씨는 손가락에 끼워진 카드를 앞으로 내미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아, 잠시만요…! 문사장의 카드를 대신 내밀기도 전에 카드가 시원하게 긁혀 내려갔다. 아니, 전화번호 주면 안 한다매! 연락처 주면 다 해결될 것처럼 말해놓고…!! 




"손이 미끄러져서."

"그리로 손이 미끄러질 수가 있나?"

"세상엔 별일이 다 있죠."




 남자는 아주 가볍게 손을 들어 사람들을 부른 뒤, 결국 결제되고만 카디건이 담긴 쇼핑백을 넘겼다 돈도 많고 잘생긴 주제에 예의까지 탑재된 건지, 그분들께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나서야 천천히 백화점의 로비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집에 모셔다드리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러우시겠죠?"

"…그죠, 아무래도."




 마지막으로 가볍게 넥타이를 정리한 정재현씨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고는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그는 내가 나아갈 출구를 한 번, 나를 한 번 보고 나서 에스코트하듯 손을 쭉 앞으로 뻗고 가야 할 길을 알려줬다.




"연락받아줘요."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는 예쁜 얼굴로.




"넵…."




 난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오싹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나의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다.


















"너 폰 바꿨어?"




 근심 가득한 나와는 달리 가뿐한 얼굴로 출근한 김정우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책상 위에 당당히 놓인 나의, 정확하게는 정재현씨의 검은 아이폰을 보며 물었다. 시발. 혹시나 째깍 연락을 받지 않는다면 위치추적이든 뭐든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에, 이 폰을 빨리 돌려줘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작은 연락이라도 놓칠까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긴 했는데, 여러모로 심경이 복잡하다.




"아니."

"근데 이건 누구 건데?"




 내가 그저 입술을 삐죽이고 있자, 태연히 자리에 앉은 김정우가 별안간 입을 틀어막는다. 가뜩이나 커다란 눈을 한껏 치켜올린 채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이리저리 보다가, 가까이 다가와서는 '이거 설마 훔친 거야?' 하고 소곤거렸다. 넌 나를 진짜 어떻게 보고 있는 거니.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런 복잡한 일이 있다…."

"복잡한 일? 그게 뭔데."




 그건. 입을 떼려다 생각을 고쳐먹었다.




"…됐다."




 아니지. 잘 생각해보면 왜 나 혼자 고민하고 앉아있지. 이게 전부 회사 때문인데.




"야, 있잖아."




 내 물음에 핫바 하나를 입에 문 김정우가 눈동자만 굴려 나를 바라보고는 어서 빨리 말하라는 듯이 눈썹을 찡긋거렸다. 화면에는 요근래 매일 같이 다섯 번은 정주행하는 것 같은 무한도전- 알래스카에서 김상덕씨를 찾는 영상을 틀어놓았다. 질겅이며 핫바를 씹어대는 꼬라지가 영 못 믿음직 하다. 괜히 쟤한테 알렸다가 이 일이 두 배로 불어나 내 모가지를 잡고는 안 놓아줄 것만 같다. 옛날에 할머니 집에 저러고 맨날 메이플만 하던 삼촌한테 고민상담한 뒤로 인생이 존나게 꼬였던 일만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됐다."

"아, 왜 뭔데."

"있어."




 그리고 때마침 검은 화면이 발광하며 11자리의 숫자를 비췄다. 아이폰 기본 벨소리를 들으며 침을 꿀꺽 삼키자 김정우가 안 받아? 하고 한 마디를 날린 뒤, 손을 뻗어 책상 위의 검은 핸드폰을 그러쥐었다. 그리고는 긴장감이 역력한 내 얼굴을 보며 의아하다는 듯 폰 번호를 확인하고 가볍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아, 안돼…!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여보세요?"




 미처 말리기도 전에 김정우가 말문을 열었다. 아 시발 망했다. 서둘러 그 옆에 바짝 붙어 스피커 반대쪽에 귀를 대고 상대방이 무어라 답할지를 기다렸다. 머릿속으론 이전의 참혹함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괜찮은 변명거리를 한없이 생각했다. 누구라 그러지? 사촌 동생? 이 시간에 사촌 동생이 왜 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하지? 몇 초 되지 않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김정우는 지금 막 L.A에서 귀국한 나의 사촌 동생이며, 갈 곳이 없어 우리 집에 머문다는 그럴듯한 시나리오를 짰다.




