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내용은 픽션입니다. 실제 역사적 배경을 묘사하고 역사적 사건들을 차용하지만 주 된 내용은 가상의 내용입니다. 










열람실에서 본 시공간의 틈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당연한 것처럼 내 눈에만 보이고 내 손만 통과한 그 틈에 대해서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맥락없이 눈물을 쏟아내던 날 보고도 그저 조용히 나를 달래기만 하는 이들 앞에서 이 곳이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이라는 걸, 원래 내가 살던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이별을 염두하고 있는 우리였지만 막상 그 이별을 내 입으로 올릴 수가 없어서 더 그랬다. 나재민에게 말하지 않았나, 우리 내일 다시 보자고. 그렇게 말했으니 이별을 조금 더 미뤄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도서관을 뒤로 하고 조용히 정재현 집으로 향하던 길목에서 꽤 낡은 수예점 하나를 발견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벽이라 가게 안쪽이 보이지 않아서 무슨 가게인지도 몰랐는데 김정우가 얘기해줘서 알았다.


그리고 수예점이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문득 스친 생각에 애들에겐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서 색색의 실부터 찾았다. 그리고 대뜸 가느다란 실들을 주워드는 날 보고도 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계산까지 마치고 나온 날 보고서야 이동혁이 참았던 궁금증을 쏟아내듯 물었다.





"실은 어찌 그리 많이 사셨습니까?"


"그냥 뭐... 쓸데가 있어요"





애매모호한 대답인데도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이동혁이 한 걸음 앞서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나란히 정재현 집 앞에 멈춰섰고, 그 날 이동혁의 손을 잡고 도망치듯 나온 뒤로는 처음 마주하는 집이라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당시 나와 이동혁을 다급히 내보냈던 정재현 모습이 눈 앞에 그려져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저 혼자 남겠다던 그 때의 정재현이 떠올라서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주변을 살피던 김정우가 닫힌 문을 벌컥 열었고 빠르게 안으로 들어서는 그를 따라 나 역시 걸음을 내딛었다. 


텅 빈 집엔 냉기가 가득하다. 며칠 비운 탓에 사람의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냉기만 가득한 집 안을 둘러보는데 집 안 곳곳이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은 채 어수선하다. 


나재민 집으로 오기 전에 정재현이 제 집에 잠깐 들러서 정리를 했다고 하더니 아무래도 혼자 하기엔 무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청소를 해야 될 거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먼저 성큼성큼 움직이던 정재현이 서랍 안에서 책 하나를 꺼내들었다. 


테이블 위로 책을 내려놓은 정재현 옆으로 다가서니 총독부 지도가 있던 그 책이다. 지난 번에 도서관을 갔을 때 가져온 그 책이 온전한 상태임을 확인한 김정우가 다행이라며 작게 중얼거렸고 이동혁은 말없이 책표지를 쓰다듬는다. 





"일단 정리부터 좀 합시다"


"네 집에 가지 않고?"


"조금만 돕다가 가지 뭐"





어깨를 으쓱이던 김정우가 먼저 움직이고 그 뒤를 바짝 이동혁이 따라 붙었다. 제 집도 아니면서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이것저것 정리하기 시작하는 두 사람을 멍하니 보다 들고 있던 실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나도 움직이려는데 갑자기 내 앞을 가로막듯 뻗어진 정재현 팔에 의아함을 잔뜩 담아 그를 쳐다봤다. 





"왜?"


"너는 편히 쉬고 있어"


"같이 해야 금방 끝나지"


"괜찮다. 우리 셋이 해도 금방 끝나. 궂은 일 같은거 하지 않아도 된다"





집 정리하는 게 뭐 그렇게 힘든 일이라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름 꽤 단호한 표정의 정재현을 마주하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 뭐랄까 정말 내가 귀한 사람이라는 듯한, 그런 대접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 내가 이상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정재현이 이내 저를 부르는 김정우 목소리에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김정우한테 가는 와중에도 앉아서 쉬라며 손짓하는 정재현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빈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나만 빼고 세 사람이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짐을 옮기고 정리하는 걸 잠시 구경하듯 쳐다보다 자세를 고쳐 앉고는 돌돌 말려 있던 실뭉치를 하나씩 풀어냈다.


