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한 누리 미술관은 화가의 아틀리에를 본떠 제작된 건물로, 1층 세 면을 통유리로 감싸고 그 앞에는 작은 물길을 뒀다. 예술품을 관람하고 출구로 나오면 해가 질 때쯤 커다란 통창으로 붉은 노을이 들었다. 저무는 석양을 맞으며 오색 빛의 물결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듣던 대로 예쁘네요."

"그럼요. 이거 감상하러 오시는 분들도 많으세요. 근데 여긴 출구라. 전시관 입구는 저쪽. 같이 가실까요?"


학예연구실 전백진 실장은 쉴 새 없이 말하며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사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한참 어려 보이는 나를 정중하게 대했다. 이쪽은 현대미술 전시하는 제 1 전시관이고요. 반대쪽은 근대미술 전시하는 제 2 전시관입니다. 요즘엔 둘 다 현대미술을 전시하긴 합니다. 근대미술품은 고르기도 들여오기도 좀 까다로워서... 실장은 끊임없이 말했지만 정작 제대로 귀에 들어오는 건 없었다. 어제 약혼식에서 만난 세 사람 때문이었다.


몇 년 만에 만나서 제대로 인사 한번을 못했다. 나재민은 그 많은 사람들에게 인사하느라 바빴고 내 허리에 팔을 감은 채 나를 이리저리 이끌었다. 화려한 구두에 발뒤꿈치가 다 까질 때 쯤에야 겨우 테이블에 앉았지만 그 후에도 신경 쓸 것들이 많았다.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케이크를 자르고 축하를 받는 일은 입가에 경련이 날 만큼 낯설고 어색했다.


"알고 계시겠지만 관장님께서 거의 출근을 안 하시거든요."


누리미술관의 박연음 관장은 누리그룹 나정호 회장의 아내이자 나재민의 조모다. 고상한 취향을 갖고 있어 미술관에서 들여오는 작품의 화풍도 대부분 비슷했다. 전시되어있는 극사실주의 작품들은 요즘 감성과는 거리가 있었다.


"관련 업무 설명드리라고 하셨는데, 지금 괜찮으실까요?"

"네. 그럼요."


나재민은 별 볼 일 없는 나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나정호의 누리그룹 지주회사 주식을 일정부분 상속받기로 했다. 나재민의 큰아빠 둘이 식품과 유통을 나눠가지고 얼마 남지 않은 파이를 나재민의 고모와 아빠가 나눠가진 상황이었다. 청현가 며느리가 된 고모는 외식 브랜드 하나 챙겨가도 괜찮았다. 그러나 몇 년째 적자만 나는 엔터 하나 먹고 떨어지기엔 나재민은 의외로 욕심이 많았다. 조금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회장님 비자금 관리를 여기서 하는 거죠?"


앞서 걷던 실장이 걸음을 멈췄다. 나재민의 조모가 나재민을 유독 예뻐하긴 했다. 그도 그럴 게 총 일곱 되는 손주들 중 피가 섞인 사람은 정재현과 나재민밖에 없었다. 그 이유를 제치고서도 나재민은 살가운 편이었다. 약혼식 날 하는 행동을 보니 안 예뻐할 수가 없겠더라. 처음 만났던 날, 날 보며 짓던 눈웃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적 없습니다만, 말씀을 삼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들어가서 마저 얘기 나눌까요?"

"네. 실장님 개인사무실은 3층에 마련해뒀습니다."


누리미술관 기획운영실 실장. 나재민과 약혼한 대가로 받은 직함이었다. 결혼까지 하면 뭘 더 주려나. 그때는 비자금에 대해 얘기해주려나. 2층 전시관을 지나 3층 계단을 밟으며 생각했다. 내가 나재민과 결혼을 할 수 있을지를.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사이좋게 늙어가는 정재현을, 내가 지켜볼 수 있을지를...


"실장님? 괜찮으세요?"


속이 답답하다 못해 틀어막힌 기분이었다. 왜지. 십 년 지난 낡은 짝사랑의 기억일 뿐인데. 정재현은 이제 내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우리 사이는 다시 원점이었다. 짝사랑이란 이름을 붙이기에도 초라한 관계였다. 빛바랜 사진처럼 그냥 추억 한쪽에 자리할 뿐이다.