"대답을 하세요. 뭐야?"

"야, 내놔."

"대답이 없는데, 그쪽 누구…!"




 야, 내놔. 김정우의 손에서 낚아채듯 휴대폰을 가져가 귀에 가져다 댔다. 상대방의 얕은 숨소리에 집중하며,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고 누구냐며 소리를 꽥꽥 지르는 김정우의 입을 막았다. 여보세요…?




"정재현씨…? 여기 서울중앙검찰청인데요. 정재현씨의 계좌가 불법유통에 이용된 정황이,"




 거기까지 듣고 단숨에 통화종료를 눌렀다. 와, 돈 많으면 뭐하냐. 개인정보가 중국에 넘어가는 건 돈 없는 우리나 돈 많은 그쪽이나 마찬가지였구나. 한없이 멀어 보이던 정재현씨가 무릎 나온 츄리닝을 입은 걸 본 것처럼 친근해진다. 긴장감에 참았던 숨을 내쉬고 폰을 돌려 책상 위에 내려놓자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던 김정우가 내 눈치를 살피며 누구였는데? 하고 물었다.




"보이스피싱인가 봐."

"헐, 너는 걸스피싱돼야 하는 거 아냐?"

"…."

"…미안."




 사과의 의미로 이거 먹을래…? 하며 반쯤 먹은 핫바를 눈앞에 들이밀길래 거질하지 않고 베어 물고 질겅질겅 씹으며 모니터를 바라봤다. 모니터 위에는 '정재현'하고 치면 나오는 수없이 많은 기사들 중 가장 최신의 것이 띄워져 있었다. MS증권의 부사장 취임 예정, 역대 최연소, 기대되는 젊은 사업가. MS증권 INO 그룹에 투자 결정 등등. 




"야, 정우야."

"응?"




 내 부름에 금세 답한 김정우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고개를 까딱였다.




"이 폰 정재현 꺼임."

"정재현이 누군데?"




 순박한 얼굴의 김정우가 생각이란 걸 하지도 않고 부루퉁하게 답했다. 자신과는 더 이상 관련이 없는 머나먼 사람이라는 듯. 이미 자신의 의식의 범위에 정재윤과 MS증권에 대해 조사한 그 모든 것이 사라져 개미 똥구멍 만큼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하, 헛웃음을 터트리고 모니터를 향해 고갯짓하자 의자 위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반쯤 일으켜 내게로 다가와 찬찬히 글들을 훑었다. 쉴 새 없이 정육된 고기를 씹던 김정우의 턱이 일순간 움직임을 멈춘다. 그리고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이 사람이 왜…?"

"그건 내가 묻고 싶음."




 그때 그 MS? 웅. 우리가 작업 중인 그 MS? 웅. 자세히 봐봐, 이 얼굴 맞아? 아- 맞다니까.




"혹시 뭐 눈치 깐 걸까? 나 지금 불안해서 잠을 못 자."




 내 말에 눈빛이 흔들리던 김정우가 곧 멘탈을 바로잡고 다시금 의자 뒤로 몸을 기댔다. 허, 웃겨. 우리가 뭘 했다고 눈치를 까. 담담하게 말하는데, 그 밑에 꼬아둔 발이 달달 떨렸다. 믿음직… 스럽지는 않았고, 나만 쪼는 건 아니라 위로는 됐다. 불행도 나누면 반이라니까, 아무래도 웅웅.




"도영이형한테 물어볼까?"

"차라리 말을 할 거면 나나가 낫지 않아?"


"뭔데, 뭔데 나한테 말해?"




 아, 깜짝이야. 김정우가 콩만 해진 가슴께를 쥐며 휙- 고개를 돌리고 김도영을 바라봤다. 김도영이 시니컬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다 뭔가 느낌이 쎄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목소리를 낮췄다. 너네 뭐 사고 쳤어? 하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뭔가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 김도영은 감춰줄 거란 생각에 퍽 감동스러웠다.