열람실에서 발견한 그 틈새로 손끝이 사라졌었다는 건 이제 내가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뜻하는 거겠지...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갈땐 가더라도 뭔가 흔적이 남을만한 걸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듯한 것들을 이들에게 남겨주고 싶지만 뭔가를 살 돈은 없고, 그 때 수예점을 보자마자 떠오른 게 실로 만든 소원팔찌였다. 대학 다닐 때 동기들이랑 같이 모여서 만들고 하던 기억이 떠올라서, 내가 직접 만들어서 주면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이거 어떻게 했더라... 너무 오랜만인데..."





잔뜩 풀어놓은 실들을 뚫어져라 보다가 만드는 방법이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아서 한숨을 푹 내쉬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생각을 해보자 여주야, 옛날에 이거 많이 만들었잖아. 그 때 매듭을 어떻게 했더라...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면서 여러 색이 섞인 실을 노려보다가 일단 손부터 뻗고 봤다. 빨간색과 분홍색, 그리고 하얀색 실을 두 가닥씩 꺼내들고 대충 길이를 맞춘 뒤 매듭을 지었다. 확실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뭐 하다보면 기억나겠지 싶어서 실을 쥐고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어떤 방법으로 만들었었는지 헷갈려서 손을 이리 움직였다 저리 움직였다 실을 풀었다 묶었다 반복하다가 그냥 머리를 땋는 것처럼 해야겠다 싶어 혼자 집중하면서 실을 땋고 있는데 갑자기 의자가 뒤로 끌리는 소리가 들린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드니 예상보다 빨리 정리가 다 끝난건지 비어있던 자리에 정재현이 앉았고, 





"뭡니까 이건?"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김정우가 허리를 숙이며 손 끝으로 내 손에 쥐고 있던 실을 가리킨다. 말없이 실을 땋는데에 집중하느라 세 사람이 가까이 온지도 몰랐던 탓에 순간 어, 음- 하는 소리를 냈다. 나름 선물이라고 만드는건데 이걸 미리 알려주면 재미없으니까, 





"비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는 날 보던 김정우가 피식 웃는다. 비밀이라는 말에 아직 풀지 않은 실뭉치를 콕콕 찌르며 눌러보던 이동혁이 궁금하다며 중얼거렸지만 나는 한 번 더 비밀임을 강조했다. 


내가 더 이상 저들에게 말해줄 생각이 없다는 걸 눈치 챈 김정우와 이동혁은 작게 웃으며 몸을 틀었고, 이내 집에 가보겠다며 인사를 해왔다. 





"독서회에서 빠르면 내일, 늦으면 모레쯤 답이 올 것이야. 직접 올지 서신으로 전할지는 모르겠지만"


"허면 내일 미시쯤 오면 되겠다, 동혁이 너도 그 쯤 오는 것으로 해"


"재민이 쪽은?"


"미시와 신시 사이에 집에 오면 된다했으니 알아서 오지 않을까"





정재현의 말에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던 김정우가 이동혁의 어깨를 툭 쳤다. 그게 나름의 신호였는지 이동혁은 망설임없이 문을 벌컥 열었고 이내 고개만 내밀어 주변을 살핀다. 신중하게 좌우를 살피던 이동혁이 먼저 발을 내딛고 그 뒤를 김정우가 뒤따랐다. 





"조심해서 가요 둘다. 주변 잘 살피고"


"예 편히 쉬세요 누나도"


"걱정하지 말고, 갑니다 우리"





걱정하지말라며 여유롭게 손을 휙휙 흔드는 김정우를 보면서도 완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나와 정재현은 문 앞에 우두커니 선 채 두 사람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꽤 한참동안 바라봤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문 닫으라고 손짓을 해 보인 두 사람이었지만 나도 정재현도 누구 하나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않았다. 


시야에서 김정우와 이동혁이 완전히 보이지 않고 나서야 동시에 몸을 돌린 나와 정재현은 아무 말 없이 집 안으로 들어와 빈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턱을 괸 채 만들다 만 실팔찌와 잔뜩 쌓인 실을 말없이 쳐다만 보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정재현이 자리를 옮겨 내 옆에 앉는다. 의자가 끌리고 밀리는 소리에 턱을 괸 채로 고개만 돌리면 옆에 앉은 정재현의 시선이 내 앞에 어지럽게 늘여진 실들에 꽂힌 게 보인다.