그런데 어제는 왜 그렇게 최악이었는지. 나재민 옆에서 정재현을 바라보고 있는 게 왜 이렇게 끔찍했는지. 지금은 또 왜 이런 상상만으로 힘든지. 알 수 없어 괴로웠다. 설마 아직도 사랑인 걸까. 그러나 이런 게 사랑이라면 그냥 태워버리고 말겠다. 흔적도 남을 수 없게. 나는 바닥에 닿을 듯이 흘러내린 가방을 추켜올리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대리석 바닥 위로 구두소리가 청명하게 울렸다. 안내 받은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내 이름이 보였다. 실장 정여주. 고급진 자개 명패에 적힌 그 이름은 다행히 꽤 괜찮아 보였다.







나재민은 집을 합치자고 했다. 방이 5개에 화장실이 4개나 딸린 100평 집은 혼자 살기에 너무 크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가장 비싼 땅 위에 지어진 100평대 고급 빌라는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도 결국 사람 사는 집인 걸. 약혼으로 겨우 독립을 허락받은 내가 사는 집과 다를 게 없었다.


혼자가 좋았다. 이건 후천적인 영향이 컸다. 제안을 거절했더니 매일 아침, 저녁마다 운전기사가 붙었다. 이건 좀 부담스럽다는 내 말에 나재민은 자기가 불편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우리 집 자주 올 텐데 기사 없으면 번거롭잖아. 오늘 아침, 커피를 마시며 하는 말에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나재민이 찾으면 가야 했으니까.


"어, 끝났어?"


그렇게 기사까지 붙여놨으면서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나재민은 퇴근 시간에 맞춰 미술관으로 불쑥 찾아왔다. 한국미술의 근대를 주제로 전시한 제 2 전시관. 폐관 시간이 지나 사람 하나 없는 썰렁한 공간에서 작품을 감상 중이던 그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왜 여기까지 왔어? 그냥 집으로,"


부르지. 어차피 섹스가 목적인 거라면. 하려던 말이 나오다 막혔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나재민 옆에 누군가 있었다. 전시관 기둥에 가려져 있던 익숙한 오렌지빛 머리. 선글라스를 써도 감춰지지 않는 피지컬 덕분에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김정우?"

"오. 알아보네. 모를 줄 알았는데."


김정우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입꼬리만 끌어올려 웃고 있는 모습이 저번 주에 봤던 서늘한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다. 이러나저러나 껄끄러운 만남이긴 했다. 김정우가 왜 저기 있어? 설명이 필요한 얼굴로 나재민을 쳐다봤다.


"너 미술관에서 일 시작했다니까 궁금하다길래. 가는 길에 픽업도 할 겸 들렀어."

"...많이 친한가봐?"

"나 유학 가기 전까지 같은 학교 다녔거든. 초등학교 중학교 둘 다."

"아... 그랬구나."

"둘은 고등학생 때 친했다며."


김정우의 시선이 내게 내리꽂히는 것만 같다. 무슨 말을 해도 목에 걸릴 것 같아 벽에 걸린 작품으로 시선을 돌리려 애썼다. 작품, 이라는 제목의 그림은 빨간 노을이 인상적이었다. 이곳에 있는 작품들 중 유일한 추상화다.


"친했지."


다른 의미로. 뒷말은 삼켰다. 작품을 감상하던 나재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김정우가 여기까지 찾아온 의도를 잘 모르겠다. 이젠 내가 좀 덜 미워졌을까. 당연히 마음은 식었을 테니 어쩌면 다시 친구로 돌아가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친한 동생의 약혼자니까 친해져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나재민이 말했다.


"형 안 바쁘면 저녁이나 같이 먹든가."

"괜찮겠어?"

"뭐가?"

"그냥. 오붓한 시간 내가 방해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나재민은 감상하러 온 사람처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두 개의 그림을 지나쳐 마지막 그림 앞에 유독 오래 머물렀다.