"혀어엉…."




 김정우는 그에 답하듯 우는 소리를 내며 김도영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아안고 얼굴을 부빈 다음, 마음의 안정을 찾았는지 검지로 나를 가리켰다. 김여주 사고쳤어엉.




"뭐?"




 김여주가 그 정재현. 정재윤 오빠 정재현. 그 MS증권 정재현한테 속아서 정보를 다 팔아넘기고.




"…?"




 김도영이 떡 벌어진 입술을 두 손으로 가렸다. 뭔가 이상한데.




"이제는 폰까지 받아와가지구…."

"야, 너는 말을 무슨. 아닙미다."




 너어, 너. 김도영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킨다. 경악한 표정을 더한 채로.




"아닙니다. 저건 모함이에요. 제 말을 들어보세요."

 



 진짜 이대로라면 김정우의 모함에 오명을 가득 쓴 채로 쫓겨날까 봐 다급히 김도영의 재킷 끄트머리를 손으로 꼬옥- 잡고 다급히 말을 이었다. 아니, 그니까 제가 그때 그 정재윤씨 방안에 넣어드리면서 그의 오빠 정재현씨를 만났는데, 어쩌구. 그때 정재윤씨가 제 옷에 실례해서 연락처를 저쩌구. 근데 어제 하필이면 백화점에서 마주친 게 정재현 이러쿵, 근데 정재현이 마음대로 옷까지 사주고 휴대폰까지 줬다 저러쿵.




"옷까지 사줬어?"




 닌 닥츠르.




"…."




 김도영씨는 손 내리고 뭐라고 말 좀 해봐유.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바라보던 김도영이 눈빛에 몸이 후끈후끈 달아오른다. 눈빛으로 나를 지져 죽일 생각인 건지 꽤나 매섭게 노려보며 아니, 정정한다. 쳐다보며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입안에서 혀를 굴리다 곧 고개를 푹 숙였다. 도무지 간단하게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제가… 알아서 하려고 했어요…."




 그냥 오늘 연락 오면 폰 돌려드리고 그러려고 했는데….




"혼자서 뭘 어떻게 해."




 후우- 깊게 숨을 내쉰 김도영이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고는 망설임도 없이 귀에 가져다 댔다. 뚜루르- 통화연결음이 울리는 동안 나를 매섭게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그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이 사단을 만든 김정우의 발을 툭툭 건들며 이를 악물었다.




"사장님."

"사장님…?"

"큰일 났어요."

"큰일…?"




 이거 큰일 정도임? 그치. 레알? 아무래도. 


 김정우와 뻐끔거리며 아무래도 좆된 거 같다는 내 상황에 대해 얘기를 하는 동안, 짧은 통화를 마무리한 김도영이 김정우와 내 사이에 있던 정재현의 휴대폰을 자신의 안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자리를 옮겼다. 김도영의 구둣발이 바닥을 쿵쿵 울렸다. 쿵쿵- 화가 난 듯한 그 뒷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시발 김정우한테 말하지 말 걸. 말하지 말 걸, 진짜 말하지 말 걸.




"따라와."




 죽는 한이 있어도 말하지 말 걸.


















 흠, 문대표는 중앙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인 전화기를 바라봤다.




"여기 GPS는 안 잡히지?"

"네, 지하니까요."




  제노의 짤막한 대답에 대표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몸을 뒤로 기댔다. 해킹은? 그런 것도 아닌 거 같아요. 도청은? 아무 것도 잡히는 게 없어요. 그리고는 별 큰일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손을 흔들며, 됐어 그럼 뭐가 문제야 하고 말했다.

 상상과는 다른 유한 그의 반응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작게 손을 모으고 아, 맙소사 하느님 감사합니다. 작게 읊조리기까지 했다.




"너 뭐 말한 거 없지?"

"아유, 저를 뭘로 보시고. 당근 없죠…!"

"그래, 그럼 됐어."