"여주야"


"응"


"내게도 비밀인 것이야?"


"뭐가"


"이것들, 무얼 하는 건지 궁금한데..."





아까 이동혁이 그랬던 것처럼 실뭉치를 콕콕 찌르는 정재현때문에 실소가 터졌다. 진짜 궁금하긴 한가보네. 따지고보면 별 것도 아닌데 내가 괜히 애들한테 기대감만 심어준건가 싶어서 잠시 정재현을 응시하다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어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렸다. 





"재현아 여기다 손목 좀 올려봐"





내 말에 왜 그러는 지 이유는 묻지 않고 제 손목을 척하니 올려놓는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움직이는 정재현의 행동에 그만큼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사소한 행동임에도 괜히 기분이 이상해 눈을 깜빡이다가 만들다 만 팔찌로 그의 손목을 살짝 감았다. 


너무 꽉 조이면 불편할테니까 적당히 느슨하게 만들면 좋을 거 같은데. 생각했던 길이와 얼추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서 두 손으로 실을 쥐고서 정재현의 손목을 감쌌다가 풀었다가 두 번을 반복하다 조심스레 그의 손목을 잡고 옆으로 옮겨뒀다. 


그리고 다시 실 땋는 걸 시작하자 이번엔 정재현이 턱을 괸 채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손이 움직이는 걸 뚫어져라 보고 있는 정재현을 쳐다보다 다시 실 팔찌로 시선을 돌려 손을 움직였다. 색 조합도 나름의 의미를 담은 건데 땋아지는 걸 보니 그래도 봐줄만은 한 거 같고, 





"실팔찌인데 여기다 소원을 빌어, 그럼 소원팔찌가 되는거지"


"소원팔찌? 그런 것도 있나보구나"


"팔찌에 소원을 빌고 이걸 계속 차고 다니는거야. 그러다 팔찌가 끊어지면 소원이 이뤄진대"


"...소원이 이뤄진다"


"응. 나 대학다닐 때 친구들이랑 많이 만들었거든"





거의 다 땋아진 실을 들고 다시 정재현 손목에 감았다. 이 쯤 하면 되려나... 손가락 두 개가 들어갈 정도의 여유를 두고 매듭을 지었다. 하지만 매듭 짓는 방법이 기억이 안 나서 대충 묶었더니 생각했던 것보단 모양이 좀 이상하다. 


마음처럼 예쁘게 되지 않는 마무리에 조금 속상해서 매듭 부분을 검지 손가락 끝으로 살살 문지르는데 그런 내 손 위로 정재현 손이 맞닿았다. 





"너무 오랜만에 만들어서 좀 이상하네..."


"아니다.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





내 손을 잡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정재현을 보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더 예쁘게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인력거에서 정재현이 걸어준 목걸이에 비하면 너무 소박하고 초라해보이기까지 해서 절로 터지려는 한숨을 삼켰다.


소원팔찌를 만들 때 색색의 실들이 가지는 의미도 있었지만 사실 그 의미가 다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빨간색의 실을 사고 그 실을 넣어서 팔찌를 만든 건, 우리 인연이 여기서 끝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인연인 사람들끼리는 서로의 손끝에 붉은 실이 이어져있다는 얘기가 있으니까. 


우리가 인연인지 아닌 지 알 수는 없지만, 시공간을 뛰어넘고 만나게 된 이들과 내 사이가 끊어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비록 나는 떠나겠지만 떠나야하지만, 떠나는 나와 남아있을 이들이 서로를 연결할 수 있는 무언가가 남아있다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내 소원이 여기 담겨있어. 재현이 네 소원도 담으면 되겠다 이제"


"...여주 네 소원이 무언데?"





손등으로 전해지는 정재현의 온기를 느끼면서 손끝으론 그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이 팔찌에 담은 내 소원은 언젠가 겪을 우리의 이별이 너무 아프지 않기를, 그리고 미래에서 우리가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한 소원은 입 안에서 맴돌기만 했다. 모두가 헤어짐을 염두하고 있지만 막상 그걸 입에 올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소원이 뭐냐 묻는 정재현의 물음에도 쉽게 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아니 답하고 싶지 않다. 


