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츰 바람의 온도가 달라지며 푸르렀던 나뭇잎에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완연한 가을이다.

 

초상화 전문 화가였던 튜헨의 첫 전시회를 축하하기라도 하듯이 날씨가 좋았다.

 

한가로이 문화생활을 즐길 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이므로 너무 추레하게 입으면 그쪽이 훨씬 눈에 튈 듯하여 미르엘라는 일부러 맞춤옷을 지어 입었다. 반짝반짝하고 거추장스러운 차림새가 어울리는 외양은 아니어서 단정하고 얌전한 색채로 맞추었다. 다채로운 빛깔은 오히려 예쁘장한 리칸과 류에게 더 잘 맞았던 터라 미르엘라는 흡족한 마음으로 옷을 사 입혔더랬다.

 

화랑은 저택으로부터 걸어서 삼십여 분 거리에 위치했다. 물론 집에서 제 발로 걸어온 방문객은 아마 미르엘라의 일행밖에 없겠으나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천장이 높게 탁 트인 화랑에 발을 들이자마자 곧장 정면으로 시야에 닿는 거대한 그림. 그 그림은 공간 한가운데 세워진 두꺼운 기둥에 걸려 있었다. 주위 벽면을 줄지어 채운 그림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다분히 의도된 배치였다. 오직 이 그림만을 위하여 전시회를 연 것만 같은.

 

 

“혼을 쏟아부었군요.”

 

 

오늘 웬일로 따라온 뮈엘이 한마디 뱉었다. 그림 앞에 모여든 사람들 중에서 그 말소리를 들은 사람은 발화자를 포함하여 넷뿐이었다. 뮈엘이 평범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면 지금쯤 관람객들이 그림 대신 뮈엘의 얼굴만 뜯어보고 있었으리라.

 

미르엘라는 화가의 혼을 갈아 넣은 그림을 감상했다. 여러모로 독특한 그림이었다.

 

정적이기만 한 초상화와는 달리, 눈이 아플 정도로 쨍한 원색 위주의 역동적인 화풍이 시선을 붙잡았다. 더구나 보통의 정물화나 풍경화처럼 현실을 그대로 베껴내는 것도 아니었다.

 

시퍼런 구름에선 핏물 같은 새빨간 소나기가 떨어지고, 허름한 옷을 걸친 행인들은 때깔 고운 꽃무늬 양산을 뚫고 들어온 빗방울에 붉게 젖으면서도 싱글벙글 웃는 낯이다. 재앙을 목전에 두고 넋이 나간 것처럼.

 

뭇사람들로 하여금 불쾌감을 자아내는 괴이한 그림이다. 동시에, 비일상과 비현실을 표현한 저 파격적인 붓질은 사람을 매료시키는 힘이 있었다. 어쩌면 그 지점이야말로 가장 불편한 게 아닐까.

 

어디 하나 각지지 못한 곡선이 이토록 폭력적일 수 있다니. 이렇게나 강렬하게 사람을 찌를 수 있다니.

 

 

“어떻소? 내 작품이네만.”

 

 

별안간 중후한 목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왔다.

 

그림에 집중하던 미르엘라가 흠칫하며 뒤돌자 희끗희끗한 연회색 머리와 수염을 깔끔하게 정리한 중년 남성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튜헨? 아니다. 이 그림의 창작자이자 전시회의 주최자라면 이렇게 방문객 사이에 끼어 있지는 않을 터였다. 게다가…….

 

 

“처음 보는 얼굴이네. 왜 ‘그믐’에 한번 오지 않고.”

 

 

냄새만 맡아도 취할 듯한 독주 같은 혼취를 풍기는 악마가 인계에서 화가 노릇이나 할 것 같지도 않다.

 

미르엘라는 당장 저 악마더러 꺼지라고 일갈할 기세인 뮈엘을 뒤로 물렸다. 뮈엘은, 뭐랄까, 조용하게 미친 번견 같을 때가 있다. 대체 무슨 억하심정인지 다른 악마만 보이면 저 모양이었다.