 곧 문대표가 검지로 콕- 멀리 있는 검은 아이폰을 가리켰다. 저거는….




"그래, 그냥 부숴버리자."




 그의 말에 자리에서 번뜩 일어난 마크가 가벼운 손놀림으로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 폰의 액정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이 가볍게 공중에 던졌다가 받으면서 문득 궁금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돌렸다.




"근데 이 사람이 누나한테 이걸 왜 줬지?"




 그 한 마디에 모두가 행동을 멈췄다. 손가락을 까닥거리던 문대표도 노트북 선을 정리하던 제노도, 그 옆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빨던 나나와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던 동혁이까지.




"그러게. 왜 줬지?"




 저 누나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는데. 이동혁의 해맑은 궁금증이 가슴팍을 찌른다.




"설마,"

"…."


"첫 눈에 반했나?"




 별 생각 없이 흘린 것이 분명한 동혁이의 말을 끝으로 정적에 휩싸였다. 그 정적의 끝은 에이, 설마- 하고 말하는 김정우의 목소리였다.




"설마."




 김정우가 굳이 힘들게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김정우가 나한테 집중이라도 하는 것처럼 미간에 인상을 찌푸리고 내 눈부터 시작해서 입술까지 찬찬히 훑어봤다. 그에 위협을 주고자 눈을 치켜뜨고 입술을 들썩였다. 곧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친 김정우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그의 팀원들에게 당당히 입장을 내놓았다. 설마 반했을 리가.




"우리 여주는 풀잎 같은 스타일이라 계속 봐야 사랑스러운 스타일."

"그치."




 문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의견에 동참했다. 왜인지 기분이 찝찝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들꽃을 풀잎으로 잘못 말해서 인지, 내가 들꽃 조차 되지 않는 풀잎에 비유 당해서인지. 이것들을…. 말문을 잃은 나를 위로하듯 나나가 고개를 휙 돌리고는 가식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누나, 나나는 누나보고 첫눈에 반했어요.




"고맙다."




 위로는 되지 않았다. 쟤는 거짓말쟁이다.




"오웅, 그럼 이거 어떻게 진짜 부숴요??"

"응, 나가서 부셔. 옥상에서 떨어트리던지. 맘대로 갖고 놀아."

"저기, 대표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말을 잇던 찰나, 마크의 손에 들린 휴대폰이 짤막한 진동과 함께 번뜩였다. 같은 아이폰 유저인 마크는 곧 익숙하게 핸드폰을 돌려 잠금을 해제하고 큰소리로 또박또박 내게 왔음이 틀림없는 메시지를 읽었다.




"정재현입니다. 내일 시간 괜찮으세요? 보고 싶네요."

"보고 싶네요? 뭐 언제 봤다고 보고 싶대? 우웩."


"오잌 이거 뭐야? 진짜?"




 김정우의 어이없는 듯한 푸념 뒤로 관자놀이를 긁적이던 대표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하하-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나를 가리켰다. 뭐, 뭔데. 나보고 웃으면 어쩔어쩔요. 한없이 불길한 상황에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휴대폰은 알아서 처리하셔 주십쇼.


 그런 내 앞을 가로막고 코앞까지 다가온 대표가 턱에 손을 올리고 몸을 돌려 소파의 끄트머리에 앉아있던 동혁이를 불렀다. 야, 동혁아.




"너네 그 금고 위치 모른다고 그랬나?"

"엉, 그 집에는 없던데."




 무성의하게 답을 건네며 손가락으로 화면의 스크롤을 내리던 동혁이는 '아, 찾았다, 정재현.' 하는 소리와 함께 자기 폰에 떡하니 들어찬 정재현의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람 맞아요? 하고 덧붙였다. 머릿속에서 솔직하게 말을 해야 한다, 아니다 말을 하면 좆된다는 의사가 충돌했지만, 결국 나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쪼록 상황이 내게 더 불리하게 진술되지 않기를 바랐다.




"여주야."




 그 MS증권 정재현의 얼굴을 확인한 뒤, 나의 대답을 들은 대표는 한없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뇨."

"아니야, 넌 할 수 있어."

"아뇨."