내가 너희를 두고 이 경성을 떠나야한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그건 비밀로 할게. 소원은 원래 비밀이잖아"





시선이 맞물린다. 아무 말 없이 날 뚫어져라 응시하던 두 눈이 느리게 감겼다가 떠지고 잔뜩 가라앉은 눈빛이 여러 감정들을 드러낸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데도 꼭 정재현이 울고 있는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게 그가 붙잡지 않은 손으로 정재현의 한쪽 뺨을 천천히 감쌌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온기에 가슴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감정이 일렁인다. 그 어떤 말도 오가지 않고 그저 서로의 숨결만 오가는 공간 속에서 우리는 그저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제 뺨을 감싸고 있는 내 손을 다시 감싸는 정재현이 느리게 눈을 감으며 내 손에 제 얼굴을 기대었다. 





"여주야"


"...응"


"내 소원 속엔 여주 네가 있다"


"......"


"네 소원엔 우리가 있을까..."





두 눈을 꼭 감은 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하던 정재현이 이내 눈을 떴고 나는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마주하고 있다간 나도 모르는 새에 온갖 감정이 쏟아질 것 같아서 그랬다. 나조차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잔뜩 쏟아져 내릴까봐 그게 무서워서





"...애들, 한테도 다 만들어주려고"


"그래. 다들 좋아할 것이다"


"어 혹시 모르니까, 그 예비용, 그러니까 여러 개 만들거야. 그러려고 실 잔뜩 산건데"


"그리 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척 하려고 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펼쳐놓은 실들을 만지며 갑자기 쏟아내는 말에도 정재현은 다정히 맞장구를 쳐줄 뿐이었고 오히려 그런 다정함이 더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내가 일부러 제 시선을 피하고 말을 돌리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장단을 맞춰주는 정재현때문에 순간 코 끝이 찡했지만 더 이상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싶지 않아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다시 실을 손에 쥐었다. 














으... 허리야... 허리에서부터 올라오는 뻐근함에 감았던 눈을 뜨고 깜빡였다. 어라 시야가 왜 기울었지. 구십도로 기울어버린 시야에 왜 이런지 이유를 생각하기도 전에 두 눈 가득 들어오는 정재현의 얼굴에 순간 헛숨을 삼켰다. 


상처 하나 없이 고운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정재현이 눈을 감고 있어서 망정이지 눈을 뜨고 있었다면 정확하게 시선이 맞물릴 각도였다. 잠이라도 든 건지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는 정재현을 가만히 응시하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참 어여쁘게도 생겼다"

 




나지막히 중얼거리던 말이 허공에서 흩어지고 다시 내려앉은 정적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정재현을 더 보고 있다간 혼자 온갖 말을 쏟아낼 것 같아서 차마 쏟아내지 못한 말은 입안 가득 눌러 삼키고 주변을 살피다 바닥에 떨어진 카디건을 발견하곤 서둘러 주워들었다.


혹시 먼지가 묻었을까봐 끝을 탁탁 털어내다 정재현이 집 안에서 주로 걸치던 카디건이라는 걸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고요하게도 잠든 그를 바라보다 카디건을 덮어줬다. 잠든 날 보고 정재현이 이렇게 덮어줬겠지...


아침일찍 눈이 떠지는 바람에 테이블에 놔두고 정리하지 못한 실뭉치들을 정리하며 실팔찌를 마저 만들었다. 애들이 몇 시쯤 도착할지는 몰라도 오기 전에 미리 다 만들어놓자는 생각에 혼자 집중하고 팔찌를 만들다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런 날 정재현이 본거고


턱을 괴고서 잠든 정재현을 바라보다 아직 남은 실팔찌를 손에 쥐었다. 이제 박지성 몫의 팔찌만 만들면 끝인데, 이걸 좋아할 지 모르겠네...


아침 겸 점심을 정재현과 같이 먹고 나란히 앉아 오늘 자 신문을 살피고 있던 그 무렵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애들인가 싶어서 내가 먼저 일어나 문을 열려고 하자 성큼 다가선 정재현이 내 앞을 가로막더니 제가 직접 문을 열었다. 

 




"정 선생 오랜만입니다"


"직접 오실 줄은 몰랐는데, 들어오십시오"

 




서둘러 여자를 안으로 들인 정재현이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살피다 문을 단단히 걸어잠궜다. 쓰고 있던 모자를 벗은 여자가 정재현이 가리킨 자리에 앉았고 이내 태연한 얼굴로 모자 안 쪽 천을 튿어냈다.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튿어진 천 안에서 작게 접힌 편지를 꺼내든 여자가 편지를 정재현에게 건네려다 날 쳐다보고는 머뭇거린다. 

