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그는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침대 밑의 괴물이었다. 누구는 그를 잡아죽여야 할 악마로 보았고, 또 누구는 감히 손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존재로 여겼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는 구원자였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가, 쇳덩이를 타고 내려와 어둠 속에서 추락하는 핏방울들을 눈으로 좇았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셀 수 없는 수가 바닥을 때리고 나서야 붉은 액체는 멎어 들어갔다. 그녀가 얼룩진 쇳덩이에서 눈을 돌려 그것을 손에 든 남자, 이 모든 상황을 일으킨 남자를 쳐다봤다.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는 남자는 얼굴이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손에 들린, 핏빛으로 물든 쇳덩이만 그를 대신하는 듯 형형하게 빛날 뿐이었다. 그녀가 물었다. 


"죽었어요?"


"어."


마치 전문가라도 되는 마냥 그는 단정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머리가 깨진 채로 널브러져 있는-이제는 사람이라고 말하기 힘든 주검은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살아생전 몸속에 있던 피가 다 빠져나오기로 작정이라도 한 건지, 끊임없이 지면을 타고 흐르는 액체는 멎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시체와 가까운 자신의 옷자락을 조금 잡아당겨 젖지 않게 치웠다. 그 아이러니한 행동에 그가 웃는 것도 같았다. 그녀는 다시 물었다. 


"죽였어요?"


"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도중 피 웅덩이를 밟는 바람에 신발의 밑창이 더러워졌지만, 거기까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허리를 굽혔다. 


"고마워요."


그는 웃었다. 




난 살인자야, 알아? 네. 그녀는 대답했다. 모태구. 단정한 세 글자가 그의 이름이었다. 입을 열 때마다 묘하게 똑딱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부정교합. 그 비대칭적인 소리마저도 그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래, 따지자면 그는 비대칭적인 사람이었다. 바깥은 멀끔한 청년이었지만 그 속은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었다. 그 중 진짜를 꼽으라면 당연히- 썩어 문드러진 속내였다. 그는 자신의 본모습, 그리고 겉모습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잘 이용했다. 


아무도 이 남자의 진실을 모른다. 이 세상의 누구도 이 남자의 피 묻은 손을 본 적 없다. 그러나 그녀만큼은 알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날 구한 건 당신이에요. 


그는 재미있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 환상처럼 번진 핏자국이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건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는 자국처럼, 그의 무심한 표정을 장식했다. 뇌리를 찔러오는 이미지를 안으며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한 번 고맙다고 했을 때, 그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장소를 떠났다. 그녀는 신발에 묻은 핏자국이 번질까 봐, 신발을 들고 골목의 반대쪽으로 사라졌다. 그날만큼 행복한 날이 그녀의 인생에는 없었다. 다시 찾아오지도 않을 것이다. 


경찰은 그 다음 날, 그녀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을 때 찾아왔다. 그녀는 안 그래도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순전히 그녀가 가난한 동네에 살기 때문에) 점장이 이를 꼬투리 잡아 그녀를 자르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어제의 행복감이 남겨놓은 발자국이 아직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신경쓰지 않았다. 경찰은 당신의 아버지가 죽었다고-정확히는, 살해되었다고- 그녀에게 알렸다. 충격에 빠진 척 연기하는 그녀에게 그들은 어제 그녀가 어디에 있었는지 물었다. 그리고 그를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는지 물었다. 


그녀는 용의 선상에 오르지 않을 것이다- 성인 남성의 머리를 둔기로 때려 부수기에 그녀는 너무 약했으니까. 대신 그녀는 그를 떠올렸다. 충분히 강한 진짜 범인을. 그녀를 보며 웃던 남자.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찾아왔다. 


"넌 아빠가 그렇게 싫나 보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가볍게 물은 질문에 그녀도 가볍게 대답했다. 얼마 전 죽은 인간을 두고 말하기에는 과하게 가벼운 말투일지도 몰랐지만, 그녀는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고 남자는 얼마 전이라고 여기지 않았기에 의미 없는 논쟁이었다. 그녀가 물었다. 


"왜 죽였어요?"


"궁금한가?"


"아뇨. 신경 안 써요. 감사해요."


