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섬광



 요즘 유원은 행복했다. 병원에 가는 건 귀찮았지만, 꾸준히 치료를 받으며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도 나아졌고 일이 아니더라도 사는 게 꽤 즐겁다고 생각했다. 

 연애를 시작하고 서로에게 조금씩 익숙해지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면서 마음이 깊어지고 있었다. 촬영 중간에 시선을 마주치며 웃는 것도 좋았고 남 몰래 손을 잡고 입술을 맞추는 일도 좋았다. 촬영이 없거나 일찍 끝나는 날에 집에서 데이트하는 것도 좋았고 함께 침대에 누워 자는 일도 좋았다. 

 가을이 지나 어느새 겨울이 찾아왔고 일도 잘 풀리고 있다. 하연은 하온이 운이 없는 사람이라, 시청률이 저조할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작부터 무난하게 두 자리 시청률을 기록했고 대상도 받았다.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할까.

 "언니, 언니?"

 하온은 악몽을 꾸는지, 끙끙대며 떨고 있는 유원의 어깨를 흔들었다. 자고 있던 하온은 앓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뜨고 유원을 보니, 몸을 떨며 끙끙거리고 있었다. 몸이 좋지 않아 보였고 악몽을 꾸는 것 같아 깨우려 했지만, 좀처럼 유원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고 입술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하온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유원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었지만,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언니!"

 하온이 유원의 어깨를 더 세게 쥐고 흔들었다. 가위에 눌리는 일도, 악몽을 꾸는 날도 많았다고 들었다. 지금도 그런 듯해 걱정이었고 그 꿈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은 지켜보기 힘들 정도였다.

 "허억……!"

 거친 숨을 토해내며 유원이 눈을 부릅 떴다. 시트를 부여잡은 손등에 핏줄이 설 정도로 몸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숨이 막힐 듯했고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몸을 일으킨 유원은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부들거리는 손으로 제 가슴을 두드리다 짓누르고 있었다.

 "언니, 괜찮아요?"

 걱정에 물든 눈으로 하온이 손을 뻗어 유원의 손을 붙잡았다. 유원의 몸이 굳는다. 밀려오는 두통에, 흉부가 답답하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해, 벌벌 떨고 있던 유원이 제 손을 잡은 하온을 밀쳐냈다. 하온은 그 신경질적인 반응에 순간 놀라 내쳐진 채로 행동을 멈춘다.

 "죽지 마, 날 두고…… 죽지 마라……!"

 치료를 시작하면서 분명 환청은 사라졌었는데.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귀를 틀어막고 몸을 웅크린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귀에서는 모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끝없이 반복되었고 소름이 끼쳤다. 꿈, 꿈을 꾸어서 그런 걸까. 그 지독한 악몽이 연장되어서, 어렴풋이 보이던 그 여자 때문에, 그래서 지금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는 걸까…….

 "언니, 언니…… 진정해요……."

 하온이 울먹이며 유원에게 손을 대지도 못하고 불안한 듯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물, 물이라도 가져와야 해. 침대에서 내려온 하온이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며 물을 꺼내 왔다. 다행히 유원에게서 들은 것이 있어서, 패닉이 오지 않고 대처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똑같이 벌벌 떨고 있었을 것이다.

 "언니, 언니."

 하온이 물컵을 유원의 입에 가져다주며 말했다.

 "물 좀 마셔봐요."

 유원은 눈물을 매단 채로 고개를 들었다. 눈에 물기가 어려, 하온의 얼굴이 흐리게 보였다. 조금 진정되었는지, 물을 받아 마신 유원이 숨을 몰아쉬며 손가락으로 서랍장을 가리켰다.

 "세 번째 칸……."

 하아, 유원이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약 좀 가져다줘."

 지독한 악몽, 귀신이 나오는 꿈 따위는 누누이 말하지만 무섭지 않다. 그런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그런 허상에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유독 왜, 그 꿈만큼은 왜…….

 "언니, 여기 이 약 맞아요?"

 유원은 하온을 보지 않고 약을 낚아챘다. 순간, 하온이 상처받을까 걱정이었지만, 지금 상대를 배려할 여유가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약봉지를 뜯던 유원은 순간, 힘없이 약을 쏟고 만다. 아, 순간 짜증이 치민다. 고작 이거 하나도 제대로 못해서, 아직도 그 꿈에 시달리고 휘둘리며 사는 게 역겨웠다.

 "괜찮아요."

 하온이 이불 위로 떨어진 약을 주우며 말했다.

 "주우면 되니까……."

 지금 하온은 최대한 눈치를 살피며 조심하고 있었다. 유원에게 얼핏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최대한 약해진 그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눈치를 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자, 여기 있잖아요."

 유원의 손을 펴고 그 위로 약을 놓아주었다. 말없이 유원은 손바닥 위에 놓인 약을 보았다. 제 마음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구역질 나도록 자괴감이 들었었다. 연예인에게는 공황장애가 감기와도 같은 질병이라고 해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다. 마음에 병이 있다는걸, 다른 누군가가 알게 되면 반응이 달라진다. 무슨 일이든, 불쌍하게 보는 동정의 시선도 싫었고 무슨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하면 공황장애와 연결 짓는 것도 싫었다. 