"이 사람 뭔가 이상해요."

"아니야, 안 이상해. 다 너의 착각이야."




 아니, 뭔가 불길하다니까. 나한테 반할 리가 없다니까 그러네! 대표는 겁대가리를 상실한 내 반말에도 아랑곳 않고 고개를 저은 뒤 내 두 손을 꼬옥 붙잡았다.




"그 금고 어딨는지,"

"안 돼요."

"알아 오자."




 말을 끝낸 대표가 돌아섰다. 그리고 내 속을 뒤집으려는 건지, 아니면 나를 응원해주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나조차도 너보면 떨려~ 하고 말해줬다.




"구라까지 마세요."

"답장 뭐라고 하지? 좀 뭔가 매력적이게 보내자."




 그리고는 더 이상 나와의 대화는 사절하겠다는 의미인 건지, 그대로 휴대폰을 들고 있는 마크를 향해 다가섰다. 동그랗게 마크 주위로 몰린 팀원들이 연애는 이래야 하니, 아니 이거는 구리니 뭐니. 멘트를 정하고 있는 동안 나는 넋을 잃고 그 아래에 얼어붙었다. 유일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김정우만 양심도 없이 쯧쯧- 하고 혀를 찼다.




"김정우 땜에 시발…."




 하는 짓이 우리 삼촌이랑 비슷할 때부터 내가 알아봤어야 했는데. 시발.











네오한 빌런 사무소









 오늘의 기사를 자처한 김정우와 김도영은 약속 장소로 가는 내내 이러니 저러니 말을 들어놨다. 이번에 내 역할이 중요하니, 뭐니. 그 말에 대답하기가 싫어서 그냥 입술을 꾹 다물고 뚱하니 뒷자리에 앉아있었다. 오늘 이 날을 위해 문대표가 휴대폰도 새로 맞춰주고, 비싼 옷이랑 가방들도 사주고, 차도 보내줬지만 정재현의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그 형형한 눈앞에서 당당히 거짓말을 해야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하다. 지금 새로 받은 이름조차 헷갈린다. 이민영? 아니 그래 은민영이었다.

 그 사람 집안이 어떻다고? 은어 양식장으로 큰 돈을 벌었어. 은어 양식장으로 큰 돈을 벌 수 있나? 그냥 외워, 의문을 가지지 마. 무슨 막장 드라마 쓰듯 엮어내린 은민영씨의 연대기에 차마 할 말을 잃었다.




"야, 괜찮아. 그것만 알아내면 다시는 그 사람 안 마주쳐도 돼."

"됐어요."




 김도영이 백미러로 내 눈치를 흘깃 보며 보조석에 앉아 철도 없이 인스타만 보는 김정우의 어깨죽지를 툭툭 건드렸다. 아- 왜에? 하며 김도영을 쳐다본 김정우는 나를 향해 까딱거리는 김도영의 고갯짓에 흠-하고 목을 다듬고 쾌활하게 말문을 열었다. 우와 좋겠다~ 이거 끝나면 대표님이 해외여행 보내준다며?




"완전 특급. 놓칠 수 없는 대박찬스!"

"네가 갈래?"

"후웅."




 패기 넘치던 모습은 어디 간건지, 금새 기가 죽은 김정우가 몸을 원래 자리로 되돌리며 다시 폰을 들었다. 김도영이 세상 착잡한 표정으로 차의 속력을 올렸다. 그냥 빨리 나를 내려주고 이 숨막히는 어색함 속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집은 강남, 아 강남 어디였지."




 나는 빠르게 지나가는 가로수들을 보며 외운 것을 까먹지 않도록 내내 중얼거렸다. 은민영, 나는 은민영. 시발 말이 안되는데 은어 양식장으로 돈을 번 24살 금수저. 아, 매달 월세 70을 내는 입장에서 금수저에 몰입하기가 쉽지가 않은데. 무튼, 지금부터 나는 강남에 자가도 있고, 차도 있으며 심지어 몇 백억 자산사업을 물려받을 상속자다.




"아. 전략보다 사람이 우선이라고 말한 기업가가 누구였죠?"