 




"못 보던 분이신데 누구신지... 조선인입니까"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한껏 의심하며 경계하는 눈빛의 여자에게 나를 뭐라고 소개해야 할 지 몰라 입술만 달싹이는데 테이블 아래로 정재현이 내 손을 덥썩 잡아왔다. 안심하라는 듯 손을 꽉 잡았다 놓은 정재현이 여자의 손에 들린 편지를 직접 가져가며 말을 잇는다. 

 




"경청회 사람입니다. 거사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으나 서신을 대필하고 있습니다"


"아... 결례를 범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아니요 아닙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으니 미안해하지 마세요. 저였어도 의심했을 겁니다"

 




정재현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여자가 고개를 꾸벅 숙여 사과를 건넸고 정중한 태도에 나 역시도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들었다. 조금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정재현은 여자가 가져온 편지를 빠르게 읽어내렸고 이내 다 읽은 편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정재현이 달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를 따라 내 시선도 달력으로 옮겨졌고 오늘이 11월의 초하루, 그러니까 11월 1일이라는 걸 알았다. 새삼 깨닫게 된 날짜에 어제 도서관 열람실에서 보았던 시공간의 틈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나도 모르게 깊은 숨을 들이켰다. 

 




"열흘이면 시간은 충분하겠습니다"


"그렇지요? 서신에 적힌 이름이 동경에서 나고 자란 이의 것입니다. 그 이가 폭탄을 던질 것이니 경청회에서는 총독부 앞에서 보초서는 순사들의 눈을 다른 곳으로 유인해주면 되겠습니다"


"독서회에서는 몇이나 움직입니까"


"폭탄을 던질 이를 제외하면 총 넷이 움직일 겁니다. 그 중 하나는 함께 총독부 안으로 들어갈 것이고 셋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예비용 폭탄을 갖고 갈 것이라"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듣기만 했다. 내가 끼어들 자리도 아닐 뿐더러 저들이 말하는 총독부 거사는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이라 그저 말없이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독서회 사람이 말하는 계획은 듣기엔 완벽하게 들렸지만 결과마저 완벽할 수는 없다는 걸 알아서 자꾸만 입 안이 쓰다.


애초에 독서회 사람들도 총독부 건물 전체를 폭파시킬 생각이 아니라 일제에 조금이나마 혼란을 주고자 하는 것이 목적임을 알면서도 입안이 쓴 건 어쩔 수 없다. 그 건물은 광복이 되고 나서도 한참동안 근정전 앞을 당당히 막고 있었으니


경복궁 내 건물 여러 채를 다 허물고 지은 게 조선 총독부 건물이었다. 근정전 하나만 두고 거의 다 허물었다고 해도 될 만큼 일제는 한 나라를 그대로 짓밟고자 했고, 그 건물은 90년대 들어와서야 겨우 철거된다. 경복궁 복원을 앞두고서 95년이었나 96년이었나 여튼 그 때쯤 철거됐는데

 




"허면 이제 가보겠습니다. 급한 용무가 있으면 호텔로 전화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예. 그럼 저는 이만"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누는 듯 하던 두 사람은 독서회 사람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대화를 마무리했고, 안쪽 천이 튿어진 모자를 다시 쓴 여자가 나한테도 짧게 인사를 건네더니 들어올 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서둘러 집을 나선다. 


독서회 사람을 배웅하는 정재현을 힐끔대다 그가 펼쳐놓은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낯선 이름과 그가 어디서부터 움직일지 적혀 있는 편지 서두엔 거사 날짜와 시간이 적혀 있었고 정재현이 말하던 열흘이 뭘 뜻하는 지 알았다. 11일 밤 열시라...


거사는 보통 한밤중에 이뤄진다. 아무래도 밤에 움직여야 순사들의 눈을 피하기가 쉬우니 당연한 거라는 걸 알면서도 지난 번에 인천을 갔다가 다쳐온 이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뭘 그리 뚫어져라 보고 있어"


"어? 어떻게 같이 들어오네"


"이 앞에 오고 있는데 독서회 사람이 나가더라고"

 




갑자기 들려온 김도영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신기하게도 다들 정재현과 같이 들어오고 있었다. 핸드폰도 없고 정확하게 약속 시간을 맞췄던 것도 아닌데 다들 비슷한 시간에 도착하려 했나보다.