"그런 건 집 가서 하면 되지. 시간도 많은데."

"...벌써 같이 살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기로 했거든."


특유의 느린 말투가 여유로웠다. 나재민은 꼭 그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모르는 사람 같았다. 결혼을 하면 이런 얘기가 더는 불편하지 않으려나. 확실히 김정우 앞에서 할 만한 얘기는 아니었다. 조금 뜨거워진 낯으로 괜히 말을 돌렸다.


"이제 나가자. 더 늦으면 자리 없겠다."

"이미 예약해놨지. 우리 처음 만났던 데로."


그때 스테이크 맛있다고 했었잖아. 그렇게 말하는 나재민은 오늘따라 친절했다. 왜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나재민의 능글맞은 미소를 따라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귀여워. 웃으며 짧게 중얼거린 나재민이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많이 먹어놔. 이따가 힘들 테니까."


나재민은 그 말만 남기고 휙 멀어져갔다. 휘파람까지 불면서. 우리 전실장님은 어딜 가셨나. 온 김에 얼굴 한 번 봐야 되는데. 그러면서 걸어가는 모습이 어지간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콘돔이 남았던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김정우는 내 옆에 다가와 있었다.


"좋아?"

"어?"

"좋냐고."


날이 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 나를 차갑게 바라보고 있는 김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미움을 가득 담은 눈은 그저 잘 지내보려고 온 사람 같진 않았다. 그런 눈을 하고서도 김정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부조화가 형편없었다.


"그림이 좀, 웃기잖아. 네가 정재현 사촌이랑 약혼했다는 게."


안 그래? 그렇게 묻는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난 날 정재현 때문에 김정우에게 어떤 상처를 줬는지 알고 있다. 김정우가 어떤 마음으로 나를 떠났는지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이런 결말을 원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미안."

"왜 나한테 사과를 해. 나는 다 잊었는데."

"......"

"나 이제 너 안 좋아해."


아무래도 정정하는 게 좋겠다. 김정우는 다시 친구로 돌아가고 싶었던 게 아니라 마지막 남은 우정을 처분하러 이곳에 왔다. 시간이 흘러 그때의 상처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될까 봐. 우린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는 걸 확실히 하기 위해 온 것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날 감싸주던 사람이라 그런가. 조금 슬펐다.


"알아. 다 이해해."

"아니. 넌 몰라."

"......"

"내가 어떤 마음인지 알았으면 너 나한테 그렇게는 못 했을 걸."


근데 왜 네가 울고 싶은 얼굴로 서 있는 걸까. 내 감정이 그래서 너도 그렇게 보이는가 보다.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그러고 나서 보니 차분한 미술관 조명 아래에 서 있는 김정우는 놀랍도록 이성적으로 보였다.


"나 진짜 하나만 물어보자. 그때 왜 그랬어?"

"뭘?"

"사람 헷갈리게 하는 거. 아닌가 싶다가도 받아줄 것처럼 그랬잖아 너."


당시 우리는 많은 것들을 함께했다. 그러나 그건 우정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함께한 것이다. 내가 정재현 옆에서 그랬던 것처럼. 안에서 곪아 터지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게 짝사랑 아닌가.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냐? 끝까지 고민한 건 너였잖아 정우야."

"내가 널 두고 무슨 고민을 했는데."

"...어?"

"너 좋아한다고 쫓아다니는 짓밖에 안 했는데 대체 뭘 고민했다는 거야?"


기억 속에 김정우는 나를 좋아하는 것 같으면서도 항상 저 멀리에 서 있었다. 고백에는 책임이 따랐다. 정재현 말대로 불장난 같은 감정으로 나를 책임지기 싫어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이런 전개는 도무지 예상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네가 언제 나한테 그런 말을 했어?"

"뭐가."

"언제 좋아한다고 했냐고."

"편지에 다 썼잖아. 니 기준에 글은 고백도 아니다 이거야?"


편지? 너무 오래된 일이라 생각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정재현이 내게 건네주다 말았던 노란색 편지. 원래는 내 생일에 직접 주려 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던 그 편지. 내가 정재현 뺨을 때린 일로 시끄럽던 때라 그게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몇 달을 정재현과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으니까.