"그럼 넌 나한테 왜 감사하는데?"


그녀는 웃었다. 태구는 실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에게 아버지는 목을 조르던 업보와 같은 인간이었다. 그녀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과거, 어쩌면 전생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카르마였다. 그는 그 과거에서 그녀를 해방했다. 


"내가 하지 못한 일을 해 준 사람이니까."


"내가 널 위해서 죽인 줄 아나?"


"아닌 것 알아요. 가끔은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올 때가 있잖아요? 절 그런 결과라고 생각하세요."


"내가 왜 너라는 결과를 떠맡아야 하지?"


"자신이 한 일은 자신이 책임져야 하니까."


"나는 책임 안 지고 잘 살아왔어."


너도 그렇잖아? 그는 그녀가 애써, 혹은 자신도 모른 채로 가리고 있던 정곡을 찔렀다.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듯한 눈빛이 묻고 있었다- 너는 네 아버지라는 책임을 나에게로 떠넘기고 있는 게 아니냐고.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감당하지 못한 짐을 처리해준 그에게 감사해 하고 있었다. 그녀를 언제까지고 괴롭히던 업보를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뻗어 치워주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고, 그런 마음을 알아차린 그가 옅은 미소를 그리고 물었다.


"넌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 나도 그렇게 갈 태니까. 이번 일은 하늘에서 내려온 로또라고 생각하던가."


사람마다 그런 일 한 번은 있어야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녀가 그를 붙잡지만 않았으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고, 두 사람은 다시는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희미하고 재미있는 만남으로, 그녀에게는 한밤의 꿈같은 축복으로. 하지만 그녀는 그를 보내지 않았고, 두 사람의 미래는 다른 방향으로 얽혀들어 갔다. 


진실로 그녀에게 그는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였다. 


"한 번, 내가 당신의 책임을 질게요."


그는 그녀의 한마디가 흥미로웠는지 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뒤돌아 그녀를 내려다봤다. 독특한, 그가 내뿜는 특유의 오만함이 권태로이 떠돌고 있었다. 찾아보기 힘든 인간이었다. 


"단 한 번, 당신이 원할 때 이 책임을 갚을게요."


"어떤 책임이든?"


"어떤 책임이든."


"내가 서울 한복판에서 총을 갈기고 너한테 떠넘기면 어떻게 하려고?"


"그럼 평생 감옥에서 썩어야죠."


그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의 눈 속에서 단단한 결심을 본 듯했다. 이유를 알 수 없어 조금은 맹목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결심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그가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할까."




모태구는 몇 번이나 그녀를 더 만났다. 어느 날은 평범한 카페에서, 어느 날은 한강 다리 아래의 차 안에서 만난 두 사람은 특별한 계획이나 작전을 꾸미지 않았다. 서로의 깊은 비밀을 털어놓지도 않았다. 조금은 실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때울 뿐이었다. 탐구하다 보면, 그는 실로 독특한 인간이었다. 그의 인생이라는 것은 도통 평범한 인간들이 바라는 행복을 추구할 생각이 없는 듯싶었다. 언제나 예측 불가한 방향으로 엇나가는 게 그였다. 그의 과거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평생 알 수 있을 거라고도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그라는 인간 자체를 들여다봤다. 그녀의 것과 닮아있는 그의 책임을, 책임으로부터의 도피생활을. 기꺼이 함께 할 마음이 있었다. 


태구는 그날 이후로 그녀를 데리고 다니는 것에 재미가 붙었는지, 밖으로 불러내는 횟수를 늘렸다. 자연스럽게 그녀가 발길을 내딛는 장소와 독특한 경험도 늘었다. 그는 그녀를 이끌고 높은 사람들의 사교회를 참석하기도 했고, 두 사람 몫의 음식이 그녀의 한 달 생활비와 맞먹는 레스토랑을 가기도 했다. 


