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 진짜 취했네. 정성찬은 편의점 테이블에 엎드려 잠이 든 이찬영을 가만 내려다 보며 혀를 찼다. 오만상 다 찌푸리면서도 혼자 홀짝홀짝 소주 마시는 게 웃기고 귀여워서 내버려뒀더니 완전 인사불성이 돼버렸다.

찬영아? 이찬영? 몇 번 불러 봐도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여서 그냥 자라고 내버려뒀다. 어디 전화라도 해줘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혼자 한국에 왔단 얘기를 들었던 게 기억나서 그냥 말았다. 대신 동기들한테 연락해서 이찬영 동기 바꿔달라고 했다.

어, 저희도 찬영이집 잘 모르는데. 학교 앞에서 혼자 산다고 했던 거 같아요. 아, 찬영이 가방도 여기 있어서. 네. 거기로 가져갈게요.

 

평소 정성찬은 취한 동기들 후배들 그냥 가차 없이 버렸다. 다 큰 성인인데 알아서 집 가겠지. 근데 이찬영은 못 버리고 가겠다. 나 때문에 취한 거 아닌가. 책임감 반. 얘 아직 스무살 애긴데 어떻게 혼자 두고 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려고. 안쓰러운 마음 반.

 

이찬영 동기들이 가방 가지고 편의점 앞으로 왔다. 성찬에게 꾸벅 인사한 성진과 정민이 찬영을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야. 찬영아. 이찬영. 성찬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자고있는 애를 왜.

정성찬 심각한 얼굴에 찬영 동기들이 당황했다. ????? 저 형 왜 저러냐;; 성진과 정민은 성찬 반응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동기사랑 나라사랑이라며. 동기 챙기려 했던 거 뿐인데 무슨 몹쓸 짓이라도 한 거 같았다. 우리 뭐 잘못했냐? 근데 찬영이 성찬이형이랑 친했어? 정민이 성진에게 속삭였다. 몰라??? 성진도 영문을 몰랐다.


어어. 됐으니까 찬영이 그냥 둬.

네? 찬영이 저희가 데리고 갈게요 형.

맞아요. 민수가 요 앞에서 자취하니까 민수 집에서 재우면 돼요.

아니 아니. 우리집에서 재울게. 우리집 커.

 

우리집 방도 두 개고.

갑자기 후배들 앞에서 집자랑 했다. 아 넵. 성진과 정민이 머쓱하게 대답했다.

우리집 넓은데 우리집에서 재우면 되지. 집 넓어서 얻다 써. 이럴 때 쓰지. 복학 신청하고 집 구할 때 뷰 미친 복층 원룸과 깨끗하고 넓은 신축 투룸 사이에서 고민하던 정성찬은 결국 투룸을 택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 선택 후회하던 성찬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게 만족스러울 수 없었다.

성진과 정민이 같이 데려다준다는 걸 기어이 거절한 성찬은 조심스럽게 찬영을 일으켜세웠다.

찬영아. 잠시만. 어? 힘이 풀리는지 자꾸만 주저앉으려 하는 이찬영 일으켜 세운다고 성찬 얼굴이 땀범벅이 됐다. 꽃샘추위 안 끝난 3월인데 등까지 척척했다. 성찬은 하는 수 없이 이찬영을 들쳐 업었다. 얼굴은 애긴데 몸은 저만 해서 꽤 무거웠다. 근데 등에 업힌 이찬영 보다 어깨에 맨 이찬영 가방이 더 무거웠다. 대체 얜 가방에 뭘 넣고 다니는 거야. 떨어질락 말락 달랑거리는 이찬영 가방 다시 고쳐 매는데 등 뒤로 뜨끈뜨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더운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지금은 싫지가 않았다. 새근새근. 오르락 내리락. 이찬영 숨 쉬는 게 다 느껴져서 자꾸 비실비실 웃음이 났다. 애기 들쳐업고 가는 거 같아서. 이 상황이 웃겼다.