"나 너 오래 기다렸다고 생각해. 그날 너네 집 갔을 때도 끝까지 말 안 꺼내길래 포기하려고 했어."

"......"

"근데 잘 안되더라. 너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하고 그러다 보면 또 좋아지고. 그러고도 쫓아다닌 내가 바보 같았지 너?"

"...그런 적 없어."

"안 그랬으면 그렇게 정재현 손 잡고 나가진 않았겠지."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막상 할 말이 없었다. 사실 다 변명이 맞으니까. 어렴풋이 눈치챘지만 모른 척한 게 없던 일이 되진 않았다.


"그렇게 볼 필요 없어. 마지막으로 보러 온 거야. 결혼식엔 못 갈 거 같아서."

"......"

"니가 생각해도 좀 그렇지?"


속삭이듯 말한 김정우가 뒤를 돌아 걸어갔다. 나재민이 나간 출구와 반대에 있는 입구 쪽이었다. 뭐야. 아직도 감상 중이야? 전실장과 얘기를 끝낸 건지 전시관 밖에서 들리는 나재민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고민하다 발을 떼는 순간, 전시관 출구에서 나재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우형은?"

"아... 화장실이 급하다고 해서..."

"화장실? 화장실은 저쪽에 있잖아."

"...입구에도 하나 있어."

"거기 멀 텐데."


김정우에게 전화할 요량으로 핸드폰을 꺼내는 나재민을 붙들었다.


"아냐. 전화하지 마. 먼저 간다고 했어."

"뭐? 왜?"

"...저녁 생각 없대. 거절하기 민망해서 말 못했나 봐."


뭘 그런 걸 말을 못해. 우리 사이에. 투덜대는 나재민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냥 흘러갔다. 이렇게 보내면 안 될 것만 같다. 그 생각이 들었을 때 더는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재민아. 미안한데 먼저 가. 나 정우랑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형이랑? 무슨 얘기?"


나재민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떻게 포장을 해도 약혼자를 앞에 두고 할 만한 얘긴 아니다. 알면서도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따가 연락할게. 그 말만 남기고 사라져버린 내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그러나 나재민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지금 이 순간 중요치 않았다. 김정우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무얼 해줄 수 있는지, 아무것도 생각한 게 없었지만 나는 무작정 달렸다.


미술관 입구를 따라 놓인 돌계단을 내려가면 넓은 야외 주차장이 있다. 까만 벤틀리를 향해 걸어가는 김정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것처럼 올해 유난히 추운 2월답게 눈이 내렸다. 천천히 내리는 눈을 맞으며 김정우를 쫓았다. 근데, 오늘이 며칠이더라.


"김정우!"


이제 막 닫히려는 차 문을 열어젖혔다. 그 짧은 거리 좀 뛰었다고 숨이 찼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나를 김정우는 쳐다도 보지 않는다. 한 손은 핸들에 얹고 다른 한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김정우 같지 않은 말투가 뒤를 이었다.


"왜."

"......"

"안 들려? 왜 따라왔냐고."

"나 그 편지 못 받았어."

"......"

"그때 일이 있어서 나 그거 정재현한테 못 받았다고."


이 세상에 나를 사랑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여자애들은 그냥 날 미워하고, 남자애들은 어떻게 해볼 생각밖에 없을 거라고, 사랑은 내 몫이 아닐 거라고 굳게 믿었을 때. 김정우도 비슷했다. 날 책임지기 싫어한다고 생각했었지. 이윽고 조금 지친 것 같은 김정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의미 없는 거 알아. 근데 나 정말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너 갖고 놀고 그런 건 절대 아니었어."

"......"

"그거랑 별개로 네 마음 모른 척한 건 미안해."


정재현을 좋아하게 된 후에는 그렇게 믿고 싶어서 믿었다.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온몸으로 표현하는 걸 애써 외면했다. 그 먼 거리를 비행해 와서 내내 내 곁에 머무는 걸 그냥 지켜만 봤다. 김정우의 마음은 그때 내가 제일 잘 알면서도.


