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의 떨림이지만 밤의 여왕, 트리비아 카리나의 눈썰미로 그걸 눈치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별빛의 수호자, 메이 헌팅턴이 아직까지는 감정을 잘 숨기질 못하는 탓도 있었다.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잃은 척만 했다는 게 이럴 때 보면 그녀의 말대로 진짜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메이?"

"별 거 아냐, 걱정하지 마."

"하지만..."

"별 거 아니라고 했어."


쇼파에 누운 채로 하늘을 보며 한숨을 푹 쉬는 스텔라를 보고, 트리비아는 짐짓 걱정됐는지 한 마디를 던졌다. 날이 선 메이의 대답에도 집요하게 캐물으려던 그녀는 단호하게 별 거 아니라 대답하는 한 마디에 기어이 그 의도를 접어야만 했다.


"...산책이라도 할래?"
"웬일로 먼저 이야기를 한담."

"그냥, 조금 씁쓸해서. 후..."


날개를 살짝 펼치며 산책이라도 안 해보겠냐는 트리비아의 말에 메이는 웬일로 먼저 이야기를 하는 거냐며 감정이 담기지 않은 기계적인 웃음을 지었다. 씁쓸하다는 그녀의 대답에, 스텔라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확실히 지금같이 마음 속에 과거에 대한 증오만을 품은 삶이라면 언젠가 낭떠러지로 달려가 떨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걱정 마. 난 괜찮으니까."


자신을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트리비아를 격려하듯, 메이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미소지었다. 아까와 달리 정말로 걱정이 필요없다는 듯 안도감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그럼, 갈까?"
"좋다. 안내해줘. 여왕님."

"농담도 참..."


베란다의 난간을 넘어가 자신에게 손을 내민 밤의 여왕을 보고, 메이는 절로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천천히 트리비아의 몸이 공중에 떠오름과 동시에 스텔라 또한 지면과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쌀쌀맞은 공기와 차가운 그녀의 손 또한 때로는 기억에 남기기 위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온 건 아닌가 모르겠어."

"카리나가 더 잘 알지 않나? 난 뒤돌아보기 싫어한다는 거."


스텔라는 다시금 주먹을 꽉 쥐었다. 트리비아는 그녀의 반박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심란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지금 당장으로서는 스텔라의 말이 맞았다. 뒤를 돌아본다 한들, 그녀가 쌓아올린 기억은 전혀 아름답지도 않고, 또 유용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앞만을 보기로 결정한 이상 트리비아 또한 뭐라 할 권리는 없었다.


"...카리나는 옛날 생각하면서 보통 어떤 감정을 느끼나?"
"나는... 글쎄, 크게 생각을 안 해봐서 모르겠네."


하늘 위의 서늘하고 맑은 공기를 만끽하던 메이는 뜬금없이 트리비아에게 옛날 생각을 하면 보통 어떤 감정을 느끼냐는 질문을 던졌다.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이었는지 그녀는 두루뭉슬하게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대답해 넘겼다. 대답을 들은 메이의 표정은 뭐 딱히 나쁠 것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항상 그렇게 생각해. 이것도 내가 쌓은 기억이니 안고 가야지. 그러면서도 잊어버리고 싶고."

"...모순됐네. 한 쪽만 고를 수는 없어?"

"안타깝게도 그러기 힘들지."


항상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그녀에게 브레이크가 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곁에서 지켜봐온 사람으로서 알 수 있었다. 스텔라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는 트리비아의 착잡함을 더욱 심화시키는 듯한 느낌이었다. 결국 그 기억을 가진 자는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이니 안고 가야 하면서도, 떠올릴 때마다 제동이 걸리는 기억 따위는 잊어버리고 싶다는 역설적인 심리. 한 쪽만 고를 수 없냐는 트리비아의 말에 스텔라는 안타깝게도 그러긴 힘들다며 한숨을 푹 쉬었다.


"...씁쓸하네. 뭔가."

"...카리나가 씁쓸해할 이유는 없어. 다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니까."

"하지만 그래도 내가 곁에 있잖아. 조금은 안심이 되지 않아?"
"뭐 그렇지. 그런 점에서 고맙다. 하지만 혹여라도 나눠서 짊어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서서히 지면이 가까워져왔다. 잠시 눈을 감은 채로 공기의 흐름을 만끽하던 스텔라는, 씁쓸하다는 트리비아의 한마디에  걱정 말라는 듯 은은한 미소와 함께 내가 전부 짊어져야 하는 짐이라며 이야기했다. 잠시 마음을 읽힌 듯 당황한 트리비아의 표정이 재밌다는 듯, 메이는 보다 뚜렷한 미소를 지으며 그래도 자기가 곁에 있으니 조금은 안심이 되지 않냐는 트리비아에게 그런 점에서 고마워도 나눠서 짊어질 생각은 하지 말라며 선을 그었다.


"그래도..."

"아직까진 그렇게, 썩 성숙한 어른은 아니니까. 그런 어른의 짐을 같이 짊어져봤자 당신만 힘들어."


드디어 땅에 발을 디뎌 서고, 스텔라는 트리비아에게 친근하게 어깨동무를 잠깐 걸고는 아직까지 그리 썩 성숙한 어른이 아니라 나눠봤자 그녀만 힘들 거라고 조금은 씁쓸한 말투로 읊조렸다. 한숨을 푹 쉬고는, 어깨동무를 풀고서 메이는 연구소의 담벼락에 기대어 앉아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래서, 조금 날아다니고 나니 기분은 어때?"

"좀 괜찮은 것 같다. 뭐, 걱정 마. 오늘은 오늘의, 내일은 내일부터의..."

"새로운 기억을..."

"새겨나가야지."


그래도 트리비아와의 비행이 그녀에게 도움은 꽤 많이 된 듯했다. 표정에서 그 변화가 확연히 드러났다. 단지 잠깐 멈춘 것에 불과하다는 듯, 스텔라는 오늘은 오늘의 기억, 내일은 내일부터의 새로운 기억을 새겨나갈 거라 다짐했다. 트리비아에게 손을 내민 이유도 그것이었으리라.


"단지 그거면 돼?"
"그거면 충분해. 새로운 기억이 쌓일 때마다, 제동이 걸릴 만한 기억도 서서히 잊혀지겠지."


마주잡은 트리비아의 손을 당겨 몸을 일으킨 스텔라는 밤의 여왕을 품에 안으며 단지 그것뿐이냐는 말에 그거면 충분하다고 답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새로운 기억이 쌓일 때마다 그녀를 멈춰세우는 기억도 서서히 잊혀질 것이기에.

파르페르파의 포스타입입니다 찾아와봤자 별거 없어요 이거저거 할만큼 하는 포스타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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