그런 장소에서 두 사람은, 차가운 눈동자로 주위의 인간을 관찰했다. 걸어오는 말들과 인사에 답하면서도, 그 목적은 옅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떤 인간이고 죽어가며 무슨 말을 할까. 그는 그녀의 귓속에 속삭이고는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도 그녀도 이 비밀스러운 밀회를 어떤 방식으로든 즐겼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를 반지하를 전전해야 하는 돈 없는 인간에서 과거를 감춘 부유한 아가씨로 탈바꿈시키는 것을 즐겼고, 이 바닥 문화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주제에 언제나 당당한 척하는 그녀를 지켜보는 것을 즐겼다. 그녀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상을 모두 자기 것인 마냥 안고 활보하는 것을 즐겼고, 예상치 못한 전화를 받고 나간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는 그가 말없이 표현해내는 기대감을 즐겼다. 두 사람 모두,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같은 생활을 짜릿한 전율로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그날은 조금 특별한 날이었다. 




처음이었다, 그가 그녀의 앞에서 다시 그 모습을 보인 것은.


하아-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턱밑에 묻은 핏자국을 문질러 지워냈다. 그녀는 그 뒤에 가만히 서서 그의 행동을 지켜봤다. 그녀가 서 있는 곳으로 아직 식지 않은 피가 퍼져왔다. 그녀는 높은 굽의 구두를 신은 발을 뒤로 물려 액체를 피했다. 피는 그녀를 지나 바닥에 깔린 융단을 적셨다. 안 그래도 붉은빛이었던 융단이 더 짙은 빛을 띄워냈다. 탁했다. 그녀를 등지고 선 그에게 물었다. 


"이게 내 책임인가요?"


"뭐?"


그가 몸을 뒤로 돌려 그녀를 마주 봤다. 예상치 못한 웃음이 그의 얼굴을 덮었다. 태구는 손을 내저으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아니, 아냐. 벌써 그러긴 아깝지. 왜, 무서웠어?"


그녀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을 안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핏자국을 피해 그에게로 다가가며 사실을 고백했다. 


"아쉬웠어요. 벌써 가야 할까 봐."


그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피가 묻어 엉망인 얼굴로 크게 웃는 건 조금 기괴했지만, 실은 그녀 자신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식지 않아 온기가 머물러있는 인간의 시체를 옆에 두고,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서서 웃었다. 그녀가 먼저 웃음을 가라앉히고, 진정하라는 듯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옷깃에 묻어있던 액체가 그녀의 손을 타고 번졌다. 그녀가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요?"


"어쩌긴, 튀어야지."


"방법이라도 있어요?"


"가자, 보여줄게."


두 사람은 말 그대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호텔방을 나섰다. 물론 그는 얼굴을 씻고 옷을 갈아입긴 했지만, 정말 말 그대로 호텔을 나갔다. 그는 차를 타고 가며 건 전화 한 통으로 이 호텔의 CCTV를 다 지운 듯 했다. 그들이 뻥 뚫린 한강을 지날 때 막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붉은 해였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내려 손을 살폈다.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그의 옷깃에서 묻은 뭉그러진 빨간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손을 꽉 쥐어 자국을 숨기며, 그녀가 말했다. 


"나 배고파요."


"브런치하고 들어갈까?"


"좋아요. 청담동 거기 갈래요."


태구는 그녀의 소원대로 방향을 틀었다. 차가 부드럽게 도로를 질주했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금 올 수 있나?]


그녀가 아르바이트를 마치기 얼마 전에 그가 보낸 문자였다. 의아했다. 그가 시간이 되느냐고 물어보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은, 멀어야 몇 분 전, 가까우면 집 앞에 도착해서야 전화를 하곤 했으니까. 그 행위는 두 사람 사이의 어떠한 종교적 의식과도 비슷하게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무엇보다, 그가 그녀에게 어딘가로 오라고 하는 경우도 많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녀를 데리러 왔다. 그녀가 언제, 어디에 있든. 그녀는 의문스러운 마음으로 답장했다. 


[네.]


[이쪽으로 와.]


그럴게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째서인지 화면에 뜬 다섯 글자가 그녀를 잡아끄는 것 같았다. 마음이 급했다. 




