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한의 집에서 나온 세 사람은 왔던 길이 아닌 다른 길, 그러니까 도시의 정문을 통해 시내에 들어섰다. 굳이 다른 길을 택한 이유는 클레르의 불안 때문이었는데, 그녀는 혹여나 세 사람이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광경을 누군가 의심하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오는 내내 누군가의 눈에 띄거나 불량한 이들에게 시비를 걸리는, 클레르가 걱정한 불상사는 없었고 세 사람은 무사히 목표한 여관에 도착했다.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클레르는 두 명분의 숙박비를 결제했다. 리온과 영원의 몫을 대신 내준 이유는 마음에 남은 부채감 때문이었다. 그녀는 강압적으로 뜯어낸 것이나 다름없는 치료비를 적절한 기회를 통해 그들에게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정작 자신에겐 아무것도 쓰지 않고 숙소 삼아 지내는 마법 협회로 돌아갔다.

“클레르가 돈을 다 냈다고?”

식사를 마친 영원은 뒤늦게 사실을 알고 조금 놀랐다. 약삭빠른 녀석인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반면 리온의 반응은 조금 시큰둥했다.

“클레르님께서 내일 아침 식사까지 부탁하고 가셨답니다. 일어나서 저를 불러주시면 곧바로 식사를 준비해드릴게요.”

“아, 네….”

“목욕물은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바로 준비해드릴게요.”

“네…….”

영원은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리온의 반응을 살폈다. 요르한의 집에서 대화를 나눌 때만 해도 생기가 돌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영원의 눈앞엔 다시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만이 남아있었다. 그는 무언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는 듯, 식사 중에도 벽이나 바닥을 응시한 채 멈추어 서곤 했고, 영원은 그런 리온의 태도가 몹시 불편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던가.’

물론 지금 상황에서 영원이 추가로 알아야 할 정보는, 딱히 없다. 그는 리온과 모든 장소에 동행했으니까. 퇴마의 검이 무엇인지야 이미 알고 있었고 그 검이 어디에 있는지는 오늘 요르한을 통해 알게 되었다. 어째서인지 이미 요르한은 모든 준비를 끝낸 상태라, 내일 아침부터 그와 동행한다면 퇴마의 검은 금세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궁금증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정보’말고도 영원이 궁금한 건 이미 넘쳐났다. 리온과 요르한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게 가장 궁금했지만 가정사를 캐묻는 건 예의 없는 행동이니 제쳐두고, 리온은 클레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줄곧 미덥잖은 태도를 보이던데 내가 없던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무엇보다… 대체 무슨 근거로 나를, 아니 내 능력을, 이렇게나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걸까?

영원은 처음 리온과 동행한 이후부터 줄곧 묻고 싶었다. 대체 왜 나를 믿느냐고. 만약 영원이 지금 리온의 입장이었다면 그런 무조건적인 신뢰는 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용사랍시고 내려온 남자는 너무나도 어설펐던데다가 무능력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아마 어쩔 수 없이 끌고 다니기는 했을지언정 다니는 내내 의심의 눈초리를 쏘아댔을 것이다. 그러나 리온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물론 초반에야 한심한 눈으로 몇 번 영원을 흘겨보긴 했으나 그는 대체로 의연한 태도를 유지했고 하이옌에 다다라선 전적으로 영원을 믿는 듯했다. 퇴마의 검의 위치? 그건 물론 중요한 문제였지만 사실 따져보자면 가장 중요한 건, 과연 영원이 퇴마의 검을 뽑을 수 있겠는가, 하는 거였지만 리온은 언젠가부터 그런 것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보도록 하지.”

짧은 인사를 건넨 리온이 먼저 방으로 들어가고, 영원은 복도를 잠시 배회하다 자기 방을 찾아 들어갔다.

“큰일이네….”

침대에 누워서도 아까의 고민은 계속됐다. 아니,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더욱 커지기만 했다. 내가 과연 내일 그 막중한 임무를 해낼 수 있을까? 영원은 그 부분이 몹시도 불안했다. 차라리 혼자 갔으면 이토록 불안하지 않았을 텐데, 영원은 불행히도 세 사람과 함께 그 장소를 동행해야 했다. 혹시 모를 실패의 광경을 그들 앞에서 전시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는 것이다. 영원은 그런 건 바라지 않았다. 그건 곧 순간의 창피함과 이어질 실망감, 그리고 결과적으로 모험의 실패를 의미했으니까.

백번 양보해서 모험의 실패가 끝이라면 그건 견딜 수 있다. 잠깐의 후폭풍은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후 영원이 계속해서 이곳에 남게 된다면, 이라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됐다. 영원은 갑자기 이 세계로 ‘옮겨졌다’. 이유는 모른다. 다만 그 목적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는데, 그건 바로 마왕의 봉인이었다. 쉽게 말해 게임 클리어. 이런 일을 벌인 장본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긴 게임 속이고, 그 주요 목표를 클리어하는 즉시 엔딩을 맞을 테니, 그 엔딩을 본다는 건 곧 현실로 돌아갈 높은 가능성이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러니 그 엔딩을 보기 위해 꼭 얻어야 하는 특수 아이템, 그러니까 퇴마의 검을 영원은 어떻게든 얻어내야 했다.

“그치만 나보고 어쩌라고….”