 

정성찬 사는 오피스텔 편의점에서 고작 5분 거리인데 자꾸만 발이 느려졌다. 이찬영이 정성찬 목덜미에 얼굴 박고 킁킁대서. 간지러웠다. 찬영아? 형 간지러워. 이찬영?

냄새 좋다아. 늘어지는 말꼬리. 기분이 좋은지 까딱까딱 발장난 치는 이찬영. 아. 얘 술 먹으면 안 되겠다 정말. 다음번에 이찬영이 술 마시면 무조건 말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간신히 도어락 누르고 들어와 침대에 이찬영 눕히고 물 한 잔 들이켰다. 티셔츠가 몸에 척척 달라붙었다. 땀 냄새 나는 것 같다. 빨리 씻어야지. 그에 반해 이찬영은 뽀송뽀송. 술 마셔서 열 오를 텐데 땀도 하나 안 흘린 것 같다. 고 놈 참 잘생겼네. 성찬은 이찬영 얼굴을 한참 들여다 봤다. 뽀얀 얼굴에 콧대가 예술이다. 이찬영 부모님 완전 뿌듯할 듯. 이찬영 내가 낳을 걸. 한참 이찬영 얼굴 감상하다 양말 벗겨주고 손발 물티슈로 찹찹 닦아준 후 이불까지 덮어줬다. 호강하네 이찬영. 뿌듯한 기분. 후배가 처음 생긴 것도 아닌데 이찬영은 달랐다. 동생이 생기면 이런 기분일까?

 

송은석은 가끔 동생이 놀러 와서 자기 집에서 자고 가기라도 하는 날이면 엄청 귀찮아했다. 왜지. 이렇게 보람찬데. 불 끄고 캔들 워머 켜고 혹시 추울까봐 보일러며 온수매트며 빵빵하게 틀어줬다. 방문 닫고 나가다 다시 돌아와 이찬영 목 끝까지 이불도 한 번 더 덮어준다. 쇼파에서 자는 거 싫어하는 정성찬은 기꺼이 방을 양보하고도 베개도 없이 쿠션 베고 새우잠 자는 게 싫지 않았다.

 

 

 

-

 

아침 일찍부터 찬영 휴대폰이 5분 단위로 시끄럽게 울어댔다. 벌써 세 번째 알람이다. 평소 알람이 다섯 번 쯤은 울려야 일어나는데 오늘따라 이찬영 눈이 저절로 떠졌다. 눈 뜨니 보이는 낯선 천장.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목 말라. 상황 파악이 잘 안 됐다. 주위 둘러보니 처음 보는 곳. 차분한 그레이톤 침실. 심플한 연그레이색 침구들. 잠이 훅 달아났다.

 

그리고 달칵.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찬영은 저도 모르게 눈을 꾹 감고 자는 척 했다. 정성찬이었다. 어제 처음 본 잘생긴 선배형. 그 형이 들어와 휴대폰 알람을 꺼주고 나간다. 계속 상황파악이 안 됐다. 아니. 너무 잘 됐다.

 

OMG... 와 이찬영 이앤톤 진짜 미쳤다.

찬영이 이불에 머리 처박고 으어어 이상한 소리를 냈다. 나 술 되게 못 마시는 구나. 고작 맥주 두 잔, 소주 세 잔에 취해버렸다. 그럼 내 주량은 소주 한 병인가. 그런 고민도 했다. 근데 아무래도 정성찬이 준 숙취해소제가 잘 못 됐던 거 같다. 그거 먹으니 더 취하기만 했다. 이찬영 속도 모르고 낯선 침대는 푹신했고, 방에선 좋은 냄새가 났다.

형 냄새. 깜깜한 새벽. 처음 본 선배형 등짝에 업혀가면서 그 목덜미에 코 박고 킁킁대던 게 떠올랐다. 그냥 콱 죽고 싶었다. 근데 침대가 너무 푹신해서. 자꾸 잠이 왔다.

 

 

 

 

찬영아. 속은 좀 괜찮아?