그녀는 그가 말한 장소로 향했다. 택시비를 대충 새어 값을 치르고 내린 후에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살면서 가본 아파트 중 가장 비쌀 것 같은 건물이었다. 아파트 단지가 너무 넓어서, 몇 동이 없었음에도 그의 집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겨우 도착한 아파트 앞에서 떨리는 손으로 초인종을 누르자, 조금 지나서 현관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태구가 보였다.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그녀는 그를 제대로 살필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피투성이였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다른 이의 피만이 아니었다. 유난히 벌건 액체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는 팔이 그녀의 손에 들어왔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요?"


"어."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보자, 평소와 다르게 옅게 찌푸린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다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볼 수 있을 만큼 오래 함께하지 않았다. 살점이 뜯긴 팔목. 숨쉬기가 조금 어려웠다. 그녀가 간신히 말했다. 


"들어가요, 내가 치료해줄게요."




바닥에 앉아 소파에 앉은 그의 팔을 깨끗한 천으로 닦아내고 붕대를 감으면서, 자신이 의도적으로 거실에 쓰러져있는 시체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닥에 피가 흥건해 나무바닥 사이를 적시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뚱어리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그녀가 상처를 건드릴 때마다 미세하게 얼굴을 찡그리는 남자가 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그쪽으로 생각을 돌리는 대신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가끔 있는 반항이지, 저 새끼가.”


“날 왜 불렀어요?”


“그냥.”


“병원은 안 가도 되겠어요?”


“나중에 가면 돼.”


그녀는 그를 쳐다봤다. 여느 때와 같이 핏방울이 자리한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언제나 어울린다고 말했던 자국이 오늘따라 마주하기 힘들었다. 어째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의 피로 젖어있었다. 그녀가 아무 말 없이 그의 무릎 위로 자신의 머리를 올렸다.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같이 갈게요.”


그에게 건네는 온정이었는지, 자신을 타이르는 다짐이었는지.




태구는 병원에는 혼자 가겠다고 고집했다. 그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를 알았기에 그녀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갔다. 평소와 같이,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달동네 사이를 장식하는 골목을 지나고 지나서. 절대 포근한 적 없었던 집 앞에 도착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본 적 없는 남자와 여자였다. 


불길했고, 그들이 누군지 알 것 같았으며, 왜 그녀를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애써 태연한 척 집 앞으로 다가가는 그녀를 발견한 두 명이 그녀를 불렀다. 


“안녕하십니까, 성운지방경찰청에서 나왔습니다.”


아, 단말마로 응답하며, 그녀는 조용히 핏자국이 남아있는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왜 그러시죠?”


“아버님 사건 관련해서,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질문은 저번에 다 답한 줄 알았는데요.”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녀는 거절할 수 없음을 알았다. 꽉 쥔 손안의 자국이 찌릿 대며 아파졌다. 그녀가 대답했다.


“그렇게 하죠.”




“경찰이 찾아왔어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그가 그녀를 데려간 곳은, 서울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속칭 룸살롱이었다. VIP를 상대로만 영업하는 집이라고 했다. 그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잘 지켜보라고 했다. 다들 동류 같아도 서로 다른 세상에서 흘러들어온 인간들이 넘쳐나는 곳이니까. 그는 다른 일행이 있었기에, 그녀는 그와는 따로 온 것처럼 행동했다. 그가 잠시 연회장을 나왔을 때,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에 관해서 물어봤어요. 그날 특이한 점은 없었느냐고도.”


“그래서?”


“없다고 말했어요.”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녀가 조금은 불퉁하게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가 물었다. 


"왜 그래?"


"어이가 없어서요."


"뭐가?"


"내가 그렇게 힘들었을 때는 없었으면서, 이미 죽은 인간한테 몇 달이나 매달린다는 게."


자조적인 발언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녀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그녀를 쳐다봤다. 위로하지 않았지만, 위로받을 수 있는 눈빛으로. 


그녀는 걱정하지 않았다. 걱정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무엇을 걱정해야 할지도 몰랐다. 경찰의 수사망 가운데에 놓인 그를 걱정해야 하나? 아니면 자신의 안위를? 그녀는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나중에 데리러 와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래.”