 하온에게 제가 앓고 있는 병을 말했을 때도, 사실은 몹시 떨고 있었다. 혹여나, 그런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나 무서워서.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고백했던 이유는 언젠가는 보여줄지도 모를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우울이든, 공황이든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아 일상생활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호전이 되었지만, 완치는 아니었다. 영원히 함께 해야 할지도 모르는 병이었다. 그랬기에, 오래 함께 하고 싶었던 사람이었기에…….

 "언니, 약 먹여 줄까요?"

 멍하니 손바닥 위에 놓인 약을 보고만 있는 유원을 보며 말했다.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하온은 고민하다, 약을 하나 집어 유원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리고 물을 내미는데,

 "한꺼번에 먹여줘."

 약을 하나 문 채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하온이 미소를 짓고 남은 약도 입에 물려주었다. 물까지 먹여주니, 그 사이에 약이 녹았는지 인상을 찌푸리는 유원이었다. 이제야 하온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약효가 되려면 시간이 조금 더 있어야 한다. 유원은 더운지, 아니면 땀에 젖은 옷이 불쾌한지, 계속 미간을 좁히며 입고 있는 옷을 쥐어뜯고 있었다.

 "답답해요?"

 유원이 힐끔 하온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땀에 젖어서 그런 거죠?"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눈높이를 맞춘 하온이 물었다. 여전히 유원은 말이 없다. 하온은 침대에 걸터 앉고는 가만 유원을 보았다. 제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이 마치 기죽은 고양이 같았다. 하온에게 유원은 언제나 멋있고 당당한 사람이었다. 늘 도움만 받았고 이런 모습이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유원은 이유원이었고 여전히 좋은 사람이었다.

 "아직도 내가 존경스럽니?"

 어제, 하온이 했던 말이 순간 떠오르는 유원이었다.

 "네. 전 언니가 늘 멋있어요."

 "…… 이 꼴을 보고도 그래?"

 유원이 허탈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고 심장이 매섭게 뛰고 있었다. 귀에 울리는 심장 소리가 머리를 더 무겁게 했고 모든 것이 다 싫어져서,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무엇보다 하온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죽을 만큼 싫었다. 늘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예상했으면서, 마음의 준비를 했으면서도 그랬다.

 "언니가 이유원인 건 달라지지 않잖아요."

 "난 지금 내가 너무 싫어."

 "사람은 모두 그럴 때가 있어요."

 하온은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않는 유원에게 몸을 기울인다. 마음을 다친 사람을 어떻게 위로해야 하는지 하온은 알지 못했다. 아직도 유원에 대해서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고 그랬기에, 다 아는 것처럼 입을 조잘거릴 수도 없었다. 그저 위로가 되어 주고 싶었다. 유원이 제게 늘 했던 것처럼. 

 "물 더 가져다 줄까요?"

 유원이 고개를 젓는다.

 "그럼, 갈아입을 옷 가져다 줄까요? 땀에 젖어서 찝찝하죠?"

 "괜찮아."

 힘겨운 목소리를 들으며 하온이 다시금 말했다.

 "젖은 옷 계속 입고 있으면 추울 텐데, 진짜 괜찮아요?"

 "하온아."

 유원이 고개를 들어 하온을 보았다. 지금 정신이 하나 없어서, 다시 까무룩 잠들고 싶을 만큼 지쳐 있었다. 그리고 제 사랑스러운 연인이 그런 저를 달래려 무딘 애를 쓰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언닌, 괜찮아."

 하온이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지친 모습이었지만, 이제서야 유원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하온은 유원에게 밀착하듯 다가가, 입고 있는 옷을 들추었다.

 "이거 벗고 한숨 자요. 내가 악몽 꾸지 않게 도와줄게요."

 괜찮다고 말했던 유원은 고분고분 해졌다. 단추가 모두 풀어지고 힘없이 침대 위로 떨어진다. 유원은 몸을 뒤척이며 침대에 누웠고 하온은 마저 하의도 조심스럽게 벗겼다. 그 옆에 누운 하온이 흐트러진 유원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며 말했다.

 "아직 시간 조금 더 남았어요."

 유원은 눈을 감은 채로 하온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동안 언니가 촬영하느라 정신없어서 몸에 과부하가 왔나 봐요. 

 이불을 그러쥐고 그 목소리를 들었다. 악몽을 꾸고 난 후에, 공황증이 도진 후에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조금 더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내가, 옆에서 지켜볼 테니까 걱정 말고 자요."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할까. 죽어가는 나를 끌어안고 슬피 울던 그 여자는 대체 누구였을까. 왜 이렇게 두렵고 무서운 걸까…….

 여전히 지독한 공황증이 가시지 않고 있는 걸까. 약을 먹었는데, 아직 효과가 제대로 돌지 않는 걸까. 유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하온을 보았다. 따라 같이 자려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그 얼굴을 보다 작게 말아 쥔 손을 본다. 툭, 그 손을 쥐고 다시금 눈을 감았다. 마음의 숨은 불안을 애써 모른체하며 하온의 손에 의지하여 다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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