벌써 열한신데 배 안 고파? 일어나서 밥 먹어야지.성찬이 찬영을 깨웠다. 이찬영이 자는 척 꾸물거렸더니 찬영아 너 어디 아파? 찬영 이마에 손 얹어보는 정성찬. 당황한 찬영이 벌떡 일어나 냅다 사과했다. 미안해요 형. 제가 취하려고 취한 건 아니구. 어. 음. 큼. 그러니까요. 근데 그 사과 제대로 하지도 못 하고 막혀버렸다.

 

 

“잘 잤어?”

 

정성찬이 씨익 웃으며 이찬영 머리 죄 헝클어버려서. 당황한 찬영은 굳어버렸다. 엉망으로 헝크러진 머리, 부어서 순둥해진 눈. 그게 너무 귀여워서 정성찬은 다시 이찬영 머리를 또 북북 흐트려 놓는다. 으. 형 그만해요. 그만.

정성찬 얼굴이 퉁퉁. 좀 부어서 어제보다 어려보였다. 아침에도 빤짝빤짝 빛나는 까만 눈동자는 여전하다. 그 두 눈으로 이찬영 보며 실실 웃기 바쁘다. 쿵. 쿵. 찬영 심장소리가 또 커졌다.

 

“형 얼굴 부었어요.

“나? 헬스 갔다 누워있어서 그런가? 근데 이찬영. 너는 완전 호빵 같이 부었엏ㅎㅎㅎㅎㅎㅎㅎ”

 

정성찬은 뭐가 그리 좋은지 이찬영 보고 웃기 바쁘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거지. 왜 저렇게 웃어. 아- 호빵 먹고싶다. 이찬영이 아무 반응 없자 정성찬은 이찬영 볼따구 주무르며 배고프다고 치댔다. 이찬영은 그냥 당황스러웠다. 나 낯가리는데. 저 형 어제 처음 봤는데. 정성찬 장난에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놀리지 마세요 형. 결국 이불 속에 넣어뒀던 손 꺼내 정성찬 손 쳐냈다. 왜? 성찬이 갑자기 정색한다. 찬영은 또 당황했다.

 

 

“나 너 놀리는 거 아닌데? 나 진짜 되게 좋아해.”

 

 

“호빵.”

 

진지한 눈으로 호빵 사랑 고백하는 정성찬.

이찬영 심장이 또 빠르게 뛰었다.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음주는 심장 건강에 너무 해로운 것 같다.

 

 

“그럼 얼른 씻고 나와. 해장하러 가자.”

 

“네?”

 

“안 씻고 나가게? 그럼 양치만 하든지.”

 

 

얼른. 나 배고프다. 얼떨결에 정성찬 내미는 칫솔 받아들고 욕실 들어왔다. 거울 보니 꼴이 진짜 말이 아니다. 머리엔 커다란 새집도 하나 지었다. 집 가서 씻고 옷 갈아입고 온다고 할까. 유난스러워 보일 거 같았다. 찬영은 어쩔 수 없이 대충 씻고 나왔다.

 

 

욕실 나와선 정성찬 집 구경했다. 정성찬 집 너무 좋아서 신기했다. 이찬영 집도 넓은 편인데 정성찬 집은 큰 방이 두 개나 있어서 아파트먼트 같았다. 옷 방도 따로 있다. 정성찬은 잠깐 기다려보라고 하고선 그 방으로 들어갔다.

 

찬영아 이거.

이게 뭐예요?

“옷 갈아입으라고. 찝찝할 거 같아서. 그리고 너 머리 그러고 나가게?

정성찬이 자기 후드랑 볼캡 가지고 나와서 내밀었다. 다른 사람 옷 빌려입는 건 처음이었다. 카키색 후드티. 이찬영 몸에 맞춘듯 딱. 거기에 커다란 로고가 있는 배색 볼캡을 대충 눌러쓰고 입고 왔던 코트를 걸쳤다. 신발장에 붙은 거울 보며 옷 매무새 다듬던 이찬영이 멈칫 했다. 정성찬이 비슷한 컬러 후드티에 색만 다른 똑같은 볼캡 쓰고 나와서.