"오늘 생일이지? 생일 축하해."

"......"

"할 말이 이거밖에 없네."


미안. 다시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짧은 사과가 다였다. 김정우 말대로 십 년 전 일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제 와서 김정우와 뭘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여전히 말이 없는 김정우를 바라보다가 차 문을 닫으려 했을 때였다. 김정우가 내 왼쪽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타."

"어?"

"옆에 타라고."

"......"

"생일 축하한다며. 축하해줘. 끝까지."


날 쳐다보지도 않고 말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퉁명스럽다.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트린 김정우는 심술 난 애처럼 세게 차 문을 닫았다. 누구를 향한 짜증일까.


잠시 후 시동 거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깐 고민했다. 내 빌어먹을 인생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는 건지. 천천히 내리던 눈발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내고 조수석을 향해 걸었다. 높은 구두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잠깐 집 정리를 해야 한다며 들어간 김정우는 10분이 넘도록 나오질 않았다. 영하로 떨어진 바깥 온도 때문에 텅 빈 오피스텔 복도가 추웠다. 팔을 쓰다듬으며 아무 연락도 없는 핸드폰을 습관처럼 들여다봤다. 두고 온 나재민이 신경 쓰였다. 나재민에게 먼저 연락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 아무래도 기분이 상했을 것 같아 관뒀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들어와."


코트를 벗어 셔츠차림인 김정우가 익숙한 듯 낯설었다. 고등학생 때는 정말 말랐었는데. 운동을 한 건지 걷어 올린 셔츠 아래로 조금 두꺼워진 팔과 넓어진 어깨가 눈에 띄었다. 괜히 두리번대며 집을 둘러봤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 그런지 차분하고 단조롭다. 하얀 벽지에 그레이와 블랙을 적절히 조화시킨 가구들이 잘 어울렸다.


"인테리어 예쁘다. 깔끔해 보여."

"신경 좀 썼어. 캘리포니아 집은 최악이라 들어갈 때마다 짜증 났거든."

"캘리포니아? 너 브라운 다니지 않았어?"

"mba는 스탠포드에서 했어."


고등학생 때도, 대학생 때도 놀았던 기억밖에 없는데. 김정우는 의외로 착실하게 공부한 듯했다. MBA까지 끝마치고 한국에 온 걸 보면. 거실을 둘러보다 중앙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그럼 지금은 뭐해?"

"뭐하긴. 회사 다니지."

"아... 그렇구나."


조금 과장되게 말해서 영화관 뺨치는 수준의 티비가 벽면 한쪽을 가득 채웠다. 그 밑으로는 벽난로를 연상케 하는 까만 무드등이 놓여있다. 모던하지만 너무 단조롭지 않도록 사소한 포인트를 잘 살린 듯했다.


"명함 줘?"


잠깐 뜸 들이다 하는 말에 괜히 웃음이 났다. 네가 필요하다면 주고 아님 말고. 김정우는 그걸 바랐겠지만 안타깝게도 명함 주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짧은 웃음에 김정우의 성난 눈초리가 내게 닿았다. 뭐가 그렇게 웃겨? 삐죽 솟은 눈썹이 다시 존재감을 발휘했다. 이러다 쫓겨나겠다 싶어 되려 뻔뻔하게 굴었다.


"응. 하나만 주라. 곤란할 때 친구 도움 좀 받아보게."

"왜 지멋대로 친구래. 누가 친구 해준대?"


툴툴대면서 방으로 향한 김정우는 말과 다르게 금세 명함 하나를 들고나왔다. 자연스레 내 옆자리에 앉은 김정우가 명함을 내밀었다. BX International. Strategic Planning Dept. Manager. 심플한 고딕체에 회사 로고가 들어간 명함이었다. 변한 게 없는 김정우 얼굴을 보면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간 것 같은데 명함 속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네가 이런 거 주니까 신기하다. 우리 진짜 스물아홉이네."

"넌 스물여덟 아냐?"

"스물아홉이랑 친구 먹었으면 쭉 스물아홉으로 살아야지. 대한민국에선 그래야 편해."