텔레파시 같은 거라도 통했나 싶어 신기하게 쳐다보는 나와는 달리 저들은 늘 있는 일인 양 태연하게 집 안으로 들어섰고 독서회 사람이 왔다갔다는 정재현의 말에 김정우는 어느새 내가 보고 있던 편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편하게 보라고 편지를 김정우 쪽으로 밀어주고 고개를 돌리다가 마지막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잠그던 나재민과 눈이 마주쳤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싱긋 웃어보였다. 

 




"내 말이 맞죠 재민씨?"


"...예"

 




그리고 어깨를 으쓱이며 일부러 목소리도 높여서 말하자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던 나재민이 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온다. 김정우가 보던 편지는 김도영의 손을 거쳐 나재민과 이동혁에게 옮겨졌지만 박지성에게는 닿지 못했다. 


눈에 띄게 저를 빼놓는 이들의 행동에 입술을 삐죽이던 박지성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이들이 저를 아껴서 그런다는 걸 알아서 차마 속상한 티도 내지 못하는 박지성의 등을 천천히 다독였다. 


토닥토닥, 일정하게 다독이는 손길에 마음이 풀렸는지 금세 느슨히 풀어진 얼굴의 박지성때문에 작게 웃음이 터졌다. 

 




"지성씨는 밥 잘 먹고 잘 쉬었죠?"


"네! 누나는요?"


"덕분에 저도 편히 쉬었어요"

 




박지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는 내 옆엔 언제 와 있었는지 이동혁이 서 있었고 이내 그가 볼멘 소리를 낸다. 울어서 눈 팅팅 부었으면서.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조용히 하라고 쉿, 하는 제스쳐를 해보이자 이동혁이 피식 웃는다. 


부드럽게 접히는 눈꼬리가 예뻐서 이동혁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다 김도영과 시선이 마주쳤고 그의 시선이 움직이다 내 손끝에 닿았다는 걸 깨달았다. 별 거 아닌데 괜히 손끝이 간지러운 것 같아 이동혁을 쓰다듬던 손을 내리고는 몸을 돌렸다. 


아직 거사에 대한 얘기는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았으니까 지금이 굳 타이밍일지도 모른다. 완성시켰던 실팔찌들을 나눠 줄 타이밍이다 싶어 서둘러 방 안에 들어가 실팔찌를 담아둔 작은 상자를 손에 들었다. 


의자가 모자랐는지 김도영과 김정우는 테이블에 대충 엉덩이만 걸치고 앉아 있었다. 박지성이 제 자리를 양보하겠다며 일어났지만 그대로 김도영에게 어깨가 잡혀 다시 앉는 걸 보며 나도 모르게 푸흐흐 웃었더니 모두의 시선이 단숨에 나를 향했다. 


갑자기 몰려든 시선에 조금 놀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상자를 들고 애들이 있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김정우가 내가 들고 있던 상자를 제가 대신 들어준다. 괜찮다는데도 내 말은 못 들은 척 상자를 들고 간 김정우가 테이블 한 가운데에 상자를 내려놓았고

 




"이게 다 무언데?"

 




땋은 실들이 잔뜩 담긴 상자를 가리킨 김도영의 물음에 대답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다 똑같은 색 조합이라 딱히 어떤 게 누구거라고 정해놓은 게 없어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서 있던 김도영을 보며 실을 손에 쥐었다. 

 




"도영아 손목 줘봐봐"


"팔찌구나"


"응, 내가 만들었어"


"...여주 네가 직접?"


"왜, 별로야?"


"아니 무슨, 그럴리가 없지 않니"


"네가 준 핀에 비하면 너무 소박하지만... 다 됐다"

 




정재현에게 해줄 때처럼 손가락 두개 정도 들어갈 공간을 남겨두고 매듭을 짓자 애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다. 


내가 직접 만들었다는 게 꽤 놀라운 일이었는지 김도영은 내가 제 손목에 걸어준 팔찌를 말없이 바라보며 쓰다듬기만 했고, 그 옆에서 김정우는 다음이 제 차례라며 내 앞으로 척하니 손목을 내밀었다. 