 

형. 모자...

어? 왜?

 

정성찬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찬영만 그게 신경쓰였다. 우리 브라더 같지? 형제가 브라더 맞나? 아님 트윈스 할래? 이찬영에게 어깨동무하고 거울 보며 킥킥대는 정성찬. 정성찬 이상한 영어하는 게 웃겨서. 그리고 귀여워서. 이찬영은 빨개진 얼굴을 감추려 모자를 더 푹 눌러썼다. 한 겨울에 자꾸 땀이 났다.

 


정성찬 집은 이찬영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신축 오피스텔이었다. 큰 길 하나만 건너면 됐다. 성찬은 그 동네에서 제일 유명한 뼈다귀 해장국 집으로 찬영을 데려갔다.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주말 오전부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뼈다귀 뜯고 있는 게 신기했다.

 

너 해장국 먹어봤어 찬영아?

아니요.

한국에서는 술 마신 다음 날 이런 거 먹어.”

정선찬이 특 뼈해장국 두 개를 주문했다. 해장국 나오자마자 정성찬은 김 풀풀 나는 뚝배기에 고객 처박고 살 발라낸다고 바쁘다. 이런 거 처음인 미국인 이찬영은 그거 어떻게 먹을지 몰라서 국물만 후루룩 마셨다.

 

자. 성찬이 앞접시에 발라낸 살코기를 담아 건네준다. 어. 아. 뼈다귀 해장국도 처음이고 음식 쉐어 하는 것도 어색한 이찬영은 버퍼링에 걸려버렸다. 왜? 맛이 별로야? 다른 거 시켜줄까? 성찬이 유난을 떨었다. 아니요. 맛있어요. 진짜로. 그래도 영 못 미덥다는 듯 쳐다보는 성찬 때문에. 찬영은 성찬이 발라준 살코기를 와앙 입에 밀어 넣었다. 콜록. 그리고 그대로 사레 들려버렸다. 성찬이 급히 물을 따라 건넸다. 너무 심하게 기침했더니 찬영 눈에 눈물까지 고였다.

 

찬영아 천천히 물 마시면서 먹어. 숙취에는 물을 많이 드세요. 물.

누구 때문에 사레 걸렸는데. 억울해진 찬영은 성찬을 흘겨봤다. 어허. 누가 형을 그렇게 쳐다봐? 정성찬도 이찬영을 째려봤다.

진짜 어이없어. 이찬영이 짜증냈다. 아. 형이 그렇게 쳐다보면 어떻게 먹어요.

찬영 투정에 그제서야 성찬도 한 술 뜬다.

 

둘 다 말도 없이 전투적으로 뼈다귀를 뜯었다. 은색 양푼 가득 뼈가 쌓였다. 이런 거 전부 처음인 찬영은 휴대폰 꺼내서 다 먹은 뼈다귀 사진을 찍었다. 정성찬은 그게 또 웃겼다. 새삼 이찬영이 외국인 같아서.

 

찬영이 너 미국 이름 뭐야?

앤톤이요.

그래? 음. 앤톤. 해장국이 영어로 뭐야?

아... 엄... 해장슾? 이찬영이 고민하다 한참 만에 말했다.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이찬영 발음에 정성찬이 킥킥 댔다. 그게 뭐 그렇게 웃기다고. 진짜 어이없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커플이 성찬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이찬영은 창피해 죽을 거 같았다. 얼굴이 또 빨개졌다. 형 그만 좀 웃어요. 열 받아서 째려봤다.

 


“아. 앤톤아. 너 진짜 귀엽다.”

그런 낯뜨거운 말 하면서 국밥 와앙 밀어넣는 정성찬. 쨍- 당황한 이찬영이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금세 이찬영 손에 쥐어지는 새 젓가락. 찬영은 그냥 멍하니 정성찬 해장국 먹는 것만 쳐다봤다.

 

앤톤아 너 진짜 귀엽다.

밥은 하나도 안 먹히고 그 말만 자꾸 귀에 맴돌았다. 흐흐흫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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