"나 너랑 친구 아니라니까?"

"...그래. 너 나랑 친구 아냐. 나도 도영이 말한 거야. 도영이."


친구도 아닌데 왜 집까지 초대를 했는진 모르겠지만. 오늘은 어딘가 삐뚤어진 김정우에게 맞춰주기로 했다. 그나저나 도영이는 잘 지내? 김도영 얘기가 나온 김에 그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무릎에 얹어놨던 가방을 옆자리에 내려놓고 코트를 벗었다.


"도영이 번호 바뀌었지? 연락하고 싶은데."


난방을 세게 틀었는지 금세 더워진 공기가 꽤 넓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코트를 벗어도 열기는 쉽게 가시질 않았다. 코트 안에 입고 있던 트위드 자켓까지 벗었다. 약혼식 하기 전 나재민이 선물해준 옷이다.


"혹시 도영이 번호 좀 줄 수 있어?"


벗은 자켓을 단정히 개어 코트 위에 올렸다. 일련의 과정은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끝날 때까지 김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싫은 건가. 내가 무슨 말실수를 했나.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김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너 진짜 나한테는 관심이 하나도 없구나. 여기서 김도영 얘기를 다 하고."

"...말을 왜 그렇게 해. 난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그러니까. 나는 안 궁금해?"

"......"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너랑 연락 끊고 나서 마음은 어땠는지, 널 보고 싶진 않았는지, 죽도록 힘들었다면 뭐가 제일 힘들었는지."

"......"

"우리 사이에 할 얘기가 이렇게 많은데. 김도영 안부를 지금 꼭 물어야 해? 그것도 나한테?"

"......"

"너 오늘 나 왜 쫓아왔어? 여기까지 왜 따라왔냐고. 정말 생일 축하한다는 말이나 해주려고 따라온 거야? 너한텐 아직도 내가 그렇게 쉬워?"


화가 난 듯한 물음에 대꾸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나에겐 그저 아이스 브레이킹에 불과했지만 김정우 입장에서는 오해할 만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김정우를 쉽게 생각해서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다. 정확한 이유를 설명할 순 없지만 그렇게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마지막이라는 말이 자꾸 맴돌아서. 어쩌면 그리워 했던 건지도 모른다. 나를 사랑해주던 누군가의 품을 안아본 지 너무 오래됐으니까.


"그래. 그 정여주가 어디 가겠어."

"......"

"기대한 내가 바보지."


그러나 김정우와 이민형은 다른 사람이었다. 현재의 내가 십 년 전 나와 다르듯이 현재의 김정우 또한 십 년 전의 김정우와 달랐다. 그때의 너는 단 한 번도 나를 그렇게 바라보지 않았는데... 그땐 10년도 기다려줄 것 같던 김정우는 이젠 10초도 기다려주지 않는 남자가 되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할 말 없으면 가."

"......"

"스물아홉이나 먹었는데 택시 정도는 부를 수 있지?"


그러나 싸늘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북받쳐 오른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멀리 안 나간다. 짧은 말을 끝으로 일어선 김정우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말했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해. 내가 다 망쳤는데."

"......"

"진짜 우리, 다시 만나지 않는 게 더 나을 뻔했다."

"......"

"괜히 따라와서 미안. 이만 갈게."


마지막 인사는 밝은 목소리로 얘기하려 했지만 끝내 말하지 못했다. 자꾸 어긋나는 목소리가 점점 더 형편 없어져서. 한 손에는 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자켓과 코트를 넘치게 들고 일어섰다. 난 네 앞에서 매번 도망만 치는구나. 빠른 걸음으로 거실을 빠져나와 중문을 열자 현관의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등이 따뜻해졌다.


"울지 마."

"......"

"내가 미안해."


김정우가 나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었다. 타인의 품은 참 따뜻하고 포근하다. 내가 나를 안아주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로. 눈에만 고여있던 눈물은 이제 볼을 타고 흘렀다. 제멋대로 들썩이는 내 어깨에 김정우가 얼굴을 묻었다. 이내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너는 진짜..."


그건 김정우가 괴로워하는 소리였다. 또 나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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