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엘프 메이지 워든, 까마귀 수인 제브란






그녀는 내게 어떤 맹세도 해주지 않았다.

이미 과거에 걸었던 맹세가 그녀의 삶을 얽매고 있었으므로.





제브란이 기억하는 한 레일라는 동물에게 상당히 친절한 편이었다. 만일 그녀의 친절함을 그 대상 별로 분류한다면 동물, 엘프, 드워프, 인간일 정도로. 그 미묘한 친절함의 차이는 아마 그녀를 따라다니던 파티의 멤버들이라면 누구나 눈치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간을 대할 때, 그녀의 친절함은 의무감에서 나오는 경직된 느낌이 있었지만 그녀가 '알리스터 2'라고 이름붙인 마바리를 부를 때면 그 상냥한 목소리며 부드러운 손길에 깜짝 놀랄 정도니까.


그래서, 제브란이 그것에 대한 무슨 불만이 있었냐 하면 전혀 아니었다.


"제브란, 이리와."


그는 까마귀 수인이었으니까.


레일라는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 제브란을 불렀다. 제브란의 안티바 억양이 민가에 떠도는 유쾌한 노랫소리라면 레일라의 '동물'을 부르는 목소리는 서정적인 시를 가사 삼는 노랫소리와 같았다. 그녀가 그런 식으로 부른다면 제브란은 도무지 그 목소리에 저항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홀린듯이 날개 먼저 움직이곤 했다. 물론 그녀의 팔에 앉은 다음에는 뽐내듯이 최대한 우아하게 깃을 고르거나, 아니면 그녀의 턱에 제 머리를 가볍게 문질렀지만.


레일라는 제브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깃털의 결을 전혀 망치지 않는 손놀림이었다. 까마귀를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게 쓰다듬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레일라일거라고, 제브란은 확신했다. 그는 그녀의 손길에 지나치게 녹아내리지 않도록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야 했는데, 가끔 그 꼴을 보던 모리건은 혀를 쯧, 하고 차곤 했다.


제브란은 까마귀 수인이자 데일스 엘프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레일라의 굉장한 편애를 받았다. 처음부터 평행을 유지할 생각이 없었던 애정의 저울 추는 이젠 기울다못해 아예 땅에 닿을 정도였다. 그녀는 제브란이 필요한 것이라면 뭐든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었고, 그가 좋아하는 것을 끊임없이 찾아냈다. 애정에 잠겨 죽을 것 같은 경험은 제 아무리 제브란이라고 해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는 저항하고 부정하거나 언제나 떠날 수 있을 것 처럼 굴었었다.


물론 지금은 완벽한 굴종으로 행복을 찾아버렸지만.


그는 자신 쪽으로 기울여진 레일라의 머리카락을 부리로 쓱쓱 정돈해주며 들판에 핀 데이지를 저 붉은 머리카락에 끼워주면 얼마나 예쁠까, 생각하곤 했다. 아마란틴시의 영주님은 고작 들꽃으로 머리를 치장할 만큼 빈곤하지 않겠지만, 이건 나름 제브란만의 하찮은 순정이었다. 물론 안티바에는 화려한 색을 가지고 진한 향기를 뿜는 여러 꽃들이 있겠지만, 레일라에게 그런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의 옆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으니까.


레일라의 시선은 창문이 열려있는 한 언제나 지평선 너머, 혹은 들판 너머의 바다, 혹은 그 끝에 닿아있는 하늘에 있었다. 처음에는 혹시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까마귀단의 추적을 받는 자신을 걱정하며 기다리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았지만 창 밖으로 향하는 시선은 제브란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창문에 휘장을 쳐주지 않을래?"


그래서 회색의 감시자의 단 하나뿐인 까마귀, 종종 그녀의 전령새로 착각되는 제브란은 제 모든 밑천을 털어 그녀의 비밀을 알아냈다. 물론 마지막에는 알리스터까지 협박해야 했지만, 그리고 그건 진짜로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지만 결국엔 알아내고 말았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퍼렐던의 영웅이자 아마란틴시의 영주이며 회색의 감시자들의 사령관인 저 여자는 언젠가 마물의 피에 잠식당하고, 그 끝을 딥로드에서 마물의 손에 외롭게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것을.


제브란은 까마귀의 부리로 인간의 말을 잘 하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그는 그런 식으로라도 말해야 했고, 레일라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에 붉은 휘장을 쳤다. 제브란은 다시 엘프의 모습으로 돌아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머물 생각인가봐?"