 

 

“그곳은 워낙 재미가 없는지라 발길을 끊은 지 오래되었소.”

 

 

역시나 오래 산 악마다. 그러니 뮈엘도 사나운 눈짓이나 으름장만으로는 내쫓지 못하는 것일 테지.

 

 

“그래서 이름이 뭐지? 나는 미르엘라야.”

 

 

중년 남성의 외형이라 저절로 존댓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일관성을 지키기로 했다. 겉모습이 어리든 늙든 껍데기에 불과할 뿐인데 젊어 뵈는 악마들한테만 반말하는 꼴도 우스웠다. 그냥 어디든 저런 모습이 먹히는 데가 있겠거니 하고 말았다.

 

 

“사쟌이오.”

“……고약하네.”

 

 

사쟌. 수세기 전에 살았던 천재 작곡가의 이름이다. 그가 쓴 곡도 유명하지만, 마지막 작품을 완성하자마자 애용하던 만년필의 뾰족한 촉으로 자살한 걸로 더 유명하다.

 

그 유작은 불길하다며 태워질 뻔했다나. 물론 어찌어찌 잘 보관되어 있지만, 같은 이유로 아무에게도 연주되어지지 않으니 세상의 빛을 못 본 비운의 악보다.

 

그런 자의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 악마가 또 다른 예술가의 그림자에 숨어 있다니. 고약하지 않을 리가 있나.

 

 

“튜헨이 네 계약자인가 봐?”

 

 

악마의 근원에 대한 자그마한 의심의 새싹을 잠시 묻어두며 미르엘라가 물었다.

 

 

“그렇소.”

“난 다들 누군가를 해치려고 계약을 하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래서 좀 거북했거든.”

 

 

알고 보니 튜헨이 악마와 손잡은 까닭은 저렇듯 파괴적인 작품을 거리낌 없이 창조해내기 위함이었던 모양이다. 혼을 쏟아부었다는 뮈엘의 평은 어쩌면 이를 일찌감치 알아본 감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이가 살생을 거래에 내달진 않소. 그보다 훨씬 원대한 야망을 반드시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해달라 청하는 인간이 있는 반면, 아주 하잘것없는 소망을 간절한 바람이랍시고 대는 인간도 꽤 있다오.”

 

 

사쟌이라는 악마가 허허 웃는 시늉을 하며 말한다.

 

 

“악마와 계약하고 나서야 겨우 사람 하나를 해칠 수 있는 인간들은…… 의외로 심약하고 온유한 자들이라. 막바지에 도저히 못하겠다며 내빼는 녀석도 있더이다. 물론 그만큼 꼬드기는 재미가 있다만.”

 

 

은근한 장난기가 묻어나오는 문장이 뒷덜미가 선득할 정도로 낮고 굵게 울렸다.

 

 

“그러니 천하가 진정 꺼려야 하는 자는, 오롯이 스스로 마음먹고 손에 피를 묻히는 종자여야 하지 않겠소?”

 

 

악마들의 목소리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매혹적이다. 누군가는 예쁘게 지저귀는 종달새처럼 맑고, 누군가는 하루 종일 달콤한 밀어만 속삭이게끔 만들고 싶었으며, 누군가는 머리맡에서 자장가를 부르듯 나긋나긋했다.

 

미르엘라는 중저음의 목소리를 반쯤 흘려들으며 재차 그림에 눈을 돌렸다.

 

사실 저 그림의 논란은 유례없던 화풍의 문제만으로 넘어가지 못할 수 있다. 여기 걸린 다른 그림들도 저것과 유사한 맥락이었다.

 

피처럼 검붉은 빗줄기라든가, 형편에 맞지 않은 양산을 들고 있는 초라한 인물이라든가, 그 오싹하리만치 헤실헤실 웃는 그들의 표정 등 작품 내적 요소와 더불어 ‘백일몽’이라는 의미심장한 작품명까지…….

 

예술은 언제나 해석을 동반하며 종종 그 해석은 극단적으로 치닫곤 한다.

 

 

“리칸, 류.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다.”