영원은 두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도 특출난 능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이 살아왔다. 주변 사람들은 자길 죄다 용사 취급하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정말 용사의 역할로 이곳에 나타나긴 한 것 같다만 능력만큼은 현실과 달라진 게 없었다. 보내줄 거면 좀 근육질의 멋진 몸으로 탈바꿈해서 보내주던지. 의무교육 12년간 체육 시간을 제외하곤 몸을 써본 적도 없는 비루한 몸뚱이를 이 험한 곳에 던져놓은 누군가가 영원은 미치도록 원망스러웠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평소 책은 들여다보지도 않고 팽팽 놀다가 기말시험을 하루 앞두고서야 다급히 책을 펼쳐보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마음이 불편했다. 영원은 아주 평탄한 삶을 살아왔기에 이런 감정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머릿속을 정리하려 목욕물에 몸을 담가보기도, 다시 침대에 누워 한참 눈을 감아보기도 했지만 이미 너저분해진 머릿속은 좀처럼 정리되지 않았다. 영원은 그래서 결국 잠들기를 포기하고 방을 나섰다. 

계단을 타고 내려온 1층은 이미 캄캄했다. 어느덧 한밤중이 되어버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여관 주인이 있었다면 마실 거라도 주문했을 텐데. 영원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창가에 붙은 식탁 의자에 앉아 바깥을 구경했다. 밤이 퍽 깊었는지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전혀 없었고 드문드문 켜진 횃불만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영원은 식탁에 팔을 베고 엎드려 한참이나 창문 너머로 비치는 횃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영원은 문득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앞을, 아니 그보다 조금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엔 작은 램프를 들고 선 리온이 있었다.

“아, 잠이 잘… 안 와서.”

영원은 얼떨떨하게 대답하며 엎드려 있던 자세를 추슬렀다. 리온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식탁 중앙에 들고 있던 램프를 올려두곤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기름을 잔뜩 먹인 끈에 불을 붙여 사용하는 침실용 램프였다. 유리는 때가 묻은 데다 아주 두꺼워서 그 주변만을 간신히 밝힐 뿐이었지만, 어두컴컴한 곳에서 시야를 확보하기엔 충분했다. 영원은 리온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말을 잊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은은한 노란 빛이 내려앉은 얼굴은 좀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매끈했다.

“말 못 할 고민이라도 있나?”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건 리온이었다. 영원은 그제야 멍하니 그를 보던 시선을 거두곤 대답했다.

“말 못 할 고민까진, 아니고.”

답변치고는 조금 어설펐다. 리온이 미동조차 없는 걸 보니 정말 그런 듯 보였다. 영원은 그래서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혼자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었으니까….

“저기 나 퇴마의 검 같은 건… 못 얻어낼지도 몰라. 아니, 못 얻어낼 거야. 사실 자신도 없고, 아니, 능력이 없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러니까, 뭔가 대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데.”

“무슨 대책을 말하는 거지?”

“뭐, 플랜 B가 필요하다는 얘기지. 내일 퇴마의 검을 얻지 못했을 경우를 대비한….”

“그런 건 필요 없어.”

횡설수설하는 영원과 달리 리온의 대답은 간결했다. 반박하려는 말문이 턱 막힐 정도로. 영원은 당혹감에 눈을 껌뻑였다.

“넌 퇴마의 검의 주인이다. 뭘 걱정하는 거지?”

고민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물론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영원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날을 세워 대답했다.

“그러는 너야말로 대체 날 어떻게 믿고 그런 대책 없는….”

“믿지 않을 이유도 없지.”

영원은 다시금 말문이 막히는 기분에 눈살을 찌푸렸다. 말도 안 돼. 영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대체 어디서 이런 깊은 신뢰가 생겨났단 말인가? 그러나 리온은 그런 영원의 반응 따윈 개의치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넌 여신님의 선택을 받은 자다. 설령 네 말대로 실패한다 할지라도 방법은 있겠지.”

참으로 견고한 신뢰였다. 영원은 종교도 뭣도 없었기에 저 엄청난 신뢰를 이해할 수 없었고, 믿을 수도 없었지만, 지금 마주하고 있는 남자의 일관된 태도 앞에선 그 불신을 더 이어갈 수 없었다. 리온이 영원에게 보이는 신뢰는 비유하자면 아주 깊은 물 같아서, 누구든 쉽게 잠길 수 있었다.

줄곧 달아나려고 노력했던 것도 잠시, 영원은 어느 순간 자신이 꼼짝없이 그 신뢰에 잠겨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널 버릴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라.”

리온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영원은 발끈해서 받아쳤다.

“…버림받을 걱정을 한 건 아니거든.”

“그렇다면 다행이군.”

램프의 불이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리온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고 영원이 그를 뒤따라 일어섰다. 두 사람은 흐릿한 램프에 의지해 계단을 올랐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뒤늦은 질문에 리온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발소리가 나길래 내려와 봤다.”

“귀도 밝다.”

“네 쪽이 어두운 거겠지.”

“뭐라고?”

풋 웃는 소리가 스쳤지만 보이는 건 뒷모습뿐이었기에 영원은 리온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왕자님도 웃을 줄은 아는 모양이지. 영원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일은 일정이 고될 거다. 잠이 오지 않더라도… 조금은 자둬.”

리온의 말에 영원은 손을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리온은 영원이 방에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하려는 듯,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영원은 그런 그를 지나쳐 끄트머리에 붙은 방으로 들어갔다. 리온은 복도에 있는 모든 방문이 닫힌 걸 확인한 후에야 램프를 챙겨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아이템: 물품] 낡은 램프

기름먹인 끈에 불을 붙여 사용하는 작은 램프.

주변 1M 정도의 시야를 약한 정도로 밝혀준다.

초기 지속시간은 4시간이나 내구도에 따라 수명이 점차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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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한 아침입니다. 추위 조심하세요! (,,> <,,)♡

1차 BL 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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