대기순번을 뽑은 것 마냥 의자를 끌고 김정우 옆으로 다가온 이동혁이 다음은 자기 차례라고 엄포를 놓았고 정재현은 그런 이동혁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김정우의 하얀 손목에도 같은 색의 실 팔찌가 자리를 잡았고 제 손목을 뚫어져라 보던 김정우가 손을 내렸다 올렸다 하더니 이동혁 손목에 팔찌를 감아주는 날 보며 묻는다.

 




"갑자기 이걸 주는 연유가 무엇이지요? 웬 선물인지?"


"어제 실 사는 거 봤잖아"


"그렇긴 한데, 팔찌를 만드려고 하는 것인지는 몰랐으니까. 비밀이라고 했잖습니까"


"소원팔찌야, 내가 학교 다닐 때 이걸 잘 만드는 친구가 있었는데 걔가 알려줬어"


"소원팔찌라..."


"각자 팔찌에 소원을 빌면 돼, 팔찌를 차고 다니다 끊어지면 소원이 이뤄진다 하더라고"

 




이동혁 몫의 팔찌 매듭을 완성시키자 기다렸다는 듯 나재민이 제 손을 내밀었다. 어쩌다보니 나이순으로 되어버린 탓에 가장 마지막 순번이 된 박지성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나재민 몫의 실을 꺼내 손목에 감았다. 


모두 똑같은 색을 가졌음에도 그 색이 뜻하는 게 뭔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다 똑같은 색이라 한 명 쯤은 왜 이 색밖에 없는 지 물어볼 법도 한데 말이지. 그래도 다행인 건 어느 누구 하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허면 이뤄졌었습니까, 아가씨 소원은"


"이뤄졌죠, 그 당시에 빌었던 건"

 




소원팔찌라고 해도 거창한 걸 빌어본 적은 없다. 대학동기들과 만들때도 정말 진심을 다해 간절하게 빌만한 소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내가 빌었던 건 그냥 이번 시험 잘 치게 해 달라, 성적 잘 나오게 해 달라 그런 류의 소원들이 전부였다. 


그리고 나름 뭐 이뤄지긴 했었지. 소원팔찌를 차고 다니던 그 해에는 그래도 성적이 잘 나와서 장학금도 받곤 했으니까. 물론 그게 다 팔찌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뤄지면 좋겠습니다. 제 소원도"

 




낮게 울리는 나재민의 목소리에 순간 손끝이 멈칫했지만 무사히 팔찌 매듭을 완성시킬 수 있었고, 완성된 팔찌를 나재민은 한참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 나재민은 제 손목에 걸린 팔찌를 보며 어떤 소원을 빌고 있을까.


꽤나 진지한 얼굴이라 더 이상 말을 걸지 못하고 시선을 돌리자 다른 이들도 나재민 못지 않게 꽤 진지한 눈을 하고 있는 게 보인다. 


그저 흔한 팔찌일 뿐인데 이토록 진심을 다해 소원을 빌 정도라니... 그들이 어떤 마음일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시선을 돌려 박지성의 손목 위로 실을 감았다. 


몇 년 전 동기들끼리 모여서 만들었을 때와는 달리 이번엔 실을 땋는 내내 진심으로 빌고 또 빌었다. 이들의 무사와 안녕을, 그리고 우리가 언젠간 꼭 다시 만나기를 간절하게 진심을 담아 빌었으니 신이 있다면 거창한 소원이라 해도 이번만큼은 꼭 들어줬으면 좋겠다. 


날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서러운 세상에 남게 될 이들을 위해서













당장 가진 게 없고 현대의 물건은 경성에서 쓸 수 없으니 여주가 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고, 그래서 여주는 직접 만드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애들에겐 어쩌면 평생 간직하고 싶은 선물일지도...

그리고 남주는 재현이 확정! 이런 건 아닙니다. 여주가 경성에 오자마자 처음 마주한 게 재현이고, 여주와 재현이 둘이 있는 시간이 아무래도 다른 아이들보단 많을 수 밖에 없다보니 둘의 장면이 비율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네여...완결까지 남주가 정해질지도 미지수..

여튼 그렇습니다. 주말도 이렇게 마무리가 되어가고, 우리 독자님들 오늘도 편안하고 행복한 밤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하트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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