 

 

이제껏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마인 남매는 기민하게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악마와 엮인 장소에 오래 머물러봐야 하등의 좋을 일이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들이다.

 

 

“아, 참.”

 

 

미르엘라가 음흉한 악마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눈가 주름이 멋들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나름 유익한 배움이라 하겠다.

 

 

“악마들이 다 여기서 활동하는 건 아니지? 그럼 나 이 동네 뜨려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가는 마왕의 어조에 사쟌이 인자한 웃음을 흉내 낸다.

 

 

“그건 아니오. 부러 여기에서 그림을 내보이도록 입김을 좀 불었소. 이참에 겸사겸사 천하를 한번 만나볼까 하여.”

“어쩐지.”

 

 

사소한 궁금증을 해소한 미르엘라는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그래도 오로지 그림 자체만 보자면, 악마에게 자신의 무언가를 팔 만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로든 길이길이 남을 역작일 테지. 인간의 가슴속에 파고들어 저렇게까지 불유쾌한 감정만 골라서 자극하기란 쉽지 않으니.

 

무엇을 팔았을까. 인간은 악마에게 무엇을 팔까. 악마는 인간에게 무엇을 살까. 가장 순수하고도 고통스러운 쾌락이란 무엇일까.

 

어제 튜헨의 전시회에 다녀온 미르엘라가 줄곧 떠올리는 물음이다.

 

처음 뮈엘에게 물었다가 대답을 억지로 듣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질문이기도 했다. 해답을 알아도 이득이 없고, 몰라도 문제없을 호기심. 지금이라도 당장 뮈엘을 불러 진실을 고하게끔 할 수 있는 물음.

 

악마는 원래 인간이었을까.

 

이따위의 궁금증도 새로 생겼으나 이 또한 정답을 알아봐야 특별히 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악마가 되기 전에 인간이었든 아니든 간에 지금 그들이 악마라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더욱이 미르엘라가 그들의 왕으로서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마음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이 수많은 질문의 답을 알면 뭐 하겠는가.

 

어차피 그 스스로 전혀 유추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정확하진 않을지언정 아주 틀리지도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해보면 사실 그 튜헨이라는 화가는 후일 아무렇지 않게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농후한 잠재적 범죄자다. 비록 그러한 목적으로 악마의 손을 잡은 게 아니었을지라도.

 

 

“미르엘라 님!”

 

 

아침부터 시시한 잡념들을 허공에 흩뿌리는 다급한 목소리. 리칸은 저렇게 방정맞지 않으므로 필히 류의 것이다.

 

 

“그, 그 튜헨이라는 화가 말이에요, 붙잡혔대요! 어제 전시회가 끝나자마자!”

“그럴 것 같긴 했지. 일처리 빠르네.”

 

 

미르엘라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다. 하필 대신관이 전국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판국에 그토록 괴이쩍은 작품들을 내놓다니. 튜헨이 사쟌과 거래한 것은 미르엘라가 마왕의 싹을 틔우기 전일 텐데. 시기가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운이 나빴다.

 

 

“오늘부터 바로 관련인을 싹 다 수사한다던데요? 입장객까지도요!”

“그것도 그냥 의례적인 탐문 수사겠지. 그리고 설령 우리한테 전부 신성 의식을 치르더라도 안 걸려.”

 

 

그제야 발갛게 상기된 류의 뺨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리칸은 그런 동생에게 찬물을 떠다 주었다.

 

미르엘라는 아침 대용으로 구움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포슬포슬하게 부서지는 식감이 부드러워 좋았다.

 

 

“근데 어디서 들었어?”

“요 앞에서 호외를 돌리더라고요.”

“아, 맞다. 우리도 이참에 신문이나 구독해야겠다. 매번 필요할 때마다 사러 나가기도 귀찮잖아.”

“내일 중으로 구독 신청을 해두겠습니다.”

“응, 부탁할게.”

 

 

구움과자의 고소한 맛을 헹구듯 개운한 박하차의 향이 입안을 맴돌았다.

 

불편한 비정상을 꿈꾸었던 화가의 기분을 상상해보는 가을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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