그는 다시 룸으로 돌아갔다. 복도를 지나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본 그녀도 몸을 돌렸다. 좋지 않은 감각이 몸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알지 못하는 이유로 기분이 나빴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창백한 조명을 받아 깨끗한 손바닥에 그녀는 남몰래 안심했다. 그날, 그를 처음 만난 날 이후로, 가끔 흰 피부 위로 환상처럼 비치는 핏자국이 있었다. 마치 그의 얼굴처럼. 


그게 그녀가 그를 닮아간다는 증거일까. 언젠가 환상이 아니라 진짜로 누군가의 피를 묻힌다는 경고일까. 아니면 이미 묻어있는 피를 잊지 말라는 경고일까. 이건 누구의 피일까. 다른 누군가의 것 같기도, 아버지의 것 같기도, 그의 혹은 그녀의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두려웠다. 






예상과도 같이, 그의 이야기였다. 


그녀가 그의 팔목을 붙들었다. 평소와 다른 젖은 눈가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창 밖에서 희미하게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피하고 피하던 미래에 도달한 것이다. 피투성이의 바닥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녀가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한테 책임지게 해요."


떨리는 문장이 목구멍을 비집고 튀어나왔고,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뺨을 타고 내려가지는 않았다. 그저 바닥으로 차갑게 추락했을 뿐이다. 붉은 핏물과 투명한 물방울이 섞여들어갔다. 그녀는 애원하고 있었다. 


"내가, 책임질게요. 단 한 번, 내가 진다고 했잖아요."


그가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검은 눈동자, 칠흑같이 검어서 들여다보기를 포기한 눈동자가 그녀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태껏 보지 못한 그의 두려움을 본 것 같다고 느꼈다. 어쩌면, 저 밑에 그가 말하지 않은 과거가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동족의 본능이 그녀를 일깨웠다. 그녀가 다시 한 번 더 다그쳤다. 


"그러겠다고 말해요."


그러나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넌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


“하지만…!”


그는 옅게 웃었다. 그녀는 그날, 그를 처음 본 그 주홍빛 가로등 아래로 끌려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의 미소 위로 환상처럼 핏물이 번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그냥 그렇게 살아.”


“……”


“나도 그렇게 할 테니.”


그리고 그녀가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경찰들이 들이닥쳤고, 그를 붙잡았다. 그들이 내뱉는 미란다 원칙이 귀에서 윙윙거리다 이내 사라졌다. 슬로우모션처럼 흔들리는 시야에 그가 들어왔다. 언제나 고고하던 얼굴이 일그러져있었다. 눈가가 흐려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의 이름을 소리친 것 같다고 여겼다. 


그는 끝까지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 혐의 없이 풀려난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렇게 난 끝 이후로 다시 그를 보지 못했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끊어진 인연이 되었다. 그 날, 가로등 아래에서, 그저 지나가기를 택했다면 이런 결과는 마주하지 않았을까 의미없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지나갔다면 그는 여전히 자유로웠을까- 그렇게 말해도 알고 있었다. 그는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게 옳은 일이다. 


문득 고개를 들어 바라본 파란 하늘이 들어오는 것도 잠시, 쨍한 햇빛이 그녀의 눈을 찔렀다.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아 되려 어색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후에야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무엇에고 굴복할 것 같지 않던, 언제나 위를 올려다보던, 그러나 결국 가장 아래를 보지 못한 그의 마지막 눈빛을 기억했다. 그는 진실로 한밤의 꿈같은 축복이었다. 그녀의 눈앞에 상상도 못한 세상을 펼쳐놓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내려 손을 살폈다. 마치 그에게서 옮겨붙기라도 한 듯, 환상처럼 번진 붉은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두 손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비릿한 피의 향이 그녀의 코를 찔렀다. 그의 곁에 있으면 언제나 존재감을 알리던, 마치 인생 그 자체에 배어들어 간 것 같던 향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그녀는 그와의 나날들을 되살렸다. 다시는 되풀이할 수 없는, 그러나 절대 지워지지 않을 자국을 남기고 간 그의 향이었다. 







모태구, 매력적인 캐릭터라서 재미있게 썼습니다! 빨리 쓴다고 썼던 것 같은데 눈을 뜨고 보니 리퀘 받은 지 한 달이 지났군요… 이젠 기믹으로 밀어야겠어요. 리퀘 감사합니다!

글러지만 글러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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