"이렇게 아름다운 연인을 두고 어떻게 매정하게 바로 떠날 수 있겠어?"


그녀의 귀에는 여전히 황금빛 귀걸이가 반짝이고 있었다.


아마 레일라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제브란에게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혼자 죽으러 갈 수도 있고, 어쩌면 알리스터와 딥로드로 내려가버릴 수도 있었다. 아마 그게 그녀가 제브란에게 그 어떤 맹세도 하지 않는 이유일것이다.


제브란은 본인의 삶을 그녀에게 이미 걸었다. 그는 그녀의 것이라고 맹세했다.


그러니 이건 실제로는 상당히 불공평한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그녀가 전부 다 주는 줄 알지만 제브란에게 압도적으로 억울한 관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레일라는 조건없는 사랑을 퍼부어주는 대신 어떤 미래도 약속하지 않았고, 삶의 마지막에 대한 비밀도 공유해주질 않았다. 제브란은 아마 그녀가 죽으면 평생 그녀만 생각하며, 그녀의 그림자 주변에 망령처럼 얼쩡거릴텐데.


까마귀는 일평생 단 하나의 반려자만 둔다. 제브란 스스로도 자신이 반려자를 만드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었지만..아무것도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데 어쩌겠는가! 그는 이미 사랑을 했고 그녀에게 맹세를 바쳤다.


그는 레일라의 귀에 가볍게 키스하고, 이로 잘근잘근 귀걸이 주변을 깨물며 그녀의 몸의 힘을 뺐다. 그녀의 무게중심이 무너진다고 해도 뒤에서 끌어안고 단단히 붙들고 있으니 쓰러질 일은 없었다. 그녀의 귀가 붉게 달아오르고,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방에 퍼진다.


"오늘따라 어리광이 많네."


레일라는 가벼운 어조로 그렇게 흘려보내듯 말했다. 거의 침대에 넘어가기 직전인 상황이었고, 제브란은 이때까지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상태였다. 하지만 왜 그때 유달리 그녀의 눈동자가 투명한 초록색처럼 보였는가? 제브란은 어느 여름날 가장 여린 잎을 햇빛 아래에 비춰보이면 저런 색이 나올까, 잠시 모든 행동을 멈췄다.


"오, 그렇게 생각해?"


그는 평소처럼 능글맞게 저렇게 말하면서도 그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뭐라도 그녀를 적당히 속이거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할 만한 그런 말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머리가 백지장이 되는 것 같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잠시 흐른 애매한 침묵 속에서, 레일라가 느릿하게 베개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제브란의 목에 걸어주었다.


회색의 투박하고, 목걸이처럼 되어있는 팬던트.

감시자의 맹세.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무슨 말이든 했으면 제브란은 그 자리에서 울거나 아니면 도망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침묵을 유지했기에, 제브란은 그녀를 끌어안고, 오직 그녀의 맹세만을 몸에 걸치고 한숨을 내쉬었다. 거의 비명을 토해내는 것 처럼.


"너는 내 둥지가 되어줄 수 없겠지. 내가 평생 떠돌 운명인 것 처럼."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무엇을 받고싶었는지, 무엇을 원했는지 명확히 깨달았다.


네가 나의 머물 곳이, 안식처가 되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녀는 전장에 서 있는 감시자의 횃대였고 그 땅에는 마물의 피가 흘렀다. 마치 제브란이 그 어느 곳에서도 길게 머물 수 없는 운명인 것처럼. 자신이 줄 수 없는 것을 상대방에게 원한다는 것은 얼마나 낯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인가. 얼마나 염치없는 일인가. 


"미안해, 내가 줄 수 있는 게 많지 않네. 난 너만 있으면 되는데."


"날 더이상 초라하게 만들지 말아줘, 내사랑."


제브란은 기어이 그녀의 맹세를 받아냈다. 죽일 뻔한 상대에게 사랑과 최후에 대한 맹세를 얻어냈으니, 이제는 정말 그녀에게 감히 무언가를 더 받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마지막에는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브란이 그녀를 상대로 뭔가 안겨줄 수 있는 것은 몸밖에 없었다.





오즈마의 딥로드로 가는 길, 어느 유적지에는 몇가지 물건이 기이하게 둥지처럼 꾸려져있었다.


장갑, 부츠, 오래된 구식의 팬던트, 검은 까마귀의 깃털, 붉은 색의 한 웅큼의 머리카락.

그리고 조각조각 부서진 마법사의 지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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