"그런 사람이 있어?"


"잭 웰치."

"아, 그래 잭 웰치."

"헐, 그런 사람도 있구낭."




 존경하는 기업가는 잭 웰치. 잭 웰치, 잭 웰치. 와중에 '잭 웰시코기라고 외우는 건 어때?' 하는 김정우의 말을 애써무시하려 귀를 막았다. 아아아 안 들린다.




"야,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그래, 나나하는 거 봤잖아."




 그럼 니네가 하시던가. 입밖으로 세어나오려는 말을 꾹 참아 눌렀다. 새로 대표가 개통해 준 휴대폰이 번뜩였다. 정재현씨하고 정갈하게 저장된 이름 아래로 '기다리고 있어요.' 짤막한 7글자가 비췄다. 




"뭐래?"

"기다리고 있대요."




 아 난 진짜 모르겠어어. 입사한지 얼마 안 된 사람한테 이런 거 시켜도 됨?




"무슨 일 생기면 우리가 달려갈게."

"왜 하필 둘임. 차라리 마크랑 동혁이 불러줘요."

"얘 봐라, 얘가 우리 무시하네."




 내가 이거까지 말 안 하려고 했는데- 하고 말문을 여는 김정우의 등받이를 조용히 하라는 뜻을 담아 툭- 건드리고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눈치를 전부 밥 말아 먹지는 않았는지, 김정우는 순순이 다시 폰을 들고 인스타를 정독했다. 골백번은 들었을 인싸쏭을 들으며 묘하게 익숙하지만 이질적인 거리를 바라봤다. 이전의 방문은 깜깜한 어둠이 내렸을 때였는데, 지금은 쨍쨍하니 해가 비추고 있어서 그런가 보다. N호텔 시발. 다시는 안 올 줄 알았는데.




"가서 맛있는 거 먹고 온다고 생각해."




 대답 대신 옷과 신발을 정리했다. 이 모두 지나가리. 지난 번도 무사히 지나갔잖아. 천천히 속도를 줄인 차량은 호텔 로비 앞에 들어서고 나서야 완전히 정차했다. 다녀올게요. 안전벨트를 풀고 있는데, 김도영이 안주머니에서 검은 아이폰을 꺼내들었다. 정재현 꺼.




"돌려줘."

"안 돌려줘도 괜찮지 않아요? 어차피 돈도 많고, 폰도 새로 뽑았던데."




 의아함 섞인 나의 물음에 김정우가 키득거리며 답을 내놓았다. 제노가 저기 도청장치랑 위치 추적기 달았어.




"불법 아니에요?"


"…."




 김도영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우리가 하는 짓이 당연히 불법이지, 합법이겠냐는 얼굴이다. 아, 그쵸. 떨떠름하게 김도영 쪽으로 손을 뻗으니 그대로 내 손을 감아잡는다. 따뜻한 김도영의 손이 긴장감에 차갑게 얼어붙은 내손을 그러쥐며 위에서 아래로 꾹꾹 눌렀다.




"왜이렇게 손이 차."

"…."

"추우면 말을 하지."

"아니 그냥 긴장돼서…."




 '뭐야? 왜 둘만 손 잡아? 나도 잡을래.' 하고 손을 겹친 김정우만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김도영의 손을 잡고 제발 나를 데려가달라 애원했을 지도 모른다. 김정우의 눈새짓이 간신히 이성을 붙잡는다. 김정우 이러라고 문대표가 보냈구나. 덕분에 덜 구질하게 따뜻했던 차 안에서 내려 김정우와 김도영의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바이요.




"들어가 얼른!"

"내가 알아서 할거야!"




 창으로 김도영이 기어를 내리는게 보였다. 곧 손을 흔드는 김정우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데리러 올게- 하는 말을 끝으로 차는 도로로 진입하여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다. 혼자 남은 느낌. 아니지, 찐으로 혼자 남았구나. 내리쬐는 햇빛에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조금이라도 있어보이려고 장식한 디올 팔찌가 치렁치렁 내려와 거슬리게 시야를 가렸다.




"여보세요, 정재현씨."




 저